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3화

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3화



창 밖을 내다보던 파킨슨 신부는 환호를 내질렀다.

“이놈, 축복받아랏! 기어코 패스를 그었구나?”

그들이 서 있는 높이는 보통 건물의 3층 정도 되는 곳이었다. 그 정도도 충분히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현기증 날 정도의 높이에 있던 파킨슨 신부는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까지도 느꼈다. 바다는 이제 충분히 가깝게 보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파도들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있어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목청껏 고함 지르고 있었으므로 데스필드는 무리없이 그 말을 알아들 었다. 그래서 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은 거요.”

“나? 내가 긋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데스필드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분해서 데스필드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파킨슨 신부는 잠시 후에야 그의 말에 올바른 주어를 넣 어볼 수 있게 되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은 거요.’ 파킨슨 신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리 느라 녹초가 되다시피 한 윈디어가 힘들게 서 있었다.

“저 윈디어가 동물적 감각으로 내려오는 길을 찾았다는 거냐?”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본인은 무턱대고 걸었소이다. 그런데 이렇게 낮게 왔다니. 아무래도 이상하군.”

“뭐가 이상하냐?”

“그냥 쭉 내리뻗은 계단으로 왔어도 이렇게 빨리 내려올 것 같지는 않단 말이오. 그런데 본인과 당신은 그렇게 내려온 것은 아니잖소. 아무리 내려 오는 길이 더 빠르게 느껴지는 법이라도, 흐음. 모르겠군. 한 가지만은 확실해. 패스파인더에게 직업적 자부심의 손상을 입히고 싶다면 이 탑은 제일 순위의 추천 대상이군…… 젠장! 아무렇게나 오다 보니 도착하다니, 패스파인더 최고의 모욕이라고! 끄아아아!”

차분하(다기보다는 시무룩하게 말하던 데스필드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광하기 시작했다. 파킨슨 신부는 당혹하여 뒤로 물러났지만 데스필드는 그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돌벽을 후려치고 통로를 짓밟다가 결국 자기 분에 못 이겨 벽을 차며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넘었다.

“그놈 참, 성질도 요상하게 부린다. 끝난 거냐?”

“준비는 끝났소.”

파킨슨 신부는 아무 말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며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 매달린 홀스터를 톡톡 두드려보였다. 데스필드는 그에 대하여 상냥하고 우아하고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임으로써 복수했다.

“됐다. 역겨우니까 그만해. 어쨌든 이 층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안 보이는군. 또 올라가다 보면 더 내려갈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만 난 아무래도 사양하고 싶다. 여기서 네가 말하던 그 방법을 쓰면…… 그런데 저놈이 문제군.”

데스필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윈디어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으로 밧줄을 묶어 내려줄 수는 없다. 창문의 크기가 도저히 말 한 마리가 지나다닐 크기 가 못 된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두 사람의 힘으로 말 한 마리를 지탱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았다.

“놔두고?”

“젠장.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

그러나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무슨 답 비슷한 것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다. 3층 높이의 건물에서 두 사람의 힘으로 말을 내릴 방법은 기중기나 아주 긴 경사로, 혹은 동물을 사랑하는 마법사 등 이 섬에서는 구할 수 없는 수단들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풀죽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데스필드가 먼저 스완 대거의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안락사가 낫겠소?”

파킨슨 신부는 얼굴을 다 구겨놓은 다음에야 대답했다.

“일단은 놔두고 나가자. 밖에 나가서 무슨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냐. 물론 우리조차도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방법 어 쩌고 하는 건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만, 어쩌면 아래로 내려가서 우리가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냐.”

데스필드는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배낭에서 밧줄을 꺼낸 데스필드는 그것을 풀면서 통로를 걸어갔다. 그들이 서 있는 곳 은 바다를 향한 쪽이었으며 반대쪽의 땅으로 내려서기 위해선 환형 통로 저편의 창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윈디어에게 다가갔다. 이 틀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던 윈디어는 이미 꽤 지친 상태였다. 파킨슨 신부는 성심 성의껏 윈디어에게 축복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통로 저편에서 데스필드가 말했다.

“아무래도 나갈 수 없소.”

파킨슨 신부는 어두운 얼굴로 통로 저편을 돌아보았다.

“데스필드. 나도 가슴 아프다. 이 죄없는 놈을 놔두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든 말든 나갈 수 없다고요.”

