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돈 의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악몽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김 의원은 호텔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특실 안은 자신이 잠들기 전에 비해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김 의원은 한숨을 내쉬며 참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고는 머리맡의 휴지로 이마의 땀을 훔쳐 냈다.
김 의원은 자신의 선거구인 모 지역에 연설을 하기 위해 전날 밤늦게 내려갔다. 이 지방은 곡창지대여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이 많았고, 다음 선거를 기약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선거 구민에게 밝혀 놓아야 뒤탈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 다. 아니, 그런다 해도 일이 풀리게 될지 아닐지는 장담할 수 없 었다. 쌀 수입 개방으로 인한 여파 때문이었다. 김 의원은 평소 “내가 국회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쌀 개방은 저지하겠다”는 말을 줄곧 해 왔다. 그러나 난데없이 쌀 시장을 개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김 의원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 다. 자신의 선거구에서 표밭을 주로 형성하는 것은 분명 농민들 이었고, 그들은 이제 자신에 대한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을 것이 눈에 훤했다. 이대로라면 다음번 선거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일이 벌어진 마당에 자신이 뭐라고 떠들어 보아야 당 의 높으신 분들에게 미움만 사는 꼴이 될 터이니.
그래서 김 의원은 이런저런 궁리를 해 가면서 일단 선거구로 내려온 참이었다. 무어라도 속히 변명을 해서 사람들을 진정시 켜야 했다. 벌써 자신이 내려오자마자 농민 대표며 알려진 지방 단체장들이 면담을 요구하며 밀고 들어와 항의하려 했지만, 평소 잘 알고 있던 경찰서장의 도움으로 몸을 피해서 무마한 터 였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뒤숭숭해서였던지, 영 기분이 좋 지 않은 악몽을 꾸었다.
“도대체 그 이상한 남자는 누구지? 본 일도 없는 놈이 꿈에 나 타나서 호통을 치다니…….”
꿈에 나타난 이상한 남자가 서슬 퍼런 칼을 들고 나타나서 자신에게 호통을 쳤다. 그의 손에는 무섭게도 수많은 사람의 머 리가들려 있었다. 몸에도 해골바가지들을 치렁치렁 엮어 걸고 있었으며 그자의 등 뒤로는 시뻘겋게 불이 타오르고 있어 아주 끔찍한 형상이었다. 바닥에는 새까만 모래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그놈이 뭐라고 했더라? 입을 찢어 버린다고 했던가? 에구, 원 더러워서!”
김 의원은 냉수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쓸데없 는 악몽은 잊어버리기로 하고, 국회의원까지 된 처지에 꿈 따위 를 무서워해서는 안 되니까.
“음? 뭐라고? 연설할 장소가 바뀌었다고?”
김 의원이 비서를 향해 눈을 흘겼다. 비서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아 예, 의원님. 그・・・・・・ 원래 연설하기로 되어 있던 마을의 회 관에 어젯밤 시위대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곳은…….”
“그렇다고 야외에서 연설을 하란 말인가? 이 추운 날씨에?”
“죄송합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라서……………”
“알았어, 빌어먹을 놈들. 난들 어떻게 하냔 말이야. 혼자 힘으 로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 인지, 원.”
김 의원은 피우던 담배를 힘을 주어 눌러 뭉개 버렸다. 비서는 마치 자신이 뭉개지는 것 같아 인상을 구겼다.
“그럼 어디야, 연설할 곳이?”
“아, 넓은 터가 없어서요. 백제 시대 때의 군창(軍) *가 있습니다. 원래 군창 터라면 쌀을 보관했던 창고이니, 뭔가 의미도 있을 것 같고…”
비서의 아이디어가 그럴듯하게 들렸다. 군창 터라 옛날 군량 미를 보관했던 자리란 말이지? 그래, 쌀을 쌓아 놓으면 뭐하는 가. 외국과의 관계가 좋지 못하면 이렇게 한낱 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역사가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을 꾸미면 제법 호소 력이 있을 것도 같았다.
“좋아. 그러면 그리로 가자고.”
