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12권 4화 – 출세지향형의 인물
출세지향형의 인물
크라레스 제국의 동쪽 국경 지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이곳은 크라레스 제국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침략해 온 아르곤 군대를 격퇴하지 않 는 한, 이곳은 아마도 영원히 아르곤의 새로운 영토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크라레스로서는 그들을 격퇴하는 것이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 코린트 제국 의 전성시대 이전에 동쪽 대륙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아르곤이었다. 크로노스교가 들어온 이래 아무리 힘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아르곤 제국이 지닌 저력은 결 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아르곤 제국은 크라레스와의 전쟁에 2개 성기사단, 총 2백 명의 성기사와 60대의 타이탄, 그리고 4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 여단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만약 이 전력 가지고도 어려울 때를 대비하여 본국의 4개 성기사단에 동원 준비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다가 만일을 대비하여 5개 용병 기사단들 중에서 두 개가 국경 쪽으로 이동을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타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것은 엄청난 전력이었지만, 아르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게 많은 기사단 들을 이번 전쟁에 퍼부을 수 있을 정도로 아르곤의 인적, 물적 자원은 풍부했던 것이다.
과거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단은 2백 명의 성기사로 구성되었지만, 그린 드래곤을 잡기 위해 침입했던 크루마 제국의 기사단과 충돌한 후 성기사의 숫자만 늘려 봐 야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1백 명으로 줄였다. 그들이 성기사의 숫자를 그렇게나 많이 할당했었던 이유는, 성기사들의 능력이 엄청나다는 그릇된 판단 덕분 이었다. 타국에서 사신들의 호위로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이 방문하면 한 번씩 친선 비무회를 가졌고, 그 비무에서 성기사가 패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때문 에 아르곤은 자국이 보유한 3천여 명이나 되는 성기사의 능력과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마와의 충돌로 그들의 믿음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제야 주교원은 현재 강대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주교원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타이탄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아르곤에 마법사는 없었지만, 대신 엄청난 자금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지금에 이르러 10개뿐이었던 성기사단은 무려 19개로 늘어나 있었고, 타이탄 총수는 무려 568대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 타 이탄 568대라면 엄청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아르곤은 엄청난 재정 능력 덕분에 타이탄의 수는 막대하게 늘여 놨지만, 타국들처럼 저급 타이탄들을 폐기하지 않았기에 숫자만 크게 불려 놓은 상태였다. 타이 탄의 질도 질이었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기사의 능력에는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타국의 경우 타이탄을 지급받는 기사들은 그래듀에이트급을 조금 더 상회하는 실력자들이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들의 수가 타이탄의 숫자 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타이탄을 지급받은 인물들을 따로 오너급 기사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르곤은 성기사들 중에서 그래듀에이트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력자는 겨우 422명뿐이었다. 그렇기에 실력이 떨어지는 인물들에게까지 타이탄을 할당 해도 정수를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교원에서는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50명이나 되는 용병 기사들을 각지에서 대량으로 채용하여 그 공백을 메웠다. 물 론 용병 기사들에게 지급된 타이탄은 라르곤이나 타비곤급이었는데, 그 타이탄도 과분할 정도로 용병 기사들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진짜 뛰어난 실력자들이라면 벌써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서 기사 생활을 하고 있지, 용병 따위로 떠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국의 경우 저급 타이탄을 폐기하고 그것을 재활용하여 더욱 강력한 신형 타이탄으로 교체하는 데 반해, 아르곤은 왜 웬만한 저급 타이탄들까지 모두 가동하려고 들까? 그것도 용병들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매우 어려운 문제 같지만, 의외로 해답은 간단한 곳에 있었다. 바로 기동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아르곤에는 마법사들이 없었고, 신관이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르곤의 기사단은 타국의 기사단들처럼 소수 정예로 여기저기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여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면서 작전을 벌일 수 없다 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르곤이 이 문제점에 대해서 그렇게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크로노스교를 국교로 정한 이래 타국을 침공하지 않고 아르곤 평 원이라는 한 지역에만 뭉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의 시작 또한 기습전이었기에 마법사의 도움이 없어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구태의연한 방법이 통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장관을 이루며 태양이 떠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오늘 있을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20여 명이나 되는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마차가 서자 성기사 한 명이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 아주 젊은 사제 한 명이 걸어 나왔는데, 보통 의 사제들이 입고 있는 복장과 다르게 로브에 붉은 줄이 하나 그어져 있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사제를 향해 성기사가 매우 존경 어린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보아 외모와 달리 꽤 신분이 높은 것 같았다.
