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12화 – 초치검의 비밀 2 : 명검과 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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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12화 – 초치검의 비밀 2 : 명검과 도인들


명검과 도인들

안 기자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상방리에서 내린 사람은 일곱명. 안 기자와 네 남자, 그리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과 늙어서 허리가 구부정한 평범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네 남자들 은 검은색 윗옷에 검은색 바지, 검은 신을 신고 있었고 머리에 질끈 맨 광목천만 흰색이었다. 머리카락은 거의 어깨까지 흘러 내렸다. 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도 기다란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멘 채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쏘아보고 있었다. 안 기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사 대 일의 눈싸움을 지켜보았다.

‘저들은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야.’

네 남자들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고개를 꼿꼿 이 세운 여자의 눈빛은 마치 무저갱처럼 모든 것을 깊숙이 빨아 들이는 듯했다.

안 기자는 꼼짝할 수 없었다. 안 기자는 뒷자리에 앉은 여자보 다 차에서 먼저 내렸지만 등에 진 장비를 살피느라 문 근처에서 꾸물거리는 통에 양측의 대치 상태에 휘말리고 말았다. 양측의 인물들이 내뿜는 기이한 느낌 때문에 안 기자는 사이를 헤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할머니가 흰 보따리를 들 고 그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 기자는 할머니를 말 리려 했으나 늦고 말았다. 불쑥 할머니가 끼어들자 여자가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네 남자들도 눈빛을 지우면서 뒤로 두세 걸음 물러섰다. 할머니는 휘적휘적 빠른 걸음걸이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길로 나서더니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안 기자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 남자들은 여인에 게 목례를 했고 여인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답했다.

한 남자가 문득 여인의 등에 얹힌 보따리를 살피다가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청홍?”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런…………….”

여인은 대답 대신 웃으면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그 말을 꺼낸 남자가 주춤하며 여자에게 부탁하는 어투로 말했다.

“저, 잠깐이라도・・・・・ 견식을 넓힐 기회를 주실 수……?” 안 기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청홍? 그게 뭐지? 칼을 가리 키는 말 같은데…….”

여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어깨의 보따리를 가볍게 한 번 흔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울 소리도 아니고 마치 쇠 쟁반 위 에 쇠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맑은 쇳소리가 길게 울려 나왔다. 네 남자는 소리를 듣고 넋을 잃은 표정이 되었다. 안 기자도 어 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건 분명히 칼일 텐데 저런 소 리를 내다니. 희대의 명검이나 명도는 스스로 운다고 했다. 그렇 다면 저건 칼이 우는 소리란 말인가?

‘청홍검이라.’

안 기자는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장면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상상에 잠겼다.


피바다가 된 싸움터, 여기저기서 철갑을 입은 기마병들이 허 약한 반대편 군사들을 도륙하며 우왕좌왕하는 민간인들을 짓밟 고 나아가고 있다. 거기에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젊은 장수 하 나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고, 한쪽에서 화려한 무장을 한, 역시 새파랗게 젊은 장수가 부하 십여 명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다. 피 를 뒤집어쓴 젊은 장수는 두려운 기색도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적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돌진한다. 그가 휘두르는 창에 적들은 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삽시간에 십여 명의 부하들은 땅 에 뒹구는 송장이 되어 버린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는 출중 한 상대의 무예에 기가 질렸는지 뒤로 말을 돌려 달아나려 하나, 역시 창에 맞고 쓰러진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써서 악귀 같은 형 상이 되어 있던 장수의 얼굴에 갑자기 놀라움의 빛이 스치더니, 얼른 말에서 내려 방금 자신이 처치한 장수가 등에 메고 있는 장 검을 살핀다.

“바보 같은 놈! 이런 좋은 검을 뽑아 보지도 못한 채 죽다니!” 

장수는 장검을 떼어 낸다. 그 손길은 약탈이 아니다. 젊은 장 수는 마치 연인을 감싸듯 부드럽게 칼을 집어 든다. 감정을 내보이지 않던 장수의 얼굴에 격정과 기쁨의 표정이 떠오른다. 장검의 자루에 금으로 새겨진 글자, 청홍(靑紅)!

“청홍검! 청홍검! 아, 이자가 바로 조조의 수신배검장(隨身) 하후은이었구나! 이 검은 하늘이 주신 것이다!”

미칠 듯 기뻐하는 그 장수는 바로 당양 장판교 싸움의 영웅, 상산 조자룡이었다.


‘그러면 저 여자가 가진 칼이 삼국지』의 명장 조자룡이 썼다 는 청홍검이란 말인가!’

안 기자는 묵직한 충격을 느꼈다. 그 정도의 칼이라면 국보급 이상의 보물. 그런 전설상의 명검을 저 작고 젊은 여자가 지니고 있다니.

