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2화 : 숙명의 존재, 파천과 카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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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72화 : 숙명의 존재, 파천과 카오스


숙명의 존재, 파천과 카오스

헤렘은 자신이 벌써부터 발각돼 주시 받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적에 대한 정보라면 아무리 하잘 것 없는 것이라도 도움이 되는 법이다. 적의 중심부까지 들어온 데는 적의 기밀을 탐지해 사령관인 헤르파에게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란 지적을 받는 때가 많았다. 좀더 신중해지란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으며 특히 대마신들이 그 말을 하며 함께 지어 보이는 비웃음은 그녀를 한없이 비참하게,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메타트론이 떠나며 공격명령은 내려져 있는 상태였고, 의문 없이 두려움 없이 전진을 해야 할 마계군은 한심하게도 웅크린 채 아무런 시도조차 못하고 있었다.
고민만 하고 있으면 해결될 일이란 없다. 뭔가 결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헤렘의 용기는 칭찬 받을 만한 것이었다. 자신이 마계 지도부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입증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한 일도 감행할 수 있는 헤렘.
하지만 용기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실수라면 자신의 능력을 좀더 냉정하게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과 그래도 꼭 해야 직성이 풀릴 일이라면 좀더 준비를 한 뒤에 결행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룬이 무턱대고 몸을 집어넣고 보자는 식으로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던가?
성내의 지리를 모르니 조심스러웠고 어딜 가도 경계가 삼엄하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잠입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여기자 자신이 무척이나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이런 생각은 반대로 하룬을 경시하는 마음을 부추겼다.
‘그런데 정작 어디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 한 놈을 골라서 제압해야 하나.’
그녀는 점점 대담해져 갔다.
지켜보던 제왕은 헤렘의 기색에서 침입자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지를 알아채고는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그것도 거미줄 같은 통로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말이다.
당장이라도 제압하여 꿇어앉힐까도 생각했지만 하는 양을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저쪽에서 경비를 서던 두 명의 전사들이 헤렘이 숨어 있는 쪽으로 막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헤렘은 그들을 제압하려다 그만둔다. 반대쪽에서 인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두 명이었는데 방금 지나간 자들과는 달리 얼굴에 은색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헤렘은 그들이 내뿜는 기세가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알고 긴장했다.
복도의 천장 속에서 숨죽이고 스며들어 있어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다지만 얘기가 틀려진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지만 적의 심장부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걸 그제야 실감하게 되었다. 이대로 마음을 고쳐먹고 되돌아 나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러기엔 이만큼 순조롭게 성과를 올린 것이 아까웠다.
‘설사 들킨다 해도 내 한 몸 빼내지 못할까!’
은색의 탈을 얼굴에 뒤집어 쓴 자들이 우연인지 헤렘의 아래에 와 섰다. 그리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헤렘은 얼마나 긴장이 됐던지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조차 도통 집중할 수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왜 이리 더디게 간단 말인가? 다시 움직일 기색을 보이자 그제야 헤렘은 한숨을 돌리며 마음을 놓았다. 저만큼 가던 둘 중 하나가 멈칫하며 돌아서는 게 보였다. 그자의 하는 말이 이제는 똑똑히 들렸다.
“이상한데?”
“뭐가?”
“좀 전 미세하긴 했지만 분명 … .”
“분명 뭐?”
“확인해봐야겠어.”
삐익
신호인 듯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한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수십 명의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지금부터 이 일대를 수색한다. 3명이 한 조를 이루되 건성으로 하지 말고 면밀히 살필 것. 수상한 자가 발견되면 먼저 동료에게 알린다. 성급하게 제압하려다 놓치는 일이 없도록, 모두 알았나?”
“네.”
그들은 지혜전사들이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곳을 지나치던 자들이 지혜전사단 부단주인 화천주와 호천주일 줄이야.
