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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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12화



키 드레이번은 자신의 책상 뒤에 앉은 채 두 손에 턱을 고이고는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방 가운데 서서 키의 시선을 참아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키는 그녀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앉으라는 말뿐만 아니라 키는 공주가 선장실에 들어온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많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조금 전까지 공주는 불안감과 공포 쪽에 많이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주는 솔직한 호기심으 로 제국의 공적 제1호를 바라보았다. 키는 그 호기심 어린 시선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 때문에 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불쾌해할 줄 알았는데, 독특한 아가씨군.”

“말했어! 어, 그런데 무슨 말을 하셨죠?”

“……거기 앉으시오.”

“아, 예.”

공주 역시 그제서야 생각났다는 투로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 자신을 꾸짖기 시작했다. 멍청하긴. 왜 해적의 말을 기다린 거야. 그냥 앉으면 되는 걸 가지고. 율리아나 공주는 자신에 대해 비웃으며 의자를 끌어와 키의 책상 앞에 놓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로를 응시했 다. 그리고 키는 두 번째로 항복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에겐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소개해야 되는 거겠지. 키 드레이번이오.”

“율리아나입니다. 이곳은 궁전이 아니니 길고 복잡한 이름 다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요?”

“다 기억하기는 하오?”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라고 말한다면 자기 이름을 말할 줄 아는 것이 무슨 자랑거리냐고 되물을 거죠?”

고풍스러운 엘프식 작명법에 따른 길고 긴 이름을 들은 키는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 미소를 본 율리아나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웃으시네요?”

“입이 있으니까.”

대답하며 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나 공주의 손이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고 그녀의 동공은 잔뜩 팽창된 채 키의 움직임을 좇았다. 책상 옆을 돌아 공주 앞에 온 키는 책상 귀퉁이 에 걸터앉아서는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키의 턱을 올려다보는 대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릎을 보며 말했다.

“말해 두겠어요. 라이온 씨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살 미수범이에요.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었지요.”

“왜 그랬소?”

“당신에게 나를 제공할 의사는 별로 없으니까. 지금도 그 결심은 그대로예요.”

말을 마치는 율리아나 공주는 표독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공주의 커다란 눈은 크게 떠지자 더욱 둥글게 바뀌 었을 뿐, 소기의 목적 즉 키를 위협하려는 목적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키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공주는 입을 앙다문 채 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공적 제1호. 제국의 8할을 휩쓸고 열한 개의 왕관과 여섯 개의 지팡이를 파괴한 대마법사 하이낙스 이후 두 번째로 그런 칭호를 받은 사내. 그것은 키 드레이번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이낙스가 제국에게 어느 정 도의 타격을 주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제국의 최전성기라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해적에게 제국의 공적 1호라는 칭호를 주지는 않았 을 것이다. 물론 제국이 그 정도로 처절한 타격을 입었기에 이런 해적의 발호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이름만으로 제국의 모든 뱃사람을 진감케 하는 사나이가 말했다.

“당신, 착각하고 있군.”

“착각이라고요?”

“당신은 나에게 자신을 제공할 필요가 없소. 당신을 기다리는 자는 따로 있으니.”

공주는 순간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미래의 남편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몸값을 받으실 건가요?”

“뭐요?”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도 로네스 경에게.” 일단은 이렇게 불러야 할 것이다. 아직은 남편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날 보내주시고 몸값을 받으시려는 것 아닌가요?”

키는 빙긋 웃었고 율리아나 공주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키는 웃는 얼굴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것이 있을지 의심스럽지만, 만일 필마온의 갈가마귀들에게 받을 것이 있다면 직접 검독수리의 관문을 열고 들어가 받아낼 거요.”

율리아나 공주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누구도 강제로 열 수는 없었던 문을 새장 문이나 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소?”

“예?”

키는 책상머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공주의 무릎 바로 앞에 선 채로 공주를 내려다보았고, 공주는 팔걸이를 단단히 쥔 채 목을 꺾어 키를 올려다 보았다.

“새장의 문을 열어 새로 하여금 그 메마른 날개에 자유의 공기를 적시도록 해본 적이 있소?”

너무 현학적인 질문을 들은 율리아나 공주는 입을 조금 벌린 채 키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의자의 팔걸 이를 짚으며 공주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대었다. 해적과 공주의 얼굴은 1피트 정도의 거리만을 두고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다. 공주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고동쳤지만 키는 여상하게 속삭였다.

“새장의 문을 여는 것이 그렇게 쉬운 거요? 그 새가 누려온 안락과 안전 대신 무자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과연 그 새를 위한 일이오?”

“모르………… 몰라요. 하,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말해 보시오.”

얼굴 바로 앞에 키의 두 눈이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공주는 입술을 핥고 싶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힘들게 말했다.

“당신, 당신은 내게 질문하고 있지만,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

키의 눈에 묘한 빛이 지나갔다.

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책상을 돌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율리아나 공주가 한숨을 내쉴 사이도 없이 키는 곧장 말했다. 

“나가보시오.”

공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말을 마치자마자 의자를 뒤로 돌렸다. 공주는 일어나서 키의 등을 한번 바라본 다음 문으로 걸어 갔다. 그때 키가 등을 돌린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문을 강하게 잡아당기시오.”

공주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여전히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총명한 공주는 곧 키의 말을 이해했고, 그래서 얼굴 을 붉히며 문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선장실의 문에 귀를 바싹 가져다댄 채 엿듣고 있던 라이온 외 몇몇 해적들이 선장실 안으로 일제히 나동그라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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