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2화 – 부름 (Summoning) 1 : 번민
4672년 후, 서기 1998년
번민
-무엇을 원하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한쪽 구석에서 그가 물었다.
-무엇을 원할지조차 모른다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다른 쪽 구석에서 그가 대답했다.
-무엇을 듣고 싶은가? 무엇을 알고 싶은가?
한쪽 구석에서 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듣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싶은지조차 잊었다네.
다른 쪽 구석에서 그가 다시 대답했다.
-그러면 가세. 다시 가보세.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에서 출발했다.
…………나는 어린 양이 그 일곱 봉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레 같은 소리로 “나 오너라” 하고 외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흰말 한 필이 있고 그 위에 탄 사람은 활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 자로서 월계관을 받아 썼고, 또 더 큰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나 아갔습니다.
-이것인가?
-가만 조금 더 보세.
…………… 어린 양이 일곱 번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약 반 시간 동 안 하늘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 앞에 서 있 는 일곱 천사를 보았는데 그들은 나팔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 니다.
-이것인가?
-가만! 가만!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우박과 불덩이
가 피범벅이 되어서 땅에 던져져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탔으며, 푸른 풀이 모두 타버렸습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불붙은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서 바닷물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닷속 에 사는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모든 선박의 삼분의 일이 산 산조각이 났습니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큰 별 하 나가 횃불처럼 타면서 떨어져 모든 강의 삼분의 일과 샘물을 덮 쳤습니다. 그 별의 이름은 쑥이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물의 삼 분의 일이 쑥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쓴 물을 마시고 죽었습니 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태양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 분의 일이 어두워졌으며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의 삼분 의 일도 마찬가지로 빛을 잃었습니다.
나는 또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 한가운데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큰 소리로 “화를 입으리라. 화를 입으리라. 땅 위 에 사는 자들은 화를 입으리라. 아직도 천사들이 불 나팔 소리가 셋이나 남아 있다” 하고 외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들이네.
-알고 있다네. 그러나………… 그러나………………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 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 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 났습니다.
이번에는 크고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 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 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 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 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 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 로 들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일세…………….. 아아, 바로 이것일세………..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수천 번이나 생각했던 것이 아니던 가……………. 어떻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인가?
…………… 그 용은 자기가 땅에 떨어진 것을 깨닫자 그 사내아이를 낳은 여자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 를 받아 가지고 있어서 광야에 있는 자기 처소로 날아가 거기에서 삼 년 반 동안 그 뱀의 공격을 받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뱀은 여자의 뒤에서 입으로부터 강물처럼 물을 토해 내어 여자를 휩쓸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땅이 입을 벌려 용이 토한 강물을 마시어 그 여자를 구해 냈습니다. 그러자 용은 그 여자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 키고 예수를 위해서 증언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가 바닷가에 섰습니다.
-이것은 무슨 표상인가? 그에 담은 진리는 무엇인가?
-모두에게 가까운 것이며, 모두가 알고 있는 진리일 뿐일세. 단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또 나는 짐승 하나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 다. 그 짐승은 뿔이 열 개이고 머리는 일곱이었습니다. 그 뿔에 는 각각 관이 하나씩 씌워져 있었으며 그 머리마다 하느님께 모 독이 되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았는데, 발은 곰의 발과 같았고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짐승은 그 용으로부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 짐승은 머리 하나에 치명상을 입어서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 상처가 나았습니다. 이것을 본 온 세상 사람들은 놀랍게 여기며 그 짐승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에게 권세를 준 용을 경배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짐승에게도 절을 하며 “이 짐승처럼 힘센 자가 어디 있는가? 누가 이 짐승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하
고 외쳤습니다.
-그만!
-왜 그러나?
-그만하게, 그만…………. 나는 알 수가 없네. 도저히 알 수가 907…….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박 신부는 읽고 있던 성경을 덮었다. 더 이상 읽을 필요조차 없었다. 어느 틈엔가 방금 전까지 자신을 둘 러싸고 있던 주변의 어둠은 사라지고 희미한 빛이 보였다.
