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84화 : 영계를 붕괴시킬 자들
영계를 붕괴시킬 자들
세상이 사라져버렸는가? 빛으로 가득 채워졌던 곳은 다시 어둠이 자리를 잡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묘한 소리만이 허공에 가득했다.
잇고자 하는 생명의 본성도 중단되었다. 가고자 하는 의지도 끊어졌다. 변화하는 것도 변화를 바라볼 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소멸해버렸다. 비밀차원이 붕괴되었다.
“진정……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말인가. 애써 가꾸어 왔던 꿈들이 이리도 허망하게 사라지는가. 우리 세계가 사라졌으니 이젠 어이해야 하나.
키케로, 내가 했던 장담은 어찌 된 거냐? 넌 할 수 있다 하지 않았더냐? 카오스가 작정한 바를 미리 알기만 했지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더냐!”
파천과 아퀴나스, 수호자가 희미한 여광 중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만은 무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사한 이들은 또 있었다.
메타트론과 루시퍼와 아사셀 그리고 코모라를 제외한 나머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이 파천과 아퀴나스에게로 와 합류했다. 파천에게 온 메타트론이 따지듯 물었다.
“너희가 우리를 돕지 않아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이 세계가 사라진 것이야 내겐 관계없지만 카오스를 놓쳐버렸으니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이다. 그가 우리의 세계마저 이와 같이 만들기 전에 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를 억제할 방법은 있느냐?”
아퀴나스는 또다시 탄식을 이어 갔다.
“모두가 혼돈 중에 잠겨버렸구나. 카오스의 목마를 울음소리가 내 소중한 것들을 삼켜버렸다. 그토록 염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내 힘으로도 막지 못했다. 카오스를 구별시켜 드러내기만 했어도. 실체를 찾아내기만 했어도.
키케로, 네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닌데……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거늘 돌이킬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는 파천에게 화내지 않았다. 늦은 분노가 사라진 걸 회복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르트는 자신이 한 짓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자책하고 있었다.
“나 하나의 괜한 호승심으로 일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내가 무슨 낯ㅇ로 너희들을 대하겠는가!”
헤르바르트가 그런 그를 위로했다.
“네 책임이 아니다. 카오스에게 농락당한 우리 모두가 어리석었을 따름이다.”
코모라에 대한 충격으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캄파넬라가 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된 것…… 카오스를 뒤쫓자. 그놈을 소멸시킬 방법이 없다 해도 방해는 할 수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을 것 같다.”
수호자는 선발대를 생각했다. 파천의 경솔함을 원망하는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렇게 될 걸 그도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니 지금 누구도 가슴이 아픈 이가 파천이라 생각도 들었다.
파천의 표정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건 비밀차원과 그 안에 속해 있던 자들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실체를 회복한 카오스를 잡아챌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는 그럴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영계로 달아났다.
파천이 말했다.
“이제 어찌들 할 텐가, 이제 사라질 세계도 없으니 여기서 결말을 지어 보아도 좋을 텐데.”
아퀴나스가 화를 냈다.
“그게 할 말이냐. 한때 이 세계를 통치했던 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이냐. 우리 원통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네가 지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키케로…… 설마 이렇게 되는 걸 원했던 건인가? 말해보라, 키케로.”
“화와 분을 내어보아도 달라질 건 없다. 우리 부딪침이 이런 결과를 가져다줄 것을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지?
예견됐던 일이었다. 이 세계분이더냐, 영계도 마찬가지지. 그럼에도 너희들은 싸우려 했다. 싸워서 이기고 뺏고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가질 것도 없다.
지금 너희들은 되려 싸움을 피하고 있어. 왜겠는가! 싸워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겠지. 카오스를 핑계 삼지 마라. 이 모두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까.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질 것이 남아 있는 한 너희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세계를 위해서는 우리 같은 이들이 없는 것이 더 나은 일임을. 그랬다면 이런 일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파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답답한 마음을 풀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파천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만 있기에 그들의 마음이 너무 공허했다.
