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3
3
“소란스럽기 짝이 없군.”
주블킨은 얼굴을 찡그리며 창 밖을 쏘아보았다. 그 옆에 서 있던 아낙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블킨을 바라보다가는 덩달아 노한 얼굴이 되어 밖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예의도 모르는 작자들이에요! 의사의 집 앞을 지날 때는 좀 조용히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원참!”
여인의 말은 옳았지만 동시에 옳지 않기도 하다. 그 ‘예의도 모르는 작자들’이라는 것이 너무 어마어마한 인파인지라 어쩔 수 없이 소음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블킨은 킬킬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 의사의 멱살을 붙잡고 수면제를 만들게 하는 녀석도 있는걸. 주블킨은 갑자기 떠오른 쓴 기억을 잊으려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무릎 앞에 앉아 있는 사내아이를 바라보았다. 사내아이는 초주검이 된 얼굴로 주블킨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굳게 다물린 입은 주블킨의 손길을 완강하게 거부하 고 있었다.
주블킨은 팔짱을 탁 낀 다음 말했다.
“요 녀석아, 나도 빨리 문 닫고 신스라이프 저택에 가서 구경해야 될 거 아냐. 네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한데.”
그러나 사내아이의 얼굴에는 결연한 각오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절대로 당신의 그 섬뜩한 도구들을 내 입에 집 어넣지는 못할걸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낙네는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이 녀석아! 의사 선생님 힘들게 하지 말고 어서 주둥아리 열지 못해?”
그러나 아무래도 사내아이는 어머님의 말씀에 순순히 따라 입 속의 충치를 주블킨의 손길에 맡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꾸만 문 쪽을 곁눈질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어머니의 감시망이 조금이라도 허술해지면 그대로 도망칠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밖에는 신스라이프 저택으로 찾 아가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만큼 이 꼬마가 빠져나가면 절대로 붙잡지는 못할 것이다.
주블킨은 잠시 미간을 문지르다가 포기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좋아, 이래서야 어쩔 수 없지. 관두자, 관둬.”
“예?”
여인은 깜짝 놀랐고 사내아이는 펄쩍 뛰어오를 듯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사내아이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예! 의사 선생님. 안녕히 계세…………”
콱! 주블킨은 어느새 왼손으로 사내아이의 볼을 꽉 움켜쥐었다. 사내아이는 경악으로 거대해진 눈을 데룩데룩 굴려대었지만 주블킨은 순간의 시간 도 낭비하지 않았다. 사내아이가 뭐라고 반항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더 크게 벌린 순간(어거거, 셔새니이…………!”), 주블킨은 오른손을 재빨리 그 입 안 에 집어넣었다가 뺐다.
빠져나온 주블킨의 오른손에는 사내아이의 침으로 번들거리는 썩은 이가 들려 있었다. 주블킨은 피식 웃으며 사내아이의 볼을 놓아줌과 동시에 오 른손에 든 이빨은 옆에 있던 그릇에 던져 넣었다. 땡그랑. 조금 전까지도 사내아이의 입 속에서 썩어들어 가고 있던 이빨은 맑은 소리를 울리며 그릇 속을 굴렀다.
여인과 사내아이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블킨은 그런 모자를 보며 킥 웃고는, 거드름 피우는 동작 으로 옆에 놓아두었던 수건을 들어 손을 닦으면서 말했다.
“아프냐?”
사내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조금 전까지 욱신거리는 아픔으로 사내아이를 괴롭히던 이빨이 있던 곳에는 부드러운 잇몸만이 만져졌다. 사내아이는 손을 입 속에 넣은 채 불분명한 말투로 말했다.
“어…………, 하야도 아 아프데………….”
“손은 빼고 말해라. 버릇없어 보이잖아.”
“어, 예. 하나도 안 아픈데…………….”
사내아이뿐만 아니라 그 어머니조차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아이의 머리를 붙잡으며 물었다.
“안 아파?”
“응.”
“입 벌려 봐. 어디……………, 세상에! 쑥 빠졌네? 신통해라.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빨리 뽑을 수 있죠? 집게도 쓰지 않고 맨손으로…………….”
주블킨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러니까 의사지. 됐어. 애 데리고 가보게. 내일까지는 찬 것이나 너무 자극적인 것은 먹지 말고.”
“아, 치료비는…..”
주블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어. 간단히 뽑았는걸, 뭐.”
여인은 놀란 얼굴로 주블킨을 바라보았지만 주블킨은 벌써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그릇과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인은 주블킨의 뒤통수를 향해 허리를 조아리며 크게 감사하고는 사내아이를 데리고 갔다.
모자가 떠나기 위해 문을 연 순간 거리의 소음이 갑자기 더 커졌지만 문이 닫히자 다시 아스라한 소음만이 주블킨의 의원을 감돌았다.
