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6화 : 황건의 회오리 드디어 일다
황건의 회오리 드디어 일다
후한 중평(中) 연호를 쓰던 첫해, 생각 깊은 선비들이 전부터 걱 정해오던 대로 태평도(太平道)의 무리가 한꺼번에 들고일어났다. 원래 도가는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 하여 학술의 한 갈래, 특히 노자(老子)의 정치론을 그 가르침의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대에 이르면 도류(道流)들은 그런 가르침을 도외시한 채 실제로 신선을 구하고 영단(丹)을 만드는 방사(方)들로 변해 노자는 대 개 자신을 높이고 신비화시키는 데만 이용했다. 그러다가 후한 말에 이르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잡다한 민간 신앙과 결합되어 도교(道 敎)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계통은 크게 두 갈래였다.
그 하나는 후한 순제(順帝) 때에 창시된 장릉의 오두미도(五 斗米道)였다. 장릉은 촉(蜀)에 머물면서 곡명산(鵠鳴山)에서 도를 깨쳤다고 하는데, 스스로 부서(符書)를 지어 사람의 병을 고치고 못된 귀신을 쫓는다고 백성들을 홀리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오두미도 란 그가 입도자(道者)에게는 반드시 쌀 닷 말을 바치게 한 데서 비 롯된 이름으로,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들을 미적(米賊)이라고 부르 기도 했다. 장릉은 아들 장형(張衡)에게 자신의 도를 전하고 장형은 다시 아들 장로(張魯)에게 전하여 한중(中) 지방에서 세력을 떨 쳤다.
다른 한 갈래는 바로 태평도였다. 장릉과 같은 시대에 낭야() 사람으로 우길(吉)이란 도사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 신서(神書) 백 여권을 하늘로부터 얻었다 하여 태평청령도(太平靑領道) 또는 태평 경이란 이름으로 가르침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음양 과 재이(災異)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뿌리를 같이하는 그런 가 르침들이 처음부터 태평도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은 거록(鉅 사람 장각(角)에 의해서였다.
장각은 원래 학업을 닦아 벼슬길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관리에 뽑 히지 못하자 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는 걸 생업으로 삼았다. 어느 날 우연히 산속에서 한 늙은이를 만났는데 눈은 푸른빛이 돌듯 맑고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홍조를 띠고 있었다. 손에 든 명아주 지팡이 [靑藜杖]와 더불어 한눈에 여느 늙은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하 는 생김이요 차림이었다.
장각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자 노인이 문득 청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장각이 공손히 그 부름에 따르니 노인은 장 각을 어떤 동굴로 데려가 책 세 권을 내주며 일렀다.
“이 책의 이름은 『태평요술(太平要術)』이라 한다. 네가 이 책을 얻 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려니와 너는 마땅히 이 책을 익혀 널리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하라. 만약 딴 뜻을 품으면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하 리라.”
이에 장각이 공손히 절을 올린 뒤 성명을 물었으나 노인은 다만 스스로를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고만 밝히고는 한 줄기 맑은 바람 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그때 장각이 얻은 천서(天書)가 바로 『태평경 (太平經)』이었다. 그 책을 주고받는 동안의 신비한 얘기는 아마도 장 각이 산속을 헤매다 만난 어떤 방사)로부터 『태평경』을 얻게 된 경위를 그럴듯하게 꾸민 것이리라.
그 뒤 장각은 그 『태평경을 밤낮으로 읽어 부적으로 사람의 병을 고치는 법과 여러 가지 천재지변을 막는 법 등을 익히니, 사람들은 그를 비를 부르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도인으로 우러르게 되었 다. 이에 힘을 얻은 장각은 스스로를 태평도인(太平道人)으로 일컫고 그 가르침을 태평도라 하여 널리 세상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관리와 도적들에게 시달리고 잦은 천재지변과 질병에 고통당하는 백성들이 무리지어 그를 따르자 스스로를 대현량사( 賢良師)로 높이고 오백 제자를 골라 더욱 널리 자기의 가르침을 전 하게 했다. 그 오백 제자는 모두 『태평경』의 가르침을 익힌 자들로, 능히 부적 태운 물[符]로 사람을 치료할 줄 알았다.
대개의 종교적인 치료가 그렇듯이 부적을 태운 물로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것도 일종의 심리 요법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가슴에 여러 가지 사술로 믿음의 환상을 심어 거기에 의지해 질병을 극복할 정신력을 끌어냈다. 거기다가 설령 병이 낫지 않아도 그들을 의심할 수 없게 한 것은 그들이 미리 꾸며놓은 말의 농간이 었다. 부적을 태운 물을 마시기 전에 믿는 마음이 없는 자는 그걸 마 셔도 낫지 않는다는 방패막이를 해두고, 또 함께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며 그 회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둠으로써, 병이 낫 지 않아도 원망받지 않고 빠져나갈 길을 미리 터두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 백성들은 태평도만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겨 그들을 따르는 무리는 날로 늘어갔다. 남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다는 식에서, 남이 열심이니까 나는 더욱 열심히 하는 식으로, 사이비 종 교 집단에서 흔히 보는 믿음과 열기의 상승 효과도 그런 그들의 세 력이 한층 빠르고 널리 퍼져나가는 걸 도왔다. 그리하여 광화 육년 의 대기근과 중평 원년의 대역질(大疫疾)을 겪는 동안 태평도의 무 리는 수십만에 이르게 되었다.
장각은 이에 다시 전국에 서른여섯 방(方)을 두고 각기 거수
라는 우두머리를 세웠는데 방은 큰 것이 만여 교도를 거느렸고 작은 것도 육칠천은 되었다.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蒼天已死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黃天當立
때는 바로 갑자년 歲在甲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天下大吉
라는 자기들끼리 몰래 부르던 노래가 거리의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공공연히 불려지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거기다가 또 장각은 교 도들에게 집집마다 대문에 갑자(甲子)라는 두 자를 백토(白土)로 쓰 게 하니 청주(州), 예주(州), 유주(幽州), 서주(徐州), 기주(冀州), 형주(州), 양주(揚州), 연주兗州) 여덟 주(州)는 집마다 갑자 두 자 가 대문에 씌어지다시피 했다. 『태평경』을 전해준 노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장각은 진작부터 품고 있던 딴마음을 드디어 겉으로 드러 낸 것이었다.