수호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파천이 정말로 이렇게 될 걸 몰랐을까? 만약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고자 했던 게 아니라면…… 진작에 카오스에게 이용당할 여지를 남겨두진 않았을 거다. 그리고 파천은 선발대의 희생을 이용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수호자가 파천을 응시했다. 그의 기대처럼 파천의 얼굴엔 작은 고통의 흔적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 수호자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확신에 찬 수호자가 파천을 다그쳤다.
“파천! 회복이 가능하냐? 말해보라, 그런 거냐?”
다른 이들은 수호자의 그 말을 무시했다. 흘려들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입에 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파천이 대답했다.
“그래, 가능하다.”
카오스의 실체가 코모라에게 잠복해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비밀차원이 사라지는 걸 멀쩡히 보고만 있어야 했던 때보다도 모두는 더 놀라워했다. 경악을 넘어서 불신으로 번져 갔다.
“모든 건 밝혀졌다. 카오스의 실체는 완전한 각성을 이루기 전까진 반드시 어떤 생명체에 깃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 비밀차원만은 예외다. 그에게 이곳은 처음부터 그런 제약이 없었고 마음껏 활동할 조건이 갖춰져 있었지. 코모라의 내부에 잠복하고 있던 실체는 잠재된 가능성일 뿐 그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카오스는 힘을 얻어 본체를 키워 나갔고 그의 의지만이 비밀차원 내를 활보했다.
그는 때때로 코모라를 통해 영계를 드나들기도 했지만 잠재된 실체로서는 한계가 있었지. 카오스가 코모라를 조종한 방법은 암시였다. 그 암시에 따라 코모라는 카오스의 개입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충실히 걸어갔던 거지.
한계를 절감한 카오스는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코모라를 통해 영계에 개입하는 수위를 높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자의 출현을 경계해 왔다. 그가 더 큰 힘을 얻어 실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비밀차원이 깨져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 비밀차원 내의 사람들끼린 서로 반목은 할지언정 서로를 소멸시킬 정도로 전력으로 싸우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기다렸다. 그들과 싸워줄 적이 찾아오기를. 그리고 그 기회가 왔다. 때가 무르익자 그는 실체를 더 강하게 만들고자 기를 썼다. 그리고 지금처럼 그의 의도대로 비밀차원은 붕괴되었고 그는 족쇄를 풀었다.
난 처음 코모라를 보았을 때만 해도 카오스의 실체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나중에도 의심은 갔지만 그걸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확인을 위해 그를 소멸시킬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 해도 실체를 구별해낼 순 없다. 스스로 드러내기 전엔 방법이 없다.
코모라는 카오스의 본체를 담고 있을 뿐 실제로 그와는 다른 존재. 잠시 코모라를 이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는 언제든 다른 생명체로 전이될 수 있다. 그래서 난 기다렸다. 그가 스스로 실체를 드러내길. 그 순간이야말로 유일하게 카오스를 봉인시킬 수 있는 기회니까.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난 분명 코모라에게 힘이 집결되었을 때 실체가 활성화되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릴 틈이 없었다. 그가 잠시만 그 상태로 더 머물러주었다면 두 가지를 다 이뤄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카오스는 그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퀴나스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결론은 뭔가? 소멸된 자들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단 말이냐?”
“그래. 언제든 가능하다. 너희들은 그들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들은 지금 우리를 보고 느끼고 있다. 그들은 실상 소멸된 것이 아니라 결합이 해체된 상태로 머물고 있다. 결합의 조건을 다시 갖춰주면 그들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된다.”
“붕괴된 차원도!”
“물론이다. 원리는 동일하다. 해체되는 순간 난 그들을 결합시키는 의지를 원령으로 인도해 안정시켜놓았다.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들은 지금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지. 결합이 해체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무슨 질문을 더하리요, 메타트론도, 아퀴나스도 파천이란 측정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걸 절감했다.
