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1권 9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2 : 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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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1권 9화 – 그 남자는 매일 밤 나를 부른다 2 : 유체


유체

자신을 퇴마사라고 밝힌 현암은 연희와 연호에게 어제의 일 을 자세히 물었다. 남자의 모습을 한 형상이 벽 속으로 들어갔 던 일, 뻐꾸기시계가 건전지 없이도 가고 제 스스로 벽에 걸렸던 일, 수정의 몸이 허공에 떴던 일과 푸른 불꽃, 불꽃이 행했던 이상한 일들. 현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어제 그 남자가수정이를 데려가야 한다고 했습니까?”

“예.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위대한 힘을 가지게 해 주려는 거라고 했어요.”

“위대한 힘……. 그러면서 이상한 이적을 보였다 했지요?”

“예. 믿어지지 않아요. 몸 전체에서 푸른불꽃이 일어나고……………”

“그것이 유체입니다. 그렇게까지 자유자재라면…”

“그런데 유체가 무엇이죠? 귀신인가요?”

“사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분 신이라고나 할까요? 육체와 영혼의 중간 단계 정도라 할 수 있 지요.”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벽을 통과하고 몸 전체가 푸른 불꽃으 로 바뀌었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면, 이 집으로 들어온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본체가 아니고 유체였던 것이 분명 했다. 그러나 유체를 이용하여 비록 작은 꼬마라 할지라도 한 사 람의 몸을 들어서 옮기고, 마루의 무거운 테이블을 유체를 나누 어서 그 한 줄기로 끌어당기며, 유체를 다른 물체의 모습으로 마 음대로 바꾸어서 보일 수 있다면, 그자의 능력은 놀랄 만한 경지 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놈의 유체는 작게 갈라져서 따 로 행동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건전지 속 에 숨어서 시계를 멋대로 가게 하고 장난을 친 작은 유체가 그 증거였다. 현암이 공력을 가하자 유체는 원주인에게로 돌아간 듯했고 현암도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 정도의 유체를 몸에서 자유로이 뽑아내고 물리력을 직접

행사할 수 있다면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그 능력은 참으로 대단한 겁니다.”

그러면서도 현암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자가 왜 수정이라는 아이를 직접 데리고 가지 않고 연희에게 일 일이 그런 설명을 하려 한 것일까? 연희의 말대로라면 그자는 악 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나 영적인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여 어린아이를 꾀어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봐줄 수는 없 었다. 그리고 연희는 수정을 안고 있을 때 유체 두 줄기가 덤벼 들다가 사그라졌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연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수정을 데려가는 것은 간단했을 터인데.

“그런데 어째서……….”

현암은 말을 멈추고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연희를 쳐다 보았다. 오밀조밀하게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커다란 검은 눈과 잘 조화를 이룬 선량한 얼굴이었다. 어딘가 장난스러운 어 린애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착하고 차분해 보였다. 거기에 허리 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늘씬하고 훤칠한 키가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눈을 크게 뜨고 현암을 지켜보 는 검은 눈동자는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하고 간 말이 어떤 것이었죠?”

“저・・・・・・ 그건 다음에 봐요. 예쁜 아가씨라고……………”

현암은 연희의 얼굴이 여전히 창백한 가운데도 양 뺨이 불그 스름해지는 것을 보았다. 현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연희에게 반했다는 말인가? 단 한 번 보고? 현암은 고개 를 흔들며 설마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능력을 익히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자질도 물론이지만 엄청나게 고되고 혹독한 수련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과정을 겪은 자가 아무리 아름답다 고 해도 한 번 본 여자 때문에 마음먹은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것 은 현암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돌연 현암은 남자 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걸 알아내야 해요.”

말을 마치고 현암은 수정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희와 연 호도 아무 말 없이 현암의 뒤를 따랐다. 현암은 상단전이 막혀 있 는 관계로 자세히 투시할 수는 없었지만, 태극패로 비추어 보면 수정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태극패의 빛으로 감추어진 영의 진면목을 투시하는 수법은 근래에 현암이 계속 수련에 힘썼기 때문에 과거보다는 많이 향상되었다.

수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랑곳없다는 듯 쌔근쌔근 자 고 있었다. 현암은 수정의 머리맡에 서서 태극패를 꺼내 들고 공 력을 가했다. 태극패의 동경에서 나온 푸른빛이 수정에게 비춰졌다.

“앗!”