“무릇 얻기 힘든 것이 민심이다. 그런데 이제 민심이 이미 우리를 따르니, 만약 이 기세를 타고 천하를 얻지 못한다면 어찌 애석한 일 이 아니겠는가.”
장각은 아우 장보(張寶)와 장량(張梁)에게 그렇게 속을 털어놓은 뒤 먼저 자신이 신임하는 마원의(馬元)란 자에게 금과 비단을 듬 뿍 싣고 도성으로 떠나도록 했다. 그 금과 비단으로 십상시(常侍) 가운데 하나인 봉서(封諝)와 그 무리를 매수하여 일이 벌어지면 궁 궐 안에서 호응케 할 작정이었다.
처음 한동안 일은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업성(城)에 자리를 잡은 마원의는 금과 비단을 풀어 탐욕스런 환관들의 환심을 사기에 성공했다. 이에 힘을 얻은 장각은 한편으로는 수많은 누른 깃발을 만들게 하고 한편으로는 아끼는 제자 당주(唐州)를 보내봉 서 등에게 직접 밀서를 내렸다. 난이 성공한 뒤의 보답에 대한 약속 과 아울러 거사할 날을 잡아 알린 편지였다.
그런데 그 마지막 고비에서 일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제자 당주가 마음이 변해 밀서와 함께 태평도 무리들의 변란 계획을 낱낱이 일러바친 일이 그랬다.
이에 놀란 황제는 하(何) 황후의 오라비인 대장군 하진(何)을 불 러들여 변란을 막게 했다. 대장군 하진은 그날로 군사들을 풀어 마 원의를 사로잡아 목 베고, 이어 봉서 등 그 일에 연루된 환관과 일당 천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일이 이미 드러나버렸다는 소문을 들은 장각은 그날로 군사를 일 으켰다. 제자의 배반으로 원래 계획보다 한 달이나 앞당겨 반란에 들어간 셈이었다. 중평 원년 이월이었다.
“바야흐로 한(漢)의 운수는 다해가고 있다. 이제 큰 성인이 나셨으 니 그대들은 모두 하늘의 뜻을 따라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하라.”
장각은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將軍)으로 높이고, 아우 장보는 지 공장군(將軍), 장량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일컬으며, 그렇게 백성들을 충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하고 서러움 받던 백성들이었다. 무거운 세금 도 부족해 살 껍질을 벗겨가듯 혹독한 수탈을 일삼는 벼슬하는 도둑 들[官]과, 그들에 대항해 싸운다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똑같은 수 탈을 되풀이하는 산속의 도둑들[綠林]에게 아울러 시달리고, 겹치는 기근으로 고통당해온 백성들의 고단함과 서러움은 장각의 도당들이 보여주는 종교적 환상과 어우러지자 금세 광기와 분노로 변했다. 따 라서 그것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단지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기대만으로도 백성들은 쉽게 누른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따라 나서니 그 수는 무려 사오십만이나 되었다. 누른 수건은 누른 하늘 이 새로이 열린다는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때문에 보통 그 난리는 황건란이라 불리고, 그들 도당도 황건적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기강도 형편 없이 문란한 지방의 관군들이 그런 황건적을 당해낼 리가 없었다. 싸움마다 패하느니 관군이요, 올라오느니 급한 구조 요청이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한의 천하를 통째로 삼켜버릴 듯한 황건적의 기세 였다.
이에 대장군 하진은 황제에게 상주하여, 각처의 방비를 엄히 하고 도적을 쳐 공을 세우라는 조명(命)을 급히 내리게 하는 한편 정병 을 보내 도적을 치게 했다. 각처의 방비를 엄하게 한다 함은 황건적 이 몰려오는 주군의 성을 수리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것 외에 함곡 (谷), 대욕谷), 광성(城), 이궐(伊闕), 환원(轘轅), 선문(旋門), 맹 진(津), 소평진(小平) 등 여러 관(關)에 도위(都尉)를 설치하여 황 건적의 침입을 막게 한 것을 가리킨다.
또 정병을 보내 치게 했다 함은 경사(京師)를 지키던 날랜 군사에 역시 문무를 겸한 세 사람을 중랑장(中郞將)으로 뽑아 토벌을 맡긴 일이었다. 그 세 장수는 다름 아닌 유비의 스승 노식(盧植)과 전 북 지(北)태수 황보숭(皇甫嵩), 그리고 역시 전 교지(交) 태수 주준 (朱)이었다. 구강(江) 및 여강(江) 태수로서 남쪽 오랑캐의 모 반을 진압한 노식은 물론 황보숭과 주준 또한 당대의 손꼽는 장재 (將材)들이었다.
황보숭은 안정군(郡) 조나朝) 땅 사람으로 시서(詩書)를 즐 기면서도 말타기와 활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일찍부터 문무를 두루 갖춘 큰 그릇으로 기대를 모았다. 효렴에 천거되어 의랑(郞)에까지 올랐으나 당고의 화에 연루되어 북지 태수로 밀려났다가 황건 란이 일기 몇 달 전에야 다시 도성에 불려 들어와 있었다.
황보숭은 좌중랑장이 되어 도적을 치라는 대명을 받자 황제에게 아뢰었다.