파킨슨 신부는 얼떨떨한 얼굴로 통로 저편을 보다가 윈디어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데스필드가 걸어간 쪽을 향해 걸어갔다. 파킨슨 신부를 본 데스필드는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창 밖을 가리켜보였다.

창 밖을 바라본 신부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육지 쪽에는 꼬리 길이를 제외해도 키가 10피트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도마뱀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다리로 일어서 성큼성큼 뛰어다니고 있었 고 동작은 꽤 기민해 보였다. 가끔 쉬식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지만 전체적으로는 고요했다. 그리고 그 중 특별히 덩치 큰 몇 놈은 주의 깊은 시선으로 탑을 쳐다보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그 놈들이 정확히 3층의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데스필드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목도리도마뱀………… 제기랄. 여긴 목도리도마뱀 당신 천지구먼!”

주위를 더 둘러본 신부는 데스필드의 말대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서 목도리도마뱀들을 발견했다. 얼핏 보아도 백여 마리는 되는 목도리도마뱀 들이 시야 이편과 저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의 두 팔에 소름이 쫙 돋아올랐다.

“이, 이놈들이 집단 생물이냐? 난 이렇게 많은 목도리도마뱀 집단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아니, 잠깐. 어제는 저런 것 안 보였잖아?”

“해질 무렵이라 슬슬 기어나온 것일 거요. 낮에는 너무 뜨겁잖소. 그리고 본인과 당신이 여기를 내려다본 것은 어제 낮이었고. 한 방 쏘쇼.”

“쏘라고?”

“하늘로 한 방 쏘아보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드건을 뽑아들었다. 데스필드는 뒤로 물러나 윈디어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하늘을 겨냥한 파킨슨 신부는 기도 하는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맹렬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도망치지 않아!”

데스필드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의 목도리도마뱀들 중 몇몇은 약간 어리둥절한 기세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대부분의 목도리도마뱀들은 조금 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 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더 안 좋은 변화를 일으킨 녀석도 있었다. 조금 전 잊혀진 탑을 주시하고 있던 덩치 큰 놈들이 조심스럽게 탑 쪽을 향해 걸어 오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이놈들에겐 이 대포 소리가 그저 천둥 소리 비슷한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 섬에 사람이 들어왔을 리가 없으니까, 이놈들은 한번도 사람을 못 본 야생 그대로의…….”

“잠깐. 좀 조용히 해보쇼.”

“뭐?”

“입 닫으라고! 당신들의 동태가 이상하오.”

파킨슨 신부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탑 바깥을 바라보았다.

덩치 큰 목도리도마뱀들은 이제 탑 쪽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별 생각 없이 그 놈들이 수컷일 거라고 생각했고 보다 생물학 적 지식이 많은 데스필드는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포유류라면 대개 경계와 전투를 맡는 것이 수컷이지만, 상대는 파충류이다. 따라서 꼭 수 컷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느닷없이 첫 번째 놈이 뛰어올랐다.

목도리도마뱀은 걸어오던 속도 그대로 솟아올랐다. 도약이나 발구름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에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 모두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었다. 신부 같은 경우 목도리도마뱀의 입이 얼굴 앞까지 치솟아오른 다음에야 그 놈이 뛰어올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애 애액!”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서로 뒤엉키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비명도 그때쯤에야 터져나왔다.

“우아아아악!”

신부와 패스파인더는 통로 바닥에 쓰러져 서로 팔다리를 얽어놓은 채 한참 동안이나 버둥거렸다. 가까스로 일어난 파킨슨 신부는 통로 반대쪽 벽에 후다닥 달라붙었고 데스필드는 스완 대거를 뽑아들었다. 그때 두 번째 놈이 뛰어올랐다.

“쐐애애애액!”

창문 저편으로 목도리도마뱀의 머리가 솟아오른 것은 것은 찰라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신부는 프릴을 잔뜩 펼친 그 얼굴과 커다란 입, 그리고 그 속 에서 번득이는 이빨들을 보며 소리 높이 비명을 질렀다. 데스필드는 통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무서운 시선으로 창문을 쳐다보았다.

세 번째 도약은 없었다. 데스필드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정말 엄청난 도약력이군. 저런 건 못 봤는데. 아마 리저드라이더 당신을 안 태워서 더 높이 뛰어오르는 모양이지.”

