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69화 : 위험한 자들이 자유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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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69화 : 위험한 자들이 자유를 원한다.


위험한 자들이 자유를 원한다.

파천과 선발대가 빠져나간 하룬엔 긴장이 더 한층 무겁게 내려앉았다.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핵심 전력이 이탈했으니 당연한 변화라 할만 했다.
다행인 것은 적진에서도 메타트론과 루시퍼를 비롯한 핵심 전력이 빠져나가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 전력 우위를 보이는 건 이제 하룬이라 해도 무방했다.
진내의 움직임마저 훤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와 있는 제왕과 마계의 군대. 지척에 서로를 두고 있으니 경계가 삼엄했다.
시간이 흐르며 긴장의 빛은 누그러졌고 불안은 씻겨졌다.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까지 게을리 하진 않았지만 비교적 평화롭다 할만했다. 그래도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부를 단속하는 걸 잊지 않는다.
현재의 하룬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지도부는 로메로와 그레고스였으며 제석과 노군, 제왕들이 힘을 보탰고 지혜전사단이 분주히 움직이며 수족 노릇을 자임했다. 군대의 편성은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으며 사기는 드높았다.
주목할 점은 하룬에 속한 자들 치고 이제 적이 침입해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 여기는 이가 없었다.
이런 안정된 분위기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시점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최적의 상태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심리적인 안정은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된 것이다.
하나는 제왕들의 가세로 수뇌부의 전력이 상승한 점이고 나머지는 파천이 안배해놓은 보호막으로 인한 안정감이었다. 적들 중 보호막을 뚫고 하룬 내부까지 침입할 수 있는 전력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적진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제왕들의 믿음직한 모습은 애초에 가졌던 일반의 선입견을 바꿔놓았다. 그들은 일정 구획을 담당하며 파수꾼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었다.
하룬의 중심도로에 나타난 로메로와 그레고스를 발견한 군중들은 감사와 존경을 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 뒤로는 지혜전사단의 부단주인 부우버와 홀딘이 지혜전사들을 대동하고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 군단의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격려하는 한편 한시라도(원본에는 ‘하시라도’로 되어있었지만 오타인 것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편성된 전력을 용이하게 진군시킬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말 것을 당부했다. 7군단까지 다 둘러본 후 망루에 오른 로메로가 적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가 떠난 이후 저들은 곧장 전력을 합했습니다. 저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호막을 부수려 할 것입니다.”
그레고스가 말을 이었다.
“보호막을 부술 만한 능력자가 저기에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지는 않겠지. 침투가 가능한 소수라도 공격은 있을 거야. 거기에 대한 대비만 철저하게 해둬도 돼.”
로메로는 보호막을 부술 만한 능력자를 떠올려보았다. 제왕 마르시온이라면 가능할까? 내심 고개를 젓는다. 하룬에 합류한 제왕들이 확인해준 사실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길 자신들도 보호막을 제거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마르시온이 강하긴 하지만 자신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들며 적진에 그만한 강자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마계는 더욱 가능성이 희박했다. 루시퍼와 대마신들이 빠져나갔으니 최강자라 해봐야 헤르파와 라넷 정도였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현재의 대치상태였다. 보호막을 제거할 수단이 있었다면 저들은 진작에 진격해 왔을 것이다.
이런 진단에도 불수하고 로메로와 그레고스의 얼굴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근심거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마령의 본주!
그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일단 그에 대해 알려진 게 너무나도 적었다. 파악하고 있지 못한 상대에 대한 막연한 심려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만 갔다.
하룬의 지도부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군단장들은 요즘 예하의 편제를 새롭게 하느라 분주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사령부가 일체 관여하지 않고 맡겨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급조된 편제라 허점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지휘자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 독특한 개성이 부여되고 있으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휘 층의 중간을 두텁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중간을 간소화하고 소부대 단위에 중점을 두는 이도 있었다. 군단장들의 보고가 끝났을 때 그레고스가 지금껏 고심해 왔던 문제를 꺼내놓았다.
“여기 웅크려 있을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토벌을 도모해보는 게 어떻겠소?”
보호막 안에서 숨을 놓고 있는 게 영 마땅치 않았던 것일까? 로메로는 그레고스의 내심을 진작부터 엿보아왔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있었다.
그레고스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여타의 지휘관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들이다. 지켜내기만 하면 된다. 책임에 대한 집중력은 파천과 선발대가 돌아올 때까지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굳이 나가서 적을 맞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1군단장인 야마천주가 적극적으로 제 의견을 피력한다.
“저들과 우리의 전력 차는 근소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돌발적인 변수가 있다면 예측은 빗나가겠지요. 굳이 유리함을 버리고 적과 대등하게 겨루어볼 필요가 있을까요? 설사 적을 물리쳤다 하더라도 우리의 손실 또한 만만치 않을 겁니다. 타협할 여지도 없는 일입니다.”
