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4

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4


4

“이이 검검을 받받을을 수수 있있겠겠느느냐냐!”

데스나이트는 호기로운 동작으로 공간을 끊어내렸다. 갈라지는 공기들이 절절한 비명을 올리는 가운데 똑바로 떨어지는 검은 드래곤 솔저의 오른쪽 어깨를 치고 내려왔다. 드래곤 솔저는 무표정했다. 어깨 너머에서 튀어나온 그의 검이 데스나이트의 검을 허공에서 비끄러매었다. 콰가각! 거대한 두 개의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비산했다. 데스나이트는 신음을 토하며 맞서기에 들어섰으나, 드래곤 솔저에게는 검을 마주대고 용쓰는 취미가 없었다. 드래곤 솔저의 왼쪽 어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데스나이트는 경악했다.

“무무슨슨 짓짓이이……………!”

드래곤 솔저의 타워 실드가 허공을 갈랐다. 날붙이는 아니지만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중량이 실린 타워 실드의 날(?)이 수평선을 긋자 온 몸을 울리게 하는 충격음이 퍼졌다. 쾅깡깡! 병사들이 백병전에서 삽이나 손도끼 휘두르는 식이다. 무지스러운 공격에 명중당한 데스나이트의 투구 는 거의 박살날 듯 우그러지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독한 연기와 포효 속에 무너지는 데스나이트를 보며 드래곤 솔저는 희박한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 “이 방패를 받을 수 있겠느냐.”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드래곤 솔저가 인간 병사들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해내고 있었다.

“흐이아아압!”

비명과 같은 기합 소리. 드래곤 솔저가 내지른 검끝은 마상의 데스나이트의 복부를 꿰뚫었다. 앞으로 무너지는 데스나이트의 멱살을 왼손으로 거머 쥔 드래곤 솔저는 데스나이트의 거대한 갑주를 머리 너머로 집어던졌다. 까랑깡깡까랑! 갑주들의 부품이 제멋대로 해체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 다. 그러나 드래곤 솔저는 자신의 업적에 도취되는 대신 지금껏 데스나이트가 타고 있던 괴수의 고삐를 잡아챘다. 하늘에서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는 목이 터져라 웃었다.

“저것이 용아병인가! 승용물의 외양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공의 명예 기사로라도 받아들여야겠군!”

그레이의 말 그대로였다. 드래곤 솔저는 그 위에 올라타서 전투력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눈이 다섯 개든 꼬리 대신 뱀이 달렸든 아무 신경도 안 쓴다 는 태도로 데스나이트의 괴수에 올라타려 했다. 하지만 괴수는 앞다리 세 개로 하늘을 찌를 듯이 거칠게 반항했다.

“갸다다다! 갸다다다!”

하마터면 세 개의 앞다리에 밟혀죽을 뻔했지만, 드래곤 솔저는 타워 실드로 간신히 괴수의 공격을 받아냈다. 뒤로 넘어지지 않은 것은 묘기. 타워 실 드가 사라진 곳에서 나타난 얼굴에는 투명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드래곤 솔저는 괴수의 따귀를 올려붙이겠다고 결심했다. 타워 실드로, 백핸드 풀스 윙으로, 꽈광! 딤라이트는 헛바람을 삼켰다.

괴수의 입장에서라면 떨어지는 도개교에 깔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1×2큐빗 넓이의 철판으로 맞은 것이다. 거의 모로 쓰러질 뻔한 괴수가 제정신 을 차리기 위해 주춤거리는 동안, 드래곤 솔저는 날렵하게 몸을 날려 조금 전까지 데스나이트가 앉아 있던 괴수의 등에 올라탔다. 월등히 가벼운 기 수의 몸무게에 괴수는 다시 심술을 부리려 했지만, 드래곤 솔저는 괴수의 뒤통수를 거머쥐며 나지막하게 호통을 쳤다.

“일자(이신 왕으로부터 너 빌어먹을 야수에게. ‘내게 복종하라!.”

무스타파는 하마터면 아이라 위에서 뛰어내리며 성은이 망극하다고 외칠 뻔했다. 일스 대공 앞에 부복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박력이었다. 일자왕(一者王)인 드래곤의 위명을 빌린 드래곤 솔저의 호통에는 야수와 기사 양자를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괴수는 침착해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공포감에 빠져버린 듯했다. 갈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솟아나 있던 지느러미와 가시들이 푸르르 떨렸다. 드래곤 솔저는 괴수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 고 괴수는 포효하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다리 모두가 허공에 뜬 것처럼 보이는 질주였다.

“갸다다다닷!”