여인은 등에 걸쳤던 보따리를 조용히 내려 손으로 살며시 들 더니 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남자들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두런두런 떠들기 시작했다. 안 기자는 손으로 는 들고 있던 잡지책을 뒤적이는 척하며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그들의 말을 엿듣기 시작했다.

“근호 형, 저게 진짜 청홍검일까요?”

“틀림없는 것 같아. 검이 우는 소리가 들렸어.”

“그럼 저 여자도 우리처럼 왜구들의 무덤을 조사하러……?”

“그럴 거야. 이거 큰일이네. 저런 신병(神)을 가지고 올 정도라니.”

“그게 왜 큰일이에요?”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 저 정도 물건을 가지고 올 정도면…. 배후에 아주 심각한 일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경민 형은 뭐 짚이는 게 없수?”

“글쎄, 누가 흑막을 쳐 놓았는지 영 투시가 안 돼. 뭔가 심상치 않아.”

“그런데 윤섭이, 아까 그 여자의 내력도 대단하던데. 비록 오 성(五)의 힘밖에 안 썼지만 우리 넷의 기공력을 눈 깜짝 않고 버틴 것을 보면 말이야.”

“누가 아니래. 아무튼 우리 현현파(派) 외에도 여러 사람 들이 모일 것 같군.”

“태현이 경민이 이제 그만! 누가 들라!”

네 명이 떠들던 말을 멈추고 바삐 걸음을 놀려 사라져 버린 뒤 에도 안 기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여전히 진정시키지 못했다. 청홍검, 기공력, 현현파, 투시,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로 세상에 있었단 말인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니. 그리고 왜구의 무덤? 그들의 목적지도 분명히 그곳이었다. 안 기자는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냈다. 이번 일은 정말 보통의 일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공력을 사용할 때에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힘에 비하여 어느 정도까지 공력을 사용하는가를 나타낼 때에 성(成)의 단위를 쓴다. 최고의 공력을 사용할 때, 즉 무리를 해서 실제 이상의 힘을 뽑아 쓸 때에 12성의 공력을 사용한다고 한다. 오 성의 공력은 약 절반쯤의 힘을 쓰는 셈이다.


그렇지. 현암이 놈에게도 이 일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게 해 주어야지. 그래서 오는지 안 오는지 두고 보면 그놈이 정말 아 무것도 모르는 놈인지, 징그럽게 내숭을 떨었던 건지 알 수 있으렷다!”

안 기자는 전화 부스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 안 기자는 짜증이 났 다. 벌써 삼십 분 이상 현암의 연락처에 전화를 걸고 있었으나 도대체 통화가 되지 않았다.

“제기랄, 관둬라, 관둬. 네가 도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냐? 그렇다고 내 인생이 달라지겠냐?”

홧김에 전화를 끊은 안 기자가 고개를 돌리자 버스가 멈추었 다. 안 기자는 움찔했다. 아마도 안 기자가 타고 온 버스의 다음 차인 듯한데, 천천히 하차하는 몇 사람의 행색이 아까 보았던 사 람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내린 두 사람은 머리와 수염을 치렁치렁하게 흐트 러뜨린 남자였다. 때가 껴서 잿빛으로 변한 옷을 걸치고 역시 얼 룩덜룩한 회색의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 저 너저분한 거지로 치부하고 넘어갔겠지만 앞서 내린 사람들을 본 후인지라 이 남자들도 비범해 보였다.

뒤이어 내린 사람은 머리가 빤질빤질 빛나는 완벽한 대머리로 거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키가 족히 이 미터는 될 듯싶었고, 큰 키가 작아 보일 만큼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얼굴 또한 험상 기 이를 데 없었고 이마에 한일자로 주름이 가 있는 것이 이런 것을 갈매기라고 하던가?) 공포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모양이다.’

그다음 사람은 생김새가 그다지 특이하지 않았으나 등에 이상 한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무슨 막대기 같은 것을 가득 담은 화 살통 비슷한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차에서 내리면서 어깨 를 한 번 흔들자 등에 꽂혀 있던 막대기들이 부채 모양으로 일제 히 활짝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수염 기른 두 남자와 대머리의 표정이 험 악하게 변했다. 도대체 왜들 저러는 걸까? 안 기자는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다들 내렸거니 하고 있는데 차가 문을 열어 놓은 채 떠나려 하 지 않았다. 얼핏 보니 안에서 누가 내려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 면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저게 누구야? 스크립터 김자영이 아닌 가? 여길 어떻게 알고?

“이봐요, 김자영 씨!”

“어머, 안기자님!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그녀의 뒤로 사진부의 손민구 기자가 뭉그적거리면서 장비를 잔뜩 둘러메고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 손 기자! 손 기자도 왔어요?”

자영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어리둥절해 있는 안 기자에게 말을 붙였다.

‘만날 내 담배 연기 싫다고 눈치만 먹여 놓고………… 그래도 객지에서 만나니 반가운가?’

