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1장 : 별의 꿈 – 2화

폴라리스 랩소디 5권 – 21장 : 별의 꿈 – 2화


하지만 다림 앞바다에서는 휘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가 육상 포격을 위해 내항 쪽으로 돌려 진 것은 사실이었다. 두 척의 배를 빼냄으로써 폴라리스 함대가 4대 14의 엄청난 열세에서 싸우고 있는 것 또한 휘리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 시 각 더 기세를 올리고 있던 것은 폴라리스 함대 쪽이었다.

“목표는 지브라뿐이다! 다른 배는 무시해, 지브라만 쏴!”

트로포스는 맹렬하게 외쳤고 기수는 그 명령을 열심히 다른 배에 전달하고 있었다. 페가서스, 흑기사, 질풍, 바다사자호는 그 명령에 따라 지브라호 한 척에 집중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집중 포격을 위해 네 척의 배는 모두 제자리를 지킨 채 포격을 하고 있었고 따라서 더없이 좋은 목표물이었지만, 필마온 기사단의 다른 배들은 어처구니없는 공격에 처해 난감해하고 있느라 폴라리스 함대를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풀어줘! 풀어줘!”

“이 튀겨죽일 놈들, 빨리 노를 잡아! 노를 잡으라고!”

“이 개새끼, 이걸 빨리 풀어! 우린 다 죽는다, 다 죽는다고!”

필마온 기사단의 노예들은 족쇄를 흔들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족쇄에 묶인 다리들에서 피가 튀었지만 노예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중 어떤 노예 는 완전한 혼란에 빠져 족쇄를 물어뜯기까지 하고 있었다. 가장 사나운 노예장도 이런 난동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필마온 기사단 함대의 좌익을 맡고 있던 닐커터호의 노예장 제틀 역시 채찍을 휘두르고 고성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채찍에 맞은 노예가 고꾸라지는 대신 그 옆의 노예들이 두 배로 소란을 부리는 식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제틀 노예장이 다시 채찍을 뒤로 끌어당겼을 때였다.

콰지지직! 닐커터호의 용골이 깨지며 선복이 꿰뚫렸다. 바닷물이 아래에서 튀어올라 제틀 노예장을 덮쳤고 그래서 제틀 노예장은 뒤로 나동그라졌 다. 뒤통수를 호되게 부딪혔던 제틀이 가까스로 똑바로 섰을 때 그는 자신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눈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복 아래쪽에서 콸콸 쏟아져들어오는 바닷물 사이로 진주처럼 새하얀 뱀머리가 솟아올라와 있었다. 배 밑창을 뚫고 올라온 흰 머리는 바닷물과 목 재들을 뿌리며 사방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차가운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노예들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흰 뱀이 한 바퀴를 돌고 제자리에 왔을 때 제틀은 바닥을 기며 도망치고 있었다. 뱀의 눈이 다시 한번 번득였다.

휘릭 ᅳ!확 뻗어간 흰 뱀은 단숨에 제틀의 허리를 낚아채었고 제틀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흰 뱀은 제틀의 허리를 깨문 채 배 아래의 좁은 공간 에 온몸을 부딪히며 난동을 부렸고 제틀의 몸이 벽과 천장에 부딪힐 때마다 노예들의 머리 위로 피가 쏟아졌다. 노예들은 이 처참한 광경에 목청껏 비명을 지르는 일 이외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그 사이에도 닐커터는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이빨과 머리를 피로 물들인 흰 뱀이 그 속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닐커터호는 가라앉으면서도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필마온 기사단의 다 른 배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의 눈에 그 모습은 ‘침몰’이 아닌 ‘익사’처럼 보였다.

“어허. 우리의 라미가 꽤 열내는 것 같군.”

물수리호의 돛대 위에서 벌쳐는 다리를 흔들며 한가롭게 말했다. 하지만 벨로린은 조그마한 얼굴에 수심을 담은 채 대답했다.

“너무 흥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 함대는 어쨌든 교회 기사단이야.”

“성물이 있나?”

