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2

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2


2

“어… 해적이군.”

“그런데.”

“저 깃발은 좀 수선해야겠어. 해골과 뼈다귀가 아니라 밥그릇과 수저처럼 보일 지경이야. 너무 변색되었는데.”

“그렇군. 수선이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드는 편이 낫겠어.”

치터리는 더 참을 수 없었다. 프리스트의 체면 따위 집어던지고 이시도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들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치터리는 말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시도 씨?”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뱃전에 팔꿈치를 괸 채 레드 서펀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해적선을 보고 있던 이시도는 고개를 돌려 치터리를 바라보았 다. 순간 이시도는 안색이 변했다.

“프리스트님? 토할 것 같습니까? 그럼 어서 뱃전으로…………….”

“…………멀미는 안 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멀미가 날 것 같군요.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시도는 치터리의 질문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여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예? 뭐하다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요?”

“바로 그겁니다.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까?”

이시도는 자못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치터리를 바라보았다.

“……그럼 뭘 합니까?”

“그걸 나에게 묻는 겁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 왜 있잖습니까! 그거요!”

치터리는 격한 흥분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옆에 서 있던 육전 대원이 그를 도와주어야 했다.

“이시도 씨. 경계 태세를 명령하고 선장님께 보고하고 무기고를 개방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왜요?”

“해적이 오고 있잖습니까.”

“아하! 저 친구들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육전 대원은 잠시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시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육전 대원은 있지도 않은 쥐를 잡으라는 부탁으로 그들을 바보로 만들었 던(이시도의 얄팍한 계략은 이미 탄로 났지만 신차이 선장이 일등 항해사를 바다에 집어던지겠다는 둥 불호령을 내리는 것을 보고 육전 대원들과 치터리는 화도 내지 못한 채 신차이 선장을 말려야 했다. 물론 신차이 선장이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것은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적할 수야 없는 노릇이잖은가?) 이 일등 항해사 가 또 자신을 바보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지 더럭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육전 대원은 최대한 상식적으로 말하자고 마음먹었다.

“예. 해적을 경계해야 되지 않습니까?”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 상어가 아무리 사나워도 낙타가 상어를 겁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

이시도는 빙긋 웃으며 어떻게 설명해 주나 고민했다. 자유 무역선이라는 것은 어차피 경우에 따라선 해적선이나 다름없다. 바다는 무법천지다. 그러 나 이것은 육지에서 말하는 무법과는 다르다. 이 망망하고 거친 대양 위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이 법에 대해 떠들고 예절을 논한다는 것은 웃긴다는 의 미에서 그렇다. 어쨌든 이시도로서는 저기 다가오는 해적들도 유사 직업 종사자인 것이다. 아니, 직업이니 뭐니 하는 세속적인 것을 벗어난 상태에서 저 해적과 이시도는 같은 바다 사내들인 것이다. 어떠한 선원들이라도, 혹여 해적들을 경계는 할지 몰라도 경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시도는 자유 무역선의 일등 항해사인 만큼 해적들을 경계하지도 않는다.

“해적들은 겁쟁이입니다. 저 친구들이 온종일 수평선 길이만 재어보다가 모두 돌아버리지 않았다면 우리 배 같은 자유 무역선을 노릴 까닭이 없습 니다. 이런 배를 덮쳐봐야 싸움만 죽도록 하고 얻는 것은 별로 없을걸요. 선원들도 별로 없고 무장도 부실한 화물선이나 여객선을 노리는 것이 훨씬 낫지요. 낙타가 상어를 겁낼 필요는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죠.”

치터리는 조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기분만 느꼈다는 말이다.

“흐음…………, 저 해적들이 도박을 걸 필요는 없다는 말인가요.”

“도박을 걸 배짱이 없다는 것이 정확하겠죠. 어쨌든 해적이니까요.”

“해적들이 겁쟁이라고요?”

이시도는 입가를 살짝 비틀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 얼굴을 보던 치터리는 감탄하고 말았다. 이 친구, 대책이 안 서는 장난꾸러기인 줄 알았더니 선장을 닮은 부분이 있군. 좋은 선장은 선원들마저도 매력적으로 바꾸는 존재인가?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요?”

자유의 프리스트는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자유와 정진의 의미도 헷갈려 하는 우리 교단의 멍청이 수련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로군요.”

“하하! 은퇴한 뒤에 찾아가면 받아들여주시겠습니까? 이 죄에 물든 뱃놈을?”

이제 안심하게 된 치터리는 농담을 해볼 여유까지 되찾았다.

“자유의 의미는 이미 이해하시고 있으신 만큼…………, 저는 이시도 씨에게 수련사의 종규만을 가르치지요. 새벽 기상, 묵상, 경전 봉독…………. 아, 금주와 절식은 기본입니다.”

“어이쿠! 포기하겠습니다.”

이시도의 밝은 태도에 전염된 치터리는 이제 마음을 놓은 상태에서 다가오는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육전 대원들은 아직 의심을 풀지 않았다. 전사인 그들에게 있어서 의심을 품어보는 것은 오히려 덕망에 속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저 해적선이 이 배를 목표로 저렇게 곧장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격 의사가 없다면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텐데.”

이시도는 킥 소리를 내며 웃고는 말했다.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예?”

“이런 망망대해에서는, 비록 원수라고 해도 서로 배를 나란히 하고 한 번쯤 얼굴을 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감옥보다 더한 배 위의 생활에 서 그건 당연한 욕구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구실로 다가와서는 기습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게다가 해적 깃발도 내걸고 있군요. 저것은 군기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군사 예절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는 제가 보기엔 저 깃발은 공격 의사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죠? 사실 그렇습니다. 저것은 수틀리면 공격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안심하고 있던 치터리였기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치터리는 두 눈에 불신과 의혹을 가득 담은 채 이시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시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해적들은 겁쟁이라고. 저건 위세를 떨어보는 겁니다. 공격할 거라는 듯이 기세등등하게 설치고 있지만 그건 기세뿐입니다. 정 말 공격할 거라면 깃발은 올리지도 않아요. 우리 배 같은 자유 무역선을 공격하겠다면 굳이 경계 태세를 갖추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칼이라도 뽑아들고 경계를 갖추면 저 친구들은 깃발을 내리고 줄행랑을 칠 겁니다.”

