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3화 – 생명의 나무 3 : 엔키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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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국내편 2권 3화 – 생명의 나무 3 : 엔키두의 죽음


엔키두의 죽음

박신부와 준후는 혼신의 힘을 다해 무겁고 빡빡한 문을 밀었 다.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열렸다. 안은 어둠 침침했고, 한복판에 몇 개의 촛불들이 춤을 추었다. 문이 열리자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엔키두가 틀림없었다.

“준후야, 엎드려!”

박 신부는 고함 소리가 들리자마자 본능적으로 준후에게 소리 치면서 몸을 뒤로 날렸다. 준후가 엎드리자 안쪽에서 시뻘건 불 덩이가 수십 가닥 날아와 문과 주변의 벽에 작렬했다. 박 신부가 재빨리 오라를 일으켜 방어했다. 준후는 몸을 굴려 두 가닥의 불 덩이를 피한 뒤, 주문을 외우며 일어섰다. 안에는 열 명도 넘는 후드를 걸친 자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얼굴빛이 싯누런 그들은 중간 사제쯤 되어 보였다. 그 너머에는 놀란 얼굴을 한 엔키두가 서 있고, 그 앞에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소미라는 여자가 분명했다.

“놈들의 수가 많아요!”

준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한 바람이 밀어닥쳤다. 바람은 오라에 부딪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박 신부의 몸을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사대력이에요! 이건 아리엘의 기운…….”

“시간이 없다. 놈이 우리를 밀어내고 의식을 계속 진행하려는 모양이다!”

박신부가 오라를 몸 주위에 한껏 펼치면서 거센 바람을 뚫고 한발씩 앞으로 전진했다. 반쯤 닫힌 문의 안쪽에서 기합과 고함 소리가 터지면서 바람의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엉겁결에 준후가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서면서 외쳤다.

“신부님, 놈들이 힘을 증가시키고 있어요!”

박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물고서 앞으로 한 걸 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박 신부의 얼굴이 붉게 물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꼿꼿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일급 주 술사가 아니더라도 십여 명이나 되는 적들이 필생의 힘을 다하 자위력이 대단했다.

“신부님, 무리예요!”

그러나 박 신부는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나직이 기도를 읊으면서…………….

“나는 야훼를 찬양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사제들의 주술이 발악을 하자, 넓은 지하실 바닥에 흩어져 있 던 물건들이 바람에 휩쓸려 뒤로 날리기 시작했다. 놈들의 괴상 한 고함 소리와 혼을 빼는 주문 소리가 준후의 귀에 들려왔다. 하지만 준후는 어떻게 해야 박 신부를 도울 수 있을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에 대사제와 싸울 때도 이 바람의 힘에 어떻게 대 처해야 할지 몰라서 아버지의 법기(器)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 때보다 더한 지금의 바람 앞에서는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발이 땅을 긁으면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여전히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전진 하고 있었다. 중얼거리듯 성경 구절을 읊으면서…………. 갑자기 박 신부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고함을 쳤다.

“야훼여!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쉈습니다.”

반쯤 열려 있던 문이 폭발하듯이 산산이 부서지며 바람에 휩 쓸려 날아갔다. 부서진 문 조각들이 날아오자, 준후는 문득 쓰러 져 있던 현암을 떠올렸다. 그래서 곧바로 현암에게로 뛰어가려 했지만 바람 때문에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안쪽에서 단검을 내 리치려던 성난 엔키두가 박 신부에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언 뜻 보였다.

“이 망할 놈의 바람!”

박신부가 힘겨운 걸음을 옮기면서 다시 고함을 쳤다.

“무서운 힘으로 당신은 적수를 꺾으셨습니다.”

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엔키두의 목 소리였다. 사제들이 박 신부를 막지 못하자 그도 주술에 합세한 듯, 바람의 힘이 배로 늘어나면서 문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방 안에 있던 물건들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뜨면서 뒤쪽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현암의 의식을 잃은 몸도 허공에 떠오르며 날아 가려고 했다. 준후는 힘껏 몸을 날려 현암의 몸을 붙들고 이를 악물면서 버텼다. 박 신부의 사제복이 찢어질 듯 휘날렸다. 박 신부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온 힘을 다해 한 발을 내디디며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불타는 분노로 당신의 원수를……………!”

