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3권 17화 – 방황하는 유대인 7 : 아하스 페르츠의 정체
아하스 페르츠의 정체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폭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두 번, 세 번 기폭 장치의 스위치 를 비틀어 댔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 기폭 장치에 달린 램프는 스위치를 돌릴 때마다 노란색 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어 점멸되었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까 월향검에 배낭이 잘리면서 기폭 장치가 바닥에 떨어져 고 장난 것일까?
그 순간 노인은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 섰다. 아무리 노인이 고수일지라도 그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있었으며, 여자가 기폭 장치를 작동시키는 순간 그는 이제 모 두 죽는다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이 어지 러워졌다. 결국 그 찰나에 청홍검을 제대로 피하지 못한 채 지팡 이로 막게 되었다.
그러나 청홍검과 지팡이가 정통으로 부딪히자 지팡이는 청홍 검의 예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나 버렸다. 순간 노인은 반사적으로 뒤로 훌쩍훌쩍 몸을 날려 칼에 베이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현암을 이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되고 말았 다. 더구나 자신의 두 부하까지 죽고 말았으니 현암 편의 사람들 이 다 같이 자기에게 덤벼들게 아닌가?
노인은 길게 탄식하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압당한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기폭 장치가 작동되지 않자 여자는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방심하는 순간 을 마하딥이나 시켈, 우 사부가 놓칠 리 없었다.
그들 셋은 인도인 세 명과 싸우기에는 조금 힘이 들었지만 여 자 한 명을 셋이 협공한다면 여유 있게 이길 수 있었다. 하물며 여자는 반쯤 얼이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세 명은 동시에 한방씩 날려 여자를 즉시 쓰러뜨리고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백호도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현암은 허공에 검법을 계속 휘두르면서 주 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숨을 몰아 쉬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현암을 바라보았다. 노인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윽고 파사 신검의 초식이 다시 한번 끝을 맺자 현암은 검을 곧추세우고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암 씨?”
백호가 현암을 부르자 현암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격전을 치르고 난 다음인데도 현암의 몸에는 원기가 충천했고, 기분이 아주 개운했다. 노인과 격전을 치르면서 현암의 무술이 한 단계 더 상승했다는 것을 현암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제 현 암은 검도에 있어서도 일종의 경지에 들어간 셈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 왜 노인이 주저앉아 있는지는 즉각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암은 멍한 듯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때 구멍에서 해밀튼이 천천히 줄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그 는 상당히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가 올라오자마자 아 래쪽에서 동굴이 무너지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벽이 한참 동 안이나 흔들리며 먼지가 자욱해졌다.
“모두들 괜찮습니까?”
먼지가 좀 가라앉은 후, 해밀튼이 입을 열자 우 사부가 빈정거리며 받았다.
“다 끝났습니다. 끝난 줄 알고 올라오신 게 아니던가요? 우리는 다 죽을 뻔했소이다.”
그러나 해밀튼은 마냥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오. 그러나 나는 애당초 도움이 안 되는지라…………….”
그러면서 해밀튼은 주저앉은 노인에게 다가가 뭔가 물어보았다. 그 말은 현암이나 백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인 도어 같았다.
“해밀튼 씨는 인도어도 아시는군요.”
백호가 현암에게 슬쩍 말하자 현암이 중얼거렸다.
“히에로글리프도 아는 분인데, 어련하겠어요.”
그때 현암은 어떤 생각에 골똘해 있었다. 예상보다 너무나도 의외의 일이었지만…………….
‘정말 그렇단 말인가? 그렇다면……………’
해밀튼과 노인의 대화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인도어를 조금 알아듣는 시켈만이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 사부가 시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어 봤지만 시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시켈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 다. 조금 전까지 악전고투를 겪으면서 상당한 상처를 입었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던 시켈이 대번에 안색이 변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시켈은 마하딥을 끌고 저만치로 가더니 둘이 뭔가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안색이 변하기는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또 완전히 제압 당해 쓰러진 여자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리더니, 몸을 부르르 떨 면서 끝내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 둘은 극도의 공포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말 한마디로 그들 같은 고수를 그토록 두렵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 인가?
“대체 뭡니까?”
우 사부는 기이하기도 하고 뭔가 자신만 소외당하는 것이 억 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백호와 현암에게 물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백호와 현암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점차 얼굴이 창백해지며 와들와들 몸을 떨더니, 마침 내 미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번이나 가로젓다가 노인은 갑 자기 확 하고 입에서 선혈을 내뿜었다.
“어?”