“재주 없고 용렬한 신이 하해 같은 성은을 입어 대임을 맡게 되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마땅히 늙은 목을 걸어 입은 성은 의 만에 하나라도 갚고자 하나, 사졸은 정강(精强)하지 못하고 마필 이며 무구(武具)도 부족하여 마침내 폐하의 성려(聖慮)를 덜어드리 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당금(黨禁, 당고의 화에 연루된 자에게 벼슬을 금한 일)을 푸시어 널리 인재를 거두어들이 시고 중장전(中臧錢, 제실의 돈)과 서원(西園, 후한 말 환관들이 키운 황실 경비병)의 말을 내어 허술한 병기와 부족한 마필을 채울 수 있도록 하옵소서.”
환관들에게 농락되어 앞뒤를 가리지 못하던 황제도 일이 그 지경 에 이르니 그런 황보의 진언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우중 랑장 주준이 다시 아뢰었다.
“신 또한 하해 같은 성총을 입어 삼군을 통솔하는 장렬(將列)에 오르게 되었으나, 몸은 늙고 힘은 줄어 스스로 선봉이 되어 말을 닫 게 하고 창칼을 휘두르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바라옵건대 폐하 께서는 신 스스로 젊고 재주 있는 장수를 골라 선봉을 삼음을 윤허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주준의 자는 공위(公偉)로 회계군(郡) 상우) 땅 사람이었다. 일찍 시골 벼슬아치 [郡吏]로 출발했으나 교지 태수가 되어 그 땅을 휩쓸던 큰 도적 양룡(梁龍)의 무리를 소탕하면서 널리 용 명을 떨쳤다. 싸움에서는 셋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그의 청이고 보니 황제는 또한 기꺼이 윤허했다.
“선봉을 정하는 것은 장수된 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대권이다. 새삼 논의할 필요조차 없으나, 특히 그대가 청하는 바를 보니 의중 의 인물이 따로 있는 듯하다. 그가 누구인가를 말하라.”
“신이 선봉으로 삼고자 하는 장수는 오군(吳郡)의 손견(孫堅)이란 자입니다. 무예와 용맹이 빼어난 데다 약간의 지략까지 갖추고 있어 가히 왕사(王)의 앞머리에 세울 만한 장재입니다.”
“손견이라면 짐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회계의 요적(妖) 허 창(許昌)을 목벤 그 청년 장수가 아닌가?”
“그렇사옵니다. 지금 하비(下)의 승丞)이 되어 그 성안에 머물 러 있는 바, 폐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그를 좌군사마(佐軍司馬)로 쓰고 싶사옵니다.”
“그가 하비성에 있다면 무슨 수로 기일을 넘기지 않고 불러 선봉 에 세울 수 있겠느냐?”
“한번 폐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오는 인물이니 결코 왕사를 지체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황보숭도 아뢰었다.
“신에게도 한 사람을 데려가게 해주옵소서.”
“당인마저도 사졸로 뽑아 씀을 허락한 터에 황보중랑(中郞)이 새 삼청하는 것을 보니 또한 예사 인물은 아닌 듯하다. 누구를 쓰고자 하는가?”
“패국) 조조입니다. 지금 의랑(郞)으로 광록훈(光祿勳, 궁중의 자문을 맡는 문신)에 속해 있으나 가히 일군을 이끌 만한 장재입니 다. 특히 그를 좌우에 두어 신의 재주 없고 늙음을 가리고자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날 그의 매서운 상소문은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으나 그토록 빼 어난 장재인 줄은 몰랐다. 조조에게 기도위(騎都尉, 도성을 지키는 五校 가운데 기마대를 지휘하는 장수. 五校는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 정도)를 제수하여 황보중랑의 막하에 속하게 하라.”
황제는 그렇게 윤허한 뒤 묵묵히 있는 노식을 향했다.
“노(盧)중랑은 달리 뽑아 좌우에 두고 싶은 인재가 없는가?”
그 말에 송구스런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북중랑장 노식이 천 천히 입을 열었다.
“일찍 성총을 입어 묘당에 든지 여러해, 시중侍中), 상서(尙書) 를 거치면서도 도적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버려두고 달리 무슨 청이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말없이 나아가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돌아오는 일이 마땅하나, 하문이 계시오니 아뢰겠사옵니다. 신에게 는 원래 공손찬이라는 제자가 있어 선봉에 세울 만하였습니다. 하오 나 그는 지금 요동 속국 장사(長史)로 나가 있어 변방을 비울 처지가 못 되오니, 하남(河) 원소로 대신하겠사옵니다.”
원소는 이미 조정에 널리 알려진 터라 새삼 설명을 늘어놓지 않 아도 되었다. 황제도 두말 없이 그 청을 윤허하니 원소는 중군교위 (中軍校尉)로 노식 밑에 들게 되었다.
그 무렵 조조는 한나라를 향한 마지막 충성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벼슬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처음 낙양의 부도위 (部都尉)로 출발하면서 중상시(中常侍)인 건석(蹇碩)의 아재비를 때 려죽인 일에서부터 그가 보여준 강직함과 과단성은 오래잖아 그를 환관 모두의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사 년도 못 돼 돈구(頓丘)라는 작은 고을의 현령으로 쫓겨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황후 송씨(宋氏) 의 폐위 사건에 연루돼 아예 삭탈관직을 당했다. 황후의 일족으로 주살된 송기(奇)란 이가 조조의 종매부인 것이 벼슬길에서 쫓겨나 게 된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그 뒤에는 조조를 미워하는 환관들의 참소가 있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황제에게 조조를 나쁘게 말해오던 그들이라 그같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아무런 불평 없이 초(譙) 땅으로 낙향해 갔다. 그리 고 한 야인으로 돌아가 옛날의 패거리와 어울리며 유유자적한 생활 을 즐겼다.
