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5화 : 다섯 번째 기산행도 안으로부터 꺾이고
다섯 번째 기산행도 안으로부터 꺾이고
한편 사마의는 자신이 구안을 시켜 베푼 계책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명의 짐작대로 돌아가는 촉병의 등 뒤를 한꺼번 에 들이치려 함이었다.
이윽고 살피러 나간 군사가 돌아와 촉채가 텅 비고 사람과 말이 모두 떠났음을 알렸다. 사마의는 공명이 워낙 지모가 많은 사람이라 함부로 대군을 들어 뒤쫓지 못했다. 먼저 스스로 백여 기를 이끌고 촉채로 가서 살피며 군사들을 시켜 아궁이 수를 세어보게 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또다시 병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자 사 마의는 스스로 가서 살핀 뒤 아궁이 수를 헤아려보게 했다.
“저들이 영채를 세웠던 자리의 아궁이 수가 어제의 곱절로 늘어있었습니다.”
아궁이를 헤아린 군사가 그렇게 알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사마의는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나는 공명이 꾀가 많아 그냥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 말 그렇구나. 공명은 군사를 늘리면서 아궁이도 늘리는 계책添兵增 竈法]을 쓰고 있다. 아궁이 수를 줄이는 것은 옛적에 손빈이 쓴 계책 이라 우리가 속지 않을까 봐 짐짓 아궁이를 늘리고 있다. 만약 우리 가 뒤쫓으면 반드시 그 흉계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차라리 물러나 따로 좋은 계책을 마련하는 게 좋겠다.”
그러고는 군사를 돌려 뒤쫓지 않았다. 덕분에 공명은 단 한 사람 의 군사도 잃지 않고 성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마의가 공명에게 속았음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 다. 서천으로 드는 초입에 사는 토박이 백성 하나가 사마의를 찾아 와 일러주었다.
“공명이 물러날 때 보니 군사는 조금도 늘리지 않고 아궁이 숫자만 늘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사마의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했다.
“공명은 우후(虞詡, 후한 안제 때의 장수. 아궁이 수를 늘려 군사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적을 속였다)를 흉내 내 나를 속였구나. 실로 그 꾀는 내가 미칠 바 아니다!”
그리고 하릴없이 군사를 돌려 장안으로 돌아갔다.
먼저 한중으로 들어선 공명은 거기서 삼군에게 고루 상을 내리고 성도로 떠났다. 성도에 이르자 공명은 먼저 후주를 찾아보고 아뢰었다.
“이 늙은 것은 기산으로 나가 장안을 뺏으려 하던 차에 폐하의 부르심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큰일로 신을 부르셨는지 실 로 궁금합니다.”
후주가 할 말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조서 한 장으로 대군을 이끌 고 돌아와 무릎을 꿇는 공명에게 딴 뜻이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만했다. 한동안 우물쭈물하던 후주가 궁색하게 구실을 대었다.
“짐이 오래 승상의 얼굴을 보지 못해 몹시 그리웠소. 그래서 조서를 내려 돌아오게 한 것이지 딴 일은 없소이다.”
역시 짐작한 대로라 공명이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를 부르신 게 폐하의 본마음이 아니라면 반드시 곁에 간신이 있 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신에게 딴 뜻이 있다고 아뢰었을 것입니다.”
워낙 공명이 바로 알아맞히니 후주는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부끄 러운 빛을 띤 채 입을 다물고 있는 후주를 보고 공명이 타이르듯 아 뢰었다.
“이 늙은 것은 선제로부터 두터운 은덕을 입었기로 죽음으로 보 답할 것을 맹세한 바 있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대궐 안에 이 같은 간 신이 있으면 신이 어떻게 역적을 쳐 없앨 수 있겠습니까?”
후주도 온전히 모자라는 인간은 아니었다. 더 뻗대지 않고 내막을 털어놓으며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아무래도 짐의 귀가 너무 엷었던 듯하오. 간신의 말을 잘못 들어 그만 승상을 불러들이고 말았소. 이제 가려지고 막혀 있던 두 눈이 열리어 뉘우쳐보나 이미 이를 수가 없구려!”
이에 공명은 여러 벼슬아치들을 불러 모아놓고 그런 말이 돌게 된 경위를 캐보았다.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마침내 그 뒤에 숨어있던 구안이 드러났다.
공명은 얼른 구안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구안은 벌써 위로 달아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공명은 그런 구안의 말을 가볍게 믿고 함부로 일러바친 환관들을 잡아들여 죄가 무거운 자는 죽이고 나머 지는 모두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공명은 또 장완과 비위를 불러들여 엄히 꾸짖었다.
“나는 나라 안의 일을 모두 그대들에게 맡기고 떠났건만 그대들 은 어찌 게을리하였는가? 그런 간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알 지 못하고, 일이 벌어진 뒤에도 폐하를 힘써 말리지 않았으니 참소 를 한 환관의 무리보다 나을 게 무에 있겠는가?”
“실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잘못을 빌었다. 공명은 두 사람을 크게 나무 라고 다른 벼슬아치들도 꾸짖어 앞일을 경계하게 했다.
대강 성도 안의 일이 마무리지어지자 공명은 다시 한중으로 돌아 갔다. 한편으로는 이엄에게 글을 보내 군량을 실어오라 이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다시 군사를 내어 위를 칠 의논을 시작했다.
