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5화 –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5 : 실마리
실마리
박 신부와 준후 그리고 월터 보울이 캐드베리 마을에 도착하 자 박 신부는 일단 차에서 내리자고 했다. 시끄러운 차를 몰고 유령에게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일행은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캐 드베리 힐에 짙게 낀 안개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캐드베리 힐 초입의 자그마한 경찰서였다. 경찰서는 사방에서 걸려 오는 전화와, 바쁘게 뛰어다 니는 경찰관들로 마비되어 있었다. 월터 보울이 경찰서장인 듯 한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말을 걸었으나, 그는 월터 보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계속 서류들을 뒤적이고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요즘 이 근처에 고대 기사들의 유령이 많이 나타난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에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고 신고도 계속 들어와서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 마당에, 낯선 사람이 찾아와 꼬 치꼬치 질문을 해 대니 못마땅한 것이 당연할 수도 있었다. 월터 보울이 여러 차례 말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장은 미꾸라 지처럼 빠져나가 자신의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월터 보울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박 신부에게 말했다.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군요. 어떻게 하지요?”
“글쎄요………….”
준후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고 벽에 걸 려 있는 커다란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월터 보울은 다른 경찰들 몇몇에게도 정보를 알아내려 했으나 그들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건성으로 “그런 것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나 “헛 소문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따위의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박 신부는 준후가 무얼 하고 있나 보려고 구석으로 갔다. 준후 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일대의 지도였다. 지도에는 붉 은 압정이 코스를 그리듯 묘하게 꽂혀 있었다. 박 신부가 월터 보울을 손짓해서 불렀다.
“미스터보울, 지도에 지금 꽂혀 있는 점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그들이 구석에 처박혀 지도를 쳐다보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한 경찰관이 지겨운 듯 화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네? 어디라고요? 네, 네. 유령? 원 참, 정신 차리시고 스카치 라도 한잔하세요. 정말이라고요? 예, 알겠습니다. 예, 알았다니 까요! 가능한 한 빨리 조치하도록 하지요.”
경찰은 짜증스러운 듯이 전화를 끊고는 구석에 있는 세 사람 을 힐끗 훑어보며 벽에 붙어 있는 지도에 붉은 압정 하나를 꽂 았다.
박 신부와 월터 보울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붉은 압정들 은 유령이 목격된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했다. 방금 꽂힌 압 정을 보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유령들은 캐드베 리 힐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형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
우선 박 신부는 마지막 압정이 꽂힌 곳으로 가서 유령부터 만 나고 싶어 했지만 월터 보울이 말렸다.
“목격자들의 이야기부터 하나씩 들어 보도록 합시다. 우리도 유령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단서를 잡을 수 있겠지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유령들이 금세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실마리를 잡아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들은 영국 경찰 수사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심층부까지는 들어갈 수는 없 었지만, 외따로 떨어진 일반 자료실에 있는 컴퓨터에는 현재 벌 어지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내용이 데이터로 파일링되 어 있었다. 한쪽 구석 모니터 앞에 앉은 윌리엄스 신부가 익숙한 솜씨로 단말기를 조작하며 말했다.
“저희가 경찰에서 해결하지 못한 몇 가지 사건에 도움을 준 적 이 있어서 이나마 가능한 것이랍니다.”
윌리엄스 신부가 키보드를 두드리자 화면에 현재 일어난 사건들의 리스트가 나타났다.
Teodor Vaans
Joseph Takitus
Euripe Kitten
Julius Decker
Octavia Kruger
Gordon Caesar
이렇게 여섯 명의 이름이 모니터에 표시되었다.
“이 사람들이 현재 살해된 사람들입니다. 경찰에서는 이 일을 ‘C 사건’이라 부릅니다. 커스(Curse), 즉 저주에 의한 살인일 거 라고 생각하고 반장난삼아 이름을 갖다 붙인 것 같습니다.”
현암과 승희는 한 명 한 명 그 사람들의 파일을 보여 줄 것을 요청했다. 경찰의 기록도 아까 읽은 내용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 으나 훨씬 자세했다. 윌리엄스 신부가 전문 용어들을 해석해 주었다.
– 테오도르 반스 : 56세, 남성, 식물학자
• 런던 공항 근교에서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어느 창고 기둥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발견.