야마천주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설란이 물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변수라도 있나요?”
누구보다 현명하고 신중한 그레고스가 괜히 저런 현안을 꺼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심중에 담아두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는 그레고스의 얼굴이 편치 않아 보였다.
“근래에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그렇소. 옛용에게서 연락이 두절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념이 내 판단을 흐리게 한 듯하오. 괘념치들 마시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로메로가 덧붙였다.
“마령의 본주 때문인 듯싶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에 대해서는 어떤 대비책도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개입이 어떤 식으로든 있을 게 분명한데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지요.
최악의 경우 … 마령의 본주가 보호막을 제거할 능력이 된다면 … 그리고 그 틈을 타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면 그보다 위협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현 시점에 적들의 전력을 위협이 되지 않을 수위까지 줄여놓자는 제안일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 그레고스.
로메로의 상세한 설명이 있고 나서야 모두는 이해한다는 표정들이다. 타당성이 있는 의견이었음에도 여전히 망설여진 수밖에 없다.
이후 여러 가지 수습해야 할 현안들에 떠밀려 일단은 보류되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좀더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기로 했다.

메타트론은 몇 번이나 파천과 영언시도를 해봤지만 결국엔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내린 결론은 다른 이들을 놀라게 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이곳엔 이해할 수 없는 모종의 힘이 존재한다. 비밀차원, 역시 만만한 곳은 아니야.”
처음 그들과 헤어졌던 곳을 들러보았지만 아직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메타트론은 처음으로 난처한 상황에 빠져든 것이다. 루시퍼가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그들을 찾아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들을 찾아내면 결국엔 자연스럽게 만나지겠지요. 현재로선 그 방법밖에는 없을 듯합니다만 … .”
루시퍼가 말끝을 흐린다? 무엇이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메타트론의 심기가 좋지 않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불길함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무슨 일인가 … 판단을 벗어나 있는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메타트론도 파천이 느꼈던 예의 그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의 종적을 찾아내기만 하면 만사가 술술 풀려 가리라 안일하게 생각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적을 찾아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체의 종적을 감지해보고자 멀리까지 확장시켜보아도 일정 영역 이상은 감각이 미치지 않는다. 정체 모를 신비한 힘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메타트론은 그 힘의 실체를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단정 지었다. 그런 확신이 깊어질수록 심정의 외피는 딱딱하게 굳어 간다.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어. 신중해서 나쁠 건 없겠지.’
메타트론과 일행은 또다시 어딘가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이 거대한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한 적을 조금이라도 빨리 조우하기 위해서 그들은 또다시 움직여 가야만 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곳. 이 앞에 다시 서는 순간이 올 줄이야.’
아름드리 석주가 하늘 높이 솟았고 바닥은 기이한 도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나씩의 기둥 마다엔 지면에 연이어 하나씩의 금속판이 둘러져 있고 그곳으로부터 밝은 광채가 흘러나와 사방을 밝혔다. 석주는 동심원을 그리며 7개씩 7겹으로 포진했다. 파천은 첫 번째 석주가 시작되는 지점에 서서 멍한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곳을 세움으로써 사람에서 신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곳에 가둠으로써 우리는 영원토록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더 이상 영혼을 기억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극복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파천은 석주를 쓰다듬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기억의 첫머리쯤에 있을 그 존재를 떠올리자 오싹한 한기가 침습해들었다.
“놀라운 일이야. 그때의 생생한 경험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을 줄이야.”
앞을 향해 한 걸음씩 딛을 때마다 내심에서 솟구치는 불안의 그림자는 점점 더 분명한 실체로 다가온다.
하나, 둘, 셋 … 이제 남은 석주는 단지 하나뿐.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7개의 석주는 다른 것들보다 더 크고 우람했다. 금속판은 한데 이어져 있었고 가운데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정확하게 동신원의 중심자리였다. 표면에 갖가지 형상의 도형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고 석주들의 끝에서 뻗어 나온 사슬들이 한곳에서 만났다. 허리 어림까지 올라와 있는 금속판을 파천의 손길이 스치고 지났다.
스르릉
묘한 기음이 흘러나왔다. 파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리는 음성을 발했다.
“진정 … 진정 봉인이 … 풀렸단 말인가?”
파천은 지금까지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리고 변수를 거기다 하나씩 대입하며 경우의 수를 만들었다. 흐릿했던 단색의 밑그림은 점차 다양한 색감으로 채색돼 갔고 좀더 뚜렷해졌다.

한참 뒤 파천은 눈앞을 살피는 일에 열중했다. 무슨 단서라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잔 경련은 점차 큰 떨림으로 변하며 전신으로 번져 갔다. 석판의 중심 즉, 여러 갈래의 사슬이 하나로 만나는 곳은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그 사이로 번들거리는 것은 시커먼 어둠이었다.
