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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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하스는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휙 쳐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
파하스는 매섭게 말했다. 그러나 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컵을 들어 보였다.
“수프요. 당신이 정말 유령이라면 먹을 필요가 없겠지만, 내 귀에 들려온 소리는 분명히 꼬르륵거림이었는데.”
파하스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올렸다. 쳉은 충분히 느린 동작으로 컵을 내밀고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았다. 그리고 파는 모닥불의 반대편에 앉은 채 역시 컵에 담긴 수프를 조금씩 마시며 그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쳉은 자기 컵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왜 자신을 파하스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나는 파하스야…. 젠장, 파하스라고!”
“파하스는 100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야 되나?”
“예?”
“지금이 드래곤력 몇 년이냐? 응?”
쳉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래곤력이라니. 이건 정말 중증인데.
“그건 잘 모르겠는데. 뭐, 100년 전까지는 드래곤력도 함께 쓰이기는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요즘은 헤게모니아에서도 거의 바이서스력을 씁니 다. 어쨌든 지금은 바이서스력 316년이오.”
“잠깐…………, 바이서스력이라면 루트에리노 대왕이 드래곤 로드를 물리친 해를 기준으로 세는 것 말이냐?”
“예.”
파하스는 그만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검을 뽑아 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태평하게 지껄이고 있는 녀석의 목을 겨누고 싶은 기분도 느꼈다. 손에 수프가 담긴 컵이 없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파하스는 목을 떨며 힘겹게 말했다.
“그럼 계산이…………, 208년 아니냐?”
쳉은 파하스가 미쳐버릴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316년입니다.”
기어코 파하스는 컵을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땡그랑! 파는 펄쩍 뛰듯이 일어났다. “꺄아악!” 수프가 어지럽게 튀어 주위를 지저분하게 만들었고 모 닥불에 튀어 들어간 수프 방울들은 피시시식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쳉은 음울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음식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좋은 예절이 못 됩니………”
쳉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달려든 파하스는 그대로 쳉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쳉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이 정신 나간 자식아! 똑바로 말해! 지금이 몇 년……, 우큭!”
파하스는 눈앞이 시커멓게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허리를 꺾었다. 그의 명치를 호되게 쥐어박은 쳉은 흩어진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세 번째로 말하지만, 316년입니다. 3은 마법의 숫자라던가요.”
파하스는 쳉만큼 침착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자에게 관대해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뒤로 튕겨지듯 일어난 파하스는 그대로 그 기나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쳉은 생각했다. 검이 기니까 발검 동작도 화려해지는군.
파하스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일어나서 검을 뽑아! 맨손의 녀석을 치진 않는다!”
“그래요? 그럼.”
쳉은 고개를 돌려 땅바닥에 구르는 파하스의 컵을 줍고 주위를 치웠다. 그리고 자신의 컵을 들어 수프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파는 도대체 무슨 말 을 해야 될지 모를 심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한쪽에서는 모닥불을 쬐며 수프를 홀짝거리고 있는 사내, 그리고 그 옆에는 긴 검을 든 채 부 들부들 떨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 쳉의 경우 저녁 식사중인 방랑자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해 내고 있었지만 파하스의 경우 기가 막혀서 입을 조금 뻐끔거리고 있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쳉! 위험해!”
파는 결국 그렇게 고함질렀다. 하지만 쳉은 어깨를 으쓱였다.
“검을 안 뽑으면 치지 않는다잖아. 걱정 마.”
“이 자식아, 일어나라! 일어나서 검을 뽑으란 말이다! 파하스에게 손을 댄 녀석은 그 손을, 입을 나불거린 녀석은 그 입을 내놓아야 돼! 원래 그렇단 말이다!”
파하스는 거의 투정부리듯이 외쳤다. 검을 보고 발작하지 않는 사내라는 것은 그의 인식 범위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대사건’이었고, 그래서 파하스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말을 하느라 매우 힘들어했다. 싸움의 승패야 알 수 없지만, 파하스는 싸움 자체는 언제든지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눈 한번 흘겨주고 적당히 약올려 주면 언제든지 사내들은 검을 뽑아 마주대어왔다. 하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뭐란 말인가. 파하스는 ‘제발 일어나서 검 좀 들고 싸워줘.’ 라고 부탁해야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안 뽑겠소.”
“이이이런 제기랄!”
파하스는 고함을 지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파를 바라보았다. 파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고, 그것은 관심 없는 척하며 사실은 파하스의 모든 동작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던 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파하스는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씨이익.
파하스는 갑자기 화려한 동작으로 검을 돌려 파를 겨냥했다. 파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고 쳉은 컵을 집어던지기 위해 근육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파하스는 외쳤다.
“충심으로 저 레이디를 모욕하겠다! 저 레이디 역시 아름다우시지만, 나의 레이디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임을 선언하겠노라!”
파하스는 득의로운 표정으로 쳉을 돌아보았고 쳉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며 의아해했다. 뒤로 물러나던 파 역시 뒤로 나동 그라질 뻔했지만 간신히 나뭇가지를 붙잡고 똑바로 섰다. 쳉은 엄지와 검지로 이마 양쪽을 세게 누르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레이디의 명예를 위해 당신과 결투해야 된다?”
“어…… 당연하지! 그게 혈관에 피가 흐르는 사내의 갈 길이지. 레이디를 위해 죽는 것! 자, 무사 쳉이여. 일어나서 검을 들어라!”
쳉은 암담한 기분으로 파를 바라보았다.
“파, 그렇게 할까?”
“미쳤어?”
“응. 나도 할 생각 없었어.”
파하스는 전율을 느꼈다. 있을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된 사람의 목소리로 파하스는 외쳤다.