용, 그리고 짐승. 짐승의 숫자는 육백육십육. 그 짐승은 용에 게 받은 권세로 세상을 미혹시키고, 거의 모든 사람을 그의 발아 래에 둔다. 그리고 일곱 나팔에 못지않은 하느님의 분노가 일곱 대접에 담겨 나타난다.
첫째 천사가 대접을 부으면 짐승의 낙인을 받은 자들과 짐승 의 우상에게 절을 한 자들에게 독한 종기가 생긴다.
둘째 천사가 대접을 부으면 바닷물이 피가 되고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는다.
셋째 천사가 대접을 부으면 모든 물이 피가 되고, 넷째 천사가 대접을 부으면 해가 불로 사람을 태우며,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부으면 짐승의 나라가 어둠 속에 파묻힌다. 여섯째 천사가 대접 을 부으면 강물이 마르고 세 악령이 나타나 하르마게돈으로 모 든 왕을 모은다.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부으면 대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이 파괴된다………….
무섭고도 무서운 예언이었다. 신의 분노는 겹치고 겹쳐서 봉 인으로, 나팔 소리로, 대접으로 중복되어 세상을 거듭거듭 파괴 한다.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처절하게 파괴한다. 마지막으로 바 빌론의 탕녀가 나타나 남은 세상을 암흑에 빠뜨린다. 그리고 하 르마게돈에서 선과 악의 최후의 싸움이 펼쳐진다.
성경의 맨 마지막 장인 『요한 묵시록』은 말세의 모습을 그렇 게 전한다. 벌써 수천 년이나 내려온 이야기. 아직까지도 누구인 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눈앞에 나타나 보인 환상을 기록한 계시. 이 묵시록은 성 경 최후의 장인 동시에 가장 해독하기 어렵고 가장 두려운 장으 로도 알려져 왔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 리라는 예시를 받은 바가 있었다. 그때가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
* 선과 악의 최후의 대결장으로 묘사된 장소로, ‘아마겟돈’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여기서는 박 신부가 믿는 가톨릭 성서에서 하르마게돈으로 표시하므로 그 발음 을 따랐다.
‘정녕 이렇게 되고야 마는 것인가? 구원의 길은 없는가?’
전해 들은 도혜 선사와 한빈 거사의 이야기. 징벌자와 구원자 의 이야기. 박 신부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나, 불교나 도교의 이야기라 해서 그것을 무시할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그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며,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 말세의 양상이 다가오기 에 이 두 가지의 예언이 일치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앞 서 천사의 나팔 소리와 봉인과 대접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박 신부의 앞에는 그에 대해 나름대로 풀이하고 추측하여 해 석한 사람들의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것 중 어느 하나도 진실을 담고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몇십 세기 동안 전해져 내려온 성경이 그릇된 일을 기록했다고 도 믿지 않았다.
문제는 풀이였다. 사람들은 글자에 담긴 암시나 상징을 찾으 려 애썼지만 박 신부의 생각은 달랐다. 박 신부는 일단 순수하게 요한이라는 사람이 예정된 인도에 따라 미래의 환영을 보았고, 그 환영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본질적 인 문제는 더더욱 커지는 셈이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인 요 한은 거의 이천 년 전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든 수천 년 후 의 미래를 보고 기록하게 된다면, 미래의 달라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환상적으로 묘사할 것이 분명했다.
가령 요한이 탱크를 보았다고 하면 ‘괴물’이라 할 것이다. 탱 크가 달리는 것을 보았다면 ‘먼지와 굉음을 내며 달리는 괴물’, 포를 쏘는 것을 보았다면 ‘코로 불을 토하는 괴물이 될 것이다. 그것이 쇠로 만든 인공물이라는 것까지 알려 주어도 고작해야 ‘먼지와 굉음을 내고, 코로 불을 토하는 강철 괴물’이 될 것이었 다. 그것을 본 후대인은 환상적으로 과장된 코끼리 정도로 여길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무리 당사자가 복잡한 상징이나 은유 없이 나름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기록했다 해도, 그 기록은 후대 인들에게 철저히 암호화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박 신부는 그것을 캐내려 하고 있었다.
