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3화 : 낙양에는 이르렀건만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3화 : 낙양에는 이르렀건만


낙양에는 이르렀건만

낙양으로 돌아온 동탁은 문무백관을 조당(朝堂)에 모아놓고 도읍 옮기는 일을 상의했다.

“동도(東都) 낙양은 제실이 옮겨 온지 이백여 년, 이미 그 기운과 천수가 쇠했다. 내가 보기에 이제 왕의 기운은 서쪽 장안(長安)에 있 으니 어가를 모시고 서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대들은 각기 떠날 채비를 서두르라.”

동탁이 백관에게 상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하자 먼저 사 도 양표(楊)가 반대하고 나섰다.

“장안이 있는 관중(關)지방은 부서지고 무너져 폐허에 가깝습 니다. 이제 까닭 없이 종묘를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의 황릉(皇陵)을 버리신다면 틀림없이 백성들이 두렵고 놀라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천하가 동요하기는 매우 쉬우나 다시 안정시키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깊이 헤아리고 살펴 행하십시오.”

“너는 나라의 큰 계책을 훼방하려 드느냐?”

동탁이 성난 목소리로 양표를 꾸짖었다. 그러나 다시 태위 황완 (黃)이 일어나 양표를 거들었다.

“양사도의 말이 옳습니다. 지난날 왕망(王)이 나라를 도적질할 때와 적미(赤眉, 후한 광무제가 왕망을 내쫓고 다시 한을 일으킬 무렵 세력을 떨쳤던 도적 떼)가 분탕을 칠 때 장안을 불태워 지금은 기와 조각과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거기다가 백성들도 모두 그곳을 버리 고 떠나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은 폐도(都)입니다. 이제 이곳의 궁실을 버리고 황폐한 그 땅으로 옮기는 일은 결코 사리에 맞지 않 습니다.”

“관동에 근왕(王)을 내세우는 역적들이 일어나 난리가 천하에 번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장안은 효산(山)과 함곡관 같 은 험한 요해가 가로막고 있어 적을 막아내기 좋은 땅이다. 게다가 다소 황폐했다 하나 농우 지방이 가까워 나무와 돌과 기와와 벽돌 따위를 구하기도 쉬우니 몇 달 안 가 궁실을 지을 수가 있다. 그대들 은 더 이상 어지러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

동탁은 황완을 엄하게 꾸짖을 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까지 험한 눈으로 훑어보며 그 입을 막으려 들었다. 그런 동탁의 심기를 사도 순상이 다시 건드렸다.

“승상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신다면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켜 결코 나라가 평안치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헤아려주십시오.”

그러자 동탁도 더는 참지 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성을 내며 소리 높여 꾸짖었다.

“나는 천하를 위해 이 계책을 세웠다. 어찌 작은 백성들에 구애될까 보냐!”

그러고는 양표, 황완, 순상 등을 그날로 벼슬에서 내쫓아 서민으 로 만들었다. 동탁이 그토록 엄하게 천도를 강행하려 드니 가뜩이나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조정이라 더 반대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 다. 모두가 말없이 동탁이 정한 대로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겨우 도읍 옮기는 일을 아퀴 지은 동탁이 조당을 나와 수 레로 오르려 할 때였다. 젊은 벼슬아치 둘이 수레를 향해 손을 모으 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상서 주비(周)와 성문교위 오경(伍)이었 다. 전날 원소가 동탁에게 항거하여 낙양을 떠났을 때 원소에게 태 수 자리를 주어 달래라고 진언한 사람들이었다. 평소에는 그 재주와 학식을 아껴 두텁게 대하던 동탁이었으나, 원소가 주동이 돼 근왕병 을 일으킨 뒤에는 둘을 은근히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런 데다 이제 그 원소가 이끄는 제후들에게 쫓기어 도읍까지 옮기게 되자 더욱 심 사가 틀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가?”

수레를 멈추고 묻는 동탁의 어조에는 이미 역정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자기 생각에 젖어 남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또한 재 주 있고 학식 많은 이들의 단점이다. 오경과 주비도 그와 같아서 동 탁의 마음속은 헤아려보지도 않고 제 생각만 드러내기에 바빴다. 

“승상께서 도읍을 옮기시려 한다기에 그 그릇됨을 아뢰고자 왔습니다.”

그 말에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동탁의 분통이 일시에 터졌다. 

“내가 너희 둘의 말을 듣고 원소를 살려 쓴 게 오늘 이 화를 불렀 다. 이제 원소가 반역을 꾀했으니 그놈을 두둔한 너희 둘도 한 패거 리임에 틀림없다. 그런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려느냐?”

그렇게 꾸짖은 후 무사를 불러 두 사람을 끌어낸 뒤 목을 베어 성 문에 걸게 했다. 바른 소리를 하려던 게 오히려 동탁에게 자기들을 죽일 구실을 주어버린 셈이었다.

양표, 황완, 순상 세 사람을 벼슬에서 내쫓고, 오경, 주비를 목 베 어 더욱 엄하게 영을 세운 동탁은 즉시 천도를 단행하여 이튿날 안 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영을 받은 이유가 가만히 동탁에게 와 서 말했다.

