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10화 : 장락궁의 피바람
장락궁의 피바람
구성이 죽고 장거, 장순의 난리가 가라앉은 뒤에도 크고 작은 민 란과 소요는 끊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손과 발 또는 가지와 잎의 우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곪으면 반드시 터진다던가, 마 침내는 배와 가슴의 우환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난리가 다름 아닌 제도(낙양성 안에서 준비되고 있었으니, 뒷날 이름한 바 ‘십상 시의 난리였다.
중평(平) 육년 초여름 사월, 노환으로 누워있던 영제는 스 스로 명이 다했음을 알고 급히 대장군 하진(何進)을 궁궐로 불러들 였다.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라는 구실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황후의 오라버니인 하진을 불러 황실의 뒷일을 부탁한다 는 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사실 거기에는 좋지 못한 내막이 있었다.
하진은 원래 소와 돼지를 잡아 파는 도가(屠家)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출신은 천하지만 아리따운 누이가 있어 그녀가 궁녀로 들어가면서부터 운이 열리기 시작했다. 누이가 궁녀에서 황제의 눈 에 들어 귀인(貴人)에 오르고, 다시 황자(皇) 변(辯)을 낳자 황후 송씨(宋氏)를 몰아내고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니, 하진도 황실의 외척으로 따라서 지위가 올라 마침내는 대장군으로 나라의 대권을 쥐기에 이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하황후(何皇后)의 길이 결코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하황후에게 빠져 전(前) 황후인 송씨를 죄 없이 폐 위시켰을 만큼 정신을 못 차리던 영제였으나 오래잖아 역시 후궁 가 운데 하나인 왕미인(王美人)에게로 총애를 옮겼다. 누구보다도 자신 이 바로 그런 경로를 거쳐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하황후로서는 두 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 왕미인이 다시 자신처럼 황 자협()을 낳자 참을 수 없게 된 하황후는 끝내 왕미인을 독살하 고 말았다.
일찍 어미를 잃은 황자 협을 기른 것은 다름 아닌 영제의 어머니 되는 동태후(董太后)였다. 원래는 해독정후(解瀆亭侯) 유장(劉萇)의 아내였으나 아들이 환제桓)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잇게 되자 궁 중으로 모시어져 태후에 오르게 된 여인이었다.
그래도 양가 출신인 동태후에게 천한 백정의 누이인 며느리가 마 음에 찰리 없었다. 거기다가 거두어 기르는 사이에 황자 협이 남달 리 영특한 것을 보자 흠뻑 정을 쏟게 되었다. 매양 하황후 소생인 변 보다 영특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협을 태자로 봉하도록 영제에게 권했고 영제의 마음도 차차 협 쪽으로 기울어져갔다.
그런 영제의 마음을 더욱 굳혀준 것은 환관들이었다. 번번이 싸워 이기기는 했지만 환관들 쪽으로 보면 역시 가장 힘겨운 적은 외척들 이었다. 하진의 사람됨이 그리 똑똑지 못해 아직까지는 커다란 부담 이 되지 않았지만, 하황후 소생인 변이 제위를 잇게 되면 사정은 크 게 달라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사실상 정사를 휘어잡을 태후의 오라버니로서 언제 환관들에게 칼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날 영제에게 하진을 궁 안으로 불러들이도록 한 것도 실은 그 런 환관들의 꾀였다. 황제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자 중상시(中 常侍) 건석(蹇碩)이 가장 충성스러운 듯한 얼굴로 병상 곁에서 아뢰 었다.
“폐하, 만일 왕자 협으로 뒤를 잇게 하시려면 반드시 대장군 하진 을 먼저 주살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큰 근심거리가 남게 되 오니 그를 홀로 불러들여 베어버리십시오.”
비록 혼미한 가운데서지만 이미 협을 태자로 세울 뜻을 굳히고 있던 영제는 선선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병권을 거지반 잡고 있다 해도 좋은 대장군 하진을 손쉽게 제거하는 길은 그밖에 없다고 판단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내막을 알 리 없는 하진은 영제의 부름을 받자 별 생각 없 이 궁으로 향했다. 그의 둔한 머리로는 제위를 잇게 될 생질 변을 잘 돌봐주라는 고명(顧命)이라도 내리려는 것쯤으로 지레짐작한 때문 이었다.
그런데 궁문에 이르러 막 안으로 들려 할 때였다. 사마 반은(潘隱)이 가만히 다가와 일러주었다.
“들어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건석이 공을 해하려고 폐하를 충동해 부르게 한 것입니다.”
제 나름으로는 무슨 속셈이 있었던지 하진은 가까운 사람을 궁 안 여기저기 박아두었는데 반은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반은의 말에 크게 놀란 하진은 급히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 리고 집안에서 부리는 종들과 먹여주고 재우며 기르는 손님들과 함 께 사는 안팎 피붙이들을 모조리 무장시킨 뒤 사람을 보내 대신들을 자기 집으로 청해 들였다. 황후의 오라버니요, 어쩌면 황제의 외숙 부가 될지도 모르는 대장군 하진의 부름이라 전갈을 받은 이는 거의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들이 대강 모였다 싶자 하진은 천천히 입 을 열었다.
“쥐 같은 환관의 무리가 우리 사백 년 한나라 조정의 기둥과 대들 보를 쓸어 사직을 위태롭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그 죄로 보면 아 래로 땅끝을 덮고 위로 하늘 꼭대기에 사무치는 바가 있으나 성상 (聖上)의 뜻이 지엄하여 함부로 손대지 못했소이다. 그런데 이제 그 무리는 성상의 환후를 틈타 감히 한 나라의 대장군을 모살하고 보위 를 넘보는 흉계를 꾸미고 있소. 이에 하늘을 대신하여 그들을 모조 리 쓸어버리려 하거니와 공들의 의향은 어떠시오?”
비록 미천한 출신이나 벌써 십여 년 높은 벼슬만을 골라 지내는 사이에 제법 위엄이 서린 어조였다. 좌중의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켜 하진의 말을 받았다.
“환관들의 세력은 충제(沖), 질제 시절부터 일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자라고 뻗은 지가 오랩니다. 이제 줄기는 무성하고 뿌리는 넓게 퍼졌으니 어찌 한꺼번에 모조리 죽여 없앨 수 있겠습니 까? 만약 일을 꾸밈에 치밀하지 못해 도리어 저들의 귀에 이 말이 들어간다면 멸문의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장군 께서는 반드시 밝고 세밀하게 살펴 거행하도록 하십시오.”
하진이 말하는 사람을 보니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있는 조조였다. 평소에는 그 재주를 아껴 가까이 거두었으나, 그가 바로 환관의 자 식이라는 걸 떠올리자 노기부터 치솟았다. 한 소리 크게 질러 조조 를 꾸짖었다.
“큰일을 도모하는 데 멸문의 화를 먼저 걱정하니, 너 같은 소인배 가 어찌 조정의 대사를 알겠느냐.”
환관의 자식놈이라고 내뱉지 않은 것만도 많이 참은 셈이었다. 조 조를 아끼는 사람들도 조조의 말이 환관들을 두둔하는 것 같은 생각 이 들었던지 의심스런 눈길로 조조를 보았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자 조조도 더는 입을 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제 하진의 어리석음이 큰 화를 부르겠구나…………….’
조조를 꾸짖어 그 입을 다물게는 하였으나 하진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조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특히 그의 누이인 하황후가 미천 한 집안의 딸로 그토록 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장양 을 위시한 몇몇 환관들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더욱 환관들의 무서운 힘을 잘 알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신 때문에 조조의 말을 의심했지만,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무시해버릴 수 없는 말이었다. 순제順) 때의 외척 염현(閻, 환(桓帝) 때의 양기), 그리고 영제(帝) 때의 두무(武) 한결같이 환관들을 향해 먼저 칼 을 빼든 것은 그들 외척 고관들이었으나 번번이 환관들에게 도리어 당하고 말지 않았던가.
