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국내편 2권 7화 – 영을 부르는 아이들

랜덤 이미지

퇴마록 국내편 2권 7화 – 영을 부르는 아이들


“어어! 이것 봐! 된다. 된다!”

“와, 정말 움직인다!”

“무서워.”

“조용히 해! 떠들다가 영이 떠나면 어쩌려고 그래?”

“난 무서워! 집에 갈래!”

“손 떼면 안 돼! 너 혼날래?”

초등학교 오학년인 동훈과 진기, 세희는 셋의 손가락으로 만 든 원 안에서 볼펜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서워졌 다. 그러나 무서움보다는 신기함이 그들을 자극했다. 정말 말로 만 듣던 이런 영응반(靈應盤)과 주문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하리 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진기야, 뭐라고 좀 물어봐!”

“뭘 물어보라는 거야?” 

“아무거나!”

“난 무섭단 말야, 이잉.”

“세희, 너 그치지 못할래? 진기야, 뭐라도 물어보라니깐!”

“귀신, 아니 영혼아, 아니 영혼님! 진짜 볼펜으로 대답을 해 줄수 있어요?”

갑자기 셋의 손아귀 안에서 볼펜이 가늘게 떨더니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렸다.

“진짜래! 그렇게 한대!”

“신기하다 정말! 그럼 내 이름을 맞혀 봐요!”

“그런 건 무리야. 동그라미하고 가위표밖에 못 쓴대.”

“어? 아닌데? 어어?”

볼펜이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떨리면서 종이 바닥에 엉성한 기호를 만들고 있었다. 얼핏 보아선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모양을…….

“이게 뭐지?”

“가만・・・・・・ 아, 이건 내 이름 같다! 최, 준, 아니 진, 기・・・・・・ 맞아. 글씨는 진짜 못 쓰네.”

“너만큼 못 쓰는구나!”

“아냐, 아직 미숙해서 그런가 봐! 그나저나 진짜 신기하다! 이 주문을 가르쳐 준 형의 말로는 동그라미하고 가위표밖에 못 그린다고 하던데.”

“영도 영 나름이지! 우리가 부른 이 영은 굉장히 센가 봐! 신난다!”

세희가 아직 겁먹은 눈으로 동훈을 쳐다보았다.

“뭐가 신나? 난 무서워. 그리고 추워!”

“뭐가 추워? 밤이니까 썰렁한 거지.”

“아냐, 추워. 소름도 돋고………….”

진기는 다시 조심스럽게 이름 모를 영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남자분이세요?”

볼펜이 이번에는 좀 더 자연스럽게 가위표를 그렸다. 이제 영도 조금씩 숙달되어 가는 듯했다.

“그럼 여자세요?”

볼펜이 다시 가위표를 그렸다. 진기는 어리둥절했다.

“그럼 뭐야? 여자도 남자도 아니면………..

“동물인가? 으악! 호랑이나 여우 아냐?”

볼펜이 떨리면서 화난 듯이 가위표를 크게 그렸다. 그러고는 힘겹게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음? 여, 러…… 아하! 여러 영이 같이 있는 모양이야. 몇 명이죠?”

볼펜이 엉성한 ‘3’ 자를 만들어 냈다.

“와, 셋이래! 우리랑 같다. 정말 재미있다! 우리 친구 해요!”

“뭐, 친구?”

“으앙…… 난 싫어!”

“아냐, 아냐! 재미있을 거야! 누가 알아? 우릴 도와줄지도 몰라! 재미있잖아?”

“재미? 이게 뭐가 재미있어? 난 무서워!”

“그런 소리 마. 이런 게 아무 데서나 되는 줄 알아? 해 보자니까. 영혼님, 아니 영혼님들! 그렇게 해 주는 거죠?”

볼펜이 익살맞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럼 우리 차례대로 자주 만나요!”

진기는 겁이 났지만 세희와 동훈 앞이라 빼지 못하고 위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볼펜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힘없이 옆으로 누웠다. 이제 끝난 모양이다.