괴수는 공포에 짓눌려 달리기 시작했고 드래곤 솔저는 타워 실드를 집어던진 다음 두 손으로 검을 휘저어 댔다. 달린다기보다 난동을 부린다에 가깝 게 움직이는 일곱 개의 다리와 그 위에서 춤추는 검날은 그 전부가 가공할 흉기들이었다. 흩뿌려지는 드래곤 솔저의 검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상공에서 바라보던 무스타파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구분하지 않아. 서로를 죽이는 저들의 의식은 유보된 것이지 취소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운 손속은 드래곤 솔저의 완력과 괴수의 미친 듯한 질주와 결합되어 그가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전쟁터에 대로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딤라이트는 무거운 한숨을 토하며 헐스루인을 아래로 몰아갔다. 옆으로 늘어뜨려진 그의 활에는 이미 화살이 걸려 있고 또 다른 화살 하나가 입에 물려 있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하늘에서의 저격은 무서웠다. 빗방울처럼 쏘아진 화살은 어김없이 데스나이트들의 갑주 틈 사이, 혹은 그 투구 속으로 파고들었다. 딤라이트는 또 하나의 화살을 꺼내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이의 고민…………,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무스타파! 뒤를 따라라! 경비 대원들이 포위되겠다!”

그레이는 명령들을 뒤로 어지럽게 던져놓으며 아래로 날아들었다. 한 순간에 전투 상황을 판단하는 기사의 눈에 경비 대원들의 배후로 접근해 들어 가는 데스나이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던 것이다. 훈련된 전투마가 그러하듯, 훈련된 킨 크라이는 야생의 그리폰은 취하지 않는 자세로 마치 매처럼 떨어져내렸다. 비껴든 그레이의 롱 소드가 섬뜩한 빛을 뿜었다.

“이이이이…… 하!”

그레이는 데스나이트들의 상공을 면도질하듯 스쳐 지나갔다. 데스나이트들은 공중을 향해 파이크를 세웠지만, 그런 대공방어 자세를 유지하기에는 전투 상황이 지나치게 난투적이었다. 로터스 경비 대장은 공포와 흥분 양자에 모두 몸을 맡긴 채 파이크를 세워든 데스나이트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 었다. 데스나이트는 저주의 고함을 내지르며 세워들었던 파이크를 그대로 몽둥이 후려치듯 아래로 휘둘렀다.

“데데스스나나이이트트 앞앞에에 두두 발발로로 서서는는 것것으으로로 이이미미 건건방방지지다다! 쓰쓰러러져져 개개처처럼럼 기기어어라라!”

파이크의 창대가 로터스 경비 대장의 어깨를 파고들듯이 명중했다. 와드득. 한 순간 로터스 경비 대장은 옆으로 휘청했다. 쇄골이 부러졌음에도 그 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눈앞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다. 눈이 뒤집힌 채로, 그러나 로터스 경비 대장은 그래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 치 쓰러지려는 사람처럼 휘청거리면서도 로터스 경비 대장은 왼손으로 창대에 매달리며 검을 쥔 오른손을 옆구리에 붙인 채 온몸으로 데스나이트에 게 부딪쳐 들어갔다.

“죽음을…………, 넘어서!”

쇠붙이가 긁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데스나이트의 등 뒤로 로터스의 검이 비죽하게 튀어나왔다. 데스나이트의 손에서 파이크가 떨어져내렸 다. 절그렁. 데스나이트는 두 손을 힘겹게 들어올려 로터스의 어깨를 짚었지만 로터스는 이미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데스나이트에게 안겨 있었 다.

갑자기 데스나이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투구가 뒤로 굴러 떨어지며 곧 이어 갑옷 전체가 폭발하듯 해체되었다. 로터스 경비 대장은 무너지는 갑 옷더미와 함께 쓰러졌다. 땅에 얼굴을 박으면서도 로터스 경비 대장은 히죽 웃었다.

난전중이라 지나치게 강력한 마법은 쓸 수 없던 솔로처는 몸 주위에 빛나는 화살들을 띄워둔 채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솔로처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매직 미사일들은 솔로처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대로 날아가 데스나이트들을 명중시켰다. 솔로처는 그런 묘기를 부리면서도 아직 정신적 여유가 많다는 듯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경비 대원들을 독려하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무스타파! 왼쪽으로, 기수를 부탁하오!”

“저놈의 깃발을 켄턴에 바치겠소!”

