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6화 : 천하를 위해 내던진 미색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6화 : 천하를 위해 내던진 미색


천하를 위해 내던진 미색

손견이 유표와 싸우다 죽었다는 소문은 멀리 장안에 있는 동탁의 귀에도 들어갔다. 낙양까지 진격한 제후군(諸侯軍)이 내분으로 흐지 부지 흩어진 데다, 그 주동이라 할 수 있는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까 지 말려 위신을 되찾은 동탁은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견이 죽었다니 가슴과 배의 무거운 병이 나은 듯하구나. 실로 큰 걱정거리 하나를 덜었다.”

동탁이 그렇게 기뻐하다가 문득 곁에서 시중하는 자들에게 물었다.

“그 아들이 시신을 수습해 갔다는데 올해 나이가 몇이냐?”

워낙 손견을 두려워했던 터라 그 아들 손책에게까지 걱정이 미쳤던 것이다.

“이제 열일곱이라 합니다.”

물음을 받은 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걱정거리가 못 되었다. 늙은 동탁에게는 열일곱 살의 손책이 한낱 철부지로만 떠올랐다. 이제 겁날 게 없어진 동탁은 나날이 그 교만 함과 횡포가 더해졌다. 스스로를 상보(尙父, 아버지와 같이 높임을 받는 사람)로 높여 황제조차 그렇게 부르도록 하니 그 참람됨이 지난날 십상시의 우두머리 장(張)을 넘었다. 영제(靈)가 장양을 아부 (阿父)라 부른 것은 환관들의 아첨에 넘어간 황제 스스로가 한 일이 지만 동탁은 헌제(獻帝)를 강요하여 상보로 부르게 한 때문이었다. 또 동탁은 아우 동민(董)을 좌장군(左將軍)에 호후(鄯侯)로 높이 고 조카 동황(董璜)은 시중으로 금군(軍)을 이끌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董)가 성을 쓰기만 하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열후(列侯)에 봉하니 천하는 그대로 동탁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더욱 참람된 것은 장안에서 백여 리쯤 되는 곳에 새로 미 오성(倻塢城)을 쌓은 일이었다. 자기 자신의 거처로 삼기 위해 백성 이십오만을 끌어내 성곽과 궁실을 지었는데 성곽은 그 높이며 두께 가 한 가지로 장안성(長安城)과 똑같았다. 궁실은 장안성 안의 금궁 (禁宮)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고 창고에는 이십 년을 먹을 곡식을 쌓 아 뜻 아니한 변고에 대비케 했다. 뿐만 아니라 민간 소년들과 미녀 팔백 명을 뽑아 그 안에 살게 하고, 자신의 가속들도 그리로 옮겨 호 사를 누리게 하니 도성인 장안성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동탁 자신도 평소에는 항상 그 미오성에 머물며 미녀와 주지육림 (酒池肉)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잦으면 보름에 한 번이요, 뜸하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장안성을 드나들었는데, 그때는 공경대부(公卿大夫)며 제후들이 횡문(橫門) 밖까지 나가 그를 맞아들이고 보내었다.

그때 동탁은 길가에다 장막을 치고 크게 잔치를 벌여 거기 나온 백관들과 술을 마시는 걸 통례로 삼았다. 명목이야 그들을 대접한다 는 것이었지만, 속셈으로는 그 자리를 통해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대신들을 겁주기 위함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동탁이 횡문을 나서자 백관이 모두 배웅을 나왔다. 동탁은 여느 때처럼 수레에서 내려 장막에 든 뒤 거기 나온 백관들과 술잔을 나누었다. 그런데 잔치가 파할 무렵 복지(地)에서 난을 일으켰다 잡힌 항졸(卒) 수백이 끌려왔다. 동 탁은 마침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그 항졸들을 처형하도 록 했다.

참으로 끔찍한 혹형이었다. 어떤 자는 그 손발을 자르고, 어떤 자 는 눈알을 뽑았다. 어떤 자는 그 혀를 잘랐으며 더러는 큰 솥에 삶아 죽이기까지 했다. 하나같이 차마 눈뜨고 못 볼 형벌이었다. 그 구슬 픈 울음소리와 괴로운 외침이 하늘까지 사무치니 백관들은 한결같 이 두려움에 질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걸 노린 동탁은 태연했다. 오히려 그 광경이 즐거운 듯 마시고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자신에게 항거하는 자는 모두 그렇게 죽으리라는 엄포의 효과를 한층 높이려는 수작이었다. 또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궁궐 안 성대(省臺)에서 술자 리를 벌였다. 백관들을 두 줄로 늘어 앉히고 한창 술잔을 돌리고 있는데 여포가 급하게 뛰어들어와 동탁의 귀에다 몇 마디 수군거렸다.

듣고 있던 동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으응, 그렇단 말이지…….”

그러고는 술자리에 끼어앉은 사공장온(溫)을 가리키며 여포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자를 데려가거라.”