“지브라호에.”

“흐응. 그래서 저놈들은 지브라호만 쏘고 있는 것이군. 네가 말해 줬나?”

벨로린은 벌쳐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함이니까 그 배만 노리라고 조언해 줬지.”

벌쳐는 큰소리로 웃었고 벨로린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코방귀를 뀌었다.

맹포격을 당하고 있었지만 지브라호는 의연하고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또한 3L의 배였으며 해적질로 다져진 솜씨에서는 노스윈드 해적들 과 막상막하인 필마온 기사들이 배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갑자기 이 해역에 출현하여 필마온 기사단의 배를 공격하고 있는 하 얀 서펜트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필마온 기사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는 곳에는 발도 로네스가 흰 머리를 흩날리며 서 있었다.

발도 로네스는 또 한 척의 익사하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흰 뱀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다 깊숙한 곳을 헤엄치다가 단숨에 배 밑창을 뚫고 올라오 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배 바로 아래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해 전함이 사용할 수 있는 방어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매우 치명적 인 공격이었다. 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퇴한다.”

기사들은 당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중 사납게 생긴 기사 하나가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단장님! 더 전진해야 합니다. 얕은 바다로 몰아가면 저 서펜트도 힘을 못 쓸 겁니다!”

“그러고 싶지만 그 얕은 바다 쪽에는 노스윈드 해적놈들이 버티고 있잖아. 후퇴한다.”

필마온 기사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나름대로 남해 최강의 함대가 어느 쪽인지 확인하겠다는 기대감을 품고 달려왔던 그들이었지만 노스윈드 해적들 은 항구 안쪽에서 포격만 가할 뿐 전혀 밖으로 나와 싸우려들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돌연변이 서펜트 때문에 그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 고 그 사실을 달가워하는 필마온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라는 이름을 가진 만큼 포격전은 몰라도 접근전에서만큼은 자신있어 했기 때문에 그들 의 실망은 더욱 컸다. 하지만 발도는 차분하게 명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석궁수들은 모두 장전하고 흰 뱀이 다가오는 기미가 보이면 자의에 따라 발사하라. 조타수, 갑판장. 표류자들을 되도록 많이 건져보자. 저 노스윈 드 놈들은 나올 것 같지 않으니 후퇴는 천천히 해도 무방해.”

“서펜트는 어떻게 합니까?”

“저 뱀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기사들은 이 명령에 의아해했지만 발도 로네스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말 위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던 휘리 노이에스는 드디어 앞바다 쪽에서 들려오던 포성이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휘리는 옆에 있던 서 소사라 를 쳐다보았고 서 소사라는 환한 얼굴을 보내었다. 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폴라리스 함대는 전멸이다. 돌격하라, 서 소팔라!”

먼젓번의 돌격에서 호된 타격을 입었지만 서 소팔라는 다시 한번 꿋꿋하게 일어섰다. 서 소팔라는 웃통을 벗어 집어던지고는 방패마저도 팽개쳤다. 광인의 소행이었지만 겁에 질린 다벨군에게 그 행동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소팔라는 반쯤 벌거벗다시피 한 모습으로 말을 달리며 외쳤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포격은 없다. 녀석들의 배는 필마온 기사단에 의해 전멸당했다. 돌격하라!”

노예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다시 사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중장보병들도 서 소팔라의 외침에 고무되어 다시 검과 방패를 고쳐쥐었다. 서 소팔라 는 진형의 최전방에 서서 외쳤다.

“돌격! 돌격! 필마온 기사단에 뒤쳐져서는 안 된다, 돌격하라!”

노예병들은 먼젓번의 돌격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기세로 두 번째 돌격을 감행했다. 초원 위에는 시체와 포격의 흔적들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었지만 노예병들은 그 모습에 더욱 분노하며 달렸다. 먼젓번보다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그들은 조금 전 물러났던 바로 그 위치에 도달했다.

그 순간 다림 앞바다에서는 강철의 레이디가 다시 불을 뿜었다.

휘리리릭!