• 사인 : 목이 잘림.
• 혐의자 : 정신 이상자의 범행으로 추정.
– 조셉 타키투스: 47세, 남성, 상인
• 스톤헨지의 외곽 마을의 간선 도로변에서 발견.
• 사인 둔기로 목을 강타당하여 목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거의 잘려 나간 상태.
• 혐의자 :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
– 에우리페 키튼: 25세, 여성, 대학생.
• 런던의 그리니치 거리의 뒷골목에서 발견.
• 사인 등에 깊숙이 그어져 몸을 거의 둘로 쪼갠 깊은 칼자국.
• 혐의자 : 강도 또는 정신 이상자의 범행으로 추정.
– 줄리우스 데커: 43세. 여성. 가정주부.
• 런던의 윈터힐 3번 가의 뒷골목에서 눈이 빠져나간 상태로 발견.
• 사인 : 몸에 여러 곳의 깊숙한 칼자국
• 혐의자: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
– 옥타비아 크루거 : 34세, 남성, 회사원
• 런던탑 부근에서 머리가 깨어진 시체로 발견.
• 사인 : 두개골 파열. 대량의 출혈이 동반.
• 혐의자 : 강도 또는 사고사로 보임.
– 고든 케사르 : 50세, 남성, 무직.
• 스톤헨지에서 난자된 시체로 발견.
• 사인 : 과다 출혈.
• 혐의자 : 드루이드 복색의 신원 미상의 두 남자.
그다음 파일은 각 살인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 스크랩이었다. 시간순으로 정리해 보니 테오도르 반스의 사체가 발견된 것이 가장 먼저였고, 그다음이 조셉 타키투스, 에우리페 키튼, 줄리우 스 데커, 옥타비아 크루거, 가장 최근에 발견된 것이 고든 케사 르였다. 신문 기사들을 보니 ‘면도날 잭의 부활’이라는 타이틀이 타키투스와 키튼의 사체가 발견되었을 때부터 매스컴에 오르기 시작했고, 그 이외에도 얼토당토않은 기사들이 지면을 장식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고 샅샅이 뒤졌으나 도움이 될 만한 사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컴퓨터로는 중요한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따라서 경찰 측 의 조사 과정이나 혐의자들의 중요 정보는 하나도 없었고, 일반 적인 자료들만 열거되어 있었다.
현암은 실망스러웠으나 그래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려 고 파일들을 열심히 읽었지만 서너 시간이 지나서야 그 파일들 에 담긴 내용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 말고 또 관계된 죽음이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신부님이 생각하시길 이 사람들을 제물로 하여 내린 저주로 살해당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기록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은 하나로 분리되어 있지 않을 테 니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윌리엄스 신부는 이렇게 말하면서 컴퓨터를 조작하기 시작했 다. 제일 먼저 테오도르 반스의 사체가 발견되었을 무렵, 역시 비슷한 시간에 사체가 발견된 사건 기록이 있었다. 그 사람은 외교관이었는데 자기의 집무실에서 목을 매단 시체로 발견되었다. “테오도르 반스가 머리가 잘리고 거꾸로 매달린 채로 발견되 었다고 했지요? 유사성이 있을 것도 같은데.”
승희가 중얼거렸다. 현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관 련된 파일을 하나하나 철저하게 검토했다. 그러는 사이에 꽤 시 간이 지났는지 바깥은 어둑어둑해졌다.
박 신부와 준후, 월터 보울은 경찰서의 지도에 붉은 압정으로 표시된 위치를 자신들이 갖고 온 지도에 옮겨 찍은 뒤, 차를 타 고 그곳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점은 경찰서에서 멀 리 떨어지지 않은 농가였다.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어떤 농부가 눈이 동그래져서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열 명, 아니 열다섯 명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창과 칼을 든 기사였어요. 아니, 아니, 갑옷은 입지 않았습니다. 투구를 썼고 망 토를 두르고 있었을 뿐이에요. 아아! 정말 얼마나 무서웠는지. 말발굽 소리도 들렸어요. 틀림없이 들렸습니다. 열 명, 아니 열 다섯 명! 오, 하느님 내가 본 것을 나도 믿지 못하겠어.”