‘파천, 너의 끝은 대체 어디냐? 날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다니.’
메타트론은 이 순간 자신과 파천의 운명이 공유되고 있음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으로 맞서는 일이 어찌 가능했겠으며 무슨 일이든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하긴 지금도 그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한은 파천과 맞설 일은 추후에도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파천은 자신이 했던 말을 실행에 옮겼다.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로 모이듯, 시간을 되돌려놓은 것처럼 모든 없어졌던 것들이 새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비밀차원은 처음 파천과 선발대가 발을 들었을 때의 모습을 하나씩 갖춰 갔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선 주변으로 하나, 둘씩 생겨나는 사람들. 모두는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런 일을 직접 목격하게 될 줄 어찌 알았으리요, 그들 중 유일하게 아퀴나스가 눈물을 흘렸다.
그는 흐느껴 울었다. 스스로 사람에서 신이라고 선포했던 그때로부터 그가 눈물을 흘려보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파천은 그 변화를 주목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 하나가 파천의 계획에서 아퀴나스가 제외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파천은 선발대와 수호자를 영계로 먼저 내보냈다. 카오스가 먼저 간 길을 그들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파천은 비밀차원에 남이 정리해둬야 할 일이 있었다.
케플러와 그를 다르는 군대가 메덴의 입구에 다다랐다. 케플러는 옛용과 싸울 일을 생각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옛용은 메타트론과 수호자와 같은 비중, 아니 그 이상의 의미로 싸울 일을 생각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옛용이 지금껏 한 일은 많았다.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들이 드물었고 영계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영계의 평화를 지금껏 지켜온 제일 공로자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의 관심은 한쪽을 도와 반대쪽을 누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원칙은 영계가 지금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에서도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작은 소란이나 사람들 간의 싸움에는 되도록 개입을 자제했고, 영계를 단번에 어긋나게 할 큰 혼란이 있을 때는 다른 이들을 통해 도움을 주어 왔었다. 이런 이유로 영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면 그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했다.
메덴은 수련자들이 머물렀던 영역이다. 일설에 의하면 메테우스의 이념을 따르고자 했던 수련자들이 처음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도 옛용이 그들을 인도해 들였기 때문이라 한다.
메덴은 영계에서도 대지가 품고 있는 기운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고 그곳의 하늘은 성스런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메덴이 수련자들의 대지로 공인된 이후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의 피 흘림이 없었다.
단순히 자제력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 모두가 옛용의 간섭이 있었기에 그랬다고 한다면 억측이지만 전혀 없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케플러는 메덴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있었다.
루딘족의 족장이었을 때 그도 여러 번 메덴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후에 야심을 갖게 되고 그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다짐해 둔 일이 있었다. 메덴에 크고 아름다운 성을 짓고 자신이 통치하는 제국의 중심으로 삼겠노란 야심이었다.
모든걸 이룬 건 아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고 험하다. 케플러는 인질로 삼은 헤르파와 헤렘, 라아그를 앞세우며 말했다.
“이곳을 내 손으로 장악하고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겠다. 너희들의 아버지인 루시퍼와 메타트론이 올지, 아니면 파천이 올지는 모르나 그들과 후회 없는 마지막 승부를 결해보리라.”
헤렘이 코웃음 쳤다.
“흥, 기고만장하지 마라. 연명하려면 지금이라도 도망가서 어딘가에 숨어 지내는 게 나을걸. 네가 그분들을 상대로 버티거나 할지 내 꼭 이 두 눈으로 지켜보겠다.”
케플러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라도 위안을 해야 기다림이 덜 지루하겠지. 자, 이제부터 옛용을 불러내볼까.”
그가 메덴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큰 소리가 일어 케플러를 움찔 놀라게 했다.