서 소팔라는 기가 막힌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고 멀리 본영에서는 휘리와 소사라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사라는 하늘과 초원 가운데 멈춰 선 그의 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포성은………… 멎었는데?”

휘리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피를 토하듯 힘들게 말했다.

“그렇다면 필마온이 깨졌단 말인가?”

두 번째 공포는 두 배로 더 끔찍하게 다가왔다. 노예병들은 사다리를 팽개치고 무기까지 집어던진 채 사방으로 도망치거나 제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감싸쥐었다. 서 소팔라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하늘을 노려보았지만 80발의 포환은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아니, 조금 전보다 더 악의적인 모습으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제압 사격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날아온 것은 80발의 포환뿐이고 그나마도 상당수 지면을 강타했지만 그 섬광과 폭음, 그리고 충격은 초원 위의 다벨군을 정신적인 사망 상태로 몰아갔다.

맨몸이던 서 소팔라 역시 온전하지 못했다. 폭풍이 날아온 순간 서 소팔라는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의 자유를 잃었다. 한참을 날아간 – 정확하게는 땅을 구르고 있었지만 서 소팔라는 감각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소팔라는 무엇인가에 머리를 박으며 가까스로 멈춰 섰 다. 신음을 토하던 서 소팔라는 자신이 부딪힌 것이 누군가의 반밖에 남지 않은 가슴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급히 일어나 려던 소팔라는 다리에 격한 통증을 느끼며 다시 고꾸라졌다.

‘다리가 부러졌나.’

소팔라는 땅에 쓰러진 채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 속에 세상은 비뚤어져 있었고 그나마도 혼란으로 가득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들 사이로 상처 입은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뛰어다니거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소팔라는 어떻게든 기어가보려고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본영 쪽에선 서 소사라가 눈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의 손이 고삐를 쥔 순간 휘리의 손이 그 손을 나꿔챘다. 서 소사라는 베어죽일 듯한 눈으 로 휘리를 노려보았다.

“형을 구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소사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 주위의 장병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성문을 봐라.”

성문을 돌아본 소사라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언제 열렸는지 모를(아마도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포환들에 쏠렸을 때였을 것이다) 성문에서는 병사들과 목도리도마뱀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병사들과 리저드라이더들은 성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좌우로 갈라졌다. 왼쪽으로 돈 리저드라이더들은 혼란에 빠진 노예병들과 중장보병들 을 본체만체하며 곧장 본영 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보병대는 오른쪽으로부터 노예병들과 중장보병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검은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채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거한이 있었다.

휘리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오닉스 나이트로군. 듣던 대로 대단한데. 서 소사라, 놈들은 부대 단절을 노리고 있다!”

서 소팔라는 다시 일어나보려 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했다. 잠시 끙끙거리며 자신의 상태를 유추해 보던 소팔라는 다리 두 개가 동시에 골절을 일으켰 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침울해졌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몸을 움직인 서 소팔라는 전장 가운데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세 참 우스꽝스럽구나 하는 것이 소팔라가 느낀 첫 번째 감상이었다. 주위는 비명과 칼 부딪히는 소리, 거친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여 긴박감이 넘 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그 소란스러운 전장 한가운데 멍청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자신의 모습을 비웃던 소팔라는 아예 팔짱까지 끼며 주 위를 바라보았다.

‘포로가 되거나 누가 멱을 따거나, 아니면 구출되거나………… 또 뭐가 있을까? 어쨌든 기대되는군. 순전히 다른 사람의 처분에 맡겨야 되는 처지란 말 이지.”

소팔라는 아예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고 소팔라는 곧 허벅지를 움켜쥔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야 했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 이 글썽해질 지경이었다. 그때 눈물로 흐려진 그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소팔라는 눈을 훔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다리 두 개가 먼저 그를 감동시켰다.

‘이게 사람 다리인가?’