주블킨은 도구들을 정리하고 방을 치우고는 잠시 기지개를 켰다. 창 밖을 바라본 주블킨은 요란한 소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바깥과는 달리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어둑어둑한 의원의 모습에서 왠지 괴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제 가볼까.’
주블킨은 창문을 단속하고 주위를 대충 치웠다. 청소를 끝낸 주블킨은 약병들이 가득한 벽장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벽장 문을 여는 대신 벽장 의 모서리를 붙잡고는 옆으로 밀었다.
드르륵. 벽장은 바닥과 벽에 교묘하게 장치된 레일을 따라 옆으로 움직여서 그 뒤의 벽을 드러냈다. 벽은 안으로 조금 들어가 있었고 안으로 들어간 벽면으로부터 못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못에는 몇 가지 도구가 걸려 있었다.
주블킨은 먼저 가장 높은 곳의 못으로부터 커다란 쇠붙이를 집어들었다. 쇠붙이는 둥그런 바퀴 모양이었고, 그 안에는 서로 뒤엉켜 있는 아홉 마리 의 고양이가 세밀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크기는 주블킨의 손바닥 정도. 주블킨은 잠시 그 표면을 쓰다듬어 보고는 그것을 그대로 주머 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주블킨은 그 옆의 못에 걸려 있는 길고 투박해 뵈는 로드를 집어들었다. 다리가 불편한 노인네들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4큐빗은 넘을 것 같은 길이에 수액을 여러 번 입혀서 강화시킨 것이 분명한 어두운 빛깔이 감돌고 있었다. 분명히 무기로 취급될 만한 묵직한 것이었지만, 주블킨 은 그것을 가볍게 들어올려 옆의 벽에 세워두었다.
그러고 나서 주블킨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던졌다. 얇은 속옷만을 걸친 주블킨은 벽 뒤의 비밀 공간으로부터 세 번째 물건을 꺼냈다. 차르르륵. 쇠 고리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은 쇳소리가 울려퍼졌다. 주블킨은 집어든 체인 메일의 무게에 잠시 당혹했다.
‘이거, 의외로 묵직하군. 이렇게 무거웠나?’
주블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블킨은 침대에 들 때마다 잠옷 대신 이 체인 메일을 걸치고 잠들었다. 잠자는 동안 운동이 되도 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게으름에 굴복해 버린 주블킨은 그것을 이 비밀 공간에 걸어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게으름을 부린 것이 잘못이었어. 어쩔 수 없군……. 몸놀림이 많이 이상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주블킨은 낑낑거리며 체인 메일을 걸친 다음 벗어두었던 셔츠를 그 위에 겹쳐 입었다. 셔츠를 입고 허리끈도 다시 조여 맨 주블킨은 가슴을 쓸어 만 지며 셔츠 아래로 만져지는 쇠고리들의 감각을 느껴보았다. 거울이라도 있다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겠지만, 주블킨에게는 거울이 없었다.
‘망토라도 걸칠까? 관두자. 더 이상해 보일 거야. 날씨가 봄철이니 겉옷도 더 못 입겠고…………, 흐음.
주블킨은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익숙지 않은 무게에 질겁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주블킨은 벽장을 다시 원래의 위치에 가져다놓았다. 벽에 기대 어 세워두었던 로드를 다시 집어든 주블킨은 잠시 자신의 작업실을 주욱 둘러보았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청소는 왜 한 거야, 이 멍청한 늙은이. 마치 다시 돌아올 것처럼. 하하하!’
주블킨은 소리 없이 한참을 웃고는 눈가의 눈물을 훔쳐냈다. 갑자기 난폭한 기분이 든 주블킨은 이곳을 모두 때려 부수고 갈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 다. 로드를 휘둘러 약장을 때려 부수고 의자를 집어던지고 테이블을 걷어차고…………. 하지만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신조는 방종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로지 숨기고 숨기며 행동할 것. 자신마저도 모를 정도로 숨길 것.
주블킨 일레드마는 자신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밖의 날씨는 청명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 둘밖에 없는 의사들 중 하나가 평소에 들고 다니지 않는 기괴한 지팡이를 들고 있음을 깨닫지는 못했다. 그들은 떠들고 걷고 서로에게 밀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른 사람을 차분하게 관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주블킨의 마음속을 감돌던 불안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때였 다.
“의사 선생님? 그게 웬 지팡입니까?”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 하나가 다가서며 질문했다. 주블킨은 당황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아, 구경꾼들이 너무 많잖은가. 그래서 이런 걸 흔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할 것 같아서. 무시무시해 보이지?”
“하하, 그렇군요. 선생님도 신스라이프 저택에 가십니까?”
“그렇다네.”
“저도 거기에 갑니다. 야! 정말 대단한 인파군요.”
“그래.”
고양이와 꿈의 콜리의 프리스트는 친근감 어린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과 말을 나누며 걷기 시작했다.