그렇게 되니 쉽게 의논이 정해질 수가 없었다. 서로 말하기를 주 저하고 있는데 늦게까지 궁성에 남아 형세를 살피던 반은이 뛰어들 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성상께서는 이미 붕어하셨습니다. 그런데 건석 등 십상시들은 의 논을 맞추어 발상(發喪)을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먼저 거짓 조서로 대장군을 불러들여 죽임으로써 뒷탈을 없앤 뒤에 황자 협을 받들어 제위를 잇게 하려는 술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칙사가 당도하여 다시 하진 에게 급히 궁으로 들라는 제명을 전했다. 조칙이 거짓이라는 걸 이 미 알고 있는 하진은 사신을 잡아두게 하고 의논을 계속했다. 일이 급박한 것을 본 조조가 참지 못하고 다시 나섰다.
“오늘 취할 마땅한 계책은 먼저 천자의 자리를 바로 정한 뒤에 수염 없는 도적들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 말만은 하진도 옳게 여겼다.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건 맹덕(德)의 말이 옳다. 누가 나를 도와 대위(位)를 바로 잡고 역적들을 뿌리 뽑겠는가?”
하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람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바라건대 제게 정병 오천만 주십시오. 궁궐 문을 깨뜨리고 들어 가 새로운 천자를 모신 뒤에 환관놈들을 모조리 쓸어, 가깝게는 조 정을 깨끗이하고 멀게는 천하를 평안케 하겠습니다.”
하진이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니 사예교위(司校尉)로 있는 원소 (袁紹)였다. 굳이 벼슬길을 마다하는 그를 중군교위(中軍校尉)로 처 음 조정에 불러들인 것이 바로 자신이라 하진은 더욱 마음이 기뻤다.
“역시 원본(本初)뿐이로구나. 자네가 나서준다면 두려울 게 무어 있겠나.”
라고 하며 원소에게 어림군(軍) 오천을 점고(點考)하여 맡겼다. 원소는 온몸을 갑주로 감싼 채 어림군을 이끌고 궁문을 깨뜨려 길을 열고, 하진은 하옹(何), 순유(荀), 정태(鄭) 등 대신 서른 몇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잔꾀에는 밝은 환관들이지만 막상 큰일을 당하고 보니 계책이 없 었다. 황망하여 제 몸 하나 보전할 궁리들만 하고 있는 사이에 하진 은 태자 변을 부축하여 제위로 나아가게 했다. 뒤따라 문무백관이 만세를 불러 새 황제의 등극을 기뻐하니 이가 곧 후한의 소제(少) 였다.
이때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건석은 궁궐의 화원 꽃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가히 내시들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서원팔교위의 우두머리로서, 원소의 오천 군이 들이닥칠 당시만 해도 그의 손안에는 그에 못지않은 금군(禁軍)이 있었다. 거기다가 원소의 원래 벼슬 인 중군교위 또한 그의 지휘 아래 있는 서원팔교위의 하나였으나, 한번 대항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달아나 숨은 곳이 기껏 한 길도 안 되는 궁궐의 꽃밭이었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뭉친 무리의 약점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역시 중상시 가운데 하나인 곽승(勝)이란 자 가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진을 불러 해하려던 일은 대개 건 석이 주동된 일이라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워 죽이면 자신은 살 길도 있을 것 같았다.
슬그머니 칼을 빼들고 다가가 건석을 찔러버렸다. 그리고 아직 건 석의 명령을 받들고 있는 금군들을 달래 대장군 하진에게 투항해버 렸다.
생각 밖으로 손쉽게 소제를 즉위케 하고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고 있던 하진은 곽승의 그 같은 투항에 크게 기뻤다. 곧 그 죄를 없이하 고 금군들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원소가 그걸 보고 하진을 일깨웠다.
“환관들은 패를 지어 나라를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대장군의 목숨까지 해하려 한 못된 무리들입니다. 오늘 이 기세를 타 저것들 을 모조리 주살해야 합니다. 부디 이 기회를 놓쳐 후환을 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하진이란 자의 사람됨이 또한 그리 밝지 못하였다. 그날의 형세를 모조리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고 있는 데다 옛날 미천 했던 시절에 자기들 오누이를 도와준 환관들의 은공에 얽매여 얼른 결단을 못 내리고 망설였다.
그사이 숨어서 일이 돌아가는 형편만 살피고 있던 나머지 환관들은 하진과 원소의 그 같은 대화를 전해 듣자 곧장 하태후에게 달려 갔다. 그리고 전날 하태후를 한낱 궁녀에서 황후로까지 올리는 데 가장 공이 큰 장양을 앞세워 애걸했다.
“처음부터 대장군을 해하려고 일을 꾸민 자는 건석 한 사람뿐이 었고, 저희들은 전혀 간여한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장군께서 원 소의 말만 듣고 저희 모두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태후마마, 저희들 을 가엾게 여기시어 부디 성명이나 보존케 해주십시오.”
하태후는 오히려 그 사람됨이 오라비 하진에게조차 미치지 못했 다. 한때의 은인이기도 한 장양이 허연 머리를 굽히고 눈물로 빌자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너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 마땅히 너희를 지켜주리라.”
그리고 하진을 불러들여 말했다.
“오라버니, 우리는 원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올라왔습 니다. 만약 그때 저 장양 등이 곁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 과 같은 부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건석이 흉측한 뜻을 품어 우리를 해하고자 하였다 하나 이미 그자는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죄가 없다 합니다. 그런데도 오라버니는 어찌 다른 사람의 말만 믿 고 환관들을 모조리 베어 죽이려 하십니까?”
그 말을 듣자 원소의 거듭된 권유로 간신히 다잡아먹었던 하진의 마음은 다시 돌아섰다. 태후전을 나오기 무섭게 뭇 관원들에게 일 렀다.
“건석은 나를 해치고자 했으니 마땅히 일족을 멸해 본보기로 삼을 것이로되, 그 나머지는 쓸데없이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그 말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원소였다. 결연하게 소리쳤다.
“만약 잡초를 베고도 그 뿌리를 뽑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밭을 망 치게 될 것입니다. 대장군께서는 거듭 살펴 처결하십시오.”
그러나 이미 마음이 돌아선 하진은 오히려 나무라듯 원소의 말을 받았다.
“내 뜻은 이미 정해진 바다. 원본초는 여러 소리 말라.”
이에 다른 관원들도 더 입을 열지 못하고 한결같이 속으로만 탄식 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싸늘한 결의의 칼날을 착잡한 표 정 아래 숨기며 궁문을 나서는 이가 있었다. 출신 때문에 그날의 일 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로 밀려나야만 했던 전군교위 조조였다.
“한나라의 날은 이제 다했다. 남은 것은 다만 떠날 구실을 찾는 일뿐.”
조조는 홀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조가 그렇게 단언하게 된 것은 하진이 원소의 권유를 뿌리치고 십상시의 무리를 살려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조조에게는 환관들이야 죽건 살아 남건 그리 중요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한 제국의 몰 락을 단언하고, 그때껏 애써 지녀온 충성의 서약을 철회하려고 마음 먹게 된 것은 결국 개악으로 끝나버린 그날의 작은 정변 자체였다. 먼저 조조를 실망시킨 것은 새로운 천자 소제였다. 듣기에는 열일 곱 살이라 했지만 막상 보위에 앉은 모습을 보니 그저 그 한바탕의 소란에 겁먹고 질린 허약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죽 은 영제도 결코 영특하거나 빼어난 군주는 못 되었다. 그러나 제위에 오른 것은 성년이 된 뒤였고, 또 충신인 진번(陳)과 두무 등이 추대한 사람이었다. 비록 환관들의 농간에 넘어가 정사를 그르치긴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위엄만은 내외정(內外廷)을 가리지 않고 끝내 지켜나갔다. 그런데도 어리고 허약한 새 황제에게는 그나마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조조의 우려를 깊게 한 것은 그런 소제를 지켜줄 막 료장치(幕裝置)였다. 일단은 외정(外)의 대신들을 등에 업은 하 진에게 국권이 돌아갔으나 그 뒤의 혼란은 불 보듯이 뻔했다. 대장 군 하진을 정점으로 하는 외척 세력이 권세를 잡았다고 해서 기울어 진 한나라 제실이 회복될 가망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그 변화는 탐욕스런 환관들 대신에 어리석고 미천한 한 떼의 외척들이 다시 국 권을 농하게 되리라는 예고에 지나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기세가 꺾이기는 했지만 만만찮을 환관들의 반격도 한실의 앞길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일 수 있었다. 대장군 양기나 대 장군 두무처럼 하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지략을 갖추었 던 외척의 우두머리들도 환관들의 반격 앞에서는 그토록 힘없이 허 물어지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는 환관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좋 은 기회를 놓친 하진을 애석해하는 대신들에게도 이유는 있는 셈이 었다.