농부가 장황하게 떠들어 대는 소리에 박 신부는 월터 보울에 게 다음 장소로 가자고 눈짓을 했다. 저렇게 수다를 떠는 사람에 게서 목격담 이외에 더 이상 증거가 될 만한 것은 기대할 수 없었고, 또한 너무 지체하다가는 주위를 돌고 있는 유령 기사들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다음 목격 장소는 그곳에서 이백 미터쯤 떨어진 방앗간이었 다. 이곳에서도 목격자인 할머니가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 고 있었다. 할머니는 지쳤던지 사람들을 피하고 더 이상 얘기하 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증언을 들을 수는 없었다. 월터 보울은 재빨리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려 했으 나. 오히려 사제복을 본 할머니가 먼저 박 신부를 찾았다. 가톨 릭 신자인 듯했다.
“오, 신부님. 구원을 내리소서. 너무나 무섭습니다. 너무나.”
비록 얼굴색이 다른 사람이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간절했다. 사제복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줄은 박 신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박 신부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했다.
“진정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보셨기에 그렇게 놀라신 겁니까?”
“기사예요 기사 기사의 유령입니다. 오! 대낮이었는데도…..”
“그래요? 얼마나 되지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한 명이요. 방앗간에서요. 갑자기 땅에서 솟아 나왔어요. 아 아! 그 유령……. 말을 타고 있었고 얼굴은 인상을 잔뜩 쓴 채 커다란 창을 들고 방앗간 바닥에서 솟아올랐어요. 아이고 하느님, 하느님!”
할머니는 다시 흥분 상태에 빠진 듯 너절한 말들을 늘어놓았 다. 박 신부는 할머니의 말에 대강 대답하고 달래어 주면서도 속 으로는 섬뜩했다. 방앗간 바닥에서 유령이 솟아 나오다니……………… 이 할머니는 수십 명-그러니까 아까 농부 말에 의하면 열 명에 서 열다섯 명 사이일 것이라고 말한에 달하는 유령 기사 부대 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유령 기사는 말을 달려서 나가 버렸 다고 했다. 땅에서 솟아나와 어디론가 달려간다? 이것은 일종의 호출이나 소환이 아닐까?
월터 보울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를 박 신부에게 전했 다. 그 시간에 바깥에서 일하고 있던 할머니의 딸이 하는 말에 따르면, 십여 명의 말을 탄 기사의 유령들이 자기 옆을 지나갔다 는 것이다. 딸은 기절하여 병원에 있다고 했다.
흥분한 할머니를 안심시킨 뒤, 셋은 계속하여 지도에 그려진 대로 한 곳 한곳 탐색해 나가기 시작했다.
탐색을 하다 보니 하나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군은 처음엔 열 명에서 열다섯 명 정도였지만 그 뒤 캐드베리 힐 주변 의 각 농가나 공터, 광장과 언덕배기 등등에서 새로운 유령 기사 들이 솟아나와 그들에 합류했고 나중에 가서는 사십 명 이상의 무리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사십 명. 그사이에 수십 명이 늘어났습니다. 지금은 아직 밤도 아니에요. 안개가 많이 끼어서 햇빛이 잘 비치지는 않지만 해가 지기 전인데도 유령들이 어슬렁거리고 땅에서 솟아나다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부님?”
월터 보울이 묻자 박 신부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에게도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자 준후가 오히려 명확한 답변을 내려 주었다.
“어떤 힘에 의해서 소환된 것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기사들은 아마 전쟁에서 희생되었거나 해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랜 세월 머물고 있었던 지박령이겠지요. 각각 다른 곳에서 죽음을 당해 잠들어 있다가 누군가의 부름을 받아서 하나둘 모이고 있는 겁니다.”
“부름을 받아서 모인다구?”
“예, 소혼술일 수도 있고, 그중 제일 강한 영의 부름일 수도 있 어요. 그들과 접촉을 해 봐야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기사의 영들을 소환시킨다면…………. 그 기사들의 영들을 소환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월터 보울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더 왕……. 처음부터 그런 예감이 들었지만 이 사건은 아 더 왕과 연관된 사건이 틀림없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 겠지만 자신의 죽은 기사들의 영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걸까요?” “물론 그럴 확률도 있지요. 그렇지만 무턱대고 무조건 아더왕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이 일들이 아까 얘기한 대로 드루이드들의 술수나 연속 살인 같은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월터 보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곧장 유령 들이 있는 곳을 찾아내야지요.”