백호와 우 사부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현암은 노인이 스스로 죽을 작정으로 몸 안을 격동시켰다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노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인도의 내공 수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 인의 공력 수준은 굉장했다. 호흡법으로 얻어지는 내공 수련법 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도 있었다. 그렇다면 스스 로 공력을 흩은 다음 일종의 주화입마 상태로 들어가 자결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현암 자신도 주화입마를 여러 번 당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암이 노인에게 뛰어들자 백호와 우 사부가 깜짝 놀라는 표 정을 지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암은 노인의 등에 양손을 얹으면서 커다랗게 외쳤다.
“저 여자가 자살하지 못하게 해 주시오!”
백호가 현암의 말에 놀라 달려가 보니 여자는 막 혀를 깨물고 있었다. 급한 김에 백호는 재빨리 여자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겨 입을 벌리게 했지만 이미 혀는 반쯤 잘려 선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급히 후송만 한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때 우사부가 현암에게 소리쳤다.
“뭐하는 겁니까? 그들을 살려서 뭐하게요?”
하지만 현암은 대답할 수 없었다. 현암은 여러 번 주화입마 에 빠진 경험을 살려 노인의 몸속 공력을 자신의 막강한 공력으 로 바로잡아 보려 했다. 하지만 현암은 그런 방법에 익숙하지 않 은데다 노인의 공력 또한 대단한 수준이라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노인은 공력을 흩는 지독한 고통에 거의 혼절해 시체처럼 무기 력해졌다. 그러나 그 안에서 충돌하는 내공력은 정말 대단했다. ‘이 노인의 공력 수준은 오십 년 가까이 되는 듯하구나! 요즘 세상에 아직 이런 사람이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실상 노인의 공력 수준은 예전의 도혜 선사와 맞먹거나 오히 려 능가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스스로 아직도 칠십 년 내공을 지 녔다고 여겼지만, 사실 현암의 내공 수위는 백 년을 훨씬 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현암 자신도 그런 사실은 몰랐다. 그때 해밀튼이 침울한 목소리로 현암에게 말했다.
“당신의 마음씨는 정말 곱군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살려고 하 지 않을 거요. 공연히 애써 봤자 스스로 살 마음이 없는 사람들 을 어떻게 하겠소? 그보다 어서 이곳을 떠납시다.”
현암은 공력을 운행하는 중이었지만 입을 열어 대답했다. 공 력을 운행하면서 입을 열어 말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내공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우 사부는 현암이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을 보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을 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현암은 그런 것은 알지 못했다.
“왜 이 사람들이 죽으려 하는 겁니까?”
해밀튼도 공력의 운행이나 그런 것에 대한 지식이 없는지 그저 우울한 표정으로 현암의 질문에 대꾸했다.
“이들은 실패했기 때문이오.”
“임무를 실패했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소.”
“이들은 칼키파인가요?”
“그렇소.”
“이들이 타보트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 타보트는 이미 옮겨진 듯하오. 이들은 성당 기사단 본 부를 아예 매장시켜 버리고, 타보트가 옮겨진 사실을 눈치챈 자 가 있으면 모조리 해치우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오. 그러니 이들 의 임무는 반은 실패했다고 봐야지.”
“하지만 이들은 타보트를 훔쳐 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타보 트는 고반다인가 누구인가 하는 자의 손에 들어갔다면서요? 그렇 다면 일단 실패는 했지만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닌데 어째서…………….. 해밀튼은 여전히 어두운 안색으로 다소 짜증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소. 그 고반다인가 하는 녀석이 지독한가보지.”
그때 현암은 노인의 공력을 어느 정도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현암이 다시 공력을 가하자 노인은 선혈을 토 하더니 약간 정신을 차리는 듯이 보였다.
“정신이 드시오?”
현암은 반가워서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도 손은 노인의 등에서 떼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노인은 눈을 뜨자마자 또다시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눈을 질끈 감고 공력을 다시 흩으려 했다. 노인의 행동에 현암은 또 한 번 놀랐다. 노인을 구하느라 공력 을 많이 소모했는데, 다시 노인이 목숨을 끊으려 할 줄은 현암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노인의 공력을 유 통시키면서 현암은 노인에게 말했다.
“염려 마시오. 당신을 해치지는 않소. 그러니 이런 짓은 제발 그만두란 말이오!”
“아냐……. 아냐……………. 난…… 난 죽을 거야…………. 날 죽일 거야………….”
“여기 있는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무모하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말이오!”
“아니야…………. 아………….”