뒷날 무선황후(武宣皇后)로 높임을 받은 변씨(氏)를 첩으로 받 아들인 것도 그 무렵이었다. 변씨는 낭야군(郡) 개양(陽) 사람 으로 가세가 빈한하여 일찍 창기가 되었다가 자색이 뛰어나고 천성 이 총명하여 조조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낙향한 지 오래잖아서 그 녀에게 빠져든 조조는 마침내 천금으로 그녀를 사 첩으로 삼았다. 나중에 조조의 뒤를 잇게 되는 조비(曹丕)는 바로 그 변씨가 낳은 아 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낙향 시절은 활동적인 조조의 일생을 통해서 가 장 평온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살피면 겉으로는 철저한 무위의 세월로 보이는 그 시기야말로 조조에게는 뒷날의 웅비를 위한 중요한 준비기였다. 그의 기반이 되는 패국 일대의 인맥과 다시 한번 결속을 다질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 몇 년의 벼슬살이 동안 조조와 패국 일대의 인걸들 사이는 하후돈과 조홍을 빼고는 저절로 소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후연 을 비롯한 생가 쪽의 호걸들과 조인을 비롯한 양가 쪽의 호걸들, 그 리고 허유, 이전, 악진 등 임협(任俠) 시절의 패거리들은 조조가 험 한 벼슬살이에 골몰해 있는 동안 차차 멀어져갔는데, 그 낙향으로 다시 옛날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삼 년 만에 조조는 다시 의랑으로 뽑히어 낙양으로 돌 아갔다. 비록 광록훈 아래의 문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황제에게 직간 (直諫)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조가 전부터 얻고자 하던 자리였다.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끝이 비어져 나오고, 사향은 싸고 싸도 향내가 새듯 아무리 환관들이 가로막아도 한나라는 조조란 인 재가 필요했다.
한번 좌절을 맛본 벼슬살이였지만 다시 불려나온 조조의 기백과 충성은 삼 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한 예가 다시 묘당에 든 즉시 조조가 올린 상소문이었다.
‘…진번(陳), 두무(武) 등 전조(前) 때부터의 훌륭한 신하 들이 당인으로 몰리어 화를 입은 것은 실로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 이옵니다. ‘당고의 화’ 이래 조정은 간사한 자들만 가득하고 충성스 런 말을 하는 신하들은 사라져, 이제는 나뭇잎이 오히려 가라앉고 돌멩이가 물에 뜨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어지러운 조정의 기틀을 바로잡으 시고, 고조께서 이 나라를 세우신 뜻을 잊지 마옵소서…………….?
영창(永昌)태수 조앵이 당인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맞아 죽은 지 몇 해 되지 않은 때라 조조의 그 같은 상소는 목숨을 내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황제는 전처럼 노하지는 않았으나 그같이 충성스러운 상소를 귀담아들을 만큼은 못 되었다. 옳은 말이 라 여기면서도 연일 술과 여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러자 조조는 이듬해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지금 나라의 기둥이라 할 삼공(三公)이 한결같이 힘 있는 자 의 위세에 눌려 정사를 바로 펴지 못하고, 나라는 갈수록 어지러워 지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귀한 국록을 먹으면서도 자기 할 바를 다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죄를 물으시고,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 으소서…….”
전보다 한층 매서운 상소였다. 황제도 그제서야 마지못해 조조의 상소를 듣는 체했다. 탐관오리를 다스리라는 명과 함께 백성들의 신 망이 두터운 이들을 벼슬길로 불러들이는 등 몇 가지 형식적인 개혁 을 꾀한 게 그랬다. 하지만 한나라는 이미 그 정도의 성의 없는 치료 로 소생될 수 없을 만큼 깊고 무거운 병에 걸려 있었다. 황제의 명을 따라 일시 엄숙한 기풍이 조정에 이는 듯했으나, 곧 전보다 더 큰 부정과 부패가 뒤따랐다. 탐관오리를 내쫓는다는 것은 새로운 탐관오리에게 팔 벼슬자리를 만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 셈이었다.
두 번에 걸친 자신의 상소가 무위로 돌아가자 조조도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이미 말과 글로는 허물어져 내리는 한 제국을 바로잡을 길이 없다는 판단 아래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하 지만 그때부터 조조의 가슴속에는 또 다른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음 도 부인할 길은 없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허자장(許將)을 찾아간 일이었다.
허자장은 당대에서 제일 간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상(相)을 잘 보 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월단평(月旦評)에서 조조를 높게 보아준 교 현(橋)도 그를 찾아가보라고 권한 적이 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세 상이 답답하기도 해서 조조는 어느 날 허자장을 찾아갔다. 허자장은 조조의 상을 이모저모 뜯어보기만 할 뿐 종내 입을 열지 않다가 조 조가 여러 번 재촉한 뒤에야 응했다.
“당신은 치세에는 능신(臣)이 될 것이고, 난세에는 간웅(奸雄)이 될 것이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말에 대한 조조의 반응이었다. 난세의 간 웅이란 꺼림칙한 단서가 붙어 있음에도 그는 껄껄 웃으며 크게 흡족 해했다. 다시 말하자면, 경우에 따라서는 한나라에 대한 충성을 철 회할 수도 있다는 뜻을 솔직히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이 그러하기에 그의 충성은 한층 뜨거운 것이 되었 다. 오랫동안 전통적인 유가의 가르침에 젖어온 그에게는 난세의 간웅보다는 치세의 능신 쪽이 훨씬 마음에 드는 역할이었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조조는 더욱 그 난세를 막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기도위로 황보숭을 따라 출전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도 조조의 마 음은 그에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끌어낼 수 있는 힘은 모조리 끌어 내 황건란을 평정하는 데 쏟으리라는 결심뿐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 가 이끌게 될 군사들을 점고(考)하고 기치와 복색을 모두 붉은색 으로만 쓰게 했다. 자신도 한 벌 붉은 전포(戰袍)와 붉은 수술 달린 투구에다 불꽃 같은 털을 가진 말 한 필을 구하였다. 빼어나지 못한 용모를 돋보이게 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붉은색의 강렬함 으로 적과 우군(軍)의 안목을 한꺼번에 압도하려는 뜻이 더 많이 담긴 차림이었다.
그런 다음 조조는 이번에도 그를 따라온 하후돈과 조홍을 불렀다.
