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4권 – 18장 : 산폭풍, 평야로 – 4화
서 슈마허는 눈을 뜨자마자 곧장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동작의 끊어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갑옷을 착용하고 망토를 걸치고 검을 들어올렸다. 마치 이 기사의 기상 동작은 모든 무장이 끝났을 때에 완성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서 슈마허는 신발을 몇 번 굴러보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감미로운 아침을 베풀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지만 덕분에 그와 같은 선실에 있던 다른 선원들은 몹시 괴로운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절그럭거리고 쿵쾅거리고 중얼거리고 있 는 슈마허를 노려보며 으르릉거렸지만, 그것은 모두 이불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고용인이고 서 슈마허는 그들의 선주였으므로. 다행히도 서 슈마허는 빨리 아침 공기를 쐬고 싶다는 갈망 하에 선실을 나갔기에 남겨진 선원들은 서 슈마허를 잡아간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 잠 들 수 있었다.
서 슈마허는 승강구를 올라가 뒷갑판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마지막 별들이 휘날레를 장식하는 새벽 하늘은 이미 충분히 푸르렀고 그런 새벽을 바다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것은 매우 신 비로운 일이다. 서 슈마허는 마음껏 감탄했고 심지어 기대감마저 느꼈다. 그는 검기만 한 바다와 해도 달도 없는 하늘 가운데 서 있는 고독한 구도자 였다. 인식을 오도하고 환상을 진실로 바꾸는 어떤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어쩌면 세계에 틈이 생기며 그에게 우주의 비밀이 드러나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 슈마허는 우주가 뒤집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세 바퀴 정도 뒤집힌 것 같다.
오스발의 얼굴은 뚜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될 수 있는 일이었다. 슈마허는 잠시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절대적으로 그런 얼굴이어야 해.’ 그리고 슈마허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발.”
오스발 역시 낮게 말했다.
“예.”
“나는 이것을 기나긴 고통의 도피행 중 당연히 생길 수 있는 동료애의 발현으로 이해해야겠지?”
“죄송합니다만 아닙니다.”
서 슈마허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칼자루로 옮겨가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몰랐을 뿐 아니라 오스 발마저도 충분하지 못한 조명 때문에 그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스발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서는 저를 쿠션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만.”
“쿠션?”
“예. 잠이 오지 않는다고 나오셨다가 이대로 주무시게 된 겁니다.”
서 슈마허는 충분한 이해심으로 그 상황을 상상해 보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오스발의 목을 친 다음 바다에 던지는 편이 훨씬 간단하겠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칼을 뽑아들려던 슈마허는 자신이 이미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스발. 공주님을 조심스럽게 눕혀드리고, 이리 나와라.”
“알겠습니다.”
“절대 안 돼요.”
서 슈마허와 오스발은 펄쩍 뛸 만큼 놀랐다. 율리아나는 눈을 감은 모습 그대로였고 그래서 슈마허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다시 말했다.
“돌아가요, 서 슈마허.”
슈마허는 그제서야 공주가 확실히 깨어 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공주님의 호위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공주님의 목숨뿐만 아니라 명예도 지켜드려야 됩니다.”
율리아나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한번도 잠든 적이 없는 것처럼 가볍게 일어났다. 오스발이 놀라서 바라보는 가운데 율리아나는 낮은 목소리로 슈마 허에게 말했다.
“당신이 본 것 전부 잊어요. 서 슈마허. 당신이 본 것은 밤새 키를 잡고 고생한 오스발과 방금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던 내 모습이에요.”
“제 입은 봉할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저 노예의 입은 어쩌시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런 위압감 넘치는 어투 그만 사용하시죠? 마치 가정교사에게 꾸중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군요. 무 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 그만해요.”
“공주님.”
“당신이 오스발을 죽이면 그게 더 수상하게 보일 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나요?”