그때 뭔가가 노인의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노인은 물론이고 현암도 꼼짝하지 못하는 터라 그것을 막아 낼 겨를이 없었다. 이어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힘없이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현암은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노인의 미간에는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고 그 단검은 마하의 것이 었다.
“무슨 짓입니까?”
현암은 불같이 화를 내며 외쳤다. 그러나 저만치 서 있는 마하 딥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를 살려 두는 건 너무도 위험한 일이오……………”
현암은 도대체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노인은 물론 대적하기 힘 든 고수 중의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기를 잃 고 중과부적인 상태인데 그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현암은 너무도 화가 치밀어 마하딥에게 소리쳤다.
“내가 보기엔 당신을 살려 두는 게 더 위험할 것 같군! 저항하 지 못하는 자를 죽여 놓고 지금 뭐라고 하는거요?”
금방이라도 마하딥을 치기라도 할 듯 현암은 성큼성큼 앞으 로 나아갔다. 그러자 마하딥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 현암은 마하의 얼굴에서 기이하게도 슬픈 표정을 보였다. 그 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하딥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 다. 결코 이유 없이 인명을 해칠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렇 다면 ……………
‘그래 ・・・・・・ 그런 걸까……………?’
현암의 머리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 상상도 못했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본다면 지금껏 쌓여 왔던 모 든 의문들이 풀렸다.
현암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다시 한번 또박또박 엄포를 놓았다.
“한 명이라도 더 사람을 해치면 ・・・・・・ 그땐 내 손에 죽을 줄 아 시오!”
그런 다음 현암은 백호가 돌봐 주고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 다. 여자는 죽지 않았지만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이내 현암 은 자신의 사자후에 기절해 쓰러진 인부들과 성당 기사단의 기 사들을 살펴보았다. 기사들은 아마도 노인에게 대부분 제압당한 듯 심한 타박상을 입고 기절해 있었다. 그중 눈먼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가 키건인 듯했다.
상황을 살핀 뒤 현암은 또다시 힘주어 말했다.
“나는 여기 더 이상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소. 누군 가에 의해 한 명이라도 더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과 죽을 때까지 싸우겠소!”
그러자 해밀튼이 나섰다.
“진정하시오. 아아, 좋소. 인명을 해친 건 잘못이지. 마하딥, 자네가 너무 경솔했네. 이리 와서 현암 씨에게 사과하겠나.”
마하딥은 금방 현암에게 와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빛이 역력했기 때문에 현암은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때 나갈 통로를 찾던 우사부가 입을 열었다.
“나갈 길이 없소. 이 인부들은 통로를 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타보트는 도대체 어찌된 걸까요?”
우사부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해밀튼이 말했다.
“타보트는 인도로 옮겨졌소.”
“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 타보트는 옮겨졌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이한 힘을 지닌 이가 칼키파에 있나 보오. 고반다라 불 리는 자겠지.”
그 말에는 현암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텔레포트 능력 말입니까?”
“그런 것 같소.”
“그런 힘이 있다면 왜 처음부터 텔레포트 능력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닌 듯싶소. 누군가 정확한 위치를 잡아 줘야 하고, 어떤 주술적인 준비를 해야겠지. 그리고 아마도 그 능력으로 사람을 옮길 수는 없는 것 같소. 안 그랬으면 여기 이들이 남아있지도 않았을 테지.”
“이들은 왜 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지 않았을까요? 나가고 나서 동굴을 붕괴시켜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소. 이자들은 아주 현명한 자들이오. 악숨에 성당 기사단의 본부가 있고 타보트가 보관되어 있는데, 성당 기사단원들이 이렇게 적은 숫자일 것 같소?”
“그러면 단원들이 더 많습니까?”
“그렇소.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자신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 는 그런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일반 단원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 아서, 여기에는 믿을 수 있는 여섯 기사들과 소수의 경비원만 배 치한 거요. 악숨에만 대략 수백 명의 단원들이 있으며, 프리메이 슨이나 장미 십자회의 힘을 합치면 대단한 전력이 될 거요.
이자들이 당장은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루도 못 가서 행적이 들통 날 것이고 그때부터 맹추격을 받을 거요. 그러나 이 곳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침입자들도 같이 묻혀 버렸다고 성당 기사단이 아니 아하스 페르츠가 여긴다면 문제가 다르지.”
“왜 그렇죠?”
