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0화 : 조비의 죽음과 출사표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10화 : 조비의 죽음과 출사표


조비의 죽음과 출사표

위주(主) 조비가 제위에 오른 지 일곱 해째 되는 해는 곧 촉한 (蜀漢)의 건흥 사년이었다.

조비는 먼저 진씨(甄氏)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그 진씨는 곧 원소 의 둘째 아들 원희의 아내였던 사람이다. 원소가 멸망했을 때 업성 에서 조비의 눈에 띄어 그 부인이 되었는데, 나중에 아들 하나를 낳 았다. 이름이 예(叡)요 자는 원중(元仲)이라 하며, 어려서부터 몹시 총명하여 조비에게서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조비는 뒤에 또 안평 광주 사람인 곽영(郭)의 딸을 얻어 귀비(貴 妃)로 삼았는데 얼굴이 매우 예뻤다. 그 아비가 일찍부터 곽귀비를 두고 말하기를, ‘내 딸은 여중지왕(女中之王)이다’라고 해 여왕(王) 이란 별명이 있는 여자였다.

조비가 곽귀비를 맞아들이자 진부인은 전 같은 굄을 받을 수가 없었다. 거기 힘을 얻은 곽귀비는 진부인을 모함해서 해치려고 마음 먹고 조비가 믿는 신하 장도(張)와 의논했다. 장도가 곧 못된 꾀를 냈다. 때마침 조비가 병들어 누운 걸 보고 거짓으로 말을 지어 퍼뜨 렸다.

‘진부인의 궁중에서 오동나무로 깎은 사람 형상이 나왔는데 거기 에는 천자(天)의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가 적혀 있었다더라. 진 부인이 천자를 몰래 해치려고 한 짓임에 틀림없다.’

그 말을 들은 조비는 몹시 노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진부 인에게 사약을 내린 다음 곽귀비를 황후로 삼았다. 하지만 곽귀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진부인이 낳은 조예(曹)를 아들 삼아 기르는 데, 비록 몹시 사랑하기는 해도 태자로 세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조예가 나이 열다섯에 이르자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솜씨가 제 법이었다.

그해 이월 조비가 조예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이었다. 부자가 나란히 산 언덕 사이를 달리는데 사슴 두 마리가 뛰쳐나왔 다. 어미와 새끼인 듯 한 마리는 크고 한 마리는 작았다. 조비가 화 살 한 대를 쏘아 큰 사슴을 쓰러뜨리고 난 뒤에 보니 작은 사슴은 조예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얘야, 어째서 쏘지 않느냐?”

조비가 큰 소리로 조예에게 물었다. 그러나 조예는 활을 쏘는 대 신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 위에서 말했다.

“폐하께서 이미 그 어미를 죽이셨는데 제가 또 어찌 차마 그 새끼마저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조비는 활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감탄의 소리를 냈다. “내 아들이 참으로 너그럽고 덕 있는 임금이 되겠구나!”

그리고 오래잖아 조예를 평원왕(平原王)으로 봉했다. 장차 태자로 세우려는 뜻을 비로소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해 오월 조비는 한여름에 한질(寒, 오한이 드는 병에 걸렸다. 의원이 힘들여 치료해도 낫지가 않자 조비는 자신이 마침내 일어나 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다. 곧 중군대장군 조진과 진군대장군 진군, 무군대장군 사마의 세 사람을 침상 곁에 불렀다. 그리고 다시 조예 를 부른 뒤 조진, 진군, 사마의 세 사람에게 조예를 가리키며 일렀다. 

“이제 짐의 병이 무겁고 깊어 다시 일어나기는 틀린 듯하다. 이 아이가 아직 어리니 그대들 세 사람은 힘을 다해 도와주어 짐의 뜻 을 저버리지 말라.”

세 사람이 입을 모아 말했다.

“폐하께서 어찌 그런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저희들은 힘을 다해 폐하를 섬기면서 천추세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조비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들어 허창의 성문이 아무 까닭 없이 무너진 것부터가 상서롭지 못한 징조였다. 짐은 그걸 보고 짐이 죽을 줄 알았다.”

그때 내시가 들어와 정동대장군 조휴가 입궐해 문안을 아뢴다는 말을 전했다. 조비는 조휴도 불러들이게 한 다음 다시 당부했다. 

