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1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0장 : 긴 노래 – 1화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 기왕의 상황들을 결코 우호적인 시각으로 해석할 수가 없게 된 사실은 본인에게도 퍽이나 상심되는 일입니다. 물론 시급

을 요하는 일에 있어서 성하께서 보여주신 결단력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으나 내가 이미 보내었던 서신이 있는 바 약간의 고려 정도는 해주 실 수도 있지 않았는가 하는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 예.”

“어쨌거나 바다의 도적으로 하여금 육지의 도적을 물리치게끔 하신 그 배려가 훌륭하다는 말씀은 드려야 할 듯하오.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지 못한 자의 불평은 언제나 무가치한 것이고 그 점에서 역사적인 지각생 타르타니어스의 예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니, 나 또한 그의 예를 본받아서 손닿는 곳의 일들에 관심을 가져볼까 합니다만.”

“아, 예.”

“나는 뿔에 보라색 리본을 묶고 옆구리에 피크닉 가방을 끼고 두 발로 봄의 들판을 나풀나풀 춤추며 뛰어다니는 12마리의 숫염소를 보았소.” “아, 예.”

로스왈로는 손가락을 입 안에 꺾어넣고는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익! 퓨아리스 4세는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팔걸 이를 움켜쥐는 것에서 멈출 수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플로라는 나직한 웃음 소리를 내었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플로라를 돌아보았던 법황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앉아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로스왈로? 무슨 일입니까?”

“청컨대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시는지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성하? 내가 드리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군요.”

“아, 이런. 미안합니다.”

법황은 쑥스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적거렸지만 로스왈로의 날카로운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법황은 속으로 투덜거린 다음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찾아오신 것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추기경들이 짖어댈까 봐 말입니까?”

“제발………… 로스왈로, 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추기경들이 보낼 항의 서한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차 있습니다.”

“무어 겁날 것이 있다고. 지팡이 없이는 운신도 못하는 이 늙은이 혼자 오지 않았소이까.”

이 말은 ‘혼자 오셨어도 위대한 마법의 해석자가 우리에게 주는 부담은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대답을 유도하는 말이 분명했고 그래서 법황은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법황은 로스왈로의 날카로운 얼굴 아래쪽에서 뿌듯해하는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싱긋 웃었다. 법황의 웃음을 본 로 스왈로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으며 엄숙하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고독한 순례자로서 이 성도에 온 것이고 가장 시비걸기 잘하는 추기경이라 하더라도 이 노마의 순례행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는 못할 것이오. 그럼 계속합시다. 일단 나는 말로써 숨바꼭질을 하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공중제비를 넘는 짓은 사양하겠소. 바이올 기사단은 어쨌거 나 성하의 의지가 폴라리스의 존속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소. 그렇잖습니까?”

“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로스왈로는 성마르게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된 거 아니겠소? 성하께서야 다벨에 대한 응징이 목적이셨을 테고 바로 그런 이유로 폴라리스를 도우시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동시 에 성하께서 폴라리스를 인지한다는 의미도 된단 말입니다. 틀린 곳 있으면 지적해 주시오.”

법황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게 되겠군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좋소. 그들을 회군시키시오.”

이 완벽한 명령조의 말에는 마법사의 수장이 교회의 수장에게 힘대결을 제안하는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 그보다는 총명하지만 아직 지도를 필요로 하는 제자에게 건네는 경험 많은 노교사의 말투 같았다. 그래서 법황은 발끈하는 대신 차분하게 질문했다.

“이유를 설명해 주겠습니까, 로스왈로?”

“미안한 말이오만 성하께서는 사자를 도와 늑대를 몰아대고 있소.”

“어, 말하자면, 폴라리스가 다벨보다 월등히 위험하다는 의미로군요?”

“말로 하지 않고 글로 써도 그런 의미요. 폴라리스가 몇 배나 더 위험한 족속들이오.”

퓨아리스 4세는 잠시 상대방이 하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명쾌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 서 법황은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폴라리스를 건국한 이들이 비록 해적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바보는 아닐 텐데요. 그들이 스스로를 다벨에 대한 반대항으로 계 속 규정짓고 있는 것만 보아도…..”

“반대항? 무슨 말씀이십니까?”