그들은 지혜전사단 부단주라는 신분 외에 천상계의 33천 중 두 곳인 화천과 호천의 천주였다. 아무리 헤렘의 능력이 대단하다해도 이런 막강한 자들의 눈까지 속이기엔 뭔가 허점이 있었던 것이다.
딱 집어내진 못했지만 미심쩍은 기운을 감지했고 감지한 이상엔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란 점도 헤렘에겐 불운이었다. 아무리 거대하고 견고한 방어막도 틈에서부터 무너지는 법이란 사실을 호천주는 잘 알고 있었다.
명령을 수행하는 지혜전사들은 일대의 구역을 작은 조각으로 나눠가며 면밀히 살펴 갔다.
헤렘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조사가 시작됐으니 들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하나하나가 쉽게 볼 수 없는 강자들뿐이니 정면 대결도 무모하다.
도주할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탈출해보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이상 헤렘은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타의에 의해 기회를 박탈당하고 만다.

‘어찌 이런 일이 … 믿을 수가 없다.’
헤렘은 부정하고 싶었다.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어려움을 느끼게 했던 대마신들도 이런 정도의 능력을 보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지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어떤 수법에 당해서 누구에게 포로가 된 것인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헤렘을 사로잡은 납치범은 제왕이었다.

헤렘은 제왕에게서 로메로에게로 넘겨졌다.
그녀가 마계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이곳에 어떤 목적을 띠고 침투했는지 나아가서 현재 마계 진영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등, 그녀에게서 알아내야 할 것들이 많았고, 이러한 이용 가치가 있는 한 포로는 사령부에 넘겨지는 게 적절하단 결론이 제왕들 사이에서 내려졌지 때문이었다.
만약 헤렘이 조금만 더 약했다면, 아니면 사령부 내로 침투하지 않고 곧장 하룬을 떠나려 했다면 그녀는 잡히지 않아도 좋았을 뻔했다. 제왕들은 하룬의 협력자일 뿐 종속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현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감시하고 있는 것도 하룬 지도부가 시켜서가 아닌 자발적인 결정이었다. 침입자는 적이고 적은 사로잡거나 척살해야 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반드시 인계해 달라는 협조 요청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헤렘이 제왕의 손에 사로잡혔다 해서 반드시 하룬의 지도부로 보내질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사로잡은 포로가 범상치 않으니 놓아주기도 어렵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심문을 하자니 그것도 귀찮고 성가신 일이다. 그래서 지도부로 보낸 것이다.
헤렘은 밀폐된 작은 공간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로메로가 보니 제왕들이 그녀를 어떻게 해놓았는지 눈과 귀와 입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보고 듣고 말할 수만 있게 해둔 것이다. 몇 번이나 힘을 모아보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헤렘은 그만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로메로가 헤렘을 찬찬히 살폈다. 마계의 인물 중 그가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직접 대면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괜찮은가?”
포로의 안부를 먼저 물어온다.
헤렘은 이미 각오를 하고 있던 차였다. 죽음을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데 심문자로 들어온 자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해 보인다.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온 것이다. 헤렘을 대답을 못했다. 가만있었다.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헤렘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로메로는 먼저 했다.
“몇 가지만 묻겠다.”
“내가 본계에 해가 될 단 한 마디도 해줄 성 싶었더냐? 시간 낭비이니 어서 죽여라.”
“네 이름은?”
“ … .”
“마계에서의 지위는?”
입을 앙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로메로는 탄식하며 말했다.
“네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벌써 몇 명은 알게 되었고 곧 더 많은 자들이 알게 된다. 그들은 내게 압력을 가해 올 것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네 입을 열게 할 것이고 마계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남김없이 토설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내세울 무기는 ‘더 많은 선한 사람들을 위해서’ 바로 이것이지.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알고 싶은 것을 얻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몇 가지만 말해준다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다.”
“죽여주겠단 의미냐?”
“아니. 죽음은 그리 쉽게 결정되지 않을 거야. 다시 묻겠다. 이번에도 성실한 대답을 하지 않을 시엔 널 다른 이에게 맡기겠다.”