무스타파는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으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아이라를 아래로 몰아 내려갔다. 거대한 와이번의 그림자가 전장에 드리워지 자 전장의 하늘 위로 춤추던 검은 안개마저도 날개바람에 휘말려 갈라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무스타파는 해를 등지며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의 목 표가 된 데스나이트의 기수는 쏟아지는 햇살에서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며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무스타파의 랜스가 데스나이트에게 명중하기 직 전, 뒤에서 뛰쳐들어 온 드래곤 솔저가 당황하고 있는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쪼개놓았다. 무스타파는 당황하여 아이라를 상승시키며 외쳤다. “제길, 그건 내 거야!”

드래곤 솔저는 피식 웃고는 깃발을 주워들며 상공을 향해 일갈했다.

“당신은 천공의 ‘기사’이고 이놈은 데스나이트’ 일지 몰라도, 나는 드래곤 ‘솔저’요. 기사도를 말할 생각이라면 당신네들끼리만 나누시지.”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들! 좋아, 모두 쓰러뜨려라!”

“그렇잖아도 그럴 참이었소.”

드래곤 솔저는 그렇게 말하며 주워든 깃발을 옆으로 휘둘렀다. 파르르륵! 사악한 문양이 깃든 깃발은 진저리를 쳤고 깃대는 그대로 창이 되어 옆을 달리고 있던 데스나이트의 다리를 걸었다. 데스나이트는 속절없이 쓰러졌고 드래곤 솔저는 쓰러진 데스나이트의 등으로 뛰어올라 검을 박아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스타파는 넌덜머리를 냈다. 그는 위로 솟아오르며 조금 먼 하늘에 떠 있던 딤라이트를 향해 고함질렀다.

“끔찍한 놈들이군! 살해밖에 모르는 전투 인형 같은 놈들이야.”

딤라이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무스타파를 바라보는 딤라이트의 얼굴은 조금 희게 변해 있었다. 무스타파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딤라이트! 이봐, 괜찮은가?”

“아아, 괘, 괜찮네.”

“정신차려! 비록 난투중이라지만 언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 데스나이트잖아!”

“그래. 고맙네.”

고맙다고? 무스타파는 더욱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어 딤라이트를 바라보았지만 딤라이트는 이미 활을 단단히 쥐며 헐스루인을 몰아가고 있었다. 무스타파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아이라를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어쨌든 장애물이 없다는 점은 쏘는 쪽에서도 마찬가지인 만큼, 규칙적인 비행은 위 험하다.

딤라이트 역시 거의 본능적으로 헐스루인을 복잡한 궤도로 몰아가고 있었다. 전통에서 화살을 뽑아 시위를 거는 손길에는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 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까지 수많은 말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이의 고민이오.’

‘내게 복종하라!’

‘나는 여기서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

‘전투 인형 같은 놈들이야!’

시위를 놓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줄이 딤라이트의 볼을 스쳤다. 깜짝 놀란 딤라이트는 무의식중에 볼을 쓸어만졌다. 진득한 느낌. 피인가? 이런 멍청한 실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발사될 때 이미 흔들렸던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딤라이트는 화살의 궤적을 쫓는 대신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자신의 피가 벌겋게 묻어 있었다.

피도 흘리나. 죽은 몸이라는 것을 자꾸 잊게 만드는군.

“퇴퇴각각한한다다!”

분노 때문에 잔뜩 떨리는 고함 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르자 가장 바깥쪽에 있던 데스나이트들부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드래곤 솔저들은 한 놈도 놓 아보낼 수 없다는 듯이 기승스럽게 데스나이트들의 등을 유린했지만 데스나이트들은 거칠게 몸을 빼내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솔로처는 학수고대하 던 순간이 다가옴을 깨닫고는 크게 고함질렀다.

“모두 멈추시오!”

고함을 지르는 솔로처의 두 손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경비 대원들은 외경심으로, 그리고 드래곤 솔저들은 그들만의 전투 감각에 따라 제 자리에 멈춰 섰다. 데스나이트가 전장에서 빠져나와 분리가 이루어진 순간, 솔로처는 벽력처럼 캐스팅했다.

“크리에이트 워터!”

“갸아아닷!”

첫 번째 괴수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다. 괴수 위에 올라타고 있던 데스나이트는 땅에 호되게 부딪히는 대신 물방울을 거칠게 튕겨 올리며 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데스나이트들과 그 괴수들이 갑자기 수면으로 변한 땅 위에서 허둥거리며 쓰러지고 아래로 잠겨들었다. 곳곳 에서 물보라가 솟아오르며 데스나이트들의 포효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솔로처는 데스나이트들을 수장시킬 생각은 없었다. 바라보고 있던 자들이 놀람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솔로처는 이미 다음 스펠을 캐스트 하고 있었다.

