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2화 – 생명의 나무 2 : 부동심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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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2화 – 생명의 나무 2 : 부동심결


부동심결

오전인데도 하늘이 먹장같이 어두워지면서 뇌성벽력이 울리 더니 곧이어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박 신부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현암은 옆에 앉아 조용히 운기를 하고 있 었으며, 준후와 승희는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승희는 뒤 트렁크 에 실린 대사제의 시체가 꺼림칙한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차는 본격적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속을 뚫고 세 번째로 대사제 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불쑥 준후가 승희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아까 말예요.”

“응. 뭐?”

“아까 대사제의 영이 제 몸에 들어왔을 때, 영의 생각을 읽었죠?”

“어떻게 알았어? 넌 그때………….”

“아, 저도 그때까지는 정신이 있었어요. 근데 누나, 그거 혹시 독심술 아녜요?”

앞자리에서 현암이 눈을 뜨며 숨을 내뱉었다. 운기가 끝날 때쯤 무의식중에 준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현암이 입을 열었다.

“전에 대사제의 집에 처음 쳐들어갈 때도 그랬고, 우리 은신처 에서 대사제와 엔키두와 싸울 때도 능력이 나왔지.”

승희가 부끄러워하며 얼버무리려 했다.

“나도 몰라. 그냥 마음속에 떠오른 것뿐이야. 박 신부님이나 준후에 비하면 능력이라고 할 것도 없지, 뭐.”

“아니, 중요한 능력이야.”

박신부가 기어를 바꾸며 끼어들었다.

“만약 승희가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적의 사악한 의도를 간파할 수도 있고, 감춰진 비밀을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녜요.”

“수련하면 할 수 있을 거야.”

“오늘이나 무사히 넘기면 그러죠.”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사실 사교의 총단에는 사백 년이나 묵은 엔키두 말고도 그런 강한 능력을 가진 주술사가 더 있을지 도 모르고, 사교의 광신도가 무더기로 있을 것이 뻔했다. 더군다 나 그들 모두 악귀나 마물이 아닌 숨 쉬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상 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악인이라 해도 인간을 심판하거나 해칠 수는 없었다. 넷은 입을 다물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 분명 했다. 한참이 지난 뒤 승희가 입을 열었다.

“경찰을 부르면 어떨까요? 놈들은 살인, 시체 유기 등 갖가지 죄를…………….”

현암이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사교도뿐이라면 모르지만, 브리트라가 깨 어나기라도 하는 판에는 경찰이 힘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아? 경 찰이 그런 악신을 체포할 수 있겠어? 더구나 누가 이런 일을 믿 기나 하겠니?”

“쳇, 결국 우리밖에 없다는 소린가? 다른 주술사나 고수도 많 을 텐데…….”

“물론 여러 사람이 있지만 그들의 도움을 청할 시간이 없어. 그리고 우리가 이런 일을 알고 끼어들게 된 건, 우리의 운명이 그렇게 방향 지어져 있기 때문이야.”

“현암군은 나만 미워해, 칫!”

“뭐, 현암군? 어이구, 관두자 관둬.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니.”

“그런데 저 시체는 왜 가지고 가는 거야?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준후가 입을 열었다.

“지금 대사제의 영도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

“뭐, 뭐라고? 어머 이를 어째!”

“놀랄 것 없어요. 저하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마 우 리를 돕기 위해 최후의 주술을 쓸 것 같아요.”

“최후의 주술?”

“거기 설치되어 있는 봉인이 있다는데, 그건 자신의 흑마술력 으로 봉인된 것이라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니면 풀지 못한대요. 그래서 대사제는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흑마술로 자신의 죽은 몸을 조종해서 봉인을 풀어 줄 거래요.”

“으, 완전 좀비 아냐.”

“모르겠어요. 찜찜한 건 사실이지만 믿어야지 어쩌겠어요? 대 사제도 마음을 많이 고쳐먹은 것 같고요. 그에겐 정말 소미 씨 생각밖에 없거든요.”

현암이 중얼거렸다.