“너희들은 당장 초현으로 내려가거라. 그곳에서 급히 할 일이 있다.”
역시 조조를 따라 출전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조홍과 하후돈이 조 조의 그 같은 말에 뜻밖이라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물론 너희들의 뜻은 내가 잘 안다. 나도 너희들이 좌우에 있으면 든든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호위하는 것보다 더 크고 무거운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조홍이 물었다.
“의군을 일으키는 일이다. 가서 하후연, 조인, 악진, 이전, 허유 등 에게 내 뜻을 전하고 의군을 일으켜라. 군자금은 아버님께서 대어주실 것이다.”
“도적을 치는 일이라면 나라의 관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태여 사재를 털어가며 의군을 일으키라니요?”
“도적의 형세를 보니 이미 관군만으로 진압하기는 글렀다. 초야에 묻혀 있는 의기 남아들이 함께 일어나지 않아서는 기세가 오를 대로 올라 있는 도적을 깨칠 수가 없다.”
“그럼 의군을 모아 형님께 데려올까요?”
“아니, 반드시 나를 찾아올 필요는 없다. 가서 고향 땅만 지키면 된다.”
“만약 도적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더라도 초현을 떠나지 마라.”
하지만 조홍은 물론 하후돈도 조조의 뜻이 통 짐작이 가지 않은 듯했다. 말없이 둘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하후돈이 궁금한 듯 끼어들 었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일껏 의군을 일으켜놓고 도적을 찾아나서지 는 말라니,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천리 길을 달려가 의군을 일으킨 단 말입니까?”
그러자 한동안 무언가를 망설이던 조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한결같이 내 뜻을 짐작하지 못하니 말하겠다. 지금 천 하는 황건란으로 들끓고 있으나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더 험한 난세가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무 엇보다 힘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국법은 사사로이 군사를 기르는 것 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가 사사로이 군사를 기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황건란을 핑계로 한 의군뿐이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어디다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내게는 그 사사로운 힘이 머지않아 필요할 것 같은 예감이다. 관군은 내 힘이 못 된다. 이 뜻 을 알겠느냐?”
조조가 그렇게 말하자 둘도 대강은 그 뜻이 짐작되는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곧 길을 떠날 채비를 하겠습니다.”
둘은 목소리를 모아 그렇게 대답한 뒤 귀향을 서둘렀다.
조조와 같은 시기에 원소도 출전의 명을 받았다. 그 무렵 원소는 대장군 하진의 청을 이기지 못해 북군(軍, 도성 수비와 치안 유지를 맡 은 군대)의 교위로 있었지만, 그 벼슬보다는 낙양의 명사로서 더 알 려져 있었다.
조조의 예상대로 노모의 병을 핑계로 복양(濮陽)의 장(長) 노릇을 그만두고 돌아온 원소는 그 뒤 더는 벼슬길로 나가려 들지 않았다. 오래잖아 모친이 죽자 복(服)을 핑계로 삼 년을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 곁에서 보낸 그는 이어 모친의 복을 벗기 바쁘게 입양 전에 죽은 양부의 복을 거슬러 입어 다시 삼 년을 보냈다.
그리고 모든 구실이 다 없어진 뒤에도 여전히 낙양의 자택에 눌 러앉아 벼슬 대신 사람 사귀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마치 일생을 무 위무관(無位無官)으로 마칠 작정인 것 같았다.
워낙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명가인 데다 성격이 밝고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이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도 원소의 집 앞에는 수레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 수레란 것이 이미 높고 귀한 지체를 나타내는 물건이고 보면 원소가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신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위로는 조정의 공경들로부터 아래로는 유협(俠)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름을 얻 고 있는 이 치고 원소의 집을 드나들지 않는 자는 없다시피 했다. 그 리고 개중에는 장맹탁(張孟卓), 하백구(何伯求), 오자경(吳子卿) 같은 장안의 호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더하여는 조조의 패거리인 허 유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까지고 원소의 그 같은 처신을 허락하지 않았 다. 벼슬은 마다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무리를 늘려가는 그에게 차차 의심을 품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런 일에 민감한 것은 환관들 이었다. 명문의 후예로서 황문(門)을 경멸하고 천시하는 것이 몸 에 밴 원소라 더욱 그랬을 수도 있다.
중상시인 조충趙忠) 같은 자는 여러 동료들에게 드러내놓고 자신 의 의심을 말했다.
“원본(本)는 아비 할비를 등에 업고 앉아서 큰 이름을 얻고 있으면서도 조정의 부름을 듣지 않고 있다. 거기다가 널리 천하의 인재를 모으고 자기를 위해 죽어줄 선비를 기르니 그가 무얼 꾀하고 있는지 실로 모를 일이다.”
대궐 깊이 들어앉은 내시들의 귀에까지 원소의 동태가 알려질 지 경이니 항간에 떠도는 소문 또한 원소에게 유리할 리 없었다. 이를 듣다 못한 숙부 원외袁)가 여러 차례 원소를 불러 꾸짖었다.
“너는 내리는 벼슬도 받지 않고 별 실속도 없이 패거리를 모아 세 상 사람들의 의심만 사고 있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 장차 우리 원 가(家)를 망하게 하려고 그러느냐?”
썩고 무능한 조정에 깊이 실망하고 분개해 있으면서도 그 벼슬만은 내직(職)외직(職)을 가리지 않고 받고 있는 종제 원술도 충고했다.
“형님의 뜻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의의 무리에 가담해 몸과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홀로 깨끗한 힘을 길러 기울어져 가는 한조를 바로잡고자 하시지만, 뜻대로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힘을 기른다 해도 사사로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형님께서 천 명의 호걸을 모으고 만 명의 의사(義)를 기른다 한들 남북군(南北 軍)과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에나 미치겠습니까? 대의에서도 마찬 가집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간신배들일수록 천자를 끼고 도 는 법입니다. 형님께서 내세우는 대의가 아무리 크다 한들 지엄한 천자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범을 잡으려면 범굴로 들어가 야 하고, 간신배들을 쫓으려면 그들이 소굴로 삼고 있는 묘당에서부 터 시작해야 합니다. 중상시 건석을 보십시오. 서원팔교위 수천을 거느려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갖은 탐욕을 다 부려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데 형님은 실속 없는 교유만으로도 세상의 온갖 의 심을 다 받고 있지 않습니까?”