그밖에 조조가 보고 있는 또 하나 한실에 대한 위협은 세상이어 지러운 그 십여 년 동안 거의 도성의 군사력을 넘어설 만큼 강대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 지방의 군벌들이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모두 황 제의 부월(斧鉞)과 인수를 받아 떠난 장군들이었지만, 대개 변방 요새의 오랑캐들을 막기 위한 배치라 상대할 오랑캐들을 잘 아는 이들 을 보낸 만큼, 어느 정도 호화(胡化)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또한 대 개는 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랑캐들의 습속만을 보고 듣고 하는 사이에 더욱 호화된 그들의 심성에는 충성의 기반이 약했 다 거느린 장졸들도 오랫동안 오랑캐들과 이웃하여 사는 동안 그들 에게 동화되거나 바로 그 오랑캐들에게서 병사를 뽑아 호화가 심했 고, 더욱이 멀리 있는 천자의 명보다는 자기들의 우두머리를 위해 싸울 만큼 그 군벌의 사병(私兵)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서량 쪽에서 주로 강)족을 토벌하며 기반을 굳힌 동탁 과 유주 동북에서 선비(鮮卑), 오환(烏丸)을 상대로 세력을 기른 공 손찬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지만, 그들 외에도 거의 조정의 명이 도달하지 않는 상태의 군벌은 여럿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가 외척과 환관들의 싸움을 틈타 도성으로 군사를 몰아올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환관들의 발호(跋扈)나 외척 의 전횡과는 비교도 안 될, 바로 한나라의 목줄기에 비수를 들이대 는 일이나 다름없는 위협이 될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조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 서 타기 시작하는 야망의 불길을 느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곧 힘이 모든 것인 시절이 올 것이다. 힘이 바로 충성이고 힘이 대의명분인 시절이…………….”
그러자 문득 급히 해야 할 일이 떠올라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원래 조조 일가의 근거지는 패국 초() 땅이었다. 조조의 아버지 조(曹)도 그 아비 조등(曹)이 닦아둔 기반과 재물에 힘입어 도 성에 나와 살기도 했지만 항상 근거를 초현에 남겨두었고, 조조 또 한 그 점에서는 아버지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태 전 조숭이 일억만 전으로 삼공(三公)의 하나인 태위 자리를 사게 되면서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태위가 무거운 경직(京職)이니만큼 살림집을 도성 안에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조숭은 삼공에 어울리는 큰 저택을 마련 하고 가솔들을 모두 낙양으로 옮겨 앉게 했다. 그 무렵 동군(東郡) 태수의 자리에 있던 조조도 일시 관직을 사퇴하고 아버지가 비운 향 리(鄕里)를 대신 지켰으나 역시 이듬해 다시 전군교위로 낙양에 돌 아오게 되자 조조 일가는 온전히 낙양으로 옮긴 셈이 되고 말았다. 조조가 동군 태수 자리를 내던지고 훌훌히 고향으로 돌아가 보낸 일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부 친 조숭이 일억만 전을 들여 태위 벼슬을 산 때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일과 어떤 연관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관작을 사고파는 것 이 이미 흔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이기에 그처럼 높은 벼슬에 는 어울리지 못함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던 조조였다. 그런데 바 로 그 아버지가 환관으로 긁어모은 양부의 재물로 삼공의 자리를 샀 다는 일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짐작이 되는 것은, 그 일이 그 무렵 마지막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던 조조의 한 제국에 대한 충성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일에 대한 실망만으로 태수 자리까지 내던졌다고 보는 것은 뒷날로 미루어 조조를 너무 감상적 이고 나약하게만 해석하게 될 것 같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 일을 통해 자기가 나중 걷게 될 길을 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시 한번 점검해두었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하후연, 하후돈을 비롯한 생가 쪽의 피붙이들, 조홍, 조인을 비롯 한 양가 쪽의 피붙이들, 그리고 이전과 악진을 비롯한 유협(俠) 시 절의 패거리들, 그들은 모두 조조의 권유를 충실히 따랐다. 각기 황 건 토벌의 의군을 일으켰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잔당들을 핑계로 약간의 무력 기반을 연兗), 예() 일대에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몇 년 조조가 마지막이기에 더욱 뜨거운 충성으로 벼슬살이에 골몰 해 있는 동안 서로간의 연결이 끊기다시피 해 있었는데, 초현에서 보낸 일 년이 다시 조조와 그들을 굳게 묶어두게 해주었다.
조조가 다시 전군교위 직을 받아들여 낙양으로 돌아온 것은 그들 과의 연결이 예전처럼 회복된 뒤였다.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초땅 에 머물러 있다가 대세의 흐름을 바로 읽지 못해 시기를 놓치는 어 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조 조의 마음에는 한실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영 제의 죽음과 그에 따른 한차례의 혼란은 그 한 가닥 미련마저 끊어 버리고 만 셈이었다.
“아버님, 즉시 가솔들과 함께 초현으로 내려갈 채비를 갖추십시 오.”
조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조숭을 찾아보고 그렇게 입을 열었 다. 평소 아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어주는 조숭이었지만 그 말은 좀 뜻밖인 모양이었다. 아침 나절 궁궐에 변란이 일었다는 소문이 돌더니 다시 변란이 가라앉고 태자 변이 무사히 제위에 올랐다는 말이 들려 마음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이 어두운 얼굴로 낙향 준비를 하라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오늘 궁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우리가 그토록 급히 낙양을 떠나야 한단 말이냐?”
그 같은 조승의 물음에 조조는 간략히 그날 있은 일을 말한 뒤 한 결 어두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록 오늘 일은 건석 하나만의 죽음으로 끝났으나, 외정 대신들 의 미움과 백성들의 원망이 그대로 남아 있고, 하진 또한 귀가 엷어 남의 말을 잘 듣는 자입니다. 언제 황문(門, 환관 집안)에 피바람이 몰아칠지 모릅니다. 아버님께서는 마침 태위에서 물러나신 지도 여 러 달 되니, 이만 가솔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버려둔 옛 집과 전답을 돌보도록 하십시오.”
마음속으로는 달리 헤아리는 바가 있었지만, 말한다고 해야 조중 이 잘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함부로 입 밖에 낼 말도 못 되 는 일이라, 조조는 낙향의 이유를 그렇게 둘러댔다. 겁 많은 조중은 아들의 그 말만으로도 안색까지 변했다. 오갈 데 없는 환관의 자식 인 만큼 환관들의 일족을 멸한다면 자기 목숨도 남아날 리 없겠기 때문이었다. 조숭은 그 자리에서 가복들을 불러 초현으로 내려갈 채 비를 서두르라 일렀다. 그리고 조조까지도 함께 내려가기를 권했다.
“소자는 따로 이곳에 남아 할 일이 있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있 더라도 이 한 몸 빼내기는 어렵잖은 일이니 소자의 일은 너무 심려 마십시오.”