로스왈로의 얼떨떨해하는 얼굴을 보며 퓨아리스 4세는 상대방이 대륙의 지배자들 중 가장 정치적 감각이 없는 사람임을 다시 깨달았다. ‘그렇다면 로스왈로가 말한 폴라리스의 위험 어쩌고에는 정치적인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법황은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만약 폴라리스를 건국한 하리야 휘하의 해적들이 눈앞의 일만 보는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휘리 노이에스에게 붙었을 겁니다. 신흥 강국이고, 게 다가 바로 옆에 있는 나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다벨의 적대 세력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의감이니 의리니 하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휘리에 적대함으로써 기존 세력들, 그러니까 팔라레온, 록소나, 다케온 등의 구세력으로부터 환영받았고 동시에 제국의 다른 나라 로부터 환영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 질서가 아닌 기존 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자들임을 분명히 한 셈이지요. 이것은 제국의 모든 지배 자들에게 분명한 사실이고, 따라서 그들이 다벨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은 납득하기 어렵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성하. 적의 적은 내 친구라는 말씀이지요?”

퓨아리스 4세는 약간 웃었다.

“예, 뭐. 그렇게 표현해도 되겠지요. 그들이 다벨의 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제국의 공적이었던 자신의 입지를 흐려버린 것은 사실이니까요.”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로스왈로는 솔직하게 고백했고 퓨아리스 4세는 이 노인의 소탈함에 다시 감동받았다. 그래서 법황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폴라리스가 위험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어쨌거나 실질적으로 우리들과, 그리고 그들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은 폴라 리스가 아닌 다벨입니다.”

로스왈로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혼 족의 기호품이 들려 있었고 그래서 법황은 얼굴을 찡 그렸다. 그러나 마법의 아티스트는 법황청에서도 태연히 담배를 피워댈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로스왈로는 파이프 연기를 살짝 뿜어내며 말했다.

“역사가 증언하는바, 언제나 사람들을 번영하게 했던 것은 조용하고 양식 있는 정부였소. 하지만 언제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던 것은 난폭하고 무 례한 정부였지요. 생각 모자란 이들과 열성 부족한 역사가들은 그런 종자들에게 열광이라는 자양분을 공급했고, 정신나간 독재자라는 코믹한 종자가 절대로 멸종되지 않고 끈질기게 부활하는 것 또한 그런 토양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오. 그래서 난 폭군보다는 그들에게 환호를 보낸 군중들에게 역 사의 죄를 물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소. 솔직히, 폭군의 압제에 신음하는 가련한 인민 어쩌고 하는 표현을 보면 속이 뒤집힐 것 같소이다. 그건 폭군의 지배를 허락한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죄값에 지나지 않아요. 따라서 나는 다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동정하지 않고, 휘리 노이에스에 대 해서 역시 특별한 적개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소.”

자유주의자의 정치관이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었다. 비록 신이라는 절대 권력의 지상 대행자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말이었지 만, 퓨아리스 4세는 잔잔한 미소 정도는 지어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소와 별개로 경고는 해두기로 했다.

“자존심이 뭔지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교회는 실제로 감당할 수 없는 폭군을 알고 있으며 그 폭군에 가을의 다림 외곽, 그리고 낮에서 가장 먼 곳.

많은 수의 사내들이 어둠 속을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과 무기, 그리고 빛을 반사할 만한 모든 물건에 검댕을 칠하고 입은 앙다문 채 민첩하게 움직이 는 사내들의 수효는 적어도 쉰. 그러나 이 정도의 사내들의 움직임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

사내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묻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조금 후였다.

“뭐지, 투코인?”

“별빛도 없군요. 달빛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투코인이라 불렸던 사내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중얼거리며 품속을 뒤져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내었다. 주머니를 손바닥 위에 뒤집어 가루 같은 것 을 쏟아놓은 투코인은 그것을 두 손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조금 전 질문했던 사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투코인의 손이 푸르스름하게 물든 것처럼 변하며 희끄무레한 빛이 떠올랐다. 투코인은 빛으로 물든 손을 땅바닥 쪽으로 가져갔다.