파킨슨 신부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뛰어오를 수 없어. 그렇지, 데스필드? 얼굴이 올라오는 것이 한계야. 저, 저 앞발로 창턱을 잡거나 하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

“방금 두 당신이 목도리도마뱀 사회에서 가장 높이뛰기를 못하는 당신들이라면?”

“젠장! 꼭 그런 비관적인 예측을 해야 되겠냐!”

“일단 좀 봅시다.”

“안 돼! 다가가지 마! 얼굴이라도 깨물리면 어쩔 거야?”

하지만 데스필드는 스완 대거를 꽉 움켜쥔 채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청턱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아래쪽이 보일 만한 위치에 서서, 데스필드는 목 을 조심스럽게 뻗어보았다.

다가온 놈들은 모두 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논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그저 산보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데스필드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창턱에 손을 짚으며 상체를 쑥 내밀었다.

“어이, 당신들!”

파킨슨 신부는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목도리도마뱀들은 기절하는 대신 모두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한 놈의 눈이 데스필드의 눈과 마주쳤고, 놈 은 다시 뛰어올랐다.

“쐐애애애액!”

“이거나 잡수셔!”

데스필드는 몸을 뒤로 튕기며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스치기만 해도 돼!’ 데스필드의 소원대로 스완 대거의 칼 끝은 뛰어오른 목도리도마뱀의 코끝 을 스쳤다. 데스필드는 우당탕거리며 파킨슨 신부의 발치까지 굴러갔고 신부는 기겁하며 스완 대거의 칼 끝을 피했다. 그리고 탑 저편에서는 퍽 이상 한 소리가 들려왔다.

데스필드는 다시 일어서자마자 창가로 도로 뛰어갔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 뜨리며 말했다.

“제엔장. 이리 와 보쇼.”

“사양해 주겠어. 이야기 듣는 걸로 만족할 테니까.”

“그러지 뭐. 조금 전의 당신은 이 칼에 코끝을 스쳤고 그래서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얼굴의 절반이 터져나갔소. 조금 전의 이상한 소리는 당신의 얼 어붙은 얼굴 조각들이 탑에 부딪히는 소리들과………… 당신이 추락하면서 낸 소리였소.”

“그, 그럼 지금 들려오는 이 소리는 뭐냐?”

“당신들이 얼굴 터진 당신 뜯어먹고 있는 소리. 가정 교육을 잘 받진 못했군. 꼭꼭 씹어먹어야 되는데.”

파킨슨 신부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거목은 거대한 그루터기를 남긴다.

바탈리언 남작은 1024년 9월, 페인 제국에서 일어난 전무후무한 반란 사건을 저렇게 표현했다. 거목은 쓰러져도 그냥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보 이지 않지만 거대한 뿌리가 아직 땅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국 기사단 북좌가 남쪽을 향해 움직인다는 첩보가 란셀에 도착했을 때 페인 제 국이 경험한 충격은 바로 그런 거대한 뿌리가 땅을 가르며 일어나 숲을 흔든 것에 비유될 수 있다.

9월 5일. 하르타틱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 기사단 북좌는 서 킬드온의 지휘 하에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격문이나 서신, 통고문 따위는 전 혀 없었다. 제국 기사단 북좌는 말 그대로 조용히, 하지만 폭발적인 속도로 똑바로 남진했다. 그러나 제국 기사단 북좌의 총병력은 25,000명. 이 정도의 대병력이 움직이는데 포착되지 않을 리가 없다.

9월 9일. 제국 기사단 북좌의 이상한 움직임이 란셀에 전달되자 란셀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천년의 역사에서 페인 제국이 경험한 반란은 한둘이 아니다. 란셀은 충격 속에서도 기민하게 움직였고 9월 12일에는 남진을 계속하고 있는 북좌에 대한 정지 명령과 함께 레프토리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 기사단 남좌에 대한 북진 명령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곧 제국은 두 번째의 충격 속에 아연해해야 했다. 북좌가 정지 명령에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좌조차도 출동 명령에 대 해 침묵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페인 제국은 그들이 제국 천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겪는 무시무시한 위기에 처했음을 깨닫고는 비명을 올 렸다.

제국 기사단 남북좌의 동시 반란.