그러자 여포는 당 위로 올라가 사공 장온을 왁살스레 끌어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장온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여포에게 끌려가 는 모습에 백관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마지못해 잔을 비워도 술인지 소태 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여포에게 끌려간 사공 장온은 오래잖아 목만 붉은 쟁반에 담겨 돌아왔다. 아직도 시뻘건 피가 흐르는 장온의 목을 본 여러 벼슬아 치들은 놀라 혼이 다 빠져나간 듯 그 까닭조차 묻지 못하고 벌벌 떨 며 동탁의 눈치만 살폈다. 그걸 즐기듯 살피고 있던 동탁이 이윽고 만족하는 듯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제공들은 놀라지 마시오. 장온이 원술과 한 끈으로 이어져 몰래 나를 해하고자 하였소. 사람을 시켜 원술에게 보낸 밀서가 잘못하여 내 아들 봉선(奉先)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일이 드러난 것이외다. 역적의 목을 벤 것은 그런 까닭이 있어서이니, 무고한 공들은 놀라 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너무도 조용하고 부드러워 오히려 듣는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그 자리에 있던 뭇 벼슬아치는 하나같이 더 이상 자세한 까닭을 캐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술잔만 비우다가 동탁이 미오성으로 돌아간 뒤에야 말없이 쫓기듯 흩어졌다.

살펴보면 동탁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즐겨 사용한 수단은 공포였고 그의 통치는 이른바 공포 정치인 셈이었다. 하지만 백성들 을 위압하고 적대 세력을 꺾는 데에 그 어떤 수단보다 빠르고 확실 한 효과가 있는 것에 못지않게 계속되기 어렵고 결말이 위험한 것이 또한 공포 정치이다.

공포 정치가 계속되기 어렵다는 것은 인간의 감각이 가진 마비란 특성 때문이다. 다른 감각과 마찬가지로 공포감도 거듭되면 마비되 게 마련이다. 따라서 공포를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쪽은 거듭될수록 보다 강력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걸 개발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만 보 다 잔혹해지고 야만스러워지는 길뿐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미 공 포감이 마비된 이들에게는 효과도 없이 이용하는 쪽만 광란적인 가 학 심리로 몰아넣어, 적대 세력에겐 한층 설득력 있는 대의명분을 무기로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 공포 정치의 한계가 있다. 공포 정치의 결말이 위험스럽다는 것은 언제나 공포 정치가 비극 적으로 끝난다는 데 있다. 정당한 승계가 아닌 권력의 상실은 대개 비극적이긴 하지만 공포 정치의 종말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다. 그 주 인공은 바로 자신이 사용한 잔혹하고 야만적인 수단에 의해 무대에 서 굴러떨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는 아주 희귀한 예로 비극적인 결말을 모면한 경우가 있지만, 그 행운이란 것도 결국은 죽음이란 자연의 비극적 결말이 적대 세력이나 더 참을 수 없게 격분한 민중 들의 동해(同) 보복을 앞당겨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동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동탁이 휘 두르는 공포란 철권에 질려 있는 것 같았지만 그가 틀어잡고 있는 조정에서도 이미 마비의 증상과 아울러 더 참을 수 없다는 격분의 분위기가 일고 있었다. 그 대표격인 사람이 바로 사도 왕윤(允)이 었다.

왕윤은 자가 자사(師)로 태원군(太原郡) 기(祁) 땅에서 나고 자 랐다. 어려서부터 절의를 숭상하고 공명에 뜻을 두어 학문에 전심하 였으나 특히 불의를 참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맑은 이름을 얻었다.

아직 이름 없는 군리(郡)로 있던 열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환관 인 조진(趙)이란 자가 탐욕과 횡포가 심하여 현의 큰 근심거리였 지만 그때만 해도 환관들의 세상이라 아무도 감히 손대지 못하고 있 었다. 그런데 왕윤이 겁 없이 조진을 잡아다 죽여버렸다.

그러자 조진의 형제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다른 환관들의 도움을 입어 영제에게 왕윤이 무고한 조진을 죽였다고 참소하니 환관들의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믿던 영제는 크게 노했다. 곧 태수 유질 (劉)에게 명하여 왕윤을 가두고 죄를 가려 죽이게 했다. 그때 왕윤 은 다행히 죽음을 면했으나 꼭 삼 년을 옥살이하고서야 고향으로 돌 아갈 수 있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 뒤 다시 군리로 나갔는데 모시는 태수 왕구(王球)가 노불(路佛)이란 이름도 공도 없는 인물을 중히 쓰 려 했다. 강직한 왕윤이 그걸 보고 있을 리 없었다. 험한 얼굴과 심 한 말로 그 그릇됨을 따지니 왕구는 크게 성이 나 그를 죽이려 했다.

다행히 이웃 군의 태수가 듣고 왕윤을 구했는데, 그로 인해 왕윤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왕윤의 그 같은 성품은 조정으로 들어간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예주 자사로 황건적 토벌에 나갔다가 십상시인 봉서, 장양 등이 황 건적과 내통한 것을 알아낸 것도 그였으며, 그들을 벌하자고 주장하 다가 오히려 참소를 입어 옥살이까지 하기도 했다. 지난번 조조를 시켜 동탁을 찌르려다 실패한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사공장온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던 날도 왕윤은 그 자리에 있 었다. 동탁의 위세에 눌리어 한번 따져 물어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날 지낸 일을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공의 목을 쟁반에 담아 술자리에 내놓은 동탁의 방자하고 잔혹함을 더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분하고 원통한 것은 마음뿐, 동탁을 죽일 마땅한 계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나선 왕윤이 지팡이 를 끌고 뒤뜰을 거닐기 시작했다. 밤이 깊고 달이 높이 뜨도록 궁리 를 해보았지만 방 안에서 떠오르지 않던 묘안이 뒤뜰을 거닌다고 솟 아날 리 없었다. 밤과 함께 시름만 깊어갈 뿐이었다.