“이제 떠나려 해도 중도에 쓸 돈과 곡식이 적어 쉽지가 않습니다. 낙양에는 부호가 많으니 그 재산을 몰수해 쓰는 게 좋겠습니다. 원 소와 한패로 몰아 그 족당을 죽이고 가산을 몰수한다면 남의 이목도 피하고 수만 금은 쉽게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껏 이유가 낸 못된 꾀 가운데서도 가장 못된 꾀였다.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동탁 또한 이유의 주인 노릇에는 모자람이 없 었다. 그 자리에서 한번 망설임도 없이 이유의 말을 받아들였다.

“갑옷 걸친 기마 오천을 거느리고 가 그 말대로 시행하라.” 

이에 이유는 수천 호가 넘는 낙양의 부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그 집에는 ‘반신 역당’이라고 크게 쓴 기를 꽂아두게 했다. 그리고 잡아 온 부호들은 모조리 성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 그 재산을 거두니 실로 거만(萬)이 넘었다.

그다음은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끔찍한 강제 천도였다. 이각과 곽사를 시켜 수백만 낙양 인구를 장안으로 끌고 가는데, 백성 한 무 리에 군사 한 떼를 붙여 감시케 했다. 제후들의 추격이 두려우니 길 을 재촉할 수밖에 없고, 길을 재촉하니 먼 길에 익숙하지 않은 백성 들이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늙고 병든 자나 어린아이와 힘없는 부녀 자들의 시체로 도중의 구덩이란 구덩이는 모두 메워질 지경이었다. 끔찍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동탁의 군사들이란 게 태반은 강인 이나 변방의 부랑자들이라 기강이 서 있지 못했다. 백성들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가진 재물을 빼앗으니 애처로운 비명과 구슬픈 통곡 소리가 하늘과 땅에 가득했다. 또 동탁은 낙양을 떠나기에 앞서 도 성의 여러 문과 종묘며 궁궐에 불을 지르게 했다. 불길이 어찌나 맹 렬한지 남쪽과 북쪽 두 궁궐의 불길이 서로 잇닿았다. 거기다가 제 후의 군사들이 거처로 사용함을 꺼려 민가에까지 불을 지르니 하루 사이에 낙양은 잿더미로 변했다.

동탁의 흉악한 짓은 여포를 시켜 여러 황제와 후비(后妃)들의 무 덤을 파헤치게 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여포가 능침을 파헤쳐 거기 묻힌 금은보화를 꺼내는 틈을 타 군사들은 백성들의 무덤까지 파헤 쳐 값나갈 것은 모조리 꺼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금은과 명주(明) 비단 등의 보화가 천 수레를 넘었다.

동탁은 그 수레를 앞세우고 어린 황제와 후비들을 낀 채 장안을 바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일이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철저한 파괴였고, 수백만 백성이 살던 낙양이라고는 짐작도 안 될 만큼 남김 없는 강제 이주였다.

사수관 밖의 제후들이 동탁의 장안 천도를 안 것은 그 장수 조잠 (趙岑)이 스스로 관문을 열고 항복한 뒤였다. 동탁이 낙양을 불사르 고 황제와 백성들을 이끈 채 장안으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조잠 은 마침 관 아래까지 와 있던 손견에게 스스로 항복해버렸다.

손견의 군사들이 사수관을 거쳐 낙양으로 들어갈 즈음 유비와 관, 장 형제도 사기를 잃은 동탁의 잔병을 쳐부수고 호로관으로 들어갔 다. 그 뒤를 여덟 갈래 제후들도 분분히 군사를 끌고 따랐다.

사수관이 보다 가까워 가장 먼저 낙양으로 입성한 것은 손견이었 다. 말 위에서 사방을 돌아보니 불꽃은 하늘을 찌르고 검은 연기는 땅을 가득 덮고 있는데, 부근 백 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물론 개나 닭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견은 군사들을 풀어 불부터 끄게 했다. 손견의 군사들이 간신히 불길을 잡았을 무렵 하여 다른 제후들도 각기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람을 피할 민가 한 채 성한 게 없음을 보자 각기 낙담한 얼굴로 폐허 위에다 군마를 주둔시켰다. 변괴라고밖에는 말 할 수 없는 동탁의 그 같은 도주에 모두 망연할 뿐이었다.

그때 조조가 다시 나섰다. 이끄는 군사를 둔병시키지도 않고 똑바 로 원소를 찾아온 조조는 진영을 베풀고 있는 원소에게 나무라듯 물 었다.

“이제 역적 동탁이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으니 승세를 타고 추격 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본초는 어찌하여 군사를 세워두고 움직이지 않소?”

마음이 급하다 보니 맹주에 대한 예마저 많이 줄어든 듯한 조조의 말투였다. 원소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후들의 군사들이 모두 지쳐 있으니, 움직여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까 두려워서외다.”

“동탁이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잡아가니 나라가 흔들리고 민심 은 의지할 바를 모르고 있소. 비하여 하늘이 무너진 때[]와 같소. 이때 한 싸움으로 천하를 안정시켜야 할 것인데, 제후들은 무 엇이 두려워 망설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시오?”

조조는 다시 그 자리에 있는 제후들을 충동해보았다. 그러나 대답 은 원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가볍게 움직여서 아니 되오.”

