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자이자 검시관인 장창열 박사는 요즈음 골치 아픈 일 이 몰아닥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원래 시신을 검 시하는 일 자체가 그리 쾌적한 일은 아니었으나, 장 박사는 무뚝 또한 성품으로 웬만한 일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조수나 친구들은 그러한 장 박사를 ‘부처’라고 불렀다. 물론 좋 은 뜻으로 석가모니라 해석한다면 자비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 지만, 영어로 하면 ‘butcher’, 즉 ‘도살자’가 되었다. 물론 장박 사가 사람을 해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때는 피에 뒤엉킨 사체를 이리저리 유심히 들여다보는 무심한 손길에서 섬 뜩한 느낌을 받는다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사실 검시관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으면 오만가지 시체를 다 접해야 하니 웬만한 사 람으로서는 이름만으로도 기가 질려 버릴 일이기도 했다. 불에 타 거의 숯이 된 시체에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냄새 방 화냐, 우연히 발생한 화재냐를 놓고 고민하는 수사관을 위해, 장 박사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시신에 코를 처박다시 피 하고 냄새를 맡아 톨루엔으로 불을 지른 방화라는 사실을 확 인해 준 일이 있었다ᅳ를 맡는다거나, 개에게 갈기갈기 찢겨진 살덩어리들을 일일이 살펴서 토양 샘플을 채취하는 등의 일 과거에 개 떼에게 찢겨 넝마가 된 시신의 조각조각에서 흙 알갱 이들을 꼼꼼하게 하나하나 골라 모음으로써 시신의 사인이 개 에 의한 것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살해된 후 옮겨져 개에게 물 려 죽은 것처럼 위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수사관이 개가를 올리게 해 주었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군 다나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특유의 표정은 직업이 주는 이미지와 결부되어, 보는 사람에게 매우 특이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실제의 장 박사는 누구보다도 선량한 사람이라고 해 야 할 것이다. 전에 그야말로 끔찍한 사체가 들어온 적이 있었는 데, 제자 하나가 저걸 어찌 태연히 만지려느냐고 묻자, “가엾잖 아. 그러니 나라도 돌봐줘야지”라고 해서 사람들의 고개를 끄덕 거리게도 했다. 기실, 장 박사는 섬세한 사람이어서 예전에 동료 의사였던 박 신부의 말마따나 “원래는 의사가 되지 못할 친구” 였는지도 모른다. 의사라면 응당 환자에게 감정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친구나 가족 등 아는 사람을 의사들이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장 박사는 그러지 못했고, 그 때문에 많은 번민을 했다. 결국 그는 시체들을 다루는 쪽으로 (산사람을 다루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전공을 바꾸었고,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딱딱한 사람이 되어 버린 터였다. 그런 그가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요새 들어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벌써 일주일 이상이나 계 속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우직한 의사는 새로 들어온 익사 시체 를 무리하게 검시하다가 피곤에 못 이겨 시체의 갈라진 몸속에 코를 박고 졸도해 버렸다.
마침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맞은 박 신부는 장 박사가 입원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박 신부는 문병하기 위해 나서는 길 이었다. 준후가 쫄래쫄래 따라왔고, 현암도 볼일을 보고 나중에 병원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승희는 또 머리를 바꾸러 미장원 에라도 갔는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긴 승희는 장 박사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을 뿐, 아직 얼굴을 본 적은 없으니 따라오라고 하 기도 좀 멋쩍었다.
“꽃이라도 사가야 하지 않을까요?”
준후가 병원 맞은편에 있는 화원을 가리키며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박 신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친구에겐 영 어울리지 않아. 해골바가지라면 모를까. 하하하.”
준후가 입을 삐쭉했다. 박 신부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먹을거나 사자꾸나. 과로로 그렇게 되었다니까. 이번 기회에 살이나 찌게.”
박 신부는 근처 횟집에 들어가서 큼지막한 초밥 꾸러미를 사 들고 나왔다. 준후는 얼굴을 찌푸렸다. 해동밀교에서 수행한 준 후는 날것은 질색이었다.
“너 줄 것도 아닌데 왜 그러니? 하하하.”
병원으로 들어간 둘은 쉽게 장 박사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짙어 갔다.
한쪽 팔에 링거를 꽂은 장 박사는 동상처럼 파리해진 얼굴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박 신부는 웃으며 인 사를 건네려다가 장 박사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원래 바싹 마르고 키만 길쭉하게 큰 사람이긴 했지만, 지금 장 박사의 몰골 은 그야말로 해골바가지 같았다. 안색까지 파리한 것이 산 사람 의 몰골 같지 않았다. 박 신부와 마지막 만난 후 오래 지난 것도 아니고 그 후에도 별다른 일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변하다니! 박 신부는 어안이 벙벙했다.
“왔나?”
장 박사의 퉁명스런 목소리만은 여전했다. 박 신부는 눈시울 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괜찮은가?”
준후가 애써 명랑한 태도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장 박사님.”
준후를 힐끗 쳐다본 장 박사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으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너도 왔구나. 아직도 칠칠치 못해. 이런 곳에 애를 왜 끌고와…….”
말투만은 여전하다고 생각한 박 신부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가져온 초밥을 꺼냈다.
“이거 받게. 병원 밥이 얼마나 시원치 않은지는 내가 잘 아니깐. 자네 같은 악덕 의사 때문이겠지만.”
장박사는 천천히 꾸러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비린내가 나는구먼.”
“자네가 좋아하는 걸세.”
“그래, 고맙구먼. 좀 있다가 먹지.”
박 신부는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저녁밥으로 날라다 준 것이 틀림없는 병원 식사가 손도 대지 않 은 채 놓여 있었다.
“자네, 식사를 안 하나?”
“먹으면 잠이 와…….”
준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했다. 장 박사는 누우려고 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앉아 있었다. 과로로 입원한 환자라면 누워 있어야 하는데, 장 박사 침대의 베개는 눌린 흔적도 없었다. 준후는 박 신부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눈으로 베개를 가 리켰다. 박 신부도 눈치를 채고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왜 그러나?”
장박사는 여전히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박신부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지금 환자야. 의사가 아니라고.”
“알고 있네. 그래서 이렇게 주사도 맞지 않나? 사실 이런 건 필요 없는데……..”
“과로로 입원했으면 잘 먹고 푹 쉬어야지. 집에 무슨 감춰 놓 은 금덩어리가 있다고 앉아서 청승인가?”
“자. 어서 그거 먹고 드러누워서 푹 자게나. 명령이네.”
장박사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박 신부 는 흠칫했다. 장 박사의 저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장 박사는 쓸쓸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두워졌구먼. 또 밤이 찾아왔어.”