연희와 연호는 빛 사이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수정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투명하게 비추어진 수정의 유령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은빛의 줄이 한 가닥 번쩍이고 있었다. 현암이 두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연희는 해괴한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암의 손짓에 이를 악물 고 울음을 참았다. 연호도 집중했다. 현암은 두 사람에게 설명을 미리 해두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어쩔 도 리가 없었다.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 유체가 빠져나오는 것은 흔 하지 않은 일이다. 현암은 계속 빛을 투사하면서 빠져나온 수정 의 유체를 살폈다. 유체와 자고 있는 수정의 몸 사이에서 밝게 빛나 보이는 것은 유체와 육신을 연결하는 은줄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었다.

연희가 신음을 흘리다가 곧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연호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몸을 떨고 있었고 현암은 계속 온 신경을 쏟아 아 물아물하게 보이는 수정의 유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수정의 유체는 계속 자신의 몸에서 간헐적으로 멀어졌다가 가 까워지기도 하고, 형체도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지기를 반복 하고 있어서 좀체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자세히 본 결과 현암은 어디가 이상한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대강 짐작이 가자 현암은 연희와 연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공력을 끌어모았다. 현암 자신도 전율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으나 옆의 두 사람이 눈치채서는 곤란했다.

“연희 씨?”

현암은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서 연희의 귓전에 대고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예, 예?”

“쉿! 조용히・・・・・・ 낮은 소리로요. 자, 안심하세요. 별일은 아닙니다.”

연희도 현암의 말에 따라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뭐죠, 저건? 아아, 무서워요.”

“차차 말씀드리지요. 일단은 수정이를 깨우세요.”

“깨우라고요?”

“예. 어서, 어서요.”

현암의 나직한 말소리가 갑자기 빨라졌다.

“어떻게요?”

“조용히 부르세요. 놀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침착, 침착하게요.”

“뭐라고 해야………..”

“자 침착, 침착하셔야 해요. 그냥 조용히, 아침에 깨우듯이 조용히요.”

연희는 울먹이며 망설이다가 마음을 새롭게 먹는 듯했다. 연희의 입에서 수정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정아 수정아?”

연희가 손을 뻗어 수정을 깨우려는 것을 현암이 재빨리 제지 했다. 현암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건드리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수정아, 일어나렴. 수정아.”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일들 이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지금 눈앞의 이 이상한 일들은 또 어 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연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수정아!”

갑자기 수정의 유체가 연결되어 있던 은줄이 팽팽해지면서 유 체가 왈칵 몸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수정의 유체는 뭔가에 걸린 듯 더 이상 몸 쪽으로 당겨지지 않았다. 현암이 왼팔을 허공으로 떨치자 월향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꺄아아악!

월향의 귀곡성이 울려 퍼지자 연희는 얼떨결에 침대를 부여 잡고 얼굴을 묻었고 연호는 놀란 나머지 수정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수정아!”

쏘아져 나간 월향은 자고 있는 수정의 왼쪽 공간으로 예리한 선을 그으며 날아갔고 허공에서 나타난 푸른 불꽃은 월향이 가로지르자 둘로 갈라져 버렸다. 연호의 손이 막 수정에게 가 닿으 려는 순간, 손이 자유롭지 않은 현암이 급한 나머지 연호를 발로 차서 밀어내 버렸다.

“연희 씨, 어서 수정이를 깨워요. 어서!”

월향은 반원을 그리며 푸른 불덩이를 공격했지만 푸른 불꽃은 넷으로 갈라져 수정의 사지에 엉키기 시작했다. 월향은 행여 수 정의 유체가 상할까 염려한 것인지 허공에 멈칫하면서 귀곡성을 질렀다. 현암의 고함 소리에 놀란 연희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수정아 수정아!”

연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정의 유체가 쭈욱 몸 안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네 개로 나뉜 푸른 불꽃은 안간힘을 쓰고 있 었으나 수정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려는지, 유체는 몸 안으로 거의 다 들어가고 있었다. 현암은 태극패를 쥔 손에 공력을 모으 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현암의 얼굴에서는 빗물 같은 땀 방울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푸른 불꽃들은 수정의 왼손에 뭉쳐지면서 유체를 당기기 시작했다. 현암은 속으로 제길 하고 외쳤다.

“연희 씨, 수정이의 손을!”

“예?”

“어서요! 다른 방법이 없…………….”

연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수정의 손을 잡자, 밖으로 끌려 나오던 유체가 순식간에 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시에 푸른 불꽃 뭉치는 위로 튕겼다.

“야아아아!”

수정의 유체가 태극패의 빛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자 현암은 기합을 지르면서 태극패에 공력을 집중했다. 태극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돌연 밝아지면서 푸른 불꽃은 마치 감전된 듯이 움 찔하더니 파르르 떨었다.

꺄아아악!

