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5화 – 황금의 발 1 : 십 년 만의 방문

랜덤 이미지

퇴마록 말세편 1권 5화 – 황금의 발 1 : 십 년 만의 방문


십 년 만의 방문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매일매일 뜨 고 지는 해였다. 그러나 석양이 질 때의 찬란하고도 서늘한 빛은 유달리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다. 주악산 귀퉁이를 붉게 물 들인 빛은 홀로 산길을 걷던 한 청년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몇 년 만인가……………. 어느새 십 년이 지났구나……………..’

청년은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으며 건장한 체구였다. 그렇 게 키가 큰 편도 아니고, 덩치가 큰 것도 아니었지만 온몸의 기 운이 매우 생생하여 활기찬 느낌을 주었다. 얼굴은 그리 잘난 것 도, 그렇다고 못난 것도 아니어서 그냥 군중들 사이로 파묻히면 알아볼 수 없을 듯한 평범한 용모였지만, 눈빛 하나만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어 참으로 특이했다.

‘그때에도 딱 이맘때쯤 여기 도착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군.’

청년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반짝이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평범 한 용모가 돼 있었다. 청년의 왼팔에서 무엇인가가 살아 있는 것 처럼 꿈틀거리자 청년이 한 번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가볍게 쓰다듬었고 무엇인가는 곧 조용해졌다.

청년은 현암이었다.

십년 전 현암은 막힌 혈도를 치료할 생각으로 해동밀교를 찾 아 이 주악산에 올랐다. 그리고 여기서 박 신부와 준후를 처음 만났고 수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런데 지금 또 해동밀교의 자취 를 찾아 이 산을 오르게 되다니…………. 현암은 조금은 남다른 감 회에 젖었다. 산길을 걸으며 월향검이 꽂혀 있는 왼손을 다정하 게 토닥거리면서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지, 월향? 알는지도 모르지만, 난 전에도 여기 왔었어. 여기서 신부님과 준후를 만나고…………. 벌써 십 년이 더 지났다니 ・・・・・・ 꿈만 같네…………….”

회상에 젖으며 현암은 터벅터벅 걸어갔다. 해동밀교가 멸망하 고 준후를 불길 속에서 살려 내어 이곳을 빠져나간 이후로 현암 이나 박 신부, 준후 등은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것은 키 워준 아버지와 진짜 아버지를 둘 다 눈앞에서 잃은 준후의 마음 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현암은 다시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중대한 목적이 있었으며, 어쩌면 중노동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은밀하게 숨어서 수련에 몰두하던 준후와 현암이 박 신부에게 서 온 소포 하나를 받은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원래 소포는 그보다 이틀 먼저 배달되었지만 준후와 현암은 은신중이었기 때 문에 소포를 받기까지 이틀이 더 걸린 것이다. 소포를 뜯어 보니 거기에는 박 신부의 편지와 얇은 석판 한 장, 그리고 탁본 한 장 이 들어 있었다. 한참 기술을 준후에게 가르치는 데에 몰두하 던 현암은 편지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현암군 보게. 이것은 내가 우연히 얻은 것이라네. 그러나 우연 이 아니라 필연적인 이유로 온 것 같네. 준후에게 내용을 묻게 반 드시 최선을 다해 해독해야 하네. 그냥 느낌이긴 하네만 반드시 그래 주게. 지금 몸이 좀 불편하여 금방 갈 수는 없네. 한 달 정도 면 만날 수 있을 걸세. 고생해 주게나. 미안하네…………….

가짜 신부

자세한 설명은 한 구절도 없는 어이없이 간단한 편지였다. 그 러나 박 신부는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급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현암은 곧 쇳조각과 탁본을 준후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녹도문이에요.”

석판을 보자 준후는 서슴없이 말했다.

“그리고 이건 신시 문자예요. 신지 문자라고도 하고, 녹도문 하고 신시 문자는 둘 다 고대의 옛 글자죠. 가림토보다 오래된 거예요. 그런데……. 중간중간에 전자체의 한문도 있는 것 같은 데…………. 이렇게 오래전에 쓰인 글자가 아직도 완전하게 남아 있 다니 신기하네요.”

박신부가 동굴의 벽에서 뜬 탁본을 보고 준후가 한 말이었다. 그 말미에 새겨진 ‘서, 여기서 우사경을 얻다’라는 한자를 보 고준후가 말을 이었다.

“이건 훨씬 뒤에 새겨진 것 같네요.”

준후는 박 신부의 당부도 있고 호기심도 생기고 해서, 오랜 시 간도 걸리지 않고 그 내용을 해독해 내었다. 그 내용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 풍백 비렴의 후예 좌풍주(風) 비직수일이 남긴다. 명을 받아 한우사 맥달 님이 마지막 남기신 ᄆᄆᄆ을 바다 끝 땅에 감 추니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다. 삼백 년의 대과업을 이제야 끝냈 다고 여기니 이제 나는 하늘에 가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혹여 이것을 손댈 사람들에게 전한다. 이 ᄆᄆᄆᄆᄆᄆᄆ과 더불어 반만 년을 남아야 하는 것이며, ᄆᄆᄆᄆ 마지막 장의 오묘 한풀이를 담은 것이니 결코 망령되이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리 고 ᄆᄆ은 죽지 않는 신비를 안고 있으니 더더욱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후세인들은 이것을 잊지 말고, 결코 이것을 망가뜨 리거나 없애지 말라.

도대체 내용을 알 길이 없는 글이었다. 풍백과 우사는 고조선 의 삼사 중 하나일 테고, 이것이 쓰인 문자도 고조선의 문자인 신시 문자와 녹도문이었으니, 분명 고조선의 어떤 사람이 제주 도까지 와서 무엇을 감춘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큰 발견이랄 수도 있었지만, 현암이나 준후는 그런 데 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여기 이 빈칸은 뭐지?”