“경들은 이 나라의 기둥이며 대들보 같은 신하들이다. 서로 힘을 합쳐 내 아들을 보필해준다면 짐은 죽어서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때 조비의 나이 마흔이요, 천자 자리에 오른 것은 일곱 해째였다.

조비가 죽자 조진, 진군, 사마의, 조휴 등은 한편으로 장례를 시작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예를 받들어 대위황제(大魏皇帝)로 세웠다. 조예는 그 아비 조비에게는 문황제(皇帝), 어머니 진씨에게는 문소황후(昭皇后)란 시호를 내리고, 조정을 새로이 가다듬었다. 종 요는 태부로, 조진은 대장군으로, 조휴는 대사마로, 화흠은 태위로, 왕랑은 사도(司徒)로, 진군은 사공(司空)으로, 사마의는 표기대장군 으로 세우고 다른 문무 벼슬아치들도 모두 벼슬을 높였다.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때 옹주와 양주는 그곳을 지키는 이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사 마의가 표문을 올려 스스로 서량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위주 조예는 그 뜻을 따라 사마의를 제독(提督)으로 삼고, 옹(雍), 양凉) 두 주의 병마를 거느리게 해주었다.

허창에 있는 세작에 의해 위의 그 같은 변화는 모조리 촉의 귀에 들어갔다. 사마의가 서량으로 온다는 말을 들은 공명은 몹시 놀란 얼굴로 말했다.

“조비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뒤를 이은 것이나 그 벼슬아치들 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긴 것은 걱정할 게 없으나 사마의가 움직인 것은 심상치 않다. 지모와 계략이 많은 사마의가 이제 옹주와 양주 의 병마를 거느리면서 훈련을 시키면 우리 촉에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먼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쳐버리는 게 낫겠다.”

 그러자 곁에 있던 참군 마속이 가만히 말했다.

“승상께서 방금 남방을 평정하고 오신 뒤라 우리 군사들은 병들 고 지쳐 있습니다. 마땅히 그들을 다독이고 보살펴야 할 때인데 어 찌 다시 새로운 싸움을 하러 나설 수 있겠습니까? 제게 사마의가 절 로 조예의 손에 죽게 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승상께 서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게 어떤 계책인가?”

공명이 마속에게 물었다. 마속이 눈이 번쩍 뜨일 계책을 내놓았다. 

“사마의가 위의 대신이라 하나 조예가 평소에 늘 의심하고 시기 하는 자입니다. 사람을 몰래 허도와 업군 같은 곳에 보내어 사마의 가 역적질을 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아울러 그의 이름으로 천하에 알리는 격문을 써서 여기저기 붙여놓으면, 조예는 그를 의심해 반드시 죽여버릴 것입니다.”

조조 때부터 시작된 사마의에 대한 위 조정의 뿌리 깊은 의심을 이용한 꾀였다. 공명도 그런 마속의 꾀를 그럴듯이 여겼다. 곧 사람 을 몰래 위로 들여보내 마속의 꾀대로 하게 했다.

얼마 뒤 업군의 성문에 갑자기 한 방문이 나붙었다. 성문을 지키 던 장수가 그걸 읽어보고 깜짝 놀라 조예에게 떼다 바쳤다. 조예가 읽어보니 그 내용은 대강 이랬다.


‘표기대장군 총령 옹, 양 등처병마사(總領雍涼等處兵馬事)사마의 가 삼가 신의를 받들어 널리 천하에 알리노라. 지난날 태조(太祖) 무 황제 이 나라를 세우실 때 원래 뜻하시기는 진사왕(陳思 께서王) 조자건(建, 조식)을 태자로 세워 뒤를 이으려 하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모여 헐뜯고 뒤집어 씌우는 바 람에 진사왕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못에 잠긴 용(龍)의 신세를 면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제위에 오른 황손(皇孫) 조예는 이렇다 할 덕행이 없으면서도 함부로 스스로 높였으니 이는 태조의 뜻을 저버 림이나 다름이 없다. 이제 나는 천명을 받들고 사람들이 바라는 바 에 따라 진사왕을 받들어 세우고자 한다. 오늘로 군사를 일으키니 이 글이 이르는 곳은 모두 새로운 임금의 명에 따르도록 하라. 따르 지 않는 자는 마땅히 그 구족을 멸하리라! 미리 이 뜻을 알리나니 모두 헤아려 행하라.’