“미티어 스웜!”

그레이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런, 제기랄! 모두 뒤로 물러나!”

경비대원들과 드래곤 솔저들, 그리고 천공의 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몸을 돌렸다. 검은 안개 사이로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는 느낌이 잠시, 빗줄 기 같은 광선들이 조금 전까지 땅이었던 수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보다 높은 하늘로 솟아오르려 애쓰면서도 동시에 땅을 향해 고함 질렀다.

“엎드려! 물방울에 맞아죽는다!”

경비대원들은 질겁하며 몸을 날렸고 드래곤 솔저들은 타워 실드를 세우며 충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무거운 갑주 때문에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던 데 스나이트들은 무서운 고함 소리를 내질렀다.

“솔솔로로처처어어어어!”

그리고 첫 번째 불덩어리가 수면에 작렬했다.

퍼벙펑펑펑! 물기둥이 거세게 솟아올랐다. 물기둥은 하늘로 솟아올라 검은 안개를 꿰뚫었고, 가공할 폭발에 의해 경이적인 초속을 가지게 된 물방울 들이 아우성을 내지르며 전장 전체를 휩쓸어 갔다. 수천 개의 대거가 튀어나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고 있던 로터스는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귓가를 스친 물방울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폭발의 중심에 있던 데스나이트들은 직격에 맞아 가루가 되었다. 그들의 갑주는 파편이 되어 물보라와 함께 높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던 위치의 데스나이트들도 물을 타고 전달된 충격파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충격파는 데스나이트들의 갑주를 통과하여 그 속에 있는 그들 의 저주받은 몸을 산산조각냈다. 날아다니는 물방울들과 갑주의 파편들은 서로 부딪히고 땅을 휩쓸며 지독한 충격음을 울렸다. 수천 개의 망치가 동 시에 모루를 때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갑주의 파편들은 물방울들과 함께 땅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꽈깡깡! 경비 대원들은 물 방울과 쇳조각들의 폭격 속에 머리를 감싸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기절해 버린 경비 대원들은 주위로부터 엄청난 부러움을 받았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손에 상자를 든 채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시몬슬은 신음을 토했다.

“사조님, 사조님. 저는 이제 죽을 때까지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건 너무하다고요.”

물기둥들은 사그라지고, 이제 허옇게 솟아오른 수증기가 검은 안개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폭발의 충격에 의해 갈라지고 있던 검은 안개는 거세게 솟아오르는 흰 수증기에 휘말려 천천히 희미해졌다. 경비 대원들은 물방울과 쇳조각의 폭풍이 아닌 다른 것이 자신의 몸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 고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들의 등으로 쏟아져내리는 것은 따가운 오후의 햇살이었다.

경비대원들은 하나 둘 넋나간 사람처럼 일어났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음에도 그들의 몸에는 하얗게 소름이 돋았고 많은 경비 대원들이 부 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햇살은 그들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충격으로 갈라진 땅과 흩어진 쇳조각, 그리고 물방울과 파편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파헤쳐진 풀들과 흙덩이. 경비 대원들은 왠지 이 세상의 모습 같지 않은 그 광경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그때 날개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대원들은 힘없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안개가 사라졌기에 햇빛은 곧장 떨어졌고, 경비 대원들은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햇살을 가렸다. 천공의 기사들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지팡이에 올라탄 솔로처가 햇살을 등진 채 검은 그림자가 되어 날아 내려 왔다.

솔로처는 약간 피로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땅에 내려선 솔로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경비 대원들의 눈빛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함성은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켄턴! 솔로처!”


“어쩌실 생각입니까.”

신차이는 치터리의 질문에 얼굴을 돌렸다. 다른 모든 뱃사람들과 육전 대원들마저도 멀리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치터리만은 굳은 얼굴로 신차이를 보았다. 신차이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돌아가서 보고해야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신차이 선장.”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나 또한 다른 이들처럼, 저것을 보고 싶습니다.”

치터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배에 있는 모든 이들 중에서 치터리만은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돌봐주는 신도 없이 완벽한 자신을 구 가하는 위대한 생명체의 비행은 치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치터리는 무의식중에 닐림의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멀어져가는 지골레이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태양이 지골레이드의 푸른 날개를 붉게 물들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묘한 보라색과 황금빛을 뿜어내게 했다. 지골레이드는 전설처럼 날개 를 펼치고 추억처럼 멀어져가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을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해.

그리고 뱃전에서는 뱃사람들이, 마치 그 모양대로 조각해 놓은 것처럼 우뚝우뚝 늘어서서는 한없는 경배로 드래곤의 비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눈물로 두 볼을 적시고 있는 뱃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냉혹한 선원들마저도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떨구었다.