“생각해 보시오. 성당 기사단의 본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 보트요. 만약 누군가가 침입해 타보트를 탈취한 사실이 알려지 면 전 세계의 성당 기사단원들과 장미 십자회원들, 그리고 프리 메이슨의 모든 인물들이 그것을 찾아 나설 거요. 아하스 페르츠 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있어도 나간 사 람이 없다면 성당 기사단 본부는 습격당했더라도 타보트는 여기 남아 있다는 소리가 되지 않겠소?
그렇다면 아하스 페르츠는 타보트가 아직 이 안에 있을 것이 라고 믿고 느긋하게 발굴을 진행시키든지, 아니면 그냥 놓아두 겠지. 아하스 페르츠에게 타보트는 위험한 물건이니 남의 손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요. 그러니 모두가 생매장된 것으로 알도록 입구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고, 이쪽 통로를 천천히 파 서 밖으로 나가면 귀신도 모르게 이들은 탈출할 수 있는 거요. 통로를 다시 파는 데는 며칠이 걸릴 것이고, 그때쯤이면 혼란 도 가라앉을 테니까. 물론 밖에서도 성소 쪽 통로를 살피겠지만, 아무도 그리로 침입한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 않겠소? 설마 안 에서 그쪽으로 통로를 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오. 며칠에 걸쳐 통로를 뚫으면 외부의 경계도 풀어질 테니 그때 탈출하면 안전하다고 여긴 거요.”
듣고 보니 상당히 교묘한 계획이라 할 수 있었지만 현암이 보 기에는 너무도 번거로운 것 같았다.
“이 인도인들의 실력이라면 급히 떠나는 게 더 안전할 텐데요. 약간의 추격을 받더라도 그 정도쯤 대처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 은데………. 물론 안전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것 같아 납득이 잘 가지 않는군요.”
그 말에 해밀튼이 한숨을 쉬자 시켈이 끼어들어 대신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 아하스 페르츠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인도인들은 물론 대단합니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에게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무서 워하는 것은 추격대라기보다 아하스 페르츠에게 자신들의 행동 이 알려지는 것입니다.”
“기왕 타보트가 없어졌다면 아하스 페르츠가 굳이 이들에게 신경을 쓸까요?”
이번 질문에는 시켈이 몹시 어두운 안색으로 대꾸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잊지 않소……”
현암은 뭔가를 한참 생각해 보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해밀튼에게 말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밖으로 나가려면 통로를 새로 뚫 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소… 아아……………. 큰일이오, 큰일……. 이렇게 일이 공교롭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다가 해밀튼은 현암에게 눈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잠깐 이쪽으로 좀 오시오. 그리고 다른 분들도 모두 모여 주시기 바라오.”
해밀튼의 안색이 심각해지자 현암은 곧 그 말에 따랐다. 백호 와우 사부, 마하딥 등도 한곳에 모여 해밀튼의 말에 귀를 기울 였다. 해밀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고반다에 대해 노인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았소. 그런데 고반다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소. 아마 아하스 페르츠에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인 듯하오. 칼키파의 사람들은 그를 ‘신의 대리 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절대적인 존재로 받들고 있는 듯하오. 지금 타보트는 그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가 만약 아하스 페르 츠를 상대하는 데 그 힘을 쓴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일이 풀릴 것 같지는 않소. 그는 타보트가 가진 힘을 자신의 욕구를 위해 사용하려 할 것 같소. 그자의 하수인인 이자들이 일을 처리 하는 방식으로 볼 때 고반다라는 자도 잔인하기 그지없고 목적 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임이 분명하오.”
“동감입니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해밀튼을 바라보는 마 하딥과 시켈의 얼굴은 아직도 흙빛으로 질려 있었다. 공포심이 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본 현암은 속으로 다시금 자신의 추측이 맞는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현암은 해밀튼의 이야 기를 중단시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또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내가 찾아 헤맨 점토판의 문제인데…………. 그것이 왜 이곳에 수백 개나 복사되어 있었던 걸까요?”
“그건 나도 알 수 없소. 나는 점토판 세 개를 여기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까지는 알지만, 그 이후의 일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들에게 물어봐야겠군요. 어차피 발굴될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현암이 말하면서 넘어져 있는 성당 기사단원들을 바라보는 순 간, 갑자기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폭발음이었다. 그리고 폭음이 퍼져 나가면서 무너지는 흙먼지와 돌덩어리로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너무 급작스레 닥 쳐온 폭발로 현암은 경악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현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방 은 대규모의 폭발이 일어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는데, 자신은 멀쩡했던 것이다. 그리고 백호와 마하딥, 시켈과 우 사부, 해밀 튼도 무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던 곳 이외의 장소는 돌덩어 리와 흙먼지에 깔린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이게………… 이게 도대체 ………….”
