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7

랜덤 이미지

퓨처 워커 4권 – 9장 기다림의 해변 7


7

딤라이트는 흉벽을 꽉 움켜쥐었다.

켄턴을 향해 걸어오고 있던 솔로처는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키티 데시는 손뼉을 치며 마법사님이 마법을 부리셨다느니 어쩌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딤라이트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주리오 시장이나 히든보리 사집관 역시 눈을 비비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며 솔로처를 찾고 있 었지만, 딤라이트는 데이든 평원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솔로처처럼 죽었다가 살아난 자였기에, 솔로처는 정말 돌아간 것이다.

그때 딤라이트의 귀로 무스타파의 거칠고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대까지 드리워져 있던 안타까움의 닻을 끌어올리고, 그는 수평선 너머를 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항해를 시작했군.”

“무스타파?”

“그림 오세니아께 가야 해. 너무 무거워도, 닻은 나의 것이지. 그것을 끌어올리고 그림 오세니아께 가야 해.”

딤라이트는 입을 다문 채 무스타파를 바라보았다. 그림 오세니아. 우리의 아버지. 최초의 익사자. 먼저 죽었던 자. 우리가 갈 길을 가장 먼저 갔던 자. 햇빛도 닿지 않는 수백 길의 바다 아래에서 영원을 꿈꾸는 자. 우리가 따라가야 할 아버지의 길.

무스타파는 고개를 돌려 딤라이트를 바라보았다.

“딤라이트, 나는 말일세.”

“응?”

“일스의 백파이프 노랫소리를 듣고 싶네. 자네는 그걸 참 잘 불었지. 자네에게 이야기를 시킬 것인지 백파이프를 불게 할 것인지를 놓고 선택하라면 난 300년이 지났어도 후자를 선택할 걸세.”

무스타파가 말을 마친 순간 딤라이트는 백파이프를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키티 데시는 입을 헤 벌리며 감탄사를 토해 냈고 딤라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백파이프와 무스타파를 번갈아 쳐다보 았다. 그는 그 백파이프를 알고 있었다. 일스의 수도 바란 탄에 있는 이스트필드 가문의 고풍스러운 저택에 황혼이 찾아들 때, 기사 딤라이트는 바다 를 향해 열려 있는 정원 끄트머리에 서서 그것을 연주하곤 했다. 그리고 기사들의 연회가 열릴 때 그는 모자란 이야기 솜씨 대신 그것을 연주하여 장 미의 기사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다. 그것은 딤라이트의 백파이프였다.

무스타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런 식이지. 부탁하네. 한 번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난 자네만큼이나 그 백파이프와 그 소리를 좋아했다네.”

“무스타파. 이건 도대체……”

“부탁하네.”

딤라이트는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떨리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지관(管) 위에 얹었다. 챈터를 찾는 손가락이 조금 주 춤거렸지만 딤라이트는 곧 익숙한 손놀림을 기억해냈다. 등은 자연스럽게 꼿꼿이 펴졌고 두 팔은 편안하게 백파이프를 안았다. 잠시 후 딤라이트의 손가락이 조용히 움직이며 켄턴의 성벽 위로 백파이프의 높고 맑은 노랫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까지도 솔로처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주리오 시장과 히든보리 사집관, 그리고 켄턴의 경비 대원들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백파이프의 청아한 소리 에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무스타파는 짧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입에선 일스의 오래된 뱃노래가 흘러나왔다. 낮고 구슬 프지만 힘 있는 노래였다.

