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1권 – 32화 생명의 나무 3 : 흑마술
흑마술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아직도 울먹이는 승희는 응급실 바깥 을 서성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술도 아닌 기관총 에 당하다니……. 불법 총기까지 태연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 놈들은 역시 보통 사이비 종교 집단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급한 대로 병원으로 달려오기는 했지만, 총상을 입은 환자를 뭐라고 변명을 해서 둘러대야 하는지 박 신부로선 막막하지 않을 수 없 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거나, 만에 하나 경찰이 사실을 믿어 준다고 해도 놈들은 이미 잠적해 버린 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지금으로 선 알아내기가 감감한 노릇이었다.
“현암군이 뭐라고 말한 건 없었나?”
승희가 아직도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아뇨.”
“흠, 이상하군. 놈들이 현암 군에게 총질까지 해 댄 걸 보면, 뭔가 현암군이 중요한 것을 알아낸 것이 분명한데……………. 승희야, 그 집에서 일어나는 싸움도 목격했니?”
“흑………….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벽이 무너지며 현암 오빠가 날려서 땅에 처박히고는 엄청난 바람이…………….”
“바람? 혹시 사대력을 이용한 건 아닐까?”
준후가 걱정 반 호기심 반의 눈초리로 끼어들었다.
“사대력이요?”
“응. 서양의 신비주의에서는 만물이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 다고 하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인데, 그 정 령들을 소환하는 비술들이 전해지고 있다나 봐. 그런 것은 주로 흑마술의 계열에서 전수되는데……..”.
승희가 듣기 싫다는 듯 외쳤다.
“지금 그런 게 무슨 문제예요? 현암 오빠가 죽지는 않겠죠.”
“예?”
준후가 어른스럽게 승희를 달랬다.
“염려 말아요. 누나. 워낙 강한 사람이고 공력도 높은데다가 치명적인 급소는 다치지 않았다니까 괜찮을 거예요.”
승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준후를 쳐다보았다. 준후도 억지로 얼굴을 펴려 하고 있었다.
“그래 넌 참 어른스럽구나. 내가 너무 방정맞지? 나잇값도 못 하고…….”
“아녜요. 누나가 워낙 착하고 스스럼이 없으니까 그런 거죠. 뭐.”
“고마워.”
셋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현암이 괜찮기를 빌고 있는데, 갑자기 응급실 안에서 현암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아니, 현암군이?”
준후가 사방을 살피면서 외쳤다. 뭔가 이상한 힘이 몰려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왔다.
“사악한 기운이 있어요! 이게 뭐죠, 신부님?”
박 신부와 준후는 응급실로 뛰어들었다. 현암이 계속 비명을 질러대고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놀라서 웅성대고 있었다. 비명 이 들리는 곳으로 뛰어가는데, 현암을 간호하고 있던 간호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박 신부 와 준후는 간호사를 붙들고 외쳤다.
“무슨 일이요?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죠?”
“저 사람의 팔에서 갑자기 상처가 터지면서………… 몸 여기저기 서 없던 상처들이 막…………….”
박 신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미 준후는 몸을 날려 현암이 누워 있는, 흰 커튼을 쳐 놓은 곳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준후의 놀라워하는 외침이 들렸다.
“으아, 신부님! 이, 이런!”
박 신부가 달려가서 커튼을 와락 열어젖히고는 우뚝 멈추어 섰다. 현암은 이를 악물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이미 의 식은 없는 상태였으나 오랜 훈련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취해진 방어 자세이리라. 몸에는 구멍이 대여섯 개나 뚫려 있었고, 거기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현암의 입에서 비명 소리 가 터지면서, 오른쪽 어깨에 퍽 하고 구멍이 뚫리며 피가 튀었 다. 의사 한 명이 겁에 질린 듯 벽에 기대어 있다가 선혈을 뒤집 어썼고, 다른 의사는 필사적으로 현암의 상처를 붕대로 감싸려 하다가 현암의 몸에서 솟구치는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뒤로 벌렁 자빠졌다. 준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신부님, 저게, 저게 어쩐 일이에요? 무슨 사술이기에 기공으로 몸을 다진 현암 형을 저리 쉽게!”