그 다음 순서는 뻔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곧 다가올 고통의 순간을 상상하자 전신이 부르르 떨려 왔다. 헤렘은 헤르파와 라아그를 떠올렸다.
‘오빠 … .’
“네 이름은?”
헤렘은 눈을 감았다. 고집스런 의지의 표현이었다.
“휴우, 다시 오지. 그때까지 고민해보도록. 생각이 바뀌길 바라마, 널 위해서라도.”
로메로가 사라졌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서로 교차했다. 단 한 번도 고통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수도 없이 보았다. 상급 마신인 아수라들이 하급 마신인 나찰들을 벌주는 장면은 마계에선 매우 흔한 일이었다.
괴로움에 울부짖던 나찰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헤렘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변화의 주체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았다.
전부를 통찰할 위치에 있는 소수로부터 모두에게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다. 비밀의 열쇠는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아퀴나스와 파천에게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지금의 상태가 어떤 극심한 변화로 가기 전, 폭풍전야와도 같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단지 그들 둘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의 당면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변화의 시작점에 불과하며 그보다 더 큰 위협이 혼란 속에 잠복되어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기엔 저마다 갖고 있는 정보가 미약했던 것이다.
아직은 그 무엇도 결정된 것이 없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배열에서 파천과 아퀴나스는 판단의 선, 후를 잘못 배치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실수로 보이는 그것조차에도 파천의 안배가 담겨 있었다. 파천은 지금 거대한 모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극복할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을 단번에 풀기 위한 도박이었다.
아퀴나스는 자신들의 동류에게로 갔고 파천은 선발대를 찾아 나섰다.
카오스의 존재를 좀더 확실하게 전달하고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전혀 엉뚱한 양상으로 번져 가는 지금의 흐름 이전에 좀더 빨리 대처할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
아퀴나스는 처음 파천이 자신에게로 왔을 때 카오스에 대해 먼저 언급했어야 옳았다. 파천 또한 비밀차원에 드리워져 있는 또 다른 위협요소를 미리 대비하고 판단했어야 했다. 어쨌든 지난 일을 후회해봐야 돌이킬 방법은 없다.
수호자가 곁에 있고 선발대원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카오스의 존재는 파천의 내심을 단숨에 불안에 사로잡히게 할 만큼 비중이 컸다.
영언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건 카오스가 이 세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걸 뜻한다. 조급해할 만도 하건만 파천은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검은 불꽃이 하늘을 거슬러 오른다. 잔잔한 수면 위에 꽃잎 하나가 내려앉은 듯 파문은 느리게 공간을 밀어내며 기이한 형상을 만들었다. 거대한 불꽃은 파천이 향하는 방향을 점한 채 자꾸만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파천은 알 수 있었다. 카오스가 온 것이다. 카오스가 자신을 찾아왔다.
“나그네의 방황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나?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나?”
부드럽고 정겨운 음성이었다. 맑고 영롱한 목소리는 음률이 느껴지는 듯 고저가 분명했으며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파천이 광명을 얻고 난 이전이었다면 반응은 즉각적이었을 것이다. 다짜고짜 힘으로 제압해보려 시도했을 것이다. 주어진 삶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질문만큼이나 카오스는 현재의 파천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자신이 넘어서고 극복해야 할 두 번의 능선 중 첫 번째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키케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구나. 모두가 네게 동의하고 있어. 내게 속한 생명마저 네게 반응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야. 전혀 다른 속성임에도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보여지는 카오스는 규정짓기 힘들었다. 메타트론이 되었다가 라미레스가 되기도 하고 다시 설란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그를 둘러싼 검은 불꽃이 아니었다면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기는 분위기마저 동일했다. 파천은 카오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정령에 불과하다. 실체를 찾아야 한다. 어딘가에 숨겨둔 카오스의 본체를 제압하지 않는 한 제거할 방법은 없 … 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어. 네가 돌아오길 기다렸지. 너희들 일곱 수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왔어. 너희들을 자유롭게 해준 대가가 고작 차가운 배신이라니. 하지만 그 바람에 나는 완전하게 각성을 이룰 수 있었고 내 역할이 무언지를 깨닫게 되었지.”