양의가 나와 색다른 의견을 말했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싸울 힘이 몹시 떨어져 있 습니다. 거기다가 군량까지 제때에 대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는 군 사를 두 패로 나누어 석 달을 기한으로 교대하도록 해보는 게 어떻 겠습니까. 곧 이십만 군사를 십만씩 나누어, 먼저 한 패를 기산으로 보내고 석 달 뒤에는 다시 다른 패를 보내어 먼저 보낸 십만과 교대하게 하면, 오래 군사를 부려도 힘이 떨어지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천천히 나아가면 중원을 차지하는 것도 힘들지 않으리 라 생각됩니다.”
공명도 들어보니 매우 그럴듯했다.
“그 말이 내 뜻에 꼭 맞다. 내가 중원을 친다 하나 그 일은 하루아 침에 이루어질 성질이 아니다. 마땅히 그와 같이 장구한 계책을 써 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군대를 두 패로 나누어 백 일을 기한으로 서로 교 대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게 했다.
그럭저럭 한 해가 지나고 건흥 구년이 되었다. 그해 이월 공명은 다시 위를 칠 군사를 크게 일으키니 때는 위의 태화 육 년이었다. 위주 조예는 공명이 다시 중원을 향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급히 사마의를 불러들여 물었다.
“지금 공명이 다시 나온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자단은 이미 죽었으니 신 혼자 당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힘을 다해 역적을 쳐 없애 폐하께 보답할 따름입니다.”
사마의가 별로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그렇게 말했다. 조예는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열어 사마의를 대접해 보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촉병의 침입이 급하다는 전갈이 꼬리를 물고 궁궐로 날아들었다. 조예는 곧 사마의에게 영을 내려 적을 막으라 하고, 몸소 성 밖까지 배웅했다.
위주 조예와 작별한 사마의는 바람처럼 달려 장안에 이른 뒤 여러 갈래 인마를 불러 모아놓고 촉병을 쳐부술 계책을 의논했다. 장합이 나와 말했다.
“제가 군사 한 갈래를 이끌고 옹(雍), 미(倻) 두 성으로 가서 병과 맞서 보겠습니다.”
사마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전군만으로는 공명의 군사들을 당해낼 수 없다. 거기다가 또 군사를 두 길로 나누는 것도 적을 이겨낼 계책이 못 된다. 차라리 군사를 상규에 머물러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는 기산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그때 그대가 선봉이 되어주겠는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선봉으로 써주겠 다는 데는 장합도 기뻤다. 선뜻 사마의의 말을 받아들였다.
“제가 평소부터 충의를 품고 마음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 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런데 이제 도독께서 그같이 중임을 맡겨주시니 비록 만 번 죽는 일 이 있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사마의는 장합을 선봉으로 삼아 대군을 도맡아 거느리게 하 고 곽회는 뒤에 남겨 농서의 여러 고을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그 나 머지 장수들은 각기 길을 나누어 장합을 뒤따라 나아가게 했다. 오 래잖아 살피러 간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공명은 대군을 이끌고 기산으로 나오는 중인데 전부 선봉 왕평 과장의는 재빨리 진창을 빠져나와 검각과 산관을 지난 뒤 야곡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장합을 보고 말했다.
“이제 공명은 대군을 이끌고 멀리 왔으니 군량이 어려울 것이다. 틀림없이 농서의 밀을 베어다 군량으로 삼으려들 것인 즉 거기에 방 비가 있어야겠다. 그대는 기산에다 영채를 세우고 공명과 맞서도록 하라. 나와 곽회는 천수군의 여러 고을을 돌아보며 촉병이 밀을 베 어 가는 걸 막겠다.”
이에 장합은 사만 군사를 이끌고 기산으로 가 영채를 얽었다. 사 마의는 자신의 말대로 나머지 대군을 이끌고 농서로 갔다.
한편 기산에 이른 공명은 싸우기 좋은 곳을 가려 영채를 세운 뒤 군사를 풀어 위빈 쪽을 살펴보게 했다. 그곳의 위병은 이미 공명이 올 줄 알고 싸울 채비를 단단히 갖춰놓고 있었다. 그걸 안 공명이 여 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적의 채비가 그토록 단단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마의의 영채일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마침 군량이 다 돼가는 데다 여러 차례 이엄 에게 사람을 보내 재촉해도 양식이 이르지 않고 있으니, 사마의가 여기 묶여 있는 틈을 타 군량이나 장만해야겠다. 내가 헤아리기에 지금 농서 지방의 밀이 한창 잘 익었을 것이다.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걸 베어 오도록 하자.”
그러고는 왕평, 장의, 오반, 오의 네 장수를 남겨 기산의 영채를 지키게 한 뒤 스스로는 강유, 위연 등을 데리고 노성으로 달려갔다. 노성 태수는 일찍부터 공명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공명이 대군을 몰아오자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 피한 방울 흘리지 않고 노성을 얻은 공명은 군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뒤 노성 태수에게 물었다.
“이 무렵이면 어느 곳의 밀이 익었겠는가?”
“농상의 밀이 이미 익었습니다.”
태수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공명은 장익과 마충을 남겨 노성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나머지 장졸들과 더불어 농상으로 떠났다.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을 지킵니다.”