“자신감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사실이 그런 걸요. 음. 한 가지 물어봅시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죽이겠다고 설쳐대는 싸움꾼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아무 말도 없이 무표정하 게 다가오는 싸움꾼이 무섭습니까?”

“후자지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치터리는 이해했지만 육전 대원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시도를 상대로 해서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한 육전 대원들은 더 큰 권위 에 의지해 보기로 결심했다.

“일등 항해사께서 선원들에게 경계 태세를 내릴 생각이 없다면, 선장에게 보고는 해주십시오. 선장님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잖습니 까.”

“뭐, 그러지요.”

“그럴 필요 없네. 벌써 보고 있으니까.”

뒷갑판의 함교에서 신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선원들의 눈에 함교에 우뚝 선 채 다가오고 있는 해적선을 쏘아보는 선장의 모습이 비 쳤다. 신차이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론리 시걸……………. 바바라로군.”

이시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다가오고 있는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저게 론리 시걸 호인가? 잠시 후에야 이시도는 그 배의 특징적인 선수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레드 서펀트가 그 이름에 어울리도록 서펀트를 선수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론리 시걸의 선수상은 날개를 펼친 갈매기 였다.

이시도는 다시 그의 선장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선장님?”

이시도는 무슨 대답이 나올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육전 대원들에게 선장의 명령을 들려주고 싶었다. 신차이는 이시도가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을 했다.

“선원들을 정렬시키고 방문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치터리는 당황했다. 예의를 아는 그인지라 선원들이 보는 앞이라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신차이 선장을 향하는 그의 질문은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장님? 방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지만 신차이는 이 질문마저도 무례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약간의 노기가 어린 눈빛으로 치터리를 바라보았고 갑판 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 시선을 잘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요. 육지에서 만난 여행자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오. 하물며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이 바다에서는 그것이 더욱 필요한 게 당연하지 않겠소.”

“하지만 해적이잖습니까?”

신차이 선장의 표정은 다시 바뀌었지만, 이번 표정도 상당히 계획적인 표정이었다. 육전 대원은 신차이 선장이 마치 잔뜩 주눅 들어 있는 신병을 바 라보는 고참병 같은 눈빛으로 닐림의 프리스트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겁낼 것 없습니다, 프리스트 치터리. 나는 당신보다는 훨씬 해적들을 많이 상대해 봤습니다. 특별히 조언을 주시지는 않아도 되겠군요.” 치터리는 당혹에 빠졌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신차이 선장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졌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 한 사이에 선원들은 이제 첫 항해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성직자에게 보낼 만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동정마저 어린 시선이었다.

치터리는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친절한 이야기들과 정중한 대우는 이제 끝난 것인가?

사실 치터리 무스의 항의는 온당한 것이었다. 비록 저쪽에서 방문을 위해 저렇게 달려오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적선에 대해서 꼭 예법을 갖 춰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차이는 일부러 ‘방문’이라는 말을 꺼냈고 치터리는 그 미끼를 꼴깍 삼켰다. 신차이 선장의 교묘한 화법에 말려들어 무례 한 겁쟁이가 된 치터리는 이제 이 배에 대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기 극히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다. 선주인 이골 비겐트의 동의서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 다. 선원들은 서류 조각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누가 주도권을 쥔 자인지를 파악했을 테니까.

어쨌든 이시도는 벌써 선장의 명령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더 날뛰어 봐야 바보 취급밖에 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치터리는 한 걸음 물러 나기로 결심했다. 이시도는 선원들을 뱃전에 정렬시키고 보트와 노잡이들을 준비시켰다.

다가오는 해적선 론리 시걸의 선상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육전 대원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론리 시걸의 뱃전에서는 해 적들임에 분명한, 그렇지만 보통 선원들과 별반 다르지도 않은 모습의 선원들이 꾸물거리면서 줄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육전 대원들의 눈이 아니라 문외한의 눈으로 보더라도 레드 서펀트 호 선원들과 론리 시걸 선원들의 수준 차이는 자명할 것이다. 레드 서펀트의 선 원들에게는 갑판장의 명령 한번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거의 눈 깜빡할 사이에 뱃전에 정렬하여 다가오는 해적선에 경의를 표할 준비를 마쳤다. 반면 해적선의 선상에서는 갑판장으로 짐작되는 사내가 부지런히 선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정렬시키는 데 땀을 빼고 있었다. 하지만 저 해적들은 꾸물거리고 고개 돌려 옆의 선원과 잡담을 나누거나 자꾸만 움직였기 때문에 줄이 계속해서 흐트러졌다.

어느새 배는 가까워졌다. 조타수들은 각자의 솜씨를 겨뤄보려는 듯이 절묘한 각도로 배를 몰아갔고 적절한 순간에 돛은 모두 거둬들여졌다. 이제 레 드 서펀트와 론리 시걸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 채, 그러나 뱃전을 나란히 하고 정지했다.

배가 정지되자 양쪽의 선원들은 환호로써 서로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저쪽 해적선에서 해적들을 정렬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던 사내가 뱃전으로 몸을 내밀며 고함질렀다.

“레드 서펀트 호! 레드 서펀트 호! 우리 선장님이 그쪽으로 건너가실 거요!”

“선장님 좋아하시네, 해적 두목이지.”

이시도는 조그맣게 투덜거린 다음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트를 향해 걸어갔다. 이시도가 투덜거린 이유는 저쪽에서 선장이 건너오는 만큼 이쪽에서는 일등 항해사가 건너가야 되기 때문이다. 예의인 동시에 인질 비슷한 의미를 가지지만, 저쪽에서는 선장이 직접 건너오는 것이니까 실제 인질이 될 걱 정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해적들 소굴로 걸어들어 가야 한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다.

