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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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말을 세웠다. 그리고 샌슨은 부끄러워졌다. 그의 부끄러움은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한 명의 남자 때문이었다.
길 옆에 말을 세운 채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고삐를 감아쥔 두 손을 안장 위에 얹고 조용히 샌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늬 없는 회색 망토를 걸치고, 허리에도 역시 별 문양이 없는 롱 소드를 찬 그의 인상은 바이서스의 어느 거리를 걷든 행인의 시선을 10초 이상 잡아두기 힘들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샌슨은 칼과 일행이 아니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따위 고민에 빠져버렸지만, 그 고민은 칼이 해결해 주었다. 칼은 남자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Mil forujh iha eun Karl, de firion ki iha eun Sanson Percival.”
물론 샌슨은 자이펀 어를 알지 못했지만 그를 가리키며 이름을 부르는 칼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샌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듣고서도 남자는 한참 동안 지그시 샌슨을 바라보았고 결과적으로 샌슨은 수치와 동시에 약간의 분노까지 느꼈다. 그러나 샌슨이 입을 막 열 려는 순간(“그래요, 잘못했어요!”)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함이라고 합니다.”
깔끔한 바이서스 어였다. 칼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자이펀의 국방 대신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말했다.
“샌슨 씨는 자이펀 어를 이해하십니까?”
샌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함은 칼에게 말했다.
“그럼, 바이서스 어를 사용하기로 합시다.”
샌슨이 감사하다고 말해야 되는가에 대해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칼은 말에서 내려섰고, 그 모습을 보자 함 역시 말에서 내려섰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함 씨?”
“아니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오르자마자 두 분이 달려오시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샌슨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 무슨 못된 흉계가 있어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함은 그제서야 싱긋 웃었다.
“흉계가 있었다면 이렇게 드러내놓고 따라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칼 씨가 걱정되어서 따라오신 것이리라 짐작합니다만.”
“……짐작대로입니다. 칼은 검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어서,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뭐 함 씨를 공격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 절대로 아닙니다.” 단독으로 만나기로 한 자리에 따라온 것에 대해 허둥지둥 변명하던 샌슨은 그만 포기하며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샌슨은 칼과 자신의 말고삐를 한 손에 몰아 쥔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태도를 취했다. 나는 여기 없는 것으로 취급해 주쇼.
내색하진 않았지만, 함은 그런 샌슨을 보며 흥미를 느꼈다. 그는 요사이 샌슨 퍼시발이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샌슨의 모습에서, 지옥에서 방금 데려온 것 같은 부대 하나를 신들린 듯이 운용하여 번견이 양떼를 몰아붙이듯이 자이펀의 최정예 부대 네 개를 꼼짝달싹 못하도록 휘 몰아 대고 있는 무시무시한 바이서스 장수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저게 정말 칼브린 이후 바이서스 최고의 맹장이라는 샌슨 퍼시발인가? 그 공 포스럽다는 사내는 칼을 따라 나온 것에 대해 몹시도 미안해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말구종의 역할을 맡은 채 다소곳이 서 있었다.
칼은 길 옆의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실까요?”
함은 칼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그렇게 앉은 두 사람은 마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객들처럼 보였다. 칼은 숨을 좀 돌리고 나서 말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함은 고개를 갸웃하며 칼을 바라보았다.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이틀 뒤에 있을 정식 협약 때 충분히 논의될 수 있겠죠. 그쪽에서도 그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겠지요? 이쪽도 마찬가지입 니다. 나오기 전에 잠시 보니, 법학자들은 전범으로 기소된 귀국의 인사들을…………, 아, 함 씨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 인사들을 기소 중지시킬 것인지 기소유예시킬 것인지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더군요.”
함은 싱긋 웃었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까요. 그런데 궁금하군요. 어떻습니까, 저는 천인공노할 인류의 적으로 규정지어져 만인의 이름으로 고발되어 있겠군요?”
“거의 비슷합니다. 수식어가 좀더 많은 편입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칼 당신은 자이펀 내에서 어떤 종류의 고발도 당한 바 없습니다. 이쪽 율법가들은 당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요.”