겉으로 보기에는 무슨 깊은 생각이라도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모두 갑작스런 변화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는 아직 그 변화의 처음과 끝이 조조처럼 요연하게 보이지 않았다. 조조는 두 번 세 번 그들을 깨우쳤으나 그들은 얼른 그 망연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 더벅머리 덜 자란 아이놈 같은 자들과 무슨 일을 함께할 수있으랴!”

마침내 분통이 터진 조조는 그렇게 분연히 외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제후들의 도움 없이 홀로 동탁을 추격하기로 결심 했다.

조조는 자기가 이끌고 온 군사 만여 명과 하후돈, 하후연, 조홍, 조인 등의 장수들을 이끌고 그 밤으로 동탁을 뒤쫓았다. 군사가 모자라는 줄은 알지만 눈앞에 있는 호기를 놓칠 수 없어 무리를 한 셈이었다. 때를 살필 줄 아는 조조의 예리한 안목과 기민한 대응력을 잘 보여주는 행동이었으나 결과는 뜻 같지 못했다.

그 무렵 동탁은 형양에 이르렀다. 태수 서영이 나와 동탁을 맞으니 백성들과 황제의 행군도 잠시 멎었다. 그때 다시 이유가 동 탁에게 한 계교를 올렸다.

“승상께서 낙양을 버리고 오셨으니 반드시 추격해 오는 군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방비책이 있어야 합니다. 서영을 보내 형양성 밖 산기슭에 매복시켰다가 만약 추격해 오는 군사가 있으면 그대로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다음 따로 군사를 빼내 적을 맞아 싸우고 서 영이 그 뒤를 끊는다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적병으로 하여금 다 시는 감히 뒤쫓을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동탁 또한 전장에서 늙은 몸이라 이유의 말을 이내 알아들었다. 먼저 서영을 보내 형양성 밖에 매복시키고 다시 여포를 불러 정병을 이끌고 뒤쫓는 군사를 막게 했다.

명을 받은 여포가 정병 삼만을 이끌고 동탁의 행렬로부터 뒤처져서 가고 있는데 과연 조조의 군사들이 뒤쫓아 왔다.

“이유가 헤아린 바를 넘지 못하는 것들이로구나.”

여포가 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싸울 채비를 갖춰 기다리는데 조조가 말을 달려 나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역적 놈아, 천자와 백성들을 끌고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목소리는 씩씩했으나 여포에게는 조조가 안중에도 없었다. 가소롭다는 듯 오히려 조조를 꾸짖었다.

“주인을 저버린 겁쟁이 놈아, 무슨 망언이 그리 심하냐?”

그러자 조조 곁에서 하후돈이 창을 들고 말을 달려 나와 똑바로 여포에게 달려들었다. 하후돈의 무예 또한 절륜하여 여포와 한바탕 싸움이 멋지게 어우러졌다. 그러나 그 끝을 보기도 전에 여포군의 왼편에서 이각이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조조의 군사를 협공해왔다. 조조는 하후연을 보내 이각을 맞게 했다. 그때 다시 오른편에서 함 성이 일며 곽사가 이끄는 군마가 덮쳐왔다. 조조는 급히 조인(曹) 을 보내 곽사를 맞게 했다.

한동안 세 갈래의 군마가 어울려 어지러운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워낙 조조의 군사가 적었다. 거기다가 마침내 여포를 감당해내지 못 한 하후돈이 말 머리를 돌려 도망치고 그 뒤를 여포가 따르며 짓밟 으니 조조의 군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안 조조는 급하게 퇴군하라는 영을 내리 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조조가 형양에 이른 것은 이경 무렵이 었다. 어떤 험한 산기슭에 말을 멈추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보았 다. 태반이 꺾여 있었다.

“여기서 잠시 쉬고 간다. 시양(麻養卒, 나무하고 밥 짓는 군사)을 시 켜 군사들을 먹이도록 하라.”

조조는 그렇게 영을 내렸다. 하루 종일 쫓기느라 지치고 허기진 조조의 군사들이었다. 명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궁이를 세우고 솥을 걸었다. 그런 그들을 비추는 차가운 겨울 달빛이 한층 처량하게 느 껴졌다.

그런데 막 솥을 걸고 불을 지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함성이 오르며 미리 와 숨어 있던 형양 태수 서영의 군사들 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피로한 몸을 쉬고 있던 조조는 그 갑작스런 적의 내습에 놀랐다. 한번 여포에게 호되게 당한 뒤라 더욱 황망하 게 된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사를 수습해 어떻게 대항해볼 엄두도 못 내고 급히 말에 올라 달아날 길을 찾기에 바빴다.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그런 조조 앞을 바로 적장 서영이 가로 막았다. 조조는 재빨리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으나 서영이 곱게 보 내줄 리가 없었다. 시위에 살을 먹여 쏘니, 살은 어김없이 조조의 어 깻죽지에 박혔다.