월향검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푸른 불꽃 덩어리를 향해 쏘아 져 나가서 정통으로 한가운데를 꿰뚫어 버렸다. 그러자 푸른 불 꽃은 순식간에 빛으로 화한 듯, 섬광이 방을 가득 메웠다가 사라 져 버렸다. 연호와 연희는 창졸간에 엄청난 빛이 눈에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감은 연희의 귀로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수정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앙! 언니 오빠………… 뭐야?”

연희는 슬며시 눈을 뜨고 수정의 침대로 다가갔다. 수정이 무서웠던지 연희에게 안겼다.

“언니, 나 무서운 꿈 꿨어. 아아앙.”

연호도 눈을 뜨고는 현암을 바라보았다. 침대 머리맡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현암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머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새벽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수정은 조금 칭얼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지만 연희와 연호, 현암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연호가 입을 열었다.

“현암 씨는 정말 놀라운 분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저희의 일을 아시게 됐습니까?”

“우연이었습니다. 어제저녁에 저는 누구의 소개로 통역 일을 부탁하려고 여기에 왔었습니다. 전화가 통 안 돼서요.’

그러고 보니 연희는 영 뒤숭숭한 기분이 들어서 어제는 의뢰 를 받지 않으려고 아예 전화선을 뽑아 놓고 있었다. 연호는 고개 를 끄덕였고 현암은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이상한 유체가 이 집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달려온 것이지요. 제가 너무 성격이 급해서 그만…………….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연희 씨.”

연희는 엊저녁에 현암이 이상한 말을 하자 문을 그냥 닫아 버 린 것을 기억해 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때는 너무 놀라서………….”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연호씨를 만나서 같이 온 거죠.”

연호는 아직도 무서움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암의 왼 팔에 있는 월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저 칼은 어떻게 스스로 날고 비명을 지릅니까? 저도 너무 놀라서………….”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칼은 월향이라 하지요. 제 분신이나 다름없답니다.”

“그런데 칼이 어떻게?”

연호는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 놀랐는지 몸을 움츠러뜨렸으나 현암은 슬쩍 미소만 짓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연희가 현암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것은 뭐죠? 아까 유체라는 말을 하셨는 데 그것이었나요?”

“예. 전에 연희 씨가 보셨다던 남자의 짓일 겁니다. 대단한 자 같더군요. 스스로의 의지와 영력으로 유체를 만들어 내고 그 유 체로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을요? 그리고 그 유체라는 것은 귀신하고는…………. “귀신은 아닙니다. 산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육신이 없는 분신 이라고나 할까요? 아까 연희 씨가 묵주를 던져도 반응이 없었던 것은 그 유체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유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너무 겁먹지는 마세요. 상대는 특이한 능력이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요.”

“예. 그러면 죽은 사람의 유체가 남아 있을 수도 있나요?”

“드물지만 몇 년 정도는 가능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유체를 백 (魄)이라고 여겨서 그 백이 묘소에 남아 후손들을 돌봐준다 믿 었습니다. 그래서 풍수를 보고 지성을 드리고 했으니까요. 전통 은 다 이유가 있는거랍니다.”

연희는 끔찍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의문점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입을 열려는 연희에 앞서 연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왜? 왜 수정이를 노리는 거죠?”

“흠!”

현암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연호의 물음에 답했다.

“수정이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아까 저는 보 았습니다. 희미한 수정이의 유체를요. 둘로 나누어지려는 유체를 말이죠.”

“예?”

둘의 안색이 싹 변했다. 현암은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수정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잠을 자다가 유체가 잠시 몸을 떠나는 일은 자주 있어요. 그냥 산책하는 정도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러나…………….”

연희와 연호는 유체가 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지라 소름이 쭉 끼쳤다. 그러나 현암의 확신에 찬 어투와 안색을 보고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수정이의 영적인 능력은,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약간의 자질이 있는 정도 같군요. 수정이는 물론 정상적인 아이입니다. 영력이란 건 누구나 약간씩은 갖고 있는 것이니 이상하게 여기 실 것 없고요. 그러나 그런 능력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구태 여 들추어낼 필요가 없는데 푸른 유체의 주인은 아마도 수정이 의 그런 능력을 뭔가에 이용하려는 것 같아요.”

“뭐에 이용하죠? 수정이는 그냥 어린아이예요!”

“저도 그건 모릅니다. 아무튼 그자가 좋지 않은 일을 꾸미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연희는 그 남자의 얼굴을 진짜 얼굴인지 유체로 만들어 낸 얼굴인지는 모르지만-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악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현암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때도 마 음만 먹었으면 수정을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냥 갔는지, 그리고 지금은 또 왜 그리 사악한 수단을 쓰는 것인지 이해가 가 지 않았다. 어쨌든 그 남자를 좋게 볼 수만은 없었고 일단 그런 생각은 지워 두기로 했다. 충격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졌던 것이다. 잠시 유체와 관련된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현듯 현암은 얘기의 화제를 돌렸다.