그러다가 복받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해 국화 덤불 곁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눈물을 짓고 있는데, 문득 모란정(牡丹亭) 쪽에서 긴 한숨 과 짧은 탄식이 엇갈리며 들려왔다. 괴이한 일이라 여긴 왕윤은 발 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가서 살펴보았다. 집안의 가기, 노래와 춤 으로 시중 드는 여종)인 초선(貂蟬이 홀로 정자에 나와 있었다.

초선은 어려서부터 왕윤의 집으로 뽑혀와 노래와 춤을 익혔는데, 열여섯 살인 그 무렵에는 그 재주와 아울러 아름다움도 뛰어난 가기로 자라 있었다. 왕윤은 특히 그런 초선을 사랑하여 친딸 못지않게 대했고, 초선 또한 왕윤을 아비처럼 우러르고 따랐다.

“천한 것이 무슨 사사로운 정에 취해 이토록 요사스런 짓거리냐?”

한참이나 초선의 한숨과 탄식을 듣고 있던 왕윤이 소리 높여 꾸 짖었다. 평소에 아끼던 초선이었지만, 편치 않은 심기로 들으니 모 두가 정인(人)을 그리는 소리로만 느껴져 버럭 역정이 인 까닭이 었다.

“천한 계집이 어찌 사사로운 정이 있겠습니까?”

초선이 깜짝 놀라며 황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왕윤이 달빛에 의지해 보니 아리따운 아미에 한 가닥 수심이 어렸으나 사된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왕윤은 조금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며 물었다.

“사사로운 정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밤이 깊은데 긴 탄식에 잠겨 있느냐?”

“용납하여 주신다면 감히 아뢰겠습니다. 진작부터 아뢰고자 하였 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가슴 깊이 감추고 지내온 말이옵니다.”

초선이 문득 옷깃을 여미며 진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윤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 여겨 재촉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보아라.”

초선이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일찍부터 대인의 은혜를 입어, 이 몸이 기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이며 예의범절까지 크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낳은 이도 부모지만 기르신 이 또한 부모란 말이 있으나, 제가 대인께 입은 은혜는 실로 견줄 데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뼈와 살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한들 그 은혜의 만에 하나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런데 이즈음 뵙기에 대인의 미간에 늘 근심스런 기색이 떠나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나라에 큰일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기다가 또 오늘 밤은 잠자리에조차 들지 않으시고 이토록 밤이슬을 맞으시며 시름에 잠겨 뒤뜰을 거니시니 이 천한 것이 어찌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하여 먼빛으로 대인을 살피다가 스스로 감회를 억 제하지 못해 한숨과 탄식을 토한 것이 그만 대인께 들린 것 같사옵 니다. 그것이 대인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엎드려 용서를 빌 뿐이오 나, 먼저 감히 묻고자 합니다. 혹 대인의 근심을 더는 데 저 같은 것 은 쓸모가 없을는지요? 만 번 죽더라도 대인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 면 기꺼이 이 천한 몸을 던지고자 합니다.”

듣고 보니 뜻밖의 말이었다. 그때껏 초선을 한 어린 계집으로만 보고 있던 왕윤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초선을 살폈다. 꼿 꼿하고 흔들림 없는 자태며, 수심 못지않게 차가운 결의가 어린 아 미와 눈물이 반짝이는 눈길로 미루어 건성으로 둘러대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자 초선의 아름다움이 전보다 한층 눈부시게 왕윤의 눈에 들 어왔다. 그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느끼는 순간 문득 무슨 계시처럼 왕윤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대한의 천하가 너의 손에 달리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왕윤은 기쁨을 못 이겨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그렇게 소리친 뒤 초선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오너라. 조용한 화각(畵閣)으로 가서 의논하자.”

그러면서 앞장서 초선을 인도하는 왕윤의 눈앞에는 호색한 동탁 의 모습과 아울러 아직 동탁보다는 여자에 대해 순진하지만 한번 눈 을 뜨면 앞뒤를 못 가리게 빠져들 건장하고 단순한 여포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화각에는 평소에 왕윤을 시중드는 비婢) 몇몇이 아직 잠자리 에 들지 못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윤은 그들을 꾸짖어 물 리친 뒤 초선을 청해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어떤 때보다도 공손 하고 엄숙하게 머리를 조아려 큰절을 올렸다. 초선이 놀라 황급하게 방바닥에 몸을 엎드리며 물었다.

“대인께서 어찌하여 이 천한 것을 놀라게 하십니까.”

“너는 무릇 한의 천하에 목숨 받은 것들을 가엾게 여겨다오…………….” 

그렇게 말하는 왕윤의 두 눈에서는 샘솟듯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저 같은 것이 쓰일 데가 있다면 다만 영만 내려주옵소서. 만 번 죽는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초선이 다시 한번 굳은 결의를 보였다. 그러자 왕윤은 무릎을 꿇 은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 백성은 모두 거꾸러져 죽게 되었을 만큼 위태롭고, 임금과 신하는 아울러 달걀을 재어놓은 듯 급한 지경에 빠져 있다. 네가 아 니면 이 천하를 구할 사람이 없으니, 잘 듣고 다시 한번 살펴 마음을 정하거라.