앞서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그 같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공명이 놀라 말했다.
“이 사람도 여간이 아니구나! 내가 밀을 베러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니…….”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곧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은 뒤 미리 준비해둔 수레 세 대를 끌어오게 했다. 모두가 공명이 즐겨 타고 다니는 네 바퀴 수레에 모양과 장식이 똑같았다. 공명이 뒷날에 쓰려고 촉중(蜀中)에서 미리 만들어 온 것들이었다.
공명은 먼저 강유에게 수레 한 대와 수레를 지킬 군사 천 명과 북 을 칠 군사 오백 명을 주며 상규 뒤편에 매복하게 했다. 또 위연과 마대에게도 역시 같은 수의 군사와 수레 한 대를 주며 상규 좌우에 매복하게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수레를 미는 사람들의 꾸밈이었다. 각 수레마다 스물네 사람이 미는데 모두가 검은 옷에 맨발이요, 머리를 풀고 칼을 짚었으며 또 한 손에는 칠성(七星)이 그려진 검은 기를 들 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세상 사람들 같지가 않아 보는 이가 절로 오싹할 차림들이었다.
강유, 위연, 마대 세 사람은 명을 받자 모두 수레 한 대씩을 끌고 지정한 곳으로 갔다. 그런 다음 공명은 다시 군사 삼만을 뽑아 채비 를 하게 하고 또 따로 건장한 군사 스물넷을 뽑았다. 정말로 공명이 탄 수레를 밀 사람들로, 차림은 앞서 보낸 세대의 수레 때와 똑같 았다.
검은 옷에 맨발이요 풀어 헤친 머리에 칼을 짚은 장사 스물넷이 공명이 탄 수레를 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맨 앞에는 천봉(天蓬, 하늘의 신장) 모양으로 머리를 묶은 관흥이 칠성 수놓은 검은 기를 들고 걷고 있었다.
공명은 수레 위에 단정히 앉은 채 똑바로 위영(魏營)을 향해 밀고 나아가게 했다. 영채 앞 멀찌감치 나와 망을 보던 위나라 군사는 그 런 공명 일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이 사람인지 귀신인지 몰라 덜덜 떨며 얼른 사마의에게 달려가 알렸다.
사마의도 어리둥절해 영채를 나가 스스로 살펴보았다. 흰 학창의 에 관을 반듯이 쓴 공명이 깃털부채를 흔들면서 수레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좌우에는 스물넷의 장사가 머리를 풀고 칼을 짚었는데, 맨 앞에 선 사람은 검은 기를 들고 있었다. 정말로 사람의 행렬이라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귀신에 에워싸인 듯한 광경이 었다.
“저것은 공명의 장난이다. 또 괴이한 짓을 하고 있구나.”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고 이천 군사를 뽑아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빨리 달려가 저 수레와 사람들을 모조리 붙들어 오너라!”
명을 받은 위병들은 으스스한 마음을 다잡으며 한꺼번에 달려 나갔다.
공명은 위병들이 달려 나오는 걸 보자 천천히 수레를 돌려 자기편 진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병들은 더욱 급하게 말을 몰아 그 런 공명을 뒤쫓았다. 문득 음습한 바람이 불며 차가운 안개가 뒤덮 여 왔다.
거의 한 마장을 뒤쫓았으나 위병들은 아무래도 공명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공명이 느릿느릿 수레를 몰아가는 데도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삼십 리나 나는 듯 말을 몰아 뒤 쫓았건만 공명은 앞에 보일 뿐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구나. 어찌 해야 되겠는가?”
마침내 뒤쫓던 위병들이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저희끼리 웅 성거렸다. 공명은 위병이 뒤쫓지 않는 걸 보자 다시 수레를 돌려 머 뭇거리는 위병들에게로 밀고 나오게 했다. 위병들은 한동안 망설이 다가 다시 말을 박차 뒤쫓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공명은 수레를 돌 려 느릿느릿 달아났다.
위병들은 다시 이십여 리를 뒤쫓았으나 아무래도 눈앞에 보이는 공명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다시 어리둥절해 뒤쫓기를 멈추자 공 명의 수레가 되돌아서 다가왔다. 약이 오른 위병들이 다시 뒤쫓으려 하는데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와 영을 내렸다.
“공명은 팔문둔갑(八門遁甲)에 밝고 육정육갑六甲)의 귀신들 을 매우 잘 부린다. 저것은 틀림없이 육갑천서(六甲天書)에 있는 축 지법(地法)인 듯하니 군사들은 더 뒤쫓지 말라.”
그 같은 영을 받은 위병들은 곧 말 머리를 돌렸다. 그때 왼편에서 싸움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 다. 사마의는 얼른 영을 내려 쏟아져 나오는 적군을 막게 했다. 그런 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적병 뒤로 수레 한 대가 나오는데 바로 공명이 탄 수레였다. 스물넷의 머리 풀고 긴 칼 짚은 사람들이 검은 옷에 맨발로 수레를 밀고, 흰 옷에 관을 받쳐 쓴 공명은 단정히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저 공명을 뒤쫓아 오십 리나 달려왔는데, 그 공명은 어디 가고 저기서 또 공명이 나온단 말이냐? 괴이한 일이다. 참으로 괴이 하다!”