“안 기자님! 우린 상방리의 고분을 취재하러 왔어요.”

“예? 아니 거기는 어떻게 알고?”

“글쎄요. 편집장님이 무슨 잡지인가 보시고 전화를 주고받고 하시더니 가라고 하던데요?”

‘아, 정말 도움이 안 되는 편집장일세. 내가 몰래 취재하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냄새 맡고, 아니, 그러면 도대체 난 뭘 하라는 거야?’

벌레 씹은 표정이 된 안 기자에게 헉헉거리며 다가온 손 기자가 끼어들었다.

“안 기자! 안 기자는 왜 여기 있지? 납량특집 취재 간 거 아니었어?”

안 기자의 속이 뒤집혔다.

“그래서 여기 와 있는 거 아냐?”

“그래? 우리는 역사 기행 취재 때문에 온 건데. 내일이면 정진욱 기자도 올 거야.”

“뭐? 역사 기행? 그럼 난 뭐야?”

자영이 끼어들었다.

“왜요. 안 기자님?”

“여기 상방리 고분 얘기가 내 납량 특집감이거든요?”

“그건 우리가 역사물로 다뤄야 하는데요?”

“관둬요! 나 참 난 포기 안 할 거요.”

“이런 내용은 역사물에 맞다고요!”

“아니, 납량물이 틀림없고, 내 꺼라고!”

안 기자와 자영이 한참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손 기자가 갑자 기 정색을 했다. 둘은 말싸움을 멈추고 손 기자의 시선이 가 있 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이마에 갈매기가 있는 대머리의 거한이 손에 든 가방에서 뭔 가를 꺼내어 맞추었다. 그것을 하나로 맞추니까 큰 철봉이 되었 다. 무게도 엄청난지. 그가 그것을 땅에 쾅 하고 찧자 요란한 소 리와 함께 땅바닥에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렸다. 등에 이 상한 것을 진 남자가 가벼운 웃음을 띤 채 앞에 서 있었고, 수염 기른 두 남자는 멀찍이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예요? 약 팔려는 건가?”

놀란 자영이 눈을 깜박거렸다. 안 기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했다.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요. 서로 재주를 겨루는 겁니다.”

“재주요? 무슨 재주요?”

“가만히 보라니까. 보통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오.”

상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 화가 났는지 대머리가 손에 힘 을 주자 철봉이 조금씩 땅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엄청난 힘이었 다. 그래도 상대편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뱀을 잡으러 왔으면 뱀굴로 가야지, 어째서 호랑이와 겨루려고 하나?”

자영이 소곤거렸다.

“저 사람들, 무슨 도사예요?”

“글쎄요. 나도 잘은 몰라요.”

“왜 온 거고, 뭘 하려는 거죠?”

“뭔가 목적이 있겠죠.”

“목적이요?”

안 기자의 머리에 뭔가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마・・・・・・ 그 고분과 관계가 있을지도.”

“고분요? 왜구가 오백 구나 발굴되었다는 그………….”

대머리가 얼굴을 붉히면서 철봉을 빼내어 등에 짊어졌다. 그러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검은 손대지 마라.”

등에 이상한 것을 진 남자는 여전히 냉소를 띠며 답했다.

“지금 그 따위 칼이 문제가 아냐. 목숨이 아까우면 돌아가지그래?”

빈정거리는 말을 듣자 대머리는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철봉을 빙빙 돌렸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면서 무거운 철봉이 보 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두 명의 수염 기른 남자 중 하나가 소리를 쳤다. 

“뭐 하는 거요? 일반인들도 있는데!”

그 말을 들은 대머리가 봉을 순식간에 멈추었다. 그러고는 봉 을 어깨에 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쿵거리면서 걸어갔다. 안 기자 일행은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소리 를 쳤던 수염 기른 남자가 등에 이상한 것을 진 남자에게 인사말 을 건넸다.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려 안 기자 일행을 쳐다보았다. 오금이 저린 안 기자가 뒷걸음치려는데 자 영이 앞으로 불쑥 튀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전 ㅇㅇ지의 김자영 기자라 하는데요, 성함이?” 

수염 기른 남자가 곱지 않은 눈매로 자영을 쳐다보았다. 자영 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살살 흘리면서 이상한 남자에게 가 까이 다가가 이름을 물었다. 남자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답했다.

“나요? 박상준이라고 합니다.”

“아네. 혹시 그런 거 말고………… 뭔가 특별하신 분 같은데…………”

남자는 피식 웃고 자못 친절하게 대답했다.

“보통들 주기(旗) 선생이라 합니다.”

“주귀요?”

“붉은 깃발・・・・・・ 주기요. 그냥 장난삼아들 부르는 거고. 난 특별한 사람 아닙니다. 미인 기자님. 허허.”

“깃발요? 그러면 등에 메고 계신 게 깃발인가요?”