“이…………,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걸작 커플 같으니라고!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상황이야앗! 내가 저 레이디를 모독했잖아!”
“뭐, 그런가 보죠.”
“이 자식아, 레이디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한 거야!”
“그런가 보죠.”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바뀐 거야앗!”
파하스는 그렇게 외치며 검을 내팽개치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쳉은 그가 뭔가 속임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완전히 기운을 잃어서 주저앉았 다고 판단하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전율하고 있던 파하스는 익숙한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린 파하스는 쳉의 손에 쥐어진 자그마한 통을 바라보았고, 그 안에서 풍겨나오는 향기에 몸을 부르르 떨 만큼의 반가움을 느꼈다. 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에게 필요할 거 같은데.”
파하스는 쳉이 건네는 술병을 냉큼 받아들며 그럴 수 없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레이디를 모욕한 것, 사과하겠네. 자네를 격분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지 진심이 아니었어. 사실 내 레이디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아. 아름다우신 레이 디, 부디 제 가련하고 보잘것없는 허풍을 눈감아 주시길 바랍니다. 파 양께서는, 만일 여기 이 쳉이 없었다면, 제가 당신을 위해 검을 뽑아들 만큼의 미인이시오.”
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귀결을 바라보던 파는 그제서야 간신히 다리를 움직일 정도의 기 력을 회복했다. 파는 힘겹게 걸어와 원래의 자리에 앉으며 파하스가 술통을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쳉은 파하스가 너무 많이 마시지 않기를 바 랐지만 파하스는 그 독주를 마치 물이나 되는 것처럼 벌컥벌컥 마시고는 진저리를 쳤다.
“후와! 허, 좋군. 정말 100년 만에 마시는 기분이야.”
“당신 이름은 뭡니까.”
파하스는 술맛이 확 달아나는 기분을 느꼈지만 쳉은 한가로운 시선으로 파하스의 목 언저리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 다. 파하스는 쳉에게 짓씹을 듯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파! 하! 스! 다! 한번만 더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파하스, 여기, 이 시대에서.”
“응?”
“당신은 왜 이 숲으로 들어온 것입니까.”
파하스는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쳉을 바라보기는 했지만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내가, 왜? 아니……, 내가 왜 이 숲에 들어왔지? 나는………… 나는 분명히 사이들랜드의 평원에서……………”
파하스의 시선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 넋이 나가버린 얼굴을 보던 파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엉덩이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쳉에게 가깝게 앉기 위해서, 그러나 파하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파는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하지만 파하스는 파에게 아무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쳉 은 파하스의 눈동자가 점점 위쪽으로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파하스는 흐느끼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사이들랜드에서…………, 밤…………, 별을 보며………… 하프를………… 노래…………, 산트렐라의 이름은 추억 속에서…………, 눈이 신비를 볼 수 있다면 입으로는 신비를 노래하련다…………. 거짓된 귀가 듣고 있는 것은………… 대평원의…………, 대평원의 노래…………. 나는 죽었어!”
파하스의 눈동자가 갑자기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눈동자였다. 파하스는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오랫 동안 참았던 것 같은 호흡을 내뿜었다.
“죽었어, 죽었어.”
쳉은 그 이름이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부를 만한 다른 이름이 없었기에 그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파하스?”
“허억……, 컥!”
파하스는 격한 동작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옷을 찢어낼 듯한 손놀림. 분노와 경악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선 혈관이 불끈 솟아올랐다. 파하스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쳉은 재빨리 그 몸을 붙잡았고 파하스의 몸이 무서울 만큼 차가운 데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파하스!”
“커……억! 클, 쿡! 나……………, 나는…..”
파하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당황하여 반쯤 일어선 파는 파하스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왜, 왜 그래? 이봐요, 파하스? 파하스!”
“크・・・・・・ 가앗! 아아아아악!”
파하스의 몸이 거의 튀어오를 듯한 경련을 일으켰다. 쳉은 하마터면 파하스를 놓칠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의 어깨를 부여잡아 뒤로 밀어붙이는 데 성 공했다. 파하스는 뒤통수를 호되게 부딪히며 땅에 눕게 되었지만 경련을 멈추지는 않았다. 눈을 뒤집은 채 뻣뻣해진 팔다리를 마구 내저으며 파하스 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쳉은 재빨리 파하스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파하스의 얼굴을 살피던 쳉은 곧 혀를 찼다.
“파, 가방!”
쳉은 죽을힘을 다해 파하스의 어깨를 찍어누르며 외쳤다. 발을 동동 구르던 파는 쳉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 가방이라니? 무슨 말이야?”
쳉은 파하스의 주먹에 턱을 한 방 맞으며 다시 외쳤다.
“내 안장의 가죽 가방을 가져와. 이 친구……”
쳉의 동작을 보던 파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쳉은 파하스의 입에 오른 팔뚝을 우겨넣었고 그러자마자 파하스는 끊어버리기라도 할 듯 이 그것을 깨물었던 것이다. 튀어 오르는 피를 보며 파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쳉!”
그러나 쳉은 파의 비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지그시 이를 사려물며 말했다.
“빨리 가방을 가져와 이 친군 놔두면 혀를 깨물어.”
파는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혼란 속에 간신히 쳉의 안장에 매달려 있던 작은 가죽 가방을 뜯어내다시피 가져올 수 있었다. 파가 그것을 들고 오는 것 을 보자 쳉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으로 파하스의 턱을 부여잡았다. 쳉은 잇사이로 희미한 소리를 내며 파하스의 턱을 내리누르기 시작했 다.
“으으으음!”