화살을 맞은 조조는 어깨가 짜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더 소중한 게 목숨이었다. 비명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깨에 화살을 박은 채 그대로 말을 달렸다. 한동안을 달리자 가로막는 적병이 점 점 드물어졌다. 그러나 미처 그 산굽이를 돌기도 전에 다시 조조는 어려운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풀숲에 숨어 있던 적병 둘이 갑자 기 조조의 말을 향해 창을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양 옆구리에 창을 맞은 조조의 말은 구슬픈 비명과 함께 쓰러지 고, 조조도 몸을 뒤집으며 땅으로 떨어졌다. 이미 무거운 상처를 입 은 데다 갑작스레 말에서 굴러떨어진 조조에게 제대로 대항할 힘과 정신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조조는 역시 하늘이 보살피는 사람이라 할 만했다. 이름 없는 졸개들에게 사로잡히는 욕을 당하게 될 즈음, 한 장수가 달려 오더니 칼을 휘둘러 그 두 적병을 베어버렸다. 그리고 황급히 말에 서 뛰어내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조조를 부축했다. 죽을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조조가 정신을 차려 바라보니 바로 사촌 아우인 조홍(曹洪)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뒤쫓던 적병이 바짝 가까워져 있었다. 한고비는 무 사히 넘겼다 하나 끝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바람에 마음이 약해진 조조가 처량한 음성으로 조홍에게 권했다.

“내가 헤아림이 모자라 이 지경에 빠졌구나.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으려니와 너는 어서 달아나 뒷날을 도모하라.”

“형님, 급합니다. 어서 말 위에 오르십시오. 저는 달려서 뒤따르겠습니다.”

조홍이 펄쩍 뛰며 조조를 재촉했다. 그러나 조조는 고개를 가로저 으며 다시 권했다.

“적병이 뒤쫓아 오는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나는 틀렸다. 너 라도 살아 이곳을 빠져나가거라.”

어릴 적부터 사촌형인 조조를 우러르고 따라온 조홍이었다. 손견 을 대신해 죽은 조무보다 정이나 의리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 없 는 그가 조조의 그 말을 어찌 따르겠는가. 조조를 들어올리듯 말 위 로 부축해 올리며 분연히 소리쳤다.

“천하를 위해 이 홍(洪)은 없어도 되지만 형님이 없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반드시 목숨을 보충하시어 크신 뜻을 세상에 널리 펴서 야 합니다.”

조조도 조홍이 그렇게 말하자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알겠다. 만약 내가 여기서 목숨을 건진다면 그건 모두가 너의 힘이다.”

그 말과 함께 조조는 무거운 몸을 말등에 실었다. 조홍은 투구와

갑옷을 벗어던져 몸을 가볍게 한 뒤 칼을 빼들고 조조의 말을 따라

달렸다.

그렇게 달려 사경쯤 되었을 때였다. 급한 추격은 벗어났다 싶었지 만 돌연 한 줄기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았다. 얼음이 두껍지 못해 그냥 건널 수도 없고, 그렇다고 헤엄을 쳐 건널 수는 더욱 없었다.

“아무래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무슨 수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어느새 가까워오는 적병의 함성을 들으며 조조가 다시 약한 소리

를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행히 물이 깊지 않은 듯하니 제가 업 고 건너보겠습니다.”

조홍이 꿋꿋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조조를 말 위에서 부축해 내렸 다. 그리고 조조의 갑옷을 벗긴 뒤 등에 업고 얼지 않은 여울을 찾아 건너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찬물이었지만 조홍의 말대로 깊이는 한 길을 넘지 않았다.

조조를 업은 조홍이 가까스로 강을 건넜을 무렵 적병이 건너편 언덕에 이르렀다. 그러나 감히 찬물 속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강둑 에서 어지러이 화살만 날렸다. 그들 종형제는 그 화살비와 함성에 놀라 젖은 몸을 돌볼 틈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이 밝도 록 달리고도 다시 삼십여 리를 더 달린 뒤였다. 작은 언덕 밑에 이르 러 잠깐 숨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함성이 일어나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들었다. 서영이 강을 상류로 건너 뒤따라온 것이었다.

‘이젠 정말로 끝이로구나..’

조조는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달아날 마음도 먹지 못하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조홍이 칼을 뽑아들고 막아섰지만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 위태롭기 그지없는 순간에 나타나 다시 조조를 구한 것이 하 후돈과 하후연 형제였다.

“서영은 우리 주인을 다치지 말라!”

둘은 목소리를 합쳐 그렇게 외치며 수십 기를 이끌고 나는 듯 달 려왔다. 승세를 탄 끝이라 서영이 겁도 없이 하후돈을 향해 마주쳐 갔다. 하지만 일찍이 패국을 떨쳐 울린 하후돈의 창 솜씨를 당할 재 간은 없었다. 몇 번 말이 엇갈리기도 전에 하후돈의 창에 찔려 말 아 래로 떨어졌다.

하후돈이 그 기세를 몰아 서영의 졸개들을 짓밟고 그 뒤를 하후 연과 수십 기가 뒤따르니 기세 좋던 적병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말았 다. 그때 다시 조인과 이전이 각기 약간의 군사를 수습해 그곳에 이 르렀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조조의 심경은 실로 착잡하였다. 남은 군사를 수습해 보니 겨우 오백 명 남짓했다. 앞뒤를 헤아리지 않은 기백이 가져다준 참담한 패전이었다. 어쩌면 뒷날 조조에게서 보이 는 조심성은 그 패전의 뼈저린 교훈에서 얻어진 것인지도 모를 일 이었다.

“내가 혈기에 치우쳐 살핌이 부족했다. 죄 없는 장졸만 죽였구나…………….”

