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8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1 : 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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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8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1 : 자정


자정

다시 자정이 되었다. 그런데 마루에서 뻐꾸기시계가 우는 소 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 휘유 하는 바람 소리 같은 것 이 들려왔다. 건넌방에서 잠보인 오빠 연호가 코 고는 소리 아니 면 숨 쉬는 소리 같았다. 연희는 피식 웃으면서 책을 덮고 머리 를 쓸어 올렸다. 자야 할 시간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목 시계나 벽에 걸린 고양이 시계도 모두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으 니까. 그러나 매일같이 들려오던 마루의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건전지가 다 떨어졌나?’

전번에도 건전지가 떨어졌을 때 밥을 주지 않자 뻐꾸기가 머 리를 내밀었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중간에 걸려서 보얗게 먼지 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땐 수정이가 건전지를 갈아 주었지. 후후.’

연희는 잠시 집에 머물고 있는 사촌 동생인 열 살 먹은 꼬마 수정의 몸짓을 떠올렸다.

-뻐꾸기 다시 간다아. 하하.

다시 한번 마루에서 스스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들렸 던 것과 같은 소리. 그런데 아무래도 연호의 코 고는 소리가 아 닌 것 같았다. 바람 소리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루의 커튼 이 바람에 흐트러지는 소리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소리일까? 마루문이 열려 있나?’

연희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봄이고 날씨도 좋았지만 밤공 기는 꽤 쌀쌀한 편이었다. 만약 마루문이 열려 있다면 방문을 열 어 놓고 자는 습관이 있는 수정이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문을 닫아야겠다.’

연희는 긴 머리칼을 등 뒤로 훑어 넘기면서 자리에서 일어섰 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아앗!”

갑자기 마루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연호는 눈을 번쩍 떴 다. 동생 연희의 음성이었다. 연호가 총알같이 문을 열고 마루로 뛰어나가자 연희가 입가에 손을 댄 채 멍하니 수정의 방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희야, 왜 그러니, 응?”

연희는 뭔가에 몹시 놀란 것 같았다. 연호의 눈에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방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저기 저기 웬 남자가………….”

“남자?”

도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연호의 머릿속을 스쳤다. 주먹을 꽉 쥐고 방문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연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 문을 뚫고 들・・・ 들어갔어……………..”

연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연희는 입을 꾹 다물고 수 정의 방문에 몸을 붙이고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렸다. 방안은 어 둡고 조용했다. 귀를 기울였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수정이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아무도 없어, 연희야. 헛것을 본 모양이구나.”

연호는 피식 웃으면서 연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연희 는 겁먹은 듯한 걸음걸이로 연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무 리 생각해 봐도 석연치가 않았다. 분명 자신은 희끄무레한 남자 의 형체가 수정이의 방문에 빨려들듯이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 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수정이 걱정 되었다. 지금 부모님은 지방에 내려가 계시는 중이라 오빠인 연 호와 사촌인 수정과 함께 지내고 있는 터였다. 연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살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가 자고 있는 수정의 머리맡에 서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정을 내려다보았다. 잠꼬대인 듯한 웅얼거림이 들렸다.

“아저씨, 나 안갈래. 언니가…….”

연희는 갑자기 누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휙 고개를 돌리자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희미해지는 사람의 형체가 그리고 반짝이는 듯한 눈동자의 모습이 보였다.

“오빠! 저깃!”

연희의 놀란 목소리에 연호가 쳐다보았지만, 누군가 사라지는 모습만 잔영처럼 눈에 들어왔다. 연호는 다짜고짜 몸을 날리며 벽을 후려갈겼으나 쿵 소리만이 날 뿐이었고 흐릿한 형체는 온 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아아.”

연희가 수정이 자고 있는 침대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정의 잠꼬대는 계속되었고 그 소리가 더더욱 연희를 무섭게 했다.

“아저씨, 인제 간 거야? 간거야?”

연호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느 덧 연호의 주먹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연희의 심정도 연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연희의 마음속에는 사라지는 순간 언뜻 빛난, 흐릿한 형체에서 유달리 반짝거리는 눈동자의 모습이 똑똑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수정아, 오늘은 언니와 같이 자자꾸나. 응?”

