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5

퓨처 워커 3권 – 6장 잊혀진 것을 부르는 목소리 5


5

주위는 고요했다. 네리아의 주장에 의하면 이천오백마흔세 개나 되는 입은 모두 굳게 닫힌 채 할슈타일 후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대답이 틀린 다면 한 인간이 죽는다. 그리고 그 대답이 맞았다면 66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상자가 열린다. 그 상자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66년 동안 동결되었던 재산도 개방되는 것이다. 그 재산의 개방은, 보통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그저 참으로 부러운 행운이다. 하지만 궤헤른은 알고 있었다. 그 재산이 개방 되는 순간 대왕의 검으로 일어섰던 나라 바이서스는 할슈타일의 검 아래 무너지는 것이다. 역사의 필연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분명히 진행되는 법, 그리고 어쩌면 궤헤른은 바로 그런 필연의 탄생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후작이 정답을 말한다면, 저 상자가 열린다면.

그란은 숨 가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많은 인파 때문에 후작에게 접근도 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주먹을 부르쥐는 일 이외엔 아무 일 도 못하고 있었지만, 그란은 흥분 때문에 이성을 잃는 것을 혐오하는 성격이다. 그는 후작이 정답을 말했을 경우 일어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정답 을 말했을 경우, 후작은 손에 넣게 된 신스라이프의 재산의 힘을 사용하여 지금까지의 추격자와 도망자의 위치를 간단히 역전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되는가? 아니다. 그란 하슬러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후작이 정답을 말했을 경우, 이대로 돌격한다. 다음 기회라는 것은 없게 될 테니까. 그러나 오답을 말했을 경우에는?

“복수는 자네 손으로 하고 싶은가.”

그란이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운차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 렇게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해 봐, 핫소드 그란 하슬러.”

사용할 수 있는 단어와 사용할 수 없는 단어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그란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마디뿐이었다.

“어렵군.”

오답을 말했을 경우 후작은 턴빌 시청의 주관 하에 처형당할 것이다. 이웃나라의 도망자인 할슈타일 후작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에 도전한 무모한 모험가 운차이 하슬러로서. 그란은 자신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반문해 보았다. 그렇다면? 죄수를 빼내 오기라도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동료들을 쓸데없는 위험에 빠뜨리는 처사일 것이다. 그란은 입술을 깨문 채 후작의 등을 쏘아보았다.

쳉은 무표정했다. 꼿꼿하게 선 몸 어느 부분에서도 움직이는 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네리아의 말처럼 골렘으로 착각되기 적당한 모습으로 선 이 감 정결핍 호위 무사의 시선은 단 하나의 점에 고정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궤헤른 미가 아니었다. 쳉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궤헤른이었다. 미를 구해 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면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방해물 은 미의 바로 옆에 선 채 그녀를 지키고 있는 궤헤른의 존재일 것이다. 쳉은 미에 대한 감정마저도 묻어둔 채 ‘지금 해야 할 일의 가장 중요한 대상’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 쳉에게 있어서 후작이 정답을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니, 지금 쳉의 뇌리 속엔 후작의 존재는 그림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쳉은 주위의 사람들이 갑자기 경악이 섞인 탄성을 내지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쳉은 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후작이 거기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신스라이프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시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상자를 집어든 것이 었다.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는 시장은 당혹으로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거나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입을 쩍 벌리고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데커드 시장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우, 운차이 하슬러? 뭐하는, 뭐하는 것입니까?”

후작은 시장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곤 상자를 한 손에 올려놓은 채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켜 보였다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그 러고는 그 손가락으로 시장을 가리킨 다음 다시 좌우로 까딱거렸다. 당황 때문에 혼란에 빠진 시장도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손짓이었다.

‘내가 말할 기회는 한번뿐이오. 말 걸지 마시오.’

그렇게 시장 이하 참관인들의 입을 막아놓은 후작은 시선을 돌려 손에 있는 상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장과 신스라이프의 유족들은 의혹이 가득 한 시선으로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이기에 제지를 가할 이유도 파악해 내지 못한 그들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후작은 상자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 상자를 뒤집어 바닥을 보고, 그리고 그것을 얼굴 가까이로 가져가 연결 부위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펴보았 다. 이윽고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군중 속에서 느닷없이 카랑카랑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자를 막아! 상자를 빼앗아!”