김 의원은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어 젯밤에 잠을 통 자지 못해서 기분이 좋진 않았다. 이상한 자가 계속 꿈에 나타나 세 번씩이나 놀라서 깨어나는 바람에 …………… 김 의원은 정체 모를 꿈속의 남자인지 귀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 어댔다.
날씨는 흐렸으나 모여든 사람은 꽤 많았다. 그러나 참석자 대 다수가 농민이라 김 의원을 보는 눈빛은 곱지 않았다. 김 의원은 켕기는 기분이 들었다. 농민들의 시선보다도 눈 아래 보이는 땅의 흙빛이 검정색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제 꿈에 나타난 땅의 색깔과 비슷한 것이………………
“이봐, 이거 흙 색깔이 왜 이렇지?”
비서가 답했다.
“군창 터라서 그렇지요. 여기 쌓아 놓은 쌀들을 당나라의 군 대가 쳐들어올 적에 전부 태워 버렸다더군요. 그때 타 버린 쌀과 재가 일대에 퍼져 있어서 흙빛이 검다고 합니다만, 천 년도 더 된 재가 그대로 남아 있겠습니까? 그냥 지형이 그렇겠지요.”
“아는 것 많아 좋겠어.”
김 의원이 무안을 주자 비서는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섰 다. 저 비서 놈, 다음번엔 갈아버려야지, 만날 잘난 척만 하고 말 이야. 김 의원은 무거운 마음으로 검게 깔린 흙을 바삭바삭 밟으 면서 연단으로 향했다. 김 의원이 연단에 올라가자마자 군중 속에서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명하라! 쌀 시장 개방에 대해 해명하라!”
“그렇게 쉽게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인가? 해명하라!”
“대책을 말해라! 말해라!”
김 의원이 비서와 경찰들이 군중을 휘젓고 다니며 조용히 하라고 악을 썼고, 김 의원도 마이크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진정! 이 김경돈이가 해명해 드리겠습니다!”
* 삼국 시대 말 백제에서 군용으로 쌀을 쌓아 놓았던 자리. 병화(兵)로 말미암 아 검게 탄 자취만 남아 있고 지금까지 탄화된 쌀 부스러기 등이 나온다.
한참을 고생하고서야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구 호 소리가 조금 작아졌을 뿐 사람들의 눈초리는 여전히 싸늘했 다. 일당을 주고 바람잡이를 많이 고용해서 군중 속에 심어 놓았 는데도 별 효과가 없었다. 김 의원은 바람잡이에게 뿌린 돈이 아 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쨌건 연설을 해야 했다. 김 의원은 자 기도 놀랄 만큼 당찬 목소리로 연설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군중이란 당당한 태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 이니까.
한참 쌀 개방의 당위성에 대해 김 의원이 떠들어 대자 사람들 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욕설도 조금씩 나오고 있었지만 이제 야 심어 둔 바람잡이들이 제 역할을 하는 듯 “맞다!”, “그렇다!”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자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한 이해가 아니라, 할 수 없으려 니 으레 그렇게 되는 것이려니 하는 체념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 이었다. 김 의원은 약간 챙기기는 했지만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 다고 생각했다.
‘나라고 좋아서 이 짓 하나? 모가지 보존하려면 할 수 없잖아?’
열변을 토하고 있던 김 의원의 눈앞에 갑자기 이상한 것이 보 이기 시작했다. 몰려 있는 군중들 너머로 키가 큰 녀석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형상이 괴이했다.
“여, 여러분은 정부가 하는 일에 절, 절대적 신뢰…………
김 의원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건 저건 어제 자신이 꿈 에서 보았던 남자, 아니 괴물이었다. 저자가 나타나다니! 그것도 이런 연설에….
“정부도 나름대로의………… 나름대로의 방책을 강….. 강구・・・・・・ “
김 의원의 목소리가 덜덜덜 떨렸다. 비서와 경찰 들은 의아하 게 생각하여 사방을, 그리고 김 의원이 홀린 듯 주시하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군중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형체는 손에 긴 환도(環刀)를 들고, 다른 손에는 미라같 이 말라 버린 사람 머리를 들고, 목에는 해골을 주렁주렁 매단 채 흉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뚜벅뚜벅 김 의원을 향해 걸어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 형체는 마치 투명 인간 처럼 사람들의 몸을 뚫고 걸어왔고 어리둥절해하는 비서와 경찰 관들마저 통과해 다가오고 있었다.