이번만은 예감이 빗나갔기를 빌고 또 빌었었다. 파천은 허탈했다.
“아퀴나스, 진정 … 네가 한 짓이더란 말이냐? 아니길 빌겠다. 만약 네 짓이라면 너와 비밀차원은 아무것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평정심이 깨졌다.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의 감정이 더 컸다.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났다.
아퀴나스였다. 그는 중앙의 금속판을 사이에 두고 파천의 반대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퀴나스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파천의 눈에서 뿜어지는 찬란한 금빛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마땅히 준비했어야 할 변명거리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제 심정 또한 격동하고 있는 파천과 하나 다를 것 없이 동일하기에 그랬다. 파천이 물었다.
“누구 … 짓이냐?”
아퀴나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도 … 모른다.”
그 대답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순순히 긍정할 수 있게 하는 이유는 뭘까? 아퀴나스에 대한 신뢰가 그처럼이나 깊다고 이해해도 좋은 것인가?
아퀴나스가 이번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파천에게는 한 줄기 구원의 빛과도 같이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반겼다. 안도의 숨을 토하며 파천의 눈빛이 원래대로 침착해졌다.
바라봄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아퀴나스는 당연한 의무라도 되는 듯 모든 걸 털어놓았다.
“우리들 중 하나겠지.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봉인이 풀렸다는 사실을 그들 중 누가 알고 있고 모르고 있는지조차 난 여태껏 파악하지 못했다. 입을 열어 그들의 기색을 살필 용기가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
그들 모두를 혐의 대상에 두고 오랜 시간 관찰해 왔지만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중 하나이거나 그들 모두일지도 … 아니면 전혀 엉뚱한 존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도 모르지.
그도 아니면 카오스가 자력으로 봉인을 풀었을지도. 허망한 말이겠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가 자력으로 봉인을 풀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서 제외되지도 않았을 거고 이곳에 갇히지도 않았겠지. 우리들 중에 하나! 다른 존재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 네 말대로다. 카오스의 의지는 봉인을 스스로 풀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지가 못했다. 그의 특성이 힘을 공급받기 용이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 이곳만은 예외로 두어도 좋다.”
비밀차원의 일곱 지도자가 힘을 합해 봉인한 것은 두 가지 경우에만 깨어질 수가 있었다. 첫째는 그 의식에 참여한 당자들 중 하나가 직접 봉인을 깨는 것. 다른 하나는 그들 일곱의 합쳐진 능력보다 월등한 힘으로 봉인을 깨는 것.
그래서 아퀴나스의 결론 역시 파천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엔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아직도 산적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있었다.
“그를 봉인에서 풀어놓아 얻을 게 뭐지?”
무엇을 얻고자 했단 말인가?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를 풀어놓은 자가 정말 우리 중 하나라면 …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얻고자 하는 것을 가졌다면 지금과 같은 구도일 리가 없다. 특이할 만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지금껏 없었다.”
“아니 변화는 있었다.”
“그게 뭐지?”
“ … ?”
“그건 바로 너다.”
아퀴나스는 실소를 흘리며 파천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의심하나?”
“모르겠다. 네가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어둠에 숨은 바로 그자의 의도라면 너를 전면에 세우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네게 영향을 끼쳤을 거란 건 분명하겠지.
네가 원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너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그의 의도가 숨어 있으리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너를 지도자들 중 으뜸으로 만들어서 뭔가를 획책하려 했겠지. 당장에 내가 보기에도 너희들의 균형을 깨어졌고 그로 인해 언제든지 비밀차원은 붕괴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너희들의 문제는 비밀차원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좋다. 그렇다고 해두지. 이젠 … 어쩔 건가?”
“찾아내야지. 놈의 뜻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소멸시킬 수 없다면 다시 … 가둔다.”
아퀴나스는 부정적이었다.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한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키케로, 알고 있나? 그는 예전과 다르다. 이 세계 전체에 그의 숨결이 머물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숨고자 한다면 그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
“드러내길 기대하진 않는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잊었나? 우리들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는 완벽하게 독립된 인격체가 되었다. 그는 위험부담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가져다 줄 욕망의 성취가 크다는 걸 안다.
의도를 더 빨리 이룰 수 있을 기회라고 판단된다면 그리고 직접적인 개입으로 제 손으로 모든 걸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모습을 드러낸다.”
“놈의 목적은 지금도 변함없이 …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것일까?”
“그것만은 변함이 없을 거야. 놈은 더욱 간교하고 신중해졌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던 그가 이토록 오랜 시간 기다려 왔다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봉인을 누가 풀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아퀴나스, 하나만 묻자. 왜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나? 봉인이 풀렸다는 것을 안 순간 모두에게 알려 대책을 세울 수도 있었을 텐데?”