박 신부는 과거 일본에서 죽어 가다가 빛나는 광채 속에서 할 일이 남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마지막 날이 곧 오리라는 목소리 를 들었다. 그때 이후로 박 신부는 침중하게 말세가 다가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숙적이던 마스터를 물리쳐서 세계를 휩쓸 뻔한 홍수를 막기는했으나 그것은 하나의 위기였을 뿐, 신이 정한 심판의 말세는 아니었다. 심판의 말세에 대비해 박 신부는 자신의 모든 생을 바치 려고 각오하고 있었다.
『요한 묵시록』 외에도 박 신부가 참조한 말세에 대한 책은 수 도 없이 많았다. 힌두교의 비전, 불법에서 전해진 밀의, 각국의 신화, 하다못해 북구 신화의 라그나뢰크(Ragnarök)에다가 유사 종교나 사이비 종교의 종말론까지도 연관시켜 보았다. 사람들이 과학 시대라고 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언에 귀가 솔깃해지고 점을 치러 다니는 형편이니, 유사 이래 얼마나 많은 예언가가 있 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직 접적인 예언서를 남기지 않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예언서가 있 었고 사라져 갔겠는가. 「해동감도 있었다. 박 신부와 현암, 준 후와 승희에 대해서까지 예언한 그 책 말이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묵시록의 해석으로 유명한 바클레이는 성서에 정통한 요한이라는 사람이 네로 황제의 뒤를 이은 도미티아 누스 황제 때 밧모섬에 유배되어 묵시록을 썼다는 설을 폈다. 그에 대해 일본학 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등은 사도 요한이 묵시록을 썼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맞든지 간에, 묵시록을 지은 요한이 거의 이천 년 전의 사 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준후가 수년 동안 나름대로 연구했으나 『해동감결의 마지막 부분은 풀이할 수 없었다. 지금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지 문 자와 녹도문(圖)에 정통한 준후였지만, 그 부분은 복잡하게 암호화되어 있어 풀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 신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경외하 는 성경의 『요한 묵시록을 해석하는 길뿐이었다. 하지만…………
“아아……. 주여. 정녕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박신부로서는 『요한 묵시록마저 해석할 수 없었다. 수백 가지의 가설은 검토할 수 있었지만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늘 에서 쏟아지는 불은 전쟁에서 떨어지는 미사일이나 인공위성, 나아가서는 유성일지도 몰랐다. 세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짐승의 숫자인 육백육십육이 바코드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짐 승이 거대한 컴퓨터라는 설도 있었고, 용이 군권주의의 독재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이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박신부가 홀로 제주도 한라산의 깊은 구석에 틀어박혀 ‘묵시 록’을 붙잡고 연구한 지도 넉 달이 지났다. 그곳은 바닷가의 거 칠고 검은 바위에 뚫린 암굴이었고, 근처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 으며 다가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박 신부는 단 한 번도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성하지 않은 다리는 물론, 성한 다 리마저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연구와 묵상에 골몰했다. 하지 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박 신부는 기도력을 발휘했다. 무아지경에 들어가 「요한 묵시록』의 상황을 따라가려고 하였다. 기도력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요한이 보았던 것을 자신도 보기 위해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패였다. 몸이 둘로 나 뉜 것 같은 몽환 속에서 박 신부는 다만 이미 다 외우고 있는 요 한 묵시록』의 내용을 귀로 듣고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원했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지금, 박 신부는 자그마치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아……………””
박 신부는 길게 탄식하면서 상자를 쌓아 대충 만든 책상의 책 들을 우르르 쓸어 버렸다. 정돈할 생각도, 그럴 힘도 없었다. 무 •력감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과거 미라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을 때의 무력감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 있으면 심판의 때가 올 텐데…………. 그때가 올 텐데………………
박 신부는 흐느끼면서 암굴 바닥을 주먹으로 쾅쾅 쳐댔다. 아 무것도 할 수 없고, 애써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무 력함과 허탈감…………. 밖에서는 파도가 제주도 특유의 검은 모래 를 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갈매기 울음소리조차 들리 지 않았다.
박신부는 울먹이다가 손을 마주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허락해 주소서…………. 주여, 허락해 주소서. 누구보다도 인간 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게 보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그때였다. 밝은 빛이 박 신부의 감은 눈에 느껴진 것은. 그리 고 바깥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박 신부의 귓전에 들 려온 것은…………….