마지막 명멸이 있고 나서, 블루 드래곤의 모습은 이제 수평선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블루 드래곤이 수평선을 넘어 날아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왕자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는 세계의 틈을 통해 빠져나간 것이리라.

낮은 속삭임들이 잔뜩 억제되었던 호흡처럼 들려왔다.

“뭔가, 사람이 봐선 안 될 것을 본 것 같다.”

“적어도 정상적인 뱃놈이라면 보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을…………….”

“제기랄…………… 이번에야말로 뱃놈 생활 끝이다. 마누라가 우라지게 보고 싶은데.”

“내 아들은 이제 여덟 살이야………….”

치터리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단순히 그들 앞에 서는 것만으로 그들 인간과 드래곤의 모습을 대비시켜 인간의 무릎을 꺾어버린 지골레이드에게 증오를 느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선원들과 그를 덮친 것이다. 지골레이드에 대해 이를 갈면서도 치터리는 신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고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신차이 선장이 말했다.

“이시도 군!”

펑펑 울고 있던 이시도는 어쩔 수 없이, 무례한 짓인 줄 알면서도 코를 팽 푼 다음에야 선장에게 얼굴을 돌릴 수 있었다. 신차이는 씁쓸하게 웃고는 말했다.

“정선한다. 저녁 식사 준비.”

이시도는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신차이를 바라보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저, 저녁 식사요?”

오후이긴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다. 신차이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그 외에 무엇을 시킬 수 있겠나. 내일은 졸란으로 돌아가니 저녁 식사 후 푹 쉬어두도록.”

“아, 예. 갑판장! 돛을 접어라. 정선!”

“정선!”

갑판장의 복창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느리면서도 정확한 몸놀림으로 각자의 자리를 향해 달려갔다. 고요하던 갑판 위에 쿵쾅거리는 발 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활기가 돌아왔다. 선원들의 손놀림도 조금씩 빨라지며 레드 서펀트 호는 정선에 들어갔다. 닻줄이 풀리며 요란한 소리가 울 려퍼졌다. 치터리는 신차이 선장의 등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서, 선장님.”

“프리스트 치터리, 선장실로 오시오. 육전 대원들도.”

“아, 예.”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은 주승강구로 사라지는 신차이를 따라 배 아래로 내려갔다. 신차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선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선장실에 도착할 때까지 신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라 선장실에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신차이 선장은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하는 대신 파이프를 집었다.

신차이 선장이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넣고 불을 붙일 동안 치터리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모금을 빨아들인 신차이 선장은 선장실 천장을 향해 조용 히 담배 연기를 날려보낸 다음에야 말을 시작했다.

“항해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소.”

“예?”

“여러분들의 조력에 감사합니다. 아까 들으셨지만, 내일 본함은 졸란으로 회항합니다.”

치터리는 낭패한 표정으로 육전 대원들을 돌아보았지만 육전 대원들은 아무 표정도 없이 신차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터리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다 음 말했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다니요? 내 임무는 끝났습니다.”

“예?”

신차이는 선장실의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바라보았다. 신차이의 파이프에서 솟아오른 연기는 햇빛 속에 하얗게 꿈틀거렸다.

“본함의 목적은 닐림의 종단의 의뢰에 따라 동북 항로의 괴사건을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닐림의 대표이신 치터리 무스 씨는 이미 모든 것을 보셨 고 지골레이드의 설명도 들으셔서 사태를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때 육전 대원들 중 하나가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 전 신차이 선장은 재빨리 손을 들어올려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니,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육전대 쪽의 목적은 내가 아는 바로는 이 조사 활동의 보호였습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렇긴 하오만, 선장님, 우리들은…….”

“무의미합니다.”

“예?”

신차이는 말을 잇기에 앞서 손을 들어올려 간단한 손짓을 해보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지만 치터리와 육전 대원들은 노예가 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예들을 모두 내보낸 신차이 선장은 나직하게 말했다.

“일스 침략이겠지요. 그렇잖습니까.”

육전 대원들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신차이는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동안 이 배의 항해 방식을 관찰하며 얼마나 많은 자료를 얻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일스 침략 같은 것은 무의미합니다. 바이서스에서 는 강화를 제안한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물론 결정은 높은 분들이 하겠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제안합니다. 이 강화 제 안은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보고하기 바랍니다.”

“이유는?”

“치터리 무스 씨는 닐림의 종단을 대표하고, 당신들은 자이펀 군부를 대표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선주 연합을 대표합니다. 선주 연합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자이펀 군부가 이 강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선주 연합은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수긍할 수 있는 이유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런 무의미한 희생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지골레이드를 격퇴할 수 있습니까?”