조조는 그렇게 탄식하며 하내로 돌아갔다. 다른 제후들이 힘을 합쳐 뒤만 든든히 받쳐주어도 그 같은 참패는 면할 수 있었으리란 데서 온 노여움과 일의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그들의 안목에 느낀 실망 때문에 그 제후들이 모여 있는 낙양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러나 조조가 알았으면 더욱 노엽고 실망스러웠을 일은 그 며칠 사이 낙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손견이 우연히 얻게 된 전국(傳國) 옥새를 둘러싼 제후들 간의 한바탕 다툼이 바로 그랬다.

각기 이끌고 온 대로 군사를 나누어 낙양에 머무르고 있는 제후 들 가운데 손견은 유독 성안에 둔병하고 있었다. 궁궐의 불을 끈 뒤 건장전(建殿) 터에 군막을 친 까닭이었다. 그러나 망연해 있는 다 른 제후들과는 달리 손견은 제법 그럴듯한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 었다.

손견은 먼저 군사들을 시켜 궁궐의 기와 조각이며 무너진 돌담을 치우게 하고, 동탁이 파헤친 능침을 모두 원래대로 덮게 했다. 그리 고태묘(廟)가 있던 터에 초옥이나마 세간의 전을 마련한 뒤, 역대 황제의 신위를 모시고 여러 제후들을 청하여 태뢰(太)로 제사를 올렸다. 동탁의 흉포한 짓을 막지 못한 불충을 사죄하는 것으로 그 들이 의병을 일으킨 명분을 세상에 다시 한번 널리 알린 것이었다. 그 제사가 끝난 뒤였다. 청함을 받고 왔던 제후들도 모두 돌아가 고 손견도 자기의 군막으로 돌아왔으나, 착잡한 감회에다 마침 달까 지 밝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손견은 검을 찬 채 밖으로 나와 천문을 살폈다. 가만히 올려다보니 제실을 상징하는 자미원(紫微垣) 부근에 흰 기운이 가득하였다.

“제성(星)이 밝지 못하니 역적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구나. 번성하던 옛 낙양은 어디 가고 이렇게 텅 빈 폐도만 남았는가…….”

손견은 그렇게 탄식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지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이미 불붙기 시작한 야망과는 달리, 일찍이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한 왕조의 몰락에 대한 순수한 감회였다.

그때 곁에서 호위하던 군사 하나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건장전 남쪽 우물 위를 보십시오. 오색 서기가 뻗어나오고 있습니다.”

손견이 보니 과연 그랬다. 이에 손견은 군사들을 불러 횃불을 밝 히게 한 뒤 우물 안을 살펴보게 했다.

우물 안으로 내려간 사졸은 얼마 뒤 한 부인의 시체를 건져 올렸 다. 죽은 지 여러 날이 된 것 같았으나 조금도 썩지 않은 시체였다. 궁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궁녀 같았는데 이상한 것은 목에 비단 주 머니 하나를 걸고 있는 일이었다.

“그걸 끌러보아라.”

이상하게 여긴 손견이 다시 곁에 선 군사에게 영을 내렸다. 끌러 보니 비단 주머니 안에서 붉고 작은 갑(匣)이 나오는데 금으로 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더욱 기이하게 여긴 손견은 이번에는 손수 그 자물쇠를 열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옥새인 듯싶은 도장이었다. 둘레가 네 치에 윗부분에는 다섯 마리의 용을 아로새겼 고 떨어진 모퉁이는 금으로 때워놓은 것으로 인면(面)에는 ‘수명어於天, 명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기수영창(永昌, 오래가고 길이 번창하리라)’

이라는 여덟 자가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엇인지 알겠소?”

손견도 대강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미심쩍어 정보(程普)에게 물 었다. 손견이 거느린 세 장수 가운데서는 가장 학식이 많은 정보가 한참 그 옥새를 들여다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공, 이건 틀림없이 나라에서 나라로 이어온[國] 옥새올시다. 이걸 새긴 옥은 옛적 변화(和)가 형산(山) 아래서 얻은 것입니 다. 봉황이 돌 위에 깃들이는 걸 보고 그 돌을 들어내 초(楚) 문왕에 게 올렸던바, 문왕이 그 돌을 깨뜨리니 안에서 커다란 옥이 나왔습 니다. 이른바 ‘화씨(和氏)의 옥[璧]’이란 것이지요. 진(秦)이십육 년 초를 멸망시키고 이 옥을 얻은 시황제는 옥(玉工)으로 하여금 도 장을 깎게 하고 재상 이사에게 지금 쓰인 여덟 자를 전서로 쓰 게 해서 처음 옥새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이태 뒤인 진이 십팔 년 시황제가 동정호를 순시하다가 갑자기 풍랑이 크게 일어 배 가 뒤집히려 하자 급히 이 옥새를 물에 던져 물결을 가라앉게 한 적 이 있습니다. 천자의 위엄으로 호수의 귀신을 억누른 것이라 여겨 모두 신기해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진시 황이 화음 지방을 순시할 때였는데, 한 사람이 종자들과 함께 길을 막고 이 옥새를 바치면서 말했습니다.