인파의 한 부분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터져나왔다. 고함을 지른 자는 직접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 애쓰는 모양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간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계단 아래 도열해 있던 경비 대원들은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놀랐지만 상관에게만 명령을 받아야 하는 처지를 잊지는 않았다. 게다가 계단 아래에 있던 그들이 후작에게 다가가려면 계단을 뛰어올라 가야 했다.

후작과 같은 곳에 있었던 시장 이하 다른 사람들은 이 고함 소리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했다. 운차이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고함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지만, 워낙 많은 군중들과 갑작스러운 소란 때문에 고함 소리의 주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네리아가 말했다.

“어라? 이 목소리는…………, 그 의사 할아버지?”

“주블킨 일레드마, 그렇군. 뭐지?”

그때였다. 데커드 시장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운차이 하슬러! 뭐하는 거요!”

그란은 바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계단 위에 서 있던 후작은 왼손에 상자를 올려놓고 오른손은 밀랍 봉인으로 가져갔다. 데커드 시장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와 후작 사이에는 테이블이 가로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참관인들도 일어났고 계단 아래에 있 던 경비 대원들도 당황해서 계단을 올라가려 했지만 그들 모두는 후작에게서 너무 멀었다. 후작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계획했던 동작을 실행 했다.

후작은 거침없이 봉인을 뜯어냈다.

파바바밧! 후작의 손이 한번 훑고 지나가자 밀랍 봉인은 박살이 나며 가루가 되었다. 봉인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데커드 시장은 엉겁결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할슈타일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인이 부서진 상자의 뚜껑을 움켜잡았다.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데커드 시장은 갈라지는 목소 리로 외쳤다.

“이, 이거 보시오! 그건 마법으로 잠겨 있단 말이오!”

후작은 시장을 한번 흘긋 바라보고는 두 손으로 상자를 단단하게 쥐었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낮고 사나운 기합 소리를 뱉었다.

“하아아압!”

후작의 팔이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른 근육을 감당하지 못한 옷솔기가 찌직거리는 소리를 냈고 후작의 턱은 부르르 떨렸다. 파하스는 어 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멍청이! 마법으로 잠긴 것을 힘으로 열려고 하고 있어! 그덴 산의 거인이라고 해도 마법으로 잠긴 것은 못 열………….!”

와지끈! 파하스는 자신의 말 끄트머리를 삼키고 켁켁거렸다. 상자는 후작의 손 안에서 무참하게 부서졌다. 그런데 그 부서진 모양이 기이했다. 상자 의 뚜껑 부분이 열린 것이 아니라 상자 몸통 부분이 갈라져 두 개로 조각나 버린 것이었다. 후작은 만족한 표정으로 양손에 들린 상자 조각들을 내려 다보았고 데커드 시장은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열……리네?”

네리아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운차이가 재빨리 대답했다.

“연 게 아냐, 부순 거지.”

“하, 하지만 부술 순 없어. 마법으로 잠긴 것이라면…………, 초보 마법사라도 마법으로 풀 수야 있겠지만,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힘으론 못 여는……………. “

파하스가 신음처럼 말했지만 이번에도 운차이의 대답은 빨랐다.

“마법이 없었다면?”

“뭐?”

“마법이 없었다면? 원래부터 아무런 마법이 없이 그냥 잠겨 있는 상자, 아니, 아예 열리지도 않게 만들어진 상자였다면? 그렇다면?”

운차이는 말하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그날, 턴빌 시청에서 운차이는 질문했다.

‘마법으로 잠긴 것이라면 역시 마법으로 풀 수 있을 텐데? 만일 어떤 마법사가 정답을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 마법 해제의 주문을 외워버린다면 어떻 게 할 겁니까?”

그리고 시청 직원은 대답했다.

‘아, 그런 시도도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마법사도 그런 시도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예, 아무도,’

“아무도 마법을 해제하지 못했어. 어떤 마법사도. 왜 그럴까? 하지만 저 상자에 원래부터 마법이 없었다면? 제기랄, 그거야. 마법이 없다면 풀 수도 없는 거지.”

네리아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럼……?”

“사기였어! 저 상자는 열리지 않아. 아니, 열릴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던 거야. 그렇잖다면 저런 식으로 부서질 리가 없지. 하지만 후작은 OPG를 가 지고 있었고, 그래서 저걸 부숴서라도 열 수 있었던 거겠지.”