현암이 묻자 준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한문(漢) 같아요. 그런데 전자체보다도 오래된 과두문자같아서…………… 저도 모르겠어요. 이 세 글자짜리는

밑의 한문을 보니 우사경일 거 같기는 한데.”

“우사』이라는 책이 있니?”

“아뇨, 처음 들어요.”

“그럼 실전(傳)된 책이냐?”

“으음, 현암 형.”

“왜?”

“제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건가요? 뭐, 칭찬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저도 모른다구요.”

“그러면 알려지지 않은 책이란거냐?”

“그거야 모르죠. 좌우간 아직은 짐작일 뿐, 확실치는 않아요. 과두문자를 잘 알아볼 수가 없어서.”

“올챙이 닮은 글자 말야?”

“흠・・・・・・ 올챙이 글자 현암 형. 무식은 잘난 게 아니에요.” 현암은 피식 웃었다. 요 녀석이 어느새 머리가 좀 컸다고 나랑 농담 따 먹기를 하려고 하다니…”

“나도 무식한 건 아니다. 전공이 다를 뿐이지. 어쨌든 해석은 되겠니?”

준후가 싱긋 웃었다.

“글쎄요? 하지만 좀 책을 찾아봐야 해요. 다행히 이 세 글자가 ‘우사경’이라면 ・・・・・・ 그걸 토대로 맞추어 보면 나머지 네 글자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만약 그 세 글자가 ‘우사경’이 아니라면?”

“그럼 저도 모르는 거죠, 뭐.”

과두문은 은나라의 갑골문보다도 오래된 것이어서 중국에서도 해독하는 법이 끊어진, 현암의 말마따나 올챙이를 닮은 문자였다. 준후는 언제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이상한 작은 책자들 을 꺼내 와서 며칠 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깊이 궁리를 하다 가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이 부분을 조금 고치고 저 부분을 조금 고치고 하면서 날을 보냈다. 글자 해독이 아니라 그림 맞추기를 하는 것 같았다.

성미가 급한 현암은 시간이 아까워서 수련이나 하자고 했지만 준후는 들은 척도 않고 일곱 개의 글자만 들여다보았다. 현암은 준후가 실전된 신지 문자와 녹도문을 풀어 읽고 과두문까지도 해독하려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현암 자신 은 비록 학문의 진흥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보급 이상의 능력 을 지닌 준후가 죽은 사람으로 처리되어 재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두문의 해독만으로도 고대사 규명 의 큰 개가라고들 하지 않는가? 준후는 이두는 잘 몰라도 가림토 와 녹도문, 신시 문자까지 자유자재로 구사가 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현암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준후가 벌떡 일어났다. 준후 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이거… 이건…….”

“왜 그래?”

그러던 현암 역시 방금 준후가 써서 맞춘 네 개의 글자를 보자 놀라서 그 자리에 꼿꼿이 서 버렸다. 네 글자는’해동감결’이었던 것이다.

“‘해동감결? 아니, 이 네 글자가 정말 ‘해동감결’이니?”

“예! 틀림없어요! 아…………. 이제야……….. 이제야 뭔가 알 것 같아요.”

“뭘 말이야?”

“해동감결의 뒷부분은 해석이 되지 않아서 무척 이상하게 여겨졌어요. 『해동감결은 연대순으로 기록된 책이거든요. 거의 마지막 장에 가서야 우리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데 그다음 장은 전혀 해독할 수가 없었어요. 난 그 부분이 말세를 예견한 거라 봤는데도…………. 그건 형도 알죠?”

“그래, 듣긴 했다. 하지만 어째서였지?”

“그 부분이 일종의 암호같이 되어 있어서, 어떻게 따져 봐도 말이 되지를 않았죠! 그러나 이건! 이 비직수일이 남긴 글을 보 면 『우사경이 「해동감결의 마지막 장의 풀이를 담은 거라고 하 잖아요!”

현암은 기뻤다. 현암도 도혜 스님과 한빈 거사로부터 말세의 양상을 대충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도대체 어 떻게 해야 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해동감결」이 있으니 그 내용을 따르려고도 했지만, 정작 『해동감결」의 말세에 해당 하는 부분을 준후가 조금도 해독해 나가지 못했다. 그 때문에 박 신부가 마음을 잡고 말세에 대한 예언들을 해독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서 몇 달째 처박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신부님이 이런 중요한 단서를 얻다니!

그러나 기뻐하던 준후의 얼굴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왜 그러니?”

“그런데 ・・・・・・ 그게………………”

“왜 그러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네요.”

“뭔데 그래?”

준후는 자신의 보따리를 뒤져서 해동감을 꺼냈다. “저 비직수일의 글에 보면 ・・・・・・ 『우사경』은 죽지 않는 신비를 담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해동감결의 마지막 장을 풀이한 다고 되어 있고요.”

“그래. 그러니 그 우사경이란 걸 찾아내면 네가 해독하지 못 한 「해동감결의 마지막 장을 풀이할 수 있을 것 아니겠니?”

“으음,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요.”

준후가 『해동감결』의 마지막 부분을 펴서 보여 주었다.

“자, 여기가 해독이 안 되는 장이에요. 그리고 맨 마지막 빈 페이지에 글자 몇 개가 보이죠?”

“그런데?”

“이 글자를 한자로 옮기자면 ‘불사(不死)의 장’이라는 뜻이에요.”

“음?”

그 말을 들으니 현암도 좀 의아했다.

“그런데 왜 「불사의 장이 빈 여백에 씌어 있는 거지?”

“저도 그게 불안한 거예요. 흠…………… 그리고 「불사의 장」을 뺀 「해동감결의 마지막 장엔 두 개의 시밖에 없어요. 말세의 양상 이단 두 편의 시로 예언될 수 있을까요? 그게 불안하네요.” 