‘이 물건을 조룡祖龍)에게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져버리니 사람들은 또한 신기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조룡이 황제인 자신을 뜻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그 옥새를 거두어들였습니다. 이듬해 시황제가 죽 자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고조께서 천하를 얻게 되시자 시황제의 아들 영(嬰)이 이 옥새를 고조께 바쳤습니다. 이후 전한 평제(帝) 때까지 이 옥새는 한실의 위엄을 대신했습니 다. 하지만 역적 왕망이 일어 평제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 울 무렵 또 한차례 회오리가 일었습니다. 옥새를 내어주던 효원(孝 元) 황태후가 왕망의 손발인 소헌(蘇獻)과 왕심(王)을 이 옥새로 내리쳐 한 모퉁이가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금으로 때운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행히 왕망의 찬역은 오래가지 못하고 후 한의 광무제(武帝)께서 천하를 평정하시매 옥새는 다시 한실로 돌 아왔습니다. 광무제께서 의양 땅에서 이 옥새를 얻으신 이래 대를 이어 열성께 전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듣기로 십상시의 난 때 이 보물을 잃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어린 소제(少帝)를 끌고 북 망산으로 도망치는 와중에서 없어져버렸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 옥새가 주공의 손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 이는 틀림없이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한나라의 운세가 다했으니 주공께서 구오九五, 황제 를 나타내는 수)의 자리로 나가시란 뜻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이 곳은 결코 오래 있을 땅이 못됩니다. 제후들은 겉으로는 충의를 내 걸고 있으나, 속으로는 각기 딴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니 주공께서 옥새를 얻으신 줄 알면 힘을 합쳐 빼앗으려 들게 분명합니다. 속히 강동으로 돌아가시어 따로 큰일을 도모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주인의 가슴속에 은밀히 불타고 있는 야심을 알고 있는 정보는 거리낌없이 그렇게 권했다. 다름 아닌 정보의 말이고 보니, 손견도 더는 속마음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얼마 전의 순수한 감회는 깨끗이 잊고, 치솟는 야망에 떨리는 목소리로 정보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대의 말이 꼭 내 뜻에 맞소. 날이 밝는 대로 병을 핑계하고 이 곳을 떠나도록 하겠소.”

그런 다음 그 자리에 있던 군사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옥새를 얻 은 일이 다른 제후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어떻게 보면 동 탁보다도 먼저 딴 뜻을 드러낸 셈이었고, 뒷날 천하를 다투게 될 군 웅 가운데서도 가장 앞서 찬역簒逆)의 기치를 올렸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손견 개인의 성격보다는 출신이나 배경과 연관이 깊다. 원소는 대를 이은 명문의 자제였고, 조조 역시 비록 황문(黃門) 이라 할지라도 대대로 두터운 한나라의 녹봉을 받아온 집안의 후예 였다. 유비처럼 한나라 종실이란 끈에 묶인 이도 있고, 공손찬이나 유표처럼 유가적인 충성의 가르침에 얽매인 이도 있었으나, 손견에 게는 그런 충성의 굴레가 없었다. 그의 벼슬이라 했자 스스로 쟁취 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조상을 거슬러보아도 특별히 한실로부터 충 성을 요구당할 만큼 은덕을 입은 일도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손견이 옥새를 얻은 경위를 지켜본 군사들 가운데 원소와 같은 고향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손견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기회로 자신을 높이고 싶었다. 어둠을 틈타 손견의 진채를 빠져나온 뒤 똑바로 원소의 군막을 찾았다.

손견의 군사 하나가 한밤중에 자기를 찾아와 뵙기를 청한다는 말 을 듣자 원소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졸개임을 꺼리지 않고 자기의 군막으로 들이도록 했다.

“너는 손문대(臺)의 수하로서 이 깊은 밤에 어찌 나를 찾았느냐?”

그 군사가 불려오자 원소가 은근하게 물었다.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맹주께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 이렇게 감히 찾아뵈었습니다.”

“날이 밝은 뒤 손문대를 통해서는 안 될 말이냐?”

“그렇습니다. 바로 손장군에게 관계된 일인즉, 그랬다간 제 목숨이 남아나지 못합니다.”

그제서야 원소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그토록 엄중하냐?”

“실은 손장군께서 조금 전 전국 옥새를 얻으셨습니다.”

“뭐? 옥새를?”

원소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옥새가 없어 진 일은 십상시의 난 때 가장 중요한 몫을 했던 원소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손견의 군사는 한층 신이 나 주워섬겼다.

“네. 건장전 우물 속에서 죽은 궁녀의 시체를 건져내니 그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손장군께서는 그 옥새를 깊이 감추시고, 저희들에게는 만약 그일을 입 밖에 내면 목을 베리라 엄포를 놓았습니다.”

“뭐라고? 손견, 그자가?”