계단참 위의 후작은 양손에 들린 상자 조각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시장과 다른 참관인들도 넋을 잃은 표정으로 66년 만에 열린, 그러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열린 상자를 바라보았다. 계단을 올라서려던 경비 대원들도 발걸음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스라이프의 유가족들은 속절없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상자가 부서질 때의 충격 때문에 안에 있던 내용물이 튀어나가 버린 것일까? 하지만 상자가 부서질 때 튀어나간 것이라고는 나뭇조각 몇 개와 모서리를 보강하고 있던 철판 하나뿐이었다. 그 안은 원래부터 비어 있었음이 분명 하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는 그들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 66년 동안 상자는 조용했다.

상자가 조용한 것이 뭐가 이상한가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안에 무엇인가가 들었다면 흔들었을 때 소리가 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없었다. 유가족들은 그저 상자 안의 내용물이 잘 고정되어 있거나 솜으로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열린 상자 안에는 솜이나 고정 장치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다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후작은 더 필요 없다는 투로 상자 파편을 떨어뜨렸다. 땅! 데구르르. 데커드 시장은 자신의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땅에 뒹구는 상자 조각들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후작을 보았다.

후작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 상자의 수수께끼를 푼 것 같소만.”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던 주블킨 일레드마는 어느새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 역시 계단참 위에서 일어난 사건을 잘 보았 다. 그에게 밀려나며 욕지거리를 퍼붓던 사람들도 넋을 잃은 채 계단 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주블킨의 경악과는 종류가 전혀 다른 경악이었다. 주블킨은 들고 있던 로드에 기댄 채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다. 노쇠해진 다리는 이제라도 곧 부서질 것처럼 떨렸고 새하얗게 변한 얼굴과 목 주변에 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주블킨을 알고 있던 턴빌 시민 몇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의사 선생님? 주블킨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저거였나…….”

“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선생님?”

“저거였나…………, 저렇게 열리는 거였나…………. 하, 하하하…………”

의아한 표정으로 주블킨을 바라보던 시민들 중 한 명이 자신은 주블킨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예. 어이가 없네요. 의사 선생님. 저렇게 부숴서 여는 것이 정답이었다면, 햐! 아깝군요. 저라도 나서서 부숴버리는 건데…….”

주블킨은 얼빠진 얼굴로 입을 연 사내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프, 프하하! 멍청한 놈! 저건 보통 사람들이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냐. 거인의 힘이 아니라면 못 부숴! 마법사도 못 부숴! 웬 줄 알아? 웬 줄 아냐고? 크킬킬킬! 마법이 어, 어, 없거든? 프헷헤헤헤!”

“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주블킨 선생님?”

그러나 주블킨은 사내의 말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열띤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들을 토해 냈다. 평생 동안 숨기기만 했던 말들이 한꺼 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기에 말을 하고 있는 주븜킨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안 열린다고 생각했지. 당연하잖나! 저기에 망치를 들고 올라갈 녀석은 없을 테고, 마법사는 마법이 안 걸려 있으니까 못 열 고! 게다가 수수께끼, 그래. 그게 있었으니까. 그건 기막힌 안배였지! 상자를 열기 위해 수수께끼를 풀어야 되는 것인데, 그런데 수수께끼라는 것 때 문에 사람들은 상자를 여는 것보다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거든! 키, 킬킬킬킬! 수수께끼라는 것이 원래 그렇잖아? 기발했 다고! 그런데, 허, 푸흐하하! 저렇게 여는가? 저 남자는 도대체 악마와 인간의 사생아라도 된단 말이냐? 도대체 어떤 악마의 시각이 눈앞을 가린 것을 넘어서 보고, 도대체 어떤 악마의 힘이 두 손만으로 저걸 부수게 만든 거지? 굉장하군, 굉장해! 이것까지 예견되어 있었나? 그랬던 것인가? 할아버님, 아버님, 형제들이여! 그랬던 것입니까? 정녕 이렇게 될 것까지 예견하셨던 것입니까?”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주블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정원에 몰려든 인파들 중 여러 곳에서 이와 비슷 한 탄식이나 흐느낌, 혹은 광소가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쳉은 그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대여섯 명은 넘는 자들이 웃어대고 있었다.