자영이 물으며 손을 뻗자 수염 난 남자가 움찔하고 몸을 움츠리더니 작게 말했다.

“신경 꺼요. 만지지도 말고.”

“네?”

남자의 눈빛이 갑자기 차갑고 조소적으로 바뀌며 비웃는 표정이 되었다.

“부정 타거든?”

“뭐…… 뭐요?”

자영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남녀평등을 외치고 다니는 자영에 게 그런 말은 모독이었다. 주기 선생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가 소매에서 노란색의 작은 깃발을 꺼내어 한 번 휘두르더니 말을 계속했다.

“하핫. 관심 끄쇼. 구경거리는 건 질색이니.”

“이보세요!”

“하하하하.”

주기 선생은 호탕하게 웃으며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걷는다 고는 하지만 걸음걸이가 기묘했고 순식간에 멀어지는 바람에 자 영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도 못했다. 주기 선생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수염 난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흠, 힐기보법(旗步法)이라………. 오늘 견식을 넓히는구먼.”

자영이 힐기보법이 뭐냐고 묻기도 전에 수염 난 두 남자도 자 영을 슬쩍 피해 붕붕거릴 정도의 빠른 걸음걸이로 사라져 갔다. 얼이 빠져서 멍청하게 서 있는 자영에게 안 기자가 다가갔다. 

“알겠소? 보통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오.”

“저, 저게 대체……..

말을 더듬는 사람은 오히려 손 기자였다. 안 기자는 속으로야 어쨌건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안 기자는 자신의 추 측에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이 고분에 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으며 초자연적이고 불 가사의한 일, 나아가서는 숨겨진 역사의 비밀이 관련되어 있다 는 이야기 등등. 두 사람은 안 기자의 이야기를 통 믿지 않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저들도 그렇고, 또 우리가 가려는 고분에도 엄청난 비밀이 있을 거란 말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안을 하나 하지요.”

“뭐죠?”

“나는 급히 오느라 소형 카메라하고 녹음기밖에 가져오지 못 했거든요. 근데 그쪽은 손 기자도 있고 장비도 많으니 어찌 되었 든 간에 공동으로 취재를 하도록 합시다. 결과가 역사적인 것이 되든 납량특집 쪽으로 가든지 말예요.”

“하지만………….”

“방금 봤죠? 전에 저런 사람들 본 적 있어요?”

“없죠. 물론.”

“그런데 저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 모여든다는 사실 자체 가 뭔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겁니다. 그런 판이니…..”

안 기자는 슬쩍 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혼자서 다니는 것보다는 힘을 합치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하지만 난 믿을 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니까 특종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한번 캐보자고요!”

자영도 손 기자도 점차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안 기자의 제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러자 안 기자 는 은근히 빼기듯 제안했다.

“자, 그러면 잠시만요. 우선 이 일을 알려 주고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누군데요?”

“내 친구죠. 사기꾼인지 숨은 도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요.”

안 기자는 최후의 시도라는 생각으로 다시 전화 부스로 걸음 을 옮겼다. 큰소리는 쳤지만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현암이 설혹 엉터리나 돌팔이더라도 적어도 자기보다는 이런 상황에 잘 대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가 가더니 딸깍 하고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안 기자는 반가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다행히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현암이었다. 안 기자는 길게 수 다를 떨려고 했으나, 현암은 별 대답 없이 다만 가능하면 빨리 그리로 가겠다고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갈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왜? 거기 뭐가 있어서? 뭔가 알지? 그렇지?”

안 기자가 추궁했으나 현암은 무거운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할 뿐이었다.

“하여간 열시까지는 정류장에 그대로 있어. 내가 갈 테니까 꼼 짝도 하지 마! 이거 농담 아니다. 위험해. 그것도 몹시………….” 

“아니, 대체 뭐가 위험하다고?”

“아, 짜증난다. 왜 그런 델 헤집고 다니는거야?”

“아니, 뭐가 위험하냐고!”

“나, 끼어들기 정말 싫지만, 네가 위험해서 가는 거야. 농담 아 니라고! 그러니 흙 이불 덮고 자기 싫으면 거기서 꼼짝도 하지마!”

전화가 끊기고 신호음이 들렸다. 안 기자는 현암의 목소리에 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위험하다고? 농담이 아니라고?

안 기자의 머릿속에 아까 대머리가 말했던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혹 단서는 아닐까? 물론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안기자는 자영에게 다가갔다. “김자영 씨, 고다이고 천황이 누구인지 혹시 아세요?”

자영이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기억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게………… 들어 본 것 같은데………… 가만…………….”

“알아요?”

“나, 일본사 전공했어요. 반은 까먹었지만… 아, 생각났다. 『태평기에 나오지!”

“그게 뭔데요?”

“일본 역사서요.”

“아, 그래요? 역시 엘리트네. 그게 누구죠?”