혈기가 지나치고 안목이 짧아 평소 경계하던 종제였지만 그 말에 는 일리가 있었다. 거기다가 때맞추어 하진의 부름이 있었을 때 한 원술의 충고는 한층 설득력이 있었다.
“하진의 출신이 비록 미천하나 황후의 오라버니이니 이제 환관의 발호를 억누를 수 있는 외척으로는 가장 힘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교위라도 주거든 받으십시오. 우선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면할 뿐만 아니라 잘 조련된 육백의 사졸(卒)을 거느리게 되는 자립니다. 거기다가 저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할 일 없는 낭중(郞中)에 지나 지 않지만 머지않아 저도 그리로 들 것입니다.”
그러면서 원술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칼자루를 툭툭 쳐 보였다. 몇 해 어지러운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에 순진 한 협기(氣)대신으로 터득한 요령임에 분명했다. 원소도 그런 그 의 뜻을 짐작하자 슬며시 마음이 움직였다. 거기다가 세상의 의심에 도 어지간히 시달려온 터라 마지못해 월기교위(越騎校尉)로 하진의 막하에 들었다.
원래 낙양을 지키는 군대로는 남북 양군(兩軍)이 있었다. 남군(南 軍)은 위위(衛尉)가 통솔하며 궁궐을 지키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위 위 밑에는 위랑(衛郞)이 있어 각 전(殿)을 지켰는데, 황제가 가장 신 임하는 친위대로서 위사는 대개 봉미(奉) 이천 석 이상의 대 관이나 군공이 높은 양가의 자제, 또는 효렴에 뽑힌 이나 부호의 아 들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는 부대는 우림 군(軍)이라 불리며 남군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북군(軍)은 도성을 수비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 다. 한나라 초기에는 집금오(執金吾) 밑에 여덟 교위[尉]를 두어 통솔했으나, 후한에 들어서는 다섯 교위와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나 누어 통솔했다. 다섯 교위는 둔기(屯騎), 월기(越騎), 보병(步兵), 장 수(長), 사성(聲) 등이었고 각기 칠백이 넘는 사졸을 거느렸다. 그런데 후한 말에 이르러 환관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환관들은 차 차 자기들을 지켜줄 무력이 필요해졌다. 남북군은 모두 외정(外廷)의 대신들 아래 있어 천자를 끼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신들의 신변이 안전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에 궁성 수비의 명목으로 새로이 만든 것이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였다. 상군(上軍)교위, 중군(中軍) 교위, 하군(軍)교위, 전군(典軍)교위, 좌군교위, 우군교위 등 여덟 으로 그 당시에는 중상시 건석이 그들을 통솔했다. 득세를 하고 있 는 환관들의 친위대격이니만큼, 전에 있던 남북군과는 비할 수도 없 을 만큼 세력이 커져 나중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지방의 군벌 들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까지 되었다.
원소가 황건적 토벌을 위한 출진 명령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북군 의 월기교위로 다시 벼슬길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 나 자신이 당연히 선봉으로 천거되지 못하고 남을 대신해 들게 되었 다는 소식을 듣자 원소는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비록 환관 집안 출 신이라지만 조조는 전부터 그 재능을 아는 친구 사이니 또 그렇다 쳐도, 손견이나 공손찬 따위보다 뒤로 밀렸다는 것은 견딜 수가 없 었다.
물론 원소도 손견이나 공손찬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손견 에 대해서는 회계) 허창의 난리 때부터 그 이름을 들어왔고, 공 손찬 또한 근년에 들어와서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공손찬이 처음 조정에 알려진 것은 요동 속국의 장사(長)가 된 뒤의 일이었다. 노식의 문하를 떠나 요서로 돌아간 공손찬은 이듬해 효렴에 천거되어 낭관(官)이 되었다가 곧 요동 속국의 장사(長) 를 제수받았다.
당시 요동은 장성(長城) 밖의 변방으로 오환과 선비, 그리고 고구려 사이에 끼인 외로운 섬과도 같은 땅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면 겁부터 먼저 먹을 위험한 자리로 불과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장성을 나가 오랑캐가 출몰하는 땅 이백 리를 지나야 하는 부임길부터가 목 숨을 건 험로였다.
그러나 공손찬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 없이 떠났다. 과연 새, 국 경 요새)를 나간 지 백 리도 안 되어 수백 기의 선비족 기마대가 공격 을 해왔다. 공손찬은 일단 부근의 빈 정자로 종자들을 물린 뒤 분연 히 말했다.
“이제 우리가 달려 나가 적을 치지 않고, 여기서 기다린다면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큰 창자루 길이가 당시 자로 일장 팔 척인 창]을 잡 고 말을 달려 나가 선비족 수십 명을 찔러 죽이니, 그 종자들도 함께 따라 죽기로 싸웠다. 이에 놀라 달아난 선비족은 그 뒤로는 공손찬 을 두려워하여 다시는 변방을 노략하지 않았다. 그 뒤 공손찬은 잠 시 탁현(縣)의 현령이 되어 유비의 뒤를 봐준 적이 있으나, 양주 (州)에 도적이 일자 도독(都)이 되어 유주(幽州)의 기마대 삼천 을 이끌고 그를 진압하러 떠났다.