“추악한 욕심으로 모두를 망치려는 자가 들어올 곳은 아니다. 네 발을 씻고 마음을 고쳐먹기 전에는 이곳에 들어올 생각을 버려라.”
옛용인가?
“누구냐? 썩 나서서 내 앞에 모습을 보여라.”
“케플러, 네 마침이 곧 눈앞까지 들이닥쳤어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여. 네가 가지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옛용인가? 누구든 상관없다. 난 가져야겠으니 날 막고자 한다면 나서서 힘을 써보시지.”
발을 내딛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동안은 거개가 밑바닥을 훑어볼 필요도 없이 척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위인들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케플러의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는 상대들, 그들과의 싸움이, 그 결과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이 한 걸음의 의미는 그래서 더 중요했다.
거대한 압력이 안으로부터 생겨 나 케플러를 뒤로 밀어냈다.
바람에 나뭇가지 휘청이는 모양새로 뒤로 밀려나버리고 만 케플러는 처음부터 황당한 기색을 했다.
너무도 부드러운 바람이었고 그래서 경계하지도 않았다. 어찌 자신이 이만큼이나 뒤로 밀려났는지 이해가 안 갔다. 오기가 날만도 했다.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을 수하들의 낯짝이 가관일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싸울 것이면 날 거부하지 마라.”
이번엔 다르다. 전신을 묵직하게 만들어 힘을 실었다. 거기다 신경을 곧추세워 주변의 동정에 집중했다.
발을 들어 딛는 그 단순한 동작이 왜 이다지도 힘이 드는가. 천만의 병력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케플러의 발바닥에 연신 공기가 응축돼 터지는 소리가 났다.
위쪽으로 솟구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쥐어뜯을 듯 헝클었다.
또다시 밀려나고 만 케플러.
발바닥을 앞쪽에다 대보지도 못하고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이익.”
마령을 폭주시켰다. 그를 둘러싼 공간이 마구 요동치는 게 느껴졌으며 곧장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마령이 출몰해 흉측한 모습을 과시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케플러는 그가 지를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아아아아.”
그리고 양손을 펼처 앞을 향해 마구 휘저었다. 마령이 실린 투명검이 형체 분간 없이 앞을 향해 쏘아졌다. 공간을 가르고 휙휙 소리를 내며 잘도 쏘아져 갔다.
투명검은 저항 없이 안으로 돌진해 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제 발자국 하나 앞으로 못 찍어 이리 헤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렇게 된 마당엔 특정한 목표물이 아닌 메덴전체를 쓸어버릴 작정으로 힘을 쏟아낼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진입을 방해하는 힘이 한결 약화되거나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친놈이 실성한 듯 고함을 지르며 힘을 뿜어내고 있던 케플러가 이젠 됐겠지 싶어 공격을 중단했다. 긴장한 빛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살짝 전진시켰다.
“됐다, 그럼 그렇지.”
별 저항 없이 다리가 뻗어지자 얼굴에 희색이 감돈다. 그런데 웬걸!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긴장을 풀었고 그러자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반탄력이 일어나 전신을 날려버렸다.
“헉.”
뒤로 휘리릭 날아가던 그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건 깜빡이던 눈이 절반도 채 내려오지 않은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멋쩍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젠 아판사판이다. 공중으로 휫 솟구쳐 메덴 주변을 돌아가며 적당한 곳을 골라 몸으로 부딪쳤다.
콰쾅
충돌의 소음은 점점 커져 가고 그럴수록 우스워진다. 점차 발악의 강도가 커질수록 지켜보는 수하들의 기색에 실망의 기색이 뚜렷해졌다.
두려움을 주었던 마령의 본주 케플러가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옛용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현장은 그렇게 아무런 진전도 없이 그 상태를 되풀이하고만 있었다.
죽었다 다시 산다면 그 반가움이 얼마나 클까.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이 되살아나 정겨운 얼굴을 보인다면 그 기쁨은 오죽할까. 비밀차원의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같았다.
