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6화 : 비밀차원과 영계, 불붙는 전쟁들의 서막
비밀차원과 영계, 불붙는 전쟁들의 서막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꼽았던 카오스의 특기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그다지 힘쓸 일도 없는 대마신과 어둠의 천사들에게서 천 징후가 나타났다.
고대하던 적의 출현은 고사하고 기묘한 현상과 힘겹게 싸워 나가던 루시퍼는 점차 조급해지는 자신을 느끼고 경계했다. 초조해하면 할수록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걸 잘 아는 현명한 루시퍼는 좀체 흥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고 있는 대마신들은 상황이 달랐다. 특히 발리! 그렇지 않아도 우호적이라 하기보다는 긴장 관계라고 보는 것이 마땅한 어둠의 천사들과 이렇게 밀착해서 동행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지라 심사가 편치 않았었다.
가끔씩 마주치는 눈빛은 자신을 멸시하고 있는 듯 보였고 간혹 살기도 감지된다. 열등감을 감추고자 더 난폭하게 행동해 왔던 발리의 평소 성품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폭발하랴.
하지만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 있지도 않은 자제력을 발휘해 속으로만 끙끙거리고 있었다. 단지 그를 그나마 묶어두고 있는 감정은 메타트론과 루시퍼에 대한 두려움이 전부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뭔 일이 터져도 터졌을 것이다.
카오스의 흉계는 은밀하고 치밀했다. 이런 발리와 대마신들의 내재된 불만은 그에게 좋은 먹잇감이었고 흥미로운 장난감이었다.
용과 같은 거대한 괴수의 출현에 루시퍼가 용맹을 떨치며 싸우고 있었고 성난 해일처럼 덮쳐드는 먹물 같은 진구렁을 메타트론이 방벽인 양 양쪽으로 세워두고 있는 때였다.
갈라도, 갈라도 밀려드는 막대한 양에 메타트론이 슬슬 질려 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좀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두 주인의 활약을 지켜보고만 있던 어둠의 천사들 가운데서 푸석푸석한 대지를 비집고 무언가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실처럼 기다란 뱀이었는데 몸 전체가 투명했으며 선홍빛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어둠의 천사들은 그 괴상한 생명체를 발견한 순간 좌, 우로 쫙 갈라지며 공격을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어찌 보면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그 투명한 괴생명체는 실상 어둠의 천사들에게만 보였고, 대마신들은 해당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어쨌든 동지로 동행하고 있던 자들에게 졸지에 공격을 받게 된 모양새가 되었다.
대마신들 중 수뇌인 아사셀이 놀라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공격을 고함만으로 되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간에 일단은 막고 볼 일이었다. 어둠의 천사들의 눈에는 오직 거대한 괴수만이 보일 뿐이었고 대마신들이 자신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하는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더욱 정신을 못 차리고 광분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괴수들의 긴 몸에는 가느다란 촉수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기기묘묘하고 신속한지 여차하면 전신을 감아 버릴 태세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대마신들도 피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어둠의 천사들이 내뿜는 공격이 워낙에 강맹한데다 그 가운데 담긴 강력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발리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루시퍼가 그 모양을 보고야 말았다.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이 한데 뒤엉켜 주고받고 있는 공방을 처음엔 남의 일인 양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것도 잠시, 뭔가 흑막이 있을 거란 판단보다는 분노가 앞서고 말았다.
어둠의 천사들이 대마신들을 향해 살수를 펼치고 대마신들이 되받아치는 장면을 메타트론도 뒤늦게 발견했다. 하지만 그의 눈엔 그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고 있었다. 루시퍼가 무리 중에 뛰어든 것을 본 메타트론이 다급하게 외쳤다.
“루시퍼 멈춰라.”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루시퍼가 가볍게 휘두른 손길은 어둠의 천사들 중 일부를 한 번에 휘감아버렸다.
쩌정
빙산이 반으로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이어졌다. 간신히 공격권을 벗어난 어둠의 천사들이 힘을 모아 방어벽을 만들고 대마신들도 한쪽으로 부리나케 몸을 빼냈다.
공격 사정권 안의 상황은 참혹했다. 깊이를 모를 정도로 움푹 꺼져든 대지는 반경 십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한 번의 가벼운 출수로 인한 흔적이었지만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미처 공격권을 벗어나지 못한 어둠의 천사들 몇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직도 루시퍼와 대마신들은 당연한 일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뒤로 물러나 간신히 피했던 어둠의 천사들은 왜 루시퍼가 자신들을 공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를 곤란하게 만들던 공격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모든 것이 환상이요, 꿈인 듯싶었다.
짜악
경쾌한 격타음은 루시퍼의 뺨에서 작렬했다.