어쨌든 자기 배뿐만 아니라 다른 배의 선원까지도 바라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방문인 만큼, 이시도는 잘 처리하고 싶었다. 목검을 갑판장에게 건넨 이시도는 한껏 위엄 있게 외쳤다.

“보트를 내려라!”

활차가 움직이고 밧줄이 미끄러지며 보트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이시도는 보트에 뛰어오른 다음, 선원들이 보트를 착수시키는 동안 보트 한가운데 우뚝 선 채 위엄 있는 자세로 양쪽 배 선원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해 냈다. 그런 불쌍한 위치에 있는 이시도에게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다면 저쪽 해적선의 보트는 요란하게 물보라를 올리며 착수했다는 것이다. 론리 시걸의 해적들은 얼굴을 붉혔고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 사이에서는 비웃음이 담 긴 킬킬거림이 흘러나왔다. 이시도는 으쓱한 기분으로 저쪽 보트에 타고 있는 론리 시걸의 선장 바바라를 바라보았다.

힘센 노잡이들(양쪽 모두 고르고 고른 선원들이니만큼)이 젓는 보트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보통으로 말하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 접어들자 이 시도는 바바라 선장에게 말을 걸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엄숙한 방문 행사 도중에 잡담을 하는 것은 예의바른 짓은 못 되지만, 이 시도는 자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시도는 경의를 담아 말했다.

“여어, 바바라 선장. 더 예뻐졌군요.”

이시도의 보트 쪽에서 폭발적인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바바라는 이를 악물면서 대답했다.

“이시도, 너 죽을래?”

바바라 선장은 턱수염이 뻣뻣하게 곤두설 지경으로 노기충천했다. 극지의 백곰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크고 뚱뚱한 그 몸 전체가 벌겋게 변했 다.

여자 이름을 가진 해적은 자이펀 선단 전체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일등 항해사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시도는 틈을 주지 않았다. 

“충심을 담아서 조언을 보내죠. 우리 배에는 외로운 사내들이 많으니 주의하시길.”

“오냐, 고맙다. 내 배에 올라서도 네 녀석의 혀가 그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일지 두고 보지.”

그 동안 신차이 선장은 메인마스트 아래 비스듬히 기대어 방문이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을 본 신차이는 가볍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이리 오시오. 저쪽 선장에게 소개해 드릴 테니까.”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은 불편한 마음으로 신차이 선장 옆으로 다가가 섰다. 그때 바바라 선장의 보트가 레드 서펀트의 동체 옆에 다가붙었고, 바바 라 선장은 해묵은 뱃사람답게 빠른 손놀림으로 배에 올라왔다.

레드 서펀트 호 선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바바라 선장은 신차이에게 걸어왔다. 그러나 도중에 프리스트와 육전 대원들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하고 말았다. 하지만 신차이는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중한 동작으로 손을 내밀어 바바라 선장과 포옹하고 나서 말했다.

“오래간만이오. 다음에 볼 때는 교수대에서일 줄 알았는데.”

바바라 선장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당신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나 역시 바다에서만큼은 상당한 행운아니까.”

“소개하겠소. 닐림의 프리스트이신 치터리 무스 씨요. 그리고 이분들은 자이펀 육전대의 전사분들이오.”

바바라 선장은 조금 주춤했다. 아무리 사나운 해적이라도 그 역시 바닷사람이었고, 그래서 육지의 사람들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미신적이기도 했다. 미신을 별로 믿지 않는 신차이 같은 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인 것이다.

“어, 저, 프리스트님. 안녕하십니까. 에, 저는 바바라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게 축복을 내리거나 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손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만………….”

치터리는 덩치 큰 백곰 같은 바바라 선장이 당황해하는 모습에 재미있게 보았다.

“왜지요, 바바라 선장님?”

“저, 그러니까, 에, 그런 게 있습니다.”

“불편하시다면, 예, 그러지요.”

바바라는 분명히 밝아진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육전 대원들에게 시선을 옮긴 순간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상당히 불편한 표정으로 신차이 선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레드 서펀트에 육전 대원이 타고 있는 거요?”

“내 배에 설령 수영 미숙으로 익사하고 있는 악마를 태운다 한들 그건 내 자유요. 당신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바바라 선장.”

악마라는 말에 바바라 선장은 기겁했다. 배를 책임지는 선장으로서 어찌 그런 흉흉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느냐는 듯한 비난어린 표정을 지은 바바 라 선장은 황급히 손을 움직여 액을 쫓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런 사교(邪敎적인 모습을 본 치터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짧게 기도성 을 발했다. 육전 대원들과 신차이는 모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들을 감상했다.

“그런데 이 해역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소, 바바라 선장? 어선이라도 노리는 거요?”

바바라 선장은 아직도 불쾌함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 이 근처는 아직 어란기가 아니라서 어선들은 오지 않아요. 게다가 항로 전체에 흉흉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서 배는 구경도 못할 지경이오. 이맘때면 이틀에 한 번꼴로 배가 보여야 되는데, 요즘은 열흘에 한 척 보기도 어렵군.”

신차이와 치터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바바라 선장은 해적선의 선장으로 뽑힌 만큼 녹록지 않은 인물이었다.

“자유 무역선인 레드 서펀트가 이런 해묵은 항로를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지. 그렇잖소, 신차이 선장? 당신, 무슨 밀명이라도 받고 조사차 온 거지? 에? 그러고 보니 육전 대원들이 이 배에 타고 있는 것도…………….”

“마음대로 상상하시오. 하지만 입은 너무 자주 여닫지 마시오. 선장의 입은 술창고의 문과 같아서 너무 자주 여닫으면 배가 침몰하는 법이오.”

“아, 뭐. 좋소. 하지만 당신이 조사차 나온 거라면 내겐 건네줄 좋은 정보가 있는걸.”

어라? 이 자는 거래를 원하고 있군. 사태를 간파한 치터리는 고개를 돌려 신차이 선장을 보았다. 신차이는 묵묵히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다가 말했 다.

“무엇을 원하시오, 선장?”