“그 일대로 가서 수색해 볼까요? 지금으로선 유령 기사들의 위치를 알아내기가 어려우니까요.”
“아닙니다. 여기 준후의 힘을 빌리면 간단합니다. 준후야, 알 아봐 줄 수 있겠지?”
준후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 던 준후가 눈을 뜨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남쪽, 그러니까 저쪽 방향에서 영기가 느껴지고 있어요. 상당 히 많은 것 같군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에요.”
박신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근방까지만 차로 가고, 그 이후부터는 도보로 접근하도록 하지요.”
월터 보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벌써 투시를 마친 겁니까? 저 자그마한 꼬마가 정말 그렇게까지 자세한 것을 알아낼 수 있습니까?”
“그냥 알아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영의 위치를 짚어 내는 일 정도는 준후에게 쉬운 일이지요.”
“와우!”
월터 보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차로 향했다. 처음에는 어린애라고 우습게 보았는데 막상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도 투시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준 후에 비하면 흉내에 불과했다. 박 신부는 월터 보울이 약간 주눅 이 든 것처럼 보여 그런 능력이 뛰어나다고 좋아할 일까지는 아 니라고 해 줄까 하다 내버려 두었다.
세 명은 차에 올랐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안개가 짙어서 석양마저도 보이지 않 을 정도였다.
한참 동안 컴퓨터에서 파일들을 조회하고 마침내 두툼한 뭉치 를 출력한 현암과 승희는 날이 어두워지자 윌리엄스 신부와 헤 어져서 호텔로 돌아왔다. 출력한 자료들을 좀 더 자세하게 검토 해 볼 생각이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넘겨준 간략한 종이쪽지와 큰 차이는 없었으나 소상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간단하게 유사 사건의 연관성을 정리해 보았다.
처음에 변사체로 발견된 테오도르 반스는 머리가 잘리고 사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그와 비슷한 시간대에 죽은 사람은 목을 매달아 자살한 외교관이었다.
그다음 두 번째로 발견된 조셉 타키투스는 스톤헨지 부근에서 목이 난자당해 으깨져서 죽었고, 이 시간대에 사망한 사람으로 는 집무실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죽은 경찰청 관리 가 있었다.
세 번째로 에우리페 키튼은 등이 깊게 파여서 두 쪽이 나 있 었다. 비슷한 때에 죽은 사람은 도버 해협의 해저 터널 공사를 하던 기사로 공사 현장에서 감독을 하다가 철근이 떨어지는 바 람에 등이 움푹 파여서 사망했다.
그다음 줄리우스 데커는 눈이 뽑히고 칼로 난자당했는데, 거의 비슷한 때에 이탈리아와 관세 협정을 논의하던 실무 관리가 죽었다. 아무 이유 없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계단 모서리에 눈 이 찍히는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다음은 런던탑 부근에서 머리가 깨져서 선혈이 낭자한 채 발견된 옥타비아 크루거로, 이와 연관된 의문사는 독일과 방역 협정을 논의하던 보건부 관리였다. 혼자 있던 건물의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살해당한 사람은 고든 케사르인데 드 루이드들에게 납치당한 뒤 스톤헨지에서 온몸이 난자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에 관계된 사람은 나토의 한 장성이었다. 길을 가던 도중 갑자기 건축물 일부가 무너지면서 돌 더미가 쏟아지는 바람에 전신이 거의 성한 곳 없는 시체가 되고 말았다.
승희와 현암은 돌아가면서 이러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들을 꼼 꼼히 읽었고, 읽을수록 수상스러운 구석은 점점 더 많이 나타났 다. 그러나 이 유사 사건들이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단정 하기 어려웠다. 외형적인 형태가 수상해 보이지만 사고일 수도 있고, 관련성을 나타낼 단서는 없어 보였다.
“자, 우리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어. 모자라지 만 할 수 없어. 이것만 가지고 문제를 밝혀내야 해. 처음부터 정 리를 해 보자. 차 안에서 승희 네가 짚어 낸 것 있지?”
“어떤?”
“이 사람들의 이름에 독특한 어원이 있다는 것 말이야. 라틴 계열이라고 했나? 그 이름들이………….”