준후가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난 원래 「불사의 장」이란 건 그냥 무슨 상징이거나 이 책이 불사, 그러니까 죽지 않는 가르침을 담은 책임을 나타내는 거라 여겼는데…………… 비직수일의 말을 보면 그런 것 같지가 않네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니? 『우사경』에 「해동감 결의 마지막 장을 푸는 열쇠가 있고, 또 불사의 비결 같은 것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어?”

현암이 말을 이었다.

“네가 연구하는 동안 나도 연구했다. 우사경을 가져갔다고 쓴 서복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진시황 때 사람을 말하는 것 같 아.”

“예? 정말인가요?”

준후가 놀라서 묻자 현암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래. 서복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삼신산을 찾아갔다는 건 유명한 고사지. 삼신산이란 건 봉래, 방장, 영주인데 그건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니? 서복은 육로를 택하지 않고 수로를 택하여 배에다 동남동녀(童男 童) 삼천 명을 싣고 갔다고 하니 한라산을 노리고 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 그러나…………….”

“아뇨, 나도 서복은 알아요. 이미 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음? 그럼 왜 그리 놀랐냐?”

“현암 형이 연구를 했다는 게 안 믿어져서요.”

순간 현암은 짐짓 인상을 쓰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너, ‘탄(彈)’ 자결 한번 맞아 보련?”

준후가 깔깔 웃으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현암도 따라 웃었다. 

“그럴 법하죠. 서복은 불로초를 찾으러 간 사람이니, 죽지 않 는 신비라는 글을 보고서는 그냥 넘길 수 없었을 거예요. 『우사 경은 서복이 가져갔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그런데 서복이 신지 문자를 알아봤을까? 그 사람은 중국 사람 아냐?”

그러자 준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지 문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신시 문자 쪽이 조금 더 원래의 발음에……”

“같은 뜻이잖아. 발음도 쉽고. 좌우간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음…………. 맘대로 불러요. 어쨌든 그보다 더 뒷사람인 이백도 신시 문자를 알았다니, 서복도 알 수 있었겠죠.”

“이백? 시선(仙)이라고 불리는 이태백 말이냐?”

“맞아요. 신시 문자는 발해 때까지 국어로 쓰였어요. 발해 국 서(國書)를 당나라 사람들이 읽지 못하자 이백이 나서서 읽었다 는 것은 꽤 유명한 고사*죠. 하물며 서복은 진나라 때 사람이니, 당나라 때 사람인 이백보다 훨씬 전 사람이에요. 오히려 신시 문 자를 더 잘 알 수도 있었을 테고, 서복에게 부하도 몇천 명이 있 었을 테니 그중의 한 명이라도 알았겠죠. 아무튼・・・・・・ 서복의 자 취를 더듬으면 우사경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사경이 이미 없어졌으면 어쩌지? 그때 서복이 자 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 나? 그리고……………

현암이 조금 인상을 쓰면서 덧붙였다.

“더구나 『해동감』의 뒷부분은 비직수일의 말과 비교하면 어 딘가 빠진 기분이 들잖아. 네 말대로라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는 건데…………….”


* 발해 때 중국에 신지 문자로 된 국서를 보냈는데, 그것을 아무도 읽지 못하자 이백이 나서서 그것을 읽어 내어 사람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백은 시(詩) 외에도 초서(草書)를 써서 흉노를 놀라게 하여 물러가게 했다는 등 의 기이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현암은 웃음기를 거두고 머리를 회전시키면서 계속 말했다.

첫 번째는 우사경』에 「해동감결의 뒷부분에 대한 실마리가 적혀 있으며, 또 죽지 않는 비법에 대해서도 적혀 있는 경우이 고, 두 번째는 『우사경에는 단지 『해동감결』 마지막의 「불사의 장에 대해서만 언급된 경우일 테지. 그렇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해동감결」은 뒷부분이 빠진, 완전하지 못한 거란 이야기가 되지 않겠니?”

“그렇겠죠…….”

준후도 자못 심각하게 고심하는 듯했다. 조금 더 생각하던 현 암은 한 가지 가능성을 말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이 비직수일의 글귀와 서복이 남긴 글자 가 모두 엉터리나 가짜일 경우인데…………. 으음, 신부님이 일부러 보내신 것을 보면 그럴 리는 없겠지?”

“저도 그렇다고 봐요.”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 중 어떤 걸까?”

“글쎄요…………….”

준후가 미간을 찌푸리자 현암이 조용히 말했다.

“나는 견문은 그리 넓지 못하지만・・・・・・・ 준후야, 정말 인간이 죽지 않고 불사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겠니?”

“해탈하여 신선이 된다는 이야기는 있잖아요.”

그 말에 현암이 하하하고 웃었다.

“신선이면 벌써 인간은 아니잖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 이 죽는 것은 하늘의 이치인데………… 비직수일의 말을 따른다면, 이 『해동감결과 우사경』은 둘 다 맥달이라는 사람이 쓴 거야. 여기 말 그대로라면 이 사람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야. 수천 년 뒤의 미래를 예언하여 하나도 어긋난 게 없으니 하늘이 낸 사람 이었을 거야. 그 정도의 예언을 남긴 사람이 경솔하게 불사의 비 법 같은 것을 적어 남겼을 것 같지는 않구나.”

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겠죠. 오래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건……”

현암은 자칫 준후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생각 할까봐 급히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나는 우리가 지닌 『해동감이 어딘가 부족한 데 가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생각이 맞을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때?” 

“으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신부님이 헛일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 같으니 …… 일 단 두 가지를 알아봐야지. 하나는 완전한 「해동감결」을 찾는 일 이고 하나는 『우사경』을 찾는 일인데, 우선 『우사경은 너무 모 호해서 찾기 쉬울 것 같지는 않구나. 허나 「해동감결」이라면 그 것을 보존해 오던 곳이 있지 않겠니?”