젊은 사제는 건물 내에 위치한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 안에는 10여 명이 넘는 성기사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젊은 사제는 방 안으로 들어서며 로브에 달린 모자를 뒤로 젖히면서 웅성거리는 성기사들 중의 한 명에게 아는 체를 했다.
“바쁜 모양이군, 레가르 형제.”
“아니? 어서 오십시오, 포스타나 대신관님. 기별이 없어서 마중 나가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신관님께서 어떻게 이런 변방까지 나오셨습니까?”
크라레스 침공의 선발 부대의 사령관은 크로미아 성기사단의 단장인 레가르였다. 레가르는 기습 공격을 위한 2개 성기사단만을 거느리고 왔고, 오늘 아침에야 후 속 부대들 중의 하나인 1개 성기사단이 더 도착한 상태였다. 크라레스의 저항이 꽤 완강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더 많은 성기사단들이 투입될 것이 확실했다. 현재까 지는 이곳 전선에 있는 성기사단장들 중에서 레가르가 가장 선임자였기에, 좀 더 계급이 높은 인물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가 이곳 전선의 사령관이었다.
그런 레가르가 마중까지 나가야 하는 이 젊은 사제는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나이가 많았고, 그 지위 또한 대단히 높아서 대신관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물
론 주교원은 250명이나 되는 대신관과 15명의 주교로 구성된다. 그렇게 따진다면 포스타나 대신관은 250명씩이나 되는 인물들 중의 하나였고, 또 주교원 내에서 그의 지위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주교원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그의 윗자리에 놓일 수 있는 인물이 거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레가르는 왜 전쟁터인 이곳에 자신보다 월등한 직위를 가지고 있는 대신관이 나타난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상 사제 계급은 전쟁과는 무관한 계급이 었다. 그런 그들이 전쟁터에서 작전 지휘권을 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 분명했다. 또 포스타나 대신관이 단독으로 여기까지 올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주교원의 결정일 텐데, 그가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보낸 것인지 아리송했다.
“허허헛, 바쁠 텐데 마중 나올 필요까지 있겠는가? 레가르 형제. 나는 이곳 점령지의 개종을 담당하기 위해서 왔다네.”
“개종…이라구요? 하지만 개종이라면 저희들과 함께 사목관이 몇 명의 사제들을 이끌고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야 소규모의 점령지라면 사목관들로 충분하겠지만, 이제 이 점령지가 얼마나 넓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니까 내가 온 것이라네.”
이제야 레가르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점령지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종시키느냐……. 이것은 나중에 포스타나 대신관의 좋은 업적이 될 것이다. 아르곤처럼 타국을 오랫동안 침략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변화가 적고 안정된 사회에서는 업적을 쌓기가 힘든 것이 당연했다. 250명이나 되는 대신관들 중에서 단지 15명만 이 주교가 될 수 있었기에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많은 업적을 쌓아 두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아직 점령지의 크기는 그렇게 넓지 못했기에 다른 대신관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을 때, 슬쩍 주교원을 움직여 이곳으로 달려온 것을 보면 포스타나 대신관은 대단한 출세지향형의 인물임이 분명했다.
“아, 예.”
“그래, 전황은 어떤가?”
“적의 저항이 예상외로 거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의 기사단이 길목을 딱 가로막고 있는데,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대단히 강력합니다. 하지만 오늘 새벽 에 지안디 기사단이 새로이 도착했고, 곧이어 3개 성기사단이 더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경에는 2개 용병 기사단이 대기 중이구요. 그렇기에 전세는 대단히 낙 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 제국 코린트를 제치고 얼마나 많은 점령지를 차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단히 믿음직스럽게 들리는군. 그렇게 많은 기사단들이 동원된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겠군.”
“뭔데 그러십니까?”