“그렇지, 술술 생각나네. 나 대단하죠? 천황은 천황인데 비운 의 천황이었던 것 같아요. 젊어서 천황에 즉위한 후 막부와 대립 하여 천황의 정통을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여러 번 유배를 당했 대요. 나중에 마사시게라는 명장을 얻어 가마쿠라 막부를 섬멸하고 건무(武)의 신정(新), 그것을 정변이라고 부르는 사람 도 있지만, 아무튼 그것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펴려고 했다나 요. 그러나 이 년 만에 호조와 같은 편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 에게 망하여 원한을 품은 채 죽었지요. 그것이 일본 남조의 멸망인데…………….”

손 기자가 히죽 웃었다.

“자세히도 아시네요.”

“저 머리 좋거든요?”

“네, 네.”

“정말 좋다고요. 어쨌건, 죽을 때의 모습이 그 책에 나오는데 그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거의 괴멸되다시피 한 남조를 끌고 요 시노 산에 갇혀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에 법화경을 쥐고 숨 을 거두면서 남긴 말이 ‘비록 내 뼈는 남산의 이끼에 묻힐지언정 영혼만은 언제까지나 북조의 하늘을 노려볼 것이다!’였다더군 요. 의지의 인물이었죠.”

안 기자가 자영의 말을 중단시키고 말했다.

“잠깐! 카, 칼이라고 했습니까?”

“나, 머리 좋다고 했죠?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라 틀림없어요.” 고다이고 천황의 검…………. 자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고다이고 천황은 분명 이루지 못한 평생의 꿈과 의지를 남긴 채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가 최후의 순간까지 놓지 않았다는 검. 혹시 아까 대머리 도인이 말한 검이 『태평기에 나왔다는 칼 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많았다. 그런 칼 이 하필 멀고 먼 우리나라의 강화도에 묻혀 있을 이유가 무엇이 며, 그 대머리나 주기 선생이라고 자신을 밝힌 이상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정말로 그들은 무엇이든 꿰 뚫어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대머리 남자는 확실히 고다이고 천 황의 검을 찾으러 왔다고 밝혔다. 하지만 주기 선생은 다른 말도 했다. 주기 선생은 대머리 남자에게 지금 그 따위 칼이 문제가 아니며 목숨이 아까우면 돌아가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안 기자는 자영과 손 기자를 끌고 읍내로 향했다. 자료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암이 자신이 올 때까지 고분으로 가지 말 라고 한 말이 걸리기도 했고, 고분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자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작은 서점에서도 일본 역사에 관한 책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어느 책 에나 고다이고 천황의 이야기는 나와 있었다.

자영의 기억력은 정확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거의 맞았고 그 녀가 묘사한 고다이고 천황의 임종 모습도 그대로였다. 그날은 1339년 8월 16일.

안 기자는 몇 장을 더 넘겨 보았다. 남조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만한 마사시게의 아들 구스노키 마사쓰라가 시조나와테에서

일족과 더불어 전멸한 것, 그리고 북조의 대장 모로나오가 고다 이고 천황이 머물렀던 요시노 산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태우고 전멸시킨 사건이 일어난 게 1348년. 마사시게의 셋째 아들이었 던 마사노리가 남조를 배신하고 북조에 귀순한 것이 1369년. 그 리고 마침내 남조가 멸망한 것이 1392년. 그러나 북조도 융성하 지 못했다. 1362년 북조의 관위 수여식을 거행할 때에 관위를 기 재할 종이가 없어서 식을 연기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고 있었으 니까. 결국 천황이라는 것은 무사들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천황의 신기(神器)라고 하 는 세 가지의 유물에 대한 것이었다. 책에는 1392년 남북조의 통 합 때에 천황의 신기를 북조에 전하였다고 했으나, 앞의 장에는 고다이고 천황 때 이미 대장군 다카우지에게 신기를 양도한 것 으로 되어 있었고 그 신기는 위조품이라는 설이 있었다. 또 당시 무로마치 막부를 건설했던 요시미쓰의 명에 의해 신기가 이미 북조로 운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면 혹시? 처음 에 가짜 신기를 전달하였다면 그 후에도 가짜 신기가 나오지 말 란 법은 없다. 그리고 얼마 뒤 이세의 국사인 미쓰마사가 후남조 를 세울 때에 신기를 훔쳤다는 기록도 있었다. 결국 고다이고 천 황 이후의 신기는 진짜가 아닐 수도 있었다.

안 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여기까지의 내용을 자영에게 들려주자 그녀의 표정도 심각하게 바뀌었다.

“비약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요? 한낱 왜구들이 그런 것까지….. 손 기자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세 가지 신기라는 것은 뭐지?”