훌륭한 철갑에 둘러싸인 그 다리 위로 역시 훌륭한 갑옷이 보였다. 그 검은 갑옷을 훑어보던 소팔라는 이미 상대방이 누군지 짐작했고 그래서 마지 막으로 얼굴을 가린 마스크를 보았을 때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대신 소팔라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오닉스 나이트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이란 찾아볼 수 없는 그 마스크 때문에 소팔라는 상대방이 어쩔 심산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 다. 문득 소팔라는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자신으로선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오닉스 나이트의 고개가 옆으로 조 금 기울어졌다.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는 거냐?”

그때 저편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오닉스는 도끼를 고쳐쥐고는 저편으로 달려가버렸다.

소팔라는 잠시 동안 무시당했다는 충격 때문에 얼떨떨해했다. 그러나 곧 소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맨몸이었고 다벨군의 고급장교라는 증거 는 어디에도 없었다. 웃통을 벗어던진 소팔라는 주위의 노예병과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닉스는 공포 때문에 정신이 나간 – 서 소팔 라는 피식피식 웃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그렇게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 부상병에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소팔라는 에라, 하는 심정으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다벨이든 폴라리스든 아무나 주워가라. 힘들어서 앉아 있지도 못하겠다.”

서 소팔라가 이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동안 서 기리우와 서 켈커는 모진 고생을 하고 있었다. 두 기사 모두 이것이 강철의 레이디의 포격을 받지 않았던 대가라면 차라리 포격 쪽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쐐애애애 액!”

프릴을 잔뜩 펼친 목도리도마뱀들은 말을 얼어붙게 만든 다음 그 기수를 쳐내리고 있었다. 혹은 겁에 질린 말 자신이 기수를 내팽개치기도 했다. 서 켈커는 리저드라이더를 직접 목격한 다음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월등히 긴 창을 준비해 두고 있었고 지금 그 장창을 곡예에 가까운 솜씨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리저드라이더들을 찔러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군분투 이상은 되지 못했고 그의 지휘를 받을 수 없었던 다벨 중장기병들은 각자의 기량으로 리저드라이더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 마구잡이식 싸움은 리저드라이더들에게 훨씬 유리했다. 서 켈커는 어떻게든 지휘 체계를 회복할 시 간을 벌어보려 했지만 목도리도마뱀들은 놀라운 민첩성으로 움직이며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서 켈커가 다시 한번 창대를 휘둘러 한 리저드라이더를 고꾸라뜨렸을 때였다.

“이게 누군가! 서 켈커 아닌가? 음훼훼훼!”

서 켈커는 이 사람 비위를 건드리는 웃음 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 창을 맹렬히 휘둘러 앞으로 가져온 서 켈커는 전방에 서 있는 리저드라이더를 차분 히 바라보았다.

“반갑군, 서 파르치. 숫자를 선택해야 하나?”

“한번으로 족해! 제기랄. 당신과 서 소팔라를 놓친 다음 얼굴을 못 들고 다녔다구. 이번엔 내 포로가 되어주셔야겠어. 자, 덤벼봐!”

서 켈커는 서 파르치의 무장을 흘끔 바라보았다. 상대는 롱 소드를 들고 있었고 상대방이 타고 있는 목도리도마뱀의 앞발에도 롱 소드와 비슷하게 보이는 무장들이 달려 있었다. 서 켈커는 빙긋 웃었다.

“칼을 세 개나 쓰는군. 하지만 내 것이 더 길어.”

차분한 말 끝에 서 켈커는 집어던지는 듯한 속도로 창을 내찔렀다.


전투는 짧고 긴박하게 치루어졌다. 폴라리스는 혼란에 빠진 노예병들과 8군단을 분리한 상태에서 노예병을 전멸시킨다는 계획을 들고 나왔다. 노예 병은 강력한 폭발력을 자랑하지만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면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일 거라는 판단은 정확했고 그 계획은 별 흠집 없이 성공적으로 수 행되었다. 리저드라이더들이 다벨의 기병들을 상대하는 동안 오닉스 나이트의 보병들은 노예병들을 척살해 대었다.