궤헤른은 재촉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후작님. 시간이 다 됐습니다만.”
할슈타일 후작은 궤헤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나무 밑동에 앉은 후작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작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미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미는 후작에게 옆얼굴을 보인 채 두 팔로 끌어안은 무릎 위에 턱을 올리고 앉아 있었다. 가이버와 니크, 그리고 사무엘은 멀뚱한 표정으로 후작과 미 를 번갈아 쳐다보았지만 그들의 비교적 단순한 두뇌 구조로는 이 사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궤헤른 역시 이 사태가 이해 불가능인 점은 마찬가 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배낭 끈을 만지작거리거나 말고삐를 흔들어댔다.
미는 말없이 앉아 있었고, 후작 역시 아무 말도 없이 그런 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무표정했다. 후작 이 궤헤른의 말을 듣지 못했을 까닭은 없다. 두 번이나 말했으니까. 따라서 궤헤른은 후작을 귀머거리 취급하며 세 번째로 말하는 것이 퍽 주저되었 다.
하지만 벌써 해는 정점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부터 출발하더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정오까지 신스라이프의 저택에 도달하지 못할 수 도 있다. 궤헤른은 다시 한번 용기를 짜냈다.
그러나 궤헤른이 입을 열기 직전, 꼼짝도 하지 않던 후작이 갑자기 말했다.
“네가 내 발목을 잡을 수는 없다. 북부의 무녀.”
사내들은 후작의 말에 깜짝 놀라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후작은 그런 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 다.
“네가 정답이 아니라도, 나는 너를 이용할 수 있다. 내 손에 들어왔던 정답이 사라졌다고 해도 나는 실망하지 않아. 너는 미래를 걷지만 나는 현재를 걷는다. 그리고 내 발걸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정답이 아니라고? 궤헤른은 숨 막힐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무녀가 신스라이프의 문제의 정답이 아니라는 말인가?
후작은 갑자기 일어섰다.
“일어나라, 무녀.”
잠시 후 미는 스르르 일어서서 후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내 말에 타도록.”
미는 아무 대답 없이 말을 향해 걸어갔다. 후작은 제자리에 선 채 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궤헤른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입을 열었다.
“후작님. 무슨 말씀입니까? 저 퓨처 워커가 정답이 아니라는 겁니까?”
“퓨처 워커가 아냐. 무녀다. 아니, 그냥 여자라고 해도 되겠군.”
“예? 그게 무슨 말씀……………”
“시간이 없다. 가자.”
후작은 궤헤른을 남겨둔 채 그대로 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미의 등 뒤에 올라탄 후작은 그녀를 안듯이 팔을 둘러 고삐를 잡았다. 궤헤른은 의혹 이 가득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지금 질문한다고 해서 후작이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궤헤른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의 말로 걸어갔다. 말에 오르면서 궤헤른은 스스로에게 후작의 행동을 설명해 주느라 애썼다.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가시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곳으로 갈 까닭도 없으니까.’
다른 사내들도 대충 궤헤른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중에는 후작님이 가시니까 나도 간다는 식으로 별 고민 없이 말에 오른 니크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모두가 말에 올랐다. 후작은 아무런 명령이나 지시 없이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고 사내들은 그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잠시 후, 정오를 향해 치닫는 햇빛 아래 반짝이는 턴빌 시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 그렇게 음식을 입 속으로 우겨넣지 마. 조금씩 베어 먹어도 되잖아. 인간들은 오크와 달라서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음식을 빼앗지 는 않아. 내가 보증하지.”
레이저는 처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루손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표정을 지을 뿐 손에 든 와플을 입 속으로 쑤셔 넣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 엄청난 인파 가운데로 루손을 데리고 걸어가면서, 뭐라도 먹게 해놓으면 주위에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레이저의 의도는 확실히 보답 받 았다. 루손은 주위에 아무런 관심도 보내지 않고 구강과 식도를 와플로 채우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젠 거꾸로 주위의 사람들이 그 들에게 상당히 관심 어린 시선을 보내어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히 미인. 보자마자 기절할 정도의 미녀는 아니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즐거운 상상이 가능한 용모. 그런데 이 아리따운 아가씨의 등에 걸려 있는 것은 살벌한 글레이브(대장장이의 손을 거쳐 루손의 현재 팔 길이에 딱 알맞은 크기로 재탄생한 것이다.). 파격적. 입가뿐만 아니라 볼 전체를 뒤덮어 눈 바로 아 래에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와플 조각. 이런 루손의 모습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은 무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레이저는 암담했 다.
“루손. 내 말 좀 들어봐.”
눈만 힐끔. 와구와구.
“고마워. 네가 음식을 먹는 방식은 위험해.”
의문이 담긴 시선. 쩝쩝쩝.