파천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완 … 전한 각성이라 … . 복수를 생각하고 있나?”
“아니. 내게 그런 저급하고 하찮은 감정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단지 나는 내 할 일, 역할을 담당할 뿐이지.
이곳은 새롭게 정화될 것이고 내 의지가 유일한 법칙이 될 거야. 새로운 세계에 너희들의 의지는 필요치 않아. 너처럼 특별한 존재는 거추장스럽기만 해.
너는 날 알 거야, 그렇지? 말해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너는 우리의 잘못된 염원이 만들어낸 비틀린 존재일 뿐이다. 네가 의지를 지녔다 해도 그것은 너로부터 발원된 게 아니다. 넌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말이야. 그렇게 따지자면 너도 마찬가지겠군. 이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여, 말해보라. 너와 내가 다른 점이 뭐지?”
“나는 허락되었고 너는 유기되었다. 난 필연의 산물이지만 넌 부조화의 우연성이 만들어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조금만 관점을 바꿔보면 모든 건 달라지지. 너는 긍정하지만 난 부정하거든.
부정의 의지는 무한한 자유를 준다. 나는 내의지로서 날 살피지만 너는 무언가에 기대어 널 규정한다. 그것의 차이는 실상 그리 큰 것 같지 않으나 지금의 너와 나처럼 이리 큰 간극을 벌려놓기도 해.
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꽤나 당황되는 것이었어. 지금도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네게 영향을 미칠 수 없어. 무척 실망스럽더군.
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너를 내게 종속시키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결국 일곱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해. 그래서 나는 슬펐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리 긴 시간을 침묵으로 인내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무척 흥미로운 걸 알게 됐어. 너의 완전성을 한번에 무가치한 것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은 놀랍고도 신비한 발견이었지. 그래서 난 더 이상 숨지 않고 네 앞에 날 드러내놓기로 했다. 내 의지 아래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계. 완전성을 향한 첫걸음을 네 앞에서 선포하고 싶었다.
이제 이 세계를 나의 것이고 그 안에 속한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야.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건 엄연한 진실이야. “
파천의 호흡은 여전히 고르고 편안해 보였으며 표정은 아늑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카오스의 선언이 파천의 심정을 자극하지 못한 걸까? 그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애쓰며 위장해야 하는 건 카오스의 선언 뒤에 숨은 불안감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굳이 파천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상대한 또 다른 수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실체가 아닌 정령으로 나타나게끔 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오스가 발견했다는 자신의 약점이 뭔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카오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적극적인 자극이 필요했다.
“너는 끊임없이 무너뜨리고 혼란스럽게 하고 파괴시켜야 하지. 통제의 끝은 결국 소멸에 다다른다. 그 이후엔 너 또한 같은 길을 가야하고.”
“그것이 어때서? 당연한 것 아닌가? 생겨난 것은 종국엔 없어져야 하고 번성하는 것은 쇠퇴하기 마련인 법. 어느 누가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까?
너희들 사람들만이 그것을 부정하고 끝내는 저항하지. 너희들의 비틀린 의식이 날 만들어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임을.
우주의 유일한 중간자들. 그런 점에서 너희야말로 무척 흥미로운 존재지. 변화의 동인이기도 하고 자극의 전달자이기도 해.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지.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전체에서 개체를 구별시킴으로써 제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무수한 관념들을 확대재생산 해내고 그것들로 자신들마저 구속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 자유가 주어졌으나 누릴 줄도 모르고 존귀함을 버리고 스스로 비참함에 거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존재들.”
파천은 카오스의 말에 일정 부분 수긍했지만 완전한 동의를 할 수는 없었다.
“아, 반박할 필요는 없어. 논쟁하고자 널 찾아온 것은 아니니까.”