육전 대원들은 다시 불편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지골레이드는 그 이름만으로도 자이펀 군인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존재였다. 하물며 두 눈 으로 직접 그 모습을 본 다음에야. 신차이는 매서운 눈으로 육전 대원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캇셀프라임과 지골레이드가 전선에서 어떤 공포의 존재였는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땅도 아닌 바다 위에서 드래곤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강화 제안이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고 싶습니다. 바이서스는 항로를 봉쇄하여 우리들에게 패 전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만………….”

“아무것도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잊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여러분들의 상관에게 전달하기만을 바랍니다. 그것 은 여러분들의 의무겠지요. 어쨌든 내 임무는 끝났고, 나는 돌아갈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육전 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치터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육전 대원들을 바라보았지만 육전 대원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선장실 을 나갔다. 신차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치터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습니까?”

치터리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래서 치터리는 힘겹게 입을 열었 다.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장님.”

“별말씀을.”

“당신은 선주 연합에 이 사실을 보고할 테지요?”

“항해 일지는 분명하게 적을 테지요.”

치터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선주 연합에서 이 제안을 해온 것을 알게 된다면 자이펀은 더욱 강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치터리는 돌이키 기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다고 느꼈다.

“에, 여러 가지 점에 대해 감사를…….”

“돌아가 쉬십시오. 치터리.”

“아, 저.”

“놀라운 오후였습니다. 나는 태풍을 몇 개 통과한 것보다 더 피곤합니다.”

치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치터리는 조용히 일어섰다. 신차이는 그를 따라서 몸을 일으켰고 둘은 느릿한 동작으로 서로를 잠깐 포 옹했다.

몸을 돌려 선장실의 문을 나서기 직전, 치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신차이는 말없이 그 등을 바라보았다. 치터리는 신차이에게 등을 향한 채 말했다.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쩐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더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도 없을 것 같군요.”

신차이는 조용히 치터리의 말을 기다릴 뿐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치터리는 입술을 적시고 나서 힘들게 말했다.

“당신의 결투 말입니다.”

“예.”

“운차이는……, 운차이 발탄은 살아 있습니다.”


“머맨과…………, 인간의 혼혈이라고요?”

“그런 불측한 소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머맨과 인간 사이에 자손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칼은 팔짱을 꽉 낀 채로 오른손을 들어 콧망울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그의 오른손은 다시 내려와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리 는 이야기를 처음 시작하던 때와 똑같은 모양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하탄의 궁궐에 있을 때의 장엄한 옷 대신 바이서스의 평범 한 옷을 걸치고 앉아 있었어도, 알리 주위에는 사막의 근엄함이 감도는 듯했다.

칼의 오른손이 이제는 허공으로 올라갔다. 칼은 허공에 있는 무엇인가를 만질 듯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저, 그 어머니 되는 여자분이 돌아왔을 때 말입니다. 흠흠.”

알리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의 손가락이 더욱 어지럽게 움직였다.

“에, 저, 그러니까, 뭐 확인된 바가 없습니까? 그러니까 머맨에게 붙잡혀갔을 때, 에, 그러니까 당신들은 여성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음, 미 덕으로 여긴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아, 그건 예삿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분은 머맨에게, 에…………, 그러니까 의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알리의 무표정은 그대로였고 불쌍한 칼은 이제 손을 입에 집어넣을 지경이었다. 알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성관계가 있었는지를 묻고 싶은 게냐.”

칼은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의외로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렇습니까?”

“물론, 모른다.”

“어, 당신이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런 소문에 대해 열심히 조사하고 다닐 만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있었다 면 여성 본인이 뭐라고 항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머맨에게 잡혀간 것은 확실하지만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다.’라든지.” 알리는 눈살을 꿈틀거렸다.

“여자가?”

순간 칼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관습의 소유자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젠장. 저 나라에서는 여자들은 자기변명도 못하는 모양이 군.

“그럼 뭡니까? 아무도 묻지도 않았고, 본인도 아무 설명을 안 했고? 그 여자가 머맨과 나란히 앉아 밤바다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했는지 아니면 그보 다 더 진전된 상황을 즐겼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칼은 항복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신차이는 사람입니까?”

“뭐?”

“사람처럼 생겼습니까?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보이거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알리는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했다.

“너는 사람이냐?”

“무슨 뜻인지?”

“내게는 네가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낮의 햇살 아래 너를 본 적이 없으니 네가 뱀파이어일지 모른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혹 도플갱어라는 의심도 가능할지 모르지. 어쩌면 네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거인일지도 모르잖느냐.”