“오늘 일은 비밀이다. 알았지? 이 일을 입 밖에 내면…… “

왠지 매섭게 느껴지는 동훈의 눈초리에 진기와 세희는 소름이 끼쳤다. 셋은 말없이 헤어졌다. 그러나 가슴은 한없이 두근거리 며 쿵쾅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동훈은 거의 매일같이 집에 숨어서 방문을 잠 그고 밤이면 그 영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진기는 큰소리는 쳤 지만 막상 켕기는 기분이 들어서 혼자서는 할 엄두를 내지 못했 고, 세희는 무섭다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영을 부를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만날 70점을 넘지 못하던 국어 시험에 만점을 맞은 동훈이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파리하고 피곤해 보여 세희는 동훈이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줄 알 았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동훈은 세희와 진기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화장실 뒤의 으슥한 곳으로 가더니 둘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와, 정말이더라! 국어책을 펴고 영을 불렀더니 볼펜이 시험 에 나올 페이지만 끄덕거리며 줄을 쳐 주더라구! 정말 기가 막 혀!”

그날 밤 세희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을 펴 놓고 영을 불렀으 나영은 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의아하게 여기는 세희의 눈에 방문 위에 어머니가 붙여 놓은 부적이 들어왔다.

‘아하! 저것 때문에 못 들어오나 보다!’

세희는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부적을 떼어 내고는 다시 볼펜을 손에 놓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진기도 방에 있던 성모상과 묵주를 감추었다.

세희는 울상이 된 채로 학교에 나왔다. 영을 부른 지난밤에 꾼 꿈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진기가 옆에 다가오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희야, 왜 그래?”

“응, 나 너무 무서운 꿈을 꾸었어.”

“무슨 꿈?”

“이상한 할아버지하고 다른 몇 사람이 나와서 날 막 야단치는 거야. 글쎄. 그리고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담뱃대로 날 때리는 바람에 깼는데….”

“그게 뭐 어때서? 별거 아니잖아?”

“아냐, 글쎄 깨어 보니 종아리에 멍이 들어 있었어.”

진기는 잠깐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어 넘기려 했다.

“야, 야,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자다가 어디 부딪혔겠지. 뭐. 근데 세희야, 나도 어제 됐다.”

“뭐가?”

“그 영 뭐라던가 하는 거 있잖아? 정말 신기하더라구. 나 혼 자하는데도 볼펜이 까닥거리면서….”

“그래서?”

“그래서 나도 시험 문제 같은 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런 건 묻지 말래.”

“왜?”

“그건 몰라. 그러면서 글쎄 그 귀, 아니 영이 뭐라는지 아니?”

“뭐랬는데?”

“자기 얘기는 통 안 하지만, 내가 자기의 아들을 닮았다나? 그래서 내가 좋대.”

“아들?”

“응, 웃기지?”

세희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저쪽으로 떨어진 자리에 말없 이 앉아 있는 동훈이 보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지 얼굴이 퍽 안돼 보였다. 세희는 동훈의 옆으로 갔다.

“동훈아, 너 왜 그래?”

동훈이 세희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몹시 안쓰러웠다.

괴로워하는 눈빛이었다.

“세희야, 너, 너도 그거 해봤니?”

“뭘?”

“그, 그전에 우리가 하던 그거, 집에서도 해 봤어?”

“응? 응.”

동훈의 얼굴이 더욱 흐려졌다.

“그거 하지 마.”

“왜?”

“아무튼 하지 마.”

동훈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세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동네 놀이터의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학교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놀이터였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 로 돌아가던 세희는 문득 그 그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자기를 쳐 다보고 있다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작고, 얼굴빛이 하얘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요즘 보기 드문 흰 한복을 입고 자 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은 무섭지는 않았으나 묘한 분 위기를 풍겼다. 세희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청소를 마치고 늦게 나와서인지 다른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왜 쳐다보니?”

그 아이는 세희가 다가오자 대답은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깊 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세희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쳐다보 다가 뒤돌아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이 세희니?”

세희는 놀라서 홱 돌아섰다. 그 아이가 다시 눈을 뜨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아직도 아무 표정이 없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난 널 처음 보는데?”

“너희 할아버님이 얘기해 줬어. 너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지?”