수면 아래, 빛은 희박하고 꿈마저 침침해도

무거운 쇠사슬 끝엔 닻이 매달려 있지

뱃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그것은 나의 것, 보이진 않아도

아름다운 항구라도 나 영원히 머물진 못할 테니

그리움의 저편에는 수평선이 닿아 있지

그림 오세니아의 아들은 누구나 알고 있지

그것은 아버지의 것, 나 거기로 돌아가리

솔로처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그레이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에카드나는 갑자기 들려온 음악 소리에 당황했지만 그 당황 은 다시 용아병의 감각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에카드나는 데스나이트들을 경계하며 주의 깊지만 빠른 동작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레이 는 에카드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켄턴의 성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닻을 끌어올리고 가벼운 돛을 펼쳐라 

내 정든 항구를 떠나 뱃머리를 수평선으로 

별, 내 아버지께의 길을 가르쳐줄 테지 

바람, 나를 그림 오세니아께 데려갈 테지

나는 항해자,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항해자, 죽을 때까지. 그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뭐해요, 파하스? 루미너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건가요?”

하프를 뜯으며 노래 부르고 있던 파하스는 네리아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해뜨기 직전의 새벽이라 가장 어두울 시간이었지만 북해의 새벽은 의외로 밝았다. 산등성이마다 뿌려진 눈과 빙산, 그리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장대 한 빙하는 루미너스의 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었다. 짙은 먹구름이 낀 낮보다 조금 어두운 정도의 새벽이었다.

덕분에 파하스는 네리아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두꺼운 털옷을 몇 개나 껴입은 것인지, 네리아는 뒤뚱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몸 놀림이 가볍고 빠른 터라 그 모습은 마치 바람이 잔뜩 들어간 공이 통통 튀는 것처럼 보였다. 파하스는 하프 위에 손가락을 얹어둔 채 말했다.

“아니외다, 네리아. 시인이 항상 그러듯 나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난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여기서 노랫소리가 들리기에 에델린의 옷까지 걸쳐 입고 올라와 봤죠.”

“아아, 프리스티스 에델린의 옷이었군요. 그래서 그렇게 커다랗게 보이는 것이로군요.”

“네. 그런데 걸어오면서 듣다 보니 바이서스 어라서 조금 놀랐어요. 헤게모니아 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하게는 일스 노래요. 바이서스와 일스의 말은 같으니.”

“일스? 아아. 음………….., 구슬프더군요.”

“뱃사람들의 노래라 그럴 것이오. 원래는 백파이프로 연주하는 거지만 하프로 연주하니 색다른 느낌이 있군요. 하긴 이 고요한 밤바다를 향해 백파 이프의 우렁찬 음률을 연주했다간 고래들이 발작을 일으킬 테지요.”

“고래?”

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하필이면 고래를 거론하는 거냐는 네리아의 눈빛에 파하스는 말없이 손을 들어 밤바다를 가리켰다.

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파하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각종 악기를 다루기에 모두 편리해 보이는 파하스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탄느완 항구 바깥의 열린 바다를 가리키고 있었다. 탄느완도 대개의 항구처럼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적게 받는 만 안쪽에 있었지만, 그들이 서 있는 언덕에서는 외해 쪽이 잘 내다보였다. 네리아는 의혹이 담긴 눈으로 바다의 검은 표면을 살펴보았고, 다시 파하스에게 고개를 돌리기 직전 ‘그것’을 발견했다. 고래들이었다. 네리아는 처음에 물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잔잔한 바다 위에 생긴 그 언덕들은 물결로 보기에는 너무 단단했고 고정적이었다. 네리아는 숨소리를 낮추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고래들은 제왕다운 몸놀림으로 느긋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 중 하나가 분수공을 쳐들며 그 거대한 허파에서만이 뿜어낼 수 있는 물보라를 폭발시켰다. 달빛 아래 튀어 오른 물방울들은 은빛으로 빛나며 천천히 비산했다.

빛이 스러졌을 때, 네리아는 고래의 고요하지만 우렁찬 호흡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먼 거리였지만 네리아는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 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아무 말 없이 파하스를 돌아보았다. 파하스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는 안도했다.

“고래네요.”

“예.”