서 슈마허는 곰곰이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공주의 말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이런 망망대해에서 오스발을 죽인다 해도 선원들의 입은 남는다. 그리고 선원들은 갑자기 죽은 오스발에 대해 별의별 추문들을 만들어낼 것이 당연하다. 슈마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남습니다.”
“문제가 뭐죠?”
“오스발이 밤새 키를 잡고 있었다는 부분 말입니다. 그게,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왜요?”
“만일 그랬다면 저게 보일 리가 없으니까요.”
슈마허는 손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켜보였다. 오스발과 율리아나는 모두 그 방향을 쳐다보았고,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수평선에서 하늘까지 이어져 있는 듯한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가늘다는 것은 순전히 그 말도 되지 않는 높이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 뿐이다. 누군가 하늘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여줄 만한 광경이다. ‘안심해. 기둥이 있잖아.’ 율리아나는 약간 어눌한 어조 로 말했다.
“저, 그러니까 그게, 어………….. 어떻게 여기로 왔지?”
오스발 역시 저 위대한 모습은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잊혀진 탑이군요.”
“그러네요.”
“그렇습니다.”
“맞아요.”
“예.”
그리고 서 슈마허는 뒷덜미를 붙잡힌 채 확 끌어당겨졌다.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은 슈마허는 조금 후 자신이 율리아나에 의해 끌어당겨졌다는 것, 그리고 오스발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끌어당겨졌다는 것, 그 리고 그와 오스발이 율리아나의 머리를 중심으로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있다는 것을 차례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세 명의 머리를 한데 모아놓은 율리 아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거짓말 하나 생각해 보자고요! 어서!”
오스발과 서 슈마허는 짐짓 고뇌에 잠긴 표정을 지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답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들었다.
“콰앙!”
오스발과 서 슈마허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있었던 율리아나는 엉겁결에 두 사람의 머리를 찧고 말았다.
“커억!”
“우욱!”
얼굴이 빨개진 율리아나는 뭐라 사과하려 했으나 서 슈마허는 머리를 문지르면서도 씩씩하게 뱃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때 승강구에서 선원들과 선장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이 예상하던 것, 즉 해적선이나 군함 등은 발견하지 못했고 그래서 어리둥절해했다. 그때 잊혀진 탑을 발견한 선원 하나가 기이한 비명을 올렸다.
“어어어?”
다른 선원들이 뭐라 외치기 전, 잊혀진 탑을 바라보고 있던 슈마허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망토가 한번 떠올랐다가 가라앉은 곳에는 가장 성실한 기 사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오스발의 말이 맞군요. 공주님. 저쪽에서 누군가가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난파한 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만.”
율리아나는 박수를 치거나 환호를 내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선장에게 말했다.
“선장님. 어서 가봐요.”
훌륭한 라트랑 뱃사람이지만 그래도 뱃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선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잭스 선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공주님. 저기는 잊혀진 탑 섬입니다. 불길합니다만.”
“그래도 누군가 신호를 보내고 있잖아요. 놔두고 갈 수는 없겠지요, 선장님?”
그리고 잭스 선장은 역시 바다 사나이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선원들은 기막히다는 얼굴로 잭스 선장을 바라보았지만 잭스 선장은 턱을 앞으로 내밀며 사납게 말했다.
“만약 내가 저기에 난파되어 있는데 그냥 지나가는 배가 있다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따라갈 거다. 너희들이라면 어떻겠냐? 그러니, 돛을 올려라!”
파킨슨 신부는 다시 한 방을 쏘아올린 다음 탄환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탄환들을 재장전하며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 배가 해적선이거나 밀수선이거나 더 나쁜 배면 어쩌지?”
“혼 – 아피르 혼혈 당신들로만 채운 배라도 상관없소. 저 배가 그냥 지나가면 향후 몇백 년 동안 이 근처에 배가 안 지나간다고 해도 본인은 이상하 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저 배를 꼭 불러들여야 하오!”