질책인가? 다른 방도라는 게 과연 그 당시에 나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없었다.
“네가 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내가 이곳을 찾게 되었을 때 알게 된 사실은 봉인이 풀린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는 것. 그의 능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을 것이란 두려움.
그래,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 나 아닌 다른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 중 하나에 의해 저질러졌음을 뻔히 알고 있는데 .. 그들 역시 이 사실을 알면서 침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쉽게 입을 열수가 없었다. 기다려야만 했다. 먼저 움직여 주기를, 그래서 어떤 틈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봉인이 풀린 게 사실인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모든 건 원만했고 지극히 평화로웠다. 나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새로운 기대를 갖기도 했었다. 그가 달라졌구나. 내가 알고 있던 예전의 그가 아니구나.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입을 다문 채 어떤 변화가 생겨나기를 기다렸다.”
“코모라의 일은?”
“첫 번째 징후였지. 코모라는 아주 자주 두려움을 드러내곤 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고자 조급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모두에게 배척당했다. 경계하고 있는 한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었던 거야.
그를 지지하던 자들마저 떠나고 홀로 남게 되자 그는 이곳을 박차고 나가 사람들에게로 갔다. 그때 난 처음으로 코모라를 의심하게 되었지. 하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더 이상 회복하지 못했고 중심에서 멀어져 갔다.”
아퀴나스는 파천이 이 세계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변화들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파천은 하나하나 짚어 가며 상세하게 파악해 갔다. 단서를 얻어야만 했다.
‘완벽하다. 놈은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두고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하고만 있다. 아니 과연 그의 개입이 있었을까 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지극히 변화가 느리다. 어디에 있나? 누군가를 통해 무엇을 획책하고 있나?’
제일 걱정스러운 건 카오스가 완전하게 각성하였을 경우였다. 그가 여길 떠날 수는 없다. 비밀차원은 그에게 또 하나의 봉인이었다. 만약 전혀 알 수 없는 변수에 의해 그가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었다면 잠복되어 있는 위험도도 그만큼 커진다.
허나 그것만은 제외시켜도 좋을 기우였다.
‘완벽하게 각성을 한 후라면 …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아직은 때가 이르다.’
아퀴나스가 의외의 말을 했다.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키케로, 너뿐이다.”
그랬던가? 당시 비밀차원에 남아 있지 않았던 파천만이 혐의에서 자유롭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적으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로 인식하게끔 하다니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파천은 아퀴나스와 상당한 시간 동안 진솔한 대화를 이어 갔다. 파천은 아퀴나스가 처음 접하는 내용을 털어놓았다. 아퀴나스가 받고 있는 심정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달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카오스가 된 것이다. 위험한 존재이긴 하지만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이지. 문제는 그를 일깨운 자의식을 파괴하고 영역을 확대시켰을 때다.
그때 각성은 이루어지고 그 순간 그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최초의 동인으로 거슬러 올라간 카오스는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모든 관념들에 혼란을 불러들인다.”
아퀴나스는 궁금했다.
“너라면 … 너라면 제어할 수 있나?”
“아니, 각성한 카오스는 최후단계의 소멸에 해당된다.”
“무슨 의미지?”
“ …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전 이 우주는 대정화의 시기가 오고 곧장 휴식기를 맞게 되지. 카오스의 소멸과 더불어 말야.”
“그럼 … 그렇다면 그의 소멸이 곧 … ”
“그래, 카오스는 세상이 열리는 순간 생겨나지만 각성은 마지막 시기에 이루어지지.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카오스가 봉인을 풀게 된 것이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한 것이라면 … 그것은 각성을 이루었다는 걸 의미하게 된다.”
“그럼 …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것도 … ”
“그 … 런가.”
자조적인 되뇌임은 아퀴나스의 뇌리 속에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스스로의 힘이, 능력이 이 세계에 멸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해 왔었다. 그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에는 약간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광명을 얻은 파천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파천에 대해서도 절망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오스의 각성이랑 것이 그처럼 절망적이 상황이란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파천의 단언은 아퀴나스와 다른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각성한 카오스를 상대하는 건 전적으로 파천의 역할이자 의무이기도 했다. 숨겨진 마지막 파천의 비밀이 바로 그것에 결부되어 있었다.
카오스에 대한 대부분의 비밀스런 사실들이 파천에게서 아퀴나스에게로 전해졌다. 하지만 끝내 파천은 자신과 관계된 부분에 의해서만은 언급을 피했다.

마계의 진영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합류한 마르시온은 자신을 억압할 존재가 사라지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위세를 보였다. 제 속을 남에게 숨기지 않는 다소 직설적인 성격의 마르시온은 마계의 대포자인 헤르파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불만이 가득한 논조로 한껏 기세를 올리며 헤르파를 압박했다. 장시간에 걸친 마르시온과의 논의는 헤르파의 심신을 피곤하게 할 정도였다.