“270파운드 가량. 발 크기로 봐서 덩치가 크긴 하지만 그보다는 갑옷 무게군. 오른손에 뭔지 모르겠지만 무거운 걸 들고 있었을 겁니다. 오른발이 깊이 패이는데요. 방패를 든 왼손잡이는 아닙니다. 칼집이 없으니까.”

“칼집이 없다는 건 어떻게 알지?”

“풀잎 꺾인 자국이 없습니다. 칼집은 흔들리면서 풀 허리나 끄트머리를 치기 때문에 흔적을 구분하기 쉽지요. 정리하면, 체격이 꽤 좋고 갑옷을 입 고 오른손에 상당한 중무장을 들고 있는 자입니다.”

“나는 한 가지 더 알겠는데. 그 친구 꽤 말수가 적을 거야. 젠장. 사트로니아의 오닉스 나이트군.”

“그럴 겁니다. 대장님. 아무래도 여기까지 순찰을 나오는 모양인데요.”

“썩을. 몇 놈인지도 알 수 있나?”

투코인은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파르스름한 손을 이곳저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조금 후 확신이 별로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은 확실히 넘고 여섯은 안 될 거 같은데요. 발디딤이 특히 좋은 녀석이 있는데 아무래도 활을 다루는 친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투코인은 손바닥을 털며 말을 덧붙였다.

“이 친구들은 돌아가던 중입니다. 발자국이 성 쪽을 향하고 있군요. 소팔라 대장님.”

서 소팔라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꽤 먼 곳인데도 순찰이 있다면 다른 순찰조와 조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서 소팔라는 어둠 속 을 응시하며 말했다.

“돌아가던 중이었다면, 당분간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데. 하지만 다음 순찰이 시작되었으면 더 곤란해. 이봐, 투코인. 혹시 언제쯤 여기를 지난 건지도 알 수 있나?”

투코인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30분 안쪽입니다.”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밟힌 벌레가 한 마리 있습니다. 만져보면 알죠.”

“확실한 거야?”

“제 몸값을 걸죠.”

몸값이 동전 두 닢이라는 전설적인 노예 투코인의 대답은 서 소팔라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그러나 웃음은 길지 않았고 서 소팔라는 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방의 어둠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의 노예병들은 그 좋아하던 잡담도 삼가며 대장의 명령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서 소팔라는 어렵사리 결정을 내렸다.

“좋아. 30분 안쪽이라면 당분간 다음 순찰은 없을 거다. 계속 전진하자.”

서 소팔라의 예견은 정확했다. 그들은 순찰조와 조우하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그들에게 찾아든 것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휘파람 소리였다. 휘리리리 릭!

서 소팔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검댕들이 바스락거렸다. 문득 서 소팔라는 지금 그와 부하들의 검댕을 벗겨보면 그 아래에서 어둠을 희석시키고도 남을 만큼 새하얀 얼굴들이 나타날 거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공상에 젖어 있는 머리와는 달리 그의 입은 벌써 명령을 내리고 있었 다.

“튀어! 화약 상자 든 놈들은 다 내던져버리고 도망가!”

명령을 내리면서도 서 소팔라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 어둠 속에서 조준 사격 같은 것이 될 리가 없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지레 겁을 집어 먹고 스스로를 노출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팔라의 판단은 정확했다. 비록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밤하늘을 가르던 포환들 은 고맙게도, 혹은 얄밉게도 정확히 화약 상자를 멘 노예병 쪽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노예병들은 모두 상자를 내팽개쳤고 그것이 충격으로 폭발하지 않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리고 어둠의 망치가 내려치는 것처럼 화약 상자에 첫 번째 포환이 내려떨어졌다.

신음하는 신의 백성들을 동정합니다.”

“악마 말씀이군요.”

·로스왈로, 이곳은 법황청입니다. 당신이 상황에 성격을 맞추기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만 말 조심해 주십시오. 그런 참렬한 이름이 그렇게 쉽게 거론될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거론해야겠소.”

“예?”

“조금 전 성하께서는 왜 폴라리스가 다벨보다 더 위험한가 물어주셨소. 그래요. 성하께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대답을 거의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휘리 노이에스라는 인간 폭군에 의해 지배받는 다벨 따위야 내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폴라리스는 분명히 내 관심을 자극하고 있소.”