조조는 그렇게 조승을 안심시킨 뒤 첩 변씨(氏)의 방으로 건너갔다. 변씨는 마침 자신에게는 맏아들이 되는 세 살 난 비(조)를 재우고 있었다. 초현에 은거해 있을 때 얻었는데 태어날 때 수레뚜껑 같은 둥그런 푸른 기운이 아이를 감싸고 있어 보는 사람들이 한결같 이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반색하는 변씨의 인사말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한동안 잠든 아들 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제 자신이 가려고 마음먹는 길이 그 어린 것의 앞날에 어떤 삶을 가져다줄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어 서였다. 그러다가 바깥의 수런거림을 이상히 여긴 변씨가 몇 번이고 거듭 까닭을 물은 뒤에야 조용히 그 까닭을 일러주었다.
하지만 맨 먼저 황궁을 뒤흔든 회오리는 조조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을 만큼 엉뚱한 곳에서 일었다.
자신의 소생인 소제가 대위에 오른 다음 날 하태후는 오라비 하 진을 높여 참록상서(參錄尙書)로 삼고 나머지 공 있는 자들에게도 골고루 벼슬을 내렸다. 아직 나잇값을 못하는 황제를 대신한 섭정을 시작한 셈이었다. 그렇게 되자 영제의 생모요, 명분으로는 황실의 가장 큰어른이 되는 동태후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몰래 장양을 비롯한 몇몇 중상시를 불러 의논했다.
“하진의 누이는 원래 미천한 집 여식이었으나 내가 그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마침내는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식이 대위를 잇게 되자 방자함과 참람됨이 차마 눈뜨고 볼 수 가 없다. 그러함에도 내외정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저것들 남매에 빌 붙어 그릇됨을 바로잡으려 들지 않고, 저것들
의 위의(威儀)와 권세 또한 크고 무거우니 나는 장차 어쩌면 좋겠는가?”
그렇잖아도 하룻밤 새 천하를 앗겨버린 듯 허탈함에 빠져 있던 환관들은 동태후의 그 같은 물음을 받자 가시덤불 속에서 길을 찾은 듯이나 기뻤다. 장양이 곧 한 꾀를 내어 일러주었다.
“태후께서 우리 한실의 가장 큰어른이십니다. 아직 성상께서 연소 하시니 당연히 발을 드리우고 정사에 간여하실 수 있는[垂簾聽政] 권한이 있습니다. 내일로 그 영을 내리신 뒤에 먼저 황자 협을 왕에 봉하시고 또 국구 동중(董重) 그분께도 높고 힘있는 벼슬을 내리시 어 병권을 잡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저희들을 무겁게 써주신다면 큰일을 꾀해 안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동태후 또한 크게 기뻐하며 그 꾀를 따랐 다. 자신이 태황태후(太皇太后)임을 앞세워 다음 날로 수렴청정의 전 지(傳旨)를 내린 뒤, 황자 협을 진류왕(陳留王)에 봉하여 은근한 견 제 세력으로 삼고, 동중은 표기장군으로 불러들여 하진이 오로지하 고 있는 병권의 일부를 낫게 했다. 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 던 장양의 무리도 다시 중상시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케 했다.
명분으로는 어머니뻘인 동태후가 나서서 하는 일이라 하태후도 한동안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곧 한 꾀를 짜냈다. 잔치를 벌이고 동태후를 청해 공손한 말로 달래보는 일이었다. 어느 날 궁중에 술 자리를 차리고 동태후를 청한 하태후는 때를 보아 술 한잔을 받들어 올린 뒤 두 번 절하고 공손히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께 한 말씀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어리석다 물리치지 마시옵고 들어주시옵소서.”
“무엇이오?”
하태후가 전에 없이 자신을 낮추고 숙여오는 까닭이 석연치 않던 동태후가 의심스런 눈길로 물었다.
“태후마마와 이 몸은 비록 높임을 받는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한 낱 아녀자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조정의 정사에 간여하는 것은 마땅 한 일이 아닌 줄로 여겨집니다. 지난날 여후(后, 한고조의 비)께서 나라의 중한 권세를 잡으셨다가 끝내는 족중(中)천여 명이 도륙 을 당하신 참변도 있지 않사옵니까? 어리석은 소견이나, 마마와 소 비(小妃)는 아울러 구중 깊은 곳으로 돌아가고, 나라의 큰일은 대신 과 원로들이 의논케 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사옵니다. 부디 가볍게 듣지 마시옵소서.”
말투며 몸가짐은 한껏 공손해도 그 뜻에는 자못 위협까지 섞인 달램이었다. 이미 자신의 세상이 된 줄로 잘못 알고 있는 동태후가 그걸 참고 들어 넘기려 들 리 없었다. 대뜸 소리 높여 하태후를 꾸짖 었다.
“너는 전에 투기로 왕미인을 독살하더니, 이제는 감히 내게까지 어지러운 말을 하는구나. 네 아들이 대위에 오른 것과 네 오라비 대 장군 하진의 위세를 믿는 모양이다만, 나야말로 표기장군에게 조칙 만 내리면 네오라비의 잘린 목을 얻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는 걸 어찌 모르느냐?”
그렇게 되자 하태후도 참지 못했다.
“나는 좋은 말로 권한 것인데 마마께서는 무엇 때문에 도리어 그 리 화를 내십니까?”
“뭣이라고? 소 돼지나 잡아 팔고 지내던 하찮은 것들이 무얼 안다고 함부로 입을 여느냐?”
동태후는 더욱 화를 내서 소리쳤다. 하태후도 이미 좋게 끝나기는 틀렸다 싶은지 거침없이 대들었다. 그대로 두면 정말로 볼썽사나운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기세들이었다. 그러자 숨어서 보고 있던 환관들이 동태후를 말려 자신의 궁궐로 돌아가게 했다. 아직 제대로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하태후를 자극하는 것은 이롭 지 못하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하지만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은 말로 해결되기는 글렀 다고 단정한 하태후는 그날 밤으로 오라비를 불렀다.
“동가) 성을 쓰는 그 늙은 것이 권하는 술은 마다하고 기어 이 벌주를 마시겠다는구려. 급히 손을 써야겠소.”
하태후는 하진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 준 뒤 동씨 일족을 제 거하도록 시켰다. 하진도 그 일에서만은 자못 민첩하게 움직였다. 나오는 길로 삼공을 불러 대강 의논을 맞춘 뒤 이튿날 일찍 조회를 열었다. 그리고 동태후가 원래 번왕(蕃王)의 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황궁 안에 기거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상주케 했다. 영제 인 유굉(劉)이 해독정후의 아들로 환제의 뒤를 이었으므로 그 생 모인 동태후가 정궁(正)이 아닌 약점을 찌른 것이었다. 황제가 어 머니와 외숙부의 편을 들어 허락하니 동태후는 그날로 궁궐에서 쫓 겨나 하간 땅으로 옮겨졌다.
그다음은 동중의 차례였다. 앞서 동태후 덕분에 표기장군이 되고 약간의 병마까지 거느린 동중이라 가볍게 다룰 수 없었다. 먼저 금 군을 점고하여 동중의 부택宅)을 겹겹이 둘러싼 뒤 표기장군의 인수부터 빼앗게 했다. 그러나 동중은 이미 일이 위급함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군사들은 흩어진 뒤였다.
본래의 품성이 그러한지 정치적인 훈련 덕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권력의 단맛과 아울러 그 두려움도 안다. 그러나 여자는 한 번 권력의 단맛을 보면 그 두려움은 곧 잊어버린다. 그것이 어쩌다 권력 핵심에 접근하게 된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더욱 쉽게 걷잡을 수 없는 도취에 젖고 종종 처참한 파멸로까지 가게 되는 까닭일 것 이다.
하태후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기로 하고 본다면, 동태후의 경우 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수렴청정으로 대권을 잡게 된 것은 거의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음에도 한번 권력의 단맛을 보자 동태후 는 그 두려움을 깨끗이 잊어버렸음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앞뒤를 헤아리지 않은 도취로 가만히 두었어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친정집 을 하루아침에 폐허로 만들고, 그녀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 기 때문이었다.