역적 동탁은 장차 천자의 자리까지 넘보고 있으되, 조정에 있는 문무의 여러 벼슬아치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동탁의 주위에서 그 악을 돕는 무리들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두려운 것은 동탁 의 맺은 아들 여포란 자다. 그 날래고 굳세기가 놀라워 힘으로는 아 무도 여포를 꺾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 밤 네 말을 듣다 보니 문득 한 계책이 떠올랐다. 이른 바 연환계(連環)다. 동탁과 여포가 하나는 드러나고 하나는 드러 나지 않은 차이는 있으나, 한가지로 호색하는 무리이니 네 아리따움 이면 능히 그들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먼저 너를 여포에게 시집보낸 뒤 다시 동탁에게 바치고, 너는 또 그 가운데서 적당히 그 들 부자를 반목하도록 만들어라. 그런 다음 여포를 시켜 동탁을 죽 인다면 큰 악을 잘라 없애는 길이요,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길이 될 것이다. 네 미색을 시랑이 같은 그들 부자에게 내던지는 것은 괴로 운 일이나, 또한 천하를 위해 큰 공을 이루는 일인즉, 어떠냐, 한번 해보겠느냐?”

그런 왕윤의 말은 간곡했다. 초선이 선뜻 대답했다.

“저는 이미 대인을 위해 만 번 죽어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아뢰지 않았습니까? 얼른 저를 그들에게 보내주옵소서. 제겐 저대로 대인의 뜻을 이루어드릴 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새어나가면 내 집안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대인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만약 그 같은 대의에 보답하지 못하면 만 자루 칼 아래 죽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왕윤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큰절로 초선에게 감사했다.

“고맙다. 다행히 역적이 죽고 한실이 다시 밝은 날을 맞을 수 있다면 그는 모두 네 공이리라.”

그런 다음 왕윤은 초선을 쓸어안고 또 한 번 비오듯 눈물을 흘렸 다. 한편으로는 박명한 가인(佳人)초선을 위한 눈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길밖에 달리 길이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눈 물이기도 했다.

동탁과 여포를 겨냥한 왕윤의 연환계는 다음 날로 곧장 펼쳐졌다. 왕윤은 집 안에 고이 간직해두었던 값지고 귀한 구슬 몇 알을 꺼내 솜씨 좋은 장인에게 내주며 그걸 박은 금관 하나를 만들게 했다. 그 리고 솜씨를 다해 만든 그 금관을 사람을 시켜 가만히 여포에게 보 냈다.

순금으로 만든 관에다 한 알만 해도 천금에 값하는 구슬이 몇 개 나 박힌 그 귀한 선물을 받자 여포는 몹시 기뻤다. 평소에 냉담하던 왕윤이 보낸 것이라 더욱 기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위세도 돌보지 않고, 몸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왕윤의 집 으로 달려갔다.

그걸 미리 헤아리고 온갖 준비를 갖춘 채 기다리고 있던 왕윤은 문 밖까지 나가 여포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좋은 술과 맛난 안주로 그득하게 상을 차려둔 후당으로 인도한 뒤 상좌에 앉혔다.

귀한 선물에다 이제는 융숭한 대접까지 받게 되자 단순한 여포는 더욱 감격했다. 목소리까지 떨리며 왕윤에게 감사했다.

“이 여포는 승상부에 속한 한낱 장수요, 사도께서는 조정의 대신이십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가 거꾸로 대접을 받는 격이 되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같은 여포의 말에는 지나친 호의에 대한 의아로움까지 들어 있었다. 왕윤이 좋은 말로 둘러댔다.

“당금의 천하에는 이렇다 할 영웅이 없는 터에 오직 장군만이 있 을 뿐이다. 여기 이 왕(王)아무개는 장군의 벼슬이 높음을 사모하 는 것이 아니라 재주를 우러러 작은 정표를 보냈을 뿐이오.”

그러자 여포는 희미하게 일던 의심마저 풀고 기쁘게 잔을 받았다. 왕윤은 여포에게 술잔을 올리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동탁과 여 포의 덕을 추켜세웠다. 혹시라도 여포가 다시 의심을 품게 될까 봐 서였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단순한 여포는 점점 우쭐해하며 신 이 나서 잔을 비워댔다.

몇 순배 술이 돈 뒤 왕윤이 시중하는 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시 몇만 남겨 자리를 좀더 은밀하고 호젓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 써 은연중에 여포의 색심(色)을 동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젊고 예쁜 시첩에게 둘러싸인 채 본채로부터 떨어진 후당에서 마 시는 때문인지 과연 오래잖아 굳어 있던 여포의 자세가 풀어지기 시 작했다. 제법 시첩들을 희롱까지 해가며 번갈아 권하는 대로 거리낌 없이 마셔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여포의 남다른 주량이 반쯤 찼다 싶을 때 왕윤은 다시 분위기를 바꾸었다. 시들마저 물러가게 하고는 그중 하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가거든 내 딸 초선이를 들여보내라. 아비가 부른다고 하면 수줍 어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약간 거나해진 여포는 젊고 예쁜 시첩들마저 내보내는 게 속으로는 싫었으나 집주인이 하는 일이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거기다가 딸을 불러낸다니 은근한 기대가 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오래잖아 방문이 열리고 푸른 옷을 입은 두 비녀의 부축을 받으 며 한껏 단장한 초선이 들어왔다. 원래도 빼어난 자색인 데다 비단 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곱게 화장까지 하고 나니 그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놀란 눈으로 그런 초선을 바라보고 있던 여포는 조금 전에 들은 말도 잊고 더듬거리며 왕윤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 누굽니까?”