“으, 으아…… 으아아아악!”
김 의원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연설이고 뭐고 할 처지 가 아니었다. 공포는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의원으로서의 체면 도, 다음 선거에 대한 기약도 행하던 연설마저도 모조리 잊은 김 의원은 단상에서 뛰어 내려갔다.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이 휘둥그레진 군중들이 웅성거리더니 “기니까 도망가나 보다”라며 떠들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운전사를 부를 새도 없이 자신의 차 를 집어타고 시동을 걸었다. 비서가 재빨리 단상으로 올라가 변 명을 늘어놓았고 경찰들이 호각을 불며 군중들을 진정시켰다. 김 의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흉측한 모습을 한 자는 계속 다가오 고 있었다. 연설을 위해 쳐 놓은 줄까지 스르르 통과하면서………………
“으아아아악!”
김 의원은 비명을 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갔다. 맞은편에서 달 려오던 고물차 한 대가 급히 중앙선을 넘어 유턴하여 뒤를 쫓기 시작한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이건 악몽이야! 이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지금 세상에 귀신 이라니.
김 의원은 중얼거리면서 계속 차를 몰았다. 놀란 가슴도 좀 진 정이 되었고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이거・・・・・・ 아이구, 연설은・・・・・・ 이거 망했네!’
김 의원은 차를 세웠다. 아직까지 떨고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 기 위해서였다. 심호흡을 한 뒤, 어제의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자 서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래, 헛것이었을 거야. 아무도 그 귀신을 본 것 같지 않던데. 흠흠. 이거 나잇살이나 먹어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난데없이 옆에서 뭔가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 의원은 기겁을 하며 옆을 돌아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언제 들어왔는지 차의 뒷자리에는 연설장에서 김 의원이 봤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아니 귀신은 오른손에 들고 있 는 말라비틀어진 사람의 머리를 김 의원에게 내밀었다. 머리가 퀭한 눈을 번득이고 아가리를 벌리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김 의 원에게 달려들었다.
“으…… 으아아아악!”
김 의원은 데굴데굴 차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급하게 뛰쳐나 오느라 중심을 잃은 김 의원의 퉁퉁한 몸이 찻길에 나뒹굴었다. 마음이 다급해서인지 몸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차 밖으로 놈 이 걸어 나왔다. 반투명한 몸을 일으키자 상반신이 차 지붕 위로 솟았다. 차 문을 열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하여 김 의원에게 뚜벅 뚜벅 걸어왔다. 김 의원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아랫도리가 축축해졌다. 귀신은 성난 얼굴로 다가오 면서 환도를 치켜들었고 김 의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꺄아아악!
갑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 의원은 눈을 번쩍 떴다. 뭔가 작은 것이 번쩍거리면서 귀신 주위를 빙빙 돌고, 귀신은 주춤거리면서 물러섰다. 저게 뭘까? 또 다른 귀신인가? 멍 하니 얼이 빠져 있는 김 의원의 귀에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시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웬 청년과 꼬마가 보였다. 꼬마가 말했다.
“그만둬요! 마음은 알겠지만,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유별한 법. 사람을 해쳐서는 안 돼요!”
김 의원은 귀신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저 사람들은 귀 신과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무섭지도 않은가? 귀신은 아직도 성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주위를 계속 맴도는 칼이 두 려운 듯, 주춤거리기만 하고 앞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청년은 결 코 곱지만은 않은 눈으로 김 의원을 쳐다보았다. 김 의원이 소리 를 질렀다.
“날・・・・・・ 날 도와주시오! 나는 국회의원 김경돈이요!”
“아, 높으신 분이군요.”
청년의 말투는 공손했으나 어딘가 쌀쌀맞은 기운이 감돌았다.