“이렇게 가까이서…………. 저는 처음 봐요.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이 북쪽의 바다는 피요르드와 빙하 때문에 수로가 좁은 편이기 때문일 거요. 그래서 사람이든 고래든 비슷한 바다를 이용해야겠지요. 바다가 훨씬 더 크게 열려 있는 땅에서라면 저런 모습은 보기 어렵겠지요.”

“그런가요. 그런데 고래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혹 저들이 그들만이 알고 있는 심원한 바다의 지혜를, 도저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 어 있지 않은 우리들에게 어떻게든 전해 주고 싶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저들은 그저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지요.”

네리아는 파하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파하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고래 사정이라는 겁니다.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설령 내 멋대로 의미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건 고래로선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그런데, 안 추워요? 나 같으면 손가락이 곱아서 하프 현 못 만질 것 같은데.”

“싸늘한 날씨이긴 하군요. 잠깐 기다리시지요…………”

“됐어요! 망토 벗지 말아요. 내가 뻔뻔스럽게 그걸 받아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건 매너가 아니고 날 모욕하는 거네요.”

파하스는 머쓱하게 웃으며 망토 조임쇠에서 손을 뗐다.

“확실히 내 알던 시절과는 다르군요. 내 시대의 레이디들이었다면 보다 세련되고 복잡한 말로 사양했을 테지요. 아, 물론 네리아 양이 무례하다는 말은 아니오. 그런 솔직함이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이오이다.”

“냐암. 좋다는 말인지 싫다는 말인지.”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하스의 옆에 주저앉았다. 파하스식 표현을 빌린다면 ‘신선함이 동반된 솔직함이라 할 만한 동작이었다. 네리아는 그 야말로 철퍼덕 주저앉아 버렸기에 파하스는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깔아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계속해 봐요.”

“계속? 아아. 하프 말입니까. 그러지요. 그렇잖아도 연습해 보곤 하는 곡이 있지요. 그날, 아일페사스의 변화와 그 비행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노래 로 옮겨보려고 고심하고 있소이다.”

“아아, 근사했어요. 난 그런 것엔 재주가 없어서 표현 못하지만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멋진 곡을 붙일 수 있을 거예요. 드래곤은 정말 빨리 자라나 봐 요. 사람도 그렇게 자라면 재미있을 텐데.”

“빠르다고 하셨소이까?”

“예? 어, 제레인트가 그랬지 않아요? 저번에는 조그마한 웜링이었는데 곧장 그렇게 커다란 어덜트 드래곤이 되었다고.”

“시간을 뛰어넘었군요.”

요즘 들어 항상 이래. ‘시간’이라는 말만 나오면 가슴이 섬뜩하다니깐. 네리아는 동그래진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보았다. 파하스는 하프의 현을 애무 하듯 천천히 문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겠지요. 그럴 순 없을 거외다. 투미한 식견으로부터 나온 추측을 용서하신다면, 현재가 멈춰 서 이 과거의 광대가 따라붙을 지 경인데 현재의 무엇이 갑자기 미래로 가버릴 수는 없을 거라고 주장하겠소이다.”

“그럼 왜 갑자기?”

“좋은 질문입니다. 아, 요즘도 이 말은 똑같은 의미로 쓰이겠지요?”

“네. 나도 모르겠다는 뜻 맞아요. 피이.”

파하스는 껄껄 웃었다. 그리고 네리아가 꽤나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직껏 하프를 타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녀의 변신은 드래곤의 의지인지도 모르지요.”

“드래곤의 의지?”

“아일페사스가 아닌 드래곤의 의지이기 때문에……………, 드래곤의 제왕인 골드 드래곤의 어덜트 폼으로 폴리모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이 광대의 용감 무쌍한 추측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세요.”

파하스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다 듣고 난 네리아는 태연한 표정으로 한 번 더 반복할 것을 요구했다. 세 번째로 같은 말을 듣고 난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드래곤의 의지가 뭘까요?”

“아, 좋은 질문입니다.”

“하프나 타요!”