“사람들이 네가 변신한 오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할지 몰라.”
경악으로 커진 눈동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와플 조각.
“아니, 먹던 것은 다 삼켜! 흘리지 말고.”
“자, 잠깐. 그거 사실이야? 진짜야?”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하지만 레이저의 말은 루손에게는 반드시 그렇다는 말로 들렸다. 루손은 발작적으로 등에 메고 있던 글레이브로 손을 가져가면서 동시에 주위를 쏘 아보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화급하게 말했다.
“아, 아, 경계하지 마! 이 멍청한 친구야. 절대로 오크가 아닌 척해야 되는 거 아냐!”
“응? 어, 그런가?”
“그래! 완전히 사람인 것처럼, 뭘 쳐다보냐는 식으로 주위를 둘러봐!”
주위의 사람들은 사실 레이저가 말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심지어 사람들은 루손을 향해 끊임없이 소곤 거리고 있는 레이저를 보면서 보기 좋은 한 쌍이라는 느낌도 받고 있었다. 루손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가 가진 오크의 야수 적인 감각은 주위에서 위험을 발견해 내지는 못했다.
루손은 갑자기 입맛이 떨어졌다는 표정으로 들고 있던 와플을 레이저에게 건네었다.
“너 먹어. 먹고 싶지 않아.”
레이저는 어깨를 으쓱인 다음 와플을 받아들고는 이런 식으로 먹어야 된다고 주장하듯이 점잖게 씹어 먹었다. 하지만 루손은 레이저로부터 근사한 식사 예법을 교육받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정말 오늘 그 신스 어쩌고 하는 인간의 집에 가면……….”
“신스라이프야.”
“그래. 거기에 찾아가면 그 고양이 신의 프리스트들이 나타날까?”
“콜리의 프리스트야. 자기들이 만든 수수께끼인데, 당연하잖아?”
“응? 뭐가 당연한데?”
“……당연히 나타난다고.”
“아? 그래?”
“응. 우리는 참 행운이야.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고 찾아오자마자 누군가가 그 문제를 풀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렇잖으면 목숨을 걸고 도 전했어야 될지도 모르는데. 나크둠의 가호일지도 모르겠다.”
“헤엣. 무너진 동굴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 나크둠이 우리를 가호한다고?”
레이저는 와플을 씹다 말고 볼을 불룩하게 만든 채 루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인간 표정은 아직 능숙하지 않았지만 레이저는 그녀의 얼 굴에 경멸감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이건 뭘 말하는 걸까. 그러나 곧 이어진 루손의 말을 듣자 레이저는 이해할 수 있었 다.
“먹었어야 했는데, 제길. 그럼 그가 내 속에 들어와………….”
“그렇겠지.”
“아깝단 말이야. 그만한 오크 전사가 다시 나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이건 오크 전체를 통틀어 너무 아쉬운 일이라고.”
루손은 정말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레이저는 소름이 돋았다. 루손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 젠장. 입맛이 떨어지 려고 하는군. 레이저는 우물거리고 있던 와플을 힘들게 삼킨 다음 말했다.
“루손.”
“응?”
“갑자기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너와 내가 언제까지 같이 다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크둠의 복수가 완결되는 시점까지는 함께 다니겠지. 그렇잖아?”
“그렇겠지.”
“좋아. 만일 내가 복수를 마치지 못하고 사망했을 경우 너는 내 곁에 있겠지. 내 시체를 어쩔 생각이지?”
루손은 잠시 대답을 보류하고는 왼손을 들어올려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에 만져진 것은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인간의 입술이 었으므로 루손은 질색하며 손을 뗐다. 결국 루손은 단순한 해답을 떠올렸다.
“죽지 마.”
“나야 죽고 싶겠냐. 하지만 그럴 수는 있잖아.”
루손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꺾더니 레이저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주욱 훑어보았다.
“젠장. 나 혼자서 이걸 다 먹으려면 끔찍하게 오래 걸리겠군.”
대답을 마친 루손은 고마워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어쩔 수 없이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손은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난 보잘것없는 오크니, 굳이 먹어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네, 친구.”
이래 가지고서야 할 말이 곤궁해진다. 루손은 레이저를 크게 칭송한 것이다. 그게 오크식 칭송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레이저는 머쓱해하다가 손에 든 와플을 떠올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어 우물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손. 아무래도 나는 인간이야.”
“그렇지.”
“너를 모욕할 생각은 아니지만, 장례식을 가질 수 있는 처지라면 인간식의 장례식을 가지고 싶어.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많겠지. 나는 갬블러고, 내 시체를 걸고 내기를 하고 싶어 하는 동료 갬블러도 있을지 몰라.”
“너희들은 시체 가지고도 그 도박인가 하는 것을 하나? 무례한 종족…….”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쉽게 말하지. 나한테 사기당한 녀석들이나 내게 돈을 왕창 잃은 사람 중에서 나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녀석이 나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그래? 흐음. 이해했어.”