맥락상 당연히 이어질 말은 법황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로스왈로는 느릿하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악마의 사역을 받고 있다는 매우 강력한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퓨아리스 4세는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악마의 일은 어쨌거나 교회의 일이다. 교회만이 가장 높은 권위로써 이 지상에서 신과 악마의 일을 논하고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황이 마법의 해석자에게 악마의 사 역에 대한 충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위신에 똥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퓨아리스 4세는 너무도 뜻밖의 말에 당황해서 그만 되묻고 말았다.

“악마의 사역이오?”

“그렇소이다.”

“어째서 그런 무서운 말을 하십니까?”

이 지경까지 와서는 법황에게 더 이상의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날 밤 퓨아리스 4세가 분을 참지 못해 침대에서 두 번이나 굴러떨어진 것도 바로 이 얼빠진 질문 때문이다. 누구 앞에서 감히 악마의 일을 논하느냐는 대갈일성을 토해야 할 시점에서 법황은 그만 당혹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하고 말았 던 것이다. 그러나 마법의 아티스트는 이 질문에 대해 별 조롱기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성하께서는 트로포스 선장이라는 이름을 혹 들어보셨습니까?”


“콰쾅쾅!”

동작이 좀 굼뜬 노예병 몇이 몸 뒤쪽으로부터 날아온 폭풍에 날아오르며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예병들은 아슬아슬하게 피폭 지대를 벗어났고, 그러고는 다리가 빠져나갈 듯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강렬한 화광은 주위의 숲을 훤히 밝혀주었고 그래서 달리는 데 별 지장이 없었지만 그 때문에 감사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서 소팔라의 경우에는 경악에 찬 노성을 내질렀다.

“이 어둠 속에서 어떻게!”

서 소팔라는 어이가 없었다.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암흑 속에서 적군은 놀랍게도 대낮에 관측 사격을 하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그 들에게 포격을 가해 온 것이다. 진지로 돌아온 서 소팔라는 자신의 감상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저 해적놈들은 모두 박쥐인 것 같아!”

형의 감상을 듣고 있던 서 소사라는 먼저 우울한 표정으로 형을 훑어보았다. 험악한 도주행을 막 끝낸 서 소팔라는 진흙탕에 던지고 발로 뭉개놓은 스펀지 케이크 같은 꼬락서니였다. 소사라는 수건을 던져주며 말했다.

“80발을 동시 포격할 수 있으니까 그냥 광범위 포격을 해버린 것 아닐까.”

“아냐. 조준 사격이었어. 믿을 수 있겠어? 다른 곳에 떨어진 포탄은 한 발도 없었다고. 설령 우리가 보였다 하더라도, 젠장. 횃불을 휘두르면서 나 쏴 주시오, 라고 외쳤어도 그렇게 쏠 수 없을 만큼 정확한 사격이었어. 직접 당했지만, 난 아직도 못 믿겠어. 야간 관측을 그 정도로까지 해내는 관측사 는 악마밖에 없을걸.”

서 소팔라가 그런 외침을 토해내고 있던 그 시각, 멀리 다림 만에서는 벨로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농담이 때로는 사실의 핵심을 찌르기도 하지, 서 소팔라.”

하리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벨로린은 손가락으로 약간 먼 곳을 가리키는 애매한 손짓을 해보였고 하리야는 이 신비스러운 피조물의 모든 언행에 이 유를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하리야는 자신의 관심사만을 질문했다.

“잘 되었나?”

“아아. 성벽 아래에 묻으려던 화약은 몽땅 폭발했고, 그 노예병들의 정신도 거의 비슷한 꼴을 당했다. 지금 정찰조를 보내면 부상자 넷을 잡아올 수 있을 거야.”

하리야는 잠깐 주춤했고 벨로린은 그 얼굴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내가 있으니 정보를 캐낼 포로 같은 것은 필요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군?”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군, 벨로린. 그래. 네가 있으니 결국 데려와 봐야 쓸데없는 입만 늘이는 꼴이지. 그들을 지키는 인력까지도 낭비고.” 

“그렇지.”

“오늘 밤에는 2차 습격 같은 것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

“그래.”

“고마워. 물수리호로 갈 거면 데려다줄까?”

“킬리 선장이 데려다줄 거야.”