“잘 알겠습니다.”

파하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리아는 에델린의 커다란 겉옷 속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린 다음 두 무릎 위에 턱을 단단히 묻고선 귀만 쫑긋 세워 파하스의 연주를 들었다.

파하스는 아무 노래 없이 하프만을 탔다. 시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지만 이 설국의 풍광 속에 언어나 의미를 더하지 않겠다는 파하스의 결정 은 바람직했다. 네리아 역시 파하스가 노랫말 없이 하프 연주만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

북녘 하늘처럼 맑게 시작되었던 하프 소리는 곧 빙하처럼 무겁고 느리고 강하게 변화되어 유장하게 흐르다가 부드럽게 변하면서 빙산의 허리를 두 드리는 파도가 되었다. 잘디잔 화음을 빠르게 탄주하던 파하스의 손가락들이 교묘하게 고음부 쪽으로 옮겨왔다. 높고 급한 음정이 쉴 새 없이 몰아쳐 네리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북해의 폭풍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던 속주가 어느 순간 폭발하는 듯한 고요함으로 접어들었다. 급격하게 찾아온 고요함은 갑작스러운 고음만큼이나 경이적이었다. 네리아가 숨을 내쉬려는 찰나,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파하스의 손가락은 북해의 바다 위를 외롭게 나는 앨버트로스를 그려냈다.

폭풍이 지나간 북해 위로, 앨버트로스는 추억만큼이나 긴 날개를 편 채 한없이 고요히 날고 있었다. 산봉우리의 만년설은 유구한 세월 동안 그래왔 던 것처럼 고요히 얼어붙어 있었고 그 계곡으로 빙하의 은빛 줄기는 느닷없는 싱커페이션으로 치닫기 위한 도약대가 되었다. 파하스가 교묘하게 삽 입한 불협화음은 얼어붙은 북해의 바다 위로 날아가는 앨버트로스의 고요한 비행에 긴장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대감이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조용하지만 힘찬 낮은 음들.

그리고 드래곤이 수평선을 박차고 일어났다.

“배다!”

제레인트의 고함 소리에 네리아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하마터면 커다란 옷자락을 밟으며 나뒹굴 뻔했다가 가까스로 몸을 가눈 네리아는 멀리 해 변을 바라보았다. 언제 나온 것인지 제레인트가 해안에 선 채 수평선을 향해 고함지르고 있었다. 잠깐, 저 모습이 어떻게 보이지? 네리아는 그제서야 어느새 사방이 꽤나 밝아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배라고?

네리아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수평선으로부터 탄느완의 항구를 향해 다가오는 배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멀리서도 너무나 뚜렷 하게 보이는 붉은 돛. 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를 바라보았다. 배의 거대한 돛에는 온통 붉은 서펀트의 모습이 꿈틀대고 있었다. 수평선을 박차 고 솟아오른 붉은 서펀트.


시오네는 관에 걸터앉은 채 묵묵히 천막의 천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함은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것은 함의 의도는 아니었다. 함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관에서 나온 시오네는 함을 흘긋 바라본 다음 돌아앉아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함에게 비교적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었다. 그 음흉한 칼은 시오네의 관 바로 옆에 함을 묶어놓았다. 시오네가 나와서 얼마든지 쳐다 볼 수 있도록. 그리고 뱀파이어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함에게는 수백 가지의 즐거운 일 다음에라도 결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함은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함은 시오네가 읽고 나서 땅에 던져버린 쪽지를 흘끔 바라보았다. 원래 시오네의 관 위에 놓여 있던 그 쪽 지에는 칼의 필체로 몇 마디의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함은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시오네 양의 독보적인 능력을 이용하여 함의 머릿속을 적당히 씻고 수선한 다음 자이펀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내용으로 다름 아닌 세뇌 요구였다.

등을 보인 채 앉아 있던 시오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지.”