칼은 킬킬거렸지만 알리의 얼굴에는 웃음기 비슷한 것도 없었다. 칼은 웃음을 멈추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농담을 할 때는 좀 웃어라, 이 사막 촌뜨기 녀석아. 알리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말했다.

“본 것만 가지고 진실처럼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이 본 것, 아는 것만 가지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말했듯이 신차이 발탄은 이제리스 해협의 서펀트를 거꾸러뜨린 일이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지독하게 어려운,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하프 머맨의 증거인지 노련하고 사나운 인간 뱃사람의 증거인지는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그 외에는?”

“없다.”

“사람입니까? 알리 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다.”

칼은 이제 두 손 모두를 사용해서 심사를 표현했다. 즉 양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버린 것이다.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알리 는 나직하게 말했다.

“왜지.”

“머리 꼬리가 남아 있어야 쇠고기인지 말고기인지 압니다.”

“왜 신차이 발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느냐. 게다가 너의 관심은 조금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뀐다고요?”

“처음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너의 관심은 그가 사람인지 하프 머맨인지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군. 나 로선 알 도리조차 없는 그 어머니의 일까지 질문하는 것은 네가 거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 아니겠느냐.”

“가슴이 서늘한데요? 하하. 바로 보셨습니다.”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신기한 일이니까 호기심이 동해서.”

알리는 잠시 칼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없다. 일방적인 질문만 해서는 내게서 좋은 정보를 받아내기는 어려울 텐데.”

“알지만, 안 됩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인가. 모르겠군. 놀라운 전설을 가지고 있는 자이긴 하지만 결국 뱃사람에 불과한 자 아니던가. 게다가 자유 무역선의 선장이 니 너나 바이서스에 어떤 도움이 될 소지를 가지지도 못한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렵군.”

칼은 빙긋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길게 기대 배 위에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고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알리의 말 그대로다. 원래는 지골레이드와 만나게 될 인간에 대한 관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칼의 관심은 신차이의 정체에 집중되어 있었다.

머맨과 인간의 혼혈이라. 머맨은 바다. 바다는 갈매기와 희구의 그림 오세니아. 인간은 땅. 땅은 대지와 회상의 시무니안. 희구는 미래로 향하는 희 망이고 회상은 과거로 향하는 상념이다.

하프 머맨은, 결국 과거로 향하는 흐름과 미래로 향하는 흐름의 교차점이 될 수 있다. 칼은 그것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정답을 알아야 한다.

칼은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는 안 돼. 하지만, 하지만…………….

그 정답을 찾아내서 숨겨야 한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경비 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이 들어섰다. 조나단은 알리의 모습을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처럼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칼 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돌아가서 쉬셔도 좋습니다. 알리 씨.”

알리는 잠시 할말이 남았다는 듯이 칼의 얼굴을 보았지만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칼은 그것이 알리가 의자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보여주는 동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와, 대단하군.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는걸. 알리는 조나단의 옆을 지나쳐 문을 나섰다. 문 밖에는 그를 감방으로 안내할 궁성 수비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알리가 나가고 나자 조나단은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칼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테이블에 앉았다. 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불편해 보이시는군요, 조나단 님?”

“불편하오. 당신은 조심이라는 것을 모르오? 그렇잖아도 그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찾아온 거요.”

칼은 꾸중을 얌전히 듣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보던 조나단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딱딱한 어조로 말하려던 결심도 잊어버렸다.

“이보시오. 궁성 수비대장인 내 입장이 뭐가 되는 거요? 내 허락도 없이 죄수를 함부로 궁성 안까지 끌어들이다니.”

“하하. 알리는 원래 궁성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조나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지하 감옥은 궁성 임펠리아의 지하에 있으므로 알리는 궁성 안에 있다는 칼의 말은 틀리지 않 았다. 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조나단 씨에게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자리에 안 계시더군요.”

조나단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빛의 탑에 잠시 다녀왔소. 솔로처 사조님의 일 때문에 의논할 일도 좀 있고.”

“아아, 그렇습니까.”

칼은 그것으로 멈추고는 마법사들의 일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조나단은 그 태도에 만족하며 말했다.

“무엇이든 한도를 넘어서는 좋지 않은 법입니다, 칼, 당신의 순수한 의도를 백안시하는 무리는 아직도 남아 있소. 나야 당신이 오로지 이 나라를 위 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자이펀의 포로와도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소.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오. 어떤 자들은 당신이 적국의 포로와 내통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행동에 유의하겠습니다.”