이때 도적들은 요서 오환을 부추겨 계()를 빼앗고 우북평(北 平) 및 요서의 속국들과 여러 현을 소란케 하고 있었다. 공손찬은 그 들을 토벌하는 데 공이 커서 다시 기도위로 올랐으나 아직 도적들이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 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남에서 손견이 거 둔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그의 전공(戰)이었다. 뒷날 그를 북방의 강자로 군림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그때 이미 다져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원소에게는 손견도, 공손찬도 출신이 미천하고 무식한 촌뜨기에 지나지 않았다. 열 번 양보해서 생각해도 사람들 입에 떠들 썩하게 오르내리는 그들의 성공조차 뚝심에 곁들인 행운으로만 보 였다. 그런 그들에게 뒤진 것이 명문의 귀공자에게 어찌 쓰라림이 아니겠는가.
그제서야 원소는 허황된 꿈에 매달려 실속 없는 교유로 헛되이 보낸 세월을 후회했다. 그 팔 년 동안에 이름도 성도 없던 촌뜨기들 이 자기를 앞질러 가버렸다……….. 거기서 원소는 비장한 결의로 싸움 에 나섰다. 그에게는 황건란이야말로 자신이 낭비해버린 세월을 한 꺼번에 만회시켜줄 기회였다.
좌군사마(軍司馬)로서 중랑장 주준을 따라 황건적을 토벌하라 는 명이 하비의 손견에게 이른 것은 낙양의 조신(朝臣) 회의가 있고 이레가 지난 뒤였다. 일찍이 오군 일대에서는 이미 영명(名)을 드 날린 손견이었지만, 조정의 대신들과 천자의 입에까지 오르내려져 특히 부름을 받게 된 데는 사실 주준과의 오랜 인연도 한몫을 했다. 주준은 오군에 가까운 회계 사람으로 이미 허창 부자의 모반 때 부터 손견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자신이 모시던 태수(太) 윤단(尹 端)이 허소(許韶)에게 패해 죄를 입은 데 비해 의군을 모아 종군한 청년 장수 손견은 싸움마다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교지의 자사(史)가 되어 도적 양룡을 토벌할 때 다시 손견을 불러 써서 그의 재략과 용력을 잘 아는 터였다.
사자가 이르렀을 때 손견은 마침 뒤뜰에서 이제 열 살 난 맏아들 손책의 격검(擊劍)을 보아주고 있었다. 우이의 승(丞)에서 하 비의 승으로 옮긴 지도 벌써 육 년, 손견은 어느새 두 아들을 둔 서 른 살의 어엿한 아비였다. 둘째 아들은 하비로 옮겨와 낳은 권(權)이 었다.
손권은 오 부인이 꿈에 해를 보고 낳았다는 아이로 턱이 네모나 고 입이 크며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섞여 있었다. 손견은 그런 둘째 아들의 상이 귀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정은 큰아들 책策) 에게만 쏠렸다. 손책 또한 그런 아비의 사랑을 받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아이였다. 얼굴은 어머니를 닮아 수려했으나 근골은 손견의 아 들답게 남달리 크고 굳세었다. 말하자면 매력과 위엄을 동시에 갖춘 용모로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까닭 모를 애정 을 느끼면서도 함부로 팔을 뻗어 안을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두려움 을 함께 느꼈고, 개나 고양이까지 어린 그의 눈길 한번에 꼬리를 사 리고 숨을 정도였다.
하지만 손견이 무엇보다 더 아들 책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의 총 명이나 위엄보다 타고난 무재(武)였다. 겨우 걸음마를 옮기면서부 터 병장기를 놀이개로 삼은 손책은 대여섯이 되면서부터 황개(黃蓋) 나 정보()를 졸라 얻은 작은 창검과 활로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 다. 하지만 황개의 쇠채찍이나 정보의 철사모(鐵蛇矛)는 물론 한당 (韓當)의 대도와 조무祖)의 쌍칼이 한가지로 어린아이가 익히기 에는 너무 무거운 무기들이어서, 일곱 살 때부터 손견이 직접 자신 의 도법(刀法)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르칠수록 놀라운 재주였다. 일 년도 안 돼 막대기 하나만 들면 다 큰 가동(家童)들도 손책을 당해내지 못했고, 열 살이 된 그 무렵 에는 제법 창칼깨나 만진다고 알려진 부중(中)의 갑들조차도 손 책을 상대로 진땀을 뺄 정도였다.
그런데 그날은 좀 이상했다. 내지르는 칼끝에도 힘이 들어 있지 않았고, 베는 칼날에서도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어 딘가 딴 곳에 마음이 쏠린 듯 평소에는 한치를 벗어나지 않던 찌르 기도 번번이 빗나갔다. 한동안 그런 아들을 바라보던 손견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칼을 거두어라.”
그리고 이어 까닭 없이 당황하여, 특히 어린 그를 위해 만든 작고 가벼운 보도를 멈춘 아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어째서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느냐?”
아버지의 갑작스런 물음에 무언가를 잠시 망설이던 손책이 이윽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은 이제 필부의 칼은 그만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필부의 칼?”
“필부의 칼은 높은 이 앞에서 재주를 겨루는 칼이니 위로는 사람 의 목을 베고 아래로는 간이나 폐부를 뚫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싸 움닭의 발톱 같아서 한번 숨이 끊어진 뒤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 게 됩니다.”
“한번 숨이 끊어진 뒤에도 쓸모 있는 칼이 어디 있겠느냐?”
“제가 듣기에 왕자의 칼은 그걸 쓰던 이가 죽어도 그 빛이 사방에 빛나며 오래 세상을 평안케 한다 하였습니다.”
“어떤 칼이 그렇단 말이냐?”
손견은 아들의 뜻이 어렴풋이 짐작이 가면서도 속을 떠보듯 계속 해 물었다. 손책은 더욱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혜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칼끝을 삼고 청렴한 이로 칼날을 삼 으며 어진이로 칼등을 삼고 충직한 이로 칼몸을 삼고 호걸스런 이 로 칼자루를 삼은 칼이 바로 그러하다 했습니다.”