그러자 준후가 쓸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과거 해동밀교에서의 쓰라린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해동밀교는 완전히 무너지고 불에 탔잖아요. 생존자도 더 이상 없고….”..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 다못해 비석이나 종의 파편이라도 단서가 될 수 있는 게 있을지 도 모르지. 내가 가서 좀 찾아보겠다.”

“흠, 그럴 수도 있어요. 해동밀교에는 지하에 귀중한 문서들을 넣어 둔 방이 있었거든요. 거기까지 무너졌는지 어쨌는지는 모 르지만…………….”

“그 방이 혹 돌로 된 석실이었니?”

준후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거긴 교주만이 드나들 수 있어서…………….” 교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준후의 안색이 흐려졌다.

“음・・・・・・ . 그래도 수색은 해 봐야겠구나. 뭐라도 나올지 모르 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니? 내가 다녀올게.”

현암을 쳐다보며 준후가 물었다.

“혼자 가게요?”

준후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지만 과거의 슬픈 기억 때문에 그곳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현암은 느낄 수 있 었다. 현암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너는 서복에 대해 알아보려무나. 난 네 말대로 무식해서 그런 기록 나부랭이들을 잘 찾을 자신이 없어. 몸으로나 때워야지. 뭐.”

그러자 준후도 현암의 마음을 고맙게 여기는 듯 미소를 지었다.

“현암 형, 많이 변했어요.”

“음? 내가 뭘?”

“예전엔 서릿발 같았는데…………. 사람 됐네요.’

현암의 얼굴이 짐짓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렇게까지 말해서 굳이 한 대를 더 맞아야겠니?”

“하하하.”

***

현암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였던가? 자신에게 다시 웃음 이 돌아온 것은……….

그렇다. 그때였다. 이제는 정말 죽었구나 싶었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던 그때 그 순간, 지금까지 항상 쫓기듯 살 아왔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스스로를 억제하면서 살아오기만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왜 그토록 내가 가진 힘에 억눌려 있었을까? 왜 그토록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조마조마해했을까? 왜 스스로의 본성을 감추고 항상 심각하고 과묵한 생각만을 해 왔을까?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었던 절박했던 순간에 현암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돌이켜 보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잘못 사용했던 적이 있었 던가? 아니었다. 그러한 마음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면 왜 그토록 마음을 졸였을까? 그러지 않아도 되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그러나 현암은 죽지 않고 살아났다. 심각할 정도로 탈수 현상 에 빠졌고 몸 여기저기에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백호의 구원을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현암은 그 순간의 기억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크게 웃으며 결심했다.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으로,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살기로 말이다. “늦었다. 서두를까?”

현암은 왼쪽 손목을 툭 건드리며 바쁘게 걸음을 놀렸다. 그러 나 마음은 그리 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현암 정도라면 해가 졌다 고 길을 잃거나 위험한 일을 당할 일도 없었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밤에 일을 하는 편이 더 수월할지도 몰랐다. 현암은 월향과 자주 대화를 했다. 월향도 그것을 몹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석양의 경치가 무척 좋았는데, 월향도 그런 것을 느끼는지 현암의 팔목에서 아주 나직한 소리로 한 번 울었다.

“저게 뭐야?”

현암은 끌끌 혀를 찼다. 혹시나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 로 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준후가 그려 준 약도대로 따라 왔으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현암은 난감해졌다. 전에 해동밀 교가 있던 터에는 난데없는 근대식이라기보다는 멋없이 콘크 리트로 상자를 쌓아 놓은 것 같은 커다란 건물이 있었고, 얼핏 보아도 수백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 문이다.

‘저 속에서 어떻게 조사해? 『해동감이든 뭐든 찾기는 틀린거 아냐?’

현암은 걱정이 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무엇 하는 곳이기에 이 밤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 지?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번 가보자.’ 

현암은 슬그머니 몸을 낮추고는 그쪽으로 향해 길도 없는 비 탈을 조금씩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문득 저쪽 숲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 다. 작은 소리였지만, 현암은 원래 나면서부터 귀가 예민한데다 가 항상 주위를 살피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다. 처 음에는 그냥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 것뿐이라 짐승이나 다른 무엇이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조금 지나자 단순한 산짐승의 소 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우 다급한 듯 숲을 헤치 며 가는 인기척 하나. 그리고 그 뒤에 다른 인기척이 여럿 상황으로 보아 쫓고 쫓기는 것 같았다.

‘뭐지?’

현암은 본능적으로 신경이 쓰였다. 이렇게 깊은 밤중에, 깊은 산속에서 누가 쫓고 쫓기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깊은 산중이라 지만 저 아래의 건물에는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 가? 그냥 넘어갈까 하고 현암이 생각하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 살・・・・・・ 읍!”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무심결에 현암은 그쪽으로 휙 몸을 날 렸다. 숲을 헤치며 성큼성큼 몇 번을 뛰자 저만치에서 여러 명의 웬 남자들이 한 여자를 붙잡아 서둘러 포대에 넣는 광경이 보였다. “거기! 뭣들 하는 거요?”

심드렁하게 물었으나 현암의 목소리는 그 남자들을 깜짝 놀라 게 만들 정도로 울림이 대단했다. 남자들은 현암을 슬쩍 돌아보 더니 이죽거렸다.

“참견 마! 죽고 싶어?”

현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터벅터벅 다가갔다.

“죽긴 싫은데 ・・・・・・ 참견하고 싶으니 어쩌지?”

그 말에 남자들이 서로에게 눈짓을 하면서 실실 웃었다. 현암 은 그리 큰 키도 아니었고 겉으로 보면 마른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일부러 눈빛을 숨기고 있어 실없는 사내처럼 보였다.

‘이런 것들한테 공력을 많이 쓸 필요까지는 없겠지.’

현암은 터벅터벅 남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여자를 구해 줄 마음은 있었지만, 여기 이 사람들 에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지 금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 여러 사람의 눈에 띄어 좋을 것은 없었다. 현암은 연극을 하기로 작정했다. 남자들은 거칠 것 없이 다가오는 현암을 미처 제지하지 못했다.