백호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어리벙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사부 역시 멍멍한 귀를 후비면서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이한 일이군! 아까 작동시킨 폭탄이 이제야 터진 모양인 데…………….”
그러나 그다음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폭발이 일어나 방이 모조리 무너져 내렸는데, 어떻게 자신들이 서 있는 곳만 돌덩어 리가 떨어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을까?
현암은 정신을 차리는 즉시, 놀라면서 주변을 살펴 다른 생존자가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쏟아져 내린 돌덩어리와 자갈, 먼지와 흙에 깔려 스무 명에 가깝던 인부와 성당 기사단 기사들의 모 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백호가 응급 치료를 하느라 그들 근처에 있었던, 중상을 입은 여자만 떨어져 내리는 돌에 몇 번 맞기는 했어도 다행히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현암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생존자를 찾 기보다 폭발로 인해 생긴 다른 변화에 눈길을 돌렸다.
“출구다!”
방 내부는 인부들이 켜 놓았던 아세틸렌 등으로 환하게 밝혀 져 있었는데, 물론 그것은 방의 붕괴로 인해 모조리 꺼져 버렸 다. 하지만 기절한 인부들이 있던 저쪽 구석의 벽이 폭발로 함께 무너져, 그곳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벽의 두께는 적게 잡아도 삼 미터를 넘어 보여, 부순다 해 도 며칠이 걸릴 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폭발물을 써도 그 벽을 부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정말로 운이 좋아 벽이 무너진 것이라 고 백호는 생각했다.
“정말이군! 그럼 어서 나갑시다! 이 방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 오!”
해밀튼의 말에 안 그래도 이 안이 답답하던 참이라 모두 통로 를 향해 와하고 몰려나갔다. 해밀튼도 그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나가려 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해밀튼의 팔목을 잡았다. 현암이었다.
“해밀튼 씨.”
현암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에 대면서 쏘는 듯한 눈으로 해밀튼을 쳐다보았다.
“조용히……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말고요.”
“왜 그러는 거요?”
해밀튼은 의아한 눈빛으로 현암을 바라보면서도 현암이 이끄 는 대로 순순히 석실 안으로 돌아왔다. 석실 안으로 오자 해밀튼 은 현암에게 물었다.
“당신, 왜 그러시오?”
현암이 입을 열었다.
“해밀튼 씨, 타보트는 지금 칼키파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얻으려면 내 도움이 계속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물론이오. 그건…….”
현암은 해밀튼의 말을 중단시키며 눈을 빛냈다.
“해밀튼 씨, 한 가지 듣고 싶은 대답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밀튼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현암의 눈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당신이 바로 아하스 페르츠가 아닙니까?”
순간 해밀튼은 현암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 부릅떠져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 늙은이에 불과하오! 나는 그에게 속 박당해 죽지도 못하는 가여운 늙은이란 말이오. 그런데 내가 어 찌 그 사악하고 끔찍스러운…………….”
“아하스 페르츠가 될 수 있느냐는 말인가요?”
“나는 절대 아하스 페르츠가 아니오! 나는 절대! 절대 아니오! 나는 그를 증오하오!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를 증오한단 말이오!”
해밀튼이 조금 흥분하는 듯하자 현암은 한숨을 쉬며 해밀튼에 게 말했다.
“좋습니다. 물론 나도 믿습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아하스 페 르츠를 증오하고 있으며, 그를 없애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죠. 잘 알겠습니다.”
해밀튼이 약간 흥분을 누그러뜨리며 대꾸했다.
“그러니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 말에 현암은 딱 잘라 되받았다.
“아니오. 나는 그래도 당신이 아하스 페르츠라고 믿습니다!”
“당신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정말 놀랍군. 내가 아하스 페르츠라면 당신은 부처나 노자겠구려.”
해밀튼이 도리질하자 현암이 천천히 말을 건넸다.
“나도 굳이 밝히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 람들의 목숨을 구하려면 당신이 솔직해져야 합니다.”
“무슨 헛소리요?”
“당신이 여기 없다면 이 동굴은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러 면 여기 깔린 사람들은 모두 죽어 버리겠지요. 그러나 지금 당신 이 있어 준다면 나 혼자라도 돌을 들추고 생존자를 찾아볼 수 있 을 겁니다. 제발 여기에 남아 있어 주십시오.”
