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4권 15화 – 하르마게돈 9 : 랍비 안나스
랍비 안나스
그 무렵, 현암은 어느 가건물 안에 있었다. 그 가건물은 트럭 에 실린 커다란 컨테이너였으며, 섬에서부터 현암은 내내 그 안 에 갇힌 채로 후송되어 왔다.
그의 곁에는 용화교의 삼대 고승인 무성, 무음, 무색과 백호가 있었다. 그들이 잡히는 순간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마하딥은 치료를 받기 위해 어디론가 옮겨져 함께 있지 않았다. 현암은 아직 공력을 회복하지 못해서 닭 잡을 힘도 없는 상태 였고, 삼대 고승들도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용화교의 승려 들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주술적으로 제압을 당한 것 같아 탈출 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컨테이너 안은 알 수 없는 주술 도안과 원이 그득했다. 컨테이 너 내부뿐 아니라 섬에서 잡혀 따라 나온 뒤부터 현암의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 의자나 테이블, 물잔 같은 것에도 그러한 도안 과 원,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하다못 해 감시자들의 옷과 그들의 총기까지 그런 문양들이 있었다.
그 도안이나 문자는 그쪽 방면에 어느 정도 지식을 쌓은 현암에게도 낯선 것들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흑마술의 도안과 유사 한 부분이 있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좌우간 현암은 공력이 없는 상태라 그 주술에 영향을 받지 않 았지만, 설령 공력이 예전대로라고 해도 감시 때문에 꼼짝할 수 없었다. 현암 일행을 감시하는 자들은 모두 자동 화기를 지니고 있는데다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듯, 조금의 빈틈조차 보이지 않 았다.
그들은 주술사 같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훈련을 받은 특수 부 대나 용병처럼 보였다. 그들은 항상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삼교 대로 현암 일행을 감시했으며, 늘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두 명 이상은 조준을 한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용화교의 세 승려들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명 상상태나 가사 상태에 빠진 것인지 반쯤 조는 상태로 앉아서 미 동도 하지 않았다.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식사나 용변조차 보지 않는 산송장 아니면 깊은 명상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현암은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곳으로 잡혀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을 뿐이었 고, 주변의 감시자들 중 그 누구도 현암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 다. 그들이 한 말이라고는 맨 처음에 컨테이너로 현암 일행을 수용하면서, ‘주문 따윈 외울 생각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것이 전부였다.
감시자들은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 한마디라도 한 다면 바로 총으로 쏘아 붙일 기세여서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이들은 현암과 승려들은 물론 백호까지도 모두 능력자라고 여기 는 듯했다. 사실 현암은 주술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그들은 강 력한 주술사라면 주문 한마디만으로도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미리 교육받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현암은 백호와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지냈고, 그런 상태로 벌써 며칠이 지났다. 항상 총의 조준을 받는 상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현암은 양손이 굵은 쇠사슬 로 묶여 있는 외에는 자유로웠다. 맛없는 식사였지만 양이 충분 했고, 용변도 자유롭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컨테이너 안에서 해결해야 했으므로 좀 거북스러웠지만, 그래도 감시자들은 일체 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아 나중에는 꺼리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현암은 갑갑해서 견딜 수 없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지 만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현암 일행을 잡은 것인지 도 저히 알 수 없었으며, 연락은 고사하고 그 누구와도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게 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현암은 아직 월향검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섬에서 포 위당하는 순간, 현암은 그들이 자신을 생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고 월향검을 몸속에 감추어 두었다. 월향검은 스스로 움직일수 있는데다 현암과는 마음이 통했기 때문에 몸수색에도 발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월향검이 있다고는 하나 공력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모험을 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답답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라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현암은 무언가 거대하고 답답한 힘이 사방에 가득 차오 르는 것을 느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영적인 힘에 대해 상당 히 둔감한 현암이 이 정도 느낌을 받는다면, 무엇인가 무서운 일 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현암뿐만 아니라 현암을 감 시하는 자들도 한순간 안색이 변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감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총구를 내리거나 손끝을 떨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현암이 도망 치려 할 것이라고 여겼는지 총부리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현 암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상대가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 인지 알고 싶기도 했고, 도망치려고 해도 공력이 없으니 십중팔 구 실패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죽은 듯이 조용하던 노승들 중 무색 화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감시 인들은 그의 행동에 놀라면서 그를 향해 총부리를 바싹 들이밀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큰 소리로 뭐라고 외쳤다.
중국말이라 현암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색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어서 무음과 무성도 고개를 들었는 데, 그들의 얼굴에도 공포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자 현암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아하스 페르츠의 앞에서도 투쟁심을 잃지 않았 던 세 노승이 공포에 질린 것일까?
