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23화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5 : 드러나는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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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1권 – 23화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5 : 드러나는 정체


드러나는 정체

현암의 얼굴을 감쌌던 그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가 퍽 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사자후의 굉음이 주변을 진동시 켰다. 떨어져 나간 그림은 무서운 힘으로 밀려가서 현웅 화백의 집 담벼락에 한 치가량 틀어박혔고, 두 사람은 엄청난 소리에 귀 를 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음? 언제 내 공력이 이렇게 깊어졌지? 전엔 사자후 한 번이면 기절 직전이었는데.’

현암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며 허공에 떠 있던 월향을 불러 손에 잡았다. 약간 기운이 빠지기는 했지만, 크게 힘들지 않았다.

“더 이상 사람을 해치도록 놔둘 수는 없다! 악한이라고 해도 인간의 징벌은 인간의 손이나 신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 도리! 하 물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 선량한 주희의 영을 사칭하는 네 손에 더 이상은……”

말을 잇던 현암은 움찔했다. 벽에 틀어박힌 그림에서 다시금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전봇대 변압기 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서 터지고 불덩이들이 바지직 거리며 날아왔다. 그와 함께 가까이 있던 돌이며 유리 조각들이 공중에 떠올라 무서운 속도로 덤벼들었다.

호호호……. 그 정도로 내 그림을 어쩌지는 못한다! 이거나 받아라!

현암은 기공을 끌어 올려 피하려 했으나, 뒤에 두 명의 악한들 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대로 두면 아까의 남자처럼 당할 게 뻔했다. 현암은 둘의 앞을 막아섰다.

“에잇!”

현암은 있는 대로 기공을 끌어 올려 앞서 날아오는 돌과 유리 조각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뒤에서 두 명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혀, 형님!”

펑 하는 소리가 나며 날아오던 돌과 유리는 현암의 반탄력에 밀려 사방으로 튀었으나 몇 개의 유리 조각은 현암의 몸으로 비집고 박혔다. 선혈이 몇 방울 흘렀다.

“으, 형님・・・・・・ 우리 때문에………….”

“집어치워! 누가 너희 형이냐? 윽!”

현암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기공을 끌어모았다. 이번에는 불덩이가 날아왔다. 두 남자는 격앙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불은 이제 지하실 전체에 번져 위로 통하는 문 언저리까지 집 어삼키고 있었다. 박 신부는 아차 싶었으나 밑에 있을 것이 분명 한현웅 화백을 만나 보지 않고서는 갈 수 없었다. 내친김에 박 신부는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음? 저건?”

박신부의 눈앞에 또 하나의 그림이 바닥에 기대어 있었다. 공 개되지 않은 소녀의 그림, <종이 접는 소녀>………….

“복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림이로군. <종이 접는 소녀> 라……………. 사람을 접어 없애려는 건가? 끔찍하군.”

그러고 보니 땅벌 떼의 인원은 여덟이었는데 그림이 일곱 장 뿐이라 이상했었다. 마지막 그림은 여기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박 신부는 기름통을 들고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서서히 여덟 번째의 그림으로 접근해 갔다.


“뭐 하는 거야, 이 바보들!”

현암은 목청을 높여 외쳤다. 두 남자가 뒤에서 뛰어나와 현암의 앞을 가리고 날아오는 불덩이를 정면으로 맞받은 것이다. 불은 삽시간에 온몸에 번졌다. 얼굴색이 파란 남자가 뒤로 쓰러지 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두목이었던 종호는 이를 악물고 활활 타 오르는 몸을 담벼락에 박혀 있는 그림에게로 날렸다.

“너, 내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안 돼,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겠다.”

두목은 불붙은 몸을 그림 위로 덮쳐눌렀다.

“아, 안 돼! 불을 꺼야 해! “

“혀, 형님! 복수는 내, 내 손으로…………… 으아악!”

말을 이으려던 두목의 입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그 림이 그의 등을 뚫고 나왔다. 큰 구멍이 뚫린 두목의 몸은 그대 로 허물어져 내렸다. 이미 불은 선혈에 물든 채 허공에 뜬 그림을 태워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천하에 몹쓸!”

현암은 이를 갈며 월향을 던지고 태극패에 기공을 담아 눈부 신 빛을 발출했다. 그런데 그림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별 헤 는 소녀>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별이 아니라 두목의 얼굴이었다. 월향이 그림을 뚫고 지나가자 뒤이어 태극패의 빛이 그림을 삽 시간에 불덩이로 태워 버렸다.

“끝났다.”

중얼거리는 현암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금 아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호호호…….

“이건 뭐야? 아직 남아 있었나?”

그림 여덟은 내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거기 가둔 여 덟의 영을 희생함으로써 나는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호호호…………. 마지막의 영을 해치운 것은 네 술수 덕분이었지!

“뭐라고? 내가 언제!”

마지막 놈의 영은 그림에 봉인되어 있었다. 네가 깨끗이 해치워 주더군, 호호호……..

“이 악랄한!”

현암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무리 악행을 많이 저지른 자이기는 했어도, 마지막엔 현암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려 했던 자였는데………….

“네 목적이 뭐냐?”

이제 나를 막을 수는 없을걸?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후였다.

“주희 누나! 더 이상 악행을 해선 안 돼요!”

부적을 한 움큼 꺼낸 준후의 뒤에 겁먹은 듯한 여자가 서 있었다. 현승희였다.

“준후야! 저건 주희의 영이 아니야! 악령이 속임수를 쓰는 것 뿐이라구! 사정 봐줄 것 없어!”