현암이 포대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포대가 사람 넣기엔 너무 더럽잖소. 그리고 이렇게 꽉 매면 안에 있는 사람이 숨 막혀요.”

남자들은 기가 막힌 듯 웃지도 못하고 쏘아붙였다.

“저거 ・・・・・・ 또라이 아냐?”

“밥 생각이 끊어졌냐, 아니면 숟가락이 미워졌냐?”

“제길, 원참. 야, 인마. 네가 죽고 싶어 그런 거니까 내 원망은 마.”

한 녀석이 현암에게 주먹을 날렸다. 현암은 날아오는 주먹을 가만 보고 있다가 재빨리 몸을 휙 틀며 어깨를 올렸다. 순간 놈 의 주먹이 공력이 돌고 있는 현암의 오른쪽 어깨에 퍽 소리를 내 며 꽂혔다.

“아이구!!”

“아이구우~”

그녀석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오자 현암도 거짓으로 아픈 흉내를 냈다. 다른 자들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야, 너 왜 그래?”

“아이구……. 저놈・・・・・・ . 저놈…… 어깨에 쇠뭉치를 넣었어!”

아이구 내 손!”

그러자 현암은 일부러 멍한 소리를 내며 덩달아 말했다. 

“아이구! 아파 죽겠네. 왜 다짜고짜 사람을 때려, 응?”

남자들은 의아한 듯 몇 번을 갸웃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 기는 듯했다. 다른 한 명이 현암에게 덤볐다. 현암은 아이구 소 리를 지르고 넘어지는 척하면서 놈의 다리를 걸었다. 놈이 넘어 지는 순간, 가볍게 공력을 넣은 손가락으로 몸을 찔렀다. 손가락 으로 재빨리 콕 찌른 것이라 다른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 만, 정작 그놈은 그 한 방으로 숨이 콱 막히면서 의식을 잃어버 렸다. 현암은 기듯이 일어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어라라? 이 작자가 돌부리에 찍혔군. 바보같이.”

다른 자들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저・・・・・・ 저거 뭐야, 엉?”

이미 수많은 일을 거치면서 현암의 능청스러운 연기 솜씨는 꽤 높은 수준이 되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퇴마행(또는 사람을 구해 주는 일)을 계속하면서, 그때마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금 모자라는 사람 흉내를 내 왔던 터였다. 원래 흉내를 내는 데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그런 일을 여러 번 하 다 보니 이젠 제법 그럴듯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한 명은 아픔을 못 이겨 쓰러지고 다른 한 명은 기절해 버린 상태이니 남자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은 놈 셋 중 둘은 품에서 칼을 꺼냈고, 나머지 한 명은 때마침 근방을 굴 러다니던 나무토막을 주워 들었다.

“뭐 하겠다는 거요? 날 칠 거요?”

현암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지만, 세 명은 동시에 칼과 몽둥 이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현암은 이미 그들에게 싸움 기술이 별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힘들일 것도 없이 슬 쩍 몽둥이를 피하면서 한 사람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 었다. 그 안에는 ‘투’ 자결을 응용한 삼성(三)의 공력이 들 어 있었다.

몽둥이를 든 녀석이 그 힘에 밀리면서 칼을 들고 달려들던 녀 석과 부딪혔고, 연달아 ‘투’ 자 결의 힘은 그 두 놈뿐 아니라 그 뒤에 있던 세 번째 녀석까지 쓰러뜨려 버렸다. 세 녀석은 모두 몸속까지 저릿저릿해짐을 느끼면서 버둥대지도 못한 채 뻗고 말 았다.

“어라? 왜들 서로 부딪혀서 넘어지지?”

현암이 속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중얼거리는 순간, 아까 현암 의 어깨를 쳤던 녀석이 후다닥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현암은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면서 소리쳤다.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슈.”

돌멩이를 손가락에 끼운 뒤 사성(四)의 공력으로 탁 퉁기자 도망치던 녀석은 종아리에 돌멩이를 맞고 데굴데굴 굴렀다. 녀 석은 크윽 하는 신음성을 내고는 다리를 잡은 채 움직이지도 못 하고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화명 노인이 알려준 천정개혁 대법(天正開血大法)을 수련한 덕분에 현암의 태극기공 공력 운 행법은 한층 발전하여, 힘을 물건에 담고 그 안에 유지시켜 다른 물건으로 전달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좀 심했나?’

현암은 다리에 돌멩이를 맞은 녀석이 일어서기는커녕 찍소리 도 내지 못하자 머리를 살짝 긁었다.

‘사성이면 그냥 넘어져 끙끙대고 말 거다 싶었는데. 내 공력이 생각보다 강한 거냐, 그 사람이 유달리 약한 거냐. 내가 심했나. 현암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포대를 풀었다. 그런데 안에 있던 여자가 외치는 소리에 현암은 깜짝 놀랐다.

“고마워요! 진짜 세시네요!”

현암은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리며 뭔가 말하려던 입을 다물고 어조를 바꿔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

“봤죠.”

“포대 속에서요?”

그러자 여자는 헤헤 웃으면서 포대에 난 구멍을 가리켰다. 현 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멍청하게 보이려 했으니 끝 까지 바보 노릇을 하기로 작정했다.

“내가 센 거 아니에요. 저 사람들이 잘못해서 넘어진 거죠.  뭐.”

현암의 말을 듣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스무 살이 좀 넘어 보였는데 약간 살지고 키도 작았으며 솔직히 말해서 조 금 못난 얼굴이었다.

“알아요. 원래 왕자님은 신분을 감추는거니까.”

현암은 머릿속이 띵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뭐・・・・・・요?”

“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요. 나를 구해 줄 왕자님이 나타날 줄…..”

“머리 다쳤수?”

