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6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19장 : 다섯 검의 주인 – 6화


무거운 커튼이 침대 위에 어두움을 뿌리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조심스럽게 그 커튼을 들어올렸다.

침대에는 파리한 안색의 노인이 누워 있었다. 율리아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침대 위로 손을 뻗은 율리아나는 노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어 보았다.

“아바마마.”

손은 부드럽고 건조하며 생기가 없었다. 율리아나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침대에 머리를 묻었다.

“아바마마!”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르파데일 공주는 손수건을 꼭 부여쥔 채 율리아나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특히 어린 막내동생에 게 비밀로 하고 싶었다. 아르파데일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막내딸에 대한 라힘턴 3세의 애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론 그 애정이 그녀에 게 상처를 입힐 때도 있었지만 아르파데일은 상처를 참는 법을 배웠고 아버지를 동정하는 법을 익혔다. 라힘턴 3세가 카밀카르의 왕좌를 요구할지도 모를 남자에게 율리아나를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그녀가 끝까지 반대하지 못한 것도 그 동정 때문이고, 그래서 그녀는 한때 왕좌에 대한 희망을 거의 단념하기까지 했다. 동생의 남편에게 주자, 는 결심은 라힘턴 3세의 느닷없는 혼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번복되어야 했고, 아르파데일은 마음속으로 라도 쾌재를 올리지는 않았다.

아르파데일은 몇 번이나 말하려다가 멈추기를 반복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그만 일어나렴. 유리.”

“아냐………… 이건 아니라고. 이렇게 될 순 없어. 왜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니고 아바마마가…………… 나는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는데…

“유리.”

“아바마마 저예요. 유리예요. 유리는 무사히 돌아왔어요. 제발………… 제발! 아바마마. 눈을 뜨세요.”

율리아나는 라힘턴 3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고 아르파데일은 결국 리로이를 불러들여야 했다. 율리아나는 몸부림쳤지만 힘이 빠진 상태였고 그래서 아르파데일과 리로이에 의해 방 밖으로 부축되어 나왔다.

방 바깥에는 두 명의 경비병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서 있었지만 그들은 아르파데일과 다른 이들을 못 본 척했다. 그리고 아르파데일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아르파데일과 리로이는 양쪽에서 율리아나를 부축했고 율리아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걷는다기보다는 끌려가듯이 복도 를 걸었다. 그렇게 힘없이 끌려가던 율리아나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율리아나는 굉장한 힘으로 리로이를 뿌리치고는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리로이는 당황해서 율리아나를 쫓아가려 했지만 아르파데일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린 리로이는 아르파데일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니까 놔둬.”

율리아나는 머리를 감싸쥔 채 정신없이 달렸다. 그녀의 곁으로 시종들이나 대신들의 모습 같은 것이 지나쳤지만 율리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 인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발 아래로 복도나 계단, 그리고 돌과 풀밭 등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역시 신 경 쓰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가 춤을 추고 소리와 침묵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율리아나는 어딘지도 모를 방향을 향해 끝없이 달려갔다. 귀 옆을 스 치는 바람 소리, 격한 그녀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는 율리아나를 까무러치게 만들 정도였다.

“공주님?”

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녀를 멈춰 세울 수 있는 목소리.

율리아나는 손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폰스파궁 후원의 과수원이었다. 과일보다는 조경을 목적으로 설계된 넓고 훤한 과수원 속에 나무들은 가을의 아취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나뭇가지 들 사이로 비스듬히 미끄러지는 햇빛은 풀밭에 고대에서 가져온 듯한 문양들을 그리고 있었고 율리아나의 젖은 볼을 차갑게 만드는 바람이 그 위를 고요히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발이 있었다.

율리아나의 걸음이 멈춰졌다.

오스발은 거대한 나무의 밑둥에 기대어 선 채 율리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막 걸어올 듯한 모습으로, 하지만 나무 아래에 멈춰 선 채 율리아나 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싸르락거리는 소리가 길게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에 율리아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안녕.”

오스발은 이 인사에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율리아나는 한번 더 인사했다.

“안녕, 오스발?”

“안녕하세요.”

“안녕…..

율리아나는 발을 들었다. 걸었다. 종종걸음쳤다. 달렸다. 몸을 날렸다.

거목과 한꺼번에 끌어안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가슴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