그간의 이야기를 준후에게서 간략히 들은 듯, 승희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스쳐갔다. 준후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 며 현암에게 부적을 한 장 던져 주었다. 영의 실체를 볼 수 있게 하는 안명부였다. 준후와 현암 사이에 머뭇거리는 한 여자의 영 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얼굴의 모습은 흐릿하니 주희의 모습 을 띠고 있었지만, 현암은 그것이 거짓으로 만든 얼굴이라는 것 을 알았다.

“현암 형, 틀림없어요? 주희 누나의 영이 아닌게?”

“틀림없어! 내가 초혼을 했을 때 주희의 영이 나타났지. 아버 지를 도와달라고 속고 있다고 했어. 현웅 화백을 도와야 해!” 현승희의 얼굴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예? 아버지가요? 속고 있다고요?”


박신부는 타들어 가는 그림 속에서 한 남자의 영상이 겹쳐 함 께 타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지었다.

“또 죽고 말았군. 결국 여덟 명이 모두 죽은 건가? 가련하 게…………. 음? 그럼 혹시 현암 군도? 아니지, 준후도 갔는데 그리 쉽게 당할 리는 없지.”

박 신부는 마침내 마지막 문을 열었다. 그 방은 아직 연기나 불길이 미치지 않고 있는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방 안에는 머리 가 허옇게 센 남자가 앉아 그림의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었다.

현웅 화백이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막 잠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소녀, <잠깨는 소녀>다. 그림에 있는 얼굴을 본 박 신부의 얼굴에 의심스런 기색이 비쳤다.

“현웅, 나를 기억하는가?”

현웅 화백은 눈도 돌리지 않고 붓만 놀리고 있었다.

“박신부, 자네는 나를 기억하는가?”

현웅 화백의 붓이 잠시 멈칫했다.

“자네는 또 소녀를 그리는 건가? 그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네. 벌써 여덟이나…………….”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어!”

현웅 화백은 벌컥 노호하며 붓을 멈추었다. 그리고 박 신부를 정면으로 째려보았다. 눈에 시퍼런 기운이 감도는 것이 이미 정 상적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박 신부의 눈도 안경 너머로 무서 운 안광을 쏘아 보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식의 복수가 옳다고 보는가?”

“안 될 것은 무언가? 놈들은, 놈들은 우리 주희를…………… 그 착 한 애를 납치해서 번갈아 욕을 보이고 반항하는 애를 칼로 난도 질해서 죽였어! 놈들도 당해야 해!”

“지금의 자네가 그놈들과 다를 건 또 뭐지?”

“나는 그들을 직접 해치진 않았어! 그림을 그렸을 뿐! 주희가 꿈에 나타나 매일 내게 복수를………….”

“주희의 영이? 자네가 힘을 빌려 주었나? 자네의 숨은 능력으로?”

“못할 건 없지. 목숨도 내줄 수 있네. 주희를 달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현웅 화백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빛났다.

“날 방해하지 말게. 이게 내 최후의 작품, 그 애가 부탁한 마지막 그림이네.”

박신부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 그림? 그러면 주희가 여덟 개가 아닌 아홉 개의 그림 을 그려 달라고 요구했나?”

“아홉이면 어떻고 열이면 어떤가.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나가 주게.”

현웅 화백이 눈을 부릅뜨자 옆에 서 있던 청동 조각상이 박신 부쪽으로 날아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박 신부는 미동 도 하지 않고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능력이 엄청나졌군. 그런데 주희가 왜 마지막 그림, 저 <잠 깨는 소녀>를 그려 달라고 요청했는지 알고 싶지 않나?”

“몰라! 듣고 싶지도 않아! 더 이상 지껄이면 옛 친구라도 가만 두지 않겠어. 내 손으로 자넬 해치고 싶진 않네, 제발!”

“주희를 죽게 만든 자들은 여덟 명이었네. 복수는 끝났어. 그 런데도 이 아홉 번째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현웅 화백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몰라! 알고 싶지 않아. 방해하지 마라! 난 주희의 소원을 들어주고 말거야!”

현웅 화백의 몸에서 염동력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리고 있던 그림과 도구를 제외한 근처의 사물들이 미친 듯 날아다니 기 시작했다. 그간의 울분과 집념이 쌓여서인지, 현웅 화백의 염 동력은 엄청나게 증가되어 있었다. 박 신부도 있는 힘을 다해 오 라를 일으켜 대항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히자 회 오리바람이 일어나 주위의 물건들이 부서져 나갔다.

“이 바보 같은 친구! 주희는 부활을 원하는 거다! <잠 깨는 소 녀>, 그 그림을 매개로 하여, 여덟 명의 영혼을 희생시켜서 다시 살아나려 하는 거야!”

“닥쳐!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초상화를 완성해야 해! 주희가 살아난다니, 반드시 그리고 말거야!”

“이 멍청이!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해선 산 사람의 몸이 필요하 다고! 자네가 그리고 있는 것이 누군지 알아? 주희가 누구의 몸 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 바로 승희야!”


“지하실에 불이!”

준후가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소리쳤다. 현암도 놀라 집 쪽을 돌아보는데, 그 순간 둘 사이에 포위되어 있던 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저, 저놈이!”

“준후야, 쫓아라! 놈은 뭔가 일을 꾸미고 있어! 신부님이 그리고 현웅 화백도 위험해!”

“아버지!”

셋은 다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벌써 검은 연기는 하 늘을 찌를 듯 치솟고 있었고, 변압기가 터져서 전기가 나간 마을 쪽에서도 수선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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