하리야는 일어나서 선실 문을 열었다. 갑판으로 나왔을 때 벨로린은 짐짓 목소리를 높여 하리야에게 말했다.

“아, 참. 그런데 조금 전의 그 포격은 뭐였어, 하리야 선장?”

“다벨군이 성벽 가까이로 오고 있었어. 성벽 아래에 화약을 묻으려던 계획이었지. 그래서 이 배의 대포를 쏴서 쫓아버린 거란다.”

“그러면 조금 전에 말하던 그 이상한 숫자들은?”

“포격 각도와 화약량 등 대포를 쏘는 데 필요한 숫자들이야.”

벨로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랜드머더호의 갑판 위에 있던 선원들의 5할 정도도 비슷한 동작을 취해 보였다. 그리고 갑판 한편에 서 있던 킬리 선장 은 웃음을 가슴 아래로 내리느라 잠깐 고생했다. 어쨌든 벨로린의 능력은 현재 폴라리스의 최고 기밀인 것이다.

웃음을 참은 킬리 선장은 벨로린에게 가벼운 손짓을 보내었고 벨로린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킬리 선장에게 걸어가던 벨로린은 등뒤에서 들려오는 하리야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 파르치에게 전하도록. 부하 약간명과 함께 의사를 동반하고 성 밖으로 나간다. 목표 지점은 조금 전 포격이 가해진 곳이다. 아직까지 불이 꺼지 지 않았을 테니 찾기 쉬울 거다. 적군 부상병을 찾아서 응급 처치를 해준 다음 ‘놔두고’ 돌아온다. 복창.”

‘놔두고’에 강세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받은 해적은 그 말을 빼먹고 복창했고 그래서 하리야는 한번 더 복창시켜야 했다. 해적은 두 번째에 야 황당하다는 목소리로나마 올바르게 복창했고 벨로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 파르치와 그의 리저드라이더들은 이 황당한 명령을 수행하느라 꽤 어리둥절하고 언짢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물론 그날 밤 언짢은 기분을 느낀 것은 그들뿐만은 아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노스윈드 최고의 관측사 그레고리는 하리야 선장이 포격 관제를 하겠다고 나선 것, 그리고 그것이 훌륭 하게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해 심사가 뒤틀려버렸고, 그래서 그의 상관이자 사정을 알고 있는 돌탄 선장은 분노한 그의 관측사를 달래느라 꽤나 고생 스러운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물론 꾹꾹 참고 있던 돌탄 선장이 결국엔 주먹을 불끈 쥐며 ‘오닉스 선창이 왜 말을 안하는치 알치?’의 한마디로 그의 관측사를 침묵하게 만들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장 둔감한 사람조차도 자신이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모퉁이를 돌았음을 느끼는 계절이었지만 다벨 8군단의 자랑인 소팔라 림파이어와 소사라 림 파이어는 만추의 취흥을 느낄 여유 같은 것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제국 기사단 북좌와의 전투 때문에 완전 전투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래 서 휘리 노이에스는 그들에게 폴라리스 공격의 선봉 임무를 맡겼다. 다림은 항구 도시이며 따라서 완벽한 병탄을 위해서 해상 병력이 필요했다. 휘리 노이에스는 림파이어 형제 기사들이 포위 공격을 수행하는 동안 다케온과 팔라레온의 항구에서 해군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폴라리스로 진군한 림파이어 형제 기사는,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상대방은 성 저편에 틀어박힌 채 이 쪽에서 보내는 도전장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성 가까이로 접근하면 다림 만으로부터 강철의 레이디가 불을 뿜는지라 공성전 같은 것은 엄두 도 낼 수 없었다. 저쪽에선 다가오지 않고 이쪽에서도 다가갈 수 없으니 전투 같은 것이 될 수가 없었다. 서 소팔라는 끙끙거리고 낑낑거리다가 야음 을 틈타 성벽 아래에 화약을 묻어 폭발시킨다는 계책을 세웠지만 해적들은 별빛조차 희미한 밤에도 귀신 같은 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서 소팔라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웅얼거렸다.

“놈들이 바다를 가지고 있는 이상 포위 공격은 무의미해. 다림은 원래부터 남해 항로의 중심이었고 따라서 육로가 막힌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지장 도 못 돼.”