함은 농담하듯 말하며 칼에 대해 살짝 비꼬았다. 커튼 뒤에 숨어서 바이서스를 조종하신 귀하의 수완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 었지만, 칼은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예. 이 휴전 협정에는 그렇듯 많은 분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으니 만큼, 분명히 양국 모두가 만족할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 서 저는 휴전 협정에 대해서는 큰 우려를 가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렇게 함 씨를 뵙고자 한 이유는 다른 이유에서지요.”
“휴전 협정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것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묻겠습니다. 귀국에서는 안식에 들어야 할 자들이 지상을 배회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함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혹, 귀국이 디바인 웨펀이라 부르는 그 좀비들의 창궐에 대한 이야기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언급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만.”
“아니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실 텐데요.”
함은 찌푸린 얼굴 그대로 칼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솔로처께서도 부활하셨다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역사가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지상을 걷고 있습니다. 콜로넬 계곡에서는 데스나이트들이 일어섰고 켄턴의 하늘에서는 천공의 3기사가 춤추고 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가공할 만한 것이라면, 말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래서 칼은 단조로울 정도로 평이하게 말했지만 함은 한참 동안 말문을 열 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조금 후에야 함은 힘들게 말했다.
“혹, 이유를 아십니까.”
“예. 불민한 후손을 위해 선조들은 죽음까지도 뛰어넘어 배려를 남겨둔다고 하지요. 그건 아시다시피 은유적인 말이지요. 관습이나 문화, 규칙, 건 축물…………. 하지만 이번 경우엔 그 말 그대로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솔로처께서 해답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직접…………, 만나셨습니까?”
“예.”
그 외에 다른 적합한 행동은 떠오르지 않았기에, 함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좀 실망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온갖 무지개가 하늘을 수놓고 땅이 갈라지고 벼락이 치는 가운데 숫염소와 사자들이 끄는 수레를 타 고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솔로처께서는 임펠리아의 정문으로 걸어들어 오셨습니다.”
함은 쓰게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분이겠지요.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칼은 잠시 미간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좀 복잡합니다. 제가 얼마나 설명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이 부활들에는 여러분들이 Hjan이라고 부르는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함은 조금 놀랐다.
“Hjan?”
“예. 혹 제가 자이펀의 단어를 잘못 인용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솔로처께서 가로되, 크나큰 Hjan을 지닌 자는 죽은 그 자신, 또는 죽은 친구나 가 족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나 그리움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단순한 사랑이었다면 루트에리노 대왕은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사랑하는 바이서스 국민들에 의해 부활되었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죽은 남편이나 아내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
“그렇……군요. 그래서 라울은 부활하지 않았으나 베이론은 부활한 것이군요.”
함이 거론한 이름들은 당연히 칼에겐 낯설었다. 하지만 함은 설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자신 속으로 빠져들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가 따다닥 소리를 내며 맞아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신차이와 결투를 치렀다가 죽은 자들 중 라울 트리그로스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결투에 임했고 남겨진 미련 없이 무사답게 죽었다. 그는 부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베이론 코다슈는 모욕당한 분노로 결투에 임했고 그 감정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일격에, 칼 맞은 낙타 꼴로 죽었다. 그는 부활했다. 칼은 함이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저…………, 그리고 솔로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이펀보다는 바이서스에서 더 많은 부활이 일어났을 거라고요.”
“예? 이유가 뭐죠?”
“우리는 그 Hjan이 뭔지도 모르니까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감정은 추스를 수 있을 테지만, 그것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감정이라면 보다 쉽게 그 감정에 휘둘릴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섬뜩한 말씀이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면서도 거기에 붙여진 이름이 없다면.. 그래서 있는 지조차 모르는 감정이라는 것은.”
“그렇겠군요. 예. 하지만 단순히 감정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예. 물론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전제 조건이 뭔가요?”
칼은 대답에 앞서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있는 언덕은 들판의 중간쯤에 잘못 솟아난 것처럼 생긴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이곳에서 푸른 하늘은 턱없이 넓어보였다. 칼은 그 하늘 어디에선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해보았지만 하늘은 마냥 푸르 를 뿐, 칼을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칼은 조금 힘들게 말을 꺼냈다.