깜짝 놀란 사마의가 그렇게 말하는데 다시 오른쪽에서 싸움북 소 리가 울리며 또 한 떼의 병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 뒤에는 또 다른 공명이 스물네 신장(神將)에게 둘러싸인 수레를 타고 깃털부채를 흔 들고 있었다.
어지간한 사마의도 그 광경을 보자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장수들을 돌아보며 놀란 소리를 내질렀다.
“저것은 틀림없이 신병(神)이다. 공명이 신병을 부리고 있다!”
사마의가 그 모양이니 나머지 장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놀 라고 겁먹은 나머지 한번 싸워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내빼기 바빴다.
위병이 한참 정신없이 달아나는데 또 한차례 북소리가 울리며 촉 병이 나타났다. 그들 앞에 수레 한 대가 나오는데 보니 바로 공명의 수레였다. 머리 풀고 칼 짚은 사람들이 검은 옷에 맨발로 그 수레를 밀고 있는 것이나, 수레 위에 앉은 공명의 모습이 앞서 본 세대의 수레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되니 위병들은 이제 그저 두렵고 괴이쩍은 정도를 넘어 간이 다 오그라 붙을 지경이었다. 사마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게 되니 촉병이 많고 적은지 를 헤아려볼 틈조차 없었다. 말 엉덩이에 불이 일도록 채찍질해 달 아나기에 바빴다.
장수와 군사들의 마음이 그쯤 되면 그 싸움은 뻔했다. 위병은 개 몰리듯 몰린 끝에 가까스로 상규성으로 쫓겨 들어갈 수 있었다. 고 작 한다는 게 성문을 닫아 걸고 굳게 지킬 뿐이었다.
그사이 공명이 보낸 삼만 군사는 농상의 밀을 모두 베어 노성으 로 옮기고 타작으로 들어갔다. 공명을 괴롭히던 군량은 어느 정도 해결을 본 셈이었다.
한편 상규성으로 쫓겨 들어간 사마의는 사흘 동안 꼼짝 않고 엎 드려 있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기는커녕 촉병 을 마주보기조차 겁이 난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촉병이 모두 물러간 걸 보고서야 겨우 사람을 풀어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살피러 나갔던 군사들이 길에서 병 하나를 잡아 사마의에게로 끌고 왔다.
“너는 무엇하던 놈이냐?”
사마의가 물었다. 그 촉병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밀을 베러 나갔던 패올시다. 돌아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져 혼자 남겨졌다가 이렇게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럼 촉진의 사정도 어느 정도는 알겠구나. 너희들이 앞세웠던 신병은 어찌 된 것이냐?”
사마의가 가장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 병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세 갈래 복병이 앞세웠던 것은 공명이 아니었습니다. 강유와 마 대와 위연이 그렇게 꾸미고, 각기 수레를 지키는 군사 천 명과 북을 울리는 군사 오백으로 상대편을 속였을 뿐입니다. 진짜 공명은 맨 처음 진 앞에 나와 유인하던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 말에 사마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탄식했다.
“공명은 그 나타나고 사라짐이 실로 귀신 같구나!”
그때 사람이 들어와 부도독 곽회가 왔다는 걸 알렸다. 사마의가 불러들이자 곽회가 들어와 예를 올리기 바쁘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 촉병은 그리 많지 않으며 지금 노성에서 밀을 타작 하고 있다 합니다. 한번 들이쳐보았으면 싶습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얼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무 릅쓰고 자신이 당한 일을 모두 말했다. 듣고 난 곽회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다만 한때의 속임수일 뿐입니다. 이제 그걸 모두 알았으 니 다시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제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칠 터이니 도독께서 앞으로 밀고 드십시오. 어렵잖게 노성을 깨뜨리 고 공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마의도 힘을 좀 얻었다. 곽회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군 사를 두 길로 나누어 노성으로 달려갔다.
한편 노성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던 공명은 그날 문득 장수들을 불러모아 영을 내렸다.
“오늘 밤 틀림없이 적이 성을 공격해 올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성 동서의 밀밭이 군사를 숨겨둘 만한 곳인데, 누가 가보겠는가?”
강유, 위연, 마대, 마충이 한꺼번에 나서며 말했다.
“저희들이 가보겠습니다.”
공명은 그들의 씩씩한 대답에 매우 기뻤다. 강유와 위연에게 각기 군사 이천 명을 나눠주며 동남과 서북쪽에 매복하게 하고, 마대와 마충에게도 각기 이천 군사를 주어 서남과 동북에 숨어 있게 했다.
“포향이 울리거든 그 네 곳에서 한꺼번에 뛰쳐나오도록 하라.”
그게 그들 네 장수에게 내린 영이었다.
그들이 모두 명을 받고 나간 뒤 공명은 겨우 백여 명에게 화포( 砲)만 준비케 해 성을 나갔다. 그리고 성 앞 밀밭에 숨어 위병이 오 기만을 기다렸다.