“서연희 씨에 대해서는 백호 씨에게 들었습니다. 놀랄 만큼 많 은 언어에 통달하신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에게 꼭 도 움이 될 거라는 소개를 들었지요.”

“아! 백호라면・・・・・・ 그 젊은 검사님?”

“예. 이미 여러 번 중요한 일을 해 주셨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저야 뭘 그냥 단순한 통역을 해 드린 것뿐이죠.”

“무슨 겸손의 말씀을. 말이 그렇지 10개 국어를 능란하게 하 시는 분이 흔합니까? 그것도 각 언어의 고대어까지 말입니다.”

연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심심풀이 삼아 12개 국어를 익혀 놓 은 것은 연희는 남에게는 10개 국어만 한다고 이야기해 왔 다-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였지만, 자신이 그 언어들 의 고대어에도 재미를 느끼고 독학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현암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 어갔다.

“저희는 이번에 백호 씨와 함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해외 에 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상당히 비밀을 요 하는 것이고 또 언제 어느 때에 생소한 언어나 문자에 맞부딪히 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미 이런 일을 겪으셨으니 구태여 제가 어 떤 일을 하는지까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저보고 이런 일들을 하러 같이 해외로 가자는 건가요? 세상에……”

연희는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해외까지 같이 다니자고?

“힘드시군요. 죄송합니다.”

현암은 다시 한번 정중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연희는 다소곳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로 거절했다. 이런 일을 당하고나니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여자의 몸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외국에까지 나가서 가이드 노릇을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탐탁지 않았다. 연희의 거절에 현암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이 중요하더라도 본인의 의사만큼 중요한 것 이 없으니. 요상한 일을 바로 코앞에서 경험한 사람이라 더 이상 이런 일을 겪지 않겠다는 기분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연희는 현재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고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한 연희의 태도를 보고 현암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옛 기억 이 조금씩 살아나자 현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히려 연희 쪽 에서 현암의 얼굴에 떠오른 어두운 표정을 읽어 내었다. 그런 표 정은 아무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기분이 나 쁘다거나 실망한 것이 아닌・・・・・・・ 연희는 이 남자에게도 뭔가 아 픈 기억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곤란합니다. 부모님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실 테고.”

분위기가 묘해지자 연호가 쐐기를 박았다. 현암은 여전히 무 표정하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도 묘한 기분이었 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는 연희의 어학 실력이 꼭 필 요했지만 그 험악한 일에 이 착해 보이는 아가씨를 끼어들게 하 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이었겠지요. 없던 것으로 하고 다른 분을 알아보겠습니다.”

“저…….””

연희는 미안한 마음으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은 연희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연희의 커다란 눈동자는 검은 호수처럼 시 선을 저절로 빨아들일 정도로 깊었다. 갑자기 팔목에서 월향이 꿈틀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현암은 연호에게 눈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연희 씨.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큰 신세를 졌지요. 수정이는 현암 씨 아니었으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자는 아마도 유체가 파괴되는 바 람에 큰 타격을 입었겠지요. 그러나 그 유체에는 은줄이 없었습 니다. 그건 유체가 본래의 유체에서 갈라 낸, 뭐랄까… 엘리멘탈 이나염체의 성격을 띤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러니 그자는 회복 되는 대로 다시 수정이를 노릴지도 모릅니다.”

현암의 말에 연호와 연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만약 그자가 또 유체인지 염체인지를 보내어 수정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누가 막는단 말인가? 그러나 현암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제가 다시 오지요. 제 동료 중에는 그런 것 을 막는 부적을 만들 수 있는 아이도 있고, 축복을 내려 줄 수 있 는 분도 계십니다. 당분간은 조용할 터이니 그사이에 제가 그 사 람들과 같이 오든지, 아니면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쪽 부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현암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받고 주고,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통을 받거나…………….” 

현암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돌렸다.

“너무 시간을 지체했군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리로 연락을 주세요. 그러면 이만.”

현암은 명함도 아닌 종이쪽지에 갈겨쓴 전화번호를 탁자 위에 놓고 인사도 나누지 않고 훨훨 날듯이 문을 나섰다. 연희가 문을 다시 열고 빨리 나가 보았으나 현암은 계단으로 내려갔는지 사 라지고 없었다. 연희는 두어 층 계단을 내려가 보았으나 역시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희는 계단을 올라와 자기 집 문으로 들어 섰다. 그러는 연희의 모습을 오히려 두 층 위의 계단에서 현암은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삼일 간은 별일 없을 것이 라고 현암은 생각했다. 일단 박 신부의 부상이 치료되면 여럿이 같이 힘을 모아 완전히 그자를 잡아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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