장 박사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준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몹시 쓸쓸한 절망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장 박사가 멍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또 밤이야. 잠을 자야지…………. 그러나 잠을 자서는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장 박사는 거의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박 신부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장 박사의 핏기 없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은 시뻘겋 게 충혈되어 있었다. 목소리는 냉정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머릿 속이 텅텅 빈 듯 그의 말은 혼란스러웠다. 장 박사는 벌써 오랫 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올 거야. 그러니 잠을 자서는 안돼!”
“정신 차리게! 제발 정신 차려!”
“무서워 잠만들면 ………….”
박신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간호사 간호사!”
장 박사가 펄쩍 뛰었다.
“아, 안 돼! 또 수면제를 맞을 수는 없어! 그러면 죽고 말 거야! 제발!”
문 밖에서 간호사들의 잽싼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 박사 가박 신부의 사제복 자락을 잡았다.
“이봐, 가짜 신부! 나를 믿어 줘! 제발! 잠들어서는 안 된단 말이야!”
장박사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사람 좋은 친구가 어쩌다가…………. 박 신부는 서둘러 장 박사를 눌러 침대에 눕히고 이불 을 끌어 올렸다.
간호사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죠?”
“아, 저희가 아닙니다. 옆방에서 누가 소리를 치던데요?”
영악한 준후가 박 신부보다 앞질러서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간 호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장 박사 는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이불을 쓴 채 얌전히 누워 있었고, 그 앞에 박 신부가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것밖에는 별 문제 없어 보였다. 간호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안을 둘레둘레 살폈다. 준후가 그들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기도중이에요. 자리를 좀…………….”
간호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나섰다. 준후가 문 을 꼭 닫았다. 장 박사가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 세우자 박신 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왜 잠을 자면 안 된다는 말이지?”
장박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꿈이…………….”
“꿈?”
“나를 괴롭히네. 꿈들이………….”
박 신부가 재차 고개를 저었다. 꿈이라니? 얼마나 지독한 꿈이기에 박 신부는 사악한 기운이 있나 싶어 잠시 정신을 집중해보았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준후도 눈을 감았다 뜨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병실이나 장 박사의 몸에 악귀는 보이
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꿈이기에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가?”
“매일 다르지. 그,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야. 마음을 편히 갖도록 하게. 기도를 해도 좋고.”
장 박사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게 아니야! 꿈이 아니었어! 세상에 어떤 꿈이 그렇게………….”
박신부가 긴장하면서 장 박사의 입을 쳐다보았다.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었는지 아나? 잠을 못 잤기 때 문이 아니야! 그 꿈, 빌어먹을 꿈을 꾸고 나면………….”
장 박사가 말을 끊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작은 음성으로 박신부를 쳐다보며 말했다.
“믿어 주겠나?”
박신부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라도 믿네.”
장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꿈을 꾸고 나면 몸에 기운이 없어져. 자지 않는 것보다 더 피곤하고 체중도 줄어.”
꿈을 꾸었다고 체중이 준다는 이야기는 박 신부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멘! 그럴수가………….”
장박사는 뭔지 모를 대상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앙상한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가며,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졌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네. 내 체중은 원래 육십삼 킬로그램이 었어. 그런데 꿈을 꾼 다음 날 오십칠 킬로그램이 되어 있더군. 그리고 그다음 날은 오십사. 나는 잠을 자지 않기로 했어. 그러 나 엿새밖에 견디지 못했지. 결국 졸도해 버렸다네. 병원에서는 주사를 놔서 나를 억지로 잠들게 만들었지. 아아, 지금 내 체중 이 얼마인 줄 아는가? 지금 나는 일어서지도 못한다네. 사십이 킬로그램이야! 뼈와 가죽만 남았다구. 한 번만, 한 번만 더 잠들 면 그때는!”
장박사는 절규하다시피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힘이 빠지는지 헉헉거렸다.
“나는 믿지 않아. 내게 이상이 있는 걸까? 아냐. 나는 아직 건 강하고 냉철하다고 믿고 있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나를 괴 롭히는 것이 있어. 뭔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있어.”
박신부가 장 박사를 부축해서 눕혔다. 박 신부의 눈동자는 형 형히 빛났고, 흥분한 탓인지 오라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장 박사가 잠시 헐떡거리다가 박 신부의 오라를 보고는 평상시의 말투로 말했다.
“가짜 신부,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봐. 자네가 이상하게 보이네.”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젓는 박 신부의 표정에는 신념이 가득차 있었다.
“그런 소리 말고 푹 쉬게. 내가 지켜 주겠네. 맹세하지.”
장 박사는 망설이는 듯했다. 아직도 잠들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잠들면 그들이 오네. 밤은 그들의 시간이야. 악몽 속에 서 그들은…….”
“밤은 휴식의 시간이고, 고요하고 성스러운 시간이라네. 나를 믿고 쉬게나.”
장박사의 눈이 점점 감겼다. 그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자네를 보고 만날 이상한 사람이라고 욕했는데 정말 자네를 믿어도 되겠는가? 하하하……………. 그래, 이제 지쳤어. 그네들 맘대 로 하라고 그러지.”
장 박사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중얼대다가 눈을 감고 침대 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박 신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준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후도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가 돌아보는 무언의 질문에 준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사악한 영의 기운이 전혀 없어요. 전혀.”
박신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밤이 되면 그들이 온다고 했어.”
준후가 눈을 빛냈다.
“그러면 몽마(夢魔)*?”
“맞다. 아마도 십중팔구 그런 종류의 놈들에게 걸려들었을 거야.”
“몽마에 대해서는 저도 말로밖에 들은 것이 없어요. 직접 겪어 본 일은 없는데….”
“잉큐부스, 사람들의 꿈을 흐트러뜨리고 원기를 빼앗는 악령 이지. 수컷이 잉큐부스, 암컷을 서큐부스라고 하지.”
“그런데 왜 그놈들이 느껴지지 않죠?”
박신부가 대답했다.
“그놈들은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는 존재야. 그러니 잠을 깨 면 사라져 버리지. 그래서 장 박사도 잠을 자지 않으려 했을 거 야. 꿈속에서만 존재하고, 꿈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틀림 없어. 준후야, 주의 깊게 지켜보자꾸나. 장 박사가 이제 잠이 들 었다.”
* 꿈속에 나타나는 악마, 앞일을 알려 주거나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주로 악몽을 꾸게 만들어 서서히 생명력을 빼앗아 간다고 전해진다. 서양의 전설 에 나오는 몽마는 암수의 구분이 있어서 수컷을 잉큐부스(Incubus), 암컷을 서큐부스(Succubus)라 한다.
둘은 잠들어 있는 장 박사를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술이나 영능력의 기운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장 박사를 괴롭 히는 것의 정체가 몽마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섣불리 무슨 수를 쓰면 아예 겁을 먹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긴장한 채로 서 있는데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박 신부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현암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쉿! 조용히!”