메타트론이 루시퍼의 뺨을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젖혀진 루시퍼의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모른다. 긴 머릿결이 루시퍼의 얼굴을 메타트론에게서 감추고 있었다.
“경솔한 것, 그러고서도 네가 마황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더냐? 얕은 술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수하들을 제 손으로 죽여 없애?”
잘못을 했다면 백 번이라도 그럴 수 있다. 오히려 메타트론이 그런 점에서는 루시퍼보다 더 냉혹하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그제야 루시퍼의 감겼던 눈이 떠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실수. 그래 실수였다.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하고야 만 것이다. 마계 마황 루시퍼의 이름 앞에 붙어서는 안 되는 흠집이 생긴 것이다.
메타트론이 어둠의 천사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눈에 떠오른 감정의 색깔은 단 하나로만 읽혀졌다.
살의! 주인의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지금껏 섬겨야 했던 존재. 그렇기에 언제든 버려질 수 있고 언제든 적이 될 수 있고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예감이 머릿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상황에서 현실로 확인될 줄은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이런 자신들의 감정이 어떻든 아직까지도 그들의 의지보다 우선되는 건 메타트론의 의중이었다. 메타트론은 어둠의 천사들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그의 이런 결정은 이 무리 중에서는 절대적이다. 어둠의 천사들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심중에 자리 잡은 증오와 분노마저 잠재우진 못했다.
메타트론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적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적개심이 담겨 있는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모든 걸 부순다. 예외는 … 없다.”
자제해두었던 메타트론의 흉포함이 문을 활짝 여는 순간이기도 했다.
카르마와 마령의 본주는 한 눈에 서로가 닮아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둘은 마주본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외양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서 동일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메타트론의 마력이 그럼 마령에서 기인된 것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째든 둘은 지금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난 느낌. 더군다나 둘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마령의 본주가 먼저 나서서 마계를 재촉하게 된 데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가 지닌 두려움은 파천과 메타트론 등이 비밀차원의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는 순간에 맞춰져 있었다. 그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오는 순간에 맞춰져 있었다. 그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래야만 마지막 승리를 쟁취할 가능성을 그나마 높일 수 있다.
카르마도 비슷한 처지였다. 메타트론에게서 헤르파의 지시에 따르라는 명령이 내려지던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메타트론을 떠났다. 루시퍼는 영광된 자리를 약속 받았지만 자신에겐 아무런 것도 약속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는 것조차 꺼려했으며 루시퍼나 마계를 위해 봉사해야 할 존재쯤으로 치부되곤 했다. 그런 건 참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못 견디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메타트론이 루시퍼를 후계자로 선포한 이후부터 멀어진 메타트론의 관심이었다.
그 후 루시퍼와 그의 수하들인 대마신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둠의 천사들이 한 말이 있었다. 참으면 언젠가는 그 영광이 모두 너에게로 갈 것이다.
그 약속은 달콤했다. 그것을 지금까지 견뎠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미래는 그 무엇도 보장된 것이 없으며 결국엔 쓰고 버려질 무가치한 존재임을.
카르마와 마령의 본주는 서로의 이런 내재된 불안을 공유했다. 굳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경험은 둘을 하나로 묶어버렸다.
“내 반쪽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네가 원함이 내 원함과 같구나.”
“우리가 힘을 합하면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겠다.”
“너는 날 위해, 나는 널 위해.”
“모든 걸 우리 아래 있게 하자.”
“좋은 말이야. 하하하하.”
“나가자, 여기서 나가 마음껏 우리 힘을 과시하자.”
둘은 함께 그곳에서 나갔다. 최대의 변수가 돌연히 생겨나버렸다. 마계나 제왕의 군대에게도 하룬에게도 좋지 않은 변수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은밀하게 태동하고 있었다.
비밀차원을 통제하는 카오스의 힘은 점차 강력해지고 견고해져 갔다.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메타트론만이 그 힘의 실체를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라 단정 짓고 있을 따름이다.
이 미묘한 정보의 유무 차이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약점으로 작용했는지는 현재의 상황만으로도 판가름이 났다.
한 번씩 적의 흉수를 접하게 될 때마다 하나씩 잃는 게 생겨났다. 수하들의 생명이거나 신뢰이거나 또는 자신감이거나. 심상치 않은 , 반갑지 않은 조짐이었다.
