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17화 – 세크메트의 분노 5 : 블랙서클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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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17화 – 세크메트의 분노 5 : 블랙서클의 손길


블랙서클의 손길

현암이 수화기를 든 채 놀란 듯 소리를 쳤다.

“블랙서클? 아니, 이번에도 블랙서클이야? 도대체…”

박신부는 침착하려 애썼다. 박 신부는 흥분한 승희를 진정시키고 현암과 백호에게 커크 교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고 지 시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외국의 학자를 억류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백호는 투덜거렸으나, 박 신부는 수화기를 바꾸어 들 고 꼭 그래야만 한다고 백호를 설득했다. 역시 사람을 설득하는 솜씨는 박 신부가 뛰어났다.

“승희의 투시는 틀린 적이 없지. 커크 교수가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아무튼 사실일 것이네. 증거도 곧 잡힐 거야. 그리고 그자는 블랙서클의 일원이라는 심증이 있 어 승희야, 그 남자가 어떤 생각을 했기에 블랙서클의 일원으로 단정한 거지?”

승희는 화난 듯 숨소리를 쌔근거리며 날카롭게 말했다. “의심하고 있었어요. 제가 누구냐고 다그치자 그자도 내 말에 서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것 같아요. 블랙서클의 일 원이 아니라면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할 텐데 하는 생각을 불현듯 떠올린 거예요.’

현암이 팔에 월향검을 차면서 말했다.

“지금 가보시죠, 신부님.”

“그래야겠지. 그자가 정말 블랙서클의 일원이고 커크 교수 와 바꿔치기된 자라면…………. 그리고 거기에 홍 박사의 실종까 지…………. 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군 그래.”

준후가 중얼거렸다.

“하늘이 도우셨나 봐요. 이렇게 복잡한 일들을 몇 시간 만에 알아내게 되다니.”

말을 하던 준후는 잠시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다. 승희는 연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희도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그 특유의 차분한 몸가짐으로 눈을 깜빡이며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승희는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씨도 도와주시겠어요?”

“제가 도움이 될까요? 저는 아무 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라 곧 오로지 통역밖에는.”

박신부가 끼어들었다.

“아뇨. 우리는 지금 고대 이집트와 관련된 일을 파헤치고 있는 겁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연희 양의 힘이 필요해질지 몰라요. 지금만 해도 연희 양이 히에로글리프를 정확히 해독해 주지 않 았다면, 커크 교수가 뒤바뀐 것이나 그들의 음모조차도 알 수  었을 겁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물론 같이 가도록 하지요.”

연희는 선선히 응낙하면서 습관처럼 손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 렸다. 갑자기 준후가 눈을 뜨더니 연희의 얼굴과 연희의 손을 번 갈아 보면서 말했다.

“연희 누나, 그게 뭐죠?”

“응?”

연희의 얼굴은 잠시 씁쓸한 빛을 띠었으나 곧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펴 보였다. 현암은 그것이 무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던 예전의 그 남자가 주고 간 낡고 닳은 구리 십자가였다.

“이야!”

십자가를 본 준후가 신기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연희는 어안 이 벙벙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여기에는 묘한 힘이 들어 있네요! 염체! 맞아요. 염체가 숨어있는 것 같아요!”

현암이 끼어들었다.

“염체? 그렇다면 전의 그 남자가…………….”

현암은 전에 유체를 마음대로 부리던 남자가 숨을 거둘 때에 머리 부분에서 무언가 튀어 나와 연희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 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때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가 죽은 이상 염체도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 나나름대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준후의 말은 달랐다.

“유체는 동양에서 말하는 백(魄)이고, 염체도 그와 비슷한 것 이지요. 밀교의 술수에도 사념을 응집시켜서 살아 움직이는 환 영들을 만드는 술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건 후기 탄트라 밀교에 서 행해지던 것이라 해동밀교에서는 다루지 않았어요. 아무튼.” 