서 소사라는 망원경을 내리며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림 외곽의 높은 산봉우리에 있었고 저 멀리 다림 만에서는 지금도 많은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니, 평소 때보다 더 많은 수였다. 용감한 바다 상인들이 전쟁 특수를 노리고 다림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오히려 골치 아픈 것은 우리 쪽이군. 형의 노예병들은 어떻지?”

“그놈들은 밀 생각 때문에 돌아가고 싶어할 정도로 부지런한 놈들은 아냐. 아직도 밀밭이라면 진저리를 치는걸.”

“그렇겠지. 그 자들은 돌아갈 곳도 없으니 오히려 여기 있는 걸 더 좋아하겠지. 하지만 이쪽은 좀 골치 아픈데. 가을이 되니까 가족들 생각이 난다고 징징거리는 놈들이 나오는걸.”

“으음. 봄여름 동안 그 정도로 애써준 것만 해도 고맙지. 추수제 때는 가족들과 있고 싶을 테고. 어쩔래? 포위 공격 같은 것 별로 쓸모도 없으니 해군 이 조성될 때까지만이라도 후방으로 돌려달라고 할까?”

다벨 8군단의 전설을 좀 과도하게 들었던 사람이라면 이런 군인답지 못한 발언에 꽤 당혹했을 것이다. 8군단이 아닌 다른 군대에서도 이런 발언을 이렇게 거리낌없이 하는 지휘관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서 소사라는 별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폴라리스는 올해 안에 결판을 보는 편이 좋아. 바탈리언 남작의 재편 작업에 이만저만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니까.”

“흐음. 하지만 접근할 수가 있어야………… 저게 뭐지?”

서 소팔라는 기겁한 듯이 외쳤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한 대 맞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 소팔라가 먼저 비명처럼 외쳤다. 

“젠장! 둘 다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리고 서 소사라는 고함을 지르기에 앞서 말에 뛰어올랐다. 서 소팔라 역시 말에 뛰어올랐다. 부글부글 끓는 심정으로 산을 내려오면서 소사라는 그들이 어떻게도 용서가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둘 중 하나는 진지에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던 적들이 이토록이나 갑작스럽게 뛰쳐나올 것이라고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벨군의 진지는 강철의 레이디의 사정 거리를 벗어나기 위해 다림에서 2마일 이나 떨어진 곳에 설영되어 있었고 그래서 림파이어 형제 기사들은 혹시나 적군이 공세를 취한다 하더라도 진지까지 돌아갈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다림 성에서 포탄처럼 쏘아져나온 리저드라이더들은 그들의 안이한 생각을 비웃듯 맹렬한 속도로 다벨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리저드라이더들의 경이적인 속도 앞에서 2마일의 거리는 행군 거리가 아닌 돌격 거리가 되고 있었고 그래서 림파이어 형제 기사들은 전술가의 최고 재산인 시간을 눈뜨고 강탈당해야 했다.


“하마터면 두 사람은 손도 쓰지 못한 채 눈앞에서 자기 부대가 끝장나는 꼴을 구경해야 할 뻔한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았군?”

“예. 서 소팔라의 노예병들은 다케온에서 이미 리저드라이더들과 한번 싸워본 적이 있지요. 그 노예들이 주축이 되어 어떻게 가까스로 막아낸 모양 입니다. 그 리저드라이더들이 노예병들에 대한 사무친 원한으로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점 또한 도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막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막긴 막았습니다. 그리고 서 소팔라와서 소사라가 공동 명의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바탈리언 남작은 책상 위에 서신을 내려놓았지만 휘리 노이에스는 거기에 손을 뻗는 대신 남작을 향해 질문했다.

“무슨 내용인데?”

“단검을 보내달랍니다.”

“웃기는군. 패전으로 부족해서 나더러 최고 지휘관들까지 잃어먹으라고? 이놈들이 도대체 아군이야, 적군이야. 자살을 하고 싶으면 전쟁 끝나고 하 라고 그래. 지금 자살하는 건 다벨 재산에 대한 도적질이야.”

바탈리언 남작은 엷게 웃었다.

“이들도 아마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쓴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마음속 깊이 반성하라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답신 보내겠습니다. 전부 요식 행위 같습 니다만.”