영문을 모르는 현암을 박 신부가 구석으로 끌고 가서 간략히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준후는 초조히 장 박사의 동태를 살 피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지 장 박사의 숨소 리는 규칙적이었다. 박 신부의 설명이 끝나갈 때쯤 준후가 중얼 거렸다.
“이럴 때에 『몽몽(夢夢)이 필요한데.”
현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몽몽결? 그거 예전에 네가 빌려 주었던 책 아냐?”
“그 책에 있는 동몽주(同夢呪)의 주문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만 약 짐작한 대로 상대가 몽마라면 우리도 지금 상태로 그들과 싸 울 수는 없을 테니까요. 꿈속에서만 나타나는 놈들이라면, 꿈속 에서 상대해야….”
“내가 주문을 아직 외우고 있어!”
현암은 예전에 김윤영이라는 여자의 악몽을 고쳐 주기 위해 준후에게 책을 빌려 동몽주를 익힌 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 다. 준후가 기뻐서 외쳤다.
“다행이네요! 나는 그 주문을 외우고 있진 않았거든요. 가르
쳐줘요.”
동몽주는 삼사십 자 정도 되는 주문이었다. 현암이 준후에게 세 번을 반복해서 들려주자 영리한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는 원래 이런 유의 주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아무 소리 없이 한쪽 구석에 서서 장 박사만 지켜보았다.
현암이 말했다.
“준후야, 일단 내가 장 박사님의 꿈속으로 들어가 보다. 그래 서 몽마인지 뭔지를 쫓아내도록 할게. 만약 월향이 울면 내가 못 당해 내는 것이니 네가 들어와서 도와주고.”
현암이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주술이나 공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어요. 꿈은 단지 상상의 세계일 뿐이니까. 현암 형은 전에 이 술법을 써 본 적이 있잖아요. 몰라요?”
현암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동몽주를 사용할 때는 꿈속의 상황을 살필 목적밖에 없었다. 의식이 들어가서 상황을 보는 것일 뿐 육체가 들어가지는 않으니 공력이나 주술을 사용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공력이나 검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현암도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아무튼 해 볼게. 이대로 놔두면 장 박사님은 산 채로 백골이 될 것 같아. 준후야, 일단 내게 맡겨라.”
현암은 왼팔에서 월향을 풀어 탁자 위에 놓았다. 월향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 벌써 울다니, 아무 기색도 없는데?”
준후가 놀라며 정신을 집중을 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이 장 박사를 보았으나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으며 편히 자고 있을 따름이었다. 박 신부가 소리쳤다.
“몽마다! 놈이 지금 이 친구의 꿈에 들어가 있어!”
현암과 준후는 어리둥절하여 장 박사의 얼굴과 박 신부의 얼 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장 박사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신부가 말을 이었다.
“저 친구는 원래 잘 웃지 않아! 악몽은 무서운 것이 아닐 수도 있어. 깨었을 때의 기억은 악몽이더라도, 꿈을 꿀 때는 안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현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 그렇다! 꿈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꿈을 꾸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본 래의 모습과 달라도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꿈속에서는 즐 겁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잠을 깨고 나면 끔찍하게 느껴지는 악몽도 있다. 아니, 악몽 직전의 편안함일지도 모른다.
현암이 중얼거렸다.
“이 몽마라는 것들, 보통내기가 아니군!”
현암은 결가부좌를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준후가 서둘러 말했다.
“현암 형, 절대 꿈속에서 장 박사님을 직접 건드려서는 안 돼 요! 잘못하면 둘 다 큰일 나요! 정말 몽마의 짓이라면, 장 박사님 의 의식이 모르게 처치해야 해요!”
“염려 마! 칼이 방금 운 것으로 보아 월향검이 신통하게 꿈속 의 일까지도 알 수 있는 듯하니, 월향검을 잘 보고 있다가 여차 하면장 박사님을 깨워라. 아마 나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뭘 하면 좋을까?”
박신부가 묻자 준후가 답했다.
“의식이 나간 상태에서 현암 형을 건드리면 큰일 나요! 신부 님은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조치를 취해 주세요!”
박 신부는 자기 친구의 일에 한낱 문지기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불만스러웠으나, 곧 문 앞에 버티고 섰다. 현암은 장 박사 의 몸에 댄 손가락 끝을 통해 의식을 집중시켰다. 박 신부가 외쳤다.
“조심하게!”
사실 불안하기는 현암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몽마와 싸우러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 다고 아이에 불과한 준후를 보낼 수는 없었다. 꿈속에 무엇이 있 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몽마가 아니더라도, 준후 같은 아이들이 보아서 좋지 않을 일들도 많을지 몰랐다.
현암의 의식은 어느덧 장 박사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장 박사의 의식이라……………’
현암은 의식을 이동시켜 장 박사의 꿈의 세계를 여행하기 시 작했다. 하얗고 밝은 세계.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마치 설원과 같은 백색의 세계였다.
‘으쓸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악몽이군그래. 내 악몽과 는 다르군. 아니, 장 박사는 악몽이라고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
현암은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한 곳에서는 번득이는 의 료 기구들이 익살스럽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현암이 알지 못 하는 많은 얼굴들이 위편에서 나타났다가 스러졌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무섭다기보다는 유머러스해 보였다. 현암은 장 박사 가보기와는 달리 유머 감각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나는 몽마가 있어도 기운을 느낄 수가 없 잖아. 제길, 이렇게 무턱대고 헤맬 수야 없지!’
현암은 직접 몽마를 찾으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장 박사부터 찾는 것이 나을 듯했다. 박 신부에게서 들은 대로 몽마가 장 박사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면, 놈은 분명 장 박사의 부근에 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근데 장 박사는 어디 있지?’
그 순간,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산골짜기와 비슷하게 거대 하게 솟아오른 이상한 색깔의 봉우리들이 사방을 막고 있는 계 곡 위에 현암의 의식이 떠 있었다. 현암은 어리둥절했다.
‘어라? 내가 왜 이리로 옮겨졌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흰 가운을 걸친 장 박사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음? 장 박사의 의식? 이거 편하군! 생각만 하면 그쪽으로 옮 겨갈 수 있으니. 꿈속의 세계는 편리하군.’
현암은 바로 몽마에게 갈까 하다가 장 박사가 무엇에 쫓기고 있는지 궁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장 박사의 뒤로 수많은 그림 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현암은 의식을 집중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장 박사의 뒤를 와글와글 쫓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들은 산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체들이었다. 불에 검게 타서 금방 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시체, 물에 팅팅 불고 눈이 불거져서 반쯤 튀어나온 시체, 갈기갈기 찢겨져 너덜거리면서 달리고 있 는 시체들.
어지간한 현암으로서도 눈을 가리고 싶었다. 그런데 장 박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그만해! 6748번, 나는 네 원수를 갚고 죄인을 잡기 위 해 그랬던 거야! 8872번 너의 사인을 수사관에게 알려 줘야 했 어! 그만, 그만!”