“이대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을 참인가? 이렇게 소심한 자가 있나. 함께 도모함이 마땅치 않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메타트론님의 당부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독자행보를 선언했을 것이다.”
상대에게서 반응이 없자 마르시온은 더 큰 소리를 내어 헤르파를 힐난했다.
“싸움을 겁내는 자가 어찌 마계를 대표하게 되었을까!”
이쯤 되면 누구라도 반응이 있기 마련인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눈을 반개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몰입해 있는 것이다.
심기가 상했던지 마르시온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마르시온이 탁자를 내리쳤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석물로 된 탁자가 쪼개지며 주저앉았다. 돌가루가 날리는 사이로 마르시온이 벌떡 일어서 있었다.
“좋다. 나 혼자서라도 공격을 감행하겠다. 네가 파천의 아들이었다고 듣긴 했으나 루시퍼의 양자가 된 이후로 과거를 버렸다고 여겼거늘 이제 보니 그 모든 것이 위장에 불과했구나.
그런 줄도 모르고 너한테 마계의 대군을 맡긴 루시퍼가 가련하기 그지없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너와의, 아니 마계와의 동맹은 없었던 일로 하겠다. 추후 루시퍼가 돌아오면 그에게 이 일을 추궁하고 따지겠다.”
그제야 헤르파가 눈을 떴다. 실내엔 그 둘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헤르파의 뒤엔 언제나처럼 라넷이 그림자인 양 함께 하고 있었다.
라넷은 마르시온의 방자한 행동이 못마땅한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고 있었다. 헤르파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음색은 영락없이 파천을 닮았다.
“진정하시오. 그대의 재촉함이 아니라도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으니.”
“뭐라고!”
“그대의 말처럼 당장 진격해서 얻을 게 있다면 왜 그리 않겠소. 얻는 건 곳하고 모두를 잃을지도 모르기에 주저앉아 있는 것 아니겠소?”
“부딪쳐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니 이런 약골을 루시퍼가 왜 양자로 받아들였는지 모두지 알 수가 없구나.”
헤르파는 빙긋 웃기만 했다. 마르시온이 남에게 드러내는 행동과는 달리 사실은 속이 깊으며 음흉한 위인이란 걸 헤르파는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의 과장된 모습도 실상 진실된 속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짐작한다.
헤르파는 진심으로 동조한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나 또한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소.”
엉뚱한 대답에 마르시온은 헤르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팔짱을 낀 채 마르시온이 물었다.
“전략은 세워두었는가?”
“전혀.”
“언제쯤 공격명령을 내리려고?”
“모르겠소.”
“허, 이런 답답할 데가 있나.”
“그러게 말이오.”
“흐음.”
이번엔 헤르파가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나도 모르겠다.”
“공격은 해야겠지요.”
“해야겠지.”
“방법은 있소?”
“없다.”
“마찬가지구려.”
“크크 … 하하하하.”
둘의 고민은 동일했다. 보호막! 파천이 안배해놓은 보호막이 마계와 제왕의 군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었던 것이다. 헤르파가 다시 물었다.
“침투할 수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되오?”
“박박 긁어보아도 백 명이 채 안 된다. 너희는?”
“몇 되지 않소.”
“푸하하, 이거 마계의 위신이 말이 아니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그 인원으로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적이 원하는 일을 할 참입니까?”
“ … .”
방법이 없었다. 그 정도의 수로 침입한다면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제왕들만 없었어도 … 눈치 보지 않고 때려잡겠는데.”
“마르시온의 중얼거림처럼 하룬 측에 합류한 제왕들이 걸림돌이었다. 그들만 없었어도 망설임은 덜했을 것이다. 전력을 총집결해 부딪친다 해도 서로 어느 쪽이 우세하다 장담할 수 없게 된 지금 소수의 인원만으로 침투한다는 건 쓸데없는 전력 낭비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만 보내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어떻게 해서든 변수를 만들어내야 할 입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둘에게는 그런 잉여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마령의 본주!
헤르파와 마르시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접촉할 방법도 끌어들일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그가 과연 동맹을 해도 될 만한 자인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어쨌든 현재로서 그 또한 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일단 돌파구를 뚫어놓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할 수만 있다면 동맹을 선택하게 될 테지만 막상 닥친다면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은 소득 없는 논의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지 입을 다물고 가만있었다. 뒤에 있던 라넷이 마침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둘의 입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헤르파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누구?”
“카르마.”
헤르파가 흠칫하는 걸 마르시온은 놓치지 않는다. 헤르파에게서 대답이 없다. 라넷도 더 이상 말을 않는다. 이렇게 되자 궁금한 건 마르시온.
“카르마가 누구지?”
‘마계에 그런 자가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시점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것.’
마르시온의 입장에서는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라넷이 가능성을 인정할 정도의 존재.