현암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입을 다물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끈적해서 기분 나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당한 거죠?”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인신매매단인가? 어쨌든……”

‘인신매매단은 눈도 없나?’

직접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살인적 행위를 할 현암은 아니었다.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을 뿐. 현암 은 아직까지 쓰러져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말을 걸었다.

“형씨들은 대체 왜 그랬수?”

그 남자는 얼굴빛이 변하면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 면서 앞에 떨어진 칼을 잡으려 하기에 현암은 혼 좀 더 내줘야 겠다 싶어 ‘투자 결의 공력을 돌려서 손가락으로 남자의 등을 꾹 눌렀다. 남자는 대번 얼굴빛이 허옇게 질리면서 푹 땅에 쓰러 졌다.

“어라? 많이 아프슈? 왜 그리 아프실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현암은 삼성의 공력을 남자의 몸에 계 속 밀어 넣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넣은 것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힘이 몸 안을 훑고 있으니,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전기 고문과 흡사한 고통이리라. 남자는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만 일으켰다. “속탈이라두 나셨나? 그럼 말해 보슈. 혹시 알아요? 말을 하 면 속이 시원해져서 괜찮아질지.”

“o…… 이…………. 그건…… 그건…….”

“잘 안 들리는데?”

현암은 공력을 사성으로 올렸다. 그러자 남자는 악에 받친 듯 현암을 노려보았다.

“이………… 이…………. 악마……………. 사탄・・・・・・ 죽어도 죽어도・・・・・・ “

현암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손가락에서 힘을 뺐 다. 사탄? 악마? 여태껏 사람들에게 오만 가지 말을 다 들어 보 았어도, 사탄이나 악마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 터였다. 

“허. 나 그렇게 엄청난 건 못 되거든요?”

공력이 풀리자 남자는 헉헉거리면서 길게 몸을 뻗었다. 현암 은 다시 삼성의 공력으로 남자의 등을 찌르면서 물었다.

“근데 말이죠….”

“으아…………. 너는 사탄 맞아! 아니고선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이사…..”

남자가 또 외치자 현암은 공력을 일성(成)올렸다. 남자는 컥 숨이 막히는 듯 외치던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나는 사씨 성에 외자 이름 아니우. 난 이(李)가요.”

현암은 아주 조금 공력을 더 올려서 기막혀하는 남자의 말문 을 막아 버렸다.

“아, 좋수. 뭐, 당신 뚫린 입으로 날 사씨라는데 내가 어쩌겠 수. 졸지에 창씨개명당하네. 그런데 저 여자는 왜 잡아가려구 한 거유?”

남자가 눈을 험악하게 치뜨자 현암은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갑자기 히죽 웃어 보였다. 더불어 공력을 대폭 올리면서 아주 작게 말했다.

“정말 사탄 맛 좀 볼래?”

두 번째 고통은 심리적인 상승 작용 때문에 더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남자의 눈이 거의 뒤집어졌다.

“저…… 저…… 저 여자는…… 황금・・・・・・ 황금….”

“황금이 뭐야?”

“황금의 발을……………. 그걸 보았…….”

남자는 토해 내듯 말하고는 풀썩 쓰러져 버렸다. 기절한 것이 다. 황금의 발? 그게 뭐지?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생각 에 잠겨 있는 사이, 나머지 네 명의 남자들이 도망치려는 듯 후 닥닥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가시려구? 아, 근데 잠깐만.”

현암이 무심한 듯이 중얼거리자 네 명의 남자들은 몸을 떨면 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현암 앞으로 비실거리며 다가왔 다. 현암은 흥하고 코웃음을 친 후 말했다.

“설명 좀 해 주실라우? 왜 그랬수?”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한 남자가 삐죽거리는 것을 보 고 현암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 아…………, 그러니까………… 음…………. 저 여자를 해치려고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오해는 마세요.”

다른 한 녀석도 더듬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린 ・・・・・・ 우린 인신매매단 같은 거 아닙니다. 그럴 거면 뭐하러 저런 여자를…………….”

“왜 그랬냐니까요?”

현암이 눈살을 찌푸리자 남자가 덜덜 떨며 대답했다.

“저…………… 저 여자는 귀신 들린 여잡니다. 맞아요. 귀신 들 린・・・・・・ 그래서……….”

허허하고 헛웃음을 웃으면서 현암은 쭈그리고 앉아 그 남자의 종아리를 슬쩍 만지며 물었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계속할 거죠?”

현암의 손에는 이성(二)의 ‘유)’자 결의 공력이 들어 있 었다. 그 남자는 다리가 축 늘어지면서 관절에 힘이 빠져, 아이 고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가 물었나? 벌레 조심하슈. 좌우간 왜 그랬냐니깐?” 

다른 남자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덜덜 떨다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저 여잔 정말 미쳤어요. 그래서 데려

가려고…………….

순간 현암이 빽 소리를 질렀다.

“미친 여자 데려가는데 나한테 협박은 왜 하고 칼은 왜 휘둘러? 말이 돼?”

현암이 떨어져 있던 칼을 주워 들며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에 남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시소 놀이하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뭐? 나보고 죽어 보라구? 그게 미친 여자 데려가는 사람들의 짓거리야, 엉? 사실대로 말 못해?”

현암이 열이 치밀어 올라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단단한 칼날 이 종잇장처럼 손아귀에서 구겨져 버렸다. 남자들이 입을 딱 벌 리더니 이내 와글와글 떠들어 댔다.

“아이고…………… 아이고, 정말입니다! 정말이에요! 우린・・・・・・ 우 린…………… 저 여자를 잡아 오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이에요! 돈 받 고요! 그래서 …………… 그래서 그런 겁니다! 저 여잔 미친 여자예요! 정말 그건…….”