“이 아이는 내 딸 초선이외다. 이 왕윤은 장군을 집안사람처럼 가 까이 여기는 터이라 이 아이를 불러 장군을 뵙게 하는 것이오.” 반나마 얼이 빠진 듯한 여포를 보고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왕윤 은 참으로 여포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초선을 향 해 엄숙하게 일렀다.

“이분은 당금에 둘도 없는 영웅인 여(呂)장군이시다. 아비와는 형 제와 다름없이 지내는 터이니 어려워 말고 술 한잔 올리도록 해라.” 

그러자 초선은 옥으로 깎은 큰 잔 가득 향기로운 술을 따라 다소 곳이 여포에게 올렸다. 잔을 받은 여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볼수록 빼어난 초선의 자색이었다. 초승달 같은 눈썹과 가을물처럼 맑고 찬 눈, 상아로 깎은 듯 오똑한 콧날에 복사꽃빛 도 는 볼, 그리고 붉은 꽃잎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하는 희고 가지런한 치아, 실로 미인을 형용하는 고금의 비유를 한군데 모아놓은 듯한 얼굴이요 자태였다.

넋 나간 듯한 여포의 꼴을 보고 왕윤은 거짓으로 취한 체하여 초선에게 말했다.

“오래 장군을 모시고 함께 술잔을 나누도록 하여라. 실로 우리 전

집안이 이분의 두터운 정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 니라.”

말하자면 술에 취한 양함으로써 딸을 외간남자의 술시중을 들게 하는 변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평소 예절에 밝고 격식에 까다로운 왕윤이었기에 혹시 그 파격적인 대우가 여포의 의심을 살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여포도 그제서야 정신을 수습하고 초선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러 나 거기에 대한 초선의 응대 또한 빈틈없기로는 왕윤에 못지않았다. 이미 그에 바쳐지기로 작정된 몸이지만, 가볍고 천하게 보이지는 않 으려 했다. 아비의 그 같은 분부가 부당하다는 듯 맑고 고운 눈을 들 어 짐짓 가볍게 왕윤을 흘기고는 돌아서 나가려 했다.

초선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여포는 애간장이 탔다. 그러나 다행히 도 왕윤이 나서서 다시 초선을 달래었다.

“장군은 나와 가장 가까운 벗이나 다름이 없다. 곁에 앉는다고 아 니 될 일이 무에 있겠느냐?”

마치 여포의 급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왕윤이 말했다. 그러 자 초선도 못 이긴 체 자리에 앉았으나 여포 쪽이 아니라 왕윤 곁이 었다.

그 같은 초선의 몸가짐은 더욱 여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건성으 로 술을 마시기는 해도 눈은 잠시도 초선을 떠나지 않았다. 금세 떠나갈 듯 떠나갈 듯 다가오는 초선에게서 느껴지는 양가의 규수다운 몸가짐이 거칠게 살아온 무부(武夫)에게는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 못지않게 고혹적이었다.

그만하면 여포와의 일은 거지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지만 왕윤은 다시 몇 순배 술잔이 오가도록 뜸을 들인 뒤에야 천천 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아이를 장군의 첩으로 보낼까 합니다만 장군께서 받아 들이실지 모르겠소이다. 이 몸이 늙어가니 누구에겐가 맡겨야 할 터 이나, 내가 마음놓고 눈감을 수 있는 길은 장군께서 거두어주시는 것뿐이외다.”

여포로서는 자기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쁜 말이었다. 그리하 여 왕윤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여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소리쳤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이 여포는 사도께 마땅히 개나 말이 주인 에게 그러하듯 힘을 다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도 기쁜 나머지 당금 천하에서 동탁에 다음가는 자로서의 체신 도 잊고 하는 말이었다.

“원 별말씀을…… 장군께서 거두어주시겠다니 오히려 이 왕아무 개의 광영이외다. 그럼 가까운 날 길일을 골라 이 아이를 장군의 부 중(府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왕윤이 정말로 고마운 듯 그렇게 말했다. 여포는 기쁜 나머지 정 신까지 아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은 비록 후(侯)의 자리에 올랐 으나 여자에 대해서는 아직 그리 능숙한 편이 못되었다. 한참을 허둥대다가 간신히 눈길을 모아 머지않아 가슴에 품게 될 초선을 바라보았다. 마주보는 초선의 눈길 역시 앞서와는 달리 은은한 추파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술자리는 한층 무르익었다. 초선에게 넋을 잃은 여포 는 지난 무용담을 자랑하며 말술로 호기를 부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날 밤 안으로 당장 초선을 품고 싶었다. 그러나 미리 세워둔 왕윤 의 계책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원래는 장군을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 가게 했으면 좋겠소만 동 태사(董太師)께서 의심하실까 두렵소이다. 뒷날을 기약하고 오늘 자 리는 이만 파하는 게 옳겠소.”