손견이 비록 무(武)에 치우친 인물이라 하지만 어린 아들의 그 같 은 총명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난세에서 급한 것은 우선 자기 몸부터 가릴 수 있는 칼이라 생각하고 짐짓 엄하게,
“제 한 몸도 지키지 못한다면 그런 제왕의 칼이 무슨 소용이겠느 냐? 힘줄과 뼈의 수고로움을 피하려는 간드러진 헛소리다.” 라며 꾸짖는데 황개가 급하게 뒤뜰로 들어섰다.
“주공(公), 태수께서 부르십니다.”
“아침나절에 부중을 들렀을 때도 말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시오?”
손견이 의아로운 얼굴로 물었다. 다행히 황건적이 하비 부근에는 나타나지 않아 군사를 점고하고 병장기를 닦게 하는 것으로 그날 일 을 마치고 일찍 퇴청한 때문이었다.
“도성의 부르심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황개는 평소와 변함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성의 부르심이라니?”
“좌군사마로 황건적 토벌의 선봉이 되시라는 제명(命)이라고 합니다.”
“어디 인물이 없어 멀리 하비의 손견을 불러들인단 말이오? 더구나 폐하께서 어떻게 이 손견 있음을 아시고…………….”
“중랑장 주준 장군이 표를 받으시고 폐하께서 윤허하셨다는 소문입니다.”
“오오, 도정후(都亭侯)께서…….”
그제서야 손견도 일의 경위를 알 것 같았다. 도정후는 주준이 교 지() 양룡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받은 작위였다.
“도성의 형편은 어떠한지 들은 게 있소?”
“지금 대장군 하진이 대임을 맡아 세 중랑장으로 하여금 우선 삼 로(三)의 군사를 이끌고 적의 소굴을 치게 하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도적을 치는 데 장수 못지않게 필요한 게 군사들이오. 그 래 도대체 토벌군은 얼마나 일으켰다고 합니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도성의 금군(禁軍)들과 따로 모집한 정병(精)을 합쳐 오만은 된다고 합니다.”
“오십만을 치는 데 오만이라………. 아무리 황건적이 보잘것없는 난 군(軍)이라 해도 오만으로는 너무 부족하오.”
손견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황개에게 명했다.
“지금 급히 정보, 한당, 조무를 찾아 함께 이리로 모이시오. 내 곧 태수를 만나고 오겠소.”
그리고 급히 태수의 부중으로 달려갔다.
손견의 명을 받은 황개는 곧 사방에 사람을 놓아 이제는 완연히 손견의 사람이 된 그들 셋을 찾게 했다. 다행히 셋은 모두 멀리 있지 않아 한 식경도 안 돼 황개는 그들과 함께 손견의 저택에서 손견을 기다릴 수 있었다.
손견은 저물 무렵에야 태수의 부중에서 돌아왔다.
“지금 황공복(公覆)은 즉시 의군을 모을 격문을 초하여 네 성문 과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걸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머지 셋은 허창을 토벌할 때 이후로 나를 따라 지금 이 하비성에까지 와 있는 용사들을 불러 모으시오.”
손견은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런 명을 내렸다. 다시 의군을 일으킬 심산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얼른 그 까닭이 이해되지 않 는 황개가 물었다.
“조정에서 군사를 이끌고 오라는 분부였습니까?”
“그것은 아니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가면 크게 요긴하게 쓰일 것이오.”
“그렇다면 왜 태수에게 군사를 빌리지 않습니까? 의군을 일으키 는 것은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기일에 대지 못해 대명을 어기게 될까 두렵습니다.”
이번에는 정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 하비의 관병을 빌려가면 성중이 텅 비게 되니 만약 도적 이 그 틈을 노리면 어떻게 하겠소? 그래서 태수께는 약간의 병장기 와 군량만 빌리기로 했소이다. 또 의군을 일으키는 일은 번거롭고 지체하기 쉬운 일이나, 역시 서두르면 관병을 이끌고 가는 것에 비 해 크게 늦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그렇지만 갑작스레 모아 조련도 안 된 군사들로 어떻게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도적을 당하시겠습니까?”
“조련이 안 되기는 도적들도 마찬가지요. 오히려 우리에게는 대의 와 명분이 있고 또 저 회계 이래로 수없는 싸움을 겪은 역전의 용사 들이 삼백 명이나 앞장서서 길을 틀 것인즉 무엇이 두렵겠소?”
“이번 황건의 무리는 지난번 허창, 허소 부자나 양룡, 공지, 양룡을 도와 모반한 전 남해 태수)의 무리와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천자께서 직접 조신 회의에 납시어 삼로의 대군을 보내신 것도 이번이 처음이오. 정덕모(程德謀)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다만 용사 들을 재촉하고 밤을 낮 삼아 대오를 짜 한 시각이라도 빨리 군사를 경사(師)로 진발시키도록 힘써주면 되겠소이다.”
손견은 그렇게 말하며 거듭 네 사람을 재촉했다. 이에 네 사람이 따르니 이튿날 날이 새기 바쁘게 네 성벽과 저잣거리에 의군을 모으 는 격문이 나붙고, 손견을 따르는 삼백 오군 자제들은 지원자가 나 서는 대로 대(隊)와 오(伍)를 짜 진발을 서둘렀다.
손견의 영명이 워낙 높은 데다 제명에 기댄 모병이라, 하비 성안 에 있는 장정들은 거의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여들다시피 했고 다시 전란으로 장삿길이 막힌 떠돌이 등장며 유민들까지 더해 하루 사이 모인 군사만도 천 명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소문을 듣고 보내 온 사수 · 회수 일대의 정병 오백여 명이 이르니 손견은 명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의군 천여 명을 이끌고 주준을 찾아 떠날 수가 있었다. 급작스레 모은 군사라 하나 이미 손견을 따라 여러 번 전장을 누빈 오군(郡) 자제들로 골격을 이룬 데다, 사수·회수의 정병과 태수가 대준 병장기와 군량이 더해 그 어떤 관군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정 예한의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