“그래. 그러니까 이건 헛된 꿈이 될 가능성도 높지만, 어쨌든 인간식의 장례식을 가지고 싶어. 넓은 광야, 이왕이면 몬스터가 전혀 없는 사이들랜드 대평원이 좋겠어. 그곳에 버려진 시체가 되고 싶어. 내 시체 조각을 삼킨 새들이 하늘을 날 때 나는 함께 하늘을 날고 싶어. 그리고 밤마다 대평원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일생의 추억을 되짚어 보고 싶어. 시간은 무한할 테니까, 잊혀진 추억이나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추억까지 더듬어볼 시간 은 충분하겠지.”
레이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경기를 일으키기에 적합한 독백이었다. 루손 역시 레이저를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오크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죽음을 삶에서 분리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듬는 레이저의 사고방식이 인간으로서는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추억을 더듬는다고? 왜? 지금 하지?”
“죽은 다음에 얼마든지 하게 될 테니, 살아 있을 때는 추억을 되새겨 볼 필요는 별로 없어. 아니지. 죽은 다음에 되새겨 볼 추억들을 매일매일 열심 히 만들어야지. 현자는 앞을 바라보며 뒤를 생각하는 법이야.”
“쳇, 모르겠다. 간단하게 말해. 죽은 다음엔 사이들랜드에 던져지고 싶단 말이야?”
“뭐…………, 그래. 하하.”
“그렇게 해주지.”
루손은 간단하게 말했고 레이저는 그런 루손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꼈다.
“오크는 죽고 나면 어떻게 되지?”
루손의 눈이 갑자기 자부심과 긍지로 반짝거렸다. 루손은 조금 희열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렌차의 곁으로 가는 거지!”
“화렌차께로?”
“그래. 그곳에서 영원히 싸움을 즐기고 먹고 마시는 것이다. 걱정할 필요도 없어. 죽은 오크는 다시 죽지는 않으니까. 싸움에 져도 몸은 끄떡없어. 그렇게 몸을 단련시켜 둔 다음, 화렌차의 지휘를 받아 복수를 하는 거야!”
“복수라니, 무엇에 대한?”
루손은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뭐, 윗분들이 아시는 중요한 이유가 있겠지. 신이잖아? 아랫놈들은 그런 곳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야.”
하긴, 오크와 복수의 화렌차라고 하지. 하지만 화렌차 자신이 무엇에 대해 복수한다는 거야. 레이저는 속으로만 웃었다.
“뭐, 그렇겠군. 그게 오크의 낙원인가?”
“낙원? 아, 그래.”
“그럼… 나는 네가 죽었을 경우 어떻게 해주면 되지?”
“네 마음대로 해. 화렌차의 곁으로 가게 되면 그분께서 새롭고 훨씬 우수한 몸을 주신다. 그러니 지상에 남겨진 몸이야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 야. 나는 나크둠처럼 다른 오크들에게 전해 줄 굉장한 힘과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뭐.”
“그렇구나. 알겠어. 아………….., 저곳인가 보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는 저기 저 저택.”
이루릴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프나이델은 그녀의 기다란 귀가 안성맞춤의 머리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절벽 끄트머리에 멈춰 선 채, 이루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곳인가요.”
“예? 어디 말씀입니까?”
“보이지 않으시겠군요. 상당히 멀어요. 하지만 제 눈엔 지평선에 걸린 인간의 도시가 보입니다. 방향으로 보건대 저곳이 턴빌일 것으로 짐작되는군 요.”
제레인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두 손을 이마에 대어 햇빛을 가리고는 이루릴이 지적한 방향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무래도 잘 안 보인다고 생각한 제레인트는 시선을 멀리 고정한 채 무턱대고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갔고, 엑셀핸드의 제지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추락할 뻔했다. 엑셀핸드는 제레인트의 허리끈을 붙잡아 당기면서 불같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멍청한 녀석아, 테페리의 죽은 지팡이가 되고 싶은 게냐! 갈림길은 잘 찾는 녀석이 왜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거야?”
“하, 하하. 설마요. 보십시오! 엑셀핸드가 저를 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테페리의 뜻일 겁니다.”
“으으음! 할말 없다.”
뒤에서 낄낄거리고 있던 아일페사스가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제리가 떨어지면 제가 날아올라서 제리 붙잡아 올릴 거야. 떨어져봐요, 제리.”
·테페리께서도 거기에는 찬성하지 않으실 것 같구나.”
“설마? 제가 테페리에게 물어볼까? 어떻게 물어보면 돼?”
“네 속에 계신 테페리께 여쭤봐.”
제레인트는 단순하게 대답해서 아일페사스로 하여금 혼잣말을 하게 만들어놓고는(“테페리? 거기 있어요? 테페리야, 대답해 봐아아라?”) 이루릴에게 말했 다.