바바라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그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아, 그러니까 말이오, 신차이 선장. 나 요즘 미칠 지경이오!”

이 폭발적인 끝맺음으로 신차이 선장은 사태를 파악했다.

뭔가 비밀스러운 교섭과 위험한 거래를 기대하고 있던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의 어깨에선 힘이 쫙 빠졌다. 하지만 바바라 선장은 신차이를 껴안기라 도 할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래! 도대체 배들이 오가지를 않으니 담배를 구할 수가 없소. 출항할 때 실은 담배는 벌써 두 주 전에 떨어졌소. 두 주! 그 두 주가 어떠했 는지는 오로지 그림 오세니아께서만 아실 거요. 정말 끔찍했소.”

신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조금 돌렸다. 그러자 잠시 후 주승강구에서 노예 소년이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바바라 선장은 체통 도 잃고는 간절한 시선으로 노예의 손에 들린 상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신차이 선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러자 노예 역시 꼼 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에 상자를 받쳐 든 채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바라 선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신차이를 바라보자 신차이는 나직하게 말 했다.

“말해 보시오.”

“흐으음…………. 한 대씩 피우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소?”

“나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소, 바바라 선장. 게다가 꾸물거리는 당신을 보다 보면 당신 이야기에 별다른 가치가 없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게 될지도 모 르오. 나는 당신처럼 불법적인 조달 방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기호품은 더 소중히 할 필요가 있지. 당신 이야기가 별 가치가 없다면…….”

“가치가 있을 거요. 분명히!”

“말해 보시오.”

바바라 선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노예 소년의 손에 들린 상자를 흘긋 바라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흐음. 내가 당신이라면 조사는 여기서 집어치우고 돌아갈 거요. 아무리 이제리스 해협의 서펀트를 사냥해 버린 당신이라도 이번 상대는 감당할 수 가 없어.”

“무슨 말인지?”

“어디 보자…………, 그러니까 나흘 전의 일이오. 석양 무렵이었는데, 마스트에서 감시하고 있던 녀석이 바다에 떠 있는 시체 하나를 발견했지 뭐요. 선 원들은 시체는 재수없을 뿐 아니라 혹시 역병에 걸려 바다에 던져진 시체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제대로 수장한 시체가 떠오를 리는 없지 않소? 따 라서 나는 그건 제대로 수장되지 않은 시체일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난파선에서 흘러나온 것일 거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그 시체를 끌어올리 라고 명령했소. 그런데 보트를 저어 시체에 다가가 본 녀석들은 기겁하고 말았소. 아무리 봐도 시체라고 생각되던 그 작자가 살아 있었던 거요!”

바바라 선장의 화법은 극적이었고 듣는 이를 감질나게 만들었다.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은 침을 삼켜가며 바바라 선장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내가 시체라고 말했지? 그건 당연한 거였소. 살아 있는 자가 그렇게 물 위에 드러누운 자세로 떠다닐 수야 없지 않겠소. 그런데 그 똑똑한 친구는 속이 빈 상자 위에 드러누워 있었던 거요. 속이 빈 나무 상자가 그 친구의 구명정 노릇을 한 거지. 그리고 혹시 잠들어도 빠지지 않도록 밧줄로 자기 몸을 상자에 묶어두었던 것이고, 빗물을 받아 마시려면 그렇게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겠지. 어쨌든 그 친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선원들은 잽싸게 그를 배 위로 끌어올렸소. 그런 임기응변을 시도한 것이나,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급 선원이 분명했소.”

신차이는 바바라 선장이 프리스트와 육전 대원들이 있는 자리라서 말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해적이 그를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은 까닭은, 그 조난자가 고급 선원이므로 몸값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끌어올려 놓고 보니 이건 완전한 시체 꼴이더라고. 도대체 표류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에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 았소. 팔다리를 움직일 힘도 없어서 입을 벌리게 하고 물을 조금씩 흘려넣어 주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는 물도 못 마실 지경이었소. 그 지경이 될 때까 지 바닷물을 마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정신력이 대단한 자였지. 아마도 나약해져서 바닷물을 마시게 될까 봐 일부러 그런 자세로 자신의 몸을 묶었는 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자는 빗물만 마시며 그렇게 견뎌온 것이었소.”

신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군…. 죽은 거요?”

“그래요. 끌어올려진 바로 그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그 친구를 도로 바다에 돌려보내야 했소. 결국 그 친구는 배 위에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해 그렇 게 버틴 것인지도 모르겠군. 선원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내내 그자의 주위를 지키게 했지만 그자는 끝내 정신을 찾지 못했소. 그런데 말이오. 회광 반 조(回 그는 임종 직전에 세 마디의 말을 남겼소. 나는 그 자리에 있었기에 모두 들을 수 있었지랄까?”

“무슨 말이오?”

“복수, 영원히………….”

바바라는 마지막 단어를 말하기에 앞서 그 커다란 어깨를 움츠리며 신차이를 바라보았지만 신차이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바바라를 마주보고 있었다. 오히려 못 참게 된 것은 치터리였다.

“그래, 마지막 말은 뭐요? 응?”

바바라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이 해적 선장에게서는 광대의 소질이 엿보였다.

“블루 드래곤.”


“블루 드래곤이라고?”

이시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론리 시걸의 갑판장인 젊은 사내는 자신을 보타라고 소개해서 이시도를 웃겼다(바바라에 보 타라니, 이 외로운 갈매기들은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여자 이름을 짓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나?). 하지만 보타 갑판장이 말한 내용은 아무리 이시도라도 웃어버릴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요.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죠. ‘복수’, ‘영원히’, ‘블루 드래곤’입니다. 우리 선장 나리는 그 녀석의 배가 블루 드래곤에 의해 공격당했고, 그래서 복수하겠다고 떠들어댄 거라고 생각하더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시도 씨?”

“글쎄. 그거 말은 되는 것 같군, 형제. 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말이 안 되기도 하는걸. 보쇼, 보타 씨. 블루 드래곤은 해양성 드래곤이 아니잖소?” 보타는 감탄한 표정으로 이시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해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타는 조금 주눅 든 어 조로 말했다.