현암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사실 여자의 언행은 아무래도 정 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겁을 준 것만으로 이토록 벌벌 떠는 것을 보아, 이 녀석들도 조직적인 폭력배나 인신매매 단 같지 않았다. 벌써 한 녀석은 오줌까지 싼 것 같은데, 이런 상 황에서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이야?”

현암이 묻자 남자들은 합창하듯 대답했다.

“그럼요!”

“그러면 누가 시켰어?”

“뭘요?”

“누가 저 여자 잡아오라 했냐고.”

남자들은 현암 옆에 기절해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요.”

“그래?”

현암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순 간기절해 있는 줄 알았던 남자의 손이 번개같이 현암의 다리를 잡아챘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엄청난 힘이었다. 아까보다 스무 배는 강한 것 같았다. 현암은 조금 장난 비슷한 기분으로 방심해 있던 터라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자 남 자는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앞에 있던 네 명의 남자들 중 두 명 의 머리채를 잡고 세차게 맞부딪히게 했다. 퍽 하고 무엇인가 깨 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붙잡힌 두 남자가 눈을 뒤집으며 풀 썩 쓰러졌다.

그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그 남자는 다른 두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 둘을 저만치로 던져 버렸다. 우두둑 하고 꺾이는 소리가 나 면서 두 남자는 몸이 채 날아가기도 전에 목이 부러졌다. 모든 일이 현암이 휘청거렸던 짧은 순간에 다 끝났고 네 명은 시체로 변하고 말았다. 그다음 순간에야 휘청거렸던 현암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면서 속으로 외쳤다.

‘이럴수가!’

현암은 쓰러짐과 동시에 오른손에 공력을 불어 넣어 ‘발(發)’ 자결의 기운으로 땅을 쳤다. 그 반동에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순간 아슬아슬하게 현암을 스친 남자의 발이 현암이 쓰러졌던 자리를 푹 찍었는데, 놀랍게도 지면에서 십 센티미터 이상의 깊이로 푹 박히는 것이 아닌가.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현 암은 바짝 긴장하면서 공력을 오른팔에 집중했다.

그제야 현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네 명의 남자가 숨이 끊어진 것을 보고 현암은 아차 하는 안타까움과 분노, 의아함을 느꼈다. 이것은 보통의 인간이 낼 수 있는 힘이 절대 아니다. 그 렇다면 ・・・・・・・

남자의 오른손이 갈퀴같이 변하면서 자신에게로 덮쳐들어 현 암은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그 손을 막았다. 남자의 손이 대 뜸 현암의 팔을 콱 움켜쥐자 현암은 팔에 찌르르 하는 느낌을 강 하게 받았다. 정상적이 아닌, 뭔가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남자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남자 에게 팔을 잡혔더라면 진작 팔뼈가 으스러졌을 것이었다. 더 이 상 봐줄 수 없다고 판단한 현암은 오른팔에 공력을 집중하면서 팔을 바깥쪽으로 크게 휘두르며 뿌리쳤다.

남자는 현암의 팔을 움켜쥔 채 그대로 현암의 팔을 따라 앞으 로 몸을 푹 숙이는 꼴이 되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현암은 손 바닥에 팔성(成)의 공력을 넣어 힘껏 등을 후려쳤다. 쿵 소리 와 함께 남자의 몸은 현암의 무서운 힘에 땅으로 처박히며 일 센 티미터 넘게 지면을 파고들어 갔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뻗었을 텐데도 남자는 이내 두 손을 휘둘러 현암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다. 현암이 날쌔게 제자리에 서 펄쩍 뛰어 놈의 손을 피하자 놈은 또다시 손을 땅에 짚고 일 어서려고 기를 썼다.

‘이 녀석은…… 고통도 느끼지 못하나?’

현암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의 다리 를 걸어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공력을 넣어 불 끈 주먹을 쥐고는 남자의 오른손을 인정사정없이 퍽퍽 내리쳤 다. 와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오른손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 가 들렸다. 그래도 현암은 입을 꾹 다문 채 놈의 왼손까지도 내 리쳤다. 잔인한 방법이었지만 그렇지 않고서 이자를 막을 수가 없었다. 현암은 남자의 등에 오른 손바닥을 대고, 있는 힘껏 공 력을 모았다.

“이 자식! 가루가 돼 봐라!”

겉으로 인상을 쓰면서 현암은 월향검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월향, 준비해라.’

현암이 오른손에 공력을 구성(成)까지 모으자 오른손에서 밝은 광채가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남자가 풀썩 땅에 쓰 러지는 동시에 무엇인가 차가운 기운이 확 느껴졌다. 현암은 지 체 없이 눈을 감으면서 왼팔을 내뻗었다. 현암은 아직도 영을 분 별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느낌에 의지하는 편이 정확했다. 꺄아악!

현암이 왼팔을 뻗자 월향검이 쏘아져 나가면서 귀곡성을 냈 다. 월향검은 남자의 위편, 허공의 한 점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빛살같이 치고 지나갔다. 그러자 허공에서 갑자기 아아악 하는 비명이 들려오고 뭔가 아주 투명하고도 시커먼 것이 공중에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한숨을 길게 토하고 자신이 때려눕힌 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그자에게 엄청난 공격을 가하는 척함으로써 그 안 에 깃든 영이 도망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를 돌 아보니 남자는 자신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숨이 끊 어져 있었다. 아마도 방금 빠져나간 검은 기운의 짓인 듯했다.

“이런 ・・・・・・ “

현암은 안타까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기 운이 빠져나가게 술책을 쓰지 말고 남자를 순순히 놓아주어 뒤 따라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했군.”

그 존재는 예상보다 너무 맥없이 사라져 버렸다. 미루어 짐작 하건대, 그 존재는 그리 강하지 않은, 일종의 꼭두각시인 듯했다.

“골치 아프군.”

현암은 되돌아온 월향검을 받아 들고 쓰러진 네 명의 남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두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잔인한・・・・・・ ! 도대체 왜?”