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여전히 천장을 쏘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너희들이 매일같이 하는 행동의 9할 정도는 내일도 살아 있기 위해 하는 일 아닌가. 자가당착 도 이 정도면 너무 심한 것 아냐?”

함은 이번에는 대답했다.

“꽤 비율이 높기는 하겠지만 9할은 너무 심하군.”

“말꼬리 잡지 마라.”

“어쨌든 ‘전부’라고 하지 않고 ‘9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너 역시 그 외의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모양이군.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 한 어떤 부분 말이야.”

“글쎄. 내가 보기에 그 1할의 가소로운 노력은 나머지 9할 동안 바치는 너희들의 노동에 어떤 근거나 정당성을 주기 위해 이용되는 것 같더군. 이러 이러하므로 살아야 한다,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 슬픈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1할이나 2할 정도를 소모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일까. 너희들 이 기르는 말이나 소는 그런 1할의 낭비도 없이 10할 전부를 완전히 자신의 삶에 바치지.”

“그건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이고, 적어도 인간에겐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로군.”

시오네는 함이 말한 단어에 당황했다.

“자존심?”

“그래. 자존심. 최후의 순간에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 인식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내 속에 있는 것. 이런 비굴한 상황에 빠진 나의 마지막 전우. 살아 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자존심을 말하는 것이다. 너는 가지지 못한 그것 말이야.”

시오네는 뒤로 돌아앉았다. 함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존심 때문인가. 그래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경배할 수 있는 이유는 뭐지? 어떻게 그렇게 오만한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성전(聖殿)이니까.”

“그 성전이 죽음 앞에 무너지기를 바라는 이유는?”

“멸망은 완성의 귀결이야. 나의 성전은 무너졌을 때 완성된다. 책은 마지막 페이지가 있을 때 책이고 노래는 끝맺음이 있어야 노래다. 나의 성전은 나의 우상은 아니다.”

“머저리.” 

“뭐?”

함은 대답하면서 시오네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시오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함은 어이가 없어졌다. 뱀파이어가 눈물을? 시오네는 두 눈 가득히 고인 눈물 속에서 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핸드레이크. 당신은 정말 머저리예요. 얼간이라고요.”

핸드레이크? 함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에 시오네는 눈물을 닦아냈다. 소맷자락이 치워지고 다시 메마른 시오네의 얼 굴이 나타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시오네는 이제 차분한 얼굴로 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오네를 마주보았다.

정적은 공포가 되었고 함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안 돼……!”

함은 다급하게 혀를 빼물었다. 하지만 깨물지는 못했다. 자이펀의 국방 대신은 혀를 길게 빼문 볼품없는 모습으로 뱀파이어를 마주보았다. 시오네의 깊은 두 눈은 미명도 없이 함의 시선을 흡수했다. 그리고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함은 그것에 집중하려는 자신을 억누 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불가항력이었다.

함의 입매가 조금씩 올라갔다.

시오네는 이제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얼굴로 함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함은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오네가 그를 알게 된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시오네는 그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지만 함의 미소는 점점 더 과장되고 일그러져 끔찍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시오네 는 눈을 감았다.

함의 머리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시오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함은 의자에 묶인 채 조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함의 정수리를 바라보던 시오네가 슬그머니 일어났 다. 시오네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나 시오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다이가 그려놓은 마법진이 그녀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래요. 나올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소.”

시오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칼을 보았다. 칼은 시오네를 흘긋 쳐다본 다음 곧장 함에게 다가갔다. 칼은 함의 머리를 조심스 럽게 쥐고는 위로 들어올렸다. 함의 머리는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묵직하고 힘없이 들어올려졌다. 칼은 그것을 다시 내려놓은 다음 시오네에게 질문 했다.

“잘 된 겁니까?”

“그래.”

칼은 불만족스러운 작품을 보는 것처럼 함을 쳐다보았다.