칼은 완전히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서 조나단은 꺼내려고 마음먹었던 말의 절반만 꺼내고는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낭보가 있소.”

“낭보요? 요즘은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겁부터 나는군요.”

조나단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일 기억하시오? 샌슨 군이 켄턴에서 받아온 부탁. 그중 솔로처의 부탁은 처리되었소. 시몬슬이 켄턴으로 출발했지.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잖 소?”

“예? 그럼!”

칼은 테이블을 뛰어넘어 조나단을 끌어안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말했다. 조나단은 마치 자신이 애써서 그렇게 된 것처럼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조금 전 일스로부터 전령이 왔습니다. 장미의 기사들이 출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오래 전, 300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 아샤스여! 오렘이여! 잘되었군요. 정말 잘되었군요!”

기뻐하는 칼의 모습을 보며 조나단 역시 즐겁게 말했다.

“그래요. 이제는 켄턴 시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소. 당신도 그랬겠지만, 그 동안 나도 정말 괴로웠소.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아무 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소. 국왕 전하께서도 몹시 괴로워하고 계셨소.”

“예. 기뻐할 일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빨리 보내올 줄은 몰랐군요.”

“일스 대공께서는 300년 전의 수하가 보내온 충성의 서약에 퍽 감동한 모양이오. 하긴 그런 말에 감동하지 않을 자 어디 있겠습니까. 전령의 말에 의하면 대공께서는 딤라이트 경의 말에 눈물을 보였다 하더군요. 그리고 저스티스 기사 단원들 역시 그들의 영웅이자 전설인 선배의 말에 격렬한 감 동을 표시했던 모양이오. 대공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면 기사단 단독으로라도 비공식적으로 원정을 불사할 분위기였다는 말이 다 들리더군요.”

칼은 ‘당연하지’라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칼은 자크의 도움으로 일스 기사단 전체에 천공의 기사들의 부활과 그 전갈에 대한 소문이 퍼지도록 공작했던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저스티스 기사단은 역시 기사도의 정화 같은 존재들이군요! 감격스럽습니다.”

감탄하는 칼의 얼굴을 보던 조나단은 그를 더 기쁘게 해주고 싶어 좀이 쑤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조금만 기다리시오. 전령이 가져온 국서의 사본을 가져오겠소. 지금쯤이면 사본은 다 만들어졌을 거요. 내 빨리 다녀오리다.”

그리고 조나단은 칼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벌써 일어나서는 문을 열고 나섰다. 칼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나단이 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기 나름대로 이 상황에 대해 기뻐하기 시작했다. 즉,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리며 피로감이 그득한 얼굴로 안온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레이의 출병 요청이 대공의 귀에만 들어가서는 일이 안 된다. 자국 병력의 유출을 꺼려한 대공이 입을 닫아버리면 속수무책이니까. 그랬기에 칼은 나름의 수단을 충분히 강구해 두고 있었다. 자크의 도둑 길드원들은 일스 기사 단원들이 자주 들르는 술집에서, 혹은 그 부인들이 모여드는 사교 모 임에서, 그리고 어쩌면 칼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일스 기사단원들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도록 했다. 장미의 기사들은 그 소 식에 놀랐고, 흥분해 버린 것이다. 수하들이 이미 다 알고 있었기에 그레이의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게 된 일스 대공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하며 칼은 킬킬 웃었다.

테이블에 올린 발뒤꿈치로 테이블을 딱딱 두드리며 칼은 흥겹게 중얼거렸다.

“샌슨, 로넨. 기뻐하시오. 당신들이 진짜로 지휘할 부대가 도착하고 있소.”

바이서스에 들어온 병력은 바이서스의 것이다. 물론 일스 기사단이라는 어마어마한 위명이 있으니 만큼 다루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들을 흡수해 버리기 위한 공작이 필요해지겠군. 칼은 더없이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깊은 고뇌에 잠겨 있던 칼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가슴에 턱을 묻은 칼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그의 볼을 타고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칼은 오른손으로 입을 막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친구들이여. 미안하오.’

제레인트, 아프나이델, 이루릴, 에델린, 엑셀핸드…………. 그들마저도 속여야 하는가.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칼은 어깨를 떨며 울었다. 교차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을 숨겨야 한다.

돌아온 과거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한다.

그리고 교차점을 공개한다.

그리고 그 동안 굳어진 상황을 강제로 현실로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조목조목 생각하고 있던 칼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무도 모르지. 현실이 정지한다면, 마음에 드는 현실을 하나 만든 다음 다시 굴러가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두 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칼은 더없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폭발적인 웃음은 아니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