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눈앞이 조금씩 밝아져 갔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은 현암과 준 후, 승희, 그리고 소미라는 여자와 함께 사교의 지하실에 있었는데……………
박 신부는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주변은 온통 붉은색으로 가 득한 광야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자신밖에는. 박 신부는 지금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아니 자신이 이미 죽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몇 걸음을 옮겨 보았다. 지쳤다고 생각했는 데 발걸음은 의외로 가벼웠다. 박 신부는 들뜬 마음이 되었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 이었다. 박 신부는 한 발로 깡충깡충 뛰어 보았다. 재미있었다.
이런 장난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히죽 웃으며 주위에 누가 있나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늙은 나이에 주책이라는 생각도 들 었으나, 누구라도 곁에 있으면 같이 놀고 싶었다. 눈앞에 흰옷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박 신부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저절 로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예쁜 소녀 같았다. 소녀의 어깨를 두드리려는데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너, 너는!”
미라였다. 오래전 박 신부가 의사였을 때 자신의 이름을 간절 히 부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 소녀의 눈은 검은자위 없 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눈에서 두 줄기의 피가 흘러내렸다. 박 신부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갑자기 소녀의 등 뒤에서 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니, 현암 군, 준후야, 승희야!”
현암의 얼굴이 반쯤 뭉개져 있었고, 준후의 얼굴은 하얗다 못 해 은색으로 빛났다. 승희의 눈은 더욱 찢어져 올라간데다 머리 카락도 사방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들 역시 눈동자가 희게 뒤 집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너, 너희들, 어 어쩌다가!”
현암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준후가 합창을 하듯이 높낮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우리를 …………… 우리 모두를…………….”
승희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브리트라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모두를…….”
박 신부는 놀라움에 휘청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내려다보았 다.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박 신부의 눈앞에 소용돌이치듯 흔들리 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두방망이질을 했다. 네 명이 소 리를 모아 말했다. 그 소리가 벼락처럼 박 신부의 귀를 때렸다.
“죽였어!”
“아, 아냐! 아냐!”
박신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뒤로 기어갔다. 네 명의 원혼이 서서히 다가왔다.
“너도………… 너도 너도………… 너도!”
“신부님, 현암 형! 대체 어디에 있어요? 대답해요!”
준후는 달렸다. 여기가 어디일까 하는 생각도 이미 없었다. 무 작정 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질 뿐이었다. 길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 한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가다 보면 굉음과 함께 보이던 길이 막히고 다 른 길이 열렸다. 홧김에 벽을 두드려도 보았지만, 벽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꿈을 꾸고 있나? 아니, 내가 죽었나?’
준후는 부적을 꺼내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주술로 확인을 확 인해 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뭐지? 어째서………….’
갑자기 준후의 뒤에서 괴성과 아우성이 들려왔다. 돌아본 준후는 오금이 저렸다. 수천, 수만을 헤아리는 요괴와 귀신, 망령과 마물들이 한데 엉켜 소리 를 지르며 준후를 쫓아왔다. 준후는 주술을 몇 차례 쏘아 보냈 지만 어림도 없었다. 한 놈이 쓰러지면 열 놈이 세 놈이 쓰러지 면 백 놈이 쓰러진 놈의 시체를 밟고 달려왔다. 따로따로 달려오 는 게 아니라 서로 엉켜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길을 가득 메우며 굴러왔다. 준후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길이 쾅쾅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준후는 벽에 부딪혀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러나 아픈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몸을 일으킨 준후의 눈앞 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보였다. 한쪽에서는 박 신부가 다급한 표정으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현암 이 목청 터져라 준후를 불렀다. 셀 수 없이 많은 악귀들이 엉켜 있는 무더기가 바로 뒤까지 몰려와 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 렸다.
현암은 자신이 깊은 물속에 목만 내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의아했다. 분명 브리트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 하고 있었는데……. 물은 깊지는 않았으나 넓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 로 넓은 호수 위로 먹장같이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현암은 물을 헤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현암의 눈앞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현아. 물귀신에게 당했던 여동생 현아였다. 현아의 뒤 에서 물귀신들의 머리가 불쑥불쑥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현아가 울부짖고 있었다.
“오빠! 오빠! 구해 줘. 어서!”
“기다려! 잠깐만! 잠깐만 참아. 현아야!”
현암은 목청껏 대답을 하면서 현아가 있는 쪽으로 헤엄쳐 가 려고 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도 꼼짝할 수가 없 었다. 누가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박 신부와 준후였다.
“가서는 안 돼! 현아는 이미 브리트라의 혼령이 씐 몸이야! 자네를 유인하기 위해서 저러는 거야!”
“절대 안 돼요, 형! 죽어도 놓을 수 없어요!”
“사, 살려 줘! 오빠, 오빠!”