사마의가 노성 아래 이른 것은 날이 저문 뒤였다. 사마의는 성 밖 외진 곳에 군사를 멈추고 장수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만약 밝은 낮에 밀고 들면 적은 반드시 거기 대비할 것이다. 밤 이 늦기를 기다려 들이치는 게 좋겠다. 이 노성은 성벽이 낮고 둘러 싼 도랑도 얕으니 깨뜨리기에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위병들은 그곳에 엎드려 밤이 깊기만을 기다렸다. 일경쯤 되 자 곽회가 군사를 이끌고 노성 아래 이르렀다. 이에 군사를 합친 위 병은 북소리도 요란하게 밀고 들어가 순식간에 노성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촉병이 성벽 위에서 수많은 활과 쇠뇌를 쏘아 붙여 화살과 돌이 비오듯 위병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 엄청난 기세에 눌린 위병 이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주춤했다. 그때 문득 어디선가 한소리 포향이 울렸다. 군사들이 몰려오는 신호인 듯했으나 어느 편 군사가 오는지 알 수 없어 위병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곽회는 그 포향이 밀밭 속에서 난 걸 알고 군사를 풀어 그 밀밭을 뒤져보게 했다. 하지만 미처 군사들이 밀밭에 뛰어들기도 전에 사방 에서 불길이 일며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미리 성을 나가 숨어 있던 네 갈래의 촉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갑자기 노성의 네 대문이 활짝 열리며 안에서도 촉병들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안팎에서 호응해 들이치니 그러잖아도 멈칫해 있던 위병 들은 그대로 뭉그러졌다. 그 한바탕 싸움에 수많은 군사만 잃고 정 신없이 쫓겨 달아났다. 사마의는 싸움에 진 군사들을 이끌고 간신히 에움을 벗어나 어떤 산등성이에 자리를 잡았다. 곽회도 목숨을 겨우 건져 쫓겨온 군사들과 더불어 그 산 뒤편에다 영채를 얽었다.
위병들을 멀리 쫓아버린 공명은 다시 노성 안으로 들어가고, 위 연, 마대, 마충, 강유 네 장수에게는 성 네 모퉁이에 영채를 내려 쉬 게 했다.
겨우 숨을 돌린 곽회가 사마의를 찾아보고 말했다.
“어느덧 병과 맞선 지도 여러 날이 지났건만 물리칠 계책이 없 습니다. 거기다가 방금 또 한바탕 크게 져서 삼천의 군사를 잃고 나 니 실로 아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대로 있을 수는 더욱 없습니다.
만약 빨리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적을 물리치기는 더욱 어려워 질 것입니다.”
“그럼 무얼 어떡해야 하겠소?”
사마의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받았다. 곽회가 권했다.
“격문을 옹주와 양주에 띄워 그 두 곳의 병마를 불러들이도록 하 십시오. 저는 군사를 이끌고 검각을 들이쳐 적이 돌아갈 길을 끊어 보겠습니다. 그리되면 군량과 마초를 날라올 길이 끊긴 적은 절로 어지러워질 것이니, 그 틈을 타 들이치면 무찔러 없앨 길도 있을 듯 합니다.”
사마의는 곽회의 말을 듣기로 했다. 곧 격문을 써서 옹(雍), 양(凉) 두 곳에 보내고 병마를 보내라 했다. 하루도 안 돼 대장 손례가 그곳 의 여러 고을 군마를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힘을 얻은 사마의는 손 례와 만나 힘을 합치기로 약정하고 곽회는 검각을 치러 가게 했다. 하지만 공명의 헤아림은 거기에도 미쳐 있었다. 노성으로 돌아와 여러 날이 되도록 위병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공명은 강유와 마대 를 불러 말했다.
“지금 위병은 험한 산세에 의지해 우리와의 싸움을 피하고 있다. 첫째로는 우리가 이번에 얻은 밀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자 함이요, 둘째로는 검각으로 군사를 보내어 우리가 양식을 날라올 길을 끊으 려 함이다. 그대들 두 사람은 각기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먼저 험한 길목을 차지하고 있으라. 그러면 위병은 우리가 미리 채비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절로 물러나 검각은 아무 탈 없을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은 시킨 대로 떠나갔다. 장사 양의가 들어와 일깨웠다.
“전에 승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일을 기한으로 한차례씩 군사를 교대시키기로 했는데, 이제 그 기한이 찼습니다. 한중에 있던 군사 들이 이미 천구까지 나와 공문을 보내고 교대하기를 기다리고 있습 니다. 지금 여기 있는 팔만 가운데 사만을 교대해야 되는데 어찌하 시겠습니까?”
“이미 말한 일이니 어서 그대로 시행하라.”
공명이 선선히 응낙했다. 그런데 갑자기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손례가 옹, 양의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싸움을 도우러 와 검각을 치러 간다 합니다. 또 사마의는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노성으로 밀 고들 작정이라 합니다.”
그 말을 듣자 교대를 하러 돌아가려고 채비를 하던 군사들은 물 론 모든 촉병이 놀라고 걱정했다. 먼저 교대 이야기를 꺼냈던 양의 가 들어와 다시 공명에게 말했다.
“위병의 몰려오는 기세가 매우 거셉니다. 잠시 교대를 미루고 그 군사를 남겨 먼저 적을 물리치도록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새 군사 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그들을 교대시키도록 하십시오.”
그 말에 공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군사를 쓰고 장수를 부리는 데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미 그런 명을 내려놓고 이제 와서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겠는가? 군사들 중에서 이번에 돌아가게 되어 있는 자는 모 두 돌아갈 채비를 마쳤을 것이고 그 부모와 처자도 사립문에 기대 서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곧 큰 어려움에 빠지는 한이 있어 도 결코 그들을 이곳에 붙들어두지는 않겠다.”