쳉이 오른 팔뚝을 끄집어내자마자 파는 그 입에 가죽 가방을 우겨넣듯이 집어넣었다. 파하스는 그것을 깨물었고 그러자 쳉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재빨리 파하스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미친듯이 들썩이는 파하스를 마치 야생마를 다루는 바이서스 목동처럼 민첩하고 침착한 동작으로 다루어, 쳉은 파하스의 두 손을 움켜쥐어 머리 위로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다른 동작은 불가능했다. 쳉은 파하스를 고정시킨 채 낮고 강하게 외쳤다.
“파하스, 파하스! 정신 차려, 파하스!”
“우큭, 우우우읍!”
파하스는 허리를 뒤틀며 쳉을 떨쳐내려 했고 그 무서운 힘에 쳉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찌할 줄 몰라하던 파가 좋은 생각을 떠올린 것은 그때였 다. 파는 다시 쳉의 안장 쪽으로 넘어질 듯 황급하게 달려가서는 밧줄 사리를 들고 왔다. 잠시 후 파는 대시인의 시대에 그를 알았던 모든 여인들이 간절히 원하던 것을 해냈다. 파하스의 팔다리를 꽁꽁 묶어버린 것이었다.
입에는 가방이 물리고 팔다리는 묶였지만 파하스는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튀어나올 듯이 희번덕거리는 눈은 극도로 충혈된 채 허 공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꼼짝도 못하게 되었고 쳉은 그제서야 파하스의 몸 위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헉, 헉……”
쳉은 파하스의 옆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파는 펑펑 울면서 쳉의 팔을 부여잡았다.
“쳉, 쳉! 팔, 팔!”
쳉은 파에게 붙잡힌 오른팔을 거칠게 빼내었다.
“내 팔을 뽑아놓을 작정이야?”
파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파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쳉을 올려다보았지만 쳉은 그녀를 외면한 채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 응?”
“붕대 가지러.”
“아, 앉아 있어. 앉아 있으라고! 내가 가져올게!”
파는 허겁지겁 일어나서는 쳉의 옆을 빠져나갔다. 쳉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는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가 붕대와 약병을 가지고 오자 쳉은 손을 내밀었다. 파는 거칠게 도리질을 하며 붕대와 약병을 가슴에 파묻었다.
“내가 해줄게. 팔 내밀어, 응? 팔 내밀어 봐아아아!”
물끄러미 파를 바라보던 쳉은 별말 없이 오른팔을 내밀었다. 파는 눈물을 훔치고는 조심스럽게 쳉의 팔뚝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파가 쳉의 팔을 치료하는 동안 쳉은 꽁꽁 묶인 짐더미처럼 된 채 들썩거리고 있는 파하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파하스는 이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쳉은 혹시 숨이 막혀버린 것은 아닌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하지만 호흡엔 이상이 없었다. 파하스가 밧줄을 끊어버릴 듯이 난동을 부렸지만 양치기인 파의 매듭은 꼼꼼했다. 쳉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저러는 거지?”
“다시 주, 죽고 있는 거 아닐까.”
쳉은 고개를 돌렸지만 팔에 붕대를 감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파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파는 고개를 숙인 채 잔뜩 코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거 아닐까?”
“파, 진짜 파하스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까부터 주욱.”
쳉은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관두고는 다시 파하스를 살폈다. 파하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경련은 멈추지 않았다. 파하스는 그렇게 울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우으읍.”
“우으읍.”
“우으읍.”
파하스는 더 이상 몸부림을 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파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가다듬고 얼굴도 닦아주어서 그렇게 흉 하게 보이지는 않도록 만들어놓았다. 파하스의 모습은 이제 말쑥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쉬지 않고 저런 말을 지껄이고 있었기 때문에 쳉은 그의 밧줄을 풀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갈을 풀어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좀 그만하십시오.”
“우으읍.”
“당신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우으읍.”
파하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쳉을 바라보았다. ‘죽여줘! 나는 죽었어. 죽은 자야! 이렇게 대지 위를 걸어 다니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뺏어서라도 부활하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쳉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다가 턴빌의 신스라이프는 66년 전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00년도 더 전에 죽은 파하스는 그를 알지 못할 것이 다. 쳉은 곧 신경을 곤두세우며 파하스의 안색을 살폈다. 만일 신스라이프의 이야기에 대해 아는 척한다면 저건 파하스가 아니다. 그러나 파하스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우으읍.”
쳉은 소리 없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채 불안한 표정으로 파하스를 바라보고 있던 파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지, 쳉? 저 사람…..⋯을 어떻게 할 거야?”
파하스라고 부르기도 어려웠고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100년도 더 전에 죽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밧줄로 묶을 수 있고 재갈을 채워 놓을 수도 있으니 유령 같은 것도 아니다. 파는 도대체 저 남자를 뭐라고 불러야 될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쳉은 우울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뒤적이 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이건 너무 골치 아픈 문제인데. 죽은 자를 죽이는 것이 살인이야? 아니, 저 친구를 죽일 필요도 없지. 밧줄만 풀어주면 자살해 버릴 태세 로군. 그런데 죽은 자가 자신을 죽이는 것이 자살인가?”
“우으읍.”
“이상한 말 만들어내려고 하지 마. 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눈앞에서 누가 자살하는 것은 못 봐주겠는데. 그 사람이 아무리 죽은 자라고 해도………… 아이, 나도 말이 이상해지잖아! 죽은 사람이 자살하다니!”
“우으읍.”
“그래. 이건 도대체 내 머리로는 해답이 안 나오는 문제야. 그런데 이럴 때는 감정을 따라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어쨌든 누군가를 죽이 거나, 죽게 내버려두는 것은 찝찝한 일이야. 그렇잖아?”