일행은 다시 책들을 뒤져 나갔다. 맨 앞부분에 그 이야기가 나 왔다. 일본에서 알려진 세 가지 신기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의 몸을 상징하는 거울, 영혼의 정수를 담았다는 구슬 목걸이[ 玉), 그리고 십이 대 게이코 천황 때의 최고 무장 야마토 다케루 (日本武)의 목숨을 구했다**는 초치검.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안 기자가 입을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이 천황의 신기를 쥔 채 다카우지에게 내주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러면 천황이 임종시에 쥐고 죽을 만 한 칼은? 바로 천황의 신기 중의 하나인 초치검이 아니었을까?


* 고대 야마토족이 숭배한 태양의 여신 신화 시대 기록인 고사기』와 『일본서 기」에 따르면 그의 손자가 1대 천황인 진무 천황(神天皇)이라고 함.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다케루가사가미국을 갔을 때 사가미의 호족 들은 다케루를 풀숲에 넣고 사방에서 불을 질러 태워 죽이려 했으나 다케루는 그 전에 이세신궁에 있던 그의 백모인 왜희(姬)가 준 천총운검(天雲劒)으로 주 변의 풀을 베고 역시 왜희가 준 주머니 속의 부싯돌로 맞불을 내어 살아나서 사 가미족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때 이후 천총운검을 초치검이라 부르고 ‘삼종 신 기’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고다이고 천황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애썼던 인 물이었으니.”

자영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안 기자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아까 말한 고다이고 천황의 검이………… 실은 삼종신 기가운데 하나인 초치검이라고요?”

“물론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죠.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천황의 삼종신기는 천황의 즉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죠. 만약 우리가 강화도에서 그 신기 중의 하나를 발견한 다고 가정해 봐요. 1360년 이후 모든 일본의 천황들은 사이비 신기를 가지고 즉위식을 한 셈이 되죠. 하하하!”

“하지만 아까 그 대머리 도사의 말만 듣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비약이 심하잖아요?”

“심하면 뭐 어때서요? 내 짐작이 맞다면 엄청난 역사적 발견 을 하는 셈이고, 실패해도 납량특집 정도는 될 수 있잖아요!” 자영은, 머리로는 안 기자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흥분되었다. 손 기자도 잔뜩 심각 한 표정을 지은 채 추리에 골몰했다.

“아무튼 조사해 볼 필요는 있겠지. 그러나 그런 이상한 사람들 이 흘린 말만 가지고 결론을 내리기는 좀 무리 같은데.”

손기자의 차분한 말로 결국 일행의 잠정적인 행동 방침이 결 정되었다. 안 기자는 자신의 위대한 추리를 선뜻 믿어 주지 않아 조금은 불만이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의 추리가 적잖게 과장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안 기자를 선두로 세 명은 현암과 만 나기로 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사방이 어두워지자 자영은 아까 본 이상한 사람들이 떠오르며 문득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도 벌써 끊어졌는지 움직이는 물체 하나 없었고 풀벌레와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안기 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기 때 문이었다. 대여섯 사람, 그중 작은 꼬마도 하나 끼어 있는 듯 보 였다. 혹시 현암 일행이 아닐까? 안 기자가 소리쳤다.

“오, 반갑다. 이현암!”

“별일 없었구나, 다행이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안 기자는 걸음을 재촉하 며 일행을 끌고 그리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 보니 덩치가 큰 신 부. 흰 한복을 입은 작은 꼬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와 늙 은 노인, 그리고 그 옆에 바싹 붙은 온화한 표정의 여자와 낯익 은 얼굴이 있었다. 현암이었다. 안 기자는 반가움에 걸음을 옮기 면서도 도대체 어울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에 의 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인사들 나누자고. 자, 이분은 알고 있겠지? 박 신부님이고, 여기는 준후, 그리고 이쪽은 승희……”

현암은 안 기자에게 한 사람씩 소개했다. 뒤따라 김자영 스크 립터와 손민구 기자가 달려오자 현암은 그들에게도 자기 일행을 소개했다. 현암이 옆에 서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최철기옹이십니다.”

노인은 카랑카랑하고 쉰 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 경주에 사는 철기라고 하네. 박수여.”

안 기자와 자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젠 박수무당까지……………..’

현암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온화한 얼굴의 여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분은 송화암의 지연보살님이십니다.”

박수 최철기옹이 높은 쇳소리를 냈다.

“우연히 만나서 같이 왔어. 하하하!”

손 기자가 끼어들어 합장을 했다.

“아! 지연보살님. 여기에는 어쩐 일로………….”

손 기자의 말이 의아한 듯 안 기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손 기자가 불교 신자라는 것은 안 기자도 알고 있던 터였다.

“손 기자, 지연보살님을 알고 있어?”

“전에 은혜를 입은 적이 있지. 지연보살님은 신통한 능력이 있다네. 보살님이 독경해 주시면 상처가 싹 낫는다고.”

자영이 안 기자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안수(*나 심령 치료 같은 거예요?”