“시간이 멈췄다는 것이 그 전제 조건입니다.”
다행히도 함은 칼을 바보 취급하거나 미치광이를 보는 시선을 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열렬한 찬동의 의사를 표한 것도 아니지만. 함은 그저 조용히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칼은 그 스스로도 혼란스럽게 느끼는 개념에 대하여 말을 해봄으로써, 함의 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이해도 높여보고자 했다.
“현재, 시간은 느려지고 있습니다. 사물들의 시간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봉오리는 꽃으로 피어나지 않고 부패해야 할 것들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아 이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보다 개인적인 것을 말해 볼까요. 흔히들 아이들은 미래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만 그 주인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주위의 친지들 중 자녀를 얻은 친지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함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그 황당한 가설에 대한 찬성의 증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없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 이해합니다. 제 말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요? 예. 저 자신도 긴가민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개인적인 일들 을 돌아보았습니다.”
“당신의 개인적인 일?”
“함.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미래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제 취향에 맞는 미래를 꿈꾸지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 미력하나마 노력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칼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말이죠.”
“예?”
“저는 제가 미래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말씀드리죠. 저는 점점 더 사태와 상황들을 고착시키고 있었습니다. 현재를 끌어안아 버린 거라고 할 수 있지요.”
“무슨 말씀인지?”
칼은 난감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 나라의 국방 대신에게 들려주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내용들이었다.
그가 서커스를 이용하여 귀족들에게 보낸 경고는 결국 귀족들에게 경계심을 품게 할 것이다(샌슨이 습격당한 것을 보면 귀족들의 경계심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건만, 칼은 깨닫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문화 사업이 의외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모직 산업을 다룰 권리를 획득함으로 써(칼이 그들에게 준 것이다) 얻게 될 풍부한 재원을 이용하여, 그들은 더 많은 문화 사업들을 장악할 것이다. 작가, 미술가, 음악가, 조각가, 정치가, 경 제학자, 기타 모든 종류의 기술자들. 어쩌면 성직자와 마법사들까지도? 그들은, 결국 문화 사업은 적절한 안목과 풍부한 재력을 가진 귀족들이 전담 할 때 가장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화를 장악한 자들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 역시 귀족이 해야 돼. 역시 귀족다워. 이건 귀족이 해야 할 일 아닐까? 고정 관념들, 움직일 수 없 는. 결국 비귀족들은 귀족들의 문화 소작농이 될 것이다.
칼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 외에 샌슨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들, 함에게는 더욱 말할 수 없었던 것들. 그 모든 계획과 비밀 활동을 재검토한 칼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찔함까 지 느꼈다. 그가 한 행동들은 모두 현재를 요지부동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들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대신 당신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저요?”
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칼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휴전을 원하지요?”
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질문이었으니까. 칼 역시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착입니다. 종전이 아닙니다. 휴전은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휴전 협약 이후 양국이 어떻게 될지 대충 말 해 볼까요? 가장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군비 경쟁입니다. 당신이 휴전 이후 모국에 대해 어떤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만 당신은 결국 비대해진 군부의 수장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하탄이 될지도 모릅니다.”
강직한 성격의 함은 이 대목에서 도저히 인내심이라는 말을 생각할 처지가 못 되었다.
“불경한!”
샌슨의 눈빛 또한 예리해졌다. 하지만 함은 벌떡 일어서거나 칼자루로 손을 가져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더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억지로 내리누 르며 칼을 쏘아보았다. 칼은 슬프게 말했다.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위 상황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거죠.”
“말해 보시오!”