“흐음. 그건 맞다. 그런데 혼 아피르 혼혈이라고? 그거 끔찍하군.”
파킨슨 신부는 껄껄 웃었지만 재장전 동작은 빨랐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창 밖을 향해 핸드건을 쏘기 시작했고 데스필드는 통로를 따라 달려가 육 지 쪽의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해가 높이 오르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목도리도마뱀들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해골들을 보며 데스필드는 목 도리도마뱀들이 자신의 요리 솜씨에 감명받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떠올렸다. 어제 데스필드는 뛰어오른 목도리도마뱀들을 서넛 정도 쳐내렸 으며 공중에서 요리된 요리는 불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목도리도마뱀들은 그 가족들의 진수성찬이 되었다. 다행히 아직 쌀쌀한 새벽녘이라 목도리도마뱀들의 동작이 약간 굼뜬 것 같아 보인다는 사실이 데스필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때 환형 통로 저편에서 파킨슨 신부의 고함이 들려왔다.
“알아차린 거 같아!”
“좋아요. 목소리가 들릴 만큼 다가오면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라고 전하시오.”
“왜?”
“목도리도마뱀 당신은 물 위도 달린단 말이야. 바다에서도 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젠장. 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곳에 떨어져 있는 거지? 알았다.”
잭스 선장은 망원경을 내려놓고는 머리카락도 별로 없는 정수리를 긁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선원들이 듣지 않았으면 싶었지만 이 작은 스쿠 너 안에서 그들의 귀를 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잭스 선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담담하게 말했다.
“서 슈마허. 이상한 것이 보입니다. 일단 난파한 배 같은 것은 없는데요.”
“그러면 뭐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 잊혀진 탑의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선원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들이 ‘잊혀진 탑에서 몸을 내밀고 있다면 그건 틀림없는 악마다!’라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잭스 선장은 재빨리 말했다.
“자세히는 안 보입니다만 아무래도 신부님처럼 보입니다.”
“예? 신부님이라고요?”
그때 오스발 대신 키를 잡고 있던 선원 하나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아, 악마는 신부나 수녀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고요! 오, 옷자락을 들춰보면 꼬리, 꼬리가 보인다고 우리 할머니가……
“닥쳐, 케틀!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졌느냐. 내가 지금 선주님과 이야기중인 것 보이지 않느냐! 너는 선주님 앞에서 선장을 창피하게 만들 생각이 냐?”
잭스 선장은 케틀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까지 목표로 삼아 노성을 질렀다. 케틀은 입을 다물었고 여차하면 이구동성으로 외쳐댈 것이 뻔한 다른 선 원들도 침묵을 지켰다. 잭스 선장은 아슬아슬하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아무리 봐도 신부복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럼 이 소리는 뭡니까? 신부님이 대포를 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오. 신부님께서는 손에 무슨 작대기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게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 슈마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선원들의 얼굴은 다시 퍼렇게 변했지만 오스발과 율리아나의 얼굴은 환해졌다.
“파킨슨 신부님!”
그리고 율리아나는 선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애쓰는 잭스 선장을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잭스 선장과 다른 선원들을 향해 말했다.
“선장님! 내가 아는 신부님이세요. 교회의 보물 핸드건을 가지고 계시죠. 지금 그걸 사용해서 신호를 보내시는 거예요!”
율리아나의 말에 선원들은 크게 안도했다. 이후 잭스 선장이 신경 써야 될 것은 접안할 만한 곳을 찾는 일뿐이었다. 파도를 갈가리 찢어놓고 있는 바 위와 절벽들이 잊혀진 탑의 북서면을 두르다시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잭스 선장은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섬에 상륙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 다. 하지만 상황을 알아야 했기에 잭스 선장은 손수 키를 잡고는 조심스럽게 탑으로 접근해 갔다.