카오스는 파천을, 파천은 카오스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서로는 어떤 측면으로 반대적인 극점을 대표할 수 있음에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 또한 적지 않았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는 점, 그것이 둘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었다.
카오스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나는 너 이전에도 널 만났고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이런 순간을 거듭해 왔다. 각성의 순간 난 널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후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흥분되고 짜릿한 순간이 활짝 문을 열고 너와 날 기다리고 있다. 결말은 예상보다 시시하겠지만 그 과정만은 충분히 즐거운 기억들일 거야. 이번에는 특히 더 기대가 된다. 예전과는 다른 조건이 하나 더 생겨났기 때문이지.
언제나 너와 나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대립하는 숙명을 안고 생겨났다. 너의 역할은 조금씩 궤를 달리하긴 했으나 대립의 정점에 네가 있는 건 동일했지.
예전의 너에게서 약점이란 걸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그래서 난 언제나 패배자로 남아야만 했다. 허나 지금은 그때와 달라. 널 곤란하게 할 든든한 조력자들. 너에게서 끝나지 못한 인연들. 네 스스로 거부한 특권들. 모든 점에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유리한 상황이야.
네가 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로 네 힘이 되어 줄지는 모르지만 … 이번만은 나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내 예상대로 이 세계가 … .”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군.”
“당연한 것 아닌가? 네 말처럼 넌 한 번도 날 이긴 적이 없고 그 사실이야말로 이 세계를 지탱하는 변함없는 법칙이야.
네 출현 시기도 그렇고 모든 정황들이 너무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서 대비할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 조건이 달라졌다고 보긴 힘들지.
너와 나 또한 이 세계의 일부. 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틀을 깨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너는 여전히 전달자일 뿐이다.”
“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틀을 깨고자 하는 게 아냐. 무대의 주역을 교체하는 것이지. 모든 운행이 소멸하고 잠시 잠복하다 다시 창생할 때에 한 기울을 빌어 태를 삼고 터전을 삼으며 끝내는 마침을 기약하니 지금껏 단 한 번도 오름과 내림이 바뀌지 않았다.
이것이 절대로 변치 않아야 할 진리라 그런 것이 아니요, 단지 그 행하는 순서가 크게 바뀌지 않아서일 뿐이다. 내 이제 그것을 바꿔 다음의 세상을 크게 혼란케 할 요량이다.”
이제야 파천은 카오스의 의중을 완전하게 알게 되었다.
세상에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있는 건 없고, 과거에 그리하였다 해서 반드시 같은 결과가 생겨나란 법도 없다.
내재된 성질의 차이가 그렇게 행도하게끔 만드는 것이지 옳고 그르다는 가름을 적용함도 마땅치는 않다.
파천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둘은 숙명적인 적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나 강렬한 투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파천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판세를 짚어본다.
‘내가 이 세계를 현재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이나 카오스가 혼란으로 크게 요동케 하려는 것이나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에서 비롯된다. 나의 반응은 오름의 극치요, 카오스는 내림의 극단이다. 처음의 동인이 신이요, 이후의 동인은 사람이며 마지막 동인은 조건들이 결합된 순차적인 의지다.
카오스의 현재는 사람들의 의지의 소산이지만 이미 독자적인 의지 체계를 지니게 되었다.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그보다 상위의 동인이 발동되어야 가능하다. 견제는 가능하지만 완전하게 제거하거나 차단시키는 건 불가능해졌다.’
파천은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했다. 카오스가 발현되는 때는 오직 초기화 이전이다.
‘이르다. 아직은 그 조건이 성숙될 때가 아니다. 어떻게 카오스가 각성하게 되었을까?’
비밀차원을 봉인하고 메타트론의 시도를 무위로 돌린 연후 파천은 완전자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카오스가 완전하게 각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와의 대립으로 세계는 사라지게 되고 모든 조건은 초기화되고 만다.
의문은 풀어야만 했다. 이후 카오스에게 던져질 질문들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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