밤이 깊자 왕윤이 문득 그렇게 말하며 술상을 거두게 했다. 여포 는 아직 돌아가기 서운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취한 몸을 간신히 가 다듬으며 왕윤에게 두 번 세 번 절하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승상부로 돌아갔다.

초선을 앞세워 여포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왕윤은 다시 동탁에게 손을 뻗쳤다. 여포가 다녀간 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조당 에 들었다가 마침 동탁 홀로 있는 걸 본 왕윤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청했다.

“이윤(允)의 거처가 비록 누추하나 한번 태사의 수레를 머물게 하 여 수주(壽酒)라도 한잔 올리고 싶습니다. 다만 태사의 뜻을 몰라 미 루다가 이제 청하는 바, 태사께서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사도께서 불러주시기만 한다면 언제든 그 즉시로 달려가겠소이다.”

좀 뜻밖이긴 하지만 동탁은 기꺼이 응낙했다. 대권을 잡고 있는 그이기는 해도 조정의 원로대신이요, 곧기로 이름 높은 왕윤이 사가 (私家)로 자신을 청해준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딘가 왕윤이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감 히 자신을 상대로 무슨 큰 음모를 꾸밀 위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 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제는 올곧기로 이름난 왕윤마저 몸을 굽혀 자신에게 가까워지려 한다는 지레짐작으로 흐뭇해했다.

생각보다 쉽게 동탁의 응낙을 받은 왕윤은 그 자리에서 이튿날로 그를 청했다. 그리고 돌아오기 바쁘게 동탁을 맞을 채비에 들어갔 다. 황제의 어가라도 거기에 이를 듯한 법석이었다.

대청에 큰상을 벌이되 물과 뭍에서 나는 온갖 맛나고 값진 음식 을 빠뜨리지 않았고, 그 가운데는 특히 동탁을 위해 높은 자리를 마 련했다. 집 안팎으로 화려한 장막을 드리우는가 하면 마당은 수놓은 비단으로 덮었다.

그러나 더욱 동탁을 흐뭇하게 한 것은 그를 맞는 왕윤의 태도였 다. 이튿날 정오 약속대로 동탁의 수레가 이르자 왕윤은 조복을 갖 추고 마중을 나가 두 번 절하고 서서 기다렸다. 그리고 갑사(甲士) 백여 명을 거느린 동탁이 수레에서 내려 집 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왕윤은 여전히 당아래 머물러 있었다. 미리 마련해둔 자리에 앉은 동탁에게 두 줄로 늘어선 갑사들 끝에서 다시 공손하게 절을 올리는 왕윤의 태도는 손님을 맞는 주인이라기보다는 임금을 맞아들이는 신하에 가까웠다.

“사도께서도 당으로 오르시오.”

동탁이 흐뭇해서 그렇게 권했다. 그러나 마지못해 좌우의 부축을 받아 동탁의 곁에 앉은 왕윤은 여전히 송구스런 얼굴이었다. 동탁이 기뻐할 칭송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태사의 성덕이 크고 높으니 이윤(伊) 주공(周公)인들 태사께 미 칠 수 있겠습니까. 분부가 지엄하여 감히 나란히 앉기는 하나 어디 다 손발을 두어야 할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동탁은 더욱 기뻤다. 예전의 의심 많고 날카롭던 그였다 면 왕윤의 그 같은 표변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련만 계속되는 성공에 취한 그라 그 말을 왕윤의 진심으로만 받아들였다.

가만히 살피면 동탁의 그 같은 방심은 별로 이상한 것도 없다. 그 가 처음 낙양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갔을 때만 해도 조정은 그를 무슨 사나운 짐승이나 더러운 물건 보듯 하는 무리로 가득 차 있었 다. 어떤 자는 대의를 코에 걸고 저항했으며, 어떤 자는 지조와 절개 를 소리 높이 외치며 벼슬을 떠나갔다. 어떤 자는 그가 변방의 농군 자식이라 경멸했고, 어떤 자는 그가 학문 없는 무장이라 외면했다. 그 러나 그로부터 삼 년 후 그의 권세가 점차 확고해지면서 동탁은 너 무도 자주, 그리고 쉽게 그들이 자신에게 굴복하는 것을 보아왔다. 아직 대세가 결정되기 전에는 의를 위해 당장이라도 목숨을 내놓 을 것 같던 자들도 한번 동탁의 천하가 되자 서량에서 데리고 온 부 하들보다 더 비굴하게 따랐고, 소리 높이 지조와 절개를 내세우던 자들도 웬만한 벼슬자리 하나면 감격에 찬 얼굴로 달려와 무릎을 꿇 었다. 가문이나 학식을 내세우던 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동탁은 종종 그들의 비판이나 저항이란 것이 동탁에게 팔릴 자신의 값을 높이기 위한 술수나 아니었던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황하가 아무리 흐려도 한가닥 맑은 흐름은 있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목숨을 내던져 그의 불의와 폭정에 항거하 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세력은 너무도 미미했다. 거기다가 그마저도 너무 쉽게 들키고, 너무 어이없이 실패하니 오히려 동탁의 방심만 키울 뿐이었다.