“이건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것 같은 모습인데. 이거 봐요. 이자가 자이펀에 돌아갔을 때 자이펀의 누구라도 이 친구가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의심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잘 알겠지요?”

“물론 그렇군.”

“예?”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함은 이제 트랜스에 빠졌을 뿐이야. 아직 암시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더 필요한 과정이 있어.”

“필요한 과정…? 아아. 혹 그겁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당신은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니 내가 그를 안으로 밀어 넣어 드리면 되겠군요. 그럼 당신이…………, 그걸 할 수 있겠죠.”

흡혈을 내뱉지 못한 단어 때문에 칼은 입천장이 깔깔했다. 시오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칼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함의 밧줄을 풀고 그를 들어올리 기 위해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시오네가 말했다.

“네 자존심은 뭐지?”

“예?”

칼은 함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놓은 다음 시오네를 돌아보았다. 물론 칼은 시오네의 눈이 아닌 이마 근처를 보았다.

“네 자존심은 뭐냐고 물었다. 조금 전 함이 그러더군. 네놈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이 있다고. 하지만 넌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 개친 것같이 보이는데. 뱀파이어에게 의뢰해서 적국의 국방 대신을 세뇌시킬 정도면 자존심이고 뭐고 없는…………”

칼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단어 그대로의 자존심이고 흔히 견습 기사들이 말하는 자존심이군요. 똑바로 설명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봐.”

“당신이 보기에 제가 확신에 차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충실하다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그런 건가? 자신을 경배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믿고, 주위에서 요구하는 모든 공정함은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것?”

“그렇습니다. 그 공정함이라는 것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고, 따라서 제 걸음과 일치한다면 따를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무시할 수도 있습니 다.”

“그게 행복한가?”

“천만에요.”

칼은 더없이 명쾌하게 말했다. 시오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칼을 보았지만 칼은 여전히 그녀의 이마만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무슨 의미지?”

“세상이 요구하는 공정함을 따른다는 것은 정체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일에 즐거워하고 같은 일에 슬퍼하며 살면 살기는 편합니다. 누가 그런 자를 꾸짖겠습니까. 그건 완벽한 호인인 걸요. 호인의 즐거움은 정체가 주는 안락함이죠.”

“정체……, 시간의 정지?”

칼은 빙긋 웃었다. 시오네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웃음인지라 조금 불안스럽게 보였다.

“예.”

“너희들은 그렇게 시간을 만들어내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넌 지금 정지된 모든 관습과 정의를 깨버리고 새로운 시간과 사건을 만들어내려는 건가? 다시 시간을 흐르게끔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두지요.”

“왜?”

“왜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시오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칼의 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지? 너 스스로도 말했다. 그런 정체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훨씬 즐겁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정지를 거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거지?”

그 순간 칼은 고개를 내렸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시오네는 칼의 시선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칼은 시오네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웃었다.

“자존심 때문이지요.”

시오네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칼은 도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고 끙끙거리며 함의 몸을 들어올렸다. 함의 다리가 질질 끌리고 몇 번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칼은 마법진 안으로 함의 몸을 던져 넣을 수 있었다.

“휴우. 죽을 맛이군요. 자, 이제 부탁합니다. 나는 다시 나가겠습니다.”

“부탁이 있는데, 나가기 전에 저 불을 꺼줘. 내겐 필요한 것이 아냐.”

“예? 아아, 네.”

칼은 테이블 위에서 타고 있던 촛불을 불어 껐다. 천막 안이 캄캄해졌다. 칼은 어둠 속을 향해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려다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듯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천막을 나갔다.

시오네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시오네는 함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함은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채로 낮게 코를 골고 있었고 시오네는 그 모습에 킥 웃으며 소 매를 걷었다.