준후는 연희의 십자가를 다시 보고 중얼거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저 안에 있는 염체의 느낌은 참 좋네요. 착한 것 같아요. 아마 필요할 때에는 연희 누나를 도와줄 것 같아요. 후후후.”

연희가 그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현암은 시간이 없으니 어서 출발하자고 일행을 독촉했고, 박 신부도 준비를 마 치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전원 출동이었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 에는 잘 알 수 없는 이집트의 고대 신 세크메트와 블랙서클이 어 떻게 얽힌 것인지, 그리고 홍 박사와 커크 교수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의 갖가지 복잡한 이야기가 한데 엉켜서 마치 앙금처럼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호텔로 가는 동안, 일행은 곰곰이 자신들이 알아낸 것을 하나 하나 돌이켜 보고 있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서 얻은 결론은 충격적이었지만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준후 만 이해하기가 벅찼던지 고개를 연신 갸우뚱거리자 연희와 현암이 번갈아가면서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일은 덴데라의 폐허에서 시작되었다. 커크 교수와 카프너 만 일 카프너가 주술사라고 가정해 보면, 카프너가 커크 교수를 꼬드겨서 유물을 빼낼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뭔가 음 모가 내재돼 있을 것이고…………. 여하튼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어 떤 유물을 빼돌리자, 그에 분노한 고대인의 영이 아누비스의 모 습으로 홍 박사에 빙의되었을 것이다. 편지에 적힌 고대의 문법 을 따른 히에로글리프가 그것을 증명한다. 홍 박사는 필경 그때 살해당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무언가 무서운 것, 즉 세크메트의 분노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굴범들은 홍 박사의 시 체를 유기하고 그들의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 홍 박사의 편지를 봉해서 본국에 우송해 버린다. 홍 박사는 실제로도 한국 에 갈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현암이 중얼거렸다.

“이 이상은 알 수 없어. 우리의 추리가 그다지 틀린 것 같지는 않지만 밝혀지지 않은 세 가지 문제가 남아있지.”

박 신부는 운전에만 집중하면서 잠자코 현암과 연희의 말을 듣고만 있었고, 승희는 어느새 어디서 들고 왔는지 두툼한 책을 뒤적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준후가 제법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떤 게 남아 있죠?”

“일단 석실 안에 있던, 블랙서클이 훔쳐 낸 것이 어떤 유물이 냐의 문제, 그리고 왜 세크메트가 분노하게 되었느냐의 문제, 마 지막으로 블랙서클의 의도가 무엇이기에 커크 교수까지 바꿔치 기해서 한국에 나타났느냐는 문제. 이렇게 세 가지의 문제가 아직 남아 있지.”

책을 쳐다보던 승희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옆자리에 앉은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 씨, 홍 박사님의 편지에 있던 상형문자의 내용이 뭐였죠?”

“예? 아, 그건 ‘문은 이미 열려 있다라는..”

“아니 아니, 그것 말고요. 그전에 적어 보낸 것!”

“두 번째의 것은 토기 조각에 적혔던 것인데 ‘분노 잠들라’ 였고 첫 번째 것이 ‘그날은 미소를 짓지 말라’였죠.” “이것! 이것과 상관이 있나요?”

승희가 심각한 얼굴로 펴 들고 있던 책의 한 페이지를 내밀었 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이집트학에 대한 책이었다. 펼쳐진 페이 지는 히에로글리프로 그려진 일종의 달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 는데 한쪽 면은 히에로글리프로, 한쪽 면은 해석이 나와 있었다. 해석 면의 제목이 「길흉을 정하는 달력」인 것으로 볼 때 점술에 쓰이던 달력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승희가 가리킨 해석 면의 작은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 다. 앞자리에 앉은 현암이 궁금해하는 눈짓을 보내자 연희는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었다.

“증오, 증오, 증오야말로 티비의 12일. 그날은 미소를 짓지 말라…”

현암이 휙 고개를 돌렸다. 박 신부도 움찔하는 듯했다.