박신부의 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흑마술! 틀림없다! 흑마술의 수법이다!”
박 신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면서 의사들의 멱살을 잡고 밀어냈다.
“빨리, 빨리 여기서 나가요! 모두!”
준후는 박 신부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만약 이것도 주술 의 일종이라면 자신들도 주술의 방어막을 쳐야 하는데, 그러다 가는 응급실 안에 있는 많은 환자와 의료인들까지 다칠지도 모 른다. 준후는 얼른 생각을 굴려 사람들을 한꺼번에 쫓아낼 방법 을 찾았다. 아무 영이나 호출해서 눈에 보이게 현신시키면 될 듯 했다. 준후가 급히 나찰천의 주를 외우자 준후의 뒤쪽에서부터 무시무시한 형체를 지닌 나찰의 허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박 신부도 준후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괴물이다! 귀신이다!”
삽시간에 응급실 안은 아수라장을 이루면서 환자와 가족, 의 사를 가릴 것 없이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들의 등 뒤에는 준후가 만들어 낸 허상이 포효하고 있었다. 현암의 몸에 생기는 상처들이 점차 몸의 중심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박 신부는 주변 사람들이 없어지자 현암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녹색의 오라가 현암에게 집중되자, 현암의 왼쪽 가슴 언저리가 움푹 들어가더니 다시 튀 어나왔다. 일단 기도력으로 흑마술의 힘을 막아 내자 박 신부가 한숨을 쉬었다. 한 번의 공격은 막았지만 체력 소모가 심했다.
“준후야, 결계를! 가장 강한 결계를 쳐!”
준후가 나찰의 모습을 지우며 부적을 꺼내 허공에 날리고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암흑의 힘을 막아 주소서! 오대명왕진!”
준후가 외치면서 입에서 선혈을 뿜어 부적에 적시자 금강야차 부(金剛夜叉符)가 북방으로, 항삼세부(降三世符)가 동쪽으로 날 고, 다시 준후가 기합을 넣자 대위덕부(大威德符)가 서쪽, 군다 리부(軍茶利)가 남쪽으로 날았다. 준후가 수인을 맺고 기합을 발하자 부동명왕부(不動明王符)가 현암의 머리 위에 우뚝 서더 니 빛을 뿜었다. 찬란한 빛이 네 개의 부적에 번져 가자 다시 부 적들이 금빛을 발하면서 중앙의 부동명왕부를 중심으로 빙글빙
글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불바퀴 같은 형 상이 되어 현암의 주위를 돌았다. 전에 현암이 건성으로 펼친 진 과는 전혀 딴판의 위력이었다. 준후는 주술을 마치고 털썩 주저 앉았다. 준후의 옷이 삽시간에 땀에 젖은 것으로 보아, 엄청나게 힘을 쏟은 진인 듯했다.
“승희, 승희야! 준후에게 힘을!”
박신부가 외치자 정신 나간 듯 서 있던 승희가 달려와 준후 의 옆에 좌정했다. 승희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리면서 현암에게 서 배운 도가의 토납술을 행하자 새파랗게 질려 있던 준후의 안 색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유파가 다른 힘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지로 버티고 있던 박 신부가 진이 완전히 펼쳐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땀을 흠뻑 흘리며 진 속에서 걸어 나왔다. 다행히 준후가 부른 신의 힘들도 정순한 것이어서 박 신부의 오라 막을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박 신부가 한숨을 쉬면서 준후 옆에 정좌 하여 무릎을 꿇고는 십자가를 꺼내 들고 앉았다. 준후가 주술을 운용하며 틈을 내어 박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흑마술이라니? 어떤 거지요?”
“지극히 사악한 것이다. 아마 인형을 이용한 수법이었을 거야. 목표로 삼은 사람의 몸의 일부를 담아 사악한 의례로 인형을 만 들어 낸 뒤, 인형에게 위해를 가하면 표적이 인형과 같은 곳에 상처를 입게 되지.”