“그럼 얼마나 더 걸어가면 될 것 같습니까?”
“말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준다면 한 시간 정도. 하지만 말들이 힘들겠죠.”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점심을 좀 느지막하게 먹기로 하고…………….” 엑셀핸드는 잠시 짙은 우수가 담긴 시선으로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아, 식사가 늦어지다니! “쉬지 않고 걸어가도록 하지요. 가볍게 달리면 한 두어 시간 걸리겠죠?”
“길이 평탄하니까 그렇겠지요.”
“어떻습니까, 엑셀핸드님?”
“으음・・・・・・ 그러자.”
엑셀핸드는 근엄하게 말했고 제레인트는 엑셀핸드의 결단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에델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태우고 여기까지 걸어온 말 코스모스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조금만 더 고생하렴.”
그리고 에델린은 등자에 발을 올리지도 않은 채 선 채로 코스모스에 올라타 버렸다. 아일페사스는 엉겁결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말이 쓰러지는 소리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눈을 뜬 아일페사스는 에델린의 거구를 견뎌내고 있는 말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 언제 봐도 대단해.”
“키가 크니까요.”
“응? 아니아니, 코스모스 말이에요.”
아일페사스가 등자에 발도 올리지 않고 말에 타는 재주에 감탄한 줄 알았던 에델린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엑셀핸드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는 고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허어! 등자에 발을 올리지 못하는 자도 여기 있네. 에델린이 부럽군.”
아프나이델은 활짝 웃고는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엑셀핸드가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다가섰다. 엑셀핸드는 그런 아프나이델에게 감사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아프나이델의 손을 밟아가며 세레니얼 위에 올랐다. 그는 말 위에 앉아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드워프 중에서는 키가 큰 편이란 말이야. 우리 동굴에서는 동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제레인트가 대답했다.
“거인이다.”
“응? 하하. 그 정도는 아닐세, 제레인트.”
“아니, 거인이에요.”
엑셀핸드는 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라니까! 잠깐, 지금 자네 비꼬는 건가?”
“젠장, 테페리께 맹세코 거인입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세요!”
엑셀핸드는 그제서야 제레인트가 자신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프나이델과 이루릴, 그리고 에델린과 아일페사스도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넘어온 능선을 바라보았다.
능선은 완만하게 굽이치고 있고, 뒤로 켜켜이 쌓인 산봉우리들은 아스라한 회색으로 물들어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능선 바로 뒤쪽에 갑작스 럽게 솟아난 봉우리가 하나 있었다. 봉우리에는 눈처럼 보이는 것이 두 개 달려 있고, 그 아래에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코라고 불러줄 만한 돌출물이 있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 아래에 있는 입이 올라오고 있었다.
엑셀핸드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그러나 엑셀핸드는 낙마의 충격도 잊은 채 능선 뒤편에서 올라오고 있는 거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거, 거, 거……!”
“수, 숨어랏!”
“어머, 세상에나! 정말 큰 인간이네?”
“숨으라니까, 펫시!”
말들은 투레질을 하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이루릴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그 숨결에 생명을 담고 모든 것을 바라보며, 종속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자여! 여기서 그대의 권능 중 하나를 거두세요.”
찌잉……! 에델린은 귓속을 울려퍼지는 이명에 놀랐다. 하지만 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을 알자 더욱 놀랐다. 소리를 전달하는 실프로 하여금 말들의 비명을 지우게 만든 이루릴은 손을 뻗어 단호하게 말했다.
“저기! 전나무 쪽으로!”
그러나 일행 중에 능숙한 기수는 아무도 없었다. 아프나이델은 날뛰는 세레니얼을 끌고 가려다가 오히려 걷어차일 뻔했다. 제레인트는 힘껏 팔을 휘 둘러 자신의 말 후치의 볼기를 철썩 갈겼지만 후치는 고개를 돌려 ‘왜 때려?’ 하는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봄으로써 그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 자식아, 너 꼭 그 이름의 원래 주인같이 굴 거야?”
엑셀핸드는 기는 것 비슷한 걸음걸이로 전나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에델린은 충만한 힘을 발휘하여 코스모스를 질질 끌고 뛰었다. 한 마디로 난 장판을 벌이고 있는 일행들의 한가운데서, 낮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라! 이 멍청한 생물들! 저의 명령이다!”
아일페사스의 고함 소리에는 그녀의 말 센추리온조차도 응답하지 않았다. 센추리온은 무턱대고 몸을 돌려 거인의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쪽에는 완전히 노출된 낭떠러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일페사스는 분노로 충천한 표정으로 고삐를 잡아당겨 간신히 센추리온의 질주를 막을 수 있 었다. 그때 이루릴이 말했다.