콜리의 프리스트들? 맙소사, 저들이 콜리의 프리스트들인가?

쳉은 재빨리 그들의 특징을 종합해 보았다. 그렇다. 모두들 나이가 지긋한 자들이었다. 66년 전 저 수수께끼를 준비했던 자들의 다음 세대 정도 될 것 같은 연령이었다.

미친 듯이 웃어대던 주블킨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멈췄다. 주위 사람들은 그제서야 주블킨이 제정신을 차렸나 보다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의혹, 한 가지 의혹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혹에 생각이 미친 주블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계단참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열린 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낱말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곱…… 명이었는데?”

후작은 다시 팔짱을 끼었다. 그는 아래쪽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오만하게 무시하며 시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사태를 측정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무섭도록 발휘되는 중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날카롭게 말했다.

“인정하는 거요.”

“예? 무, 무슨, 뭐를?”

“인정하냐고! 내가 그 수수께끼를 풀었음을 인정하느냐는 거요! 보시오, 나는 상자를 열었소. 그 속엔 아무것도 없어! 상자 속에 제2유언장이 있다 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정하겠지!”

“그, 그렇군. 그런데……?”

“이건 사기야. 희생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미끼였어. 신스라이프 녀석이 무슨 심술로 뒷사람들을 자기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그자의 수수께끼를 풀어냈소. 인정하시오!”

후작의 말은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다. 후작은 수수께끼를 풀었다기보다는 그것을 파괴해 버렸다. 그는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 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유언장은 수수께끼를 푼 자에게 재산을 증여하게 되어 있지, 그것을 파괴한 자에게 재산을 주게 되어 있지는 않다. 후작은 시장과 유가족들이 당황 속에서 헤어나 그것을 알아차리기 전에 확답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호통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후작은 낮으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반복적으로 말했다.

“인정하시오! 내가 그것을 풀었소. 운차이 하슬러가 말이오. 66년 만에 풀었지. 이제 다시는 죄 없는 자들이 이 수수께끼에 희생되지 않도록 만들었 소. 바로 내가!”

후작의 최면적인 말들은 혼란에 빠져 있는 데커드 시장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데커드 시장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 그렇군요. 이, 이것이 사기였다니……………

“내가 맞추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기에 휘말려 죽어갔겠지.”

후작의 화법은 교활했다. 그는 밝혀내지 않았다면’이라고 말하는 대신 맞추지 않았다면’이라고 말했다. 무의식중에 자신이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것처럼 생각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데커드 시장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군요. 예, 그렇습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과찬의 말씀.”

후작이라고 해도 이 이상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신스라이프의 재산은 이제 내 것이다.’라는 둥의 말을 해버린다면 혼란에 빠져 있는 유 가족들이라도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자신이 이 문제를 풀어버렸다는 식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증 인이 되어줄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후작은 피로감과 동시에 희열을 느꼈다. 이거야. 이젠 됐어!

그때였다.

“약속된 순간이 돌아왔다!”

후작은 홱 고개를 돌렸다. 군중 한가운데서 터져나온 고함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드는 처절한 것이었다. 궤헤른 역시 재빨리 무기로 손을 가져가며 고함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았다.

주블킨 일레드마는 한 손에 든 디바인 마크를 힘 있게 들어올리며 포효하듯 외쳤다.

“어둠 속에서 더 반짝이는 눈이 그대의 꿈을 보리니!”

이어지는 목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군중 속 곳곳에서 터져나온 목소리가 합창하듯이 주븜킨의 말에 대답했다.

“어둠 속의 꿈이라 해도 그대만의 것은 아니다!”

목소리와 함께 역시 많은 숫자의 손이 군중들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 손에는 전부 똑같은 모양의 디바인 마크가 쥐어져 있었다.

궤헤른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저 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고함을 지른 자들의 손에 손에 들린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고양 이와 꿈의 콜리. 그의 프리스트. 그의 디바인 마크.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지? 약속된 순간이 돌아오다니?

가장 먼저 고함을 지른 주블킨은 그대로 사람들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노인의 몸놀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사납고 날쌘 동작이었다. 주블킨은 사납게 고함을 지를 뿐만 아니라 손에 든 무거운 로드를 인정사정없이 휘둘러 사람들을 물러나게 만들며 달려갔다. 삽시간에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 졌기에 주블킨은 무인지경을 달리듯 달려 계단에 도착했다.