다음 날 해가 지자 연희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연호와 상의 를 해서 그냥 없었던 일로 잊고 넘어가기로 했지만 영 마음이 개 운치 않았다. 오늘은 일이 없어서 집에서 수정과 하루 종일 놀아 줄 수 있었다. 프리랜서로 통역 일을 하고 있는 연희는 일이 많 아 무척 바쁘게 지냈지만 요즈음은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남자들로부터 전화도 별로 걸려 오지 않아서 조금은 여유 있게 지내고 있던 차였다. 수정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듯 연희가 같이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 있었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혹시 어젯밤에 꿈을 꾸지 않았느냐 고 물어보았지만 수정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수정의 고 갯짓과 동시에 마루의 뻐꾸기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어젯 밤에는 죽어 있었는데………….

“하하하. 뻐꾸기다. 하하.”

뻐꾸기 소리가 들리자 수정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그 모습 을 본 연희도 미소를 지었다.

‘시계가 고물이 되었나? 가다 말다 하다니.’

뻐꾸기 소리가 멎자 수정은 다시 글자 맞추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연희는 수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가볍게 물어보았다.

“수정아, 네가 뻐꾸기 밥줬니?”

“으응.”

게임에 몰두한 수정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계 앞으로 갔다. 어디가 어떻게 고장 났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아앗!”

연희가 너무 놀란 나머지 시계를 떨어뜨릴 뻔했다. 시계 속에는 건전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언니이, 왜 그래?”

연희는 갑자기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시계는 여전히 째깍거리며 가고 있었다.

“수, 수정아? 네가…………… 시계에…”

“으응? 응. 뻐꾸기가 매달려 있기에 내가 빨리 집으로 들어가 라고 했지.”

연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계 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틀림없었다. 분명히 두 개의 건전지가 들어 있어야 할 시계 안에는 건전지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시계는째깍거리며 가고 있었다. 연희가 떨리는 손으로 건전지를 집어 들려 하자 갑자기 건전지에서 파파팟 하며 푸른 불꽃이 튀었다.

“아아앗!”

놀란 연희는 그만 시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뻐꾸기가 뻐꾹 하고 길게 울었다. 연희는 놀란 수 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 었다.

“언니, 왜 그래?”

“수, 수정아, 너……….”

겁이 난 연희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문을 꼭 닫아 버렸다. 그리고 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연희 의 귀에 생생하게 울려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 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짜내어 봐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에 연희는 깜짝 놀라서 문에서 떨어졌다.

“언니이, 왜 그래?”

“아아…….”

“언니이이잉 왜 그래애!”

연희는 눈을 감고 생각을 해 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문 너머에서는 수정이 울고 있었다. 연희는 무섭다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문을 열자 수정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들어오더니 연희에게 꼭 안겼다.

“언니이 왜 그래애? 무서워. 이이잉.”

“응, 그래그래 미안, 미안하다, 수정아.”

연희는 등을 토닥거리며 수정을 달래려 애썼다. 오늘따라 무 슨 일이 있는지 아직 연호도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둠이 짙어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 까? 수정은 자기가 시계에 밥을 주었다고 했다. 어리니까 건전지 를 하나만 끼웠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약이 하나밖에 없는데 어 떻게 시계가 다시 간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수정이 시계를 내 렸을까? 시계가 걸려 있는 곳은 TV 바로 위라 의자를 놓아도 수 정의 손이 닿지 않는 위치였다.

“수정아, 너 전에 시계 밥 줄 때………….”

“으응, 언니.”

“그 시계를 어떻게 내렸지?”

“응? 응, 그건…….”

마루에서 뻐꾸기시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수정을 꼭 끌어안자 수정이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뻐꾸기, 뻐꾸기 소리가 좋아서…………… 아저씨에게…………..?

연희는 온몸이 덜덜덜 떨려 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어느 아저씨?”

다시 마루에서 기척이 들리는 듯했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고 수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수정의 눈은 어두운 곳이 없이 크고 맑았다. 그렇다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수정아, 어느 아저씨? 연호 오빠 말고?”

“으응.”

수정이 반쯤 열린 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저 아저씨.”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문을 와락 열어 젖혔다. 그러나 마루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앗!”

연희는 자기의 다리가 휘청 꺾이는 것을 느꼈다. 눈앞에 물체 가 거꾸로 혹은 머리 위로 휙 지나가는 것처럼 머리가 빙빙 돌았 고 몸이 휘청거렸다. 마루의 벽에는 분명 자신이 떨어뜨렸던 빼 꾸기시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째깍거리며 가고 있었다. 

“저 시계가 어떻게!”