현암은 알 것 같았다. 모두 숫자가 적힌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장 박사를 추격하고 있는 시체들은 장 박사가 검시관 생활을 하면서 해부한 시체가 분명했다. 그 수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았다. 현암은 망설였다.
‘저들이 왜? 장 박사는 좋은 의미로 남이 마다하는 일을 한 것 인데 왜 저들이 원한을 품고 쫓고 있을까? 아니지, 여긴 생시의 세계가 아니야! 저건 분명 장 박사가 만들어 낸 영상이 아니야! 몽마의 장난일 거야!’
그러나 꿈 자체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현암의 뇌리에 떠올랐다. 현암은 안타까웠으나 참고 주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던 장 박사가 나뒹굴었다. 시체들이 우르르 덮쳐들었다. 오디오의 전원이 켜진 것처럼 시체들의 아우성이 갑자기 들려 왔다.
“내 눈! 내 손! 내 다리! 내 심장! 코! 혀! 네가 잘라 냈어! 내놔 내놔!”
현암은 부르르 떨며 달려 나가려다가 준후의 경고를 생각해내고 간신히 몸, 아니 의식을 정지시켰다. 그러면서 장 박사가 의식을 차리기를 빌었다. 저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공포에 못 이겨 잠을 깨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저 시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장 박사는 그저 고통스럽게 외칠 뿐이었다.
“그래, 다 가져가라! 필요하면 다 가져가!”
현암은 충격을 느꼈다. 장 박사는 스스로 의식을 차리려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몸을 내주고 있었다. 시체들의 탐 욕스러운 손아귀가 박사의 몸을 이리저리 긁어 내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당하고만 있을까? 그들에게 베풀겠다는 것인가? 하여 간 이렇게 꿈속에서 당하면서, 장 박사의 몸과 생명 에너지도 실 제로 갉아 먹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암은 더 보고 있을 수가 없 었다. 이대로 생명이 소진될 수도 있었다. 장 박사를 구하기 위 해서라도 약간의 위험은 무릅써야 했다. 그리고 저 시체들 중에 몽마가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멈춰!”
현암의 의식은 쏜살같이 아래로 쏘아져 나갔으나 동시에 당혹 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을 쓸 수 있을까? 여긴 장 박사의 꿈속인데.’
그러나 현암은 곧 그런 걱정 따위는 뒤로하고 허공을 쏜살같 이 가로질러 시체들을 향해 덮쳐들었다. 장 박사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판이었다. 눈을 빼내려는지, 한 놈이 장 박사의 얼굴 을 더듬고 있었다.
현암의 의식이 장 박사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자, 준후와 박 신 부는 현암의 잠든 듯이 굳어진 얼굴과 월향검, 장 박사의 얼굴을 초조한 기색으로 번갈아 살폈다.
“어엇, 신부님!”
준후가 소리를 쳤다. 월향이 소리를 높여 울었기 때문이다. 박 신부는 급히 달려가 장 박사의 안색을 살피려는데, 준후가 날카 로운 비명을 지르며 박 신부에게로 와당탕 부딪히면서 넘어졌다.
“왜 그러냐? 앗!”
박신부도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준후를 집어 던진 것은 현 암이었다. 눈은 감겨 있었으나 이상하게 얼굴 전체에 요사스러 운, 마치 여자와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월향의 소리가 커지다 가 저절로 공중에 솟아올랐다.
꺄아아악!
박 신부와 준후가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는 사이에, 현암의 몸이 서서히 일어났다. 월향은 귀곡성을 울리며 주변을 맴돌았 으나, 차마 현암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호호호!”
현암의 입에서 난데없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박 신부와 준후는 소름이 쫙 끼쳤다. 준후는 눈에 띌 정도로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혀, 현암 형! 형이 의식을 비운 사이에 다. 다른 녀석이 현암형의 몸에………….”
박신부가 이를 갈았다.
틀림없다. 몽마의 암컷, 서큐부스!”
준후는 현암의 손가락이 장 박사의 몸에서 떨어졌는지 재빨리 살펴보았다. 현암, 아니 의식이 빠져나간 틈을 타 현암의 몸에 숨어든 서큐부스는 왼손으로 준후를 집어 던졌는지, 굳어 있는 듯한 오른손은 아직 장 박사의 몸에 닿아 있었다.
“저 손! 손을 몸에서 떼면 큰일 나요!”
준후가 소리치면서 현암의 오른손을 침대에 찍어 눌렀다. 현 암의 몸에 들어간 서큐부스는 왼손으로 옆에 뒹굴던 빈 병 하나 를 집어 들었다. 아직 현암의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는지, 오른손은 다행히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병이 준후의 머리 를 내리치려는 순간, 박신부가 현암의 왼손을 잡고 매달렸다.
“요사한 것! 썩 나와!”
월향이 날아서 병을 스치고 지나가자 병은 왼손에 잡힌 목 부 분만 남기고 깨끗이 잘라져 땅에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박 신부 는 오라를 뻗어 냈으나 현암의 몸을 조종하는 몽마는 아무 반응 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웃어댔다.
“바보 같은 것! 이자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어떤 술수도 내겐 통하지 않아. 이자가 자고 있는 동안에는!”
박 신부는 입술을 깨물며 전력을 다해 현암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나,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는 없었다. 준후 가 소리를 쳤다.
“신부님 오른손을 대신 잡아 주세요!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안간힘을 다해 준후가 누르고 있던 현암의 오른손을 박 신부 가 대신 잡아 누르자 준후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소리쳤다. “꿈은 너희들이 장난치는 장소가 아니다! 내 혼을 내주마! 형 체도 없고 존재할 이유도 없는 사악한 것들!”
준후는 손가락을 현암의 몸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이번에는 현암의 의식 속으로 준후의 의식이 들어간 것이다. 박 신부는 이 를 악물고 점점 힘을 더해 가고 있는 현암을 막아야 했다. ‘서둘러라, 준후야!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라!’
“물러서라!”
길게 소리친 현암은 장 박사에게 덤벼드는 시체들의 앞을 막 아섰다. 시체들의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졌다. 불쾌하기는 했지 만 느낌이 나는 것으로 보아 의식 상태에서도 힘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장 박사의 의식이 나를 알아봐서는 안 되는데.’
현암은 장 박사에게 달라붙어 그의 몸을 뜯어내려는 두 놈을 집어 던졌다. 장 박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정신이 없어서일까? 현암은 다행이라 여기면서 시체들을 향해 싸울 자 세를 취했다.
시체들은 어지간히 당황했다. 갑자기 시체들이 한군데로 모여 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몸뚱어리가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로 뭉 쳐 갔다. 현암은 메스꺼웠지만 물러서지 않고 장 박사의 앞을 막 아선 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뭉쳐진 시체들은 거대한 넝마 더미 같은 추악한 형태의 괴물로 변했다. 놈의 키는 이삼십 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왜 방해하는 거냐? 보아하니 저 늙은이의 꿈과는 다른 존재인데?”