하진이 보낸 사람에 의해 하간 땅 으슥한 곳에서 독살된 동태후 의 시체는 두 달 뒤 낙양으로 옮겨졌다. 남의 눈을 꺼린 하진은 턱없 이 후한 장례로 동태후를 높이고 문릉)에 들게 하지만, 그 어떤 것이 강요된 죽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겠는가.
한편 장양과 단규를 비롯한 환관의 무리는 믿던 동태후가 어이없 이 쫓겨나자 큰 두려움을 느꼈다. 동태후의 뒤에서 꾀를 댄 것이 바 로 자기들이란 걸 알면 이번에는 정말로 살아날 길이 없을 것 같았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건 나쁘건 꾀란 쓸수록 늘게 마련이다. 여럿이 머리를 맞댄 결과 다시 살아남을 궁리가 떠올랐다. 하진의 아우 가운데 어 리석은 주제에 욕심만 많은 하묘(何苗)란 자가 있다는 것과 또 콩, 팥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서도 딸인 하태후에게는 힘이 있는 늙 은 어미가 있다는 것을 이용한 꾀였다. 환관들은 딸 덕택에 무양군 (舞陽君)에 봉해진 하태후의 어미와 그 못난 아들에게 온갖 금은보 화를 싸들고 가 애걸했다.
“저희들이 동태후를 부추겼다는 것은 모두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 의 모함입니다. 부디 두 분께서 태후마마와 대장군께 아뢰어 이 미 천한 목숨을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싸들고 간 금은보화를 헤쳐 보이며 그들 모자 의 욕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 가져온 것은 황망한 김에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저희들의 작은 정성입니다. 이번에 살려만 주신다면 저희 모두의 땅과 집을 팔더라도 이 열 배로 은혜를 갚겠습니다.”
딸과 누이 덕분에 호강을 누린 지 오래인 그들이었지만 싸들고 온 것이 하도 엄청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일만 잘 이 루어진다면 그 열 배를 더 내놓겠다는 바람에 그들 모자는 앞뒤 헤 아릴 것도 없이 응낙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침저녁으로 태 후궁(宮)을 드나들며 십상시의 일을 좋게 말해 마침내는 그들의 질긴 목숨을 구해냈다.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울 때는 아까운 줄 모르던 재물이었으나, 살 았다 싶기 무섭게 환관 특유의 물욕이 되살아났다. 더군다나 무양군과 하묘 모자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면 아직도 바친 것의 열 배를 더 바쳐야 했다. 거기서 십상시들은 전보다 한층 이를 갈며 하진의 일 족을 없앨 궁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구실이 되어준 것이 바로 하진에 의한 동태후 독살이었다.
“하진 그 백정 놈이 짐독(鴆毒)으로 태후를 죽이고, 저도 낮이 없 는지 병을 핑계로 나다니질 않는다네. 좋은 기회일세. 놈이 한 짓을 널리 나라 안에 퍼뜨리세. 뿐만 아니라 놈은 대위(位)까지 넘보고 있으며, 우리를 그토록 죽이려 드는 것도 우리가 충성으로 사직을 버티고 있어 대사를 도모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이세 일이 잘되면 외정의 대신들이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놈을 몰아내 는 수도 있고, 일이 못 되어도 하진 그놈이 우리를 함부로 죽이려 들 지는 못할 것이네.”
대강 그렇게 의논을 맞춘 십상시는 그날부터 몰래 자기 편 사람 을 풀어 그런 말을 퍼뜨리게 했다.
세간에 떠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유언비어라 한다. 그런 유언비어 가 떠돌게 되는 원인은 두 가지로, 하나는 정치적 폭력에 의해 언로 (言路)가 막혀 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성을 공적으로 확보 하지 못한 집단 또는 개인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쓰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 어느 편도 진실보다는 퍼뜨린 자 또는 조작한 자의 주 관과 목적에 더 충실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정의감에 의해서든,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든, 또는 정치적 폭력을 겁내서이건, 자기를 드러내면 금세 그 목적이 탄로날까 두려워서이건, 그 근원이 뚜렷하지 않은 이상 진실 여부에 대한 토론이나 비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듣는 사람이 좀 이상하게 느껴져도 전하 는 사람 또한 들었을 뿐이기 때문에 진실을 따져 물을 수가 없어서 이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유언비어를 들어도 전하지 않는다. 진 실은 확인할 길이 없고, 꾸며댄 자나 퍼뜨린 자의 주관과 목적만 되 풀이 강조되는 그런 종류의 뜬소문을 다시 전하는 것은, 잘해야 용 기 없는 정의의 주관에 뇌동하는 것이 되고 자칫하면 악당을 쓰러뜨 리기 위한 다른 악당의 계교를 도와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민중들에게는 생각 밖으로 위력적인 것이 또한 이 유언비어이다. 퍼져나가는 동안의 알 수 없는 자가증폭의 속성은 때 로 선동력으로까지 커져 어줍잖은 이 기폭제로도 강력한 권력 집단 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는 까닭이다.
십상시가 노린 것은 바로 그 같은 백성들의 우매함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계책은 잘 들어맞아 며칠도 안 돼 하진에 대한 나쁜 소 문은 엄청나게 부풀려진 채 낙양성 안에 널리 퍼졌다. 실로 귀 뚫린 자 치고 그 소문을 듣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 였다.
그렇지만 하진 쪽이라고 아주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변변찮은 데다 천성까지 모질지 못해 동태후를 죽인 뒤로 한동안은 병을 핑계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하진에게 어느 날 원소가 찾아왔다.
“장양과 단규의 무리가 대궐 밖으로 고약한 소문을 퍼뜨려 명공이 동태후를 독살하고 큰일을 꾸민다고 모함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그런 환관의 무리를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뒷날의 큰 화가 될 것입 니다. 지난날 대장군 두무가 저들을 없애려 했으나 일을 꾸밈이 치 밀하지 못해 도리어 그들에게 화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명공의 형제와 따르는 장리(將吏)들은 한결같이 영준한 선비들이니 만약 힘 을 다하신다면 능히 저 수염 없는 간적奸)들을 쓸어버릴 수 있습 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호기이니 결코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원소는 먼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전한 뒤 다시 한번 하진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하진은 소나 돼지를 잡으며 살 때는 좋은 백정 노릇을 했는지는 몰라도 사람 잡는 일에는 그리 솜씨가 좋지 못했다. 동태후와 그 친정의 권속들을 죽인 일만으로도 떨떠름해 있 는데 원소가 와서 그렇게 말하니 환관들의 하는 짓이 괘씸하기는 하 나 또다시 자기 칼에 사람 피를 묻히는 일이 그리 마음에 내키지 않 았다. 거듭 재촉을 받고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원소에게 말했다.
“환관들을 죽이는 것은 적지 아니한 나라의 일이니, 먼저 태후마 마와 상의한 뒤에 처리하겠네.”
하지만 이때 이미 환관들의 간교한 손길은 하진의 집안에까지 뻗 쳐 있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 가운데 하나가 몰래 그 일을 장양의 무 리에게 전했다. 진작부터 그런 일이 있을 줄 짐작하고 있던 환관들 은 재빨리 손을 썼다. 하진의 아우 하묘에게 전보다 한층 많은 뇌물 을 보내며 도움을 청했다.
새는 모이를 탐하다가 그 목숨을 잃고 사람은 재물을 탐하다가 그 몸을 망친다던가. 하묘도 그 일이 종당에는 제형 하진뿐만 아니 라 제 목숨까지 상하게 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환관들의 심부름꾼이 재촉할 필요도 없이 궁중으로 달려가 누이인 하태후에게 제형을 헐 뜯었다.