“우으읍.”
“맞네. 그래. 쳉 말이 맞아. 그런 일은 안 되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우으읍.”
결국 파는 더 못 참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봐요! 그만해요! 한번만 더 ‘죽여줘.’라고 말하면 죽여버리겠어욧!”
잠시 후 파는 쳉과 파하스가 똑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쳉은 고개를 숙여버렸고 파하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하늘을 올려다봄으로써 파를 외면해 주었다. 발갛게 변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파는 심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조금 전에 쳉이 말했던 것처럼 목숨 걸고 부활하려는 사람도 있어요.” 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 역시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부활하려면 죽어야 되는데, 죽은 자에겐 목숨이 없으므로 목숨을 걸고 부활할 수는 없다. “아주 이상하고 무시무시한 일이지만, 이렇게 되살 아났으면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자꾸 죽여달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지요? 이상해요, 아주.”
“……우으읍.”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파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파는 대시인을 호되게 걷어차 주려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어쨌든 꽁꽁 묶여서 재갈까지 물린 채 쓰러져 있는 사람을 걷 어차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파는 다른 방법을 강구했고, 쳉은 기겁할 듯이 놀라며 일어서야 했다.
“왜 내 다리를 걷어차는 거야?”
파는 발을 동동 구르고 주먹까지 좀 휘두르며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저거 좀 어떻게 해줘. 재갈까지 물린 채 저렇게 ‘죽여줘, 죽여줘.’ 하고 중얼거리는 거 못 듣고 있겠으니까, 응? 좀 어떻게 해보란 말 “이야!”
쳉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려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조금 전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약간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쳉은 마지못한 듯 파하스의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들었습니까? 좀 그만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으이우읍.”
“무슨 말인지 모르니 답답하군요. 파하스라면 명예를 알 겁니다. 재갈을 풀어줄 테니 혀를 깨물지는 말아요. 맹세하겠다면 눈을 두 번 깜빡이십시 오.”
쳉은 거의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파하스의 눈이 빠르게 두 번 깜빡이자 의심부터 떠올리게 되었다. 의심이 잔뜩 담긴 눈으로 파하스를 보던 쳉은 마침내 손을 뻗어 그의 재갈을 풀었다. 여차하면 그의 양쪽 관자놀이를 쥘 수 있도록 어깨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킨 채.
재갈이 풀리자 파하스는 가쁜 숨을 토해 내었다.
“푸후! 후, 하아. 죽여줘.”
“……그렇게 걸신들린 듯이 숨을 쉬면서 죽여달라고 말하면 호소력이 없습니다.”
파하스는 잠시 입을 쩍 벌린 채 쳉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상단의 호위 무사에게서 이런 논리적인 지적을 듣게 된 것은 대시인 파하스에게 있어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경험이었다. 파하스는 쳉의 어깨 너머로 낄낄거리고 있는 파를 바라본 다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허, 뭐, 이건 당연한 반응이잖아, 인마. 어쩔 도리가 없는 현상을 가지고서 면박주지는 마라. 그리고 부탁인데, 죽여줘.”
“왜요? 살고 싶지 않습니까?”
“나는 죽었어.”
“그럼 지금의 당신 상태는 뭐라고 부르는 겁니까?”
“뭐야? 자식아. 지금 내 상태란 것이 말이 안 되니까 부탁하는 거 아니냐. 이런 것은 존재할 수 없어. 나는 죽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나를 죽인다고 해도 넌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으로 돌려놓는 거지. 알겠어? 알아먹었으면 빨리 나를 죽여줘.”
“묘하군요. 단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생존 욕구를 부정하는 겁니까? 살고 싶은 생각이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데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습니 까?”
파하스는 잠시 눈을 찌푸린 채 쳉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은 어떻게 다른 것이냐.”
“예? 그건 같은 것이지 않습니까. 뭐, 기분에 따라 여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고 가을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나는 죽은 채 살고 있는 거냐, 아니면 살아 있지만 죽은 거냐.”
“당신의 기분에 맞는 방식으로 부르십시오. 내 생각엔 양쪽이 똑같다고 느껴집니다만.”
“도대체 너는 바보처럼 보이는 바보냐, 바보라서 바보처럼 보이는 거냐!”
파하스의 몸이 요동쳤다. 파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지만 쳉은 팔짱을 끼고 쭈그려 앉은 자세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자세라고 주장하는 듯한 얼 굴로 파하스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밧줄 때문에 아플 겁니다.”
“이 자식아, 날 죽이란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 빚진 것이 없었어! 얻을 만큼 얻었지만 뺏긴 것도 많았다. 그러나 그걸 비교해서 결산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빚을 지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아. 이 세상에겐 나를 되살릴 권한이 없다고!”
쳉은 잠시 생각한 다음, 생각이라는 행위 자체를 포기했다. 이해할 도리가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쳉은 다른 말을 꺼냈다.
“……우리는 턴빌로 갑니다.”
“뭐? 턴빌이라니?”
“고풍스러운 드래곤식 이름으로는 아이야 이켈리나라고 부르지요. 지금은 다들 턴빌이라고 부릅니다.”
파하스의 얼굴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쳉은 그 표정을 새겨두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곳은 당신 고향이지요?”
고향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파하스의 얼굴엔 다시 조금 전과 같은 표정이 지나쳤고 쳉은 속으로만 빙긋 웃었다. 상단의 호위무사이자 방랑자인 쳉은 방랑자를 자극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방랑자이긴 했지만 그에겐 고향이나 부모가 없었고, 그래서 쳉은 거리감을 가진 채 고 향이나 부모가 있는 방랑자를 관찰할 수 있었다. 파하스는 낮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향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난 고향이 없거든요. 그러니 거기까지 가서 당신을 놔주겠습니다. 자살하든 말든 맘대로 하시 죠. 난 당신을 이 황야에 내버려둔 채 떠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이냐? 아이야 이켈리나에 간다는 것이?”