현암이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그러는 너야말로 이 사람의 꿈속의 존재가 아닌데, 왜 그를 괴롭히는거냐? 썩 물러가라!”
“크헤헤!”
괴물이 포효하자 사방이 우르르 울렸다. 현암은 긴장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놈은 무시무시했다. 자신은 의식뿐인 존재라 공력 을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시험 삼아 몸에 기를 돌리려 했으 나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괴물이 다가섰다.
“네놈까지 같이 먹어 주마.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꿈은 나의 세계다. 여기에서는 내가 신(神)이다!”
“헛소리 마라! 꿈의 주인은 꿈을 꾸는 사람이다! 너 같은 몽마따위가……………”
“크헤헤! 어리석은 것!”
괴물은 여유만만했다. 추악한 손아귀에 한번 잡히면 공력이 없는 현암은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인간들은 스스로의 꿈을 알지 못하고 있다. 모두들 꿈을 무가 치한 것이라 여기며 잊으려 하고 있지. 스스로가 주인임을 포기 한 꿈의 세계에서 나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꿈을 꾸 는 시간 동안에는 내가 전지전능한 존재다.”
“그러면 장 박사도 꿈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냐?”
“크헤헤! 이 녀석은 누구보다도 좋은 목표였다. 이 녀석은 속 마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남에 대한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는 바보 같은 놈이야. 그래서 기력을 빼앗기가 훨씬 쉬웠지. 고집불통이어서 여간해서는 잠을 깨려고 하지 않거든!” 화가 난 현암이 소리를 질렀다.
“너같은 기생충은 그게 우습고 바보 같아 보이겠지! 백번죽 었다 깨어나도 그런 고귀한 마음을 알 수 없을 거다! 지옥으로나 꺼져라, 기생충!”
현암이 노호성을 지르며 습관대로 왼팔을 내뻗었으나, 자신의 왼팔에 월향이 달려 있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건 어디까지나 의식 속에서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괴물은 웃어 젖혔다. “크헤헷! 여기서는 내가 왕이다! 여기까지 들어온 걸 보니 너 도 한가락 하는 놈인 것 같다만, 이젠 끝이야!”
괴물이 이상한 몸짓을 하자 사방이 갑자기 불바다로 변하며, 발밑이 끈끈한 거미줄 같은 것으로 삽시간에 뒤덮였다. 현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세상에! 아무리 의식 속의 세계라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술이 있다니!’
괴물은 쿵쿵거리며 다가와 아가리를 쩍 벌렸다.
“산산조각 내 주마.”
“어디 있느냐!”
준후는 처음 와보는 현암의 의식 속을 누비고 다녔다. 몽마의 암컷 서큐부스는 무의식 가운데 중요한 부분에 자리 잡고서 현 암의 온몸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무의식 어 디에 그것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준후는 의식을 몽마에게 집중 시켰다. 준후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이동하더니 주변의 환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떠 있는 준후 앞에 기이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피부색도 괴이했고 흉악해 보이는 인상을 한 여자였는데,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준후는 질겁하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몽마는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면서 서슴없이 준후에게 다가왔다.
“에잇,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썩 현암 형의 몸에서 나가!”
“호호호!”
“가까이 오지 말고 썩 꺼져!”
몽마가 다가와서 팔을 잡았다. 준후는 당황한 나머지 피하지도 못한 채 소리를 쳤다.
“옷이라도 입고 얘기하자고! 놔, 놔!”
준후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몽마의 몸에 흰 천이 둘러져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마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어째서 내 말대로………… 윽!’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몽마가 준후의 목을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준후는 손아 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몽마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 았다.
“호호호! 지금 너는 꿈속에 있다. 이건 악몽이야. 네 마음대로 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절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준후는 속으로 외쳤다.
‘현암 형, 제발 정신 차려! 아니지, 현암 형은 딴 데 있지. 아이고, 신부님!’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으나 잘되지 않았다. 준후는 마음속 으로 박 신부를 소리쳐 불렀다.
박신부가 보기에 현암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 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현암 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며, 몸은 안에서 무 언가가 요동을 치는 것처럼 실룩실룩했다. 장 박사의 안색도 변 화가 없었다. 월향검은 불안한 듯 계속 희미한 소리를 울리면서 주위를 날아다녔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박 신부는 참지 못하고 현암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기도력을 집중했다.
사방이 거세게 뒤틀리며 요동쳤다. 주위가 연녹색으로 빛나 면서 밝은 광채를 발했다. 준후에게 이 느낌은 매우 친근한 것이 었다.
‘신부님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빛은 분명 박 신 부의 오라력이었다. 그러나 아까 박 신부가 기도력을 발했을 때 에는 몽마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 않은가.
몽마가 놀란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준후는 아직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몽마가 다시 준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퍼런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몽마가 입을 열었다.
“의식도 없는 놈의 몸이 왜!”
몽마의 몸이 배부터 가슴까지 쫙 갈라지더니 갈라진 부위로 이빨이 드러났다. 준후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몽마가 준후의 의식을 통째로 삼키려 했다.
“호호호! 내 아기가 되려무나.”
준후는 발버둥을 치려고 했으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직접적 인 물리력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목에 손톱이 파고 들어오는 고통은 생시의 그것과 똑같았다.
‘아아!’
준후는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귓전에 맑은 목
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하면 안 돼요. 당신 역시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자신의 꿈을 되찾으세요.
준후는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다. 그렇다면 지금 몽마가 주는 고통도 꿈속의 고통에 불과한 것 이리라.
‘나가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준후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리고 스스로의 의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몽마 가 어딘가 남아 있을 터이나 지금은 너무도 기진맥진해 찾아 볼 여력이 없었다. 현암의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준후의 귀에 다시 아까처럼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는 꿈이 많은 사람이에요. 저는 오빠의 생각 속에 있는 그림자랍니다. 바깥에 계신 어느 분의 힘을 제가 대신 받았어요.
‘그러면 이분은 현암 형의 동생인 현아 누나?’
오빠는 저를 지켜 주고, 저에게는 자신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지요. 저 는 오빠가 지니고 있는 기억일 뿐이랍니다. 안타깝고 애절한 기억 말이 에요. 오빠가 자기도 모르게 남겨둔 기억이랍니다.
준후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준후의 의식은 소용돌이에 휘 말린 것처럼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다.
지금 현암은 위기일발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괴물은 거대한 몸을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네 발밑에 깔린 꿈의 거미줄에서는 절대로 달아날 수 없다! 악몽의 불덩이가 너를 태우고, 회한의 얼음송곳이 네 몸을 꿰뚫 을 것이다. 크헤헤!”
‘얼음송곳이라고?’