영계의 폭군이라던 메타트론이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 접근의 방식이 기이하면 할수록 메타트론의 마력이 덩달아 춤을 추었다. 점차 횟수가 늘어날수록 메타트론의 선택은 좀더 빠르고 신속해졌으며 대처는 깔끔해졌다. 그러자 속출하던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
루시퍼도 비록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메타트론의 적응 속도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비밀차원의 곳곳을 훑어가며 종적을 쫓고 있는 중에 파천과 선발대도 카오스의 실체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단지 메타트론과 다른 것이 있다면 카오스의 어떤 훼방과 기습과 암계에도 흔들림 없는 중심이 있다는 것이다. 파천은 든든한 방호벽이었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선발대원들까지 상처 하나 없이 지켜내고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현재의 진행만으로 놓고 보자면 파천이 메타트론이나 카오스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판단을 내려도 하자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찾아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파천이 아무리 잘 방비하고 막아낸다 해도 카오스의 실체를 찾아내 봉인하지 못한다면 끝없는 소모전이 될 뿐이다. 파천은 그 점을 경계하며 속을 태운다.
카오스는 비밀차원을 통제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결코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그의 숨겨진 의도는 무리 가운데 분열을 조장하는 것만이 전부일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메타트론의 일행에게만은 먹혀든 셈이었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에게 더 이상 카오스의 위협은 없었다. 몇 번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고 그들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여섯 중 하나가 나서면 나머지는 굳이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도 쉽게 격파해내곤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카오스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녀야 할 것인가? 코모라가 불만을 제기했다.
“이제 그만 하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우리가 함께 동행 하는 한 카오스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찾아내 길은 막연하다.
침략자의 종적을 쫓는 것이라면 굳이 몰려다닐 필요가 없잖아?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흩어져서 찾는다면 누구든 마주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겠지.”
반박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빈델반트도 코모라의 의견에 동의 했다.
“그러지. 현재 이곳이 중심에 가까우니까 여기에서 다시 모이는 걸로 하지. 그럴 일이 모르겠지만 마주친 적이 상대하기 벅차다면 이곳으로 유인해 오고 그럴 경우가 아니라면 각자 알아서 처리하고.”
그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아퀴나스는 반대도 동의도 하지 않았다. 잠시 멈췄던 그의 발걸음이 다시 이어졌을 뿐이다.
“잘난 척 하기는.”
캄파넬라가 아퀴나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놀라운 변화였다.
아마도 착각이었을 것이다. 아퀴나스의 발이 지면에 닿기 전 멈칫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퀴나스가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도 다섯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코모라가 말했다.
“모두들 명심해서 새겨들어. 너희들도 느꼈다시피 지금 아퀴나스의 태도는 종잡을 수 없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을 기하려 드는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 그런 집착이 우리들 전체의 운명보다도 자신의 판단을 우선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거야.
그런 이유로 그는 이제 더 이상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자격을 상실했다.”
“그래서,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헤르바르트의 다그침엔 코모라에 대한 경계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직까지는 코모라보다는 아퀴나스가 더 믿음직한 우군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아퀴나스는 제2의 키케로가 될지도 모른다.”
명백한 반란이었다. 적어도 암묵적으로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던 지휘체계에 코모라가 반란을 기도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퀴나스에 대해 반대를 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아퀴나스에 대한 신뢰 역시 금이 간 건 사실이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관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태가 현재의 그들 간의 관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서로 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적대세력을 모두 물리치기 전까진 그런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자신의 발언에 대해 비난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 이것이 코모라는 우선 반가웠다. 그래서였을까? 좀 도가 지나치다 싶은 선까지 그의 발언은 폭을 넓혀 가고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으니 무조건적인 신뢰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다 후회하지 말고 어느 정도는 대비하는 게 좋을 거란 충고를 하고 싶었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미리부터 예민해져 있을 필요는 없겠지. 지금 내가 한 말을 잘 담아두는 게 좋을 거야.”
헤르바르트가 쏘아 붙이지 않았다면 코모라의 선동은 한 없이 기세를 올렸을 것이다.
“나는 네가 더 걱정스럽다. 때로 아퀴나스가 독단적인 노선을 고집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처럼 분열을 조장하거나 하지는 않거든. 자, 그럼 모두 조심들 하라고.”
헤르바르트가 그 자리를 뜨자 나머지도 발길을 돌렸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건 코모라와 캄파넬라 둘뿐이었다.
둘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캄파넬라는 코모라의 경박함이 때로 미덥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과 가장 성향이 비슷하다 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뜻을 합하기에 용이했다.
누군가의 합작해야 한다면 그에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캄파넬라가 진심으로 충고했다.
“뭔가 얻으려고 하는 자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정황이 지극히 유리해 원하는 걸 얻기 직전이라 할지라고 신중함을 버린다면 얻을 건 쓰라린 패배뿐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후회만을 안고 긴 긴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
그러기 싫다면 …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경거망동하지 마라. 우리의 합작은 언제든 철회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임을 안다면 말야.”
코모라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는 그곳을 떠나버렸다.
코모라의 입가에 매달린 작은 미소가 얼굴 전체로 퍼져 가더니 화려하게 폭발했다.