실로 엄청난 내용이었다. 그걸 읽은 조예는 깜짝 놀라 질린 낯빛 으로 여러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태위 화흠이 나서서 말했다 

“사마의가 표문을 올려 옹, 양 두 주를 맡으려 한 것은 실로 이 때 문이었던 같습니다. 일찍이 태조께서도 저희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사마의는 그 눈길이 매와 같고 이리처럼 고개를 뒤로 틀 수 있으 니 반역의 상(相)이다. 그에게 병권(兵權)을 맡기지 말라. 반드시 나 라에 큰 화근이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제 그 컴컴한 속을 드러냈 으니 얼른 그를 죽여버리도록 하십시오.”

사도 왕랑도 화흠과 뜻을 같이했다.

“사마의는 육도삼략에 매우 밝고, 군사를 잘 부리며, 뜻마저 큽니 다. 일찍 없애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에 더욱 놀란 조예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사마의를 치러 나서려 했다. 그때 문득 대장군 조진이 나와서 말했다.

“아니 됩니다. 문황제(皇帝, 조비)께서는 그를 포함한 저희 몇 사 람에게 폐하를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선제께서 사마중달(司馬 仲達)에게 딴 뜻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 서는 부디 그걸 헤아려 움직이시도록 하십시오.”

“사마의가 만약 정말로 모반을 하려 한다면 그때는 어찌하겠소?” 

조예가 조진에게 그렇게 물었다. 조진이 자신 있다는 듯 대꾸했다. 

“폐하께서 정히 의심이 드신다면 한고조(高祖)가 운몽(雲夢)에 놀이 간 체하여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계책을 따라해보도록 하십시 오. 어가를 안읍(邑)에 대면 사마의가 틀림없이 달려 나와 맞을 것 인바, 그때 그의 움직임을 살펴 수상쩍으면 수레 앞에서 바로 사로 잡아버리시면 될 것입니다.”

조예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듯한 꾀 같았다. 조진을 허도에 남 겨 나랏일을 돌보게 하고 자신은 몸소 십만 어림군을 이끌고 안읍으 로 갔다.

위주 조예가 갑자기 대군을 이끌고 그리로 온 까닭을 알 리 없는 사마의는 오히려 그걸 천자에게 자신의 위세를 떨쳐 보일 좋은 기회 라 생각했다. 병마를 정돈하고 갑옷 입은 군사 몇만을 딸리게 해 조 예를 맞으러 갔다.

그 소식을 들은 근신 하나가 조예에게 알렸다.

“사마의는 과연 십여 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와 맞서려 합니다. 정말로 모반할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예는 그 말에 크게 놀랐다. 곧 조휴를 불러 명을 내렸다.

“장군은 먼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사마의를 막으라.”

이에 조휴는 어림군을 이끌고 사마의에 맞서려고 달려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마의는 조휴가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자 천자 의 어가도 함께 이른 줄 알았다. 얼른 말에서 내려 길바닥에 엎드렸 다. 그런 사마의 앞에 조휴가 달려 나와 꾸짖었다.

“중달은 선제의 고명(顧命)을 받은 몸으로 어찌하여 반역하려 했는가?”

그 말을 들은 사마의는 깜짝 놀랐다.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장군은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내가 반역하려 했다니 도대체 그게 어디서 나온 소리요?”

사마의가 길바닥에 엎드릴 때부터 조휴도 소문이 그릇된 것임을 짐작했다. 거기다가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오는 사마의를 보자 더욱 사실이 뚜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구태여 숨 기려 들지 않고 사마의가 의심을 받게 된 경위를 모두 일러주었다. 조휴의 말을 들은 사마의는 기가 막혔다.

“그것은 촉이나 오가 반(反)하는 계책을 쓴 것이오. 우리 임금 과 신하가 서로를 의심해 해치게 만들고, 그 빈틈을 타 쳐들어오려 는 것임에 틀림이 없소. 내가 천자를 찾아뵙고 그 의심을 풀어드리 겠소이다.”

이윽고 그렇게 말한 사마의는 자신이 이끌고 온 병마를 물러가 있게 하고 혼자 조예를 찾아갔다.

조예의 수레 앞에 엎드린 사마의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했다.