왕윤의 거짓 아첨은 바로 그런 동탁의 허점을 겨냥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동탁이 내리는 술을 받으며 왕윤은 거듭 마음에도 없 는 치하와 공경의 말을 하여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

향기로운 술과 진귀한 안주는 줄을 이어 날라져 오고, 사죽(竹, 거문고와 피리)은 세상에 다시 없는 경사를 만났다는 듯 자지러졌다. 그리하여 날이 저물고 동탁도 거나해지자 왕윤이 문득 낯빛을 고치 며 가만히 동탁을 후당으로 청했다.

“태사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취한 중에도 소매를 끄는 왕윤의 표정에 은밀함을 원하는 구석이 있는 걸 알아본 동탁은 호위하던 갑사들까지 물리치고 후당으로 따 라 들어갔다. 거기서 왕윤은 다시 한차례 동탁을 추켜세운 뒤 갑자 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제가 젊을 때부터 천문 보는 법을 익혀온 터라 나잇살이나 먹은 이제는 좀 알 듯도 합니다. 요즈음 밤마다 하늘의상[乾]을 살펴본 바, 한나라의 기수(氣)는 이미 다한 듯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태사 의 공덕은 천하에 떨치니, 순(舜)이 요(堯)를 잇고 우(禹)가 순을 잇 듯 태사께서도 한을 이으셔야 할 것입니다. 실로 하늘과 사람의 뜻에 아울러 합당한 일입니다.”

듣고 보니 왕윤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뜻밖인 데다 내용 도 너무 엄청난 것이라 동탁도 잠시 아연한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왕윤을 살피다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어찌 감히 그걸 바라겠소?”

“예부터 ‘도로 무도함을 치고, 덕이 없는 자는 덕 있는 이에게 천 하를 내어준다[有道伐無道 無德讓有德]’란 말이 있습니다. 바로 태사 께서 한을 이으심이 그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찌 분에 넘치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왕윤이 목소리까지 가다듬어 다시 동탁을 부추겼다. 표정 또한 조 금도 맘에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제서야 동탁도 활 짝 웃으며 말했다.

“만약 천명이 내게로 돌아온다면 사도께서는 마땅히 그 원훈(元勳)이 되리다.”

어느새 동탁의 눈에는 왕윤마저 한실에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서 부귀와 영달을 구하는 무리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정성을 다한 대 접과 전에 없던 아첨의 속사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윤은 거기다 한술 더 떴다. 정말로 당장에 큰 벼슬이라도 얻은 듯 그 같은 동탁의 말 한마디에 허연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감사했 다. 동탁은 이미 천자의 자리에라도 오른 기분이었다. 황망한 듯 손 을 저으며 겸양을 떨었지만 입은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다. 이어 왕 윤은 짐짓 분위기를 은밀하게 만들기 위해 어둑한 대로 놓아두었던 방 안에 촛불을 밝히고 물리쳤던 계집종들을 불러들였다.

“태사께 올릴 진짓상 준비는 어떻게 되었느냐?”

왕윤이 그렇게 묻기 바쁘게 음식과 술이 곁들여진 상이 다시 후 당 안에 차려졌다. 낮에 못지않게 풍성한 차림이었다. 왕윤이 다시 동탁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교방(敎)이 춤과 노래를 가르치나 그 풍류가 태사께 바쳐올리 기에는 모자란 데가 있습니다. 마침 제가 기른 가기가 하나 있어 그 재주가 자못 볼만하기로 감히 태사께 바쳐올리고자 합니다.” 

“매우 좋은 일이오. 사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보고 싶구려.” 

동탁도 기꺼이 허락했다. 그러자 왕윤은 아른아른한 발을 드리우 고 부는 것이며 퉁기는 것[竹]을 벌이게 한 뒤, 초선을 불러들여 발 뒤에서 춤추게 했다. 곧 생황 소리가 방안에 가득해지며 미리 비 단과 보석으로 단장하고 기다리던 초선이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는 지난날 미인 많기로 이름났던 소양궁(昭陽 宮)의 궁녀가 되살아난 듯하고, 초양왕(楚讓王)을 넋빠지게 한 무산 (巫山)의 신녀(神女)가 거리로 내려온 듯했다. 두 팔을 휘저어 바삐 휘돌면 동정호의 봄을 나는 기러기요, 버들잎을 스치는 제비 같았으 며, 느릿느릿 멈추어 서면 아름다운 누각에 걸린 흰 구름이요, 바람 에 흔들리는 한 떨기 고운 꽃이었다.

발을 사이에 두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탁은 그대로 얼이 다 빠 져나가는 듯했다. 거기다가 적지 않이 오른 술도 초선의 춤추는 자 태를 한층 아리땁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슬몃 색심이 동한 동탁은 한차례 춤이 끝나기 무섭게 초선에게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왕윤이 곁에서 얼른 거들었다.

“태사께서 너를 부르신다. 와서 인사드려라.”

그러자 초선은 마지못한 듯 발을 걷고 나와 동탁에게 공손히 절 을 올렸다.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드는 걸 보니 실로 뛰어난 자색이었 다. 천하의 권세를 오로지한 지 삼 년, 미인이라면 궁녀로부터 여염 의 아낙까지 숱하게 안아본 동탁이었으나, 가까이서 한번 초선을 보 자 자기는 한번도 미인을 안아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동탁은 갑자기 말까지 더듬거리며 왕윤을 돌아보고 물었다.