“형님은 새 성상을 도와 너그럽고 어진 정사를 펼 생각은 않으시 고, 사람 죽이는 일에만 힘을 쏟고 계십니다. 지금은 또 아무 까닭 없이 십상시를 모조리 죽여 없앨 것을 꾀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런 다음 더욱 간곡하게 덧붙였다.
“저 십상시는 누님이 오늘 이 자리에 오르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 라 궁궐 밖에 있는 어머님과 제게까지도 예를 극진히 했습니다. 지 금 형님께서 믿고 계시는 조정 대신들이란 작자 중에 어머님과 제게 쌀 한 톨베 한 자투리 보내준 자가 누가 있습니까? 언제나 허울 좋 은 가문이란 걸 앞세워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들이 바로 그들 아닙니 까? 그런데도 형님께서는 그들 말만 듣고 십상시를 해하려고만 드 십니다. 부디 말려주십시오. 이건 이 아우의 청일 뿐더러 어머님의 간곡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머니 무양군까지 업고 나오니 하태후는 다시 그 말에 따랐다.
잠시 후 태후궁에 나타나 환관들의 죄상을 밝히고 그들을 주살하자고 주장하는 하진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외정과는 무관하게 금궁禁) 안은 환관들이 다스려온 것이 한실의 오랜 관례입니다. 아직 선제께서 세상을 버리신 지도 오래지 않은 터에 선제께서 아끼며 부리던 신하들을 죽이시면 종묘를 가벼이 여긴다는 욕을 먹기 십상입니다. 오라버님, 사람 죽이는 일 은 이제 그만 그치십시오.”
본시 결단력이 없는 데다 태후까지 그렇게 나오자 하진은 다시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몇 마디 우물거리다가 태후궁을 나오고 말 았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문밖까지 나와 돌아오는 하진을 맞은 원소가 궁금한 낮으로 결과 를 물었다. 나갈 때는 제법 일을 벌일 기세였던 터라 약간 무안해진 하진이 힘없이 대답했다.
“태후마마께서 도무지 허락하지 않으시니 어쩌겠나? 좀더 두고 보세.”
하지만 원소도 집요했다. 환관들에 대한 미움이 대대로 쌓여온 명 문 출신인 탓인지, 그들에 대한 원소의 적개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 다. 쉽게 단념하지 않고 다시 꾀를 내 하진을 충동했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널리 사방의 영웅들을 불러들여 그들이 끌고 온 군사들로 환관들을 베어 죽이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일이 다급하니 태후께서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 니다.”
결단성 없는 하진이 그 말에 다시 마음이 움직였다. 남의 칼을 빌 려 사람을 죽이는 격[借刀殺人]이라 할까, 자신은 슬그머니 빠지고 천하 영웅들의 공분에 의지해 환관들을 몰살시킨다는 원소의 계책이 자못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그거 참으로 묘책일세. 그럼 여럿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세.”
그렇게 말한 뒤 여러 대신을 불러 모으고 원소가 내놓은 계책을 의논케 했다. 주부(主簿) 진림(陳琳)이 일어나 말했다.
“아니 됩니다. 거리의 말에, 눈을 가려 참새나 제비를 잡으려는 것 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새나 제비 같은 미 물을 잡는 일도 속여서는 뜻을 이룰 수 없는데 하물며 나라의 큰일 이겠습니까? 이제 대장군께서는 황실의 위엄에 의지해 병권을 잡으 셨고, 용양군(龍驤軍) 호보군(虎軍) 그 어떤 쪽이든 높고 낮은 이가 다 마음으로 그 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대장군께서 환관들을 주살하시려 든다면 그 일은 마치 큰 화로에 머리터럭을 태우는 일이나 같습니다. 일을 빨리 결단하시어 나라로 부터 받은 대권으로 처단하신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따를 것입니 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바깥에 있는 영웅들에게까지 격문을 띄워 그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웅들이 부름을 받 고 모여든다 해도 먹은 마음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이른바 칼자루 와 창자루를 거꾸로 잡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야말로 어떻게 일을 수습하시렵니까? 공(功)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난리를 청한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못 조리에 닿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 손에 피 안 묻히고 적을 제 거한다는 원소의 발상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하진은 진림의 말을 그리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
“그건 겁 많은 자의 생각일세. 아무려면 그런 일이야 벌어지겠는가?”
하진이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모인 이들을 둘러보는데 문득 한사람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높고 비웃는 듯해 노한 눈으로 보니 조조였다.
부름을 받았으니 오기는 해도 원래 조조는 되도록이면 그 자리의 의논에 나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지난번 소제의 즉위를 앞뒤로 한 소동 때, 황문 출신인 자신에 대한 대신들의 감정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확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한 제국의 회생에도 이미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은 터라 하는 꼴들을 구경이나 하겠다 는 기분으로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계책이 발상 자체가 너무 엄청나고 따르는 위험이 너무 많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진림이 말하는 혼란 이외 환관에 대한 무차별 학살의 위험까지 뒤따랐기 때 문이었다. 어떻게든 진림을 도와 원소의 계책대로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먼저 상대를 격동시켜 놓는 일이다. 조조가 여러 사람을 비 웃듯 높은 소리로 껄껄거린 것 또한 먼저 그들의 주의를 끌고자 함 이었다.
“맹덕이 지나치구나. 어찌하여 그토록 안하무인인가?”
과연 하진이 노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이 일은 마음만 먹으면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쉬운 일인데 무엇때문에 이렇게 여럿이 모여 떠들어댈 필요가 있습니까?”
조조는 그렇게 한 번 더 좌중을 충동한 뒤 낭랑하게 뒤를 이었다. “환관의 화는 옛부터 있어온 일로 나라의 주인 되는 이가 그들에 게 지나친 권세를 주고 총애한 탓에 오늘 이 꼴이 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아끼시던 선제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새 황제 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권세도 총애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의 지난 죄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우두머리 되는 못된 것들만 국 법에 따라 다스릴 일이니, 형옥(刑獄)을 맡은 벼슬아치 하나만으로 도 넉넉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바깥의 군사들까지 도성으로 불러들여 번거롭게 만들 까닭이 무엇 있습니까? 더군다나 환관을 모조리 죽이시려면 죄 없는 희생도 크려니와 일이 사전에 새어나가게 됩니다. 힘없는 필부라도 죽기로 싸우면 꺾기에 힘이 드는데, 하물며 수십 년 권세 를 누려온 그들이겠습니까? 제가 헤아리기에는, 만약 그들이 그동안 쌓인 힘을 모두 합쳐 일시에 짓쳐나오면 오히려 지는 것은 이쪽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하진은 더욱 화가 났다. 이치를 따져보기도 전에, 저를 얕 보는 듯한 조조의 끝맺음이 그대로 하진의 속을 뒤집어놓은 까닭이 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성난 목소리로 조조를 꾸짖었다.
“네놈의 할애비가 환관이니 너 또한 딴 뜻을 품고 있구나. 네놈은 우리를 방해하러 왔느냐? 아니면 정탐하러 왔느냐? 얼른 물러가지 못할까.”
그렇게 되면 더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조조는 소매를 떨 치고 그 자리를 나서며 홀로 탄식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할 자는 바로 이 하진이리라…….”
하지만 일은 끝내 원소가 뜻한 바대로 되어갔다. 하진은 기어이 반대를 물리치고, 그날 밤으로 몰래 여러 진장(將, 지방의 군벌)들에 게 사람을 보냈다.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와 간악한 십상시를 제거하라는 밀조를 받든 사자들이었다.
이때 동탁은 서량 자사(史)로 있었다. 황건란에서는 이렇 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해 한때 조정에서는 그 죄를 물으려 한 적이 있었으나 십상시에게 뇌물을 바쳐 겨우 죄를 면한 뒤 다시 조정 고 관들의 환심을 사얻은 자리였다.