어둠의 천사들과 대마신들의 파괴적 성향은 최소한의 동료의식마저 위협할 정도가 있었다. 메타트론의 가공할 능력을 빌어 위기를 모면해 가고 있었건만 주인의 이런 고군분투함도 모르는지 마성이 폭주하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방치했다.
카오스의 침투는 매우 교묘해서 메타트론과 루시퍼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놓은 다음 비교적 요리하기 쉬운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을 최대한 자극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정작 적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는 당사자들은 전혀 이런 변화에 대해 주목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들에겐 애석한 일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점차 동일한 빛을 띠어 간다. 한계치까지 팽창한 마성이 폭발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호기를 카오스가 놓칠 리가 없었다.
대마신들 중 그나마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사셀이 메타트론과 루시퍼를 대신해 동료들의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모두가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들 중 유독 두드러지는 이가 보였다.
‘발리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흐으으으 … .”
가쁜 호흡을 흘리며 이따금씩 벌어지는 입에선 암갈색 기류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사셀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발리의 이런 변화에 대해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메타트론이 무리를 재촉했고 일행의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가장 뒤에 처진 이는 발리였다.
루시퍼의 뒤를 바짝 좇고 있던 아사셀이 뒤를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메타트론의 손길이 스친 곳은 예외 없이 폐허로 변해 갔다. 끓어오르는 용암과 타오르는 화염의 바다도, 갈라진 대지에서 솟구친 괴수와 하늘을 뒤덮는 용의 그림자도, 비틀린 공간에서 비할 수 없이 강력한 흡입력이 생겨나도 소용없었다.
화난 메타트론을 막아낼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거세게 일어났던 힘은 곧장 잠잠해지고 떠들썩하던 소동은 이내 숨을 죽였다. 비밀차원 전체가 함정이 되어 곳곳에서 죽음의 이빨을 들이댔지만 메타트론에게는 흠집이 나지 않는다.
메타트론은 화가 났다. 계속되는 적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종적을 찾아내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이때 발리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어둠의 천사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구겨지듯 한곳에 처박혔다. 뒤에서 들린 갑작스런 비명에 바람이 불 듯 날아가던 일행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아사셀은 아차 싶었다. 발리가 일을 낸 것이다.
“발리, 이게 무슨 짓이냐!”
막 또 하나의 동료에게로 향하던 발리의 공격을 중간에서 차단시키려 하던 아사셀은 쏘아왔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퉁겨졌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흐으으으, 죽인다. 모조리 죽여주마.”
마성이 폭주해 발리가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한다는 건 분명해보였다. 문제는 어떻게 발리의 공격에 아사셀이 맥을 못 추고 퉁겨날 수 있었던 걸까?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둠의 천사들이 발리를 포위했다.
발리의 손에서 비롯된 막강한 힘은 그들의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위력이었다. 뒤로 정신없이 밀려나는 어둠의 천사들, 그 중의 하나는 발리의 손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방심한 것도, 그렇다고 실수한 것도 아니었다.
“죽 … 어 … 라!”
“멈춰라!”
루시퍼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발리의 손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손아귀에 털어 쥔 어둠의 천사를 무참하게 조각내버렸다.
포위하고 있던 어둠의 천사들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발리의 앞을 막아서는 루시퍼, 그리고 뒤에서 이를 지켜보는 메타트론.
그의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분노는 발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마땅한 방책이 없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발리가 제 주인인 루시퍼도 알아보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루시퍼는 발리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탄식했다.
“네가, 네가 나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더냐?”
발리의 전신은 보라색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동공이 사라지며 그 안에서 새로운 형상이 나타났다. 루시퍼는 생각했다.
‘어디서 보았을까?’
파앙
발리가 손을 휘두르자 공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둠의 천사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발리의 가공할 능력도 루시퍼를 곤란하게 하진 못했다.
“꺼억.”
되려 반탄력에 뒤로 밀려난 발리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괴성을 발했다.
“캬아아아, 죽 … 인 … 다.”
루시퍼가 처연하게 말했다.
“죽 … 여 … 야 합니까?”
메타트론에게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행동으로 대신 답했다.
퍼퍽
“크악.”
메타트론의 의지는 발리를 용서하지 못했다. 두 무릎과 팔의 관절이 모조리 박살이 나서 바닥에 뒹구는 발리. 그 모습을 루시퍼는 지켜보고만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여라.”
메타트론은 참으로 잔인했다. 단번에 숨을 끊지 않고 마지막을 루시퍼에게 맡겼다. 루시퍼는 알고 있었다. 지금 메타트론의 분노가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왔음을.
그리고 그것이 터진다면 어둠의 천사들도, 대마신들도 그리고 자신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차가운 땅에 드러누운 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발리에게 루시퍼의 마지막 시선이 머물렀다.