“비슷한 것 같네요. 손 기자가 저렇게 나올 정도라면 대단한 분인 모양이네.”

손 기자는 거듭 고마움을 표시하며 지연보살에게 합장을 하고 있었다. 지연보살은 수줍은지 얼굴이 빨개져서 박수 철기의 등 뒤로 가서 숨었다. 숨어 봐야 박수 철기의 키는 백오십 센티미터 도 안되었지만.

“보살님, 전에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부러진 다 리가 감쪽같이 낫고 나서 너무 감사해 몇 번이나 송화암으로 찾 아갔었습니다만 갈 때마다 만나주지 않으셔서…………….”

“뭐? 다리가 부러졌었다고?”

안 기자가 눈을 크게 떴다. 보통의 안수나 심령 치료라는 것은 내상이나 종양 같은 속병을 치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연 보살이라는 여자는 그 정도를 넘어서는 것 같았다. 부러진 다리 가 감쪽같이 나았다니? 다리가 부러지면 최소 입원 팔 주에 치료 십이 주다.

“그만하세요. 여기 훨씬 더 도력이 높은 분들이 계시는데…………….”


* 원래는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기도받는 사람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 복을 하는 것을 말한다. 드물게는 이 안수를 하면서 몸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경우 도 있다고 한다.


안 기자가 현암을 향해 눈을 흘겼다. 현암은 모른 척하고 옆을 보고 있었지만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놀라운 능력을 가 진 여자가 자기보다도 도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중에 현암도 끼어 있잖은가? 헌데 여태껏 내숭을 떨고 있었어? 안기 자가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찰나에 꼬마 아이가 툭 튀어나왔다. “보살님, 저희는 그저 구경 온 거예요. 그런데 도력이 뭐예요?” 똘망똘망하게 생긴 꼬마였다. 조금 날카로운 눈매였지만 새까 만 눈망울이 눈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무척 귀여워 보였다. 저런 꼬마가 무엇을 알겠나? 그리고 성당에 있어야 할 신부님이 박수 무당과 같이 나타난 것도 이상했고, 거기다 저 날라리 같은 여자 라니. 도저히,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일행인데.

‘정말 그냥 놀러 온 건가? 꼴들을 봐선 무슨 신통한 힘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자, 자. 아무튼 목적지가 같으니 일단 떠납시다. 마침 나하고 현암군이 차를 갖고 왔으니 그걸 타고 가면 나을 겁니다. 이야 기는 가면서 나누죠.”

박신부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일행을 갈라놓았다. 안 기자 는 일부러 현암과 같은 차를 타려고 했으나 현암이 지연보살을 자신의 차에 타라고 하자 손 기자가 따라갔고, 뒤를 자영이, 그 리고 준후라는 꼬마가 잽싸게 끼어들어서 인원이 차 버렸다. 안 기자는 내심 고약한 놈, 망할 놈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덩치 큰 신부님의 차로 갔다. 철기옹이 뒷자리로 쑥 들어가더니 승희라는 여자가 옆에 타려고 하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리 가! 새파란 것이 어딜! 부정 타!”

승희라는 좀 놀아 본 것 같은 여자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 가면서 입에서 뭔가 한 소리 쏟아지려는 찰나에 박 신부가 급히 앞자리에 타라고 타일렀다. 승희는 곱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앞 자리에 탔다. 안 기자는 자리에 관한 한 자신이 지지리도 재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필 해소병자 같은 저런 노인의 옆에 앉게 되다니.

자리에 앉으려던 승희가 킥킥 웃어 댔다. 왜 화를 내다가 갑자 기웃는 것일까? 철기옹은 박 신부의 차 안이 불편한지 앓는 소 리를 해댔다.

“아, 뭘 이리 많이 붙였어? 억수로 발라 놓았구먼. 불편해, 불 편해. 쯧쯧.”

도대체 무엇을 붙여 놓았다는 말인지 안 기자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철기옹은 차 안을 방어하기 위해 박신 부가 숨겨 놓은 성물들과 차에 뿌려 놓은 성수의 기운을 느끼고 는 심통을 부리는 중이었다. 아무리 동행한다 쳐도 애당초 박수 무당인 철기에게 박 신부의 기운과 맞을 리 없었다.

차가 출발했다. 안 기자는 목적지가 상방리 고분이냐고 물었 고, 박 신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뒷자리의 철기옹은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현암의 차는 얼마나 속력을 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박 신부는 그런 것도 아랑곳 않고 느긋하게 출발했다. 안 기자는 불만스러웠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불쑥 철기옹이 한마디 내뱉었다.

“아깝구먼, 아까워!”

안 기자가 물었다.

“뭐가요?”