하지만 휘리는 폴라리스군이 성벽 밖으로 나온 이상 절대로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서 소사라는 사령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한 다 음 혼란에 빠진 중장보병들을 먼저 수습했다. 중장보병들은 노예병보다는 회복이 빨랐고 소사라는 전열을 가다듬은 중장보병으로 오닉스 나이트의 보병을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바스톨 장군은 주저없이 후퇴를 명령했다. 얻은 만큼 뺏기는 식으로는 폴라리스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오닉스와 서 파르치는 바스톨 장군의 명령에 따라 성문 안쪽으로 도망쳤고 서 소사라는 그제야 전장 한가운데 드러누워 있던 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투 내내 억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해소된 순간 서 소사라는 형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기 시작했고 그래서 겨우 구출한 형을 기절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서 소사라는 형제의 행운에 마음놓고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진영으로 복귀한 8군단은 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망연자실해했다. 노예병들은 사실상 전멸했다. 전장에서 도망쳐버린 노예병들이 돌아올 가능성 은 남아 있었지만 그날 저녁 점호에 응한 노예병은 원래 숫자의 1/5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8군단의 가장 뼈아픈 손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휘리는 짓씹는 듯한 어조로 반문했다.

“서 켈커가 붙잡혔다고?”

중장기병은 비통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그렇습니다. 그 비겁한 녀석이 일대일 대결인 척해 놓고는 부하들과 함께 우르르 달려들어 서 켈커를 붙잡아버렸습니다.”

중장기병은 자신이 본 바를 상세히 보고했다. 서 파르치가 서 켈커의 창을 막아낸 순간 서 켈커의 뒤쪽에서 이상하게 생긴 리저드라이더가 달려들어 서 켈커의 뒤통수를 후려쳐 낙마시켰다는 것이다. 중장기병은 그 목도리도마뱀에게는 다른 도마뱀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보라색 줄무늬가 있어 이상 하게 보였다는 말로 보고를 마쳤다. 휘리는 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에서의 속임수야 탓할 수는 없지. 걱정 마라. 포로로 잡힌 거라면 어떤 액수의 몸값이라도 지불하고 서 켈커를 되찾아오겠다. 가서 쉬도록.” 중장기병은 경례한 다음 돌아갔다. 휘리는 우울한 표정으로 참모진을 둘러보았다.

한 사람이 빠졌을 뿐이지만 서 켈커의 빈 자리는 크게 보였다. 그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기사는, 그러나 8군단에서 가장 강력한 병종을 자유자재 로 다루고 있었다. 중장보병이 군단의 방패라면 중장기병은 군단의 검이다. 8군단은 노예병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검까지 뺏긴 셈이었다.

서 기리우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노성을 질렀다.

“항의해야 합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회의에 참석해 있던 서 소팔라와서 소사라, 그리고 휘리는 서 기리우를 돌아보았다. 서 기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 쪽을 가 리키며 외쳤다.

“저 바다 도둑놈들은 터릿 갤리어스를 맡아주기로 했잖습니까! 그런데 거꾸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상대보다 훨씬 많은 배로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노스윈드와 맞먹는 척 잘난 체를 하다니, 돼지 같은 놈들!”

휘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 친구들을 만나봐야 되는 건 맞아. 오늘밤은 승세를 탄 적군의 야습이 있을지 모르니 대비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필마온 기사단을 좀 만나봐야겠군. 그리고 전투 직전에 나타났다는 그 카밀카르 함대도 좀 만나봐야겠고.”

휘리는 책상 위의 두 손을 깍지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군들. 오늘은 여러 가지로 힘든 날이었다. 내가 8군단을 맡은 이래로 이런 패배는 처음이로군. 더군다나 육지와 바다 모두 상대보다 월등히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패배를 당하다니, 제군들에게 할 말이 없다.”

참모진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보던 휘리는 가볍게 손뼉을 딱 쳤다.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는 장수들을 향해 휘리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재미있는 얼굴들을 하고 있군. 어울리지 않으니 집어치우게, 서 소팔라. 서 소사라 자네야 원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넘어가지. 기운들 내! 약속하겠다. 그 표정들 잘 기억해 두었다가 기필코 저 해적놈들로 하여금 똑같은 표정을 짓게 만들어주지.”