궤헤른은 재빨리 외쳤다.

“가이버, 니크! 검을 뽑아! 사무엘! 미를 맡아! 그러나 명령이 있기까지는 대기하라!”

명령을 마친 궤헤른은 역시 검을 뽑아들며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주블킨의 난폭한 동작 때문에 물러난 사람들이 그의 진 로를 막아서게 된 것이다. 궤헤른은 욕지거리를 뱉어냈지만 사람들은 주블킨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 중간쯤까지 올라갔던 경비 대원들은 주춤주춤하면서도 일단은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주븜킨을 막기 위해 창을 내뻗으며 계단을 다시 내려왔 다. 하지만 주블킨은 계단에 발을 올리자마자 우뚝 멈춰 서서는 두 손에 쥔 로드를 하늘로 번쩍 쳐들어 올리며 외쳤다.

“사라져간 것들로 증인을 삼고, 잃어버린 것들로 대가를 치렀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고, 잊혀진 것들을 부른다! 콜리여, 당신의 지팡이에 게 내린 약속을 기억하소서!”

미친 듯이 부르짖는 주블킨을 사람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말을 끝낸 주블킨은 그대로 손목을 빙글 돌렸다. 한 바퀴 돈 로드를, 주블킨은 한쪽 무릎을 구부리며 맹렬한 기세로 땅에 꽂았다. 크가각!

굵직한 로드와 돌계단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정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느낄 수 있는 충격이 전해져 왔다. 쿠르르 릉!

“어, 으어걱!”

“사람 살려!”

“유피넬이여! 맙소사, 이게 뭐야!”

맙소사, 저런 지팡이 하나로 이런 충격이 생겨난단 말인가? 궤헤른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주블킨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러나 계단 위에 서 있던 후작은 다른 것도 볼 수 있었다.

“저것은……!”

주블킨이 지팡이를 내리꽂자 마치 그의 힘에 의해 갈라지는 것처럼 돌계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쩡! 마치 유리나 얼음장이 깨지는 것처럼 주블킨 이 내리꽂은 지점으로부터 사방으로 금이 퍼져나갔다. 돌계단은 삽시간에 마치 거미줄 같은 잔금들로 뒤덮였다. 쩡! 쩡! 그리고 그 금들은 무서운 속 도로 자라나며 계단 위와 계단 아래로 퍼져나갔다. 쩡! 쩡! 쩡! 계단 가까이에 서 있던 군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뒤에 있는 거대 한 인파는 그대로 완강한 벽이 되어 사람들의 도주를 막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대지를 달리는 금은 쉴 새 없이 퍼져나갔다.

“뭐, 뭐야아!”

“비켜! 비키란 말이야!”

사람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못한 까닭은 너무 많은 군중 때문에 팔을 휘두를 공간도 제대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멀리 뒤쪽에 있는 자들은 무 슨 일인지 잘 보기 위해 앞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해 앞쪽 사람들을 막았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돌계단은 주블킨의 로드가 꽂힌 중심 지점으로부터 무수한 잔금을 따라 돌 조각들로 분열되었다. 끼기깃! 갈라진 돌들이 서로 일어나고 무너지며 마 찰하여 뼈를 긁는 소음을 냈다. 돌조각들이 서로 쏠리며, 계단은 마치 너무 오래 가열한 도자기처럼 박살났다. 콰가가각!

주블킨은 얼굴을 향해 직격으로 날아오는 돌 조각들 앞에서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튀어 오른 돌 조각이 어깨를 쳤고 날아가던 파편이 볼을 할퀴어 붉은 피를 흩날리게 했지만, 주블킨은 한쪽 무릎을 꿇고 로드를 단단히 움켜쥔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돌 조각들은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운차이는 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네리아는 벌써 운차이의 팔에 매달린 채 부들부들 떨며 울음을 터뜨릴 듯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 우, 운, 운차이, 저, 저건, 저거 뭐야? 뭐야! 뭐냐고!”

운차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주블킨이 내리꽂은 로드를 중심점으로 해서 터져나온 돌 조각들은 폭발의 정점에서 도로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중력을 무시하며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회전했다. 마치 회오리바람 같았다. 게다가 퍼져나가는 금들을 따라 치솟아 오르는 돌멩이는 더 많아졌고 돌 조각과 파편들, 흙먼지로 이루어진 회오리의 크기도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는 주블킨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 다. 남보다 월등한 시각을 가진 운차이는 주블킨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뭐하는 짓이지?