“그 구절이다!”

놀란 연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나머지 구절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 그날이야말로라가 세크메트에게 명령하신 날이기에..”

“그날? 무슨 날이죠? 티비의 12일은요?”

준후가 묻자 연희는 몸을 약간 떨면서 대답했다.

“인간들에 대한 대살육이 시작되었던 날, 겨울이 시작되는 첫 달의 12일 ・・・ ・・・ “

그 말에 준후는 안심한 듯했다.

“겨울? 여기는 지금 한여름이잖아요?”

승희가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그건 과거의 대살육에 대한 교훈으로 남긴 말이야. 과거에 있 던 세크메트의 분노. 그러나 말이지, 세크메트가 다시 분노하는 것이라면……”

현암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블랙서클 놈들. 분명 그놈들의 목적은 세크메트의 분노를 우 리나라에 덮어씌우려는 의도일 거야. 그런데 그놈들은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박신부가 한참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가짜 커크 교수를 잡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일단은 유물을 조사해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겠군.”

“유물을요?”

“그래. 유물의 전시는 내일부터고, 박물관은 커크 교수 일행이 머무르는 호텔의 바로 옆에 있지. 승희야?”

“예?”

“네가 연희 씨와 함께 유물들을 미리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다.” 

“알아낼 것이 있을까요?”

“가능성은 있지. 우리가 지금 서둘러 가기는 한다마는, 만약 커크 교수가 달아난 상태라면 현암 군이 아까 이야기한 첫 번째 문제점, 즉 없어진 유물이 무엇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어. 그리고 유물의 공개는 내일부터다. 시간이 없어. 그 유물들은 어쩌면 공 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몰라. 그러니 조사해 보렴.” 

“그러면 커크 교수는…….”

“그자가 아무리 블랙서클의 일원이더라도 현암 군과 나, 둘이면 충분할 거다. 준후도 소혼 능력이 있으니 같이 가 보려무나. 가서 유물들을 잘 살피면 혹시 이가 맞지 않는 유물이 나올지도 모르지.”

“아!”

승희는 박 신부의 의도를 깨닫고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냈다. 목적을 가지고 사용되었던 유물 중에 빼낸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물병이 있으면 잔이 따르게 마련이고, 칼집이 있다면 칼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물들을 한번 조사해 볼 필요성은 충분했다.

연희가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도굴범들이 증거를 다 인멸했다면요? 분명 흔적을 지우려 했을 텐데?”

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대부분의 증거를 인멸하려 했겠지만 많은 유물을 빼돌 리지는 못했을 테고, 특히 커다란 유물은 어쩌지 못했을 거예요. 이집트 정부도 발굴중 감시단원을 파견했을 테니 그건 확실합 니다. 카탈로그를 보니 이번 전시에는 거대한 돌 제단까지도 그 대로 운반해 온다 했으니, 그 커다란 유물들에서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현암은 카폰으로 백호와 연락을 취했다. 백호는 요원들을 비 밀리에 풀어서 커크 교수가 묵고 있는 호텔의 한 층 전체를 외 부와 차단했다고 했다. 현암은 가능하면 그 층에 있는 투숙객 전 부를 조용히 다른 곳으로 옮겨 줄 것을 백호에게 부탁했다. 자칫 싸움이 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백호는 쉽진 않은 일이지만 한번 해 보겠노라고 답했다. 그리고 현암은 박물관에서 유물을 먼저 조사해 볼 터이니 협조를 받아 달라는 부탁도 아울러 했다. 수화기에서 백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은 제가 전지전능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보군요. 하하하.”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뭔가가 있어요.

부탁합니다.”

“알았습니다. 제목을 걸고 추진해 보죠. 하하하.”

백호와 통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 신부의 차가 박물관에 들 어섰다. 그곳에 승희와 준후, 연희를 내려놓은 박 신부의 차는 털털거리면서 호텔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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