“예. 이렇게 부활했는데 고향 한번 보지 않고 다시 죽는 것도 좀 아쉽지 않겠습니까.” 쳉은 이 말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 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평생토록 타향을 전전하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파하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눈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쳉은 부드럽게 말했다.
“맹세하십시오. 밧줄을 풀어줄 테니 턴빌, 음, 아이야 이켈리나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동료로 있겠다고 맹세하십시오. 그곳에 도착한 다음에 당신의 거취를 자유롭게 하시지요.”
지금은 노랫말에나 남아 있는 지명을 거론하면서 쳉은 조금 유쾌한 기분 같은 것을 느꼈다. 파하스는 쳉을 뚫어져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맹세한다.”
쳉은 파하스의 맹세에 아무런 이의나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곧장 밧줄을 풀었다. 파는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지만 파하스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밧줄에 묶였던 팔다리를 주무르던 파하스는 파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 손을 슬그머니 치워버리는 모습까지도 보여주었다. ‘당신이 날 묶었다는 사실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진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시오, 착한 레이디’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동작이었기에 파는 머쓱한 기분을 느꼈다.
쳉은 불침번을 서겠다고 말했고 파하스는 별말 없이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프와 그 기다란 검을 망토로 세심하게 감싼 파하스는 그 짐을 머리맡에 치워두곤 배낭을 베고 누웠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상당히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잠시 후 파하스는 가벼운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파는 그때까지 도 쳉의 곁에 앉아서 쳉과 파하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별빛이 짙어지는 시간, 파하스가 완전히 잠들었다고 판단한 파는 쳉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파는 쳉의 귓가에 입을 대고서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쳉은 자신의 생각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파가 원하지 않는 대답을 했다.
“모르겠어. 그가 죽고 싶어 하는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아, 아니. 그것도 이상하긴 한데, 내 말은 파하스가 어떻게 되살아났느냐는 거야.”
“응? 아아, 그렇군. 음. 그가 언데드나 유령처럼 보여?”
“아니, 전혀. 말도 제대로 하고 묶을 수도 있는 유령이라니, 이상하잖아.”
“그래. 내 생각으로도 저건 완전히 되살아난 파하스이거나 완전히 미쳐버린 정신병자이거나 둘 중 하나야. 그런데 전자라면, 어떻게 파하스가 되살 아났지? 재미있는데, 그에게 물어본 다음 나도 써먹어 볼까. 아주 유용한 기술인 것 같아.”
“농담처럼 말하려는 거야, 농담을 말하려는 거야?”
“마치 파하스처럼 말하는군. 몰라. 미에게 물어보겠어.”
“응? 뭐?”
“미에게 물어보겠다고.”
“……그래서 턴빌로 가자고 한 거야?”
“응. 저 친구는 과거의 사람이야. 그렇다면 결국 이 문제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미에게 물어보는 편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잠깐. 미 가 말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인가?”
‘항상 미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는 거야?”라는 파의 질문은 그녀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질문이었으니까. 파는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턱을 얹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그렇겠네. 언니는 미래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말했지. 아빠도 죽게 내버려둔 언니니까.” 쳉은 파의 목소리에 결기가 어린 것을 느끼고는 눈 주위를 조금 꿈틀거렸다. “그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라는 말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일까.”
“흐음.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는 것은 확실히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긴 하지.”
“그럼…………….”
파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쳉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쳉은 동작을 구속당하는 것을 퍽 싫어했지만 파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럼 안 되는 거야?”
“응?”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면 안 되는 거냐고. 으응, 그러니까 유령 같은 거라면 모르겠는데, 저 파하스를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으스스한 것도 아니 고,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도 아니야. 저런 거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쳉은 파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자세에서는 무리였다. 그래서 쳉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파하스가 계속해서 말한 것이 뭐지?”
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여달라고 했잖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어, 자신은 죽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그건 엉터리야. 배짱을 부려보는 거라고.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거잖아.”
“배짱이라니?”
“씨…………, 몰라! 그거, 왜 있잖아. 남자들이 하는 거. 곧 죽어도 큰소리치고, 아무 때나 낭만 부리려고 드는 거 말이야. 파하스도 마찬가지야. 똑같은 남자라고, 남자들은 다 똑같잖아.”
“호기 말이구나. 호기 부리는 거. 하지만 죽으려고 드는 것이 어떻게 호기 부리는 것이 되지?”
“칼 빼어들고 적진을 향해 홀로 달려가는 장군은 그럼 뭔데?”
“그건 다르지. 그 경우에는 남자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부하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겠다거나, 혹은 이왕 죽게 될 거 명예롭게 죽 겠다는 등의 이유 말이야. 그리고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호기를 부릴 수 있는 거야. 물론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좀 어이없는 것, 그러니까 술을 많 이 마실 수 있다는 식의 호기나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등의 미련스럽기 짝이 없는 호기도 있기는 있지. 우리 보스 같은 경우에는 주로 도박판에 서 말도 되지 않는 패를 들고서는 호기를 부리는 편이야. 그게 사내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란.”
파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쳉은 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돌려 파하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저 친구가 죽으려고 드는 것은 호기와는 상관없는 거야.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이 죽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죽으려고 들고 있 어. 이해는 잘 안 되지만, 어쨌든 여기엔 호기는 전혀 없어.”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게 보이는걸. 뭐, 세상에 빚을 지고 싶지는 않다고? 웃겨. 도대체 왜 죽으려고 드는 거야. 누구나 살고 싶잖아.”