“그렇…….죠?”

“응? 아, 그렇소. 형제. 블루 드래곤은 육상형 드래곤이오. 어느 정신 나간 블루 드래곤이 이런 봄철에 피서를 나온 것이 아니라면 블루 드래곤이 갈 매기 틈을 날고 있는 꼴은 상상하지 못하겠는데.”

“예. 나도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놀고 있네. 머저리 해적 녀석. 이시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은 다음 계속 말했다.

“어디 보자. 대륙에 활동 중인 블루 드래곤은…………, 지금은 지골레이드뿐일 텐데. 지골레이드의 아내는 웜링을 낳고 나서 수면기에 들어갔으니 아직 안 일어났을 테고, 지골레이드의 웜링은……………, 설마 웜링이 배를 박살낼 수야 없을 테고. 흐음.”

“그, 어, 그럼 그건 지골레이드일까요?”

“난들 알겠소. 그 블루 드래곤이라는 말이 진짜 드래곤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말입니까?”

이시도는 이 친구를 겁줘 볼까 생각했다.

“있을 수 없는 말이지만 말이오, 보타 씨. 만약 우리 배가 당신 배를 공격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배는 침몰하고 당신만이 살아남았다고.”

보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험악한 표정이 된 다른 해적들과는 달리 갑판장인 보타는 이시도의 말을 이해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내가 유일한 생존자라면 레드 서펀트에 공격당했다고 말하며 죽을 거라는 말이군요?”

“그렇지. 그럼 당신 말을 들은 사람들은 진짜 서펀트가 당신 배를 침몰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하지만 블루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배는 없어요. 자이펀뿐만 아니라 일스, 헤게모니아에도 그런 선명은 없는데.”

“어, 새로 진수한 함선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이름은 잘 쓰이질 않는데, 보시오

이시도 씨. 당신이 선주라면 배에 ‘위대한 드워프 호’, 이런 이름을 붙이겠소?”

이시도는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이 친구, 어쩌면 나와 비슷한 종류인가 본데?

“하, 하긴 그렇소. 킬킬킬! 내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선 엘프 도벌꾼 다음으로 웃기는 이야기로군.”

이번엔 보타가 낄낄거렸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각난 건데……

보타는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선장이 아닌 일등 항해사들은 격식에 구애되지 않았기에 론리 시걸의 선상에서는 자유롭고 방약무인한 이야 기들이 오갔다.


방문은 끝났고, 이시도와 바바라 선장은 각자의 배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바라 선장은 그 새를 못 참아서 입에 파이프를 물고는 신차이 선장이 선물 한 담배를 맛있게 뻐끔거리고 있었다. 행복감에 젖어 있는 바바라의 얼굴은, 자신의 배에 올라가서 자신의 선원들과 낄낄거리다가 이제는 그 해적들 에게 전송까지 받으며 떠나오고 있는 이시도의 모습을 보고는 팍 일그러졌다. 이시도는 론리 시걸의 선상을 향해 손을 휘저어 주며 친해진 해적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이시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바바라 선장의 시선을 알아 차렸다. 보트는 어느새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여어, 바바라 선장님. 회견은 즐거우셨습니까?”

“끔찍하게 즐거웠다. 넌 어땠냐?”

“아, 예. 재미있게 잘 보냈습니다.”

바바라 선장은 잠시 이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런데, 자넨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인가? 짧고 굵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나?”

“하하, 저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습니다.”

“알았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날 찾아오게.”

바바라 선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시도와 엇갈려 지나갔다. 이시도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바바라 선장의 보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해적이 되라고? 웃기는군. 이시도는 바바라 선장의 제안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니, 관심을 두기는 했다. 이시도는 그 자신도 론리 시걸에 타면 여 자 이름을 가져야 되는가 하는 망상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낄낄거리며 올라왔기 때문에, 이시도는 신차이 선장과 치터리 무스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보고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 무슨 상상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해적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선장님!”

“응? 무슨 말인가?”

“예? 어…….”

신차이는 잠시 의아쩍은 표정으로 이시도를 보다가 말했다.

“자네도 저기서 들었는가? 블루 드래곤의 이야기.”

“아, 하하. 그겁니까?”

이시도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만지작거렸다. 내 상상력은 너무 과속인 게 흠이야.

“예. 대충 들었습니다. 바바라 선장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그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였습니까?”

“그래. 프리스트 치터리?”

블루 드래곤이라는 이야기에 넋이 나가 있던 치터리는 신차이 선장이 재촉했을 때야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예?”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합시다. 이시도 군. 뒷정리를 부탁하네.”

“아, 예.”

신차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주승강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고, 이시도는 갑판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

선장실에 들어선 신차이는 말이 없었다. 그는 바닥에 적당히 앉은 다음 파이프를 꺼내어 천천히 담배를 채워넣었다. 조바심을 참지 못한 치터리가 먼저 이야기를 걸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장님?”

“사실일 겁니다. 바바라는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 사람은 아니니까요.”

“예? 아, 물론 사실이겠지요. 제 질문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정말 동북 항로에 블루 드래곤이 배회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실은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예?”

신차이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동안 치터리는 손톱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으며 기다렸다. 신차이는 담배 연기를 길 게 내뿜고 나서 치터리가 아닌 육전 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활동 중인 블루 드래곤은 지골레이드뿐이겠지요. 그는 전선에 있습니까?”

“아니오. 작년에 사라졌습니다.”

“더 정확한 정보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육전 대원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사람으로 치면 퇴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골레이드에게 웜링이 있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압니다.”

“지골레이드는 그 웜링의 양육 문제가 있어서 자신의 라자에게 전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요청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지골레이드의 라자였던 돌맨 할 슈타일은 그것을 허락했고요.”

“그렇습니까. 이상하군요. 웜링이 있는 드래곤이라면 거동을 삼가하고 양육에만 신경 쓸 것 같은데. 지골레이드는 육상형 드래곤인 만큼 해안가에 자신의 영토를 만들거나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때 치터리가 입을 열었다.