“신은 앞서 선제의 고명을 받은 몸으로 어찌 딴마음을 먹을 리 있 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오나 촉의 간교한 꾀일 것입니다. 바라 건대 신에게 한 갈래 군사를 내려주신다면, 신은 먼저 촉을 쳐부수 고 이어 오를 평정하여, 선제와 폐하의 은덕에 보답함과 아울러 신 의 충성된 마음을 밝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의심이란 게 묘해 한번 들면 쉬이 씻기지 않는 특성이 있다. 사마의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조예는 얼른 사마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곁에 있던 화흠마저 쑤석였다.

“아무래도 사마의에게 병권을 맡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에 게서 벼슬을 뺏고 고향으로 내려보내심이 옳을 듯합니다.”

조예는 선뜻 그런 화흠의 말을 따랐다. 사마의에게서 벼슬을 뺏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 뒤 조휴에게 옹, 양 두 주 병마를 모두 거느리 게 했다.

조예는 조용히 일을 마무리짓고 허도로 돌아갔지만 사마의가 벼 슬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은 곧 위나라 구석구석에 퍼졌다. 그 소 리를 들은 촉의 첩자는 나는 듯 성도에 알렸다.

소문을 들은 공명은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내가 위를 치려 한 지 오래되었으나 사마의가 옹, 양 두 곳의 병 마를 도맡아 거느리고 있어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사 마의가 우리 계략에 떨어져 벼슬에서 떨려났다니 걱정할 게 무엇이 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다음 날 일찍 조회에 나가 후주(後主)에게 한 장표문을 올렸다. 바로 저 유명한 출사표(出師表)였다.

일찍이 소동파가 서경의 이훈(伊), 열명(說命)의 두 편과 견주었으며, 그 글을 읽고 울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 아니라고 하는 말까지 있는 출사표의 내용은 이러하다.


‘선제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기 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익주는 싸움으로 피폐해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걸린 위급한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罷 敝 此誠危急存亡之秋也].

그러하되 곁에서 폐하를 모시는 신하는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 성된 무사는 밖에서 스스로의 몸을 잊음은, 모두가 선제의 남다른 지우를 추모하여 폐하께 이를 보답하려 함인 줄 압니다[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마땅히 폐하의 들으심을 넓게 여시어, 선제께서 끼친 덕을 더욱 빛나게 하시며, 뜻있는 선비들의 의기를 더욱 넓히고 키우셔야 할 것입니다[張聖聽 以光先帝之遺德 恢恢宏志士之氣].

결코 스스로 덕이 엷고 재주가 모자란다고 함부로 단정하셔서는 아니 되며, 옳지 않은 비유로 의를 잃으심으로써 충성된 간언이 들 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도 아니 됩니다[不宜妄自菲薄 引遺喩失義 以塞忠 諫之路也].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궁중과 관원들이 정사를 보는 조정은 하나 가 되어야 합니다. 벼슬을 올리는 일과 벌을 내리는 일은 그 착함과 악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궁중 다르고 조정 달라서는 아니 됩니다. [宮中府中俱爲一體 陟罰臧否 不宜異同].

간사한 죄를 범한 자나 충성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마땅히 그 일 을 맡은 관원에게 넘겨 그 형벌과 상을 결정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세상에 뚜렷하게 내비치도록 하십시오[若 有作奸犯科 及為忠善者宜付有司 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治].

사사로이 한쪽으로 치우쳐 안(궁중)과 밖(조정)의 법이 서로 달라 지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偏私使內外異法也].

시중 벼슬 시랑 벼슬에 있는 곽유지, 비위, 동윤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되고 깨끗합니다. 선제께서는 그 때문 에 그들을 여럿 가운데서 뽑아 쓰시고 폐하께까지 넘겨주신 것입니 다[侍中侍郎 郭攸之 費禕 董允等 此皆實 志慮忠純. 是以 先帝簡拔 以遺 陛下].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궁중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림없이 그 들에게 물어 그대로 따르심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빠지거나 새는 일 없도록 폐하를 보필하여 이로움을 넓혀줄 것입니다[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吾之 然後施行 必得補闕漏 有所廣益].

장군 상총은 그 성품과 행동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를 부 리는 일에도 구석구석 밝습니다. 지난날 선제께서도 그를 써보시고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신 바 있어 여럿과 의논끝에 그를 도독으로 삼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에 관한 일이면 크고 작 음을 가림이 없이 그와 의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반드시 진중의 군사들을 화목하게 하고 뛰어난 자와 못한 자를 가려 각기 그 있어 야 할 곳에 서게 할 것입니다[將軍向寵 性行淑均 暢曉軍事, 試用之於昔日 先帝稱之曰「能」,是以衆議舉寵以為督,愚以為營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必能使行陣和穆 優劣得所也].