“세상에….. 옛날 우리나라의 제웅*을 쓰는 거나 일본에서 초상화를 그려 놓고 못을 박는 것과 비슷한 거군요.”
“그것보다 훨씬 효과가 빠르지. 게다가 주술력이 강한 자들이 사용하는 것이니까…………. 아까 현암 군이 몸에 기공을 돌리는데 도 구멍이 막 뚫리지 않던?”
“놈들이 현암 형의 인형에 못 같은 걸 찌르는 건가요?”
“그럴 테지. 지금은 우리의 방어 때문에 못이 들어가지 않을 거야.”
현암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현암이 앉아 있는 침대의 시트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면서 저절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신부님!”
“이런 놈들이 현암의 인형을 불에 태우려 하나 보다! 준후야!” 준후가 다시 승희의 힘을 가득 모아서 삼매신수(神)의 수를 펼쳤다. 검은 연기 같은 구름들이 뭉치며 현암의 주위를 덮 자, 흰 물안개가 사방을 적시면서 불을 껐다. 수증기가 자욱한 속에서 준후가 헐떡거렸고, 승희도 무아지경 속에서 무리한 힘 을 낸 듯 얼굴빛이 변해 있었다.
*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것. 원래는 액을 막기 위하여 대용물의 용도로 만들 어진 도구이나 저주를 내리는 용도로 악용되기도 했다.
“헉헉헉! 더 이상 수를 쓰면 아무리 승희 누나의 힘을 빌리더 라도 무리예요! 어쩌죠. 신부님?”
박신부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금빛이 번쩍이는 부적을 꺼내 들었다.
“놈들은 이 근방에 있을 거야. 주술로 해를 입히지 못하면 직접 찾아오겠지.”
“현암 형이 알아낸 비밀이 대체 뭐기에 저렇게 질기게 굴죠?”
“알 수 없지. 아무튼 비밀보다도, 일단 현암 군을 지켜야 해! 준후야, 힘을 비축해 두어라!”
“예, 신부님・・・・・・ 응? 밖에 뭔가 다가와요!”
준후가 외쳤다. 박 신부도 영사를 행했다. 역시 사악한, 검은 기운이 병원을 에워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준후야, 놈들이다!”
“수가 많아요! 그중에 둘은 엄청 세고! 나머지도 이상한 기운이!”
밖에서 놈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터무니없게도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사령의 힘으로 응급실에 나타난 귀신을 처단하 겠다고 둘러대는 것 같았다. 교활한 놈들이었다. 박 신부는 혀를 내두르며 승희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승희야, 뒤로 물러서서 현암 군을 보살펴라! 그리고 준후를 도와!”
승희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으나, 입가를 찡그리고 있는 표정에는 각오가 단단히 서려 있었다.
준후가 품에서 금줄을 꺼내 주위에 확 펼치자 금줄은 꼿꼿이 가로로 뻗어서 마치 난간처럼 둘의 앞을 막았다.
“이게 어느 정도 우릴 보호해 줄 거예요. 주술을 흡수해 버리는 줄이나………….”
박 신부도 기도문을 읊으며 JNRJ의 부적을 앞에 놓고 십자가 를 양손으로 쥐었다. 십자가에서 파란 성령의 불이 솟으며 부적 이 공중으로 떠올라 박 신부의 앞을 지키듯 허공에 머물렀다. 승희가 뒤로 들어가 현암을 부축하고는 대강 지혈을 시키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놈들이 주문인지 찬가인지를 부르면서 접근 해 오고 있었다. 준후와 박 신부는 바짝 장했다. 그때 승희의 외침이 들려왔다.
“잠깐요, 여기! 현암 오빠의 손에 뭔가 써 있어요!”
돌연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응급실의 창문과 문이 한꺼번에 와장창 부서져 나가고 엄청난 바람의 소용돌이가 밀어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