“편히 쉬 … 어라.”
영혼을 바쳐 충성했던 수하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그 말 한마디뿐이라는 사실이 서글펐을까? 그건 아니었다. 단지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에게 휘둘려 이렇게 어이없이 당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던 것뿐이다.
“잠깐!”
루시퍼를 제지한 메타트론이 발리 곁으로 왔다.
“너는 누구냐?”
루시퍼도, 지켜보던 자들도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다. 대마신의 타락한 천사 발리를 너무도 손쉽게 장악한 자.
결국엔 동료들의 손에 죽음을 맞도록 발리의 운명을 농락한 자. 그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발리에게 머물러 있으면서 메타트론에게, 루시퍼에게 비웃음을 던지는 자는 다름 아닌 카오스였다.
카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발리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킥킥 소리가지 내며 웃고 있었다.
메타트론이 재차 다그쳤다.
“내가 두려워 피하는 것인가? 아니라면 나서라. 이 세계의 지배자가 고작 이 정도였던가? 조잡한 짓거리는 그만두고 직접 나서라.”
아직도 메타트론은 카오스를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발리의 입이 열렸다.
“우는 소리를 하다니 벌써 지쳤나? 이제 시작인데 그럼 안 되지.”
“나서지 않는다면 네가 아끼는 이 세계를 모조리 부숴버리겠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이 세계를 부수든, 새것으로 만들든 난 관심 없어. 내 관심을 끄는 건 오직 하나, 너희들의 독특한 반응일 뿐이야.”
메타트론은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네 이름은?”
“카오스! 날 아는 존재들은 그렇게들 부르지.”
파천이 거론한 비밀차원의 지도자들 중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었다. 메타트론의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너는 누구지?”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거룩한 분이시지. 분열의 시작이자 혼돈의 귀결이다.”
“여기 또 잘난 분이 등장하셨군.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면 거칠 것이 없을 텐데 왜 숨어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안 그런가?”
“맞아. 숨어 있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 아직은 조심해야 할 때. 내 힘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니 나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점이 나도 무척 아쉬워.”
“그?”
“키케로. 내 숙적의 이름이지. 광명을 얻은 자, 파천이라고도 불리더군. 그가 있는 한 내 영역은 어둠일 수밖에 없다.”
“그런가? 또 그인가? 어디든 그의 이름이 내 길을 막아서고 있어. 카오스, 지금 한 말이 사실이라면 네 힘은 내게도 미치지 못한다.”
“자신을 무척이나 대단하게 여기는군. 메타트론, 네 능력이 이 세계에 속한 자들 중 최고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상계에 한정돼 있지.
난 널 해칠 수 있지만 넌 그럴 수 없어. 그 차이는 의지만으로 극복되지 않아. 난 너와 격이 다른 존재야, 지금 널 상대해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네 탁월한 강함에 대한 예우 차원일 뿐이야. 하지만 거기까지가 네 한계야. 왜, 믿기지 않나?”
“현상계 운운하다니 마치 자신이 신과 동격인 것처럼 말하는군.”
“맞아. 잘 봤어. 절반쯤은 그렇다고 봐도 무방해. 나머지 반을 회복하고 마지막 겨룸마저 승리로 이끈다면 그때부터 현상계는 영원히 내 의지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지. 믿지 않는군. 하긴 믿고 싶지 않겠지.
아, 그리고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말해두는데 키케로는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메타트론은 어이가 없어 대답조차 않는다. 한 번도 파천을 과소 평가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나처럼 절반쯤 이 세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지. 이해할 수 없지만 현재의 그는 그 상태를 원하는 것 같아. 얼마든지 완전을 회복할 수 있음에도 그러질 않거든. 사람일 수 없는 자가 사람이길 고집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붙잡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점이 내겐 나쁘지 않은 일이야. 내 희망의 부피가 그만큼 커지는 거니까. 어쨌든 나와 싸우길 원한다면 그쯤 못해줄 것도 없어. 정말로 원하나?”
“물론이다. 대신 전재조건이 있다.”
“성가시군. 거기다 조건까지 갖다 붙이다니. 이 싸움은 내가 아니라 네가 원해서 하는 거야.”
“자신이 있다면 그런 건 상관없을 텐데.”
“아, 좋아 그래 그 전제조건이란 게 뭐지?”
“네 본체와 싸우고 싶다.”
“안 돼.”
“본체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그럼 하지 마. 난 흥미 없으니.”
“잠깐, 좋다. 네 방식대로 하겠다.”
“흠. 좀 시원찮기는 하지만 이놈이면 충분하겠군.”
이리저리 끊어지고 부러진 발리의 몸이 언제 그랬던가 싶게 말짱하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원래의 발리와는 차원이 다른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차.”