“군비 경쟁부터 다시 시작하죠. 잠재적인 전쟁에 대비한 군수 사업의 발달과 군부의 확장은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폭력의 특징이란, 그 것이 에고 소드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샌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프림 블레이드의 칼자루로 내려가 그것을 쓰다듬었다. 칼과 함은 알 수 없었지만 프림 블레이드 역시 숨을 죽인 채 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에고 소드는 보통 칼과 달리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주인을 찾아갑니다. 보통 칼이라면 전사가 쥐거나 암살자가 쥐거나 푸줏간 주인이 쥐거나 그 용 도에 충실히 사용될 겁니다. 하지만 에고소드는 그 스스로 주인을 찾아냅니다. 물론 착한 에고 소드는 그렇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에고소드는 자신 의 목적을 위해 주인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검의 목적은 무엇이죠? 폭력, 피입니다. 에고 소드는 주인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의 목적을 위해 주인을 택할 뿐입니다.”
함은 갑자기 들려온 고함 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그 고함 소리의 내용엔 더욱 놀랐다.
“난 아니에요! 메스꺼워요, 피라니!”
함이 떨떠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에서는 샌슨이 허옇게 질린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과 샌슨의 얼굴과는 반대로, 칼은 차분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 프림 블레이드 같은 경우는 좀 독특하죠. 저 에고 소드는 자신의 목적, 즉 세상이 끝날 그날까지 계속될 수다를 위해 주인을 이용합니다. 자신에 겐 입이 없으니까요. 뭐, 마검보다야 훨씬 보기도 좋고 애교스럽기도 한 버릇이지만 주인을 이용한다는 점에선 다른 에고 소드와 마찬가지입니다.”
프림 블레이드가 입을(?) 다물어버린 것 역시 샌슨만이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다. 칼은 계속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함을 불러야 했다.
“저, 함 씨? 계속할까요.”
“아, 예.”
역시 무사인지라 에고 소드라는 말에 감탄하며 샌슨이 쥐고 있는 칼자루를 감상하고 있던 함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칼은 계속 말했다.
“당신 나라 안에서 자라나고 비대해진 폭력은 결국 자신의 폭력성을 발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인을 찾아낼 겁니다. 폭력을 억눌러 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아닙니다. 에고소드와 마찬가지로, 폭력이 그런 목적으로 주인을 찾아내는 일은 드물지요. 그 폭력은 자신을 쥐고 휘둘러줄 주인을 찾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명가의 수장들은 군부의 권한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서요? 당신은 자연스럽게 전후 자 이펀 최고의 권력자, 군대 통수권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휴전 협정은 파기되는 거지요. 당신은 바라지 않았을지 몰라도 휘하의 병사들과 장군들이 보내오는 압력은 무시할 수 없겠지요.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함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주위의 상황이 그러해도, 나에겐 자유의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사라는 것이 현재의 무한한 반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다른 예?”
“당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오네를 체포하게끔 하셨지요.”
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칼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가 판단하기로, 눈앞의 칼은 아무래도 설명을 좋아하는 성격인 듯했다. 과연 칼은 설명을 시작했 다.
“시오네를 체포하게끔 한 것으로 당신은 휴전 의사가 견고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뭐, 우리로서는 칭찬할 만한 제스처지요. 데밀레 노스 바이서스 공주님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그 뱀파이어를 싫어했다는 점도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그것을 조금만 바꿔 생각해 볼까요. 시오네는 닐림의 날개의 중요 인물입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닐림의 날개는 군부를 견 제하는 하탄의 중요 수단이지요. 당신은 그것을 꺾었습니다.”
함은 자신의 가슴속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덜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는 기분을 느꼈다. 칼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았다.
“당신 자신도 모르게, 혹 알고 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휴전 이후의 군부 장악을 위한 포석을 깔았습니다. 그 외에도 당신 스스로 관점을 조금 바꿔보면 유사한 목적으로 행한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함은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떨어져서 그의 가슴속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 함의 입을 막았다. 함은 입술을 깨문 채 생각했다.
그는 자이펀 최정예 부대를 바이서스로 파견했다. 휴전 이후에 있을 군벌의 발호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그런데 그 부대들은 저기 있는 바이서스 건 국 이후 두 명밖에 없을 맹장이라는 샌슨 퍼시발에 의해 지리멸렬하고 있다. 그렇다면?
함은, 샌슨의 손을 빌어,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장수들을 제거해 버린 것이 된다.