“응. 해군 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바탈리언 남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그는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팔라레온과 다케온의 전함들에 대한 정리 작업은 대충 완료되었습니다. 문제는 배가 아니라 선원들 쪽입니다. 팔라레온과 다케온의 해군 장교들이 나 고급 선원들은 모두 은퇴하거나 잠적해 버렸습니다. 회유 작업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성과는 시원치 않고, 폴라리스의 승리 소식 같은 것이 계속 들려오는 마당엔 그나마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아무래도 어렵겠나?”

“어중이떠중이를 모으면 역사적인 다벨 1함대를 창설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죄송합니다. 해전에 대해 잘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엉터리 함대가 노스윈드의 상대가 될 수 있을지 몹시 의심스럽습니다.”

“나도 의심스러워. 쳇, 노스윈드의 이름에 기죽지 않을 정도의 수병이어야 되는데, 그런 친구들이 있을까. 용병선이나 해적은 어떻지?”

“효과가 기대되지 않습니다. 시폭스 남작의 몰락 이후 남해에는 변변한 용병 선단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시폭스 남작을 바다 아래로 처박아버린 것도 노스윈드였습니다. 해적 역시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키 드레이번은 가장 훌륭한 해적들은 자기 휘하에 넣었고 시시한 해적들은 다 가라 앉혀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남해에서는 괜찮은 해적 찾기도 어렵습니다.”

“참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로군.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야.”

그러나 휘리 노이에스는 박수를 치는 대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얹고는 눈을 감았다. 휘리는 그 자세로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바탈리언 남작은 방 을 나갈까 생각했다. 그때 휘리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아무래도 해적은 해적으로 상대해야겠군.”

“예?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해적은 없습니다만.”

“아니, 있다. 노스윈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지독한 해적이.”

휘리는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바탈리언 남작의 찌푸린 얼굴이 들어왔다. 남작은 뭔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휘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휘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해협으로 서신 한 통을 보내야겠어.”

바탈리언 남작은 가장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작님. 어쨌거나 그들은 교회 기사입니다. 그리고 발도 로네스는 야심가입니다. 그의 자제력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조차도 그들을 육지로 끌어들이기 싫어서 우리를 파문 조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점에서는 교회를 본받아야 합니다. 폴라리스를 잡기 위해 그 놈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토끼를 잡기 위해 대포를 쏘는 꼴입니다. 그 놈들이 훨씬 더 귀찮을 겁니다. 게다가 그들이 우리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곧 그들이 교회를 배신 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교회의 배신자와 손을 잡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 됩니다.”

차분하게 듣고 있던 휘리는 싱긋 웃었다.

“폴라리스의 문제만은 아니지.”

“예?”

“내년 봄에는 그들이 필요없어. 그때까지는 20만 군세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 폴라리스는 지금 쳐 없애야 돼. 그렇잖으면 내년에 만들어낸 병력을 그 놈들에게 낭비해야 되니까. 그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내년 봄까지 사용할 병력이 필요해. 정복지 방 어, 중부 동맹 견제, 돌발적인 적의 출현 등등. 마지막 것은 제국 기사단 북좌라는 형태로 이미 한번 나타났었다. 또 나타나지 않으라는 법은 없어. 따 라서 나는 가용 병력이 필요하고, 필마온 기사단은 그 병력을 단번에 제공해 줄 수 있다. 놈들을 육지로 끌어올려야 돼.”

“하지만……”

“빌어먹을, 어차피 그 놈들은 자칫하면 내 적이 될 놈이야! 법황이 놈들에게 다벨 토벌을 명령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놈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상륙 해서 우리를 공격하겠지. 차라리 내가 먼저 쓰는 편이 훨씬 나아.”


폰스파궁 2층 발코니는 여름날 저녁이면 조그마한 무도회가 열릴 정도로 넓었지만 그 넓은 발코니에는 지금 율리아나와 파킨슨 신부만이 앉아 있었 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말했다.

“떠나신다고요?”

“예. 교구를 너무 오래 비워두었습니다. 이젠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야지요.”

파킨슨 신부의 대답에 율리아나는 섭섭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곳까지 오셨는데 더 있다 가시지 않고, 이것저것 보여드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요.”