“그 웜링은……, 죽었습니다.”

신차이는 눈을 빛냈다. 그리고 육전 대원들도 놀란 표정으로 치터리를 바라보았다.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 웜링은 바이서스 수뇌부의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 같습니다. 지골레이드가 전선에서 물러난 것은 웜링 때문이었으 니까, 그 웜링이 없다면 지골레이드는 다시 바이서스를 위해 싸워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아무리 바이서스에서 지골레이드의 힘을 필요로 한다 한들 그런 위험한 짓을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군요.”

“저희들도 단정 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그 웜링이 죽은 것은 확실한 것이군요?”

“예.”

신차이는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골레이드는 현재 바이서스를 위해 움직일 수도 있겠군요. 놀라운데요. 해군이 없는 바이서스에서 드래곤을 이용하여 해상 봉쇄를 꾀한 것 인가요.”

“하지만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돌맨 할슈타일과 지골레이드의 계약이 말소된 후, 지골레이드가 다른 드래곤 라자와 계약을 했다는 정보는 없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없는 드래곤이 인간을 위해 움직일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신차이는 치터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참가한 이유는 그것입니까?”

“예?”

“닐림의 종단에서 참가한 이유는 그것입니까? 조금 전 말씀하셨듯이 당신들은 지골레이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럼, 동북 항로의 괴 사건이 지골레이드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했을 수 있겠군요.”

치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숨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예. 닐림의 날개에서는 바로 그런 이유로 저희들의 참가를 원한 것입니다. 여기 육전 대원들께서는 저와는 다른 목적이지만………….”

“장미 꽃밭으로 향하는 길을 답사하는 것이 이분들의 목적이겠지요.”

치터리뿐만 아니라 육전 대원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신차이를 바라보았다. 신차이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잖습니까?”

육전 대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차이는 이해했다. 이들이 군인인 이상 명령권자가 아니라면 그들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 이다. 육전 대원들은 자신의 입장을 지키면서 신차이에게 협조하기 위해 무응답을 택한 것이리라.

“대답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신차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리가 되는군. 육전 대원들은 목적은 일스 침략을 위한 사전 답사, 그리고 닐림의 프리스트의 목적은 동북 항로의 괴변이 지골레이드의 준동인가를 확인하는 것.

이 시점에서 신차이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배를 책임진 선장으로서, 어쩌면 블루 드래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배를 몰아가야 하는가?


신차이는 욕구 불만을 느꼈다. 그는 아직 고민을 끝내지 못했지만 지골레이드는 기다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수평선은 옆으로 길고, 거대한 구름은 거침없이 솟아오른다. 레드 서펀트는 짙푸른 해원에 던져진 작은 점이 되어 희게 반짝인다. 여기에는 안정감 을 해치는 요소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늘어선 밧줄들 사이로 솜씨 좋은 선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마저도 한가롭다. 그러 나 드래곤은 그 등장만으로 모든 안정감을 박살내고 모든 소박한 가치를 붕궤시켜버렸다.

이시도는 목검을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북해의 물개떼들처럼 짖어대고 있었다.

“돛을 모두 펼쳐라! 수심은? 우라질! 무기고 개방! 석궁대는 배 전면으로! 화로 가져와서 불 붙여! 뭐? 이 자식들아, 불화살이다, 불화살! 창잡이, 배 좌현으로! 어서 움직여라, 이 썩을 놈들아! 갑판장, 갑판장! 스크롤 중에서…………, 아니, 그냥 상자 째로 들고 와! 그리고 아무 할 일이 없는 녀석들은, 젠장! 모르겠다. 죽을 땐 장엄하게 죽자. 사나이답게! 거치적거리지 않는 곳에 꿇어앉아서 그림 오세니아께 기도라도 해! 음? 인마, 왜 죽는 소리를 하 는 거야! 누가 죽는다더냐! 돛 안 펼쳐?”

이시도의 상태는 레드 서펀트의 선원들 전체의 상태를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선원들은 모두 서로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상대방의 어깨에 부 딪히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사태를 바라보는 육전 대원은 이들이 어제 해적선 앞에서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선원들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전 대원들 자신조차도 까마득한 하늘 저편에서부터 위압감을 뿜어내는 점으로 나타난 드래곤의 위용을 본 순간에는 하얗게 질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캬아아아악!”

아득히 높은 곳에서 드래곤은 포효했다. 그리고 자신의 포효를 뒤쫓는 듯한 맹렬한 속도로 육박해 들어왔다. 날개를 접고 까마득한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온 블루 드래곤은 수평선을 스칠 듯한 저궤도로 접어들자 재빨리 두 날개를 좌우로 펼쳤다. 튕겨지듯, 쏘아지듯 펼쳐진 날개는 삽시간에 블루 드 래곤의 크기가 너더댓 배 정도로 커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야가 꽉 차는 느낌에 치터리는 헛바람을 삼켰다. 맙소사, 저렇게 멀리 있는 데?

쏘아져 내려온 속력을 모두 레드 서펀트 쪽으로 돌린 블루 드래곤은 수면을 스칠 듯한 비행으로 접근해 들어왔다. 드래곤의 거체 아래 피어오른 물 보라는 그 날개에 부딪히며 아스라이 퍼져 올라 숨 막힐 듯한 햇빛을 반사했다. 블루 드래곤의 등 뒤로 파도가 하얗게 갈라져, 드래곤의 모습은 파도 의 계곡 사이를 쏘아져오는 듯했다. 드래곤의 날갯짓에 공간은 무참하게 무릎을 꿇었다. 사기처럼 느껴지는 쾌속의 비행. 레드 서펀트와 블루 드래곤 의 거리는 숨 가쁘게 좁혀졌다.

“좌로 선회! 드래곤에게 이물을 향하라!”