“길짐승 중 유일한 바람의 적자들이여, 그대들의 주인을 따르세요.”
이루릴의 음악소리와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말들은 진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미숙한 기수들은 그제서야 각자의 말을 끌고 전나무 숲으로 몸 을 숨길 수 있었다.
일행들이 이토록이나 난동을 부리고 시간을 끌었는데도 거인은 이 일행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실프들이 소음을 없애준 까닭도 있지만, 까마득한 키 의 거인에게 일행들은 개미처럼 보일 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거인은 그 높은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턴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나무 숲에 숨은 일행들은 동시에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제자리걸음을 하며 날뛰고 있는 말들을 진정시키고 몸을 더욱 은밀하게 숨기면서 동시에 거인의 동태를 살펴야 했다. 이루릴은 말들의 갈기를 쓰다듬고 속삭이듯 말했다.
“진정하렴, 진정해. 조용히………….”
그리고 아일페사스는 알고 있는 욕설을 모조리 퍼부어대며 ‘감히’ 자신의 명령을 무시한 말들을 꾸중했다. 아무래도 아일페사스의 머릿속에서 거인 의 존재는 별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이들의 시선은 거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엑셀핸드는 배틀 액스를 단단히 쥐 고 나무에 등을 바싹 붙인 채(그러고 있으면 거인이 봐도 나무 표면의 무늬로 생각할 거라고 믿는 것처럼)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봐, 봤냐? 우리를 봤어?”
아프나이델 역시 덤불 속으로 몸을 숨기려 애쓰면서 대답했다.
“아, 저, 아직은 모, 못 본 것 같습니다만, 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금 다리를……………, 맙소사!”
아프나이델은 그 동작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거인은 능선을 밟고 올라섰다. 쿵! 거인이 능선을 밟자 산 전체가 울리는 충격음이 퍼졌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어서 거인의 모습을 보지 못한 엑셀핸드는 그 충격음에 허옇게 질렸다. 반면 제레인트는 몸을 숨기는 것보다는 거인의 모습을 보다 잘 보기 위해 애쓰며 말했다.
“엑셀핸드, 저것 좀 보세요!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군요? 세상에, 굉장합니다!”
“갑자기 거인보다 네놈이 더 무섭다…………. 아니, 어떻게 저런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거지?”
“아, 해답을 줄 듯합니다. 보세요!”
엑셀핸드는 나무 옆으로 고개를 돌려 산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두 발로 능선을 디디고 선 거인은 두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거창한 동작을 본 에델린은 피가 식는 기분으로 에델브로이의 디바인 마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활짝 웃었다. 그는 저 동작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두 팔을 들어올린 거인은 커다랗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아…………암!”
숲 곳곳에서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라서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천둥 같은 소리로 하품을 한 거인은 다시 천천히 팔을 내렸다. 구태 여 천천히 내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거대한 팔인지라 제레인트가 보기엔 감질날 정도로 오랫동안 팔을 내리고 있는 것처 럼 보였다.
“저 너머에서 자고 있었나 보군요. 게으른 친구인데? 해가 얼마나 떠올랐는데 지금 기상하나.”
“더 게을렀으면 좋았을 텐데, 안 일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엑셀핸드는 이렇게 고함지르며 배틀 액스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아프나이델은 나무 밑동에 쪼그리고 앉은 채 오들오들 떨면서 말했다.
“세, 세상에 거인이라니…………! 거인은 사라졌는데….”
제레인트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이겠죠. 나는 저 친구를 알 것 같아요.”
“안다고요?”
“잘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거인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엑셀핸드는 그 동작을 보며 헛바람을 삼켰지만 제레인트는 낭랑하 게 말했다.
“키는 100큐빗은 되겠군요. 오른쪽 눈에 상처를 입었어요. 애꾸 거인입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거인 중에서 100큐빗이나 되는 신장에 애꾸눈을 한 거인은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왠지 상당히 유서 깊은 거인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이젠 백짓장처럼 변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 그럼……!”
이루릴이 아프나이델의 말을 받았다.
“그덴 산의 거인으로 짐작되는군요.”
제레인트는 씩 웃었다. 아일페사스는 그 웃음에 왠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평소의 제레인트의 웃음에는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 담겨 있음 을 깨달았다. 제레인트는 웃으며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여러분? 요즘 대유행입니다. 과거가 우리를 따라잡는 것. 흔한 말로는 복고풍이라고도 하지요. 하하하………….”
“제, 제레인트…….”
제레인트의 웃음은 마치 울음처럼 보였다. 그는 그렇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다시 한번 산 위의 거인에게서 천지를 흔들리게 하는 소음이 터져나왔다.
“흐으음……!”
일행들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산 위의 거인은 두 팔을 뒤로 당기며 천천히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다. 에델린은 턱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뭐, 뭐하려는 걸까요?”