연희는 이를 악물면서 사방의 전등을 모두 켰다. 그러고는 조 심스럽게 수정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방 안에 어 제 그 사람의 형체가 다시 나타난다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제 본 그림자는 헛것 같지가 않았다. 연호는 아무것도 아닐 거 라고 했지만 오늘 역시 어제와 비슷한 일을 겪은 연희로서는 예 삿일이라고 지나치기에는 석연치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집 안에는 어린 수정과 연희 단둘이었다. 연희의 심장 뛰는 소리가 더욱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연희가 스위치를 올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등 뒤편에서 수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오늘은 왜애?”

연희는 재빨리 수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수정아, 수정아!”

수정은 혼자였다. 시선이 가만히 벽 쪽을 향해 있었다.

“수정아! 왜 그래? 누가 누가 있어?”

“방금 아저씨가 왔어. 그리고….”

“그리고 뭐지?”

“아니야.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갔어.”

연희는 방의 창문을 확인했다. 현관문도 살펴보았다. 모든 문은 잠겨 있었다. 연희는 입이 쩍쩍 말라붙는 것을 느꼈다.

“수정아.”

“응, 언니.”

“그 아저씨 어느 쪽으로 갔지?”

“저쪽으로…………….”

연희의 말에 수정이 가리킨 곳은 아파트 외부와 통하는 벽이 었다. 연희는 까닭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으려 했 지만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언니 언니, 왜 그래? 왜?”

연희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을 했다.

“수정아, 그 아저씨가………… 대체………..”

그때 갑자기 현관의 벨이 울리자 연희는 놀라서 움찔했다. 수 정이 문을 열기 위해 쪼르르 달려 나갔다. 분위기가 어색한 참에 벨 소리가 나자 기뻐서 달려간 모양이었다.

“연호 오빠다. 헤헤.”

연희는 문을 열지 말라고 하려 했으나 그럴 틈이 없었다. 수정 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은 채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거기에 는 연호 대신에 눈매가 싸늘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수정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연희가 재빨리 달려 나와 수정을 자 신의 뒤로 돌려 세웠다.

“누, 누구세요? 뭘 원하시죠?”

“혹시…….”

연희는 남자의 말을 기다리는 대신 재빨리 고개를 숙여 작은 소리로 수정에게 물었다.

“수정아, 이 아저씨니? 아까 본 사람이?”

“으응? 아니이.”

남자는 연희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데도 다 들리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연희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행색은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지만 한쪽 손에 뭔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무슨 일로 오셨죠?”

“아, 실례가 안 되었으면 합니다. 방금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지 않았나요?”

“일이라뇨?”

남자는 오히려 수줍은 듯 말을 약간 더듬거렸으나 눈빛만은 매서워 보였다.

“글쎄요…….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뭔가 이상 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싶어서요.”

“나가세요! 그런 일 없어요!”

연희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무섭게 잠가 버렸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을 누가 믿어 준단 말인가? 연희 는 멀뚱멀뚱 서 있는 수정을 안았다.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 져 있는 수정이 연희의 얼굴에 뺨을 갖다 대고는 설움에 겨웠던 지 눈물을 흘렸다.

“수정아,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닐 거야. 아무 일도……………”


한참이 지나서야 연희는 평소의 침착한 상태로 돌아왔다. 시 간이 상당히 흘렀음에도 연호는 들어오지 않았고 어찌 된 일인지 매일같이 걸려 오던 부모님의 안부 전화도 오늘따라 오지 않았다. 수정은 졸린 모양인지 연희의 무릎을 베고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연희도 몹시 피곤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루의 벽에 뻐꾸기시계는 없었다. 연희가 발코니에 내다 놓은 것이다. 아까 수정이 아저씨가 왔다 갔다고 혼잣말을 한 다음부터 뻐꾸 기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었다. 연희는 라디오와 TV를 크 게 틀어 놓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마음을 심란하 게 하여 불안했기에 모두 꺼 버린 참이었다. 적막 그리고 고요. 친한 이웃이라도 불렀으면 좋으련만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그럴 수도 없었다. 친구와 전화통이라도 붙잡고 이야기할까도 생각했 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오직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그런데 오빠는 왜 이리 늦는 거야? 주위는 너무도 조용하다. 너 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연희는 문득 찬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스치는 감촉에 퍼뜩 정 신이 들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릿속을 엄습했다. 눈을 뜨기 가 무서웠다. 분명히 불을 켜 놓고 잠든 것 같았는데 불은 꺼져 있었다.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

연희는 손을 뻗어 무릎을 베고 자고 있을 수정을 찾았으나 수 정은 없었다. 이상했다. 눈을 뜨기가 무서웠고 또 눈을 떠서는 안된다고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부르짖는 듯했다. 그러나……………. 