“그런가.”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기에 파는 한참 후에야 쳉이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는 머리를 들어 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그런가.’라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해.”
“어떤 사람?”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아는 사람. 미 말이야.”
파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변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파는 캄캄한 숲속을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영원히 미 생 각만 하고 있을 거야, 이 멍청아! 바보야!
네리아는 갑자기 일어났다.
야박한 인정을 무서워하며 창고나 헛간에 숨어 들어가 잠들었던 어린 소녀였고, 시간의 조화로 몸이 영글어가면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처녀였고, 타인의 소지품을 허가 없이 선사받으며 경비 대원들의 발자국 소리를 피해야 했던 나이트호크였기에 네리아는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 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다음 베개 밑에 넣어두었던 대거를 잡아당기며 자신을 깨어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았다. “낑……, 끄으응.”
이건 뭐야. 아달탄이 끙끙거리고 있는 소리였다. 저 개가 왜 저러지?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달탄의 끙끙거림 사이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를 들었다.
흐느낌?
네리아는 대거를 조금 느슨하게 바꿔 쥐며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만 분명한 울음소리였다.
“미?”
네리아는 침대에서 빠져나오며 미의 침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파르스름한 달빛을 받아 누워 있는 미의 윤곽이 드러났 다. 머리끝까지 시트를 덮어쓴 채였다. 그리고 그 침대 옆에서는 아달탄이 웅크린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네리아가 미에게 다가서자 아달탄은 곧장 몸을 튕겨 일어섰다. 네리아는 잠시 주춤했지만 미의 흐느낌이 다시 들려오자 결심을 굳혔다.
“이봐, 아달탄. 너 말 알아듣는다며? 네 주인이 이상한 것 같아서 그래. 말 좀 믿어봐.”
아달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리아는 겁먹은 표정으로 아달탄을 바라보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네리아는 되도록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움직여갔고 아달탄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그런 네리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네리아는 미의 머리 쪽으로 귀를 가져갔다. 그리고 잠시 후, 네리아는 당황하며 미의 시트를 걷어내렸다.
“이런, 미! 어떻게 된 거야?”
미의 거친 숨소리에 당황한 네리아는 미의 이마를 짚어보고는 더욱 놀랐다.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미의 이마는 불덩어리 같았다. 네리아는 한 손으 로 테이블 위의 등잔을 끌어당기며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거꾸로 쥐고는 재빨리 손가락을 놀렸다. 나이프의 손잡이에서 불꽃이 몇 번 튀자 아달탄은 깜짝 놀라며 물러났으나 네리아는 그에 괘념치 않고 등잔에 불을 붙였다.
방 안에 조명이 비치자 네리아는 미의 얼굴이 새하얗고 땀에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전신을 계속 떨고 있다는 것도. 컹컹컹! 옆 에서 불안스럽게 오가고 있던 아달탄이 벌컥 고함을 질렀다. 네리아는 기겁하며 미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 미? 정신 차려. 도대체 왜 이래? 안 되겠어. 잠깐만.”
네리아는 곧장 방을 뛰쳐나갔다. 조금 후 네리아에 의해 깨워진 운차이와 홀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그란은 침대 머리맡에 선 채 어두운 표정으로 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달탄은 신경질적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하다가 멈춰 서서 짖기를 반복했다. 아달탄의 고함 소리 때문에 여관 곳곳에 서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아달탄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고 미의 머리맡에 서 있던 사람들 역시 미의 상태를 보느라 그런 것에 관심 둘 여유는 없었다.
그란은 미의 이마를 짚어보고는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옆에 서 있던 운차이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뭐야, 몸살인가? 하지만 아까 저녁까지도 그런 기색이 없었는데.”
“이런, 이게 어디 몸살이야? 이렇게 아파하고 있잖아. 이것 보라고! 의사를 불러야 되는 거 아닐까? 응?”
네리아는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컹! 아달탄은 다시 쥐어짜듯 짖었고 네리아와 아달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운차이는 이 사태를 종식시키 기로 결심했다.
“가서 물이라도 한 대야 떠와 봐. 일단 열은 식혀야 되잖아.”
네리아가 부리나케 달려가고 나서야 약간의 고요를 얻게 된 운차이는, 다시 눈살을 험하게 찌푸리며 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얼굴은 종잇장 같았고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심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은 마치 말라리아 환자처럼 보였지만 운차이는 이 북부의 땅에서 누 군가가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네리아의 말이 맞아. 의사를 부르자. 심상찮아.”
“내가 갔다 오지.”
운차이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그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를 내려다보았지만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그때 부들부들 떨리던 미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그란은 눈을 꿈틀하다가 미의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달탄은 그런 그란의 모습을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그란은 신경 쓰지 않고 거칠게 떨리고 있는 미의 손을 쥐었다. 미는 손을 잡히자 곧 손에 힘을 주어 마주 잡아오며 말했다.
・・쳉, 쳉..
쳉이라고? 사람 이름인가? 미의 가족이나 연인일까? 그란은 아무 말 없이 미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안 보………., 윽, 흐으윽. 안 보여….”
그란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안 보인다고? 등잔을 이렇게 켜두었는데 보이지 않다니. 시력 상실은 보통 굉장히 위급한 상태에서나 나타나는 것이 다. 그란은 손을 뻗어 미의 눈꺼풀을 뒤집으려 했다. 하지만 미는 그란의 손이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갑자기 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미 는 크게 흐느꼈다.
·놓지 마, 부탁이야………. 흐윽, 놓지 마……………!”