깜짝 놀란 현암이 위를 보자, 아득한 곳에서 엄청난 수의 날카 로운 고드름 송곳들이 빽빽이 내려오고 있었다. 불덩어리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현암의 주위를 맴돌았고, 현암의 발을 붙잡고 있는 거미줄은 달라붙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래쪽을 향해 무서운 힘으로 잡아당겼다.
‘야단이구나!’
현암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까, 생각만으로도 장 박 사의 의식이 있는 곳으로 몸이 이동하지 않았는가. 혹시?
‘몽마의 뒤쪽!’
다리에서 거미줄의 느낌이 없어졌다. 현암은 이제 몽마의 뒤 쪽에 있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 얼음송곳이 우르르 박히고 불덩 어리들이 요란하게 부딪쳐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몽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이구나! 의식 속에서의 이동법을 알아내다니!”
‘그렇구나! 여기는 의식의 세계. 생각만 하면 그곳으로 의식을 옮길 수 있다. 맞아! 내 의식은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어. 일방 적으로 놈에게 당하지는 않겠군! ‘
현암은 자신이 생겨 힘을 모으고 의식을 끌어모았다.
‘몽마의 머리 위!’
몽마의 정수리가 보이는 공간으로 이동한 현암은 아래를 향해있는 힘을 다해서 일격을 가했다.
“아앗!”
현암이 주먹을 내리치려는 순간, 몽마의 머리가 엄청나게 큰 바위덩어리로 변했다. 현암이 주먹을 거둘 겨를도 없이 어느새 바위 같은 몽마의 머리에 명중하고 말았다.
“크헤헤! 네놈의 손만 산산조각이 났겠지!”
현암은 놀라서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다. 몽마의 말대로 오른손은 어느새 짓뭉개져서 형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으아악!”
몽마가 이죽거리면서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바보 같은 놈! 이동하는 방법을 알았다고 꿈 세계의 신인 나 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현암 앞에 머리를 풀어헤친 여 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현암이 상대하던 몽마와 비슷한 느낌이 었다.
‘서큐부스구나! 저것까지 나타나다니!’
괴물로 변한 인큐부스가 소리쳤다.
“너는 왜 왔느냐? 저 젊은 놈의 빈 몸이나 차지하랬더니.”
“지키는 자가 있었어. 저놈이 남겨 둔 기억이………….”
암컷 몽마는 말을 뚝 끊었다. 실언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 었다. 암컷 몽마는 목 아랫부분부터 배까지 몸을 반으로 가르더 니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호호호! 네놈을 통째로 삼켜 주지!”
현암은 몸을 이동시켜 몸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버린 서큐부 스의 공격을 피했다. 오른손마저 없어진 상황에서 두 마리의 몽 마를 상대하다니.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포기하지 않는다! 분명 저놈들이 저렇게 강해진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걸 알아내야 한다.’
아래에서 괴물 몽마의 소리가 들렸다.
“크헤헤! 그놈은 네가 맡아라. 나는 늙은 놈을 해치워야겠다!”
괴물로 변한 몽마가 장 박사를 집어 올렸다. 현암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현암이 몸을 날려 내려가는데 뒤에서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은 내 차지다!”
서큐부스가 뒤에서 현암을 와락 껴안았다. 현암은 다른 곳으 로 이동하기 위해 의식을 집중했지만 이동한 뒤에도 몽마를 떼 어 내지 못했다. 아마도 ‘현암이 있는 곳으로’라고 생각하고 있 는 모양이었다. 기분 나쁜 끈적임이 몸을 감싸고 들어왔다.
‘큰일이구나!”
박 신부는 현암의 몸이 안정 상태로 돌아가자, 영문을 모르면 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에 준후의 손가락이 현암 의 몸에서 떨어지더니 준후가 푸욱 한숨을 내쉬면서 옆으로 피 식 쓰러졌다. 박 신부는 놀라서 준후에게 몸을 돌렸다. 준후는 의식이 돌아오면서 꿈속에서 받은 상처와 피로를 같이 가지고 온 것이다. 안색은 푸른빛을 띠었고, 목에는 푸르고 붉은 손가락 모양의 멍이 들어 있었다. 꿈에서 생긴 멍이 현실에도 남는 경우 가 있는데, 동몽주를 이용하여 남의 의식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평소의 의식이 그대로 살아 있는 터라 상처와 피로가 함께 따라 오기 쉬웠다. 박 신부는 어떤 사정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준후 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추슬렀다.
“준후야, 잘했다! 수고했어!”
준후가 고개를 저었다. 퇴마사 일행이나 준후 스스로도 가끔 씩 망각하는 일이지만, 아무리 도력이 높아도 준후는 기껏 열네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고 그래서 정신력은 아직 부족했다. 스스 로를 잊고 강한 힘을 쓰고 나면, 곧 지쳐서 정신을 잃거나 잠들 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준후는 몽마와 싸우면서 놀란 터라,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에 있었다. 눈이 감기는 것을 억지로 참 으며 준후가 중얼거렸다.
“아녜요. 이대로는 몽마를 이길 수 없어요. 나도 상대가 안 돼 요. 스스로의 꿈이 없으면…………….”
“무슨 소리냐?”
“잊고 싶지 않은 현아 누나에 대한 기억…………. 현암 형의 몸에서 그걸 보았어요. 그 기억이 몽마를 물리쳐 주었어요.”
“그러면 장 박사는? 그 친구도 그런 기억이 있을까?”
“아아, 만약 그게 없으면………….”
잠이 들려는 준후의 뺨을 박 신부가 톡톡 쳤다. 쉬게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준후가 알아낸 사실을 듣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준후의 눈이 스르르 열렸다. 준후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현암 형도 지금 그대로는 상대가 안 돼요. 의식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어요. 그사실을…”
준후의 몸이 축 늘어졌다. 박 신부는 고개를 들고 최대한 머리를 회전시키려고 애썼다.
‘그래! 현암 군은 장 박사의 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공 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지 의심을 하고 들어갔다. 꿈속의 세 계! 그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했지! 그러나 의심을 품게 되면!’
박 신부는 곰곰이 생각했다. 준후 정도 되는 아이가 이토록 고 전을 할 정도로 강한 놈은 그리 흔하지 않다. 문제는 그들이 들 어간 세계, 의식 세계의 문제였다. 준후는 의식의 세계를 불안하 게 여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했을 테고, 그 때 문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큰일이다! 준후는 그나마 현암의 기억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장박사는 현암에게 도움을 줄 만한 기억이 없을 거야. 현암 군 이 위험해!’
박 신부는 서둘러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든 채 장 박사의 몸에 손가락을 짚고 있는 현암을 보았다. 장 박사의 얼굴은 점점 말라 갔다. 눈가가 휑하니 일그러지고, 완전히 해골상이 되어 있었다. 박 신부는 다급했다. 현암이 몽마를 막아내지 못 하는 것이 분명했다. 현암의 몸마저도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이 줄어들고 있었다.