“이 미인이 누구요?”

“저희 가기 초선입니다.”

왕윤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대답했다. 동탁이 거슴츠레한 눈으로 다시 한번 초선을 살피다가 불쑥 왕윤에게 말했다.

“가기라면 노래도 할 줄 알겠구려. 한 곡조 듣고 싶소이다.”

“노래도 제법 흉내는 낼 줄 압니다. 태사께서 바라신다면 한마디 불러 올리게 하겠습니다.”

왕윤이 그렇게 대답하고 초선에게 일렀다.

“태사께서 네 노래를 원하신다. 일신의 광영으로 알고 재주를 다 해보아라.”

그러자 초선은 수줍은 듯 동탁과 왕윤을 훔쳐본 뒤 가만히 장단을 맞추는 데 쓰는 단판(板)을 집어들었다.

곧 은쟁반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초선의 음성이 방 안을 가만히 떨어 울렸다. 시인이 그 모습을 이런 시로 그려냈다.

한잎 앵도꽃이 새빨간 입술로 열린 듯,

-點櫻花啓絳辱

옥을 바수어 따스한 봄 뿜어내나

兩行碎玉噴陽春

정향 같은 혀에 숨은 칼날 토하듯 후려

丁香舌吐橫鋼劍

나라 어지럽히는 간사한 도적 목 베려 하네.

要斬奸邪亂國臣

그러나 초선의 혀에 숨은 칼날을 알 리 없는 동탁은 더욱 홀린 듯 반했다. 노래가 끝나자 초선의 솜씨를 크게 칭찬하고 듬뿍 상을 내 렸다. 왕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초선에게 말했다.

“너는 그같이 과분한 상을 받고도 어찌 가만히 있느냐? 태사께 수 주라도 올리도록 하여라.”

초선이 술을 한잔 가득 부어올리자 동탁은 단숨에 들이켜고 물었다.

“올해 나이가 몇이냐?”

“천한 몸 이제 열여섯이옵니다.”

“너는 참으로 선녀와 같이 아름답구나. 내 일찍 너 같은 미색과 재주는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되면 왕윤이 뜻하는 바는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 다. 하지만 왕윤은 조금도 기쁨을 내색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갔다.

“태사께서 천한 계집을 높이 보아주시니 이 윤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저 아이를 태사께 바치고 싶사오나 받아들여주실지 몰라 망 설이고 있을 뿐입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가장 공경하는 체 그렇게 말했다. 마음은 있어 도 차마 조정 원로대신의 가기까지 뺏어갈 수는 없어 군침만 흘리고 있던 동탁은 왕윤의 그 같은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입이 귀밑 까지 벌어져 감사해 마지않았다.

“사도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될지 모르 겠소이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저 아이야말로 승상의 총애를 입게 되었으니 그 복이 얕지 아니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탁의 눈앞에서 사람을 불러 명했다.

“어서 전거(車)를 준비하도록 하라.”

당장 초선을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벌써 색심이 동할 대로 동한 동탁도 그런 왕윤의 서두름을 말리지 아니했다.

곧 털로 짠 휘장을 드리운 호화로운 수레가 준비되고, 새로이 단 장을 마친 초선이 그 위에 올랐다. 동탁의 승상부로 가기 위함이었다. 초선이 자기의 부중으로 떠나는 걸 보자 동탁은 마음이 급했다. 다시 몇 순배 술이 돌기도 전에 취한 체 돌아갈 채비를 차리게 했다. 얼른 달려가 아리따운 초선을 품을 생각에 왕윤의 듣기 좋은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도 이만 돌아가 봐야겠소이다. 오늘의 분에 넘치는 환대 잊지않겠소.”

왕윤도 더는 동탁을 잡지 아니했다. 친히 말을 타고 동탁의 수레와 나란히 달려 승상부까지 배웅했다.

왕윤이 동탁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간쯤 왔을 때 붉은 등들을 앞세우고 달려오는 인마가 있었다. 왕윤이 놀라 말 을 멈추고 바라보니 방천화극을 꼬나든 여포였다. 어둠 속에서도 불 이 철철 넘치는 두 눈이며 거친 숨소리로 미루어 분을 이기지 못하 는 게 역력했다.

“왕사도! 이럴 수가 있소.”

여포는 왕윤에게 다가오자마자 옷깃을 움켜잡으며 벼락같이 소리 쳤다. 까닭을 훤히 알면서도 왕윤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여포에게 되물었다.

“온후께서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오? 이 늙은이가 무엇을 어찌했기에?”

“아니, 어쨌기에라니? 사람을 놀려도 정도가 있지, 그래 놓고 시치 미를 떼는 거요?”

여포가 더욱 펄펄 뛰며 소리쳤다. 그러나 왕윤은 정말로 알 수 없 다는 표정이었다.

“여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 왕아무개가 장군을 놀렸다니? 우선 까닭부터 말씀해주시오.”

그러자 여포도 이상한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한동안 왕윤을 삼킬 듯 노려보더니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도께서는 이미 초선을 내게 주시기로 허락하시고, 이제 다시 태사께 보내시지 않으셨소? 그래도 사람을 놀리지 않았다고 하시겠소?”

끝부분에 와서는 다시 격앙되는 여포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