물귀신들은 현아 뒤로 바싹 다가들고 있었다. 현아는 가련하게도 허우적거리며 현암에게 오려고 애쓰고 있었으나 무엇이 잡아당기는 듯, 물속으로 빠져 들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뒤에서 준후가 불길을 물귀신들에게 내쏘고 있었지만, 놈들은 물속 으로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준후의 불길을 피해 현아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놔요! 놔줘요! 브리트라의 노예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단 말 이에요! 놔요! 이 손 놓으라니까!”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으나 박 신부는 완강했다. 신부는 깍지 낀 팔을 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조여 왔다.
“안 돼! 자네를 잃을 순 없어!”
현아는 힘이 빠진 듯 구슬픈 신음소리를 내며 물에 가라앉았다.
박 신부는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네 명의 원혼이 눈을 형형히 빛내며 서 있었다. 박 신부는 다시 한번 자신의 피에 물 든 두 손을 쳐다보면서 오열했다. 기억이 났다. 그렇다. 자신이 그랬다. 자신의 손에 의해 벽에 처박힌 준후, 거꾸로 쥔 십자가 에 머리가 박살이 난 현암, 오라의 힘에 튕겨 날아간 승희…………. 내가 왜 그랬던가. 그리고 구해 달라고 작은 손을 휘젓다가, 구 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하던 미라…………..
“내 목숨을 너희 손에, 아니 하느님의 손에 맡기나이다.”
박신부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감아쥐었다. 현 암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증스러운 자! 하느님이라는 허황된 이름을 읊조리면 살아날 듯싶으냐?”
승희가 외쳤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겠다!”
준후의 소리도 들렸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지!”
미라의 작은 소리가 셋의 소리를 누르고 들려왔다.
“구원은 없다. 신부!”
박 신부는 눈물을 폭포같이 쏟으면서 기도만을 올렸다. 목이 메었다.
“제 더러운 영을 하느님 손에 맡기나이다. 구원을, 아니 유황 불에 사르실 수 있다면, 그러나 전에 예수께 그러했듯이 이 잔을 거두실 수 없다면 그대로 하소서…………. 야훼의 뜻대로 하소서.”
굉음과 함께 박 신부의 눈앞이 하얗게 빛나더니 이내 아득해 졌다.
준후는 양쪽을 돌아보았다. 박 신부는 다급하게 준후에게 손 짓을 했다. 인자한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현암은 절규하듯이 준후를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가지?’
악귀들이 준후의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해 있었다. 순간 준후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허중유실(虛中有), 사중유생(死中有生). 빈 속에 실제가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준후는 방향을 돌려 악귀가 들끓고 있는 속으로 돌진했다. 악 귀들의 아우성과 느글느글한 살갗의 감촉과 역겨운 냄새가 났 다. 준후의 눈앞이 노래지며, 아무런 감각도 느낌도 없이, 아득 한 공간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갔다.
“놔, 놔! 이 손을 놓으란 말이야!”
“내 말을 듣게, 현암군! 평소 냉정한 사고를 지녔던 자네가 아 닌가! 현아는 죽은 사람이야! 죽은 현아가 어떻게 우리 눈앞에 나타날 수가 있겠나! 정신을 차려! 정신을 차리란 말이야!”
“놔, 놔! 저게 죽은 현아건, 산 현아건 상관없어! 난 동생을 구 해야돼! 백 번 천 번이라도 구해야 된다고!”
현암이 기합 소리를 내면서 엄청난 힘으로 박 신부의 깍지 낀 팔을 뿌리쳤다. 무리하게 힘을 써서인지 상처가 터지며 피가 분 수같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에 아랑곳없이 현암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팔을 놀리기 힘들었다. 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 았다. 아, 몸이 왜 이리 느린가…………. 현암이 팔을 저을 때마다 주위 물이 붉게 물들었다. 피의 궤적을 그리면서, 현암은 조금씩 현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조금만, 현아야, 조금만 버텨 다오.
물 밑에서 무엇이 현암의 발을 잡고 끌어당겼다. 현암은 마치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힘겹게 헤엄을 쳤다. 현암의 눈에서 피눈 물이 쏟아졌다.
‘현아야, 곧 간다. 조금만 더……………..
누군가에게 등을 깨물린 듯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해 왔다. 그 러나 저항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오직 현아에게 가까이 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현암은 얼굴까지 물속에 잠긴 채, 손을 허우적 거리며 조금씩 나아갔다.
‘아, 현아야…………..’
현암이 마지막 힘을 다해 수면을 쳤다. 그 반동으로 순간적으 로 물 위에 떠오른 현암의 눈에, 정신을 잃고 막 물에 잠기려는 현아의 감은 눈이 보였다.
‘현아야, 내가 왔다! 현아야!’
현암은 기력을 짜내 현아에게 손을 뻗쳤다. 현암의 손끝이 현 아의 손에 닿는 순간, 폭발 소리와 함께 푸른 광채가 눈앞을 가 리며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