“날 도와주시오! 저, 저 흉악한 귀신이 보입니까? 저놈을 어떻게……”
“보이냐고요? 물론 보이지요. 귀신의 말도 들립니다. 준후야, 저 높으신 분도 들으실 수 있게 해 드려라. 전부 알려 드려.”
준후라는 꼬마가 품에서 누런 종이 두 장을 꺼내더니 눈을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부적에서 저절로 불이 확 타올랐다. 그러 더니 그 불붙은 부적은 김 의원에게로 살아 있는 듯 날아왔다.
“에구! 이게 뭐, 뭐야?”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부적 한 장은 김 의원의 귀에, 또 다른 한장은 입에 달라붙었다. 불은 금방 꺼져서 재가 된 듯, 뜨거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벼락같은 소리가 귓전을 세게 때렸다.
이노오오옴!
김 의원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눈앞에서 귀신이 소리치 는 것이 똑똑히 들렸다. 귀신의 모습도 똑똑히 보였다. 꿈에서와 똑같이 귀신의 등 뒤로는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니, 귀신 의 등 뒤로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 파노라마처럼 어떤 영상이 계 속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마치 기억을 돌아보듯, 많은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 놀랄 만큼 짧은 시간 동안에 김 의원의 눈으로 들어 왔다. 김 의원은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 광경들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창고, 군관 복색의 바싹 여윈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 리고 그 앞으로 끌려온 일가족인 듯한 세 사람. 바싹 말라서 미 라처럼 보이는 남자와 아낙, 그리고 열댓 살쯤 된 소년. 군관이 환도를 꺼내 일격에 남자의 목을 날린다. 다음엔 아낙을, 그다음 엔 소년의 목을……………. 군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가혹한 손질로 세 명을 죽였지만, 그들을 가여워하는 군관의 마음이 휘몰 아친다. 그렇다. 군관의 마음이 신기하게 김 의원에게 전달된 다. 벌써 열두 명째다. 나라에서 쌓아 놓은 군량미, 기근을 못 이 겨 쌀을 훔치려다가 자신에게 적발되어 죽은 백성이 열둘, 슬프 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쌀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자신으로 서는…………. 가엾은 백성들. 그들이 살 방도가 없다는 것은 그도 안다. 자신이 배급받은 식량은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준지 오래 다. 그러나 동정은 동정일 뿐, 그에게는 임무가 있다. 피가 쏟아 진 백성의 머리를 놓고 그 군관은 참았던 오열을 터뜨린다.
김 의원은 잔혹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청년 의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계속 보시오!”
군창 터가 훨훨 불타고 있다. 아까의 군관이 허망한 얼굴로 횃 불을 들고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하다. 당 나라 군대는 이미 백강을 건넜고, 백제 군사들은 괴멸되었다. 그 럼에도 그는 창고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명령 때문에 가엾은 백성을 열두 명이나 처형했다. 누구를 위해서였단 말인가! 누구 를 위해 이 쌀들을 쌓아 놓았단 말인가! 상부에서는 불을 지르라 고 했다. 모조리 태우라는 엄명을 받았다…………. 왜 태우는가? 왜 없애야만 하는가? 나는 명령을 따랐다.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무 조건 명령에 따랐다. 나라에서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여겼고, 나라님을 위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건 또 무 엇인가. 왜 이 쌀을 태워야 하는가. 태워 버릴 것이라면 내가 열 두 명의 목숨을 끊어 내면서 지켜야 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불, 그리고 쌀. 왜 내 칼은 피로 물들었는가? 왜 쌀을 지켜야 했 는가? 도대체 무엇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어떻게 되었단 말인 가? 군관의 몸이 망연하게 불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라는 망했 다. 그런데도 쌀을 태우는 것이 스스로를 더 괴롭히는 이유는 무 엇일까? 왜 몸에 붙은 불들이 아무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일까? 쌀 이 타는 불이라서 그럴까? 쌀이란 무엇일까? 백성들이 살기 위 해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로 했던 것・・・・・・ . 그 때문에 수없이 사 람이 죽기도 했고, 나라를 망하게도 흥하게도 한 작고 하얀 낟알emf….