‘할 수 없다. 이렇게 된 바에야………….’
안경 속의 눈이 번쩍 빛났다.
“놔라! 이거 놔!”
현암은 의식을 이리저리 옮겼으나 암컷 몽마인 서큐부스는 집 요하게 현암의 의식에 달라붙어 점점 깊숙이 몸을 삼켜 갔다. 현 암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뭉개진 오른손은 몽마의 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어깨 뿌리까지 없어졌고, 허리 아래부터 하 반신 또한 거의 삼켜진 상태였다.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되다니! 이럴 수가…………..?
현암은 잉큐부스가 장 박사의 몸을 움켜쥐고 장난을 치는 것 을 바라보았다. 박사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몸을 늘어뜨리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장 박사는 꿈속의 꿈에서 지독한 암흑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바에는!’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의식을 집중하면 아무 곳이나 갈 수 있다고 했지?’
현암은 눈을 꽉 감았다. 일단 뒤에서 자신을 움켜쥐고 있는 서큐부스에게서 풀려나야 했다.
‘서큐부스의 머릿속!’
순간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질긴 벽이 현암의 몸에 엄청난 압 박으로 조여 왔다. 현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큐부스의 머 릿속으로 현암의 의식이 이동된 것이다.
‘몽마라 해도 자기 자신 속으로 따라 들어올 수는 없다! 자신 의 몸을 자신의 몸속으로 넣는다는 것은 모순이고, 너도 그 사실 을 알고 있을 테니까! 죽어라!’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서 사지를 뻗었다. 사방의 벽이 움찔하 더니 단단하게 버텼다. 현암은 기합을 발하면서 양팔과 다리를 폈다.
굉음과 함께 서큐부스의 크게 늘어난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부 서져 버렸고 현암은 밖으로 튀어나와 허공을 밟고 섰다. ‘설마 살아나지는 못하겠지! 머리가 부서졌으니!’
현암은 지체 없이 다음 행동을 취했다. 이번에는 잉큐부스를 저지해야 했다.
‘잉큐부스의 머릿속!’
잉큐부스의 머릿속은 너무 넓었다. 괴물로 변해 있는 잉큐부 스의 머리는 현암이 들어가서 활동하기에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때 누가 뒤에서 현암을 덮쳤다.
“앗! 너, 너는 죽었을 텐데!”
머리가 박살 나서 산산조각으로 없어진 서큐부스가 현암을 뒤 에서 붙잡은 것이다. 힘도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서큐부스 의 박살난 조각들이 다시 모여들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호호호! 잔수를 쓴다고 될 것 같으냐? 여기는 꿈의 세계! 우 리에게 불가능은 없다!”
현암은 기가 질렸다. 밖에서는 잉큐부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장 박사를 집어삼키려는 참이었고, 현암의 반쯤 녹아 버린 몸은 다시 서큐부스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망이 없다. 포기해라!”
‘안 돼! 난 포기할 수 없다!’
현암이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왼손으로 발버둥을 치려 하자 서 큐부스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큐부스의 팔은 쇠뭉치 같았다.
“호호호! 뜨거운 맛을 보여 주어야 포기하겠느냐?”
현암을 반쯤 소화하고 있던 서큐부스의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 랐다. 새빨갛게 불길이 일어나다가 다시 노란색으로, 파란색으 로, 그러다가 백열(熱)의 상태로 변했다. 현암의 몸이 지글지 글 타올랐고 서큐부스의 팔과 몸이 살갗을 태우며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현암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포기해라! 그러면 적어도 고통은 없을 것이다. 포기해라, 포기해!”
현암의 얼마 남지 않은 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안 돼!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아!”
그때 현암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박 신부의 음성이었다.
현암군, 현암군! 괜찮은가? 정신 차리게!
‘시, 신부님이 여길 어떻게!’
나는 이런 데 익숙하지 못하네! 그리로 갈 수는 없어! 자네에게 알려줄 말이 있네! 어서 의식을 집중해! 그리고 상상을!
‘사, 상상이라뇨? 어떤 상상을?’
의식의 세계. 자네 또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꿈속에서는 뭐든지, 상 상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해! 아아, 나는 이런 주술을 더 계속하지는 못해! 어서 정신을!
박 신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멀어져 갔다. 어떻게 박 신부 가장 박사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원 래 주술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의식 바깥으 로 되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신부님! 이제 와서 어떻게…………. 내 몸은 벌써 박살이 났는데…………..”
마지막으로 아련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현암군, 집착하지 말게! 자네는 의식 속에 있어. 불가능은 없어. 자네의 의지로!
현암의 머리에 여러 가지 생각이 벼락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맞다. 그의 의식은 맨 처음 스스로 가고자 하는 곳까지 옮겨 갔 다. 하다못해 몽마의 머릿속까지. 그리고 몽마가 술수를 부릴 때 는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수법에 대해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았 다. 왜 그랬을까?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아니다. 현암의 의식 이 몽마가 말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현암 의 몸은 일부밖에 남지 않았다. 생시의 일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와 팔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도 의식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 을까? 몽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큐부스는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살아났다. 그렇 다면 나도 할 수 있다!
현암은 고함을 쳤다. 그와 동시에 서큐부스에 빨려 들어가 조 그만 조각이 되어 버린 현암의 몸에서, 고열로 달아올라 몸을 시 커멓게 태우고 있던 서큐부스의 팔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서큐 부스가 소리쳤다.
“네, 네놈이 꿈의 비밀을!”
잉큐부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현암은 조용히 공중에 떴다. 망 가지고 부서져 녹아 버렸던 현암의 몸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현암은 오른손을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았다!”
현암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고는 아래쪽의 잉큐부스까지 도 겁을 먹은 듯 장 박사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서큐부스도 아까의 기세등등하던 모습에서 갑자기 쭈그러들어 왜소해진 것 처럼 보였다.
현암은 왼팔을 들어 가만히 살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는 상상력이 없어. 꿈이 없는 존재, 항상 남의 꿈과 상상 력에 기생하는 존재지. 너희가 나를 해치려 한 수법, 그리고 환 상들 모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었어. 지레 겁을 먹고, 염려하 고, 머리를 굴리고……..
현암은 처음 장 박사의 몸속으로 올 때부터 자신의 힘이 통할 수 있을까 염려하고 걱정했다. 무의식적으로 월향을 발출하려 했을 때도 월향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고, 몽마의 머 리를 칠 때에도 모습이 바위 같아 보인다고 생각을 했다. 몽마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없었다. 현암의 걱정, 현암의 짐작을 읽어 그것으로 현암이 놀랄 만한 허상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의식을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고 조금씩 갉아먹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너희 따위 겁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할 수 있고 구속되지도 않는다!”