천년의 역사에서 제국은 강력한 방위력이 양날의 검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체득하고 있었다. 적을 막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면 그 강력한 군대 는 거꾸로 조국을 향해 칼을 들이댄다. 그러나 반란이 무서워서 군대를 약화시키면 적에 의해 공격받는다. 그리고 페인 제국은 인류의 역사에서 해결 될 날이 올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딜레마를 해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제국이 천년의 세월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력해서가 아니라 인간 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기 때문이라 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 말처럼 페인 제국은 어떤 환상적인 해결법을 찾는 대신 제국 군사력의 요체라고 할 수 있 는 제국 기사단을 남북좌로 분할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대방을 우아하게 경멸하는 전통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제국 기사단의 기사들은 언제라도 야전 지휘관이 되어 제국 방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국 군사력의 두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국은 군 사력 전체를 철저히 장악하는 대신 이 ‘머리’들을 분리한 것이다. 나누어진 머리들은 서로를 향해 으르릉거리지만, 그들 모두가 고결한 기사이므로 정도 이상으로 폭주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협력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호 경멸은 유지할 수 있다. 따 라서 그들 중 어느 쪽이 기사의 맹세를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킬 경우, 다른 쪽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 때문에 혹은 형제 의 오욕을 몸소 처리한다는 심정으로 토벌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북좌는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 반란이 성공하여 제위가 바 뀐다 하더라도 신임 황제는 그 즉시 최정예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는 유격대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증명된 일이다. 제국력 689년, 제국 기사단 남좌가 주축이 된 반란군은 란셀을 점령하고 당시 황제였던 아스로이 황제를 퇴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 기사단 북좌 가 전부 지하로 잠적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그래서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 기사단 북좌의 조직적인 반격에 무릎을 꿇었다. 아스로이 황제는 다시 제위를 되찾았고 제국 기사단 북좌의 영수였으며 레지스탕스 활동의 총지휘자였던 손필 경은 대공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머리를 나누어 서로를 견제시키는 이 수단은 언제나 유효했다. 따라서 아자르 황제와 제국 정부는 제국 기사단 북좌의 돌발 행동보다도 남좌의 기이 한 침묵에 더 당황했다. 그러나 연거푸 보내어진 진군 명령에도 남좌는 아무런 회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황제의 명령에 불응했다.

제국 기사단 남좌의 침묵은 란셀을 최악의 혼란으로 몰아갔다. 어쨌든 제국 내에는 무수한 병력이 있었고 돌출 행위를 일으킨 것은 제국 기사단 북 좌뿐이다. 따라서 아자르 황제에게 토벌 병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좌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앞장서서 그들을 견제해야 할 남좌가 침묵한 것은 그런 당연한 사실까지도 망각하게 만들 정도의 충격이었다. 황제와 제국 대신들이 당황하고 허둥대는 사이에 북좌는 무서운 속도로 란셀에 접근했다.

그러나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최고 속도로 남진한 북좌의 병력은 란셀을 한번 훔쳐보지도 않은 채 지나쳤다. 란셀 시민들은 제국의 수도를 그냥 지나쳐버린 그 맹랑함에 무시당한 기분마저도 느꼈다. 이미 꾸려놓은 피난짐 위에 걸터앉아 아자르 황제와 란셀 시민들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북좌의 진로를 응시했다.

숨가쁠 정도의 남진을 계속한 북좌는 미리온 산맥에 도달하자 남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북좌의 진로 앞쪽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달은 제국 정부 가 신음을 흘릴 무렵, 제국 기사단 북좌의 영수 서 킬드온은 짤막한 서신을 란셀에 보냈다.

‘페인 제국과 그 식민지의 지배자이며 아흔아홉 눈의 섬의 백작이며 사무이다크의 공작이며 신앙의 수호자인 페인 제국 황제 나르실 로이 아달탄 아 크레아 리 온 놀가드 아자르 나이제스 만세. 제국 기사단 북좌 일동은 약간 강도 높은 동절기 훈련에 돌입함을 삼가 알려드립니다.’

‘약간 강도 높은 동절기 훈련’이라는 용어는 제국 외교관들의 악몽이 되었다. 제국 기사단 북좌의 1024년 동절기 훈련이 다벨 공국과의 ‘약간 강도 높은’ 충돌로 진행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제국 기사단은 제국 외교관들이 휘리 노이에스와 복잡한 가장무도회를 벌일 기회를 주지 않고 몸소 기사단장의 핏값을 받아내기로 결정해 버린 것 이다. 두 영수 간의 비밀 접촉은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역할 분담을 위한 제비뽑기는 필요없었을 것이다. 서 브라도는 북좌 출신이다. 따라서 복수를 맡는 것은 북좌여야 했다. 그리고 남좌는 침묵으로써 복수를 맡은 형제를 지원함과 동시에 북좌가 복수 이외의 다른 행동을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 을 맡은 것이다.