“소미, 소미라…….”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왜 대사제가 마음을 바 꾸었는지 납득이 가긴 하지만, 그래도 개운하지 않았다. 소미가 아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현암은 일단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차는 어느덧 모퉁이를 돌아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대낮인데도 사방이 컴컴했다. 박 신부는 대사 제의 집이 있던 터에 차를 세웠다. 집은 불에 완전히 타서 지금 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넷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차에서 내 렸다. 준후가 우산을 받쳐 주려 했으나 현암은 가볍게 웃으며 고 개를 저었다. 준후는 입맛을 다시며 우산을 차에 집어넣었다. 박 신부가 타버린 집터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허무하다, 바빌론의 옛 성이여……………. 이렇게 종말이 오고야말 것을.”

준후가 사방을 살피더니 박 신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신부님!”

“왜 그러니, 준후?”

“사교 일당이 자꾸 이리로 모이는 이유를 알겠어요.”

“왜지?”

“산세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돌에 머리를 부딪힌 뱀의 형상이에요. 약이 올라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는 뱀이요.”

현암이 후줄근하게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준후, 너 풍수도 볼 줄 아니?”

“헤헤……. 전에 약간 배웠죠.”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서 뒷산을 뒤져 보자.”

마치 사냥개처럼 영기를 감지한 준후가 앞장을 섰다. 박 신부 는 사제복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대사제의 시체가 든 가 방을 끌면서 뒤를 따랐고, 벌써부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승희가 현암을 부축하여 걸음을 옮겼다. 현암은 오른손에 월향을 굳게 쥐고 있었다.

한참을 가던 준후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 잡히는 모양이었다. 

“저기………… 아마 저기가 틀림없을 것 같아요.”

과연 준후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이상한 기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기운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걸로 봐서 브리트라가 아직 재생 하지는 못한 것 같군요.”

일행은 그쪽으로 접근해 갔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 때문에 자 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흘러나오는 기운을 확실히 느낄 수 있 었다. 돌연 승희가 무엇에 걸렸는지 털썩 넘어졌다.

“아얏!”

발밑을 보니 전선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박 신부가 승희를 일으켜 세웠다.

“이건 전원 케이블인데………… 이 산 어딘가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가 보군. 이걸 따라가면 녀석들의 은신처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 기운은 뭐죠?”

박신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로 강한 기운이 아닌 걸 보아 함정인지도 모르겠다. 엔키두 는 우리에게 호되게 당했는지라, 우리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예 상하고 무슨 대비를 해 두었을 테지.”

“이 기운이 함정이라구요?”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늙은 주술사인 엔키두가 이렇게 기 운을 노출시키지는 않을 거야. 하여튼 이 전선을 따라가 보자.”

일행은 걸음을 돌려 발밑에 깔린 전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전선은 영기가 느껴지는 장소와 반대로 나 있었으나, 한참을 따 라가자 굽이를 돌아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의 뒤쪽으로 닿게 되었 다. 거기에는 잘 은폐된 입구와 함께, 보초로 보이는 초라한 사내 몇 명이 비를 맞으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넷은 덤불 속에 숨어 얼굴만 내밀고 잠시 상황을 엿보았다. 현암이 웃으며 말했다. 

“축복이 있으라! 행운의 발이여! 하하하.”

박 신부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녀석들의 의식장은 산속의 굴이었나 보군! 아까 그 기운은 의식장을 가린 벽 중에서 얇은 부분으로 새어 나왔겠지. 뜻밖에 시간을 많이 절약했군. 승희의 행운의 발 덕분에 …………..”

“놀리지 마세요. 쓰려 죽겠는데!”

“하여간 입구는 발견했고, 이젠 어떻게 한다?”

박신부가 전선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난 이래봬도 군에 있을 때 장교였지. 혼란시킨 뒤 기습하는게 최고야. 인명 피해를 줄이려면……….”

현암은 박 신부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월향으로 전선을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잠시 후 안에서 소리가 들리자, 보초를 서고 있던 사람들이 떠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의식장에 전기가 나간 게 분명했다.

“자, 가자!”

말은 박 신부가 먼저 했지만 앞서 뛰어나간 것은 현암이었다. 준후는 뒤따라가면서 현암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정말 철골이라니까.”