그란은 고개를 떨구며 미의 손을 감싸쥐었다. 미의 격한 호흡이 조금 잦아들었다. 아달탄은 이제 두 발을 앞으로 모은 채 그 위에 머리를 떨구고는 구슬픈 표정으로 그란과 미를 올려다보았다. 그란은 완전히 기운이 빠져버린 키타나 하운드가 어떤 모습이 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네리아는 물 한 대야를 떠오기에 앞서 먼저 여관 전체를 물청소하다시피 해놓았다. 물 대야를 든 채 달렸기 때문에 사방팔방에 물이 튄 데다가 스스 로 그 물구덩이를 밟고 미끄러져버렸던 것이다. 여관 주인은 넌더리를 내며 직접 깨끗한 수건과 물동이, 주전자, 대야 등을 들고 왔다. 그리고 그때쯤 입에 게거품을 문 의사도 나타났다. 그란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운차이를 바라보다가 의사에게 질문했다.
“왜 그런 표정을?”
“당신도 한밤중에 누군가가 문을 일검에 반으로 잘라놓고 들어서서는, 턱이 쪼개질 것인지 10셀 받고 특별 왕진을 할 것인지를 놓고 3초 안에 결정 하라고 말한다면 나 같은 표정이 될 거요!”
그러나 주블킨이라는 이름의 그 늙은 의사는, 살벌한 외모로 무장한 두 사나이와 그 두 사나이보다 더 살벌한 키타나 하운드가 노려보고 있는 가운 데 의술은 인술임을 주장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더 이상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빠르게 미를 살폈다. 미의 눈꺼풀을 뒤집 어 보던 의사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대야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이봐요, 아가씨. 저 아가씨의 상의를 벗겨요.”
운차이와 그란은 네리아가 미의 셔츠를 벗기기 시작하자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런데 미의 옷을 벗기던 네리아는 갑자기 손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의사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야? 무녀잖소?”
운차이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한이 있어도 보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란은 의사가 바라보는 것을 흘긋 보았 다. 하얗게 드러난 미의 오른쪽 어깨에는 복잡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쇄골 부분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른팔 상완의 절반까지 뒤덮고 있는 커다란 문 신이었다. 그란은 오랫동안 바라보기 계면쩍어서 더 이상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네리아는 그 문신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네 리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복잡한 선과 도형들의 모습이었다.
의사는 손을 씻던 동작을 멈추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운차이를 보며 말했다.
“이봐! 장난치는 거요? 나더러 신열을 고치라는 것은 아니겠지?”
그란은 신열이 뭔지 궁금했지만 운차이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열이 아니오. 저 여자는 강신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니까.”
의사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열이 아니라고? 이상하군………아, 퓨처 워커요?”
“퓨처 워커…………, 그렇소. 미래를 보더군.”
“그럼 미래를 걷다가 뭐 실수한 거 아니오?”
운차이는 오늘 저녁에 그녀는 미래를 걷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네리아는 저녁에 보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의사에게 말했다.
“아, 예. 아까 저녁에 혼자서 물그릇을 보더라고요.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요? 엊그제도 그랬고 그 전날에도, 어쨌든 미는 자주 물그릇을 들 여다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갑자기 이럴 리가 없는……………”
네리아는 말을 맺지 못했다. 여관 주인과 의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다시 말해 봐요. 엊그제도…………, 뭐야? 매일 퓨처 워킹을 했다고?”
“예.”
“농담하는 거 아니죠?”
“그런데요? 왜요?”
의사는 이제 혼수상태에 빠진 미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무녀 아가씨, 죽으려고 작정했나?”
그란과 네리아는 충격을 받았다. 운차이가 빠르게 질문했다.
“그거 매일 하면 안 되는 거요? 우리는 뜨내기이고 이 아가씨와는 동료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는데.”
의사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일 하면 안 될 것은 없소. 한 달도 못 가서 죽어버려도 상관없다면 말이야. 당신네들 정말 무심한 동료였군.”
네리아는 입을 쩍 벌린 채 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 못하는 아달탄은 여전히 구슬픈 표정으로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의사는 별다른 처방을 하지 않았다. 퓨처 워커의 일은 스스로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의사가 해결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며, 앞으로 미래를 걷 겠다면 무조건 말리는 것이 좋을 거라는 처방만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긴 밤 동안 운차이와 그란, 네리아는 어쩔 줄 모른 채 그저 미를 바라보 고 있기만 했다.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거나 머리에 올려놓아 열을 식혀주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 무렵, 미의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네리아는 반쯤 졸고 있다가 그녀를 부르는 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네리아.”
네리아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미를 바라보았다. 초췌해진 모습이었지만 미는 평온한 표정으로 네리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힘들게 미 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잠꾸러기. 이제 일어났어?”
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좀 어때? 왜 사람을 갑자기 놀라게 만드는 거야. 어젯밤엔 너무 놀라서 심장에 금 갔을 거야. 뿌지직뿌지직.”
미는 별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미는 기억해. 의사가 왔지?”
“응.”
“한 달도 못 가서 죽을 거라는 식의 말을 했을 거 같은데, 맞아?”
네리아는 두 번쯤 말을 꺼내려다가 실패한 다음 세 번째 간신히 말했다.
“맞아. 그거 정말이야?”
“그럴지도 몰라.”
“바보 같으니, 왜 그런 거야!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잖아. 너무한 거 아냐?”
미는 거의 호흡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래에 살아 있는 몸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시트를 보며 네리아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미는 천 장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달탄은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은?”
“아달탄? 밤새도록 끙끙거리다가 조금 전에 잠들었어. 운차이랑 그란은 우리 일 때문에 나갔고. 그러니까, 후작의 자취를 찾아보러.”