그와 동시에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며 사제들이 뒤로 어지럽게 튕겨져 날아갔다. 사제들은 벽에 부딪혀 늘어지기도 했고, 선반 이며 제단에 처박히기도 했다. 몰아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멈추 고 박 신부의 오라만이 푸르게 빛났다. 그러나 여전히 뻣뻣하게 버티고 서 있는 자가 있었다. 사백 살이나 되었다는, 바빌론의 바루 엔키두였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박 신부는 전력 을 쏟은 다음이라 다리의 힘이 풀렸지만, 지지 않고 엔키두의 눈 을 쏘아보았다. 폭풍같이 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지자 준후는 의식을 잃은 현암을 내려놓고 부적을 한 움큼 꺼내 쥐고는 의식 이 행해지려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현암이 눈을 떴다. 그리고 힘 겹게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승희의 몸은 아직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대사제의 시체가 머뭇거리며 행동을 취할지 말지 망설이는 듯 보였다.

“미안하다……………. 그러나………… 의식은………… 행해져야…”

“이놈, 의식을 막아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할 말이 있으면……………해라…………….”

‘입이 떨어져야 말을 하지!’

돌연 승희의 입이 열리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승희는 놀라서 음음 하는 소리를 내 보았다. 말이 흘러나왔다.

“너,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아직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았단 말이냐?”

“엔키두는…………… 아무도 이길 수 없어……………. 소미를 살리려면…….”

“바보 같은 소리! 아무리 사백 년 묵은 괴물이라 해도 신부님 이나 현암, 준후를 이기진 못해!”

“그, 그럴까…”

승희는 순간적으로 대사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번 민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퇴마사 일행이 엔키두를 이기지 못하 더라도 소미만은 살리고 싶었다. 전에 부리던 호기에 비해 지금 그의 마음은 여리기 그지없었다. 승희는 이제 눈앞의 시체가 무 섭다기보다는 초라하게 여겨졌다.

“흥! 그렇게 그 여자가 걱정되면 네 간을 꺼내 주지그래? 어차 피 죽었으니까.”

“그건 안 돼……………. 의식을 위해서………… 죽음을 당해야만……………

제물로 소용이…”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왜 의식을 치러야 한다는 거지?

“왜?”

“브리트라를 없애기 위해… 이미 의식은…… 아홉 단계까지 진행되었을 것이다……………. 브리트라가 진실로 원한다 면…………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부활할 수……………”

“뭐라고?”

대사제의 시체가 하는 말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답답해 진 승희는 대사제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브리트라는 치러진 의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분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승희는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대사제의 말에 의하면 의식 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악의 사신(神) 브리트라가 자신의 힘으 로 쳐들어오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우당탕거리는 소 리가 나면서 의식장의 문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노도와 같은 바 람이 승희와 대사제의 시체에게까지 밀어닥쳤다. 안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대사제의 시체가 바람으로 인해 잠시 균형을 잃고 주춤거리자 승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합 을 발했다. 수련을 하거나 그에 관한 지도를 받은 적도 없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지른 소리였다. 승희의 몸 안에서 폭발할 것 같 은 힘이 솟구쳐 올랐다. 그 힘은 승희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결박을 한꺼번에 풀어 버렸다.

대사제의 시체가 뒤로 자빠지는 것을 보면서 승희는 벌떡 몸 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 다. 박 신부와 일행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 약 대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의식을 마쳐야 했다. 그것이 유일 한 방법이었다.


박 신부는 꼼짝하지 않고 엔키두를 노려보았다. 엔키두 앞에 는 아무 표정도 없는 소미가 석상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그녀의 앞에는 커다란 수정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수정구에서 는 색색의 빛이 물결치면서 음산한 빛을 사방에 뿌렸다. 박 신부 와 엔키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준후는 끼어들 수 없었다. 둘 사 이에 너무도 팽팽한 긴장이 오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눈 빛은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각자의 신앙에 대한 믿음과 의지 를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몹시 강렬한 그들의 눈빛 속에서 두 사람이 눈으로 행하고 있는 말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소리들 이 마치 옆에서 듣는 것처럼 또박또박 들려왔다.

-신부, 그대는 왜 진실을 외면하는가?