이제 현암은 확신하고 있었다. 해밀튼은 물론 선의에 가득 찬 착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분명 그 악마 같다는 아하스 페르츠이 기도 했다. 해밀튼이 아하스 페르츠가 아니라면 이 수많은 우연 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다.
현암의 말에 해밀튼은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아아……………”
이윽고 해밀튼은 현암에게 머뭇거리듯 물었다.
“어떻게…… 알았소?”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의아하다는 싶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겠소?”
“당신은 사백 년 전에 히에로글리프를 배웠다고 했지만, 그때 는 누구도 히에로글리프를 알지 못하던 때였죠.”
이에 해밀튼은 탄식했다.
“그렇지. 샹폴리옹은 로제타석으로 해독을 했지만 나는 토트 의 예언석으로 그보다 훨씬 먼저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했소. 어 려운 일이었지만,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아하스 페르츠의 마음 상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에게 직접 들었다고 말했지만, 아하스 페르 츠 같은 자가 장차 자신에게 반기를 들, 자신과 전혀 맞지 않는 타입의 사람에게 그런 신세 한탄을 했다고는 믿기 어렵더군요. 또한 당신은 자신이 빌헬름이라고 했지만 자신의 이름에 별로 감흥을 지니지도 않았고, 과거의 세월을 그리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이름을 감추었다가 진짜 이름을 말한다 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옛일을 조금은 기억하게 되는 법인데 요. 그런데 당신은 아무런 감흥도 나타내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지요. 가짜 이름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또 있습니다. 당신은 아하스 페르츠에 의해 팔백 년 전에 이런 몸으로 변했다고 말했지요? 게다가 자신도 아하스 페르츠처럼 죽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비추었죠. 당신이 우리를 불러들였을 때, 만약 내가 당신을 공격했다면 당신은 멀쩡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너무도 태연자약했습니다. 스스로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당신, 아니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의 힘에 의해 그렇게 된 겁니다. 아하스 페르츠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다른 사람 을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지녔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아하스 페르츠는 벌써 죽지 않는 자들로 세상을 덮어 지배했을 테니까요.”
그러다가 현암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나 솔직히 그것들만 가지고는 알 수 없었습니다. 아까 동 굴이 붕괴될 적에, 비로소 나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까 동굴이 무너지다가 멈춘 것은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렇소……..
“그리고 당신이 올라오지 않은 것도 만에 하나 우리가 인도인 들을 이기지 못했을 경우 퇴각하게 하기 위해서겠죠? 당신이 있 는 한, 동굴은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요.”
“……”
“그리고 아까 기폭 장치가 폭발하지 않은 것도 당신 때문이고, 인도인들이 자살하려 한 것도 당신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며, 방금 그 폭탄이 다시 터져 동굴이 붕괴되면서도 우리만 멀쩡했 던 것도 당신 덕분이겠죠? 그리고 동굴이 붕괴되면서 하필 통로 가 열려 버린 것도 역시 당신 덕이겠죠・・・・・・・ 맞습니까?”
“그러나! 나는 아하스 페르츠가 아니오! 나는 해밀튼, 아니 빌 헬름이오.”
“나도 압니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지만, 전에 재미있 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지요. 그 덕분에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 말입니다.”
그러자 해밀튼은 처절하고도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하긴 나도 전에 처음 그 소설을 보았을 때 내가 그 모델인 줄 알았소.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오. 현암 씨…….”
아하스 페르츠, 아니 해밀튼은 천천히 현암에게 자신의 과거 에 얽힌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천 년! 당신은 이천 년이라는 세월이 어떤 것인지 아시오? 나는 지나치게 긴 세월 동안 살았고, 너무 많은 생각을 했소. 나 는 당신을 속였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소. 나는 분명 아하스 페르츠였지만 빌헬름이고 해밀튼이었소.”
“당신의 몸을 빌린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용모를 빌렸을 뿐이오.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오. 히에로글리 프를 남에게 배웠다고 한 것이 내가 당신에게 한 유일한 거짓말 이었소. 나는 죽지 않으며 몸과 함께 살아가고 있소. 다만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내 몸은 기이해졌소. 하긴 당연한 일이 겠지만…….”
“무슨 말씀이시죠?”
“내 몸은 불멸이니, 어떻게든 고칠 수 있다는 거요. 나는 여섯 번이나 몸을 고쳤소. 키가 큰 사람이 되고 싶으면 마차로 몸을 끌어 늘렸고 몸을 작게 하고 싶으면 무너지는 돌더미에 일부러 뛰어들어 머리부터 깔리기도 했소.”