발리가 두 발을 쿵쿵 디뎌보며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본다.
“자, 준비됐으니 어서 시작해봐.”
메타트론이 루시퍼에게 말했다.
“모두 데리고 최대한 이곳에서 벗어나 있어라.”
곧 있을 싸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리였다.
루시퍼는 나머지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를 대동하고 멀리까지 벗어났다. 메타트론과 발리의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보인 곳까지 멀어져 있었다.
아사셀이 걱정을 했다.
“만약 메타트론님이 지기라도 한다면 … 어찌 되는 거죠?”
루시퍼가 고개를 힘껏 저었다.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메타트론과 발리의 간격은 겨우3장 정도에 불과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본 채 서 있었다.
발리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것과는 달리 메타트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긴장할 것 없다. 허세일 뿐이다.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
메타트론은 천천히 상대의 주변에 힘을 집중시켜 갔다. 지금까지 보여준 화려한 공격들과는 뭔가 달랐다. 움직임 없는 의식의 집중만으로 공격을 하고 있었다.
“호, 이것 봐라. 예상보다 더 대단한데.”
카오스가 호들갑을 떨며 메타트론을 추켜세웠다. 그런 태도가 메타트론은 더 못마땅했다.
발리의 주변에선 감지되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속엔 거대한 압력이 깃들어 있었다. 발리의 늠름했던 신체가 초라하고 볼품없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툭툭
관절이 이탈하는 소리가 나며 터져 나갔다. 메타트론이 소리쳤다.
“겨우 그 정도로 큰소리 쳤던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 몸은 그대로 터져버린다. 그 뒤엔 뭐로 나불거릴 거지?” “해봐. 너무 이르잖아. 아직은 아무런 결과도 생기지 않았거늘, 쯧쯧.”
툭툭툭
팔과 다리가 꼬였다. 목이 늘어나고 혀와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이걸로 끝이다.”
퍼퍼퍽
산산조각 나 흩어지는 것은 대마신 발리의 강건한 신체였다.
너무 싱겁게 끝났다고 여겼던지 메타트론은 좀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진다는 생각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처럼 허무하게 결판이 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의외의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스스스스
흩어졌던 파편들이 한데 모였고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발리는 부활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거둬지지 않은 압력을 뚫고 공중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메타트론은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놀아주마.”
메타트론이 발리의 뒤를 쫓아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 둘의 위치는 땅에서 하늘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달라진 건 또 있었다. 메타트론도 그랬고 발리도 마찬가지였는데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유형의 기세가 그랬고 발리도 마찬가지였는데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유형의 기세가 확연하게 구분이 될 정도로 뚜렷하다는 점이었다.
각기 붉은색과 보라색의 색감이 둘 사이에 띠처럼 생겨나 있었다.
이어 메타트론의 맹공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은 하늘을 한 번에 씌워버릴 듯이 퍼져 나갔다가 발리의 몸을 향해 집중됐다.
츠츠츠츠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변화는 없었다. 뚜렷한 경계를 이룬 두 띠가 대치하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것을 반복한다. 발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재미없는 일이야.” 그리곤 힘을 거둬들였고 저항 없이 메타트론의 힘이 발리의 몸을 때렸다. 타격음은 없었다. 발리의 신체에 흠집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기대했던 변화는 없었다.
“뭐 … 지? 설마 … 흡수한 건가?” 그랬다. 이어진 메타트론의 공격이 모조리 발리의 몸 안으로 흔적 없이 스며든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메타트론의 부정은 그 후로도 한참을 더 이어졌다.
메타트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발리에게 퍼부었다. 그를 반기는 건 카오스의 냉소뿐이었다. 참으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빈 허공을 치고 있으니 겉으로 보기야 갖가지 현상이 나타나 화려하게 공간을 물들이지만 기대했던 결과물은 없었다. 멀리까지 대피했던 루시퍼 등은 쓸데없는 일을 한 것이었다.
“왜 맞대응을 안 하는 거지?”
메타트론이 이런 항의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기 이전에 자신의 어떤 공격 수단도 카오스가 보호하는 발리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 작은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총격적인 사건 앞에 메타트론은 망연자실했다.
“마주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거든.”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아직은 이곳이 파괴돼서는 곤란해. 흠집이 나는 건 상관없지만 사라져버리면 안 되지. 지금까지 들인 공이 아깝거든.”
메타트론의 힘과 자신의 힘이 마주치면 차원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말일까? 분명 그런 의미가 담겨있었다.
카오스에게 메타트론이 현재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어떤 방법을 써도 날 어쩔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고 그 현식이 메타트론을 절망케 했다.