-나는 진실을 외면한 적이 없다. 이 세상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의 진실이다.

이 세상? 이 세상이 그대는 옳다고 보는가? 추악한 인간들.

허황된 종교, 이기주의…………. 세상은 씻어 내야 한다. 옛날 우트나피슈팀의 시대처럼.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브리트라님뿐이다.

– 허황된 소리! 악마를 불러내 세상을 맡기려는가? 그런 짓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이라고? 우주의 위대한 힘은 하나뿐이다. 너는 그 힘 을 신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힘은 공정하다. 인간을 특별히 위해 주지 않는다.

-요망한 소리 하지 마라. 엔키두!

-인간이 이제껏 해온 일이 무엇인가? 위대한 자연력에 순응 한 일이 무엇인가? 평화롭던 세상을 악과 고난이 들끓는 지옥으 로 바꾸어 놓은 것이 누구인가?

-네 말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라! 오만한 자신의 이성과 자만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악한 자여, 가련하구나! -뭐라고? 감히 내게 가련하다는 소리를 하는가?

-진실로 가련한 자…………. 오랜 기간 동안 증오와 악만을 쌓아 왔구나. 회개하라!

엔키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릅뜬 두 눈이 황금빛으로 찬란 하게 광채를 띠기 시작했다.

“샤마시의 광채! 신부님, 눈을 감으세요!”

뒤에서 현암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엔키두와 박신부의 대결을 주시하고 있던 준후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현암이 어느새 방 안으로 기어 들어와 있었다. 현암의 손에서 월 향이 날아올랐다. 뒤를 보고 있던 준후의 뒷머리에 화끈한 것이 느껴지면서 주위가 황금색의 빛과 열기로 가득 찼고, 준후의 손 에 들려 있던 부적들이 불에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승희는 현암이 기어가는 것을 보고 방 안으로 뛰어들려다가 천둥같이 덮쳐 오는 황금빛 광채에 튕겨지듯 뒤로 나가떨어졌 다. 한 번 당한 일이 있던 수법이었으나 이번 것은 위력이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승희의 머리카락이 바지직 소리를 내면서 그슬렸다. 눈앞이 멍해졌다.

현암이 쏘아 보낸 월향조차 엔키두가 발한 샤마시의 광채를 뚫지 못했다. 공중에 떠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정지한 채 꼼 짝을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암의 눈이 빛에 직접 닿는 것을 월향이 막아 주어서, 현암은 희미한 정신에서도 앞을 볼 수가 있 었다. 박 신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강한 빛을 온몸에 받으며 앞 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암은 박 신부가 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 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엔키두의 힘은 엄청났다. 아무리 박 신부라 해도 이 힘 앞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검은 사제복이 군데군데 불이 붙어 타올랐으나 박 신부 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무거운 걸음을 앞으로 옮기고 있을 따름 이었다. 엔키두는 놀란 듯 외국어로 소리를 질렀다. 응답이 없자 이번엔 서툰 한국말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가오지 마라!”

엔키두의 눈에 다가오는 박 신부의 얼굴이 보였다. 박 신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눈물인가? 엔키 두는 의아했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박 신부는 강한 빛으 로부터 다른 자들을 가리기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박 신부 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사방에 나뒹구는 사제들까지 도 빛에서 보호하려고 했다. 박 신부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 었다. 그저 인간을 사랑할 뿐이었다.

“으으, 너, 너는 대체…………”

엔키두가 소리를 지르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에게서 뻗어 나오는 빛이 오렌지색을 띠면서 엄청난 열기를 뿜어 댔다. 뒤쪽에서는 승희가 옷에 불이 붙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고, 현 암도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준후가 삼매진수의 수를 발해 검은 물기운을 일으켜서 박 신부를 보호하려 했으나, 검은 물기운은 박 신부가 있는 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증발되듯 이 사라져 버렸다. 박 신부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현암이 소리 를 질렀다.

“승희야, 준후야, 정신 차려! 신부님이 위험해!”

현암의 외침에 준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부적을 꺼내들었 다. 승희도 옷에 붙은 불을 끄다 말고 현암의 외침을 듣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지금 작은 불 같은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승희가 급히 좌정을 하자 현암에게 기가 조금씩 흘러들기 시작 했다. 현암은 눈을 감고 월향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준후에게 소리쳤다.