“뭐?”

“방문 위에 붙어 있던 부적 뜯었지? 그건 너희 할아버님이 손수 만드신 거야. 그런데 그러고는 영까지 부르고…………..”

세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아이가 그네에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키도 자기보다 별로 크지 않고, 얼굴도 또래로 보였는데 말하는 투는 어른 같았다.

“아까 말했잖아. 너희 할아버님에게 들었다고.”

“거짓말 마! 우리 할아버진 내가 두 살 때 돌아가셨댔어! 나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아이는 세희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행이야…………. 내일이 할아버지 제삿날이지?”

세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아이는 이상했다.

“그런가? 그런데 넌 어떻게 알지? 수상하네!”

“그래서 너희 할아버님이 네가 좋지 않은 일을 한 걸 아신 거 야. 너 어제 꿈에 뵙지 않았니? 지금도 네 옆에 계셔.”

세희의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어제 꿈 이야기는 진기에게 밖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가 두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어제 오셨다니. 게다가 지금 자신의 옆에 있다니!

“으악! 귀 귀신이 있다구?”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널 수호해 주시는 조상님에게…………….”

하여간 너, 그런 짓 다신 하지 마!”

아이가 너무 엄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세희는 마음을 가라앉 혔다. 할아버지가 세희를 퍽 예뻐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차피 영을 불러내 대화까지 한 마당에, 조상님이야 무서워할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이 들자 세희는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 무슨 짓을 말하는 거야?”

“쓸데없이 영을 불러내서 부탁하는 짓 말야.”

“너, 너 귀신이니? 어, 어떻게 그런 걸다…………….”

아이가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너희 할아버님이 방금 말해 줬대도!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겠니?”

세희는 무섭고 놀란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면 너, 너도 귀신? 아니…… 하여간………….. 너는 어떻게 돌아가신 분들과 말을 할 수 있단 거야? 볼펜도 안 쓰고?” 

아이가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는 학교 쪽을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차라리 그런 걸 몰랐더라면 나도 너희처럼 학교도 다니고 만날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아도 됐을지도……………”

아이의 눈매는 무척 서글퍼 보였다. 세희는 아까의 무서움은 잊고 불현듯 이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넌 학교 안 다니니?”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이 없어.”

“너 같은 아이가 뭐가 바빠서?”

“할 일이 많아.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어?”

“없어. 이승에서 내 시간은 이제 ………..”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빠르게 이었다. 

“이승과 저승은 원래 분리되어 있는 세상이고 그 사이에서는 원칙적으로 소통이 있어서는 안 돼. 그러니 그런 원칙을 깨고 영 에게 뭔가를 얻으려면 역시 뭔가를 주어야 한다고. 영에게 지식 을 얻으려 해 봤자 그들도 대단한 지식을 갖고 있진 않아. 그런 데도 영은 그 대가로 지독한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단 말이야. 선 한 영도 많지만, 사람에도 악인이 있듯이 악령들도 있어. 더구나 빙의까지 될 수 있으니 그런 건…………..”

세희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멍하니 아이를 보면서 대꾸했다.

“야, 너 똑똑하다.”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런 건 알 필요도 없고, 모르고 사는 게 제일 좋아. 귀신을 섬기 멀리하라, 괴력난신을 논하지 마라……………. 이걸 명심하는게 좋아.”

“?”

“하여간 넌 정말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다시는 그런 짓 해선 안돼. 알았지? 며칠 후 다시 올게.”

세희가 멍하니 있는 사이 아이는 휘적휘적 사라지고 말았다.

“나 참………… 미친 아인가.”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다.

밤이 되었다. 세희는 책상 앞에 앉아 볼펜을 손에 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제 영을 불렀을 때 오늘 또 불러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다시 해 봐?”

그러나 낮에 이름 모르는 아이가 한 말들이 자꾸 생각났다. 

“그만둘까?”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세희는 혼 자서 영을 부르는 것은 한 번밖에 성공해 보지 못했고 별다른 이 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것들을 척척 맞히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어제 약속까지 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 보자.”