그다지 질이 좋은 녀석들 같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어이없이 떼죽음당한 것을 보자 현암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애써 냉정을 잃지 않고 차분히 앞뒤를 맞추어 보았다.

방금 사라진 것은 분명 어떤 영적인 존재다. 그 존재가 이 남 자에게 들어와서 힘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왜 여자는 놓아 두고 같은 편인 남자들을 모조리 해친 것일까? 더구나 마지막 순 간에 급박하게 도망치면서도 이 남자의 목숨을 빼앗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군. 입을 막기 위해 그런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이자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 남자가 한 말 은 고작해야 사탄, 악마라고 현암에게 욕을 한 것과 황금의 발이 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도대체 황금의 발이란 무엇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현암은 방금 전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황금의 발을 보았기 때문에 그 남자들에게 잡혀가 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에게 물으면 어떤 단서를 얻 을 수 있을지도…….

현암은 그제야 여자를 찾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사이 어디론가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현암은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는 이제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순간 현암은 당황했다. 앞에는 다섯 구나 되는 시체가 즐비하 게 널려 있다. 물론 자신이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 까 다투면서 그 시체들에 자신의 손자국이라도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목격자도 없는 이상, 이들이 죽인 자는 꼼짝없이 자신이 될 판이었다.

그렇다고 수백 명이 웅성거리는 건물 바로 근방에 이 시신들 을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도망쳐 버린 그 여 자는 정상인도 아닌,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정확하게 증 언을 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여자는 영적인 존 재나 그 힘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를 테니 이 다섯 명을 죽인 게 현암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이거 더럽게 됐네.”

현암은 입술을 깨물며 별수 없다는 기분에, 공력을 집중시키 면서 팔을 뻗었다.

“아까 그 여자를 찾아봐줘! 월향!’

월향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 는 제정신이 아니니 보게 되어도 상관없다 싶어 현암은 월향검 을 날렸다. 월향검은 회답하듯 조그마한 소리로 울면서 현암의 왼손에서 빠져나가 밤하늘 저편으로 솟구쳐 올랐다. 공력을 집중시켜 넣어 주면 월향은 스스로도 어느 정도의 비행이 가능했다. 현암은 재빨리 다섯 구의 시체를 끌고 숲 속으로 가서 서둘러 땅을 팠다. 맨손이었지만 십성(成)의 공력을 담은 현암의 손은 거의 포클레인만큼이나 빠르게 구덩이를 파 내려갔다. 비록 좋 은 놈들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무참히 죽어 버리다니. 현암은 조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제발 나중에라도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수는 꼭 갚아줄 테니 편히 잠들어라.’

일단 그들을 구덩이에 넣은 다음 아까 여자를 묶었던 끈과 포 대 등도 모조리 파묻었다. 그자들의 몸을 뒤져 볼까도 싶었지만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현암은 시신들을 묻고 근처에 때마침 굴러다니던 거대한 바위 두 개를 밀어서 그 위를 덮었다. 현암의 공력으로도 간신히 굴릴 정도의 큰 바위로 덮었으니 이 정도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일을 해치우긴 했지만 공력 소모가 조금 있어서인지 땀이 뻘뻘 났다. 그리고 새삼스레 그 악랄한 영 적 존재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지.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 다섯 명이 나 죽는 것을 그냥 보다니……………. 그놈을………… 내 반드시 찾아내 어 없애고 말겠다!’

현암이 땀과 흙을 털면서 다짐하는데, 저쪽에서 월향검의 귀 곡성이 들려왔다. 얼른 몸을 일으켜 그쪽을 향해 숲을 헤치며 달 려가 보니, 과연 아까 그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땅에 주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둥둥 떠 있었던 월향검은 현암이 다가오 자휙 하고 그의 왼팔 속으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현암이 다가오는 것을 그 여자는 멍하니 보더니 실실 웃었다. 

“오빠 왔네? 헤헤 ……………..”

현암은 기가 막혀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저렇게 웃는 얼굴로 보아 정신이 나간 여자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

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몰라. 무서워서. 그러니까…………… 그게…………. 아까 너무 무섭 고………… 이상한 귀신 같은 게 둥둥 떠서……………. 히히, 오빠가 오니 까 없어졌어. 오빤 정말 왕자님이야.”

“나 같은 게 무슨 왕자야?”

“쌈잘하구……. 날 구해 줬잖아.”

“으음…………. 근데 네 이름이 뭐냐?”

“몰라.”

“이름도 몰라?”

“몰라.”

“아까 그 사람들이 왜 널 잡아가려고 했지?”

“몰라…………….”

묻는 족족 모른다고만 하자 현암은 고개를 젓다가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황금의 발이 뭐야?”

별안간 그 여자의 얼굴이 확 변했다. 창백해졌다가 퍼렇게 변 했다가를 두어 번이나 반복하는 것을 보고 현암은 흠칫 놀랐다. 혹시 무슨 악령이 씌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고 놀랐을 때 보이는 그런 표정이었다.

“발・・・・・・ . 황금의 발…………. 난 봤지. 그래…………. 봤지…………….”

“그것 때문에 그자들이 널 잡아가려고 한 건가? 그게 뭐지?”

“몰라…………. 난 몰라!”

“봤다면서?”

“그건 ・・・・・・ 그건 황금으로 된 발이야. 그것밖에 몰라! 몰라! 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 

현암은 여자가 히스테릭해지자 막막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서 봤어?”

여자는 멍한 눈빛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수백 명의 사람들 이 우글거리는, 새로 지은 건물 쪽을…………….

“저기서?”

현암이 묻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현암에게 말했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가면 죽어. 아니, 아니, 가면 나처럼돼!”

비록 제정신은 아니었지만 여자의 목소리가 하도 간절해서 그 곳에 가면 정말 위험해질 것 같았다.

현암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섯 명의 시신이 묻혀 있는 바 윗덩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여자를 남겨 두고 조용히 아래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