신차이의 고함 소리. 블루 드래곤이 등장한 이후로 함교 위에 꼿꼿하게 선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차이 최초의 명령이었다. 조타수는 경악에 휩싸 인 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선장의 명령에 호응하듯 스스로 움직여 타륜을 꺾고 있었다.

모든 돛을 펼친 레드 서펀트는 가속력에 의지하여 빠르게 이물을 돌릴 수 있었다. 난폭하고 두서없어 보이는 이시도의 명령이긴 했지만 돛을 모두 펼치게 한 것은 자이펀 선단에 이름을 날리는 뱃사람다운 판단이었다. 보통의 해전에서 돛을 모두 접는 것이 상례임을 볼 때 이시도의 명령은 언뜻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시도는 이 싸움이 전투력의 비교가 아니라 기동성의 싸움이 될 것임을 단숨에 간파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시도조 차도 신차이 선장의 명령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왜 드래곤에게 이물을 향하게 한 것이지? 그러나 거짓말처럼 거대해지고 있는 블루 드래곤의 모 습과, 그리고 그 너머로 어마어마한 높이로 갈라지고 있는 파도를 본 순간 이시도는 신차이 선장의 명령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하지만, 설마?

“캬아아아아악!”

“뭐든 붙잡고 충격에 대비하라!”

블루 드래곤의 포효와 신차이 선장의 명령은 거의 연결되듯이 울려퍼졌다. 모든 선원들과 육전 대원들은 손에 닿는 것을 재빨리 부여잡았다. 그러나 잔뜩 겁에 질려 있던 치터리는 선장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익숙한 행동을 취해 버리고 말았다. 갑판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 다.

“이런 젠장!”

이시도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드래곤은 레드 서펀트의 선체 위를 덮쳤다.

배 위의 사람들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블루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레드 서펀트의 갑판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자 가장 흐린 날의 햇빛보다도 더 줄어든 광량이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드래곤의 뒤를 따라오던 광풍은 레드 서펀트를 크게 진동시키며, 배 위의 사 람들의 옷을 찢어발기고 몸을 부술 듯이 몰아닥쳤다. 돛을 모두 펼쳐두었기에 배는 맞바람을 정면으로 받은 셈이었다. 눈앞을 가리는 암흑과 돌풍 속 에서 치터리는 바람에 휩쓸려 날려갈 뻔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덮쳐든 손이 있었다.

“실례하오이다, 프리스트님!”

이시도였다. 이시도와 치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굴러갔으나 갑판 위를 제 손금처럼 알고 있는 이시도는 재빨리 손을 내뻗었고, 그의 손엔 갑판 해 치의 모서리가 움켜쥐어졌다. 입 안에 금속성 마찰음을 울리며 이시도는 팔에 힘을 주었다.

“이으으윽!”

드래곤의 거체가 햇빛을 가린 시간은 실로 짧았으나 암흑과 돌풍에 시달린 사람들에게는 끔찍하도록 긴 순간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지나간 다음 에 제정신을 차린 선원들이 본 것은 그들을 향해 치달아 오고 있는 거대한 파도였다. 선원들은 침착하게 쥐고 있던 것들을 다시 굳게 부여잡았지만 정면으로 다가드는 파도에 질린 육전 대원들은 기겁하고 말았다. 파도는 그대로 레드 서펀트를 덮칠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그리고 그 순간, 오래 전 레드 서펀트의 설계를 담당했던 함선 설계사가 커다란 자부심을 느껴도 좋은 광경이 펼쳐졌다. 신차이 선장의 명령에 의해 선체 옆으로 파도를 맞는 지경을 면하게 된 레드 서펀트는 이제 그 이물을 한껏 쳐들며 파도를 꿰뚫기, 아니, 그것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레드 서펀트는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는 사슴처럼 파도의 머리를 타고 넘었다. 이물부터 정면으로 파도에 대항한 레드 서펀트는 좌우로 갈라지는 파 도의 한가운데를 무리 없이 타넘었다. 비록 배 위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삽시간에 솟구쳤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구 토감을 느꼈지만 레드 서펀트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상태로 파도의 머리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아래로 떨어지며, 배의 이물은 요란한 물보라 를 튀겨 올렸다. 처어얼썩, 콰르릉! 그리고 그 뒤로는 블루 드래곤의 항적을 따라 흰 포말의 부채꼴이 펼쳐진 수면뿐이었다.

선원들은 차가운 물보라를 뒤집어쓰면서도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배에 대한 긍지가 들끓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차이는 배 뒤쪽 하늘에서 다시 커다란 반원을 그리고 있는 블루 드래곤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은 레드 서펀트를 중심점 으로 하여 넓은 하늘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은 다시 안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치터리는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이시도의 팔을 깨달았다.

“가, 감사합니다. 이시도 씨.”

이시도 역시 드래곤이 지나고 나서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햇살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 앉은 이시도는 잠시 머리를 감싸 쥔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

“이시도 씨?”

치터리는 이 일등 항해사가 어딘가에 머리라도 부딪힌 것이 아닌가 더럭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치터리는 조심스럽게 이시도의 어깨를 짚어보았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이시도는 펄쩍 일어서더니 다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말은 싫어요! 돈이나 먹을 걸로 감사해요! 우와, 죽는 줄 알았네.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석궁 준비하라고 했잖아! 스크롤은 어찌 되었나? 드래곤 진 짜 크지? 이놈들아, 그러니까 쏘면 맞는다! 뱃놈들의 솜씨로도 저건 맞출 수 있어. 우리는 싸우기도 전에 이긴 거나 다름없다, 크핫하하!”

이시도의 뒷모습을 보며 치터리는 혀를 내둘렀다. 이시도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하듯이 말하며 날뛰고 있었다. 그때 신차이 선장이 조용하 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시도 사이록.”

“예? 예! 선장님!”

“선원들을 제자리에 정렬시켜서 경의를 표할 준비를 하라.”

이시도가 대답하기도 전에 육전 대원들 중 하나가 불을 토하듯이 외쳤다.

“신차이 선장!”

그러나 신차이 역시 이 목소리에 대해 끔찍한 시선을 보내왔다. 고함을 지른 육전 대원은 이를 갈며 외쳤다.