동훈은 얼굴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 촛불을 바라보았다. 촛불 이 길어지면서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촛불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꼭, 꼭 그래야 하나요?”

동훈의 말은 왠지 억양이 단조롭고 이상하게 울렸다. 눈과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동훈의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울려왔다.

원수, 내 원수를 갚아 줘. 내 철천지원수를…………….

동훈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로 무서웠으나 왠지 저항할 수가 없었다. 동훈은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 악몽일 뿐이라고 믿으려 했다.

“내, 내가 어, 어떻게………….”

빌려 줘, 네 몸을.. 잠시만, 아주 잠시만……………

“그, 그건…….”

동훈은 이제 굳어져 가는 혀로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은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볼펜을 들고 정신을 모으고 있던 세희는 짜증을 냈다.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위에 부적을 다시 붙인 것도 아닌데 갑자 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희는 기겁을 하며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낮에 보았던 아이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너 어떻게 우리 집을 알았지?”

세희는 일단 귀신이 아닌 것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창을 열어 주었다. 아이는 세희의 문 위에 붙어 있던 것과 비슷한 부적을 하나 흔들면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너 또 영을 불렀지?”

“뭐? 아냐, 내가 언제!”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이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그놈을 잡아 버렸지.”

세희가 얼굴이 해쓱해져서 되물었다.

“잡아?”

“그래, 일단 이 부적에 가둬 놨어. 적당한 때에 승천하게 해 줘 야지. 혼 좀 내 준 다음에 ………….”

“호, 혼을 낸다구?”

“그래. 이놈도 별로 좋은 영은 아니야. 부유령이나 지박령은 일반적으로 질이 좋지 않아. 틈만 나면 사람의 육신을 가지려 들지.”

세희는 다리가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아이가 얼굴에서 웃음 기를 거두고는 세희에게 말했다.

“넌 운이 좋은 아이야. 세상이 워낙 어지러워 누가 영을 부르 는지 뭘 하는지 보통은 알 수 없는데, 너는 수호령이 강해서 내가 느낄 수 있었지.”

“저리 가! 무서워!”

아이가 금세 울적한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엾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자기를 도와주려고 한 것 아닌가?

귀신을 잡아 어쨌다는 말은 믿기 힘들지만,

“아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아이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지더니 이내 붉어졌다. “뭘・・・・・・ 앞으로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좋을 것 하나 없어.”

세희의 머릿속에 갑자기 동훈이 생각이 났다. 혹시………….

“얘! 근데 이를 어쩌지?”

“뭘?”

“나하고 이런 장난 같이 했던 애가 둘이나 더 있어.”

“뭐? 저런!”

“동훈이는 오늘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였는데…………….”

아이가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물었다.

“지금 한번 전화를 해 봐. 아니, 그것보다 동훈이라는 애에 대 해 설명해 줘. 투시를 해 봐야겠어.”

세희는 뭣에 씐 기분으로 그 아이에게 동훈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으며 양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뭔가 생각하더니 갑자기 외쳤다.

“이게 어찌 된 거지? 그 아이가 보이질 않아!”

“안보이다니?”

“그 아이, 지금…… 지금…….”

말도 다 잇지 않고서 아이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세희는 덜컥 겁이 났다. 동훈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걸까? 세희는 수화기를 들고 동훈이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동훈이 어머니가 받았다.

“아, 안녕하세요? 동훈이 있나요?”

“세희구나. 그래, 있지. 잠깐만 기다려.”

세희는 안심했다. 그 아이가 헛소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것도 모르고 나는 괜히…………….

“아니 얘가 어딜 갔지? 세상에! 얘가 창문으로 빠져나갔나봐!”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동훈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천둥같이 울 렸다. 세희는 급히 전화를 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저만치 어 둠속에서도 달려가는 아이의 흰 한복이 희미하게 보였다. 세희 는 반에서 여자 일등인 달리기 실력을 발휘하여 이를 악물고 뒤 를 쫓아 달려갔으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기다려! 좀 기다려 봐!”

세희는 더 이상 뛰기가 힘들어지자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아이 를 불렀다. 아이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뒤를 보고 소리쳤다. 

“시간이 없어. 잘못하면!”