헤르파는 부정했다.
“안 돼.”
듣기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보호막을 제거할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미인지. 마르시온은 편한 대로 전자의 해석을 취했다.
“하긴 마계에 루시퍼 말고 그런 강자가 또 있을 리가 없지.”
그런 자가 있었다면 자신이 모를 리 없다는 생각으로 호기심을 접었다.

“왜 그랬지?”
“뭘?”
“카르마를 왜 언급했냐고!”
“너까지 그럴 건 없잖아.”
“무슨 뜻이야?”
“몰라서 물어? 내 앞에서까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용해야 해. 너도 알고 있잖아. 비밀차원에서 돌아 온 메타트론님이 누구한테 책임을 물을까? 루시퍼님은 몰라도 그 분이라면 용서라는 건 없을걸.
전력을 다치지 않고 유지했으니 잘했다고 할 줄 알아? 본계의 전력이 어찌 되는 것 따위엔 관심도 없어. 관망하고 있을 때가 아냐.
카르마를 이용해서라도 하룬에 타격을 입혀야 해. 제왕의 군대와 본계의 전력을 모조리 잃더라도 해야 한단 말야.”
“안 돼.”
“왜? 왜 안 된다는 거야?”
“카르마는 … 우리에게도 적이야.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 아무 짓도 안 해보고 그냥 이대로 당하자고?”
“카르마는 안 돼. 그를 내세울 때가 올 거야. 적어도 지금은 아냐.”
카르마!
마계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런 존재였다. 잊혀졌다가 메타트론의 등장으로 다시 알려진 존재였다. 메타트론의 밀명을 받은 어둠의 천사들이 루시퍼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낸 것이 마계전사다. 메타트론과 루시퍼의 마력이 적절하게 융합된 존재가 마계전사라면 카르마는 순수하게 메타트론의 힘만으로 생겨난 존재였다.
마계 전사라는 것도 알고 보면 카르마를 본떠서 만들어낸 것이다. 카르마는 메타트론에게만 순종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복종한 것일 뿐 충성심 따위를 기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메타트론은 처음 카르마를 루시퍼에게 주었다. 루시퍼는 카르마를 대마신들처럼 자신의 의지로 부릴 수 있는 종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아니, 그건 애초에 무리한 욕심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대마신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루시퍼는 점차 카르마가 부담스러워졌다. 결정적으로 부담을 가중시킨 건 카르마에 대한 대마신들의 시선이었다. 카르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루시퍼와 닮은 점이 많았다. 메타트론의 분신이라는 점과 오직 그에게만 종속된다는 특별한 지위, 거기에 걸맞는 탁월한 능력까지.
그들 사이에 실제로는 어떤 관계가 형성돼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주변에서 보기엔 루시퍼와 카르마는 경쟁 관계처럼 보였다. 대마신들은 이런 구도가 메타트론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라 여겼다. 루시퍼가 카르마의 존재를 부인하듯 카르마도 루시퍼를 무시했다.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여긴 어둠의 천사들이 이 사실을 메타트론에게 보고했고 메타트론은 즉각 카르마를 소환했다. 만약 그 당시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마계에는 그 뒤로도 상당한 혼란이 있었을 것이란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헤르파는 카르마를 딱 한 번 대면한 적이 있었다. 메타트론이 떠나기 전 주선한 자리에서였다. 메타트론은 카르마에 대한 명령권을 헤르파에게 이양했다. 그런 조치는 헤르파로서 이해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랬다.
메타트론은 하룬을 멸망시키지 못해도 좋다고 했다. 마계의 전력을 모두 잃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마음껏 시도해보라고 격려 했었다.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하룬에 타격을 입히는 것. 영계에 닥쳐오는 혼란이면 족한 것이다. 얻어내고 싶은 결과는 어차피 자신의 몫이라는 판단일 것이다.
이런 걸 깨달은 헤르파이기에 더욱 카르마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지만 메타트론의 명령마저 무시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보호막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음에도 처음부터 카르마를 염두에 두지 않은 데엔 그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호막을 제거한 뒤에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는 것 아냐?”
라넷의 의견에 헤르파는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를 먼저 쳐온다면? 그가 되려 걸림돌이 된다면? 양쪽을 모두 적으로 돌리고 싸움을 걸어온다면 그때는 어쩌지? 그리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 의심스런 점이 있어.”
“뭔데?”
“마계전사들은 내 명령을 따르긴 하지만 그에게도 순종해.”
라넷으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만약 … 내 뜻과 그의 지시가 다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어.”
마계군의 핵심 전력을 이루고 있는 마계전사들의 반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
“알아. 나도 알고 있어. 내가 지휘관의 책무를 지고 있는 이상엔 내 스스로 용납할 수 있는 명령만 내릴 거야.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전과(戰果)의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면 너무 비참하잖아.”