원래 동탁에게 장수로서 명성을 드날릴 수 있게 해준 것은 변방 의 오랑캐, 특히 강족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들과 가까이 지내 그들 의 습속이나 계략에 밝은 덕분으로, 이미 말한 대로 동탁은 그들과 의 크고 작은 백여 번의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반면 동탁은 한인들과의 싸움에서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황건란 이 그 한 예로 난리의 주역이 한인들이 되자, 열 번 싸워 일고여덟 번은 지는 꼴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았다.
하지만 한번 서량으로 돌아가자 그는 옛날의 위세를 되찾았다. 서 량은 강인(人)들과 가까운 곳으로 거기는 옛날에 알려진 이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변방인 까닭에 의심받지 않고 이십만의 대군을 기 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은 강족을 비롯한 인근 오랑캐 출신으 로 뽑아, 한나라의 군사들이기보다는 동탁의 사병이라고 불러도 좋 을 군사들이었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자신의 힘과 야심은 일쑤 비례한다. 동탁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하동 태수 시절부터 탐욕과 야심을 키워가던 그는
다시 자신의 근거지라고 할 수도 있는 서량에서 한나라보다는 자기 자신에 충성하는 이십만장을 거느리게 되자 더욱 대담해졌다. 동탁은 군사만 기를 뿐만 아니라 당대의 재사)인 이유(李儒) 를 사위로 맞는 등 제법 모사까지 갖추었다. 그리고 천하를 꿈꾸며 은근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동탁에게 하진의 밀사는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날로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사위인 중랑장 우보 (牛)에게 근거지인 섬서(西)를 지키게 한 뒤 스스로 이각(李傕), 곽사정사 『삼국지』에는 곽범(氾)으로 나온다. 그러나 『자치통감』과 『연 의』에서는 곽사로 나오고 일반에게도 곽사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대로 쓴다), 장제(濟), 번조(稠) 네 장수와 휘하의 군마를 이끌고 낙양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또 다른 사위인 모사 이유가 그런 동탁에게 권했다.
“비록 밀조를 받았다고는 하나, 그 내용에는 이상하고 애매한 곳이 많습니다. 낙양에 들기 전에 표문을 올려 이번 입경(京)이 황제 의 명에 따른 것임을 널리 알림과 아울러 장군의 충정을 앞세우십시 오. 그렇게 되면 대의명분도 서고 의심도 받지 않을 것이니 어렵지 않게 큰일을 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밀조에 대한 의심은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그걸 받은 대 부분의 제후 진장(鎭將)들도 마찬가지였다. 환관들 몇을 잡아 죽이 기 위해 변방과 주군의 대군을 도성으로 부르는 까닭이 도무지 이해 가 되지 않았다. 기껏 짐작한댔자 외척과 환관들의 싸움이 다시 불붙었구나, 싶은 정도였다.
따라서 동탁을 뺀 나머지는 선뜻 군사를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일부는 힘이 있으면서도 자신 의 근거지를 떠나 거센 도성의 권력 싸움에 말려들기 싫어서였다. 자칫 그 소용돌이에 휩싸여 억울한 희생이 되느니보다는 멀리서 형 세를 관망하며 자신의 힘이나 길러두자는 속셈이었다. 동탁 못지않 은 실력을 가지고도 여전히 자신의 근거지에서 움직이지 않은 공손 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동탁도 밀조를 호기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기는 했으나, 명분이 개 운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사위 이유가 그렇게 권해오니 됐다 싶었다. 당장에 좌우를 재촉하여 도성으로 올릴 표문을 닦게 했다.
‘듣기로 천하의 어지러움과 거스르는 일이 그치지 않는 것은 모두 가 황문의 상시장의 무리가 하늘의 떳떳한 도를 업신여기 고 욕되게 한 탓이라 합니다. 신의 생각에 솥의 물이 끓어 넘치는 것 을 멈추게 하는 수로는 아궁이에서 불붙은 장작을 들어냄보다 나은 게 없고, 또 고름이 든 종기를 찢는 것이 비록 아프기는 하나 몸속에 독을 기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에 감히 신 동탁은 종과 북[鐘鼓, 여기서 좋은 군사를 거둘 때 두드리 는 타악기. 쇠북]을 울리며 낙양으로 올라가 장양의 무리를 없애고자 합니다. 사직에 큰 다행이고 천하에 큰 다행이고자 할 따름이오니 헤아려주시옵소서.’
그리고 날랜 말을 내어 하진에게 표문을 전해 올리게 했다.
하진은 동탁의 그 같은 표문을 받자 모든 대신들에게 보이고 의 견을 물었다. 갑자기 방안의 공기가 무겁고 어둡게 바뀌는 가운데 시어사 정태(鄭)가 일어났다.
“동탁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은 자입니다. 도성에 들게 되면 반드 시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
마침 그곳에 나와 있던 노식(盧植)도 격한 정태의 말을 거들었다.
“이 식도 동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착해 보이나 마음속 은 검기가 이리와 다름없습니다. 한번 대궐 안에 발을 들여놓는다면 반드시 근심과 화가 뒤따를 것입니다. 군사를 멈추고 도성에 들지 않게 하여 새로운 난리가 이는 걸 면하는 편이 옳습니다.”
그러나 하진은 끝내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동탁을 맞 을 준비를 하게 했다. 그러자 정태와 노식이 나란히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고, 이어 대신들도 태반이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동탁의 흉포 함을 싫어함이 대개 그러하였다.
표문과는 달리 동탁의 속셈이 음험한 것은 이내 드러났다. 하진은 동탁의 군사를 맞으러 민지(池)란 곳까지 사자(使者)를 보냈으나, 동탁은 그곳에 군사를 멈추게 하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때 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헤아린 까닭이었다. 조용한 도성에 군사를 몰 고 들어가 환관들을 죽이다가 자칫 자신이 되말려 어려운 처지에 빠 질 것을 염려한 듯했다.
과연 오래잖아 일은 동탁의 뜻대로 발전해갔다. 나라 바깥 군사들 이 도성 부근에 당도했다는 걸 알자 환관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진이 꾸민 일이다. 우리가 먼저 손을 써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모두가 멸족의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양의 무리는 그렇게 의논을 맞춘 뒤 하진 죽일 일을 꾸몄다. 먼 저 장락궁(長樂) 가덕문(德門) 안에 칼과 도끼를 든 장사 오십여 명을 숨겨둔 뒤 떼를 지어 하태후를 찾아갔다.
“방금 대장군께서는 저희 무리를 죽이고자 외병을 경사(京師)로 불러들이셨습니다. 바라옵건대, 태후마마께서는 다시 한번 저희 무 리를 가엾게 여기시어 목숨이나마 보전하도록 해주옵소서.”
환관들은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애걸했다. 하태후도 외 방의 군사들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오라비의 결심이 굳은 것은 짐작 했으나, 장양의 무리가 울며 애걸하는 꼴을 보니 슬몃 애처로운 마 음이 일었다. 그런 상반된 마음을 절충한 의견을 내놓았다.
“대장군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다면 정말 예삿일이 아니다. 차라리 너희들이 직접 대장군의 부중으로 찾아가 빌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장양이 무리를 대신해 대답했다.
“만약 저희들이 그리로 갔다가는 뼈와 살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정히 저희 무리를 구해주려 하시면 오 히려 태후마마께서 대장군을 부르시어 그만두라는 분부를 내리시는 편이 옳습니다. 그래도 대장군께서 따르지 않으신다면 저희 무리는 다만 태후마마 앞에서 죽기를 빌 따름입니다.”
그리고 다시 간사한 눈물을 찍어댄다. 그 눈물 뒤에 감추어진 끔 찍한 음모를 알 리 없는 태후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전지를 내려 하진을 태후궁으로 불러들였다.
태후의 전지를 받자 하진은 아무런 생각 없이 홀로 입궁할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 주부 진림이 나서서 말했다.
“태후마마의 부르심 뒤에는 반드시 십상시의 못된 꾀가 숨어 있 을 것입니다. 결코 가서는 아니 됩니다. 가시면 반드시 화를 당하시 게 됩니다.”