어둠 속에서 준후가 주술로 불러낸 희미한 빛을 받으면서, 사교도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며 길을 열고 나갔다. 부상 때문에 약해지긴 했지만, 기공이 살짝 실린 현암의 주먹을 한 대만 맞아 도사교도들은 말없이 쭉쭉 뻗어 버렸다. 정통으로 맞지 않고 팔 로 막아 간접적인 충격만 받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현암이 ‘투(透)’ 자결을 운용하고 있어서 주먹을 막더라도 기공력이 몸 을 직격하기 때문이었다. 절룩거리면서도 벌써 십여 명의 사교 도를 여유 있게 넘어뜨리는 모습을 본 승희는 현암이 권투 선수가 됐으면 천하무적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쓰러진 졸개들의 몸을 넘고 바위를 뚫어서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백 미터가량 전진하자,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 보였다. 안 이 조용한 걸로 봐서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여기가 의식장인가 보군. 현암 군, 준후, 승희야, 모두 조심 해라.”

넷은 긴장하며 부적과 무기를 다시 한번 정비했다. 박 신부는 대사제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허리를 폈고, 특별한 싸움 기술이 없는 승희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준후가 부적 몇 장을 꺼내 그들이 들어온 길에 놓고 주문을 외웠다.

“화염진이에요. 웬만한 사람은 뜨거워서 이쪽으로 올 수 없을테니 안심하세요.

박 신부도 승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승희는 여기 서 우리를 도와다오. 그게 나을 것 같다. 저쪽에서는 들어올 수 없고, 앞에는 우리가 있을 테니 안심해도 될 거야.”

승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명의 힘을 증폭시켜 주는 것뿐이고 그러려면 차분히 앉아 있어야 했다. 괜히 싸움터에 나서 보아야 방해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준비됐겠지?”

현암과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가 눈짓을 하자 승희 가 힘을 보내는 동작을 취하고, 현암은 기를 오른손에 끌어모으

기 시작했다. 현암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오른손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났다.

쾅!

현암이 발출한 기공에 문짝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문이 부 서지자마자 셋은 날렵하게 안으로 몸을 날려 세 방향으로 흩어 졌다. 현암이 인상을 찌푸렸다.

“으앗!”

박 신부도 신음성을 냈다.

“아니!”

준후가 말을 더듬거렸다.

“브, 브리트라!”

방 안은 꽤 넓었다. 거기에는 환영같이 반투명한 거대한 뱀의 형상이 불타는 두 눈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삼십 평은 됨직한 방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그 앞에는 역시 반투명한 모습으로 검은후드를 쓴 한 사람의 영상이 있었다. 엔키두였다. 

“벌써, 벌써 환생했다는 말인가? 이, 이런!”

박신부가 신음 소리를 냈다. 엔키두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도 능숙한 한국말이었다.

“흐흐흐……. 늦었다. 브리트라 님은 벌써 현신하셨다. 이제 브리트라 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고, 이 세상을 다스 리실 것이다. 브리트라 님은 형체 없는 지혜, 고민 없는 힘으로 보이지 않게 세상에 군림하실 것이다.”

준후가 성을 내며 인드라의 뇌전을 쏘았으나 허무하게 브리트 라의 형상을 통과하여 뒤쪽 벽에 맞고 스러져 버렸다. 박 신부도 기도력을 집중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셋은 당황하여 서 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여태껏 많은 악령과 싸워 왔지만, 이렇게 막강한 놈은 처음이었다. 엔키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 을 이어 갔다.

“그대들의 힘으로는 브리트라 님을 이길 수 없다. 아니,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그대들이 어떤 수를 써도 불멸의 힘이 된 브리트라 님을…..”

현암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전에 승희의 몸에서 나온 애염명 왕과 대적할 때도, 위력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분명 주술이 통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빗나가다니………….

“속임수다!”

“애송이! 당해 볼 텐가?”

거대한 뱀의 형상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뱀의 사 발만 한 눈이 이글거리며 광채를 쏘고, 지름만 해도 사람 키가 훨씬 넘는 거대한 몸뚱이가 미끄러지듯 꿈틀댔다. 셋은 흠칫 뒤 로 물러섰다. 뱀이 아가리를 벌렸다. 거대한 이가 날카롭게 번쩍 거렸다.

“현암군, 속임수라니? 무슨 말인가?”

박신부가 땀을 흘리며 외쳤다. 현암이 대답했다.

“이건 환영입니다! 맞아요, 틀림없어요! 의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놈은 시간을 벌려는 겁니다!”