그리고 명을 내려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군사들은 그날로 떠나가게 했다. 그 명을 전해 들은 군사들은 저마다 큰 소리로 외쳤다.
“승상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떠날 수 있 습니까? 바라건대 우리에게 이곳에 머물러 목숨을 걸고 크게 위병 을 무찌를 기회를 주시오. 승상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해주시오!” 공명이 그런 군사들을 달랬다.
“너희들은 마땅히 집으로 돌아갈 차례다. 그런데 어찌 여기 머무 르려는가? 돌아가도록 하라.”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나가 싸우기를 원합니다. 집으로는 돌아 가지 않겠습니다!”
군사들이 더욱 소리 높이 외쳤다. 그제야 공명도 그들의 뜻을 받아주었다.
“고맙다. 이왕에 너희들이 싸우기를 원하니 한 가지 일을 맡기겠 다. 성 밖에 나가 영채를 얽고 있다가 적이 이르거든 쉴 틈을 주지 말 고 들이쳐라. 그것이야말로 편히 앉아 지친 적을 기다리는 계책이다.”
그러고는 그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싸움이 라 병의 사기는 드높았다. 모두 손에 익은 병장기를 들고 성 밖으 로 나가 진을 쳤다.
오래잖아 서량의 인마가 먼저 노성에 이르렀다. 먼 길을 급히 달 려오느라 사람과 말이 모두 지쳐 있었다. 그들이 겨우 진채를 세우 고 막 쉬려 하는데 일찍부터 기다리던 촉병이 밀물처럼 덮쳤다. 사 람마다 힘을 다해 덤비니 군사는 날래고 장수는 용맹스러웠다.
그런 촉병을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옹, 양의 군사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이없이 뭉그러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더욱 기세가 오른 촉병이 그 뒤를 뒤쫓으며 죽이니 순식간에 시체는 들판을 덮고 거기 서 흐르는 피는 내를 이루었다.
성을 나간 공명은 이긴 군사들을 거두어 들여 고루 상을 내리고 치하했다. 그런데 문득 영안(安)의 이엄이 사람을 보내 급한 글을 전해 왔다. 공명이 놀라 뜯어보니 대략 이런 뜻이 적혀 있었다.
‘요사이 듣자 하니 동오가 사람을 낙양에 보내 위와 화친을 맺으 려 한다고 합니다. 이에 위는 동오에게 촉을 치라고 부추겼으나 다 행히도 동오는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습니다. 엄은 특히 그 같은 소식을 탐지하였기로 알려드림과 아울러 승상께서 빨리 좋 은 계책을 세워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읽기를 마친 공명 은 곧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만약 동오가 군사를 일으켜 촉으로 쳐들어온다면 큰일이다. 급히 돌아가야겠다.”
그리고 영을 내려 기산에 있는 대채의 인마를 서천으로 물리게 했다.
“사마의는 내가 이곳에서 군사들과 머물고 있는 줄 알면 감히 뒤쫓지 못할 것이다.”
이에 기산의 촉병은 왕평, 장의, 오의, 오반이 길을 나누어 이끌고 천천히 서천으로 몰려갔다.
공명의 짐작대로 그곳에서 병과 맞서고 있던 장합은 촉병이 물러가는 걸 보고도 함부로 뒤쫓지 못했다. 무슨 계책이 있지 않나 싶 어서였다. 대신 사마의를 찾아보고 물었다.
“이제 촉병이 물러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사마의가 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명은 잔꾀가 매우 많은 사람이니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되 오. 굳게 지키면서 저들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겠 소. 군량만 떨어지면 절로 돌아갈 것이오.”
그러자 대장 위(魏)이 나서서 말했다.
“병이 기산의 영채를 뜯어 물러가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틈을 타 뒷덜미를 후려쳐줄 때입니다. 도독께서 군사를 묶어놓고 촉 을 보기를 범 보듯 하시다가 때를 놓치기라도 하면 천하의 비웃음은 어떻게 감당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나 사마의는 끝내 고집을 부려 그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한편 공명은 기산의 군사들이 모두 일없이 돌아갔음을 알자 양의 와 마충을 장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밀계를 주며 먼저 만 명 의 궁노수를 이끌고 가 검각과 목문도 양편에 매복해 있게 했다.
“만약 위병이 뒤쫓아오거든 포향 소리에 맞춰 통나무와 바위를 굴려라. 그렇게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은 뒤에 양편에서 활과 쇠뇌 를 쏘아 붙이면 된다. 틀림없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두 사람에게 가만히 일러준 계책이었다. 마충과 양의가 나간 뒤 공명은 또 위연과 관흥을 불렀다.
“그대들은 뒤따라오며 적의 추격을 막도록 하라.”
공명은 그렇게 영을 내린 다음 성벽 위에 어지럽게 깃발을 꽂게 하고 성안 여기저기에 마른 풀과 짚더미를 쌓아 불을 지르게 했다.
성안의 그 갑작스런 변화에 사마의는 어리둥절했다. 함부로 덤비 지 못하고 살피는 사이에 공명은 대군을 몰아 목문도를 바라보며 빠 져나갔다. 이윽고 살피러 나갔던 군사 하나가 돌아와 사마의에게 알 렸다.