어질고 밝은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한 까닭에 전한은 흥성하였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 한 까닭에 후한 은 기울어졌습니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이 일을 논하다 보면 환 제, 영제 시절의 어지러움을 통탄하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 었습니다[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 頹也.先帝時事 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

지금 시중상서 장사 참군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은 곧고 발라 절의 를 지켜 죽을 만한 신하들입니다.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믿어주시면 한실이 다시 융성하기를 날을 헤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 니다[侍中尙書 長史 參軍 此悉貞亮 死節之臣也, 願陛下親之 信之 則漢室 之隆 可計日而待也].

신은 본래 아무런 벼슬 못한 평민으로 몸소 남양에서 밭 갈고 있 었습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숨이나 지키며 지낼 뿐 조금이라도 제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그들에게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躬耕南陽,]

선제께서는 신의 낮고 보잘것없음을 꺼리지 않으시고, 귀한 몸을 굽혀 신의 오두막집을 세 번이나 찾으시고 제게 지금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신은 선제를 위해 개나 말처럼 닫고 헤맴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 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 許先帝以馳驅].

그 뒤 선제의 세력이 엎어지고 뒤집히려 할 때 신은 싸움에 진 군사들 틈에서 소임(싸움에 진 군사를 되살리는)을 맡고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서 명(그 위태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달라는)을 받았습니다. 그로 부터 스물하고도 한 해,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성실함을 알아주시 고, 돌아가실 즈음하여 신에게 나라의 큰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後 值傾覆 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謹慎 故臨崩寄臣以大事也].

명을 받은 이래, 아침부터 밤까지 신이 걱정하기는 두렵게도 그 당부를 들어드리지 못하여 선제의 밝으심을 다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오월에는 노수를 건너 그거친 오랑캐 땅 깊이까지 들어갔습니다[受命以來 尻夜憂慮 恐付託不效 以傷先帝之 明, 故五月渡濾 深入不毛].

이제 다행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싸움에 쓸 무기며 인마도 넉넉합니다. 마땅히 삼군을 격려하고 이끌어 북으로 중원을 정벌해 야 합니다. 느린 말과 무딘 칼 같은 재주나마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 악한 무리를 쳐 없애고 한실을 부흥시켜 옛 서울[長安]로 되돌리겠습니다 甲兵已足 當獎帥三軍北定中原, 庶竭駑純 攘除姦凶 興 定復漢還於舊都].

이는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이곳에 남아 나라에 이롭고 해로움을 헤아려 폐하께 충언 올리는 것은 곽유지와 비위, 동윤의 일이 될 것입니다[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勘酌損 益 進盡忠言 則攸之禕允之任也].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역적을 치고 나라를 되살리는 일을 맡겨주시옵소서. 그리고 신이 만약 제대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죄를 다스리시고 선제의 영전에 알리옵소서. 만일 폐하의 덕을 흥하게 할 충언이 없으면 곽유지와 비위, 동윤을 꾸짖어 그 게으름 을 밝히옵소서[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 靈.若無興復之言 則責攸之禕允等之咎 以彰其慢].

폐하 또한 착한 길을 자주 의논하시어 스스로 그 길로 드시기를 꾀하소서. 아름다운 말은 살피시어 받아들이시고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치심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 여 이제 먼길을 떠나거니와, 떠남에 즈음하여 표문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 더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下亦宜自謀 以諮諏善 道 察納雅言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悌泣 不知所云].’


구절구절 선주에 대한 추모의 정과 후주에 대한 충성이 밴 글이 었다.

표문을 다 읽은 후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부(相父)께서는 남쪽을 정벌하시느라 멀리 가시어 어려움을 겪 으시다가 이제 막 돌아오셨습니다. 아직 앉은 자리가 편해지시기도 전에 또 북쪽을 정벌하시겠다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실까 걱정이 됩니다.”

“신은 선제께서 돌아가시면서 한 당부를 받은 뒤로 밤낮 애썼으 나 아직도 스스로 게으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침 남방이 평정되어 안으로 되돌아볼 걱정거리가 없어졌으니, 이때 역적을 쳐 중원을 되찾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공명이 그렇게 대답했다. 초주譙周)가 여럿 가운데서 나와 다른 말로 후주를 거들었다.