그걸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메타트론이 카오스를 불러낸 것이 아니라 카오스가 메타트론을 찾아온 목적이 이제 드러나고 있었다.
“차원이 허물어져 터전이 사라지면 나만 손해니 … 이쯤에서 그만두자.”
메타트론은 카오스의 그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곳 비밀차원이 후에도 내 발목을 잡겠다. 내 원대한 계획에 차질을 빚을 걸림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지 않은가! 이곳을 파괴해버리고 싶다.’
메타트론이 물었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도 … 너만큼 강한가?”
“너와 엇비슷할 거야. 왜, 그들과도 힘을 겨뤄보고 싶나?”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자들이다.”
“그랬군. 너나 그들은 모두 싸워서 이기려 할 테니. 쉽게 끝나진 않겠군.”
“그렇겠지. 누구든 한쪽은 … 사라져야 끝이 나겠지.”
카오스는 마치 선심이라도 베푼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좋아. 그럼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진 널 곤란하게 하지 않으마.”
메타트론은 카오스가 무얼 원하는지가 궁금했다.
“네가 원하는 결과는?” “난 키케로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이용한다. 어떤 존재와도 힘을 합할 수 있다.”
만약 메타트론과 파천이 운명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카오스가 알았다면 이런 말을 생각 없이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더 잇아 귀찮게 하지 않는다니 메타트론으로서도 거부할 일은 아니었다. 찜찜한 존재이고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상대였지만 드러난 현식은 자신으로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일단은 받아들여야 했다.
메타트론의 변화를 카오스는 주의 깊게 살폈다. 메타트론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기대가 끝날지 현실로 다가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카오스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며 떠났다.
카오스가 떠나자 메타트론은 발리에게 대신 분풀이를 했다. 발리의 처참한 최후를 앞에 두고 메타트론은 중얼거렸다.
“파천이 내게 카오스를 숨긴 저의가 뭔가?”
메타트론은 최후까지 살아남아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현명해져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적도 동지도 없다. 이용할 자와 버려야 할 자의 구분만 있을 뿐.’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제왕의 눈이 먼저 발견해낸 변화는 곧바로 로메로에게 전해졌다.
하룬 수뇌부가 모두 밖으로 나와 그 전경을 살폈으며 역시나 뭔가 있다고 판단했던지 각 군에 비상령을 발동했다.
지휘관들은 부리나케 제자리로 돌아갔고, 로메로와 그레고스 등은 망루에 올라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한자리에 도열해 있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진군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고함을 지르며 밀려올 듯했다. 하지만 보호막은 여전히 건재하기만 했다. 이상이 없었다. 그럼 뭔가?
“뭔가가 있어.”
그레고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골몰해 있다.
로메로는 아직 상황에 변화가 없으니 달리 내릴 명령은 없었다. 지켜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한편 마르시온과 헤르파는 마령의 본주가 장담했듯이 하룬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제왕들이 보호막 바로 밖에까지 모습을 드러낸 채 주변을 경계하는 것만 발견될 따름이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정말 해낼 능력은 되는 건지 의심스럽단 말이야.”
마르시온은 아직까지도 마령의 본주가 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해 낼 거라고는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쨌든 진군 준비는 마쳤다. 명령도 내려뒀다. 쿠사누스들이 예하의 병력을 이끌고 도열해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러웠다.
보호막만 없다면 하룬 정도는 단숨에 박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룬 외곽을 감시하고 있는 제왕들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진작에 끝장을 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끝내지 못한 일을 마감할 수 있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헤르파는 말없이 하룬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헤렘에게서 들었던 얘기가 그의 뇌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머니를 하룬에서 보았다는 말이 왜 이리 그를 자극시키는 걸까? 헤렘은 그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만 듣는 헤르파는 그렇지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묵직했으며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채 복잡한 상념들이 뒤엉켜 떠돌았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랬다. 아직도 과거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더란 말인가? 아무리 부정해봐야 결정적으로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으니 쓸데없는 일이다. 그냥 묻어두는 수밖에 달리 할 바가 없음에도 자꾸만 연연하게 되는 자신의 나약함이 싫었다.
어서 빨리 보호막이 제거되었으면 하면하고 바란다. 그럼 차라리 개운하게 진군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양측이 각기 다른 이유로 초조해하고 있을 때였다. 마령의 본주 케플러는 준비를 끝마쳤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의외로 하룬 밖이 아닌 안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해내긴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한적한 곳을 택했으니 이제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지금부터 그가 해치워야 할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었다. 보호막뿐만 아니라 하룬에 깃들어 있는 힘 역시나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그 힘을 해체하기 위해선 완벽하게 조율된 힘의 균형을 일시에 무너뜨려야만 가능했다.