현암이 나직이 말하자 현암의 왼손에 월향검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에게는 머리끝 쭈뼛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현암에게는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리는 월향의 귀곡성이 나직하게 울렸다. 현 암은 고개를 갸웃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너희가 무섭지 않아. 내 의식 안에서는 내가 주인이다. 주인은 바로 나야!”
거대하던 잉큐부스의 몸이 풍선처럼 찌부러져 갔다. 잉큐부스 는 미친 듯이 고함을 치고 발버둥을 치려 했으나, 그 몸은 마치 거대한 손에 짓눌리는 것처럼 계속 찌그러졌다. 서큐부스의 몸 은 반대로 양쪽에서 당겨지는 듯, 고무줄처럼 가늘어지면서 늘 어났다. 머리부터 발목에 이르기까지 계속 길이가 늘어나면서, 폭이 계속 가늘어져서 실처럼 줄어들었다.
현암이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현암은 월향이 반사하는 빛을 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파멸 해갔다.
“여기서의 모든 것은 생각에 달렸지. 도망치고 싶은가? 그러 나 못 간다. 못 가고말고. 꿈속이 아니고서는 너희는 존재할 수 없거든. 꿈의 주인이 너희에게 속지 않고 정신을 차릴 때, 너희 는 가엾은 존재가 되는 거야.”
두 몽마의 몸이 고무줄처럼 뭉쳐지더니 실타래를 꼬듯이 뒤틀 리기 시작했다. 몽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종이처럼 구겨졌 다. 현암은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몽마를 벌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느낌은 현암이 수련했던 부동심결의 상태와 흡사했다.
“내가 좋은 것들을 생각하고 좋은 꿈을 꿀 때 너희는 고통받겠 지.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그러나 아마 내 힘도 그것뿐일 거야. 이 꿈의 진짜 주인은 내가 아니니까.”
현암은 묵묵히 왼손의 월향검을 쳐다보았다. 월향검은 조용히 검집에서 빠져나와 명령을 기다리듯 현암의 코앞에 떴다. “월향 장 박사님에게 알려 줘. 모든 것이 꿈이라고. 좋지 않은 꿈은 꾸지 말라고.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알겠지?”
월향이 오색영롱한 빛을 뿌리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장 박사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장 박사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해 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현암의 마음대로였으니 까. 지금 월향은 귀검이 아니라 의식의 전령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 박사의 의식이 돌아왔다. 어느새 월향이 들어가자 장 박사 의 난도질당한 몸도 원래대로 멀쩡하게 돌아와 있었다. 현암이 기쁘게 소리쳤다.
“악몽은 없어요! 몽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 박사님, 스스 로의 의지로 일어나세요!”
장 박사의 의식이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떴다. 꿈속의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장 박사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듯, 마치 잠 에서 깨면서 누군가가 들려주던 자장가 구절을 읊조리듯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악몽은 없어. 그들도 없는 거야.”
뭉쳐지고 쪼그라들어서 엉망이 된 몽마의 몸이 폭죽처럼 허공 에서 터졌다. 비명과도 같은 공허한 굉음이 사방을 메우다가 여 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몽마들은 사라졌다. 의식 세계의 주인 이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자 그들의 존재가 무(無)로 돌아간 것이 다. 현암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박사 자신이 꿈의 주인 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한, 몽마는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갈 시간이 됐다. 현암의 의식이 장 박사의 의식 속에서 대신 난리를 피웠다는 것을 알면, 주인이 좋아하지 않을 것은 뻔 했다. 현암은 동몽주를 쓸 때 주의하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현암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장 박사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갑니다. 장 박사님. 다시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으실 겁 니다. 나쁜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세요.’
현암의 의식은 장 박사의 의식을 남겨 두고 서서히 길을 떠났 다. 장 박사가 미소를 짓고서, 시체 더미 속에서 시체들을 하나 씩 손보고 정성스럽게 매장해 주는 모습이 언뜻 비쳤다. 다른 사 람에게는 악몽으로 보일 만한 일이 장 박사에게는 좋은 꿈으로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장 박사가 좋은 꿈을 꾸다가 느닷없이 악몽으로 바뀐 것도 이해가 갔다. 정성스럽 게 매장해 주고, 안식을 찾게 해 주려던 시체들이 별안간 장박 사를 공격했으리라. 자신의 의식으로 돌아가던 현암은 장 박사 라는 사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암은 빙긋이 웃었다.
아직 준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퍽이나 놀랐던 듯 했다. 박 신부가 현암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현암군, 수고했네! 정말 수고했어!”
“뭘요. 신부님이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꿈속에서 꼼짝없이 죽 을 뻔했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자네의 의지와 준후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아마 큰일 났을 거야. 준후가 안간힘을 다해 일러 주었기에 나도 의식 속에 서의 일을 짐작할 수 있었지. 아까 자네의 몸에서…”
현암이 눈을 크게 떴다.
“예? 제 몸요? 저 안에 있는 동안 제게도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박신부가 껄껄 웃었다.
“그래!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박신부는 흐뭇한 눈초리로 장 박사의 누워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앙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온한 얼굴로 미소를 띤 채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앞으로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겁니다.”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현암의 머리에 문득 한 가 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신부님, 물론 덕분에 위기를 넘겼습니다만, 아까 어떻 게장 박사님의 의식 속으로 들어오셨죠? 서툴기는 했지만, 그건 동몽주를 외워야 하는 건데.”
박신부가 희극적으로 넓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나도 외웠거든!”
“아니, 주술은 안 된다. 안 된다 하시던 신부님이 주문을 외우고, 게다가 실제로 부리기까지 하셨다고요? 오, 아멘!”
현암의 장난기 섞인 말에 박 신부도 억지로 심각한 표정을 지 으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일부러 외운 것은 아니네. 아까 자네가 준후에게 주문을 일러 줄 때 그냥 귀에 들어오더군.”
“아니, 겨우 세 번, 그것도 먼발치에서 듣고 외웠다구요? 신경 을 쓰고 듣지 않았으면 가능한데…….”
“내 머리가 돌인 줄 아는가? 이래봬도 어렸을 땐 신동 소리를 들었단 말이야! 하여간 걱정이군. 얼마나 고행을 하고 기도를 올려야 이 죄를 씻을 수 있을지. 야훼 하느님이시여, 이 죄 많은 신 부를 용서하소서!”
현암은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이제 밤은 이숙해져 있었으나 더 이상 요사하거나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밤은 그들의 시간이라고 몽마가 그랬던가요? 하하하!”
박신부가 엄숙하게 말했다.
“아니지. 밤은 휴식의 시간이지. 그것을 공포의 시간으로 만드 는 것은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각자의 죄와 걱정 과 의심하는 마음일 거야.”
둘은 말없이 창밖의 어둠을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준후 는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었고, 장 박사 또한 코까지 드릉드릉 골 며 편안하게 진정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