함의 상체를 붙잡은 시오네는 놀라운 힘으로 그를 끌어올렸다. 조금 전 칼이 낑낑거리던 꼴에 비한다면 마치 어린애라도 다루는 것 같은 모습이었 다. 시오네는 관에 걸터앉은 채 함을 가슴에 안았다. 그의 긴 다리가 시오네의 무릎을 넘어 축 늘어졌다. 시오네는 흐트러진 함의 머릿결을 정돈했다. 얼굴과 목이 하얗게 드러났다.

시오네는 그렇게 잠시 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포로 생활로 초췌해진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엔 명가의 자손다운 풍모가 남아 있었다. 무수한 세월 동안 인간의 죽음을 보아온(그중에는 그녀 자신이 인 도한 죽음도 상당수 있었다.) 시오네는 함의 얼굴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을 표정을 읽어냈다. 그것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오만하고 강 인한 표정이었다. 겸손해 보일 만큼 잘 갈무리되어 있지만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엄격함이 깃든 얼굴.

함의 목을 끌어안은 시오네는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일어나!”

시오네는 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오네의 날카로운 음성에 함은 눈을 떴다. 자신의 이상한 자세와 어둠 때문에 아직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함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끔벅였고 그때 시오네의 손바닥이 재빨리 함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은 몸부림을 치며 반항하려 했지만 시오네는 뱀 파이어의 무서운 힘으로 함을 억누른 채 조용히 말했다.

“가만히 있어. 반항하지 마.”

시오네의 제안은 깨끗이 거부되었다. 함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틀어막힌 함의 입 속에서 무서운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읍! 으우웁!”

“닥치고 가만히 있어. 네게 이로운 일이야.”

‘웃기지 마!’라고 고함지를 수가 없는 함은 대신 두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시오네의 눈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욕망이나 잔인한 즐거움을 찾아보려 했던 함은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후 칼이 들어오면 세뇌당한 척해라. 알았지?”

함의 몸이 굳었다.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판단한 시오네는 함의 입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눈치 빠르게도 함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착한 아이군.”

“설명해.”

“어려울 건 없어. 아니, 네게는 몹시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겸손하게 대하면 그만이다. 알겠지? 말은 적게 하고 되 도록 미소를 많이 지어라. 얼빠진 녀석처럼 보이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바보같이 보일 필요는 없어. 의심당할 테니. 그저 평소에 짓던 대로 미소 지으면 돼. 알았나?”

“그걸 설명하라는 말이 아니었어. 목적이 뭐지?”

“칼의 계획은 알겠지. 그 계획을 역이용하는 거야. 너를 자이펀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왜?”

“난 지고하신 하탄의 종복이니까. 하하하……”

함은 아무 말 없이 시오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속엔 이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과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자세, 즉 젖먹이 어린애처럼 시오네의 품에 안긴 자세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시오네는 손을 들어 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함이 욕지기를 참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칼에게 찬성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지.”

“무슨 말이지?”

“나도 그의 의견을 완전히 수용해서 세상의 모든 환경에 대해 반항하기로 결심했다는………… 것 정도일까. 아니, 됐어. 설명할 시간이 아냐. 잘 들어. 나 는 이제 너를 물겠다.”

함의 몸이 나무토막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하지만 함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시오네는 기특하다는 듯이 함을 보았다.

“훌륭하군. 네 목에 아무런 자국이 남지 않는다면 당장 들통나겠지. 그리고 칼이 그것을 조사해 보지 않을 위인은 아니고. 그러니 목을 좀 내놓아야 겠어.”

함은 불신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시오네를 쏘아보았지만 시오네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녀의 손이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지만 않는다면 훨씬 쉽게 진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함은 이를 악물었다.

“믿어야겠군. 네가 정말로 나를 마실 생각이었다면 이런 계교를 꾸밀 까닭은 없겠지.”

“그래.”

함은 목을 옆으로 휙 젖히며 말했다.

“물어.”

그리고 함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시오네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시오네는 씁쓸한 표정으로 함의 목을 내려다보다가 한 마디 했다. “개에게 명령하는 것 같군.”