“저도 아쉽습니다.”

“그럼, 떠나시기 전에 한 가지만 대답해 주세요.”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율리아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대신 사과해도 되겠습니까?”

“아니오.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언제 알게 되셨습니까?”

“바로 그 날. 신부님이 그런 얼굴을 한 채 찾아와서는 떠나겠다고 말한 직후 암살 기도가 일어났어요. 그것도 교회 안에서 그 정도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교회가 그런 것이겠지요.”

“부끄럽기 짝이 없군요.”

“다시 그럴 생각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젠 카밀카르 필마온의 연계는 의미를 상실했지요. 문제가 되는 것은 휘리 노이에스의 다벨이자 제국을 침략한 혼 족입니 다. 그러니 공주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파킨슨 신부는 갑자기 주춤하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런, 신부라는 위인이 마치 정치가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군요.”

율리아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그러고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회색 구름이 넓은 하늘을 뒤덮고 있었지만 구름이 갈라진 자리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곳에서 카밀카르의 바다는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때 론 겹쳐지며 때론 외롭게 쏟아지는 햇살들의 폭포는 하늘에서 바다로 던지는 너울 같았다. 경계가 중심이 되고 빛이 그림자가 되는 그곳에서는, 중첩 된 시간의 빛깔이 바래지며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아닌 무엇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율리아나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셨나요?”

“별로. 그저 찾았습니다.”

“무엇을 찾으셨지요?”

“내 곁에 있는 사랑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율리아나는 신부를 돌아보았다.

바다 저편에 쏟아지고 있는 햇살이 신부의 얼굴에도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섬나라 공주인 율리아나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나긴 항해 를 끝내고 항구로 돌아온 선원들은, 난폭하거나 부드럽거나 수다스럽거나 조용하거나 간에 모두들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테리얼레이드의 사람들은 정말 행운아군요.”

신부는 소리 없이 웃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두 손을 모아쥐었다.

“신부님.”

“말씀하시죠.”

“정말…… 무례되는 질문이겠지요. 하지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원칙적으로는 성직자에게 무례라는 건 없습니다. 무례라는 건 예에 어긋난다는 것인데, 성직자는 하늘의 예만 알고 있을 뿐이며 그것만 따르니까 요. 다만 이 엉터리 신부에게는 지금 했던 말 다 까먹게 만드는 악우가 하나 있어서 왠지 신뢰성이 없을 것 같군요.

율리아나는 작게 웃었다.

“데스필드 말씀이군요.”

“아무래도 수양이 부족합니다. 어쨌든 노력은 하고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율리아나는 먼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그런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파킨슨 신부는 이 간단한 문장에 엄청난 질문을 담아낸 율리아나의 화법에 먼저 감명받았다. 신부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는 그 손에 눈길을 떨 어트렸다.

“저는 그러고자 합니다.”

“에름 후작님도, 신부님도………… 사랑해 봐야 보답이 오지 않는 상대를 다만 사랑하겠다시는군요. 발은 그 사랑이 자기 것이니 무슨 문제냐고 했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데스필드는………… 예. 패스파인더에게 목적은 없지요. 다만 걸어갈 뿐.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다만 걸어갈 수 있을까요?”

“다만 살아가기는 하잖습니까?”

율리아나는 놀란 눈으로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우수 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보다 더 멀리 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테리얼레이드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했지 요.”

“더 멀리…..?”

“예. 공주님.”

문득 율리아나는 파킨슨 신부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감을 보았다. 그것은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초췌함이나 비굴함으로 얼룩진 패배자는 아 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싸움을 중단한 자의 눈빛이었고 몸짓이었다. 그리고 정지된 춤이었다.

“저는 이 정도까지 다다른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율리아나는 문득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파킨슨 신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돌이켜보았다. 결코 많이 안다고 는 하기 어렵다. 몇 개월 전에 만났고 잠시 동행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헤어져 있다가 최근에야 좀 이상한 방식으로 다시 만났다. 친구라는 이름은 아직 무겁고 지인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이 신부를 보며 율리아나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래서 그 이름을 규정지을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율리아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말했다.

“별을 보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나뭇가지 끝에도 닿지 않는 팔을 가졌다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요?”

파킨슨 신부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은 보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