세희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어깨를 잡았다.

“기다려! 그리고 설명을 해 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이도 숨이 찬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대답했다.

“동훈이라는 아이가 위험해! 그 애에게 원한령이……………. “

“원한령?”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아! 얼른 가야돼!”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고?”

세희가 잡고 놓아주지 않자 아이는 울상이 되어서 떠들어 댔다. 

“아까 투시를 했는데 동훈의 몸에 떠돌던 원한령이 빙의되어 버렸다구! 그 영은 동훈의 몸을 이용해서 자신의 복수를 하려는 거야!”

“빙의?”

“씌었단 말야! 잡지 마! 만약 늦으면, 동훈이가 살인자가 될지도 모른다구!”

“동훈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야?”

“지금 동훈이는 동훈이가 아니라니까! 다른 녀석이 몸을 차지 해서 들어앉았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리고 죄는 동훈이가 뒤집어쓰게 돼!”

아이는 세희를 뿌리치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세희는 숨을 가 다듬으려 했으나, 지금 서 있는 곳이 인적 드문 공사장이라는 것 을 깨닫고는 왈칵 겁이 났다.

“같이 가!”

세희는 아이의 뒤를 쫓아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이상하게 지 나가는 사람들조차 보이질 않았다. 어느덧 큰길이 보이는 데까 지 달려왔는데 눈앞이 번쩍하면서 뜨거운 열기가 밀려왔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세희와 아이가 충격으로 땅에 뒹굴었다. 그 앞은 주유소였다. 주유소가 폭발한 것이다.

“이런 늦었어!”

아이가 소리치면서 일어나 달려갔다. 불이 사방에 퍼지면서 여기저기로 삽시간에 번졌다.

“안돼, 위험해!”

세희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던 차들이 하나둘씩 멈 추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으나, 워낙 열기가 지독하고 또 폭 발이 있을지 몰라 아무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돌아와, 어서!”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으나 아이는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그 아이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자 이상한 불빛이 몸을 둘 러싸는 듯했으나 그런 것은 신경 쓸 계제도 아니었다.

“이런 망할!”

준후는 피화부(符)*와 주문을 발휘하여 몸을 보호했으나 얼마 못 버틸 것 같았다. 기름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주유소 안은 생지옥이었다. 준후는 앞에 보이는 건물 문으로 뛰어들어 갔다. 다행히 안으로는 불길이 침투하지 않아 연기와 열기만 심할 뿐이 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준후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 가지고 있으면 불길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부적.


한 아이, 동훈이로 보이는 아이가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두 사람의 몸에 석유를 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리한 것에 찔린 듯 바닥에 피가 흥건했고 눈을 크게 뜬 채 죽어 있었다. 동훈은 동 작이 뻣뻣한 것이 꼭 기계 같았다.

“멈춰!”

준후가 소리치자 동훈, 아니 동훈의 몸을 차지한 원한령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희게 뒤집어져 있었다.

“이 고약한 놈, 아이를 이용해 이런 짓을 하다니!”

동훈의 입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고 욕을 해도 좋다. 나는 원수를 갚았다. 내 손, 내 손으로, 흐흐흐.”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지옥에 처박아 주지!” 

동훈은 뒤로 조금 물러섰다. 준후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애당초 각오했던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원한을 갚았다. 흐흐흐……”

“썩 그 아이의 몸에서 나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꺼내 주겠다!”

“너무 심하게 굴지 마라. 이 아이에게 죄를 씌우진 않을 테니. 증거를 없애려고 이렇게 불까지 낸 것 아니냐.”

“닥쳐!”

준후가 이를 갈면서 수인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동훈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남자의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준후는 주문을 외운 후 힘을 모으면서 외쳤다.

“사악한 놈, 이 아이가 어떻게 불길을 빠져나간다는 거냐? 앞 뒤 가릴 줄 모르는 철면피! 지옥으로 떨어져라!”

준후가 일갈을 하자 허공에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동훈의 몸이 풀썩 땅에 쓰러졌다. 준후가 한숨을 쉬며 동훈에게 다가서려는데 주유소의 석유 탱크가 폭발했는지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길이 밀려들었다. 준후와 동훈은 불길의 압력에 밀려서 건물의 안쪽에 처박혔다.