휘리가 부하 장수들을 위무하던 있던 시각, 폴라리스에서는 거창한 승전 파티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거창하기만 할 뿐 요란하지는 않은 파티 들이었다.

그 파티들은 주로 각국 대표부들이 마련한 것들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폴라리스의 패배를 점치고 있던 그들은, 그래서 폴라리스가 거둔 놀라운 승리에 희열에 가까운 기쁨을 느꼈다. 필마온이나 다벨을 선호하는 나라가 드물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본격적인 힘의 대결 에서 필마온과 다벨을 동시에 격퇴한 폴라리스의 위업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었을 뿐만 아니라 본국에도 그 쾌거를 전달하고 싶어 안달했다. 밤이 오자마자 감동 어린 문구로 가득한 서신을 지참한 전령이 대륙 곳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최한 파티들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노스윈드의 선장들은 모두 정중한 거절을 보내었고 노스윈드 해적들 역시 노잡이 노예까 지도 찾아오면 환영하겠다는 파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참여율을 보였다. 같은 기쁨을 공유하고자 하는 망명객들만이 약간명씩 참여했을 뿐 전 반적으로 한산한 파티들이 다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카밀카르 대사관에서는 폴라 대사가 펜촉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종이 위로 펜촉을 달리게 했다.

‘이들은 아직도 뱃사람이라면 잘 아는 노스윈드의 엄한 기율을 잊지 않은 모양입니다. 노스윈드는 승리 뒤에 소란 없다고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지 금 이들은 과연 거대한 승리를 거둔 승전국의 병사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히 행동하고 있습니다. 선장들이 조용히 있으니 아랫사람인 자신들이 함부로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폴라 대사는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며 창 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다림 앞바다는 육지에 비해 좀 요란한 편이었는데, 표류자 수색과 전리품 인양 등 의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나마도 잔치가 아닌 노역으로 시끄러운 것이었다. 폴라 대사는 수심이 깃들인 표정으로 다시 펜촉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표정과 달리 펜촉은 매끄럽고도 빠르게 움직여 갔다.

‘육지 쪽의 다벨은 침통한 분위기입니다. 강철의 레이디와 리저드라이더, 그리고 노스윈드 해적들의 공격으로 노예병들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 었고 8군단의 3중대장 서 켈커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외 다른 지휘관의 손실에 대해서는 아직 잘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또다른 지휘관 하나가 큰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8군단이 그 구성원의 정예성을 자랑으로 삼기는 했지만 폴라리스 공격을 앞두고 3, 4, 5, 6군단의 잔여병들을 대거 합류시켰으므로 현재 그 질적 수준은 미지수, 따라서 고급 지휘관의 손실은 매우 큰 타격일 것 같습니다.’

관심을 해군 쪽으로 돌린 폴라 대사는 대사에 대해 떠올렸다.

‘필마온 기사단을 공격했던 그 하얀 뱀은 서펜트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제 정보망에 의하면 그것은 대사라고 합니다. 원래 아피르 족의 땅에 살면 서 그들을 잡아먹던 괴물인데 키 드레이번에게 패배한 이후로 키 드레이번의 부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라 이 정보를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폴라 대사님도 수고가 많으시군요. 예, 대사 맞아요. 다른 이름으로는 철탑의 인슬레이버라고 하지요.”

먼바다에 떠 있던 카밀카르 함대의 기함 스톰라이더호에서 율리아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한 용감한 전령의 노고에 의해 폴라 대사의 서신이 도착한 것은 조금 전이었다. 전령은 방수포로 서신을 감싼 다음 카밀카르 함대까지 헤엄쳐 왔다.

카밀카르 함대의 제독 데아첵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철탑의 인슬레이버라고 하셨습니까? 그 괴수에 대해 잘 아십니까, 공주님?”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린타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그 괴물이 오 왕자의 땅이 통일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묘사를 했 지요.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제로 오 왕자의 땅을 통일한 휘리 노이에스는 대사의 적이 되겠지요. 아마도 그래서 폴라리스와 손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되네요.”