아일페사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거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을 구부리고 있어……. 음, 린, 제 생각에는 말이야………….”
“뛴다!”
엑셀핸드의 고함 소리와 동시에 거인은 두 팔을 휘두르며 산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아프나이델은 기절하고 싶었다. 거인의 커다란 몸이 하늘을 가리는 순간 주위는 캄캄하게 변했다.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림자는 땅에 가까울수록 짙어지는 법. 그들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거인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마치 낮 중에 찾아온 밤과 같았다.
게다가 저것은 구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거인이었다. 아일페사스는 씨근거리며 말했지만(“감히 제 머리 위를 뛰어넘어 다니다니!”) 그녀만큼 당당하게 분노를 토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꼼짝없이 깔려죽게 생겼다고 믿은 엑셀핸드가 ‘카리스 누멘이여, 이 자의 영혼을 받아들여 어쩌고 하면서 중얼거리는 가운데 그덴 산의 거인은 위압감 넘치는 도약의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
쿠쿠쿵! 말들이 다시 비명을 질렀지만 실프들은 여전히 말들의 비명 소리를 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거인의 착 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거인은 단숨에 낭떠러지 아래의 평야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래도 절벽 위의 숲속에 숨어 있는 사람들은 거인의 허벅지 정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거인의 머리는 아직도 까마득한 높이에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틀어막은 채 거인의 엉덩이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거인은 산 위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 왔다. 비록 등 을 보여준 채 서 있었지만 사람들은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은 거인의 등을 보며 두 손으로 입술이 뭉개져라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나 이루릴만은 차분한 동작으로 활을 꺼내 화살 하나를 시위에 걸고 다른 하나는 땅에 꽂았다.
아프나이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이루릴을 향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이루릴이 그를 돌아보자 아프나이델은 입모양만으로 격렬하게 말했다.
‘고, 공격하려는 겁니까?’
‘아니오. 만약을 대비하려는 겁니다.’
‘만약을?’
‘그덴 산의 거인은 흉포한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프나이델이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루릴이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엘프니까. 아프나이델은 이를 악물며 자신의 방법으로 만약을 대비했다. 정신을 집중한 아프나이델은 두 손을 앞으로 내 민 채 캐스트할 준비를 갖추었다. 엑셀핸드는 만약을 대비한다기보다는 거기에밖에 의지할 수 없었기에 배틀 액스를 힘 있게 움켜쥐었다.
일행들이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거인의 엉덩이를 쏘아보고 있는 동안, 거인은 착지의 충격을 해소하려는 듯이 두 다리를 조금 구르고 있었다. 아무 리 신장이 100큐빗에 달하는 거인이라도 그런 도약에서도 아무런 충격이 없을 수는 없는 듯했다. 다리를 몇 번 구른 거인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거 인은 펼친 오른 손바닥을 이마로 가져갔다.
아프나이델은 인간들도 자주 취하는 그 동작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햇살을 가리는 건가요?
‘아, 안 돼! 턴빌을 보고 있어요!’
제레인트는 기막힌 표정으로 말했다. 이루릴은 갑자기 활을 들어올려 시위를 힘 있게 당겼다. 에델린은 기겁한 얼굴로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루릴 은 시위를 놓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화살을 잔뜩 당긴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공격할까요?’
‘뭐, 뭐라고요? 제정신입니까?’
‘거인이 턴빌로 가게 내버려두라는 말씀입니까? 그를 다른 곳으로 유인해야 하지 않나요?”
경악에 빠져 있던 아프나이델은 조금 후에야 이루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비인간적인(당연하다, 엘프니까.) 침착성은 논외로 하고, 그녀의 판단은 옳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저 거인의 존재를 발견했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 거인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레인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아프나이델은 열정적인 얼굴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쩔 수 없어. 우리가 살아야 되는 것 아니겠어? 그러나 제레인트는 계속 설명했다. ‘우리는 산 위에 있습니다. 마음대로 도망칠 수가 없어요.’
이루릴은 활을 내리며 다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잠시 턴빌로 가게 내버려둡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가지요. 저 아래의 평야라면 말을 마음대로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거인을 유인할 수야 있겠지만 마음대로 달아날 수는 없어요.’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나이델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그와 제레인트 모두 생존을 원하고 있었지만 제레인트는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거인은 갑작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거인의 거대한 다리 길이에 어울리는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천천히 걷는다 해도 다리가 워낙 길기 때문에 거인 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제레인트와 이루릴은 그 모습을 신중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
거인은 이제 웬만한 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걸어갔다. 제레인트는 낭패라고 생각했다. 거인의 보폭이 너무 큰 것이다. 만일 저 보폭 으로 달리면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를까. 그런데 그들은 이제 산을 내려가면서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할 것이다.
제레인트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서두릅시다! 자칫하면 유인은커녕 따라잡지도 못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