“촉병의 큰 부대는 이미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성안에 남은 군 사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사마의는 몸소 성 아래로 가서 살펴보았다. 깃발이 펄럭 이고 불길이 이는 성을 한참 살피던 사마의가 비로소 공명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것은 빈 성이다. 들어가보아라.”
군사들이 들어가보니 정말로 성은 텅 비어 있었다. 비록 잠시 속 기는 했으나 공명이 급히 물러난 걸 알자 사마의는 기뻤다. 이번에 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공명은 이미 물러갔다. 누가 뒤쫓겠는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선봉장합이 선봉답게 나섰다. 사마의가 왠지 불안한 듯 말렸다.
“공은 성미가 거칠고 급해 마음이 놓이지 않소. 이번에는 빠지시오.”
그러자 장합이 불끈해 따지듯 물었다.
“싸움터로 나올 때 도독께서는 저를 선봉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바야흐로 큰 공을 이루려 하는데 어찌하여 저를 쓰려 하지 않으십니까?”
“병이 물러났다 하나 반드시 험한 길목에 매복을 남겨두었을 것이오. 깊이 생각하고 꼼꼼히 살핀 뒤에야 뒤쫓아야 하오.”
사마의가 그렇게 까닭을 밝혔다. 장합이 한층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거라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좋소. 굳이 가시려면 가시오. 하지만 나중에 원망해서는 아니 되오.”
그게 어디 다짐을 받는다고 될 일일까만 워낙 장합이 고집을 부 리고 나서니 사마의도 마지못해 그런 다짐으로 물러섰다. 장합이 굳 은 얼굴로 소리쳤다.
“대장부가 몸을 던져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만 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나오자 사마의도 더 말리지 못했다.
“공께서 굳이 가시겠다니 오천 군사를 이끌고 먼저 떠나시오. 뒤이 어 위평에게 이만을 주어 뒤따르게 하면서 매복을 방비하게 하겠소. 나는 삼천 군사를 이끌고 그 뒤에서 형세를 보아 접응하겠소이다.”
이에 장합은 오천 군사를 받아 나는 듯 촉병의 뒤를 쫓았다. 장합 이 한 이십 리나 달렸을까, 홀연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숲속에 서 한 떼의 인마가 뛰쳐나왔다. 앞선 장수가 말 위에서 큰 칼을 비껴 들고 크게 소리쳤다.
“역적 장합은 군사를 이끌고 어디로 가느냐?”
장합이 보니 그 장수는 위연이었다. 장합은 불같이 노해 말을 박 차고 달려 나갔다. 곧 위연과 장합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열 합을 채우기 바쁘게 위연이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합은 그런 위연을 뒤쫓아 다시 한 삼십 리를 달리다가 문득 말고삐를 당기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마의가 걱정하던 게 퍼뜩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복병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다시 말을 박찼다.
장합이 막 한 산 언덕을 도는데 새로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병이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수는 관흥이었다.
“장합은 달아나지 말라! 내가 여기 있다!”
관흥이 큰 칼을 비껴들고 그렇게 소리쳤다.
장합은 대꾸도 없이 말에 박차를 가해 관흥에게 덤볐다. 다시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전과 비슷했다. 관흥이 열 합을 넘기기 바쁘게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합은 또 그 뒤를 쫓았다. 얼마 안 가 나무가 빽빽한 숲속에 이르 렀다. 장합은 번쩍 의심이 들었다. 군사를 사방에 풀어 살펴보게 했 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히 살펴도 복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바람에 마음을 놓은 장합은 내쳐 병을 뒤쫓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장합은 제갈공명의 계책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 다. 얼마 안 가 난데없이 위연이 나타나 다시 여남은 합 부딪고는 달 아났다. 화가 난 장합이 앞뒤 없이 뒤쫓는데 이번에는 또 관흥이 나 타났다. 장합은 화가 꼭뒤까지 치솟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길을 막 고선 관흥을 덮쳤다.
관흥은 또 열 합을 채우기 바쁘게 달아났다. 거기다가 그를 따르 는 촉병들은 갑주와 창칼까지 버리고 달아나 길이 막힐 지경이었다. 위병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그걸 줍느라 어지러워졌다.
그때 다시 위연과 관흥이 나타나 그런 위병을 덮쳤다. 그러나 장합이 힘을 다해 맞서자 이내 못 견디겠다는 듯 달아나버렸다. 아무 래도 계책이라기보다는 정말로 힘이 모자라 쫓기는 듯했다. 거기에 자신을 얻은 장합은 더욱 거세게 촉병을 뒤쫓았다.
어느새 해는 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목문도 어귀까지 쫓기던 위연이 문득 말 머리를 돌리더니 큰 소리로 욕을 퍼부어댔다.
“장합 이 어리석은 역적 놈아, 내가 너 같은 것과는 맞겨루지 않 으려고 하는데도 무얼 한다고 부득부득 쫓아오느냐? 정히 그렇다면 이제 한번 죽기로 결판을 내보자!”
그 소리에 장합은 또다시 불같이 화가 났다. 대꾸도 않고 말을 박 차 위연에게로 달려갔다. 장합이 창을 들어 위연을 찌르려 하자 위 연이 칼을 휘둘러 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큰소리만 쳤을 뿐, 위연 은 열 합을 넘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못 당하겠다는 듯 갑옷 투구까 지 벗어던지고 졸개들과 함께 목문도로 달아나버렸다.