“준후야, 금(金)! 금의 부적을!”

준후는 병원에서 대사제와 싸울 때의 일을 기억해 냈다. 현 암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준후는 실눈을 뜨고 오행 의 부적 중 금의 부적을 손에 잡았다. 이것이 맞나?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현암은 눈을 감고서 힘을 모았다. 대사제의 총을 맞 은 이후 벌써 몇 번이나 무리를 했는지 모른다. 지금 몸을 움직 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러나 어쨌든 움직여야 했 다. 주변의 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몽롱해지는 정신・・・・・・ 자 고 싶다. 그러나 깨어야 한다. 현암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 왔다.

“아아앗!”

화답이라도 하듯이 월향이 귀곡성을 내면서 날았고, 월향을 향해 준후의 손에서 금빛 기류가 뻗어 나갔다. 월향은 화살처럼 날아가다가 곧 속도가 떨어지더니 박 신부의 머리 위에서 정지 했다. 그 순간 준후가 쏜 금의 기운이 월향에 엉키면서 삽시간에 박 신부의 머리께부터 반원형의 막을 씌웠다. 엔키두가 발하는 샤마시의 태양광이 그 기운에 부딪혀 마치 렌즈처럼 집중되더니 반대로 엔키두에게 덮쳐 들어갔다.

“크아악!”

뜨거운 빛줄기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사 방을 메우고 있던 빛줄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앞이 캄캄 해지면서 주위가 시원해졌다. 준후가 눈을 비비며 명경부를 갖 다 댔다. 박 신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사제복에 붙 은 불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승희가 절룩거리며 박 신부에게 다 가갔다. 현암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엔키두는 오른쪽 귀 언저리 부터 우반신이 완전히 타 버린 채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너 무 오래 묵은 그의 영은 이미 육신을 떠나고 없었다. 승희와 준후가 박 신부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 있는데 박 신부가 입을 열 었다.

“가련한 자들이여.”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소미가 꿈틀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너, 너희는 누구냐? 무슨 짓을 한 거냐?”

준후가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 소미는 주위를 둘러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 더니 박 신부 일행을 돌아보고는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의식을 방해하러 온 자들이구나! 엔키두, 엔키두 님을 너희가 저, 저렇게?”

준후가 더 참지 못하고 깔깔 웃었다. 현암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박 신부도 말이 없었다. 승희만이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대꾸했다.

“뭐? 죽을 목숨을 살려 줬더니 뭐가 어째?”

“뭐라고?”

“흥! 네가 찾는 그 사백 년 묵은 괴물이 널 산 채로 해부하려 했다 이 말이야! 그런데도 뭐? 엔키두 님?”

소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뭐라고? 무슨 소리냐!”

박신부가 승희와 준후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돌봐 주렴. 그리고 현암 군도………….”

승희가 눈을 크게 떴다.

“예? 저 악당들을요? 저놈들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했는데도요?”

박 신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승희야!”

준후는 군소리하지 않고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있는 사제들에게 다가가 옷에 붙어 있는 불을 꺼 주었다. 승희도 그 모습을 보 고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몸을 돌려 준후 쪽으로 향했다.

“암, 그래야지.”

박 신부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고목이 쓰러지듯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승희와 준후가 달려와서 박 신부를 부축했 다. 소미는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더니, 이윽고 눈을 감고 양손 집게손가락을 이마에 갖다 댔다. 준후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승 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굉장히 당황하는 것 같아요. 무슨 투시를 행하는 모 양인데? 제법 영력이 세군요.”

투시를 행하던 소미의 얼굴이 차츰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러더 니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크게 뜨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승희가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소미는 자기가 희생 제물이 될 뻔했다 는 사실에 경악하고, 또 대사제가 죽었다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 은 듯했다.

승희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흥! 수많은 사람들을 이용해 먹고 죽이고 할 때는 눈 하나 깜 짝하지 않았으면서, 자기가 죽을 뻔하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죽은 것엔 왜 그렇게 놀라신담? 자기 아이까지 팔아먹은 여자가…..”

소미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지? 아기? 아기라고?”

승희는 살기를 띤 그녀의 눈과 마주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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