“성기사를 좀 지원해 줬으면 하네. 아무래도 포교를 하면서 크로노스 교단의 위엄을 보이려면 성기사가 좀 필요하지 않겠나?”
상대는 출세지향형의 인물인 데다가 지위가 높은 대신관이었다. 지금 슬쩍 인연을 만들어 두는 것도 별로 나쁘지 않을 것이기에 레가르의 대답은 매우 시원스러 웠다.
“예,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몇 명이면 되겠습니까?”
“한 10명 정도면 되겠군.”
“아, 10명 가지고 되겠습니까? 20명을 차출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지금은 대부분의 인원이 전장에 나가 있기에 빼기가 힘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그렇게나 협조를 해 준다니 정말이지 고마울 뿐이구먼. 내 결코 잊지 않겠네.”
“별말씀을.
“바크론 요새에 여장을 풀 생각이니까, 그리로 보내 주게.”
“예, 대신관님.”
레드 이글과 콘도르, 2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알카사스군은 천천히 크라레스의 중심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카사스군의 본대에는 여러 대의 마차들이 이동 하고 있었는데, 그 마차 안에는 마법 통신을 위한 설비와 함께 마법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방에 부챗살처럼 퍼져서 이동하는 정찰조들과 각 기 사단에 다섯 명씩 배정되어 있는 용기사들에게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취합(聚合)되어 사령관과 작전관에게로 전달되는 것이다.
알카사스의 경우 와이번에 용기사 외에도 마법사를 태운다. 물론 빠른 연락을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아무리 와이번이 크다고 해도 그 위에 만들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좁았고, 거기에는 도저히 통신용 마법진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와이번에 탑승하는 마법사는 수정구만 가지고도 통신이 가능한 실력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타국의 경우 우수한 마법사들을 그런 통신용으로 할당할 처지가 못 되기에, 마법사들을 와이번에 태우면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 옆에서 말을 몰며 나란히 가고 있던 전령들 중의 한 명이 마차 안에서 건네지는 종이를 움켜쥔 후 급히 사령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제라린성으로 간 용기사에게서 연락입니다, 각하.”
미구엘 후작은 전령에게서 종이를 낚아챈 후 급히 읽었다. 하지만 정보는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적들의 방어 거점이 되어야 할 제라린성이 이토록 조용하다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왜 그러십니까? 각하.”
“제라린성 쪽은 아주 조용하다는군. 뚜렷한 전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래도 크라레스의 방어 거점이 제라린성이 아니라 딴 곳이 아닐까?”
“제라린성이 확실합니다, 각하. 이곳 전선에서 패퇴한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거기 외에 더 적합한 곳은 없습니다. 그 정도 거리쯤 떨어져야 방어선을 새로이 구축 할 만한 시간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유를 모르겠군.”
이때 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서 쪽지를 전달했다.
“본국으로부터 긴급 정보입니다.”
“줘 보게.”
확 낚아채서 쪽지를 읽어 보던 미구엘 후작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 챈 라이넨 후작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스바시에 기사단이 이쪽으로 왔다는 정보일세. 코린트 쪽에서 흘러 들어온 정보인데, 거의 정확할 것이라는 예측일세.”
“스바시에 기사단이라면, 그 쥬리앙 후작이 이끄는 기사단 말입니까?”
“그렇네. 본국의 정보로는 근위 기사단 다음 가는 정예 부대로 추정되고 있다네. 타이탄이 20대밖에 안 되는 소규모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야. 거기에다 가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이라면 대단히 뛰어난 지략가야.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퇴하세.”
“예?”
“우리들은 이 일대 지리를 잘 몰라. 적들은 전투력이 뛰어난 소규모 기사단이다. 그렇다면 놈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쓸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황에서 더욱 깊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후퇴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니, 후퇴하는 것이 좋겠네. 괜히 무리해서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야. 어차피 녀석들은 이곳 전선에 스바시에 기사단 같은 강력한 전력을 오랜 시간 박아 둘 수 없는 처지야. 며칠 지나지 않아 코린트 쪽으로 이동해야만 하겠지. 안 그런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후퇴하기로 하세. 괜히 피를 흘려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네.”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지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