박 신부는 놀라서 눈을 떴다. 눈앞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도 거룩한 빛이 흐릿한 몸체를 둘러싸고 비추고 있었다.
바로 앞에 빛무리가 떠 있는 것을 보고 박 신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너무 긴 시간을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헛것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아니, 저 불빛은 자신을 홀리려는 사악한 그 무엇이 아닐까? 워낙 오랫동안 퇴마행을 한 탓에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휘황한 빛에서 는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 신부로 하여금 절 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엄숙한 느낌이 강했다. 박 신부는 조금 놀라다가 비로소 기억해 냈다. 이 빛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떠 돌던 때 보았던 빛과 흡사했다.
“아……………. 그렇다면……………”
또다시 박 신부의 귀에 방금 전 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빛은 꿈틀거리며 없어질 듯 희미해 졌다. 박 신부는 퍼뜩 놀라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조금 전 까지의 번민을 잊고 다만 황홀하고도 거룩한 광채를 뿜는 빛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두려워 그리로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 다. 그러자 빛은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계속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을 외우자 무아지경 의 상태가 되어 저절로 눈이 감겼다. 눈을 감아도 빛은 더더욱 환하게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그리고 빛의 가운데가 서서히 열리면서 아직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색과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 이것인가. 이것이……………..’
박 신부는 자신의 기원이 드디어 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침내 과거 요한이 보았던 광경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기적이 었다. 기적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와 박 신부의 신경을 건드 렸다. 순간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소리를 듣지 않으 려 애썼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자 조금 마음이 흔들렸는지 서서 히 열리던 보일 듯 말 듯한 빛의 틈이 닫혀 버렸다.
‘유혹아, 꺼져라…………… 사탄이여, 물러가라……………!’
박 신부는 속으로 외치면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이 아니던가? 그 구슬픈 소리는 자신을 미 혹시키려는 사마(魔)의 소리가 분명했다. 듣지 말아야 한다. 귀를 막고 떠나보내야 한다. 그러나 눈앞의 빛은 박 신부가 기를 씀에도 불구하고 점점 닫혀 갔다. 평소라면 무아지경에 빠질 정 도로 정신 집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흐트 러지고 정신 통일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중대한 일인데……………… 그토록 간구하고 간구하던 기적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데 말이 다! 그 울음소리라는 것은 도대체 왜……………!
이제 그 빛은 가운데를 열고 계시를 보이기는커녕 빛 자체가 사그라져 가고 있었다. 박 신부는 분노를 느꼈다. 이러한 커다란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 한낱 아무것도 아닌 울음소리 하나로 사라지려 하다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박 신부는 빛이 사라져 가자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도대체 뭐냐? 사라져라! 사라져! 그리고…………… 소리를 멈춰 라! 입 닥쳐!’
그 순간, 박 신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 았다. 그 울음소리・・・・・・ 그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듯 작고도 가 냘픈 울음소리였다. 혹시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라면? 만 약 그렇다면? 아니다. 박 신부는 생각을 고쳤다. 이 근처는 사람 들이 거의 오지 않는 외진 곳이니 그런 소리가 들려올 리 없었 다. 분명 자신을 유혹하려는 사악한 것의 술책일 것이다. 그렇게 박 신부는 스스로를 타이르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빛으로 고개 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박 신부는 갑자기 힘을 잃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무엇인가・・・・・・ . 나는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자였던 가?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박 신부의 가슴이 저리듯 아파 왔다. 그랬다. 아무리 세계의 안위가 달린 문제라고 해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저 울음 소리를 그냥 들어 넘겨서는 안 된다. 저것이 나를 꼬여 내려는 수작일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귀를 막으려 했다…………..
박신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슬픔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다시 한번 무력감을 느꼈다. 뼛속까지 치미는 무력감, 예전에 느꼈던 무력감보다 몇 배나 더 큰 혐오감이었다. 박 신부는 힘이 모자라 는 것에 항상 무력감을 느껴 왔지만, 이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무력감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대의를 위한답시고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행위는 박 신부가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항상 믿음을 가지고 가장 밑바닥에서부 터 사람들을 구하려 애써 오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박 신부는 더더욱 괴로웠다. 인간 전체의 구원이라는 허명(虛名)에 사로잡 혀 작은 것을 등한시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박 신부는 눈물을 흘리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을 떴다.