“아니, 그러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하려다가 현암은 아하스 페르츠가 불사(不 死)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소. 보통은 다 죽겠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도 상처 하 나 생기지 않소. 내가 원해 그런 것이니 그 현상 자체가 변하지 는 않았지만, 내 몸이 그냥 변모하여 변화를 수용한 거요. 그냥 몸이 늘어날지언정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말이오. 그러다 보 니 나중에는 얼굴 모습도 구태여 칼을 댈 필요도 없이 원하는 대 로 힘을 주면 변하더군. 좌우간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오. 나는 분명 아하스 페르츠였고, 그노시스파의 일원이었으며, 빌헬름과 해밀튼의 인생을 살아오고, 성당 기사단의 지부장이자 성당 기 사단의 보이지 않는 우두머리요. 즉 나는 여러 개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말이오. 이해하시겠소?”
“이해합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소. 과거에 내가 저지른 실수는 이제 기 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지만, 나는 정말 괴로웠소. 전에 과거의 내 심정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적이 있었을 거요. 나는 착하게 살 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복수심과 집착에 의해 지나치게 잔 인한 성격도 커져 갔소. 그 두 가지는 공존하기 어려운 성격이 오. 아마 보통 삶이라면 정신병적으로 자아가 분열되었겠지만, 나는 그보다 너무 오랜 기간을 지내야 했소.
그래서 분열된 자아가 각자 성장한 끝에, 둘이 완전히 별개의 인간이 되어 버린 셈이오. 몸을 지닌 채로 살아서 그런지, 그런 정 신적인 증상이 나에게도 생기더군. 더구나 내 몸은 내 마음대로 용모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라 팔백 년 전부터 나와 아하스 페르 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편이 옳소.”
“믿기 힘든 일이지만…………… 믿습니다. 해밀튼 씨.”
그러면서 현암은 열심히 돌을 치웠다. 해밀튼도 나름대로 열 심히 돌을 들추면서 현암에게 말했다.
“내가 두렵지 않소, 현암 씨?”
“왜 두렵겠습니까? 당신은 해밀튼 씨가 아닙니까? 아하스 페 르츠가 아니고요.”
“현암 씨, 내 알려 드리리다. 나는 지금 아하스 페르츠를 억누 르고 해밀튼의 성격으로 행동하고 있소. 사실 내 성격을 가진 이 후부터 나는 모든 힘을 다해 아하스 페르츠를 억제해 왔소. 덕분 에 아하스 페르츠가 활동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소. 그런데도 그 는 엄청난 일들을 저질러 왔소. 하지만 이제 그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고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더욱 강해지고 있소.”
“당신은 신앙인입니까?”
“물론이오……. 나는 그리스도를 직접 본 사람이오. 나만큼 신앙심이 강한 사람은 없을 것이오. 아이러니컬한 일이겠지만, 그리스도의 기적을 아하스 페르츠나 나만큼 믿는 사람 또한 없 을 거요. 내가 바로 그 기적의 당사자이니 말이오.”
“그렇군요…….”
“언제 아하스 페르츠가 나타날지 모르오. 나는 점차 그를 억 제하는 데 실패하고 있소. 이제 내가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아하스 페르츠가 언제 눈을 뜰지 모른다는 거요. 만약 아하스 페 르츠가 나타난다면 당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시오. 아시 겠소? 아하스 페르츠는 이제 당신을 무척 미워할 거요.”
“왜 그렇습니까?”
“나는 아하스 페르츠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아하스 페르츠는 내 마음을 모두 알고 있소. 불합리한 일이지만, 나는 아하스 페 르츠를 거부하려 하고 아하스 페르츠는 나를 이용하려 하기 때 문에 그렇게 된 것 같소. 좌우간 당신이 내 정체를 안다는 것은 아하스 페르츠로 하여금 지구 끝에까지라도 당신을 쫓아가 없앨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당신은・・・・・・ 당신은 몰랐어야 했는데”
“아하스 페르츠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당신이 주술적인 힘으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러자 해밀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대단하오. 그리고 나는 물론 아하스 페르츠 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지만, 단 하나의 주술도 쓸 수 없소. 왜냐 하면 내가 약간의 주술이라도 사용한다면 간신히 억눌러 놓은 아하스 페르츠가 눈을 뜨기 때문이오…………. 그는 힘에 대한 집착 이 대단하기 때문에, 내가 힘을 쓴다면 다시 눈을 떠 나를 지배 할것이오…….”