“수정아!”

연희는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연희의 눈앞에서 수정이 푸르스 름한 불꽃에 들려서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막 열린 아파트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참이었다.

“수, 수정아! 안 돼!”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서 막 창문을 빠져나가려는 수정의 몸뚱이를 붙들었다. 수정을 감싸고 있던 푸른 불꽃이 지 지직 하는 소리를 냈으나 연희는 신경 쓰지 않고 수정을 감싸 안 았다. 푸른 불꽃은 환하게 빛나다가 잠시 멈칫했다. 열린 마루 문 너머 몰아쳐 오는 바람결에 연희의 긴 머리가 휘날렸다. 연희 는 수정을 안고 뒤로 물러서다가 소파에 걸려 넘어졌다. 푸른 불 꽃은 서서히 희미해지면서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사람의 형 상으로 변해 갔다. 얼굴 부분이 맺혀 형상을 이루자 눈동자가 빛 났다. 연희는 어쩔 줄을 모르고 암담한 기분으로 아직 잠들어 있 는 수정을 꼭 끌어안고 몸을 덜덜 떨었다. 눈을 감을 수도 없었 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고 머리칼은 자 꾸 뒤로 흩날렸다.

이제 눈앞의 그것이 완연한 사람의 모습을 띠어 갔다. 이목구 비가 또렷하고 흰옷을 입고 있었으며 눈빛이 몹시 빛났다. 눈빛 에는 까닭 모를 슬픈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귀신이 저런 것인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귀신의 이미지와는 좀 달랐으나 지금 연희는 너무나도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아가씨, 무서워 말아요.”

연희는 남자가 말을 하자 놀라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목에 걸고 다니던 묵주를 뜯어 남자에게 던졌 다. 저건 분명 귀신이야.

“저리 저리 갓!”

그러나 남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묵주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남자는 한 손으로 공 잡듯이 받았다. 남자는 장난기 섞인 듯한 얼굴로 묵주를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얌전히 장식장 위에 올려놓 았다.

“아가씨, 그 아이를 제게 주세요.”

“안, 안 돼, 안돼!”

연희는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아이를 달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얘긴가?

“울지 말아요. 아가씨. 이건 정해진 일이랍니다.”

“안돼, 안돼!”

연희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하늘을 가르고 길게 울려 퍼졌다.

“아아!”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탄식이 남자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아가씨는 내 모습을 봐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어서는 안 돼요. 나는 원래대로라면 아가씨를…………….”

남자는 연희가 있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푸른 불꽃이 남 자의 손에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연희는 공포에 질려서 있는 힘 껏 몸을 뒤로 밀었으나 딱딱한 벽이 굳세게 막고 있었다. 연희는 말을 잇지도 못하고 수정을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간간이 고개 를 저을 뿐이었다.

“아가씨, 어서 그 아이를 줘요.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랍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그러나 연희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요!”

남자가 소리를 치자 남자의 전신에서 푸른 불꽃이 폭풍우처 럼 터져 나왔다. 터져 나온 불꽃은 허공에서 엉켜 커다란 두 줄 기 뱀의 형상을 이루면서 연희에게 달려들었다. 연희는 아찔해 져 눈을 꼭 감으면서도 수정을 힘차게 부둥켜안았다. 연희는 미 친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때마다 검은 머리칼이 사방에 물결치면서 흐트러졌다. 두 갈래의 푸른 기운은 연희가 있는 쪽 으로 덤벼들듯이 몰아쳐 오다가 남자가 손짓을 하자 아슬아슬하 게 연희를 스치듯 피해서 다시 남자의 등 뒤로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이런・・・・・・ 내가, 내가 어쩌다가…………….”

남자의 한숨 소리에 연희는 눈을 떴다. 커다란 눈은 겁에 질리고 눈물에 젖어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아! 나, 나는………… 이건…… 아………….”

남자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연희가 이해할 수 없는 손짓을 했 다. 뭔가 이상했다.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하하하하핫!”

남자가 소리를 치자 아파트의 커다란 유리문이 와장창 깨질 것처럼 진동하고 집 안의 물건들이 지진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 다. 남자가 엄청난 힘을 쏟는 것을 보았지만 도리어 연희에게는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씩 옅어져 갔다. 그렇게 강하면서 자신에 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자가 연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나는 이 작은 아이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에 요. 이 아이는 자질이 있습니다.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자질 이요. 자 봐요!”