“맞아. 케사르, 타키투스, 줄리우스, 옥타비아, 에우리페, 테오 도르 다 그런 이름이긴 해. 하지만 단순히 이름의 어원에 혐의 를 둘 수 있을까?”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일들은 신속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좋아. 시간을 아껴야지. 이미 영국 경찰이 할 수 있는 조사들은 거의 다 했을 거야. 그러나 단서나 혐의자를 찾아내지는 못했겠 지. 일단 경찰은 주술을 인정하지 않아. 그러나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 또 그와 비슷한 동 시간대의 죽음이 일반적인 살인 때문 이라고는 믿기 어려워. 이렇게 허황되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중 요한 단서가 될 수 있거든. 흠……………. 이 이름들은 로마 시대의 이 름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렇지.”
“자, 그다음에 이런 짓을 한 자들이 고대 켈트족 사제였던 드 루이드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우리의 공통 의견이야. 그 것은 고든 케사르 씨가 신드루이드의 의식을 치르던 중에 진짜 드루이드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지. 드루이드 들이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있을까?”
승희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있을 수 있지. 드루이드들은 1세기경에 로마군에 의해서 몰살되었어. 그들의 전통이나 문화가 거의 사라져 버렸지.” “그러면 이유가 되겠군. 내가 다시 봐도 여기 희생자들과 죽은 여섯 명이 어떤 연관성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어. 그렇다면 필경 이 사람들의 죄는 라틴어가 들어간 이름 또는 성을 가진 것밖에 없다고 볼 수 있지. 그렇지 않겠어? 이름을 이용하여 주술을 거 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지.
자, 이 일을 벌인 것이 드루이드라고 상정해 보자. 드루이드 는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은 로마인에 의해서 정벌당했어. 그중에 서도 특히 드루이드는 로마군에 의해서 거의 씨가 말랐다고 했지? 그렇다면 로마인, 즉 지금의 이탈리아인에 대한 원한은 아직 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지. 제물을 선택할 적에 라틴어가 들어 간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는 거야. 그렇지 않아?”
“그럴 수도 있긴 있겠군.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제물이라고 한다 면 동기가 너무 작아. 무엇보다도 저주를 걸어서 죽은 사람들, 즉 이 사람들을 무슨 목적으로 죽였는지 그것을 알아내지 않는다면 죽은 관리들과의 연관성도 찾기 힘들어. 자, 보라고. 군부대 장 성, 보건부 관리, 관세행정관, 경찰청 관리, 공학 기사, 외교관. 이 사람들에게서 도대체 무슨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겠어?”
“단서는 단순한 데 있을지도 몰라. 앞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단 지 라틴 계열의 이름이나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면, 뒤의 관 리들도 그런 식의 매우 포괄적이고 간단한 연관성을 가질 가능 성이 있지. 이 사람들에게서는 이름의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했 지만 혹시 이것은 아닐까?”
“뭐?”
현암이 조금 더 생각을 비약시켜 보았다.
“이 사람들을 모두 다 외국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 들이야. 나토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니까 외국의 각 나라들과 연 관을 맺을 수 있고, 보건부 관리자는 독일과 방역 협정을 맺었다 고 되어 있고, 이탈리아와 관세 협정을 맺으려던 사람도 있어. 프랑스와 관련된 수사를 하던 경찰청 관리도 있고, 도버 해협 공사도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것이니 프랑스와 관련이 있을 거야. 외교관은 물론 당연하고.”
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너무 막막해. 외국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떤 외국을 말하는 거야? 도대체 목적이 있어야지. 독일이면 독일, 프랑스면 프랑 스. 그래야 될 것 같지 않아?”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을 하다 보니 동시에 두 사람 머 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이라는 것이 당시의 외세 전반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아더 왕은 색슨족과 싸우 다가 전사했고 드루이드들은 로마인에 의해 전멸되었다? 그렇다 고 해도 이제 와서 이런 사람들을 목표로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 았다. 둘의 추리는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고 빙빙 맴돌았다.
어느덧 시간은 한참 지났고 안개 때문인지 밖은 어두컴컴했 다. 내내 골치를 앓은 두 사람은 피곤함을 느끼고는 각각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 두기로 했다. 내일의 일은 내일 걱정하라는, 박 신부의 말인지, 아니면 어디서 박 신부가 인용한 말인지를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