“시간을 번다고? 그러면・・・・・・ “

“우리가 온 것을 놈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의식은 아직 완성 하지 못했습니다. 높은 의식을 마저 진행시키려고 환영을 보인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주술이 통과할 리가 없어요!”

엔키두가 눈썹을 치켜 올렸고, 뱀은 성난 듯 똬리를 풀며 쉭쉭 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이 미리 준비해 둔 것이 틀림없어요! 보세요. 놈의 말이 너 무 유창하잖아요. 어제까지 엔키두는 우리말을 잘하지 못했어 요. 미리 할 말을 준비한 겁니다!”

뱀이 입을 벌리고 현암을 향해 돌진해 왔다.

“앗, 현암 형!”

“현암군!”

박신부와 준후가 소리를 쳤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한 것 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현암에게는 슬로 모션으로 보이기 시작 했다. 뱀의 커다란 입이 코앞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 속에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일체가 무상이고 영원은 없는 것.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색(色)도 없고 공(空)도 없는 것. 아무것도 없는 속에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부동심이라………………

“부동심결(不動心訣)!”

오래전 파사신검, 사자후와 함께 배운 심결, 아직 한 번도 사 용해 본 일이 없던 무공이 현암의 뇌리에 떠올랐다. 현암은 마음 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으며, 번쩍이며 다가오는 거 대한 이빨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현암군!”

“현암 형!”

박 신부와 준후가 외치는 사이에 뱀의 거대한 아가리가 그대 로 현암에게 덮쳐들었다. 그 순간 현암의 몸에서 카메라 플래시 처럼 광채가 터졌다. 주변의 모든 것을 무(無)로 바꾸어 버리는 듯한 밝음 속에서 닥쳐들던 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아!”

박신부가 감탄의 소리를 내고, 준후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物)의 힘이 강하여 세상을 휘젓고 뒤엎어도 심(心)을 이기 지 못한다더니, 과연…………….”

엔키두의 환영도 순간적으로 뻗어 나온 광채 속에 사라져 버 리고 현암만이 고요한 자세로 서 있었다. 뱀의 환영이 겹쳐 있던 뒤로 아끼는 보이지 않던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술로 감추어져 있던 것이 부동심결 앞에서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현암이 눈을 뜨더니 울컥 피를 토했다.

“현암군, 괜찮은가!”

박 신부와 준후가 달려오려는 것을 현암이 손을 들어 저지했 다. 힘에 겨워 말은 하지 못했으나 의도는 분명했다. 박 신부와 준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문을 서서히 밀어 젖히기 시작했다.

승희는 고요히 앉아 최선을 다해 힘을 발출하고 있었다. 그런 데 어느 순간, 엄청난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현암이 부동심결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승희가 알 리 없었다. 힘이 연기 빠지듯 풀어지면서 승희는 앞으 로 고꾸라졌다.

한참을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엎드려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대사제의 시체가 든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승희 는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쳤으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방 지퍼가 후드득 뜯어져 벌어지더니 대사제의 검게 탄 얼굴이 나 타났다. 뒤이어 잘려 나간 팔도 딸려 나왔다. 승희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으나 공포에 질려 그럴 수도 없었다. 욕지기가 나왔다.

‘으, 저 흉한 모습…………. 왜 하필 이럴 때…………’

대사제의 시체가 뻣뻣한 동작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감겨 있었다.

‘봉인을 풀러 가는구나. 그래그래, 어서 가라.’

그런데 대사제의 시체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승희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어라? 왜 나한테 오는 거야? 저리 가! 저리!’

조금씩 몸에 힘이 돌고는 있었으나 아직은 움직일 수 없었다. 승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침착하려 애썼다. 그리고 힘을 한꺼 번에 빌려 가는 바람에 자기를 이 지경으로 만든 셋 중의 누구를 향해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대사제의 시체가 서서히 승희 앞으로 다가오더니 우뚝 섰다.

‘이게 왜 나한테 와, 징그럽게!’

시체가 입을 열었다. 억양 없이 단조로운, 마치 기계 같은 목소리였다.

“네가 필요하다…………. 소미를 살리려면……….”

‘뭐, 뭐라고?’

“미안하다…………….. 그러나 의식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너를 희생시켜야…”

‘으악!’

승희는 머리에 둔탁한 충격을 느끼고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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