“뿐만이 아닙니다. 내일이면 반드시 맹주님을 찾아와 병을 핑계로 강동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것입니다. 전국 옥새에 기대어 참람된 뜻을 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듣고 보니 큰일이었다. 이에 원소는 그 군사에게 많은 상을 내리 고 몰래 자기의 진채에 숨겨놓은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튿날 과연 손견은 날이 새기 무섭게 찾아와 불쑥 돌아갈 뜻을 표했다. “이 견(堅)에게 병이 있어 잠시 장사로 돌아갈까 합니다. 병을 다 스린 뒤에 다시 돌아와 근왕의 대의를 받들기로 하고 이제 특히 맹 주인 공께 작별을 고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평소의 당당하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리 는 듯했다. 원소가 빙긋이 웃으며 그런 손견의 말을 받았다. “내가 알기로 공의 병은 옥새를 얻어서 생긴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 말에 손견은 일시 안색까지 변했다. 그러나 이내 시치미를 떼 며 되물었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씀이십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지금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해로운 것들 을 없애고자 함이 아니오? 그런데 공은 어찌 사사로이 딴 뜻을 품으 시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옥새는 나라의 보물이오. 공이 그 옥새를 얻었으면 마땅히 여러 제후에게 보인 뒤 맹주인 내게 맡겨야 할 것이오. 그리하여 동탁을 주멸한 뒤 조정에 돌려줘야 할 것인데, 이제 공이 숨겨가지고 떠나 려 하니 그게 무슨 뜻이오?”

그 말을 듣자 손견은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한 이상 끝까지 그대로 밀고 가보는 수밖에 없 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못 불쾌한 투로 원소에게 되물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실로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째서 그 옥 새가 제게 있단 말씀입니까?”

“그럼 건장전 우물에서 꺼낸 그 물건은 지금 어디 있소?”

원소가 한층 빈정대는 얼굴로 손견을 다그쳤다. 그에 비례해서 손 견의 부인도 더욱 완강해졌다.

“모르는 일이오. 본래 내게 없는 것을 어찌 이렇게 억지로 내놓으 라 하시오?”

말투까지 거칠게 나왔다. 그러자 원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 지고 대신 노기 띤 목소리로 을러댔다.

“닥치시오. 빨리 내놓는다면 스스로 화를 만드는 일은 면할 것이오.” 

그러자 손견은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소리쳤다.

“내가 만약 그 보물을 얻었고, 또 사사로이 그걸 감추고 있다면, 다른 날 제 명에 곱게 죽지 못하고 칼과 화살 아래 목숨을 잃을 것 이오!”

손견이 그렇게까지 나오자 아직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제후들 은 절로 손견의 편이 되었다. 오히려 원소를 말려 두 사람의 다툼을 끝내려 들었다.

“손문대가 저렇게까지 맹세하니 틀림없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맹주께서 잘못 아신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 증거를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소.”

원소는 제후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좌우를 시켜 간밤의 그 군사를 불러오게 했다.

“이 사람을 보시오. 우물에서 옥새를 건져낼 때 이 사람이 있었소, 없었소?”

손견이 보니 지난밤 건장전 우물에서 궁녀의 시체를 건져낼 때 함께 있었던 자기의 군사였다. 그러나 당황함에 앞서 노기부터 치솟 았다.

“이놈이 헛소리로 맹주와 나를 이간시키려 드는구나. 주인을 저버 리고 도망친 죄만도 큰데 이제 제후들 사이를 이간시키려고까지 했 으니 어찌 살기를 바라는 놈이겠느냐?”

손견은 그렇게 꾸짖은 다음 칼을 뽑아 그 군사를 죽이려 했다. 그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원소가 아니었다. 참고 있던 노기를 터뜨리며 마찬가지로 칼을 뽑아 손견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네가 이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것은 바로 그렇게 입을 막아 나를 속이려는 수작이다. 굳이 이 군졸을 베려면 내 검부터 꺾고 가거라.” 

이때는 원소의 상장인 안량과 문추가 당도한 뒤였다. 주인이 노하 여 칼을 뽑는 걸 보자 그들도 각기 칼을 빼들고 원소를 감싸며 손견 을 노려보았다. 그걸 본 정보와 황개, 한당 등 손견의 장수들도 가만 히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각기 칼을 빼들며 손견의 좌우로 몰려 왔다.

자칫하면 동탁을 치기에 앞서 집안 싸움부터 먼저 치를 판이었다. 기주의 용장(勇將)들과 강동의 맹장(猛將)들이 칼을 맞겨루고 있으 니어느 쪽이 이길지 실로 짐작조차 어려웠다.

영문도 모르고 그들의 다툼을 보고 있던 제후들은 크게 놀랐다. 어느 편이 이기든 자기들로서는 큰 손실이요, 가만히 있는 동탁만 이롭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는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 었다. 일제히 싸움 가운데 뛰어들어 말리는데, 우선은 손견더러 자 기의 진채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아직 자기들이 본 것만으로는 어느 쪽의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어 쉬운 대로 두 사람을 떼어놓는다는 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제후들이 나서서 말리자 손견은 은근히 반가웠으나 더욱 성난 기 색을 짓고 한동안을 버티다가 마침내 마지못한 듯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진채로 돌아오기 무섭게 명을 내렸다.

“모두 진채를 뜯고 강동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

명을 받은 손견의 군사들은 지체없이 진채를 뜯었다. 손견은 그들 을 이끌고 그날로 낙양을 떠나 자기의 근거지인 강동으로 향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가까운 곳에 진채를 벌이고 있던 제후들 도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한편 손견이 군사들을 이끌고 자기의 근거지로 돌아가버렸다는 말을 듣자 원소는 크게 노했다. 손견에게 옥새를 주어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급히 사람을 뽑아 형주 자사 유표(劉表)에게 한 통의 글을 보냈다.