남자가 손짓을 하자 그의 손에서 사람의 손 모양을 한 푸른 불 덩어리 같은 것이 퍼져 나왔다. 그 손은 마루 저편에 있던 커다 란 테이블을 성냥갑처럼 들어 올려 다른 편에다 옮겨 놓았다. 손 모양의 푸른 불덩어리는 위에서 확 하고 다시 엉키더니 어느새 붉은 장미 꽃다발로 변해 버렸다.

연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건 마술인가? 아니, 귀신의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두려운 기분에 연희는 기도문을 생각나는 대로 읊어 댔으나 남자는 오히려 그 소리를 듣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것 봐요. 아가씨.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하등의 이 유가 없어요. 그건 단지…………….”

남자가 다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순 간, 이번엔 갑자기 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 물체가 제 비처럼 날아들었다. 마루의 유리문이 퍽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 리고 부서져 나가자 남자는 대번에 얼굴색을 바꾸더니 고함을 쳤다.

“이건!”

삽시간에 남자의 모습은 푸른 불덩어리로 바뀌었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드는 은빛 물체를 요리조리 피하더니 연기처 럼 맞은편 벽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지고 말았다.

“다음에 봐요. 예쁜 아가씨.”

은빛 나는 물체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벽을 향하다 휘잉 솟구치더니 공중에서 정지했다. 이 예기치 못할, 아니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상황에 연희는 거의 졸도하 기 직전이었지만, 그래도 품에 안고 있는 수정을 생각하고는 있 는 힘을 다해 눈을 치켜뜨고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연희는 괴상 한 푸른 덩어리보다 칼이 더 무서웠다. 이건 도대체・・・・・・ .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당탕탕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한 사람은 연호였고 또 한 사람은 아까 벨을 눌렀던 바로 그 남자였다. 연호가 소리를 쳤다.

“연희야, 무슨 일이야! 연희야, 수정아!”

연희는 긴장이 풀렸는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의식이 몽 롱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허공에 떠 있던 은빛 물체가 날아 뒤에 서 있던 남자의 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슴푸레하게 보였고 그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먼 산에서 메아리치듯 아련하게 들려왔다.

“저럴 수가……………. 엄청난 녀석이군.”

연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더 이상 버티는 것은 이젠 한계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누군가 냉수를 연희의 입에 흘려 넣었다. 연호 오빠였다. 연희 는 뭐가 뭔지 모를 혼돈 속에서 머리를 한 번 털고는 정신을 차 렸다. 마루 구석에 아까 그 남자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숙이 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빠, 수정이 수정이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연희를 연호가 말렸다.

“아무 일도 없다. 수정이 방에 눕혀 놨어. 잠들었단다.”

“흐응, 그래?”

연희는 안심이 되었던지 소파에 몸을 묻다가 문득 벽에 걸려 있는 뻐꾸기시계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 오빠, 저 시계, 저 시계는?”

“음?”

“저건 분명히 내가 떼어서 치웠는데…………. 오빠가 걸어 놓았어?”

“아니?”

“그러면 저게 왜?”

“제가 걸었습니다.”

저쪽에 있던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표정 없는 얼굴에 두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왜죠? 무섭다고요!”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저 시계, 제가 조사해 보았습니다.”

남자는 이야기하면서 오른손에 쥐었던 것을 펴 보였다. 그건 뻐꾸기시계 안에 들어 있던 건전지였다.

“이게 문제입니다.”

남자가 오른손에 힘을 가하자 그 건전지에서 아까 연희가 보 았던 푸른 불길이 바지직 하면서 일어났다. 연호의 눈이 휘둥그 레졌고 연희의 입에서도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남자가 손에 힘을 주자 손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더니 건 전지에서 솟은 불길이 다시 건전지 안으로 들어가는 듯하다가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건전지를 힐끗 훑어보고는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도망쳤군. 방금 보인 불꽃은 유체입니다. 엘리멘탈이라 하는 거죠. 아가씨는 이상한 일을 많이 보셨겠지요? 저 시계가 이상한 동작을 한 것도 이것이 작용한 탓입니다.”

연희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 서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연호가 입을 열었다. “이분은 우리가 어제 이상한 일을 당한 것을 알고 나를 찾아오 신 분이야. 성함이?”

“현암이라고 합니다. 이현암.”

연희의 눈에 들어온 뻐꾸기시계의 정지된 숫자판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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