눈앞에는 황홀한 빛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박신 부는 쓸쓸히 그 빛을 향해 고개를 숙인 다음, 힘없는 걸음걸이로 동굴 밖을 나섰다.
‘나는 자격이 없다. 나에게는 그런 계시를 받을 자격이 없 다…………. 이제는…………… 이제는 끝이다……………..’
박신부가 동굴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빛은 깜박하고 빛나다 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박신 부는 좌절감에 몸이 비틀거려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끌어모아 굳어 버린 한쪽 다리를 끌고 절뚝거리며 달렸다.
제주도 특유의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은 몹시 거칠어서 발을 한번 헛디딜 때마다 미끄러져 옷이 찢기고 몸에 상처를 냈다. 박 신부는 구르다시피 하여 순식간에 벼랑 아래로 내려섰다. 벼랑 아래에는 역시 제주도 특유의 검은 모래사장이 끊임없이 파도 치는 검은 바다에 맞닿아 있었다. 주위는 달빛도 없이 어두웠고 쏴쏴 하는 파도 소리만이 거센 바람 소리와 더불어 사방을 메우 고 있을 뿐, 땅도 바다도 하늘도 온통 검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슬픈 울음소리는 어느새 사라졌는지, 이제는 들리지 않 았다.
“어디 있소? 누구요!”
박 신부는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었 다. 메아리도 없었다. 음산한 파도 소리만이 화답하듯 들려올 뿐.
“어디에 있소오! 누구요!”
박 신부는 더욱 목청을 높여 소리를 치고 귀를 기울였다. 그 러자 저쪽에서 비명 비슷한 것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절뚝거리면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불편한 다리를 끌 고 별빛조차 없는 밤에 모래사장 위를 뛰는 것은 벼랑을 굴러 내 려오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 박 신부는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몇 번이나 넘어져 뒹굴면서도 달렸다. 몸은 어느새 바닷물에 흠뻑 젖어 갔다.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도와주어야 한다. 도와줘야 한다…..’
검은바다만큼이나 박 신부의 마음을 검게 물들인 부끄러움이 그의 몸을 채찍질하며 재촉했다. 박 신부는 달려갔다. 계속 구르 고 넘어지고 물에 빠지면서도 달려 나갔다. 모래사장 곳곳에 솟 은 거친 현무암에 찍히고 넘어지면서도 달려갔다. 입에서 단내 가 나고 머릿속이 휭휭 돌 만큼 숨 가쁘게 달리다가 박 신부는 풀썩 차가운 물속으로 넘어졌다. 정신이 아득해져 올 때, 박신 부의 귓전에 또다시 그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요!”
박 신부는 고개를 솟구치면서 외쳤다. 이제 보니 그 소리는 바 닷가가 아니라, 바닷가에 면한 어느 검은 벼랑쯤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고, 조그만 불빛조차 없는 검은 바위뿐인 벼랑 중턱에서…………. 박 신부는 암담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곧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달렸다.
몸을 움직일 기력조차도 남지 않을 만큼이 되어서야 박 신부 는 벼랑 중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가 벼랑에 올 라섰을 때, 흐느끼는 것 같던 울음소리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기척이나 불빛 같은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일까?