갑자기 해밀튼은 지금까지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상상해 보시오. 이미 팔백 년! 팔백 년 동안이나 나는 나 자신 을, 아니 아하스 페르츠를 죽이려 해 왔소! 독을 마시기도 했고, 불 속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암살자를 고용해 총에 맞아 보고, 바다에 뛰어들고, 화약더미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해보 지 않은 방법이 없었소!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소! 그 리고 나의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아하스 페르츠는 나타나 악행 을 저질러 왔소. 그러니 이제 섣불리 그런 시도를 할 수도 없소.”
“당신이 목숨을 끊으려 하면 아하스 페르츠가 나타납니까?”
“많은 경우에 그랬소. 그러니 나에게는 남은 방법이 없었소. 그래서 나는 팔백 년 전에 성당 기사단을 창시하도록 영향을 끼쳐, 단 하나의 희망인 타보트를 찾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소…………. 그러나 타보트는 너무도 늦게 발견되었고…………. 이제는 그것을 코앞에 두고 또 다른 자에게 빼앗기게 되다니! 아아!!”
현암은 해밀튼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팔백 년 동 안의 고통, 그리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신에 대한 증오……..
현암은 돌을 치우다 말고 묵묵히 해밀튼의 어깨를 토닥여 주 었다. 이어 해밀튼이 목멘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이 처음이오…………. 내 정체를 알고서도 나 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는..”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그런 생각 마시오! 아하스 페르츠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오. 그러면 당신은 언제라도 도망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자 현암이 또박또박 말끝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착한 사람입니 다……………. 내 힘이 닿는 한, 나는 당신을 구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아하스 페르츠와 같이 자멸하기에는, 당신은 너무도 아까운 사람 입니다…………….”
해밀튼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악마요! 그는 세상을 망하게 할 거요!”
“그건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신은 둘이 같이 사라지겠다 는 생각은 마십시오.”
“정말이오……? 아냐, 아냐. 당신은 틀렸소. 대단히 틀렸소.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오. 너무 오래 살아 지치기는 했지만, 여 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활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오. 나는・・・・・・ 나는 그들을 지켜야 하오. 내 손으로 그들을 지켜야 한단 말이오……”
해밀튼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동되는지, 그는 여태껏 수백 년을 겪어 오면서 배워 왔던 많은 언어로 떠들어 댔 다. 현암은 그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 사람의 외로움, 뼛속 깊은 곳까지 배어 있는 외로움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급기야 해밀튼이 울먹였다.
“창피하지만…… 울어도 되겠소?”
그 말에 현암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해밀튼의 어깨를 힘 주어 꽉 잡으며 말했다.
“됩니다.”
그러자 해밀튼은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현암은 말없이 무너져 내린 돌 천장을 초점 없이 올려다보았다.
아하스 페르츠가 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라면, 해밀튼은 그 반 대인 선으로 똘똘 뭉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현암은 이러한 사 람을 결코 외롭게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선량함이 특출나서가 아니다. 아니, 악인이어도 상 관없다. 선인의 목숨을 악인의 목숨과 바꾸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내가 지금껏 살아오게 만든 신념이고, 나를 지탱해 준 힘 이었다. 결코 포기할 수는 없다. 방법을 찾자, 방법을….’
현암은 허공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스도여, 당신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알고 있었습 니까. 이 방황하는 사람이 받을 고통을……………? 당신은 천사를 만 들고, 또 악마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현암이 대답 없는 물음을 계속하는 사이, 어느새 해밀튼은 울 음을 그치고 현암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마도 해밀튼이 수백 년 만에 보인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을 것이다.
“돌을 치워 봅시다.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있는 한 동굴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요. 안심하고 치웁시다.”
“그것 보십시오. 당신은 저주받은 존재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현암은 해밀튼의 말에 농담으로 대꾸하면서 환하게 웃어 보였 다. 그들은 열심히 돌을 치워 몇 사람의 생존자를 찾아냈다. 그 리고 어느새 왔는지 마하딥과 시켈도 함께 거들었다. 마하딥과 시켈은 이제 그의 정체를 안 듯했다. 어쩌면 현암과 해밀튼의 대 화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좌우간 그들이 여기 와 있다는 것은 암암리에 현암 자신과 같 은 뜻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현암은 기분이 좋았다. 대 악마인 아하스 페르츠에다 고반다라는 정체 모를 자까지 나타났 지만, 그리고 점토판과 타보트에 얽힌 음모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했어도………………
‘신부님이 그러셨던가?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박 신부의 말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음 지었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