스쿠너는 쾌속선이기는 하지만 모험 항해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안정된 부두 시설이 없을 경우 이 조그만 범선은 바다 사나이의 기량의 시험대가 된다. 물론 가볍게 파도를 타넘어 암초도 통과하는 묘기를 부리는 것이 이 배지만 잊혀진 탑 섬 주위의 해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선원들은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측심기와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바닷속의 상황을 잭스 선장에게 전달했고 잭스 선장은 세심하게 키를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릴 만한 위치에 오자 서 슈마허는 선원으로부터 확성기를 받아들었다. 그는 잊혀진 탑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본함은 라트랑 소속의 파웨이브호다!”
서 슈마허가 선주이긴 하지만 파웨이브호는 라트랑의 선적에 등록되어 있었다.
“거기 있는 것은 사람인가?”
아련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파킨슨 신부요! 더 다가오지 마시오!”
다가오지 말라고? 서 슈마허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파킨슨 신부님. 저는 서 슈마허라고 합니다. 구조 요청을 하신 것 아닙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지금은 다가오지 마시오! 뭐? 해가 더 떠오르면? 알았어. 이보시오! 해가 더 높이 떠오른 다음에 다가오시오!”
서 슈마허는 다시 당혹해 버렸다. 그때 율리아나가 서 슈마허로부터 확성기를 받아들었다.
“야호! 파킨슨 신부님? 나 유리예요!”
“엉? 율리아나 공주님? 아니, 거기 웬 일이십니까?”
“그건 만난 다음에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왜 해가 더 높이 떠야 된다는 거죠?”
“아, 도대체………… 험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야생 목도리도마뱀 천지요! 수백 마리도 넘는 놈들이 탑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놈들이 바다 위를 뛰어 그 배로 다가갈까 무섭소!”
율리아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율리아나는 재빨리 해안과 배 사이의 거리를 어림해 본 다음 잭스 선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잭스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메리우스 평원에서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90로드나 되는 수면을 가로질렀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수였습니다. 이렇게 파도가 심한 곳 에서는 그렇게 못 뛸 겁니다. 하지만 상륙하는 것은 위험하겠는데요.”
“그런가요. 그런데 왜 해가 더 높이………… 아, 그렇군요. 날이 너무 뜨거워지면 목도리도마뱀은 더위를 피해 숨을 테니까.”
“그렇다면 제7시나 제8시 정도까지는 기다려야겠군요.”
“하지만……”
율리아나는 파킨슨 신부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신부님! 혹시 그 놈들이 바닷속에서 더위를 식히거나 하지는 않나요?”
잊혀진 탑에 있던 파킨슨 신부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데스필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탑 바깥의 목도리도마뱀들을 바 라보았다.
“신부님 당신. 지금까지 바다에 들어가는 목도리도마뱀을 본 적 있습니까?”
“너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본 적 없어. 그런데 말이야. 나는 한 가지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데.”
“그게 뭡니까?”
“이놈들이 이 섬에서 뭘 먹고 사는 거지?”
“글쎄. 사슴이나 토끼나 그런 것이 아니면, 어…………”
데스필드는 말꼬리를 흐리며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는 곧장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아, 안 돼! 더 멀리 가시오! 이놈들은 헤엄을 칠지도 몰라!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서…………!”
풍덩풍덩!