데아첵 제독은 자신이 들었던 것을 잘 기억해 두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 읽겠습니다. 폴라리스가 가진 기적의 금고에는 아직도 잔고가 충분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이에 저는 본국에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불난 집과 도 같아서 한발을 잘못 내디뎠다간 그대로 타 죽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위험한 시절입니다. 결단은 빠르게, 하지만 신중하게 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폴라리스를 돕는 것 또한 유익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어쨌든 폴라리스는 어느 나라와도, 심 지어 그 땅의 주인이었던 레갈루스와도 악연을 쌓은 바가 없습니다. 그들의 원래 정체를 생각해 보면 이 또한 그들 특유의 놀라운 기적이라 하겠습니 다. 반면 다벨은 그 점령국은 물론이거니와 제국과 교회와도 좋지 못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악당입니다. 그들 자신도 부인할 수 없겠지요. 앞날의 일 을 생각해 볼 때 폴라리스와 키 드레이번에게 협조하는 것에 다벨과 휘리 노이에스에게 협조하는 것만큼의 이득이 없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다림의 폴라. 데아첵 제독, 폰스파궁으로 복사본 한 통을 보내주기 바랍니다. 무운을 빕니다.”

고지식하게도 마지막 부탁까지 다 읽은 데아첵 제독은 서신을 정확히 접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서신이 아니라 암호로 이루어 진 서신을 해석한 해석본이었지만 제독의 손길은 한결같이 정중했다. 데아첵 제독 역시 다림의 큰누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뱃사람인 것이다. 생각 에 잠긴 표정으로 촛불을 바라보던 율리아나는 고개를 살짝 꺾어 데아첵 제독을 바라보았다.

“어쩌시겠어요, 제독님?”

“폴라 대사의 글을 읽으면 항상 유쾌합니다. 저 같은 무인도 이해하기 쉽게 써주시고 재미있으니까요.”

잠시 엉뚱하게 들리는 말을 한 데아첵 제독이었지만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전포고의 시점을 늦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전투 직전에 상대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볼썽사나운 꼴인지야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 만 이 시점에서 성급한 판단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국에 결정을 넘긴다는 건가요? 하지만 그건 너무 늦을 텐데요.”

“원칙적으로 본국의 재결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급히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온다면 저는 당연히 폴라리스를 공격할 겁니다. 그런 명령을 받았으 니까요. 하지만 그 시기를 늦추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끝끝내 폴라리스와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다벨과 필마온 측이 진심으로 고 마워하게 될 만한 개입 시점을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어떤 것이 카밀카르에 가장 도움되느냐 하는 것이고, 그 판단을 위해 폴라 대사의 이 서신은 꼭 본국에 전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이 위치에서 관망인가요? 그렇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기회주의자적인 모습으로 비칠 텐데요. 전쟁터 주위를 배회 하며 누굴 도울 건지 궁리하는 모습은…………”

“그런 입장은 회담을 통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담이오?”

“예. 필마온 측과 다벨 측이 회담 요청을 해왔습니다. 장소는 폴라리스에서 약간 떨어진 어떤 해변가입니다. 당연히 응해야겠지만 아무것도 약속해 줄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카밀카르는 이 소란에 우려를 느끼며 그대들을 주시하노라, 정도로 거드름을 피워볼까 합니다. 공주님께서도 참석해 주 시길 바랍니다.”

“제가요?”

“예. 공주님께서 참석하시면 우리의 태도가 불분명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농담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저들도 함부로 우리를 전쟁 구 경꾼이나 기회주의자로 몰아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공주님께서도 서 휘리를 만나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발도 로네스는, 어쨌든 지금 은 공주님의 약혼자이십니다.”

데아첵 제독이 그 자신의 말처럼 단순한 무골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율리아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언제지요?”

“내일입니다. 활동하시기 편한 복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이곳은 3개국과 1개 기사단이 모여 있는 전장이니까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 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