미는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네리아는 그냥 그렇게 그만둘 수 없었다.
“뭐 먹고 싶지 않아? 목마르지는 않고?”
“괜찮아.”
“말 좀 해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렇게 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한 건데?”
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려 네리아를 외면했다. 네리아는 그녀를 왈칵 잡아당길까 하다가 다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듣고 싶어, 미. 말을 하라고.”
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봄의 햇살 이외엔 아무런 조명도 없는 여관의 방은 회색의 일렁거림으로 네리아와 미를 감싸고 있었다. 창문으로부터 떨어져내린 햇살은 미가 덮고 있는 시트 위에 사각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미의 얕은 호흡은 그 사각형을 전혀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정지되고 고요한 오후.
“미가 지금부터 말하는 것을 듣고 아무 질문도 하지 말아줘. 그냥 듣기만 해줘. 말을 하고 싶어.”
미는 갑작스럽게 말했다. 네리아는 당황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미의 미래는 단순해. 미는 스물다섯 살에 쳉과 결혼해. 그러니까 바로 올해지. 쳉은 미가 12년 동안 사귀었던 남자 친구고 미는 쳉을 말 못할 정도로 사랑해. 저 아달탄은 쳉이 소개해 줬지. 어쨌든 미는 쳉과 결혼한 다음 4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때, 미는 남편인 쳉 을 따라 여행을 떠나. 그 여행에서 쳉은 죽게 돼.”
네리아는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도대체 제대로 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이 극히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네리아는 자신의 인생을 마치 남 의 인생인 것처럼 평온하게 말하고 있는 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쳉이 죽게 되는 곳은 디도스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그때쯤 디도스에서는 페스트가 발생하거든. 그리고 페스트는 10년가량 헤게모니아를 점령할 거야. 그리고 쳉은 바로 그 병에 걸려서 죽게 돼. 미는 죽지 않아. 그리고 쳉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아. 왜 그런 줄 알아? 쳉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미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어쨌든 미는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와. 그리고 몇 개월 후, 미는 쳉의 아기를 낳다가 죽게 돼. 임신한 몸으로 혼자서 페스트가 횡행하는 땅을 가로질러 돌아오느라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야. 상당히 지저분한 모습으로 죽게 될 거야. 그 모습 을 봤지. 몸에 기름기가 다 빠져버려 가죽을 대충 뼈에 붙여둔 듯한 모습으로 아래로 피를 질질 흘리며 죽게 돼. 무지 빨리 썩더라. 다행인지 불행인 지, 아기는 살아날 거야.”
네리아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의 얼굴은, 미의 목소리는 도대체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표정이 아니었다. 뜨겁게 타오르 는 슬픔을 억누른 그 비인간적인 평온함은 바라보기 끔찍스러울 정도였다. 네리아는 눈앞이 부옇게 변해 오는 것을 느꼈다.
“쳉과 미의 아기는 미의 여동생인 파의 손에 키워져. 그 아기의 이름은 아달탄이야. 사실 미는 미래의 미의 아기의 이름을 따서 저 개의 이름을 지은 거지. 미는 불러보지 못할 이름이라서, 아쉬워서. 하지만 미가 그런 짓을 한 바람에 파는 개의 이름을 따서 조카의 이름을 짓게 되는 거지. 우습잖아. 사실은 거꾸로인데. 무녀에게는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야.”
미의 목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는 어조의 높낮이를 그대로 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어쨌든 아달탄은 페스트가 횡행하는 헤게모니아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며 살다가 열 살도 되지 못해서 죽게 돼. 그다지 행복한 죽음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모습이야. 그렇게 될 수가 없지. 그리고 파 역시 페스트에 걸리지만, 그 애는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아. 미의 여동생, 착한 아이, 파는………… 파 는 자살하게 돼. 여린 아이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계속된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거든. 이게 미와, 그리고 미와 관련된 사람들의 미래야. 그리 고…………, 무녀인 미 V. 그라시엘이 지켜야 될 미래고.”
네리아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털썩. 떨리는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쥐며 네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이게 미래를 본다는 것인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은 시간에 의해 사 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계속 되뇌며 살지는 않는다. 네리아는 팔이 떨어져나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양 어 깨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미는 계속 말했다.
“미는 그 모든 모습을 10년도 전에 알았어. 철이 들자마자 미의 죽음, 그리고 미의 가족과 아들의 죽음을 모조리 봤지.”
숨이 막히는 기분 속에서 네리아는 미의 이름만을 되풀이 되풀이 불렀다. 그러나 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 다.
“행복할 수 있을까?”
봄의 따스한 공기 속에 희미한 먼지 입자가 반짝거렸다.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지 알 수 없는 꽃향기는 퀴퀴한 여관의 공기와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 는 냄새가 되어 주위를 맴돌았다. 미는 시야를 떠다니는 금빛 먼지를 바라보며 노곤하게 말했다.
“미는 조금 전에 행복하다고 말했지. 쳉과 결혼해서, 4년 동안 행복하게 살 거라고. 그게 말이 돼? 하지만 미는 그렇게 살게 돼. 남편의 죽음이 기다 리고 있는 여행을 함께 떠나고, 비참하게 죽어갈 아기를 낳을 거야. 자살해 버릴 여동생에게 아기를 부탁한다고 말하며, 그렇게 죽을 거야. 그리고 미 는 사라져. 마치 있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미의 추억, 미가 걸었고, 미가 웃었던 나날들은 과거에 덮이지. 아무도 모르게 되지.”
미의 눈이 한없이 투명해지는 순간, 투명한 구슬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미의 목소리는 그저 궁금하다는 투였다.
“행복할 수 있을까?”
네리아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