데스필드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재빨리 창 밖을 내다본 데스필드는 해안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들고 있는 목도리도 마뱀들을 발견했다. 요란한 물보라가 연속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물 속에 뛰어든 목도리도마뱀들은 코와 눈만 내어놓은 상태에서 천천히 꼬리를 휘저 어 헤엄쳤다. 그리고 그때 태양이 떠올랐다. 떠오르는 태양은 파웨이브호의 돛을 환하게 비춰주었고 목도리도마뱀들은 검푸른 바다 위에 도드라진 그 흰 점을 향해 빠르게 헤엄치고 있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수십 개의 통나무가 떠내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와 눈, 그리고 등의 일부와 꼬리 윗부분만 수면 위에 드러낸 채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목도리도마뱀들의 모습은 벌목장에서 통나무들을 하류로 보 내는 모습 같았다. 목도리도마뱀들이 통나무와 다른 것은 그 거대한 꼬리가 좌우로 천천히 꿈틀거린다는 점뿐이었다. 느리게 보였지만 목도리도마뱀 들의 굉장한 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절대로 느린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목도리도마뱀들이 크기는 순식간에 커졌다. 잭스 선장은 낮고 억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배를 정지시켜. 하지만 닻은 내리지 마. 모두들 무기를 꺼내어들고 뱃전 가까이 붙어라. 절대로 뱃전 너머로 몸을 내밀지는 말고! 서 슈마허, 공주 님을 보호하시오. 우리는 공주님까지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선원들은 조용하면서도 날쌘 동작으로 흩어졌다. 커틀러스, 후크, 스페이드, 대거 등이 아침 햇살 속에 반짝였다. 율리아나 공주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돛대 가까이까지 물러났고 공주의 앞을 막아서던 슈마허 경은 오스발을 흘끔 쳐다보았다.
“너도 공주님을 막아라, 오스발.”
그리고 슈마허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오스발에게 던졌다. 오스발은 그것을 받아쥐곤 잠깐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걸어왔다. 그리고 슈마허와 함께 돛대를 등지고 선 공주의 앞을 막아섰다. 잭스 선장은 ‘손 하나가 아쉬운데’ 하는 표정으로 슈마허를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슈마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서 슈마허는 공주가 밤새도록 잠든 척하며, 하지만 잠들지는 못한 채 기대어 있던 노예가 공주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정도는 짐작할 줄 아는 기사였다. (그리고 서 슈마허는 그답게도 이것이 모두 키 드레이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속으로 주장하며 그에게 모든 죄값을 뒤집어씌워 버렸 다.)
선원들은 뱃전에 몸을 다 감춘 채 눈만 내밀어 수면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목도리도마뱀들의 함대는 급속도로 커졌다. 이윽고 첫 번째 놈이 파 웨이브호의 선수에 닿았다. 하지만 첫 번째 놈은 그대로 선수의 왼쪽을 돌아 옆으로 헤엄쳐 갔다. 그리고 두 번째 놈은 오른쪽으로 헤엄쳤다. 잭스 선 장의 입 안에서 쇠 긁는 소리 같은 것이 울렸다.
“제기랄, 포위?”
다가오던 목도리도마뱀 무리는 그대로 좌우로 갈라지며 파웨이브호를 둘러쌌다. 잊혀진 탑에서는 파킨슨 신부가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 질렀다.
“제기랄! 놈들이 파웨이브호를 포위하고 있어!”
으르릉거리며 창밖을 쏘아보던 데스필드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발 아래에서는 이제 햇빛 속에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가 그르릉거리고 있었 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환형 통로가 길게 이어진 가운데는 윈디어가 서 있었다. 데스필드는 손가락을 몇 번 꺾은 다음 파킨슨 신부 를 돌아보았다.
“신부님 당신.”
“왜?”
“수마(馬)하실 줄 아오?”
“수마? 수마라니. 나는 그런 거 할 줄….”
파킨슨 신부의 말은 입천장쯤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파킨슨 신부는 눈을 부릅뜬 채 데스필드를 바라보았지만 데스필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너, 너, 너 설마?”
“설마고 설사고 간에 지금 좀 속성으로 배우셔야겠어.”
“마, 말도, 아, 아니 그런 웃기는, 데, 데스필드?”
“저 배가 침몰하면 본인과 당신도 끝장이야. 그리고 수마를 하려면 하나만 타야 해. 둘 다 태우고는 안 되지.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당신이어야 하지. 더 가볍고, 핸드건도 있으니까. 자, 시작할까요?”
파킨슨 신부는 절망적인 시선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데스필드는 이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