“저 계집애 말여. 몸 안에 엄청나게 큰 힘이 있는데 십분의 일 도 써먹을 줄 모르는구먼. 하긴 차라리 그게 나을 거여. 아마 영 영 힘을 다 쓰지는 못할 걸세. 신이 이 세상에 유배 온 거니까.” 안 기자는 알아들을 수 없어서 철기옹의 얼굴만 멀거니 쳐다 보고 있는데, 승희는 ‘계집애’라는 소리를 듣자 화가 나는지 위 로 쭉 째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철기옹은 못 본 척 눈을 감고는 계속 중얼거렸다.

“좋은 일 혀! 사람들을 많이 구해야 혀! 하늘은 공정한 거여! 좋은 신이 유배 왔으면 악신도 유배 왔을 테니깐.”

승희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신부에게 낮은 소리로 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그러지? 미쳤나?’

안 기자는 박 신부와 승희의 대화법을 알 리 없었다. 기자라는 기피 대상을 태우고 있는데 굳이 말로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마 음속으로 생각만 하면 그걸 승희가 읽고는 간단히 박 신부에게 짧은 대답만 하면 그뿐이었으니, 참으로 완벽한 도청 방지가 아닌가?

한참 침묵이 흘렀다. 안 기자는 철기옹에게 아까 본 이상한 사 람들의 정체를 넌지시 물어볼 생각을 했다. 어차피 비슷비슷한 사람들이라면 서로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르신!”

“왜?”

“혹시 주기 선생 박상준이라고 아십니까?”

“아, 그 새파란 게 뭔 선생이여? 입만 산 놈인데.”

“아시는군요?”

“아, 쪼깐 알지. 재주가 조금은 있는 놈이여. 등에 열두 깃발을 꽂고 다니며 십이지신을 부린다고 큰소리치는 놈이라지? 왜, 그 놈도 왔나?”

“예. 봤습니다. 이마에 갈매기가 있는 대머리 거한하고…….” 

“갈매기? 그러면 그놈은 차력파의 병수라는 놈이여! 힘만 센 멧돼지 같은 놈이지!”

“수염하고 머리를 잔뜩 기른 두 명의 흰, 아니 회색 옷을 입은 남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 가지고야 알 수 있나? 오의(衣)파인 듯한데, 그 이상은 몰러!”

“그러면 혹시 현현파라는…………..

“거기도 왔어? 죽지 못해 안달들이 났군. 필경 현현파 두 늙은이겠군.”

“어? 아닌데요. 네 명의 청년이던데요.”

“그려? 그럼 그 늙은이들은 뒈졌나? 제자들인 게로구먼.”

“그리고 청홍검을 멘 여자…………….”

가만히 앉아 중얼거리고 있던 철기옹이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켰다.

“뭐? 청홍검?”

“예. 근데 왜 그러십니까?”

안 기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승희는 눈을 치켜뜨더 니 뒤를 돌아보았고 박 신부도 당혹스런 얼굴로 힐끔힐끔 룸미 러로 뒷좌석을 쳐다보았다.

“이런이런 초치검하고 겨뤄 볼 생각이구먼! 누가 누가 청홍검을 메고 왔다고?”

“초치검이요? 일본 천황의 삼종신기 중 하나라는……………”

“아, 누가 메고 왔냐니깐! 어떤 여자였어?”

철기옹은 귀가 멍멍해질 만큼 안 기자 귓가에 바싹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안 기자는 기겁을 하는 바람에 눈물까지 찔끔났다.

“예, 체구가 작고 예쁜 여자였습니다.”

“뭐? 무당 할망구 아니었어?”

“아닌데요.”

“도지(桃)가 아니면………… 제자를 보냈나?”

“그런데, 도지가 누구죠?”

철기옹은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청홍검은 분명 도지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빌려 줄 리가 없어.”

“도지 무당이 누구냐고요?”

“아니. 손주뻘도 안 되는 놈이 말이 짧기도 하네!”

“아, 도지 무당님이 누구신데요?”

“알 것 없어!”

안 기자는 떫은감 씹은 표정이 되었지만 철기는 다시 거침없이 물었다.

“혹시 그 여자에게 일행이 없던가?”

“예? 없는 것 같던데요?”

“그 여자 주변에 허리가 구부러지고 나처럼 폭삭 삭은 할망구가 없었어?”

“아참. 할머님이 한 분 같이 내리기는 했었죠. 그러나…….”

“이런, 이런! 그 할망구까지 왔구먼!”

철기옹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의자에 깊이 파묻었다. 안기 자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박수 철기옹, 지연보살, 주기 선생, 차력파, 오의파, 현현, 청홍검에 도지 무당이라……………. 도대체 쉽게 볼 수 없는 이런 신기한 사람 들이 왜 하나같이 상방리 고분으로 향하고 있는지, 정말 자신이 추리한 대로 초치검이라는 일본 천황의 신기가 그곳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지, 모든 것이 뒤죽박 죽이 되어 머릿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그 순간 현암이 운전하던 차 앞에서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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