“힘든 길이 될 거야. 너도 알잖아. 저들은 소모용일 뿐이야. 마계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꿈은 사라졌던 거야. 전부를 다 가지지 않는 한 나눠 가질 소망은 없어. 루시퍼님이 메타트론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저들이 누려야 할 권리란 아무 것도 없어.”
라넷은 자신이 마계의 일원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옳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선택했기에 최선을 다하리란 입장일 따름이었다.
확고한 신념까지는 아니어도 좋았다. 다른 성향의 존재들에게 언제나 악마로 지칭되는 루시퍼였지만 적어도 자신만은 그렇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메타트론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했지만 따르는 자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겠다는 의지에서만은 분명한 상이점이 있었다.
루시퍼는 인정받고 싶어 했다. 메타트론에게, 자기 자신에게, 따르는 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이루는 길이 존재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라넷은 루시퍼를 존경한다. 그것만은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메타트론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이 그 모든 것들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만 할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상황은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해져버린 것이다. 루시퍼는 메타트론을 결코 거역할 수 없으리란 점. 그래서 마계의 희생은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헤르파는 그래서 비극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라넷은 헤르파를 가련하게 여겼다.
“판단해 보겠어. 그런 연후에 최소한 선택할 기회를 주겠어. 그전까지는 카르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헤르파가 카르마를 찾았다. 어둠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눅눅함을 즐기는지는 모르만은 카르마는 언제나 지하에 머물러 있었다. 긴 머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죽은 듯 숨죽이고 있었다.
지하토굴의 표면은 물기를 머금고 있다가 조금씩 뱉어낸다. 카르마가 앉은 곳은 물이 고여 작은 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헤르파는 이런 곳에 머물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듯한 카르마가 이상했다. 하긴 애초부터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찾아 왔음에도 카르마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는 건 무시한다는 의미겠지.’
헤르파는 카르마의 앞에 가 섰다. 메타트론을 따라 찾아왔을 때와는 전혀 대하는 심정이 달랐다. 헤르파는 고심했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까? 언제든 야수로 돌변할 수 있기에 경계심을 먼저 허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로 왔나?”
의외였다. 헤르파는 카르마의 음성을 처음 들어봤다. 묵직하면서도 탁하지 않은 음성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을 것 같은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카르마에 대한 선입견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낯설게 만들었다.
‘무슨 일로 왔더라?’
헤르파는 일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가 카르마를 보러 온 것은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 .”
헤르파가 당황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카르마에게서는 메타트론이나 루시퍼에게서 느낄 수 있는, 상대를 억누르는 위압감 같은 건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마력보다도 더 칙칙한 느낌의 기류가 항시 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헤르파는 그 기류가 더 짙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전율했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르파는 서고 카르마는 앉았기에 긴 머리에 가려 용모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헤르파는 이 순간 카르마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 혼자 날 찾아오다니 … 용기가 있구나.”
“당신도 … 그렇소.”
잠시 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느끼기만 했다. 헤르파는 자신이 먼저 방문해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상대에게서는 어떤 반문도 없다. 이제 관심을 거둔 걸까? 메타트론과 함께 왔을 때도 카르마는 반응하지 않았었다. 단 한 번의 끄덕거림, 그것이 전부였었다. 그것도 매우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반응이었을 뿐이었다.
카르마를 진솔하게 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왜 들었던 걸까?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
“ … ”
“아직은 결정된 건 아니오. 내가 부탁하면 해줄 수 있겠소?”
“ … ”
“메타트론님이 말씀하셨소. 당신이 내 부탁 … 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 .”
헤르파는 그 말을 꺼내놓고 또 후회한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했겠지.”
맞는 말이었다. 메타트론은 분명히 명령이라고 했었다.
“어쨌든 … 해줄 수 있소?”
“ … .”
“지금 우리에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카르마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을 본 헤르파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눈알이 터질 듯 아파 왔다. 카르마의 눈은 투명했다.
“루시퍼를 신뢰하고 있나?”
첫 질문치고는 좀 엉뚱했다. 헤르파는 고민 없이 즉각 대답했다.
“그렇소.”
“메타트론은?”
“모르겠소.”
“멍청한 놈이군.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야, 너는.”
무슨 뜻일까? 헤르파는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루시퍼도 메타트론도 믿지 마라. 그들은 신뢰를 받을 만한 자들이 아니다. 겁내지 마라, 운명에 맞서지 않고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해. 달라진 것 없어. 그들의 마력이 널 변화시키긴 했지만 네 본질마저 훼손시키진 못했다.”
카르마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낸 적이 과거에 단 한번도 없었음을 헤르파는 알지 못한다.
“왜 네 자신을 그들에게 종속시키려 하지? 넌 너일 뿐 그들이 될 수도, 그들의 뜻을 대신할 수도 없다. 넌 결국에 버림받을 것이고 그들을 신뢰했던 만큼 네 자신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모든 걸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마시오.”