위연이 또 달아나는 걸 보자 장합은 눈이 뒤집힐 만큼 속이 상했 다. 사정없이 말을 몰아 위연을 뒤쫓았다.
그사이 날은 아주 저물어 오래잖아 길마저 보이지 않게 됐다. 그 런데 갑자기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산등성이에서 하늘을 찌를 듯 불길이 치솟았다. 이어 큰 돌과 통나무가 비오듯 쏟아져 장합과 그 졸개들이 돌아갈 길을 막아버렸다. 비로소 장합은 속은 걸 알았다.
“내가 적의 계책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장합이 그렇게 소리치며 급히 말 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때 는 늦어 있었다. 등 뒤는 이미 그동안에 흘러내린 돌과 통나무로 길이 막히고, 앞에만 손바닥만 한 공터가 보일 뿐, 양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장합은 이제 나아가려고 해도 나아갈 수가 없고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막막해서 잠시 머뭇거리는데, 문득 딱다기 소 리가 들리며 수많은 화살과 쇠뇌가 비오듯 쏟아졌다.
장합은 움치고 뛸래야 뛸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화살에 고슴도치 처럼 되어 백여 부장과 함께 목문도에서 죽었다.
한편 장합을 뒤따라오던 위병들은 골짜기 입구가 돌과 통나무로 막혀 있는 걸 보자 장합이 이미 공명의 계책에 빠진 줄 알았다. 얼른 말 머리를 돌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산꼭대기에서 큰 외침이 들렸다.
“제갈승상이 여기 있다!”
위병들이 올려다보니 공명이 불빛 속에 앉아 있다가 손가락질을 하며 타일렀다.
“내가 오늘의 사냥에서 잡고자 한 것은 말[馬, 사마의]이었는데 잘 못되어 노루, 장합]를 맞히고 말았구나. 너희들은 안심하고 돌아 가 사마의에게 이르거라. 오래잖아 내 손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니 목을 씻고 기다리라고.”
그 말을 들은 위병들은 머리를 싸안고 돌아갔다. 그리고 사마의를 보기 무섭게 목문도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했다. 사마의는 슬퍼 해 마지않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장합이 죽게 된 것은 모두가 내 허물이다!”
그러고는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다.
위주는 장합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고 그 시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 지내게 해주었다.
그때 한중으로 돌아가 있던 공명은 성도로 돌아가 후주를 찾아보 려 했다. 동오의 침입을 의논하고 방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런 데 이엄이 먼저 후주에게 글을 올려 거짓말을 했다.
‘신이 군량을 마련해 막 승상의 군(軍)에 보내려 하는데 승상 이 갑자기 군사를 돌려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실로 무슨 까닭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대강 그렇게 적힌 글을 읽은 후주는 어리둥절했다. 곧 상서 비위 를 한중으로 보내 공명에게 되돌아온 까닭을 물어보라 했다.
한중에 이른 비위는 공명을 찾아보고 후주의 뜻을 전했다. 공명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엄이 급한 글을 보내, 동오가 군사를 일으켜 서천으로 쳐들어 오려 한다기에 돌아왔소.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요?”
비위가 아는 대로 말해주었다.
“이엄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군량을 이미 마련해두었는데 승상께 서 까닭 모르게 군사를 되돌리셨다 했습니다. 천자께서는 그 때문에 특별히 저를 보내 까닭을 묻게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한 공명은 곧 사람을 풀어 일이 그렇게 된 경위를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모든 게 밝혀졌다.
“이엄이 군량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자 승상께 죄를 입을까 두려워 한 짓 같습니다. 승상께 거짓 글을 보내 되돌아오게 해놓고 다시 천자께 거짓 말씀을 올려 자신의 허물을 감추려 한 것입니다.” 그 같은 말을 들은 공명은 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쳤다.
“그 하찮은 것이 제한 몸을 위해 나라의 큰일을 그르쳤구나!”
그러고는 곧 사람을 시켜 이엄을 잡아다 목 베려 했다. 비위가 그 런 공명을 말렸다.
“승상께서는 선제께서 당부하신 일을 머리에 새기시어 잠시 너그 럽게 용서하도록 하십시오.”
그 말에 공명도 성을 가라앉히고 그 처리를 비위에게 맡겼다. 성 도로 돌아간 비위는 그 모든 일을 표문으로 적어 후주에게 올렸다. 표문을 읽은 후주는 발연히 노해 무사들에게 당장 이엄을 끌어다 목 베라 소리쳤다. 이번에는 참군 장완이 후주를 말렸다.
“이엄은 선제께서 세상을 버리신 뒤의 일을 부탁하신 신하 중의 하나입니다. 바라건대 너그럽게 용서하도록 하옵소서.”
후주도 그 말을 듣고서는 함부로 이엄을 목 벨 수 없었다. 그를 벼 슬자리에서 내쫓아 서인으로 삼고 재동으로 귀양 보내 하는 일 없이 지내게 했다.
공명도 이엄에게 모질지만은 않았다. 성도로 돌아오자 그 아들 이 풍(李豊)을 장사로 삼아 아비 대신 나랏일을 돌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