“이 휴전은 사실은 종전입니다. 지금까지의 전쟁, 즉 언젠가 어느 한쪽의 승리나 패배로 끝나게 될 형태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전쟁 이 시작되겠지요. 승자도 패자도 결코 나타나지 않을 영원한 전쟁 말입니다.”
“영원한 전쟁이라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죽은 자들이 생사를 넘는 것은 가능합니까?”
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푸른 새틴처럼 고왔다. 그리고 마른 붓으로 한번 슥 그은 듯한 구름들이 희미한 흉터처럼 하늘 한곳에 멎어 있었다. 칼은 그 구름을 바라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차넬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그분께서 행동과 상황의 관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신 것도 아십니까?”
“상황을 호전시키는 행동은 최상이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은 나쁘지만,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는 행동은 최악이라고 하셨지요.”
“그분은 전략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그때 그분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시간의 본질을 말씀하신 듯합니다.”
“시간의 본질이오?”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칼은 바위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보이는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때론 장려한 강물이 되어 도도하게 흐를 수도 있고, 때론 굽이쳐 꺾이고 폭포가 되어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때론 절벽을 타넘고, 때론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가 되어서라도 우리는 흘러야 합니다. 고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고 해서 영원히 현재를 묶어두는 것 은 우리의 자살입니다.”
함은 자신도 모르게 칼을 따라 넓은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함과 칼이 보는 것은 서로 다른 황무지였다. 칼은 북받치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했다.
“우리는 날아야 합니다.”
“난다고요……”
“때론 황야를 질타하는 질풍이 되어 날 수도 있고, 때론 산에 부딪혀 갈가리 찢겨질지언정, 우리는 바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피넬과 헬카네 스의 증인인 인간, 시간의 장인입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이 되고 불어 닥치는 바람이 되어 시간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갑자기 몸을 돌려 함을 바라보았다. 칼을 마주보던 함은 그의 눈 가득히 담긴 슬픔에 어리둥절해졌다. 칼은, 그야말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미안합니다.”
“예?”
“미안합니다.”
칼은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함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칼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샌슨에게 걸어갔다. 함은 제자리에 선 채 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무지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 올, 언덕 위에 먼지 구름을 피워 올렸다. 칼은 말 위에 올랐다. 그러고는 마상에서 함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칼은 약한 미소를 지은 채 함에게 말했다.
“이틀 뒤의 휴전 협정 때 뵙겠습니다.”
“아, 예……. 그런데…….”
“제가 멋진 것을 보여드릴 테니 준비하고 나오십시오.”
“멋진 것?”
칼은 장난이라도 칠 것 같은 익살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 저는 열과 성을 다해 그 협정을 파탄낼 겁니다.”
‘예?”라고 되묻지도 못했다. 함은 턱이 빠진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칼은 다시 악동 같 은 얼굴로 말했다.
“그쪽 율법가들도 이제 할 일이 생길 겁니다. 휴전 협정을 최악의 방식으로 파탄냄으로써 양국 국민의 평화와 번영의 기틀이 서는 역사적인 순간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자이펀과 바이서스 양쪽을 진흙탕에 던져버린 역사의 범죄자로 칼 헬턴트를 기소할 수 있겠군요.”
함은 아무 말도 못했다. 칼은 싱겁게 웃었다.
“당신만이라도 내 진심을 알아주시오.’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해야 어울릴 것 같지만, 이 장면에 어울릴 법한 문구를 찾아내는 것은 후세의 문필가들 에게 맡겨둡시다. 자이펀의 작가일지 바이서스의 작가일지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멋진 문구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장면으로 만들어주겠지요.”
그리고 칼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함은 아직까지도 굳어버린 입을 어쩌지 못한 채 칼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칼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주춤거리던 샌슨은 함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슈팅스타에 올 라 칼의 뒤를 따랐다.
함은 언덕 위에 못 박힌 채 떠나가는 칼과 샌슨을 바라보았다. 황무지를 가로질러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작은 점과 모래바람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그때까지 그의 입 속엔 하나의 문장이 되풀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