가해지는 힘이 조금만 약하거나 강해도 실패할 것이고, 전체를 한 번에 조율하지 못해도 마찬가지 결과를 보일 것이다.
힘의 핵을 이루는 곳은 하룬의 지하중심부 지점이었다. 그곳에서부터 힘을 가해 서서히 외부로 끌어올려 보호막까지 이끌고 단번에 배열을 비틀어야 성공할 수 있다. 배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서로간의 미세한 차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시시킬 때 반발력을 억제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하나하나 점검을 해가던 케플러가 자신감을 얻었다. 몇 번이나 되짚어서 점검 해봐도 오차는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케플러는 하룬에 내재된 힘의 균형을 살펴 가며 이런 걸 설치해 놓은 파천의 능력에 몇 번이나 감탄했다. 하지만 그런 감탄이 클수록 그것을 풀어 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찬탄도 커졌다.
‘먼저 핵을 짚고 나서 … .’
하룬에 전쟁의 포화를 베풀고자 하는 마령의 본주 케플러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되고 있었다.
쩌적
드드드드
평온했던 하룬을 뒤흔드는 진동은 땅에서부터 시작됐다. 갈라질 정도의 흔들림은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범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망루에 올라 있던 로메로와 그레고스도, 보호막 밖에서 사방을 경계하던 제왕들도, 각 군단을 지휘하던 수뇌들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푸화확
보호막 전체에 은은하게 감돌던 빛이 더욱 강렬해지며 폭발하듯 확장됐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상황 파악을 할 겨를도 없이 변화는 다음 단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확장된 보호막이 수축되며 공간 중으로 스며들 듯 사라진다. 이어 하룬의 요새 전체를 흔들 큰 진동이 있었다. 그리고 하룬이 낙하했다. 대비할 틈도 없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어, 하는 사이에 하룬의 그 거대한 땅덩어리가 원래의 대지에 부딪혔다.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종횡으로 균열이 나며 순식간에 조각나 흩어지는 땅덩어리들.
하룬을 뒤덮은 건물들이 튀어 오르는 흙더미 가운데 뒤섞여 함께 무너지고 부서졌다. 하룬의 중심에 작용하던 인력과 척력도 동시에 제거되었기에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던 힘은 사라졌다. 그 바람에 하룬의 전력에 타격을 주진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흩어진 대열, 급작스런 붕괴로 인한 대혼란, 지휘 부재로 이어진 명령계통의 혼선. 그것이야말로 헤르파와 마르시온이 바라던 상황이었다. 모두가 한꺼번에 허공중에 떠올랐기에 일대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진군하라.”
“적을 섬멸하라.”
마계와 제왕의 대군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혼란을 수습해야 할 하룬의 지도부들이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세상을 한 번에 뒤덮어버릴 해일 같은 군세였다. 헤르파와 마르시온의 외침은 더 큰 함성을 불러일으켰다.
“와아아아아 … .”
그들의 함성 속엔 승리를 확신하는 담겨 있었다. 대기를 진동하는 함성은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 하룬에겐 날벼락과도 같았다. 그제야 로메로와 그레고스등, 하룬의 수뇌들이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전열을 정비하라.”
“지휘관은 예하의 병력을 점검하고 대열을 이탈하지 말라.”
군단장들과 예하 부대장들만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날뛴 뿐 하룬의 조직화된 전력은 마구 뒤섞여버린 후였다.
당장 눈앞에 들이닥치는 적을 발견하는 시선만이 재빠르다.
오랜 기간 동안 격전을 대비해 와서인지 두려움에 물러서거나 우왕좌왕하지는 않았지만 효과적인 방어를 기대하긴 어렵게 된 것이다.
어째든 하룬 역시나 용맹하게 맞서 가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본 로메로는 탄식을 했다. 그렇다고 고함만 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제석도, 노군도, 그레고스도 직접 최전선으로 나가 적을 맞았다.
제왕들이 적의 선봉을 막고 있었고 지혜전사들이 주력과 격돌한다.
먼저 흐름을 끊어놓는 것이 중요했다.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타가 시작한 적의 기세를 줄여놓지 않으면 그 첨단의 예리함에 갈가리 찢어질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다행히 하룬은 예기치 않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담당할 훌륭한 전력이 구비되어 있었다. 잠시의 지연,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규모 충돌은 혼전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채 적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뒤섞여 버린 후였다. 마계도, 제왕의 군대도 이렇게 흘러가는 걸 원치는 않았다. 후퇴시킬 수도 없는 것이 지금 빼내면 그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젠 누구도 유리하다 할 수 없는 끝없는 소모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명령을 하는 자도 받는 자도 없었다. 살기 위해 죽이고 죽이기 우해 전력을 다했다. 진정 이런 지옥도가 펼쳐진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전세는 혼미함 가운데 빠져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