함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오네는 고개를 숙였다. 시오네는 그녀의 차가운 입술이 목에 닿았을 때 함이 소스라치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시오네는 잠시 함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댄 채 가만히 있었다. 함의 심장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늑골을 때려 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시오네는 오랫동안 입술만 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함은 의아했다.

“시오네?”

그가 고개를 들려 할 때 시오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함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은 시오네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이를 드러냈다. 그녀의 이 가 목에 닿는 섬뜩함에 함이 경직한 순간, 시오네의 송곳니는 함의 살결을 파고들어 갔다.

함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목에 느껴지는 축축함은 시오네의 입술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아픔은 그 송곳니

가 살갗을 꿰뚫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일 테고. 하지만 그것은 함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견디기 쉬운 느낌들이었다. 정말 약간의 특별함도 없었다.

“불을 켜라.”

잠시 후, 시오네는 함을 놓아주며 말했다. 함은 풀려나자마자 마법진 밖으로 뛰쳐나와서는 목을 문지르며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오네는 옆으로 돌아앉아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목을 쓰다듬던 함은 손가락 끝에 작은 상처 두 개가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진득하게 피가 묻어나왔지만 그 것은 상처 때문에 흘러나온 피였다. 시오네는 마시지 않았다.

“사람이 들어오거든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아라. 개를 길러본 적이 있나?”

“……어릴 때.”

“주인을 바라보는 개를 흉내내면 될 거야.”

“무슨 속셈이지? 왜 나를 돕는 거지?”

“설명할 시간이 아니라고 했어.”

시오네는 몸을 더 옆으로 돌렸다. 함은 그녀의 등을 보다가 테이블로 걸어갔다. 등잔에 불을 붙인 함은 의자에 앉으려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구겨진 종이를 발견했다. 시오네가 읽고 던져버린 쪽지였다.

함은 그것을 주워들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네의 어깨가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함은 칼의 필체로 적혀 있는 쪽지의 내용을 빠르게 읽었다.

쪽지를 다 읽은 함은 그것을 다시 구겨서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서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시오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겸손한 동작과 달리 그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함은 더 참지 못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살려낸 건가, 시오네?”

시오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함은 조금 전 읽고 던진 쪽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복잡하게 써놨지만, 결국 네가 거절하면 나는 별 필요가 없으니 곧 죽일 거란 말이군. 그런데 넌 나를 살려내고, 또 자유까지 주려는 건가? 들킬 위 험을 감수하고 말이지. 왜지? 내가 널 칼에게 팔아넘긴 것을 잊은 것은 아닐 텐데.”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캐묻는 화법을 썼다간 당장 들킬 거야, 함. 노예처럼 행동하는 편이…………”

“왜 나를 돕는 거지?”

시오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함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시오네의 등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시오네의 목소리가 들렸 다.

“한 가지만 말해 두지. 다시 앉아.”

마법진을 넘어 시오네의 어깨를 쥐려 하던 함의 손이 공중에서 멎었다. 시오네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함은 손을 끌어당겼다. 함이 다시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리자 시오네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뱀파이어다.”

함은 기다렸다.

“네가 죽고, 네 자손이 죽고, 그 이후로 몇 대가 흘러도 나는 존재할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 언제까지고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 인간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모습을 너희들이 나를 잊고, 뱀파이어라는 것을 완전히 잊는 그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도 너희들이 돌 아보지 않는 그림자 속, 너희들이 잊었던 물건의 뒤편, 잠든 너희들의 창문 밖에서, 나는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함은 시오네의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는 농담을 말하는 것도 굳은 결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오네가 담담히 말하고 있는 것 은 틀림없는 사실이 될 것들이었다. 반영구적인 생명과 어둠 속의 생활, 그러나 생존 때문에 인간의 곁을 떠날 수는 없는 시오네에게 감시자의 역할 이란 오히려 당연했다.

시오네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맺었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것인지를 감시할 것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