할슈타일 후작은 검을 뽑았다.

검과 검집이 부딪치며 무서운 마찰음을 울렸다. 데커드 시장은 경악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후작은 검을 뽑아들고는 그대로 계단 아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을 피해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경비 대원을 옆으로 밀어버리며 후작은 고함을 질렀다.

“이놈! 무슨 짓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 짓을 당장 멈춰!”

주블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블킨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치솟아 오르는 돌 조각들은 이제 그 끝이 보이지 않 을 정도로 솟아올랐고, 턴빌 시 전체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 앉아 있는 주블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속삭이고 있었다. 후 작은 더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아아아!”

그러나 후작은 회오리바람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어느새 계단 전체가 무수한 돌 조각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것이 이제는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발 아래가 흔들려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후작은 허리를 낮추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후작이 다시 한번 몸을 바로잡아 주블킨에게 달려들려고 했을 때였다. 주블킨은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자마자 무서운 소리가 울려퍼 졌다. 콰광쾅쾅쾅!

후작은 이번에는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정원에서는 사람들이 넘어지며 숨 막히는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동안에도 땅은 쉴 새 없이 흔들렸 다. 쿠르르릉! 사람들 가장자리에 서 있던 운차이 일행은 간신히 깔리는 지경은 면했지만 대신 날뛰는 말들에게 짓밟힐 뻔했다.

“이힝힝힝힝!”

“휘이…………, 휘르힝힝!”

“이런 제기랄! 가만있어! 앰뷸런트 제일! 으큭! 가만히 있으라고, 네리아!”

두 번째는 말이 아니다. 운차이는 말을 말려야 될지 자신의 목을 휘감고 날뛰는 네리아를 말려야 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쳉은 쓰러지려는 그란 을 붙잡더니 믿을 수 없는 힘으로 그를 끌어올렸다. 그란은 거의 떠밀려지듯이 똑바로 서고는 한참 동안 숨을 가누며 아무 말도 못한 채 쳉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쳉은 그란을 보는 대신 저 멀리 주블킨을 바라보았다.

계단에 주저앉았던 할슈타일 후작 역시 일어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주블킨을 쏘아보고 있었다.

주블킨의 발 아래로 땅이 함몰되어 있었다. 둥근 우물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우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을 뿐만 아니라 30큐빗은 될 것 같은 지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블킨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블킨은 손에 로드를 든 채 구멍 중앙의 허공에 고요히 떠 있었다.

주블킨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떠 있는 그를 보며 경악하고 있는 후작에게도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주블킨은 구멍 중앙의 허공에 뜬 채 구멍 아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 얼굴에 가득한 표정은 초조함이었다. 주블킨 일레 드마는 초조한 표정으로 바닥도 보이지 않는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주블킨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덜덜 떨면서 로드를 움켜쥐었다. 허공에 떠 있는 자가 로드에 의지하려 드는 것은 몹시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후작은 웃을 수 없었다. 주블킨은 저 땅 아래를 바라보며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돌아왔다…………, 돌아왔어!”

주블킨은 공중을 떠가면서 뒤로 조금 물러났다. 후작은 주저앉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무수히 되뇌었다. 돌아왔다고? 뭐가, 뭐가 말인가? 구멍 아래쪽으로부터 천천히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계단참 위에 납작 엎드린 채 온갖 신의 이름을 주워섬기던 발레드 신스라이프는 기겁하고 말았다. 땅에 뚫린 거대한 무저갱에서 솟아오른 사람은 흰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얀 머리, 하얀 수염, 몹시도 근엄해 보이는 풍채를 가진 노인이었다. 발레드는 저 완고해 보이는 얼굴을 신스라이프 저택의 서 재에 걸려 있는 초상화에서 무수히 보았다. 발레드는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큰아・・・・・・ 버님?”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지만 이성을 잃지는 않았던 할슈타일 후작의 귀에 발레드 신스라이프의 목소리는 여지없이 들어왔다.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의 입가를 맴돌고 있는 것은 한두 가지 감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증오였다. 할슈타일 후 작은 증오 어린 시선으로 무저갱으로부터 솟아오른 늙은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돌아왔느냐…………. 신스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