감시인들은 총을 겨누면서 조용히 하라고 외쳤다. 순간, 컨테이너 전체가 부르르 떨려 왔다.
별안간 무색이 감시인들을 향해 서툰 영어로 외쳤다.
“당장 당신들의 주인을 부르시오! 이건………… 이건…………….”
그러나 감시인들 중 한 명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총부 리만 더 바싹 들이밀었다.
바로 그때, 컨테이너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 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감시인들은 총을 거두고 정중하고도 신 속하게 사방으로 물러섰다.
현암은 눈을 들어 그 사람을 보았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에 은 발의 수염을 기른 작달막한 노인이었는데, 머리에 빵 같은 조그 마한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유대교의 남자들이 즐겨 쓰는 모 자였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면서 현암과 세 노승 앞에 서서 말했다. 그의 말투는 퍽 공손하고 상냥한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고풍스럽고 딱딱했다.
“이야기를 나눌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나는 랍비 안나스라고 합니다. 그냥 안나스라고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무색이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었구려.”
무색은 안나스가 자신을 잡아 온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말에 안나스가 이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들은 적이 있소. 당신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적겠지…..”
무색은 몹시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 당신을 보았으니 이 늙은 목숨도 끝이겠군. 그런데 왜 시간을 끄는 거요?”
현암과 백호는 무색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무색은 이제 자 신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고 있었고, 진심인 것 같았 다. 눈앞에 있는 이 자그마한 유대교 랍비가 그토록 무서운 사람 이란 말인가?
안나스가 온화한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랍비 안나스이지, 랍비가 야바가 아닙니다. 내가 가야바였다면 당신 말이 맞겠지만, 나는 안나스랍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뭘 원하오?”
“중국의 고승분들은 필경 우리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당신들이 뭔가를 알아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밖에서 벌어지는 일 말이오?”
“그렇습니다.”
“장담할 수 없소. 이건 불법(佛法)이 아니니.”
“붓다는 인도사람이었으니 우리보다는 당신들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긴 인도입니다.”
현암은 이들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백호가 현암에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나스 가야바?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들은 예수를 죽게 만든 제사장들의 이름과 같지 않습니까?”
백호는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고 했는데, 무색과 안나스 모두 그 말을 들은 듯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안나스는 훗 하고 조금 비웃는 듯했지만, 무색은 보이지 않는 눈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가득 담고 백호를 노려보았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 고 말았다.
그때 돌연 조용히 있던 무음이 눈짓을 하자 무색이 그쪽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대신 외쳤다.
“우리보다 저 젊은이가 나을 거요!”
그러자 안나스는 의심스럽다는 듯 현암과 백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들이 …………? 제 눈에는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아니오! 솔직히 말하지. 우린 아하스 페르츠와 맞서려 했지 만 실패했소. 그리고 저 젊은이의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이 말은 모두 사실이오.”
“그렇습니까? 흠……..”
랍비 안나스는 뭔가를 궁리하는 듯하더니 몸을 빙글 돌려 컨 테이너 밖으로 나섰다. 나가면서 그는 한마디를 남겼다.
“랍비 가야바 님과 상의해 봐야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 시오.”
안나스가 밖으로 나가자 컨테이너의 문이 닫혔고 용병들은 다 시 긴장된 표정으로 현암 일행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때 현암의 귓속으로 한 줄기의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현암은 속으로는 놀 랐지만 금방 그것이 무색이 보내는 전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이, 우리는 이제 끝장이네. 저자는 랍비 안나스……………. 아하스 페 르츠만큼이나 비밀과 신비에 싸인 인물일세. 자기 부하를 제외하고는 그를 만난 후 살아남은 자가 아직 없다네. 우리도 이젠 끝장이야. 그러 니 자네만이라도 살아남게나. 우리의 목숨을 구해 준 보답일세. 저자가 자네를 데리고 나갈 때,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 저자에게 달려들겠네. 자네는 절대 우리를 돌아보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게나.
현암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무색처럼 전술을 펼칠 수는 없었기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시늉을 내거나 글자를 써서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색은 눈이 보 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암이 간신히 “누구(who)……”라고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다짜고짜로 입안에 총부리가 들이밀어졌다. 차갑고 묵직한 총구 의 냉기가 입안에 느껴지자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현암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 한마디를 알아들었는지 무 색이 다시 전음술로 목소리를 보내왔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우리도 그자의 정체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는 바로 검은 편지 결사를 이끄는 자, 시 오니즘의 중심에 있는 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