거목은 거대한 그루터기를 남긴다. 휘리 노이에스가 볼지악 요새 앞에서 쓰러뜨린 것은 서 브라도일 뿐 제국 기사단은 아니다. 그리고 거목의 남겨 진 뿌리는 그들이 있어야 할 땅 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복수를 노래하며 다벨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야만인들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북좌는 겨울 동안 결판을 짓고 자신들의 주둔지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그 외에도 급히 움직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떤 이유?”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복수를 완결시켜 그것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리려는 것이겠지요. 아자르 황제의 가슴속에 노여움이 불타고 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그들이 지금 당장 우리를 짓밟는다면 아직 서 브라도의 전사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못한 황제는 그들의 이 돌발 행위를 묵인해 줄 가능성 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무단 이탈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 행동에 대한 처벌도 흐지부지되겠지요.”

“흐음. 나는 그들 자신이 복수를 더 기다릴 수 없어서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바탈리언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요. 서 브라도는 홀수대 기사단장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만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모두 제국 기사단 북좌가 번갯불처럼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어야 된다는 전제 조건을 가지지. 그들의 이 대단한 자신감 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질 정도인데. 그들은 정말 야만인이 준동하는 봄이 오기 전에, 남좌에서 짝수대 기사단장이 나와서 그들에 대해 곤혹스러워하 게 되기 전에, 그리고 황제가 그들의 근무지 이탈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게 되기 전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어쨌든 제국 기사단이니까요. 오만해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요.”

바탈리언 남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고 휘리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적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작은 부연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분리된 남북좌는 여기서도 기능을 발휘합니다. 최악의 경우 남좌가 이동하여 야만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좌가 존재하는 한 황 제께서는 북좌를 견제할 수단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 되지요. 견제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는 법 아닐까요.”

“알았어. 자네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의 귓속에 반란이라는 단어가 계속 메아리치게 만들어. 황제로 하여금 북좌를 의심하게끔 하라고. 그러니까…

“시작했습니다. 다른 것은?”

“라트랑에 축하 서신을 보내. 선물 꾸러미와 함께. 에름 후작으로 하여금 이제서야 맞이한 신혼에 머리끝까지 잠겨들게 하라고. 그래서 중부동맹 을……”

“어제 보냈습니다. 브라이트썸의 눈물을 이루미나 후작 부인에 대한 선물로 보냈습니다.”

휘리는 껄껄 웃었다.

“자네 배짱 대단하군. 그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를 말인가? 하하. 좋아. 또 무슨 일들을 했는지 먼저 묻고 싶어지는데.”

“별것 없습니다. 폴라리스를 국가 수복 활동의 성지로 부각시킨 것 정도가 남는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나?”

“폴라리스를 잔존시켜 두기로 결정하신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들을 쓰레기통으로 사용하실 생각이시잖습니까?”

쓰레기통이라는 말은 휘리를 다시 웃게 만들었다. 팔라레온, 록소나, 다케온의 구 지배 세력들이 그들의 고토에서 광복 활동을 벌이는 것은 절대로 피곤한 일이다. 따라서 손댈 수 없는 폴라리스로 이동해 주는 편이 차라리 낫다. 손댈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은 거꾸로 그들 역시 이쪽에 손을 뻗기 어렵다는 뜻이 되므로, 그리고 바탈리언 남작은 폴라리스의 그런 용도를 쓰레기통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모아둬야지. 비울 때 비우더라도. 그렇잖으면 집안이 지저분해져.”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해왔던 일을 삼가 평가해 보고자 하니 들어주겠나? 자네는 내가 제국 기사단 북좌를 맞아 싸워야 된다고 결정하고 그외 잡무를 다 처리해 놓은 건가?”

“절대로 안 싸우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군요.”

“서 브라도의 유해 반환.”

“타진해 보겠습니다.”