‘지금 강동의 손견이 참람된 뜻을 품고 전국 옥새를 감추어 제 근 거지로 돌아가고 있소이다. 공께서는 그 길목을 막으시어 반드시 나 라의 막중한 보물을 되찾도록 하십시오……………..’

동탁을 쫓아간 조조가 형양에서 싸워 크게 졌다는 소식이 원소에 게 전해진 것은 바로 손견이 떠난 다음 날이었다. 그가 옥새를 가진 줄 뻔히 알면서도 손견을 놓아 보낸 일로 심사가 한껏 뒤틀려 있던 원소였으나 역시 맹주로서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노여워서이건 부끄 러워서 이건 조조가 낙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멀리 하내에 둔병한 것 을 알자 곧 사람을 보내 조조를 자신의 진채로 청해 들였다.

조조가 마지못해 가서 보니 원소는 제후들과 함께 크게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 시절부터의 정분 때문인지, 아니 면 충분히 뒤를 밀어주지 못해 조조의 패배를 더욱 참담하게 만든 데 대한 맹주로서의 책임 때문인지 조조가 당도한 뒤에도 위로하는 태도가 자못 은근했다. 다른 제후들도 어딘가 무안해하는 기색이 엿 보였다. 그 때문에 조조는 오히려 격앙되었다. 몇 순배 술이 돌자 일 어나 큰 소리로 개탄했다.

“내가 처음 대의로 일어나 나라를 위해 역적 동탁을 없애고자 할 때 여기 계신 공들 또한 의를 짚어 호응해 오셨소이다. 그동안 우리 는 어려운 싸움을 겪었으나 마침내 낙양에 이르렀소. 그런데 뜻밖에 도 동탁은 천자를 끼고 장안으로 달아났지만, 그 도적을 잡을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소이다.

처음 이 조조의 뜻은 이러하였소. 먼저 맹주인 원본초(袁本初)께 서는 하내의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맹진과 산조 땅에 머무르시어 역 적 동탁이 있는 장안의 동쪽 날갯죽지를 자르는 것이오. 그밖에 나 머지 제후들도 그 근거지에 따라 한곳을 맡되, 성과 땅을 굳게 지키 고 오창산(山)에 근거를 마련한 뒤, 환원(輟과 대욕谷) 두 관을 막아 그 험한 요지를 제압해야 할 것이오. 그다음은 원공로(袁公路)가 남양의 군사를 이끌고 단절 땅을 거쳐 무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장안은 사방에서 외로워지고, 장안 동쪽을 지키는 경 조윤(兆)과 장릉 북쪽을 지키는 좌풍익(馮과 위성 서쪽을 지키는 우부풍(風) 등 삼보(三輔)가 아울러 놀라 떨게 될 것이외 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할 뿐 굳이 적 과 싸울 필요가 없소. 거짓으로 나날이 군사가 느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천하의 형세가 우리를 따르고 역적을 주살하려는 쪽으로 기운 듯 꾸미면, 모든 일은 절로 이루어진다 생각했소. 그런데 이제 이곳 에 지체하여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천하의 여망을 크게 잃고 있으니, 어찌 한탄할 일이 아니겠소? 이 조조 실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 하겠소이다.”

원소 이하 모든 제후들이 곰곰 생각해보니 그 같은 조조의 말에 한 치의 그릇됨도 없었다. 그러나 또한 조조가 작은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예기만 꺾이고, 강동의 호랑이 손견마저 떠나버린 그 마당에 서는 이미 소용없게 된 계책이었다. 다시 힘을 모은댔자 이미 충분 한 시간을 번 동탁이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리 만무하였다.

이에 아무도 조조의 말에 응대하지 못하고 어색한 가운데 술자리 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 조조의 참뜻은 지난 허물을 들춰 제후들을 원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후들을 격동시켜 늦은 대로 다시 한번 그들을 분기시키고자 한 것이었건만, 아무도 따라주지 않으니 생각을 바꾸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자들은 모두 딴 뜻을 품은 야심가의 무리거나 내 북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어중이떠중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과 무슨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랴!’

조조는 그렇게 단정하고 남은 자기의 군사들을 수습해 양주를 바라고 떠나갔다.

손견에 이어 조조까지 떠나가는 걸 보고 공손찬도 유비와 관우, 장비를 불러 말했다.

“원소가 무능한 위인이라 제후들을 제대로 통어하지 못하네. 오 래잖아 반드시 제후들 간에 변고가 있을 것이네. 우리들도 이만 떠 나세.”

그리고 진채를 뽑아 자신의 근거지인 북평으로 돌아가버렸다. 유 비 또한 눈과 귀가 있으니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투덜대는 관, 장 두 아우와 원래 이끌고 온 오천 군마를 수습해 평원현으로 되돌아갔 다. 조정에서 받은 현령 자리인 만큼 그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동탁에 항거하여 군사를 일으킨 이상 그대로 유지될 리 없지만, 이 미 그 부근은 동탁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 돌아갈 수가 있 었다. 거기다가 그런 유비의 뒤에는 공손찬이란 강력한 후원자까지 버티고 있으니 누가 감히 평원을 넘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