“태후께서 나를 부르시는데 가면 화를 당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하진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곁에 있던 원소도 진림을 거들었다.
“이제 저들을 죽이려던 계책이 새어나가 이미 겉으로 드러났는데, 그래도 대장군께서는 저들의 소굴이라 할 수 있는 궁궐 안으로 혼자 가시겠습니까.”
조조도 곁에 있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정히 가시려면 먼저 십상시를 밖으로 불러내신 뒤에 궁 안으로 드십시오.”
번번이 면박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나선 이유는 태후의 그 부름에 는 너무나도 짙게 음모의 냄새가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진은 껄껄 웃으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린아이 같은 소리다. 지금 천하의 병권이 모두 내 손아귀에 있는데 십상시 따위가 감히 나를 어쩐단 말이냐?”
원소가 다시 진지한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대장군께서 굳이 가시겠다면 저희들이 갑사(甲)들을 이끌고 호 위하며 따르겠습니다. 예측하지 못한 변을 막고자 함입니다.”
좌우가 한결같이 그렇게 권하자, 하진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 았다. 이에 원소와 조조는 각기 자신이 거느린 사예(司隷), 전군(典 軍) 두 교위 휘하에서 정병 오백씩을 뽑아 호분중랑장인 원술에게 맡겼다. 그리고 원소와 조조는 나란히 칼을 차고 하진을 호위해서 궁으로 향했다.
원술이 이끄는 일천 군사는 청쇄문(靑鎖門)에 이르러 멈춰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나 원소와 조조는 장락궁 앞에 이를 때까지도 좌우에 서 하진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궁문까지 함께 지나려 할 때 였다. 궁문을 지키던 환관이 조조와 원소의 앞을 가로막았다.
“태후마마께서 특히 전교를 내리시어 대장군 외에는 아무도 들지 못하게 하라 이르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원소와 조조도 더는 하진을 호위할 수 없었다. 하진 은 끝내 홀로 장락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궁문을 지나 가덕전(德殿) 앞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하진은 자 못 당당했다. 주위의 우려와는 달리 거기까지 이르도록 아무 일이 없자 마음이 놓인 까닭이었다. 누가 감히 나를 다치랴 하는 듯 거드 름까지 피며 한껏 고개를 젖히고 걸었다.
그러나 미처 가덕전 안으로 들기도 전에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 떼의 환관들이 쏟아져 나와 하진을 둘러쌌다. 하진이 놀라 살피니 장양과 단규의 무리였다.
“하진은 듣거라. 동태후께 무슨 죄가 있어 네놈이 감히 짐독으로 해쳤으며, 국모의 상을 당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아니함은 또 어 찌 된 일이냐? 거기다가 네놈은 본시 소 돼지나 잡아 팔던 하찮은 무리로 우리가 힘써 폐하께 추천한 덕에 오늘의 영화와 부귀를 누리 게 되었건만,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해치려 드 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듣기로 네놈은 매양 우리를 탁한 무리라 하였다는데 그렇다면 맑은 자는 누구냐? 네놈이라도 된단 말이냐?” 장양이 앞서서 그렇게 하진을 꾸짖었다.
당황한 하진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정신 없이 달아날 길을 찾기에 바빴으나 사방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힌 뒤였다. 거 기다가 환관들의 명을 받고 숨어 있던 갑사들이 일시 내달아 치니 원래 무예가 변변찮은 하진이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잠깐 사이에 하진의 몸은 두 동강이가 나 가덕전 앞을 뒹굴게 되고 말았다. 뒷사 람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한실이 기울고 천수가 다하니 漢室傾危天數終
꾀 없는 하진을 삼공으로 삼았구나 無謀何進作三公
충간을 듣지 않기 몇 번이던가 幾番不聽忠臣諫
마침내 궁 안에서 칼끝에 죽었네 難免宮中受劍鋒
한편 원소는 하진이 이미 환관들에게 죽음을 당한 줄도 모르고 여전히 궁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하진이 나오 지 않자 문 안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때가 너무 오래됐습니다. 대장군께서는 이제 그만 나오셔서 수레에 오르십시오.”
그런데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담 너머로 하진의 잘린 목이 던져져 나온 일이 그랬다. 이어 담 안에서 장양이 높은 소리로 미리 꾸며둔 황제의 고유문을 읽었다.
“하진은 모반을 꾀하다가 이미 복주(伏誅)를 당했다. 그밖에도 돕 고 따른 무리가 있으나 모두 너그러이 용서하노니 일후로는 아무도 경동치 말라.”
걱정은 하였으나 막상 당하고 보니 실로 어처구니없었다. 원소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청쇄문으로 달려가 데려온 군사들에게 소리 쳤다.
“환관들이 대신을 함부로 모살했다. 그 못된 무리를 뿌리 뽑고자 하거든 모두 나와 싸움을 도와라!”
먼저 하진의 부장 오광(吳匡)이 노해 청쇄문에 불을 지르고 안으 로 뛰어들고 이어 원소가 거느린 일천 군마도 또 다른 궁문을 깨뜨 리고 장락궁 안으로 짓쳐들어갔다.
“환관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그 모든 장졸을 통괄하게 된 원소가 높이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그 말을 받든 장졸들은 환관들로 보이면 늙고 젊음을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대로 목을 베었다. 그 바람에 환관이 아닌 궁인들도 수염 이 없거나 어깨가 솟은 자는 모조리 죽음을 당해 삽시간에 장락궁은 시체로 뒤덮인 피바다로 변했다.
원소는 문지기의 목을 베고 내궁(宮)까지 들어가 십상시 가운데 조충(趙忠), 정광(程曠), 하운(夏惲, 곽승 넷을 잡아 취화루(翠花樓) 아래로 끌어내었다. 그리고 여럿이 보는 앞에서 그 목을 잘라 높이 매달고 몸은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 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거기다가 누군가에 의해 치솟는 불길과 놀란 궁녀들의 비명 소리로 장락궁은 그대로 피바람이 몰아치는 아비규 환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드센 악운이 끝나지 않았는지 십상시의 우두머 리인 장양과 단규(段), 조절(曹節), 후람(侯覽) 등은 거기서도 무사 히 몸을 빼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린 황제와 진류왕 협 및 하태 후를 겁박하여 내성(內省)을 버리고 북궁(宮)으로 달아나려 했다. 궁중에 그 같은 변란이 일 무렵 노식은 아직 낙양에 머물러 있었 다. 비록 벼슬은 버렸으나 대궐에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갑주를 꿴 뒤 창을 잡고 대궐로 달려갔다. 불붙는 청쇄문을 지나 한곳 전각 아래 이르렀을 때였다. 중상시 단 규가 하태후를 윽박지르며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것이 보였다.
“단규 역적 놈아, 네 어찌 감히 태후마마를 핍박하느냐?”
노식이 창을 꼬나잡으며 크게 외쳤다. 놀란 단규는 태후를 내버리 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 태후도 급한 김에 전각의 높은 창으로부터 몸을 던졌으나 노식이 급히 달려가 받아 모신 덕분에 무사히 환관들 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하진의 부장 오광은 졸개들과 함께 닥치는 대로 내시들을 베며 내정(內廷)으로 뛰어들다가 마침 칼을 들고 들어오는 하묘(何 苗)를 만났다. 하묘가 한 짓을 들어 알고 있는 오광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놈도 환관들과 공모하여 우리 대장군을 죽게 했으니, 마땅히 환관들과 함께 죽어야 하리라.”
주위의 군사들도 입을 모아 소리쳤다.
“원컨대 형을 해친 도적의 목을 베소서.”
겁에 질린 하묘는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겹겹으로 둘러싸인 뒤였 다. 발악도 잠시, 주인의 원수를 갚으려는 장졸들에게 베이고 찍히 어 형태도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그 마당에 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재물을 탐하다가 하나뿐인 형을 죽이고 마 침내는 저마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