“나는 싸우지 않고 항복한 적이 없소! 상대가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나는 당신 명령은 받아들일 수가….”

“닥치시오!”

육전 대원은 그대로 검을 뽑을 듯이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손이 칼자루에 닿기 직전, 육전 대원의 얼굴에 얼핏 의혹이 지나쳤다. 육전 대원 은 그대로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신차이를 올려다보았다. 신차이는 냉엄한 표정으로 육전 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모르시오?”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다. 이 배는 강풍에 휘말리고 파도에 농락당했지만 그것은 블루 드래곤이 한 짓이 아니라 그의 비행의 여파에 휩쓸 린 데 불과하다. 육전 대원은 다시 의혹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신차이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하늘 한편에서 이쪽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하는 블루 드 래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기다리시오. 당신의 용기와 명예 모두 존경받을 만한 것이겠지만, 지금은 그것들이 발휘될 때가 아닌 것 같소. 그것보다는……………, 마음을 여는 일이 필요할 것 같소.”

“예?”

“예의바른 대화를 위해선 마음을 열어야 할 거 아니오.”

신차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블루 드래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육전 대원들은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이시도는 재빨리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자, 선장님 말씀 들었냐? 모두들 뱃전에 정렬해라.”

“잠깐, 이건 설마 식탁을 깔끔하게 차리는 것은 아니겠죠, 이시도 씨?”

선원 중 하나가 불안한 어투로 말했다. 이시도 역시 그런 의혹이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그런 의혹을 표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시도는 열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하나만 물어보지. 똑똑한 선원 100명이 지휘하는 배하고 미치광이 선장 한 명이 지휘하는 배 중에서 어느 배에 타겠어?”

이것이 이시도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이었고, 신차이는 미치광이 선장 어쩌고 하는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물론, 미치광이 선장 한 명이 지휘하는 배에 타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정답을 알고 있는 선원들은 히죽 웃고는 옷차림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무서운 속도로 육박해 들어오는 드래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자긍심을 잃지 않은 얼굴로 하나 둘 뱃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치터리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광경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다 위로 한없이 펼쳐진 흰 구름을 배경으로 푸른 점이 점차 번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새벽하늘보다 더 푸른 블루 드래곤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들 고 있었던 것이다. 펼쳐진 드래곤의 양 날개는 메인마스트의 길이보다 더 길었고 그 비행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자연 재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선원들은 존경하는 선장의 명령을 따르는 선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존심으로 얼굴 전체를 물들인 채 뱃전으로 걸어가서는 꼿꼿 하게 정렬해 섰다.

하나둘씩 걸어간 선원들의 움직임이 이젠 갑판 끝에서 끝까지 전달되었고 선원들은 전원 정렬을 마쳤다. 부드러운 해풍이 그들의 엄격한 이마에 늘 어진 머릿결을 쓰다듬었고, 동여맨 머릿수건들은 가볍게 흩날려도 그들의 굳은 얼굴만은 초연하게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불안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치터리는 자신과 육전 대원들만이 이 만남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의심하고, 주저하며, 저 드래곤 앞에 당당히 벌거벗 은 자신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 선원들은 신차이 선장의 선원들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육전 대원들은 그러지 못 했다.

‘닐림이여!’

치터리는 오열하고 싶어졌다. 신을 섬긴다는 자가 인간인 선장을 섬기는 저 선원들보다도 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그를 극도로 괴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움직여지지 않았고 치터리는 여전히 마스트 근처에 우두커니 멈춰 선 채 다가오는 드래곤을 공포와 회의가 가득한 눈길 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블루 드래곤의 모습이 가장 커진 순간, 그는 사라졌다.

선원들은 당황했고 그중에서도 이시도가 가장 당황했다. 날아와서 당장이라도 레드 서펀트에 부딪힐 것처럼 보이던 블루 드래곤의 거체가 거짓말처 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시도는 먼저 주위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봐, 내 눈이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그의 옆에 서 있던 늙은 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마 제 눈만큼 이상해진 것 같군요, 이시도 씨.”

“사라졌지?”

“예.”

선원들은 충분히 당황했고, 이제 본격적인 소란에 들어갈 채비를 갖췄다. 심지어 그들은 분노까지 느꼈다. 그들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를 모두 뛰어넘어서 이 만남의 자리에 섰거늘 드래곤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바야흐로 선원들이 욕설의 폭포를 쏟아내려고 마음먹은 순간 이었다.

“지골레이드이십니까.”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함교를 바라보았다. 함교 위에는 그들의 선장이 눈에 익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날카로운 표정의 젊은이였다. 별다른 장식이 없지만 고아해 보이는 푸른 로브를 입은 젊은이는, 투박함과 실용성 외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이 선 상의 풍경에 이질적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시도가 보기에 젊은이의 용모나 주위를 감도는 분위기는 왠지 카레한 탑 꼭대기에 서서 ‘안녕하 세요, 이시도 씨.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명령으로 사이록의 수평선의 완성을 도와드리기 위해 왔는데요.’라고 말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시도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렇구나, 신의 사자였어. 그러나 잠시 후 이시도는 당황 속에서 젊은 이의 끄덕임이 신차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골레이드라고?”

이시도는 온몸이 차가워지는 전율을 너무 늦게 느꼈다. 그가 입을 쩍 벌린 채 바라보는 가운데 신차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배의 선장 신차이 발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장으로서, 허가 없이 승선한 것에 대해서 질책하고 싶어지는군요.”

지골레이드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선장이라고?”

“그렇습니다만?”

“네가 선장이라면, 배의 안위를 보살피는 방향으로 혀를 놀리는 것이 옳을 텐데.”

신차이는 잠시 지골레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골레이드의 형형한 눈빛은 한 치의 일그러짐도 없었고, 신차이는 그 속에 아무런 분노도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번득이는 것은 블루 드래곤의 순수한 난폭함, 그것뿐이었다.

“승선을 환영합니다.”

“고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