“신이 밤에 천상(天象)을 보니 북방의 왕성한 기운이 아직 여전하 고, 별도 밝기가 전보다 갑절이나 됩니다. 아직은 도모할 때가 아닌 줄 압니다.”

그렇게 후주에게 아뢴 뒤 다시 공명을 보고 물었다.

“승상은 천문에 매우 밝으시면서 또 어찌하여 억지로 안 될 일을 하려 하십니까?”

“천도(天道)란 그 변화가 무상한 것이외다. 어찌 천문에만 얽매여 있을 수 있겠소? 나도 이번에 병마를 내기는 하나, 한중에 멈추어 위의 움직임을 살펴본 뒤에 나아가든지 말든지 할 것이오.” 

공명은 그렇게 대꾸하고 초주가 애써 말려도 듣지 않았다. 공명은 출사표에서 밝힌 대로 곽유지와 비위, 동윤 등을 시중(侍 中)으로 삼아 궁궐 안의 일을 모두 맡아보게 했다.

또 장군 상총을 대장으로 어림군을 거느리게 하고, 진진(陳)은 시중, 장완은 참군, 장예는 장사로 삼아 승상부의 일을 맡겼다. 두경 은 간의대부, 두미와 양홍은 상서, 내민과 맹광은 좨주, 윤묵과 이선 은 박사로, 극정(郤正)과 비시(費詩)는 비서로, 초주는 태사로 삼았으 며, 그들 안팎의 문무 관원 백여 명이 함께 촉 안의 일을 돌보게 했다. 끝내 위를 치라는 후주의 조서를 받아내 승상부로 돌아온 공명은 다시 여러 장수들을 불러 출전의 부서를 짰다.

전독부(前督部)는 진북장군 영승상사마 양주자사 도정후 위연이 요, 전군도독(軍都督)은 영부풍태수 장익, 아문장비장군(牙門將裨將軍)은 왕평이 맡았다.

후군영병사(後軍領兵使)는 안한장군(安漢將軍) 영건녕태수(領建寧太守) 이회(李)가 되고 부장은 정원장군(將軍) 영한중태수領中) 여의(義)가 되었다.

군량 나르는 일을 보살피면서 좌군영병사(軍領兵使)를 맡게 된

것은 평북장군 진창후 마대였고, 그 부장은 비위장군 요화였다. 우군영병사는 분위장군(威將軍) 박양정후(博陽侯)마충과 진 무장군 관내후 장의가 맡았다.

행중군사(軍師)는 거기대장군 도향후(都鄕) 유염이요, 중감 군(中軍)은 양무장군 등지(鄧芝), 중참군(中參軍)은 안원장군 마속 이었다.

전장군은 도정후 원림(袁琳), 좌장군은 고양후(高陽侯) 오의(吳懿), 우장군은 현도후(玄都侯) 고상(高), 후장군은 안락후(樂侯)오반 (吳)이 되었다.

영장사(史)는 유군장군 양의(楊儀), 전장군은 정남장군 유파 (劉巴), 전호군(護軍)은 편장군 한성정후(漢侯) 허윤, 좌호군은 독신중랑장 정함, 우호군은 편장군 유민(劉敏), 후호군은 전군중랑장 궁 이었다.

행참군(行參軍)에는 소무중랑장 호제(胡濟)와 간의장군(諫議將軍) 염안(閻) 및 편장군 찬습, 비장군(裨將軍) 두의, 무략중랑장 두기, 유군도위(軍都성돈이 각기 임명되었다.

종사는 무략중랑장 번기가 맡고, 전군서기(典軍書記)는 번건, 승상영사(丞)는 동궐이 맡았다.

장전좌호위사帳前左護衛使)는 용양장군 관훙이요, 우호위사는 호익장군(將軍) 장포가 맡았다. 그리고 그 모든 장수들을 평북대도 독 승상 무향후(武鄕) 영익주목(益州牧) 지내외사(知內外事) 제갈 량이 거느리고 떠나는 것이었다.

모든 자리를 정한 뒤에 공명은 다시 이엄(李嚴)을 비롯해 천구(川 口)를 지키는 장수들에게 글을 보내 동오의 내침에 대비케 했다. 그 리고 날을 골라 군사를 내니 때는 건흥(建興) 오년 봄 삼월 병인일 (丙寅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