“거기에 공식 사과 덧붙여서 보내. 서 킬드온에게 딸이 있다면 메르데린 공작과 결혼해도 좋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나도 감히 황제의 명령을 모른 체하며 달려오고 있는 복수광들이 그 정도로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할 것은 다 했다는 명분 을 세울 수는 있겠지. 자네가 말한 대로 이왕 저쪽에 있는 선택권이잖아. 그러니 그 선택권을 좀더 보태준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

바탈리언 남작은 잠시 말없이 휘리를 바라보았다. 휘리는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뒷머리를 받친 자세로 책상 위에 두 다리를 뻗고 있었다. 말하고 후 회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 하에 남작은 조용히 물었다.

“이런 질문을 용서하십시오. 격퇴할 방법이 있습니까?”

“제국 기사단을 말인가?”

“그렇습니다.”

휘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렵겠지.”

바탈리언 남작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휘리의 다음 말이 이어졌을 때 남작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뿐이라면 깰 수 있다. 하지만 제국을 끌어들이게 돼. 어쨌건 유배 죄인이었던 서 브라도와는 경우가 달라. 이기면 안 되는 싸움이니 어렵지.”

바탈리언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휘리를 바라보았지만 휘리는 책상 위에 켜놓은 초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은 책상으로 바짝 다가서 며 말했다.

“자작님. 죄송합니다만 무슨 되지도 않는 여유를 부리시는 겁니까? 상대는 우리가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의 두 배가 넘는 대군입니다. 더군다나 제 국 기사단 북좌입니다. 혼족과의 전투에서 단련된 베테랑 중의 베테랑…………”

“혼 족은 못 깨도 나는 깬다.”

“예?”

휘리는 여전히 촛불을 노려보며 말했다.

“혼 족이 북좌를 못 깬다고 해서 나 또한 그러라는 법이 있나? 물어보겠다, 남작. 혼 족이라면 팔라레온, 다케온, 록소나를 모두 공략할 수 있었겠 나?”

“지금 혼 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휘리는 고개를 들어 바탈리언 남작을 바라보았다. 남작은 휘리의 얼굴에서 초조감 같은 것을 읽었다고 생각했으나 곧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게 되었 다. 휘리의 얼굴은 초조감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물 속에서 떠오르는 익사자의 얼굴처럼 휘리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아, 그렇지?”

바탈리언 남작은 긴장한 채 휘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오, 자작. 난 투필 종군한 적 없소. 그 노예의 말처럼 나는 계속 쓸 거요. 그리고 나 는 당신을 쓰기 위해 편리하다는 이유로 찾아온 거요. 이제 나를 향해 말하시오. 당신의 속에 있는 불꽃은 어떤 거요?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거지요? 혼족이라는 말에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뭐요? 말하고, 자작, 위안을 얻으시오. 말하시오!’

“더 이상 시킬 일이 없다. 나가라.”

남작은 실망감을 채 감추지 못한 채 물러났다. 휘리 노이에스는 의자에서 일어난 다음 창문을 향해 돌아섰다. 바탈리언 남작은 한번 더 휘리를 불러 보았다.

“자작님.”

“나가라고 했다, 남작.”

바탈리언 남작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휘리의 등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휘리는 어두운 창 밖만 내다보고 서 있었다. 휘리는 갑자기 넌더리를 냈다.

밝은 방과 어두운 바깥의 밝기 차이 때문에 창문에는 휘리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어리고 있었다. 그래서 휘리는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휘리 는 짜증스럽게 몸을 돌려 촛불을 불었다.

훅! 방 안을 밝혀주던 촛불이 꺼지자 방 안은 캄캄해졌다. 다시 몸을 돌린 휘리는 창문에 어리던 자신의 영상에 방해됨이 없이 창 밖의 어둠을 똑바 로 볼 수 있었다. 휘리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했다.

“암흑, 어두움, 타들어가는 칠흑, 이은 자리 없는 음영. 거울 따윈 필요없어. 내게 필요한 건 바로 이거야.”

말 끝에 휘리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입에서 떠난 말들이 그와 괴리된 무엇이 되어 그를 덮쳐왔다. 휘리는 다시 물러났지만 어둠은 거리를 둔다고 해서 희미해지지는 않는다. 휘리 는 책상에 부딪혔고 떨리는 손을 뻗어 의자를 당겨잡았다. 그리고 거기에 몸을 던졌다.

의자 깊숙이 주저앉은 휘리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안정을 되찾은 휘리는 다시 암흑을 쏘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천사여. 당신이 있으면 더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