“맞아. 나 또한 네 전부를 알지는 못하지.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알고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널 위해 써도 부족한 시간이다.”
“당신은 … 그러는 당신은 왜 그러고 있소?”
“나? 나에 대해 말해줄까? 나는 말야 … 루시퍼처럼 메타트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아. 거부했지. 왜냐고? 짜증이 나는 일이거든. 난 이런 날 매우 좋아한다. 난 내가 원하는 일만 한다. 내 관심은 온통 어떤 일을 해야 기분이 좋아지는가에 집중돼 있어.
아직은 날 완전하게 아는 건 아냐. 조금씩 파악해 가고 있는 중이지. 내 속성은 메타트론에게서 나왔어. 그의 어떤 부분이 날 이렇게 만들었을 거야. 난 파괴하는 것이 즐겁다. 나로 인해 다른 존재가 고통 받는다는 사실만이 흥분시킨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냐.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지. 메타트론은 내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야. 그는 기실 아무것도 파괴시키지 않지. 그는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여.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위치를 격상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멍청이야.
그래서 그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온전하게 사용하지 못할 때가 많아. 왜인 줄 아나? 자신이 정해놓은 테두리마저 파괴될까 봐 두렵거든.
하지만 난 달라. 내겐 그런 것 따윈 없어. 이세계의 존재유무와 내 기분과는 관계가 없거든. 그래서 난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아.”
그는 정말 많은 말을 한꺼번에 했다.
“메타트론이 분명 그랬을 거야. 모든 걸 파괴시킬 위험한 존재라고.”
“한마디를 더 덧붙였었소.”
“뭐라고?”
“그래서 자랑스럽다고 했소.”
“자기 만족감을 위해서였겠지. 사실 난 메타트론에게도 골치 아픈 존재지. 아직은 써먹을 데가 있으니 내버려두는 거겠지만 이용 가치가 없었다면 진작에 소멸됐을 거다.”
“그런 걸 알면서도 왜 그 곁에 머물고 있는 거죠?”
“내가 그를 떠나는 건 극복해냈을 경우에 한정돼 있다. 아니면 최소한 그 방법을 알게 됐을 때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길에 내 소멸을 걸 수는 없는 일이거든. 그 전에는 어딜 가도 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나나 루시퍼나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지. 그걸 자랑스러워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네게도 그 족쇄가 보여. 하지만 그건 네 스스로 채운 것이야. 언제든 풀 수 있는 약하디 약한 것에 불과하지.”
과연 그럴까? 헤르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인 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인 것 같아서였다. 카르마를 대면라고 있는 목적에 생각이 닿았다.
“하룬을 공격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소.”
“보호막을 제거해 달란 거였군.”
카르마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소.”
“메타트론이 떠나면서도 같은 말을 했지.”
그랬던가? 메타트론은 카르마가 보호막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의 판단이 그랬다면 아마도 맞을 것이다. 고민을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을 희망이 생겨서일까? 헤르파의 얼굴이 표가 날 정도로 밝아졌다.
하지만 메타트론도, 헤르파도 몰랐던 것이 있었다.
“해줄 수 있소?”
“왜 그래야 하지?”
얘기가 이쯤 진행되고서도 헤르파는 종잡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해주시오. 할 수 없다면 모를까, 할 수 있다면 해주시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다.”
“몰라서 묻소? 보호막을 제거해야 효과적인 공격을 … .”
“내가 왜 그 일을 해줘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판단이 중요하지 너나 메타트론의 입장 따위엔 관심이 없다. 지금껏 내가 한 말은 허투루 들었나 보군. 하룬과 너희들 간의 싸움에는 관심이 없는 건 마찬가지겠지. 전혀 흥미를 못 느껴.”
이런 황당한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걸까?
헤르파는 카르마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아직은 그가 두렵기 때문이다.
“거부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하지만 왜죠? 메타트론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다니 결과가 두렵지도 않소?”
“권태를 아나? 내겐 그 이상의 두려움이란 없어. 나에겐 다른 가능서이란 것이 없어. 감정이란 것도 상당히 제한적이지. 메타트론으로부터 한계가 정해진 규격품의 비애라고나 할까. 내가 그의 지시를 이행하지 잃은 것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 위한 나름의 처절한 몸부림이지.
하지만 단정 짓지는 마. 내 안의 나는 네 생각보다는 꽤 복잡하니까. 내가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는 나 자신도 모르는 일이거든. 흥미가 생기면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할지도 몰라.”
헤르파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 나와야만 했다. 카르마는 철저하게 자신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나름의 방식으로 외부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처음은 언제나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답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의 구분. 그가 확인하고픈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작과 마침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것이 메타트론이라는 것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고 별개로, 독자적으로 생존 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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