“으음…….”

머리를 부딪힌 동훈이 의식을 차리는 듯했으나 완전히 깨어나 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이제 깨진 창문과 열린 문으로 불길이 밀려들고 있었고, 동훈이 뿌린 기름통에도 불이 붙었다. 준후는 기름통에 불이 옮는 것을 보고는 동훈을 끌고 반사적 으로 구석으로 향했다. 등 뒤로 서늘한 쇠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뒷문이었다.

“살았다!”

열기와 연기가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기름통이 터지지 않더라 도 얼마 견디기 어려운 판이었다. 준후는 다급하게 철문을 열려 했으나 잠겨 있었다.

“이걸 어째!”

기름통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조금만 더 있으면 불길은 구석에 쌓인 윤활유통까지 번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할수 없다!”

준후는 인드라의 뇌전을 양손에 일으켜서 문고리에 대고 쏘았 다. 그러나 단단하게 쇠로 만들어진 문고리는 조금씩 흔들리면 서도 좀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다.

두번, 세번………….

준후는 이를 악물고 계속 문을 강타했다. 불은 준후의 바로 등 뒤에서 혀를 날름대고 있었다.

“됐다!”

준후가 여섯 번째로 내쏜 번개가 문고리를 부수는 순간, 쌓여 있던 기름통들이 일제히 폭발하면서 준후와 동훈의 몸을 바깥으 로 날려 버렸다. 준후와 동훈은 뒷마당인 듯한 공터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준후는 사람들이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몸 을 보니 별로 상처는 없어서 걸을 만했다.

‘어떻게 하지?’

이런 일은 알려지지 않는 게 제일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동 훈의 잘못이 아니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을 피 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준후는 쓰러진 동훈을 놔두고 절룩거리 며 길옆의 쓰레기통 뒤로 몸을 숨겼다. 주유소가 연이어 폭발음을 내고 있었다. 시체가 나오더라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준후는 달려온 사람들이 동훈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는 주 유소 안에서 죽은 두 사람의 영이 안식하기를 빌었다.


세희는 동훈의 병문안을 다녀오면서 내내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동훈은 의식을 잃은 채 주유소의 뒤뜰에서 발견되었 고, 사람들은 동훈이 지나가다가 불에 쐰 걸로 알고 있다. 그런 데 주유소 안에서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지만, 그 아이의 시체 는 나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귀신이었을까? 그리고 동훈이 그 시간에 아무 기억도 없이 주유소 근처를 방황한 것은 또 무슨 까 닭이었을까? 그 아이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세희 역시 하나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동훈의 상태는 많이 회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동훈은 멀 쩡하다가도 잠만 들면 자신이 어떤 남자 두 명을 처참하게 죽이 는 악몽에 시달려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얼 핏 들었다. 대체 동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아이는?

“세희야, 엄마 일 좀 거들어 줄래?”

“예? 예, 엄마…….”

“오늘이 할아버지 제사잖니. 너도 도와주렴.”

아, 그렇지. 세희는 복잡한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감추어 두었던 부적을 방문 위에 도로 붙이고 밖으로 나갔다.

제사상 위에 놓인, 할머니와 같이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 젊으셨을 때 찍은 사진 같았다. 이제 다시 보니 사진의 모습이 꿈에 나왔던 무서운 할아버지의 모습과 정말 닮아 있었다. 세희 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그런 짓 안 할게요. 할아버지.’


진기는 오늘도 자기와 친해진 영을 불러냈다. 전부터 그 영은 같이 가자고 했다. 자신이 아들처럼 느껴진다고. 처음엔 무섭고 어이도 없었지만, 어쨌든 가련하지 않은가? 진기는 오늘만 허락 을 해 주고 어떻게 하는지 볼 심산이었다. 자기를 따라가면 아주 잘해준다고 말했다. 볼펜이 움직이고 있었다. 왠지 졸리다. 의 식이 점점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이 사람을 따라가고 있는 건가?

진기의 몸이 식어갔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