박신부는 의아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달빛조차 없는 밤에 시커먼 바위산에서 제대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신부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가쁜 숨을 조절하려고 애쓰 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심 놀라면서 그는 눈을 떴다. 마음이 섬뜩해졌다. 이런 일은 정 말 처음이었다. 승희와 같은 투시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 령의 힘을 통한 영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감고 정신을 모으 면 주변 상황을 어느 정도는 세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박 신부는 조금의 능력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보통의 예민한 사람만도 못한 듯했다. 깜짝 놀라면서 다시 눈을 감았으 나 상황은 여전했다. 별안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내 기도력은 성령의 힘에 의한 것……………. 큰 것을 본답시고 작은 것 을 버리려 했던 나는 이미 성령의 힘을 받을 자격이 없다………….. 성령의 가호가 나를 떠났구나………………’
박신부는 ‘아아’ 하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면서 주먹으로 날카로운 바위를 내리쳤다. 혹시나 꿈은 아닐까 했지만 절대 꿈 이 아니었다. 이제 박 신부는 아무런 능력도 힘도 가지지 못한, 힘없고 다리까지 저는 지친 노인일 뿐이었다. 주먹이 터져 손에 서 피가 흐르는 듯했지만 박 신부는 계속 바위를 내리치며 울었 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순간 박 신부는 다시 울음소리를 들었다. 흐느끼는 듯한 울 음소리. 그 소리는 기이하게도 점차 커지며 박 신부 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박 신부는 통곡하다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 박 신부 앞에 검은 덩어리 하나가 떠 있었다. 슬픈 울음소리는 점차 변하더니 급기야는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로 변했다.
박 신부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사악한 유혹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은 유혹에 빠져서 가졌던 힘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검은 기운이 계속 깔깔거리고 웃으며 서서히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갖추어 갔다. 박 신부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 틈엔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에 굳게 결박된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더구나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사악한 힘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너무나 서글프게도, 지금의 박 신부에게는 그것이 사 악한 힘에 의한 것인지 알아낼 힘조차 없었다.
박 신부의 몸은 계속 허공을 떠올라 수십 미터나 되는 높이까 지 솟구쳐 올라갔다. 그와 더불어 영능력만이 아니라 그나마 남 아 있던 육체적인 힘마저도 빠져나갔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 딱할 힘마저도 없어진 것이다.
검은 형체가 박 신부의 앞에 떠올라 깔깔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귀로 들리는 소리보다는 영적인 울림 같았으나 지금의 박신 부는 그것조차 구별할 수 없었다. 다시 형체가 깔깔거리더니 갑 자기 나직한 인간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기억하나, 박 신부?”
박 신부에게는 대답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은 것이 누 구인지, 무엇인지 꿰뚫어 볼 영능력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자신 과 다른 힘을 느낄 수 있었지만 사악한 것인지조차 선명치 않을 정도였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 노력하면서 박 신부 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검은 형체가 말했다.
“너 자신을 이제 알겠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지.”
검은 것이 깔깔거리듯 눈앞을 어지러이 오가며 계속 떠들어 댔다.
“언젠가 네가 인간의 위대함을 말했지? 그래, 이게 그 위대함 이야? 작은 장난 하나로 이렇듯 쉽게 뭉개져 버리는 것이 그 위대함이야?”
박신부는 눈을 감았다.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이 느껴지자 아예 체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힘, 기도력, 말세를 막을 수 있 는 능력,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는 이제 쓰레기일 뿐이잖아. 아무것도 아니고.”
박 신부는 욕을 듣자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맞다.
나는 이미 여러 번 비슷한 경험을 겪었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스 스로를 과신했던 것이다. 스스로의 처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 고, 얻은 능력마저 간수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찌 말세를 막겠는가……………..
박 신부는 욕을 하는 검은 것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끝까지 잘난 척은 죽을 테냐? 아직 죽으면 안 되잖 아. 쓰레기지만 뭔가 고귀한 게 남아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 잖아. 그렇다면 발버둥 쳐야지. 죽고 싶어? 죽여 줄까? 안 되지? 그러니 빌어. 나에게 빌라구. 어서! 안 그러면 없애 버릴 거야.” 박 신부의 몸이 일순 조금 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그렇지만 박 신부 표정은 담담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기도 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검은 형체가 움찔하며 외쳤다.
“아아…………. 짜증나네! 그러면 맘대로 해.”
다음 순간, 박 신부의 몸은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쏜살같이 아 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쪽은 검은 현무암투성이 바위 지대였 다. 박 신부는 아찔할 정도의 속도를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했던 최후치고는 너무 싱겁군. 아멘…………..
현암과 준후가 떠올랐다. 승희도, 연희도, 윌리엄스 신부도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지나간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생각하다가 박 신부는 속으로 속삭였다.
‘모두 안녕 안녕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