귀신의 눈에서 피 같은 눈물이 흘렀다. 김 의원은 비로소 이 귀신이 그때의 군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 년 이상이나 군 창 터를 떠돌며 불에 탄 쌀을 떠나지 못하고 파수를 봐오던 군 관・・・・・・ . 준후라는 꼬마가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이상하게 손가 락을 읽고 주문을 외우자 귀신의 손에 들려 있던 세 개의 해골에 살이 붙더니 몸의 형태가 갖춰졌다. 그들은 군관이 목을 쳤던 일가족이었다. 불에 탄 쌀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듯 땅바닥을 뚫고 검게 탄 쌀알들이 땅바닥을 뚫고 솟구쳐 올라 세 명의 일가족에게 흡수되어 갔다. 먹지 못하고 죽은 한을 풀려는 듯. 귀신이 소리쳤다.
아이야! 고맙다! 저들이 이제야 하늘로 가는구나!
생김새와는 다르게 귀신의 마음은 고왔다. 귀신의 몸에 붙어 있던 아홉 구의 다른 해골도 앞의 사람처럼 검게 탄 쌀알들을 흡 수하여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귀신의 몸에서 해골들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무엇에 파 먹힌 것처럼 끔찍한 상처들이 있었다. 김 의원이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준후가 중얼거렸다.
“저 아저씨……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아귀(鬼)가 되어 저 아저씨의 몸을 갉아먹으면서 붙어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자신 은죗값을 치르려고 승천하지 않고 여기 남은 것이고요.”
열두 아귀의 혼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귀신 의 얼굴도 밝아졌다.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후가 다시 귀신 에게 말을 건넸다.
“아저씨…… 이제 갈 곳으로 가세요. 파수 보는 일은 그만하시고요.”
* 아귀는 범어의 Preta를 옮긴 것인데 이는 원래 죽음이란 뜻을 지녀 귀(鬼)로 번 역되었으며, 굶주린 귀신을 뜻하는 아귀로 변하였다. 아귀는 배는 수미산만 하고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항상 굶주려 있으며 먹을 것을 극도로 탐하는 불쌍 한 귀신이라고 한다.
아니야, 아니야!
귀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얼이 빠져 있는 김 의원을 보고 호통을 쳤다.
말끝마다 나라, 나라・・・・・・・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백성은 먹어야 사 는 법, 네 어찌 나라의 일이란 핑계를 대고 백성의 근본인 쌀을 무시하는 소리를 했느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거늘.
“그, 그건・・・・・・ 그러니까……………..”
요사스러운 변설은 듣기 싫다! 입만 놀리고 행할 줄은 모르는 것들. 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나라는 백성을 위해야 마땅한데, 어찌 나라라는 핑계를 대어 백성을 괴롭히려는지 모르겠구나. 나라라는 것은 한없이 높고 귀한 것이지만, 그렇게 귀할지라도 사악한 자들이 사리사 욕의 핑계로 이용하면 또 그리도 벗어나기 힘든 일이 되는 것이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조심할지어다. 능수능란한 언변일수록 다시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고 장래의 그럴 듯한 계획이나 감언에 현재를 희생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나와 같은 후회를 하지 마라.
귀신은 잠시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그의 형체가 희미해져 갔다.
아아! 내 죽은 지 오래된 몸으로 어찌 세상에 간섭하겠느냐. 그러나 정녕 통탄스럽다, 통탄스러워………….
귀신의 목소리는 기근에 못 이겨 죽어 간 수많은 원혼의 목소 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농민의 한이 섞인 하소연 같은 것도 섞여 있는 듯했다.
내 죄를 받아 지옥으로 끌려갈지언정 이곳이나마 지키려다. 아아, 세상은 대체 어찌 되려는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푸념과도 같은 소리가 조용히 사방을 메아리 같은 여운을 남 기는 속에 이름 모를 귀신은 다시 환도를 걸쳐 메고 조용히 사라 져 갔다. 그를 묵묵히 바라보는 청년의 얼굴도, 어쩔 줄 모르면 서 울고 있는 꼬마아이도,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멍하니 귀 신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김 의원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군창 터처럼 땅이 검었다. 처참하게 불에 타서 탄 쌀알들을 머금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