높고 낮음의 구분 없이, 계급의 차이 없이 그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며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거리끼지 않는다. 그들 중에 파천이 있었다.
부활을 경험한 이들의 입에서 나온 생경한 내용들은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에게조차 더할 수 없는 신비함을 주었다. 그들이 잠시 동안 보고 경험했던 세계의 실체가 여러 모양의 각기 다른 느낌으로 전달됐다.
기이한 것은 그들 중 하나도 똑같은 말을 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중에도 대체적으로 공통적인 건 있었다.
“내가 분명 살아 있는 건 알겠는데 몸도 예전과 다르고 보이는 것들도 전에 없이…… 뭐랄까 마치 영롱한 빛을 가진, 전체가 구별돼 있지 않는 거대한 채색 같았습니다. 어찌나 그 모양이 아름답고 황홀하던지 그만 넋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서로가 관계하는 모양이, 오고가는 것이 또한 신묘하기 그지없어 이것이 생시인지 환상인지 알 수가 없더군요.
곁에 함께 하고 있던 존재들이 지닌 의지도 전혀 막힘없이 내게로 전달됐을 뿐만 아니라 내 생각도 그들에게 가감 없이 전해져 아주 흡족했습니다.
분명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의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두는 하나같은 동질감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저 멀리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는 밝은 빛의 결정체들이었지요.
모든 존재들에게 차별 없이 공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게로 오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충족감에 기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의 경험은 앞으로도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계급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기에 평소에 엄한 태도로 일관했던 우라노스들마저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그들이 아직도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는 듯 몽롱한 시선을 하고 있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이 설명하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르는지 상상으로조차 그 느낌은 잡혀지지 않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나 메타트론 등은 그저 멀거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파천은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오스의 출현이 이들 비밀차원의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의 경험이 이들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겪었던 일에 주목하는 이들이 이처럼 많으니 앞으로 비밀차원은 근심거리가 되지 않겠다.’
소란스럽던 주변이 진정되자 아퀴나스는 우라노스들을 시켜 사람들을 이끌게 했다. 그들이 멀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퀴나스가 물었다.
“이제 우리들 일을 처리해야지.”
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타트론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끝을 낼 심산인가! 나로선 그다지 거부하고 싶지 않은 제안이야.’
속으로 오기를 부리던 메타트론을 파천이 불렀다.
“메타트론.”
“싸우자면 싸워야지.”
메타트론은 파천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제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라 미리 짐작하곤 그렇게 말했다. 파천은 어이없어했다.
“여전히 네 머릿속엔 싸울 일만 가득하구나.”
“소득 없는 싸움은 나도 사양이다. 하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다.”
“누가? 누가 네게 싸움을 걸어온다는 거지?”
“그럼 이들이 그냥 넘어가자고 할 것 같은가?”
아퀴나스가 메타트론의 말을 무시한 채 파천을 응시했다.
“네 생각을 먼저 말해봐라.”
“내 생각은 처음과 동일하다. 내 의사는 너희들 결정에 달렸다. 너희가 영계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나 또한 너희들을 경계하지 않는다. 허나…… 끝까지 고집을 부려 너희들 의지 하에 두려한다면 그냥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아퀴나스는 확인하고 싶었다.
“묵과하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영원히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격리해버리는 방법도 있을 거고, 그도 아니면 헤르바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너희들을 소멸시켜 힘을 약화시키는 방법도 가능하겠지.”
“그럴 자신 있나?”
“해봐야 알겠지.”
아퀴나스는 알고 있었다. 파천은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시켜두고 있었고 필요할 경우 언제든 그 경계는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확고부동한 확신이었다.
사실 모두는 더 이상 싸워서 얻을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있었다. 문제는 거른 결론으로 끌어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선결되어야 할 약속이 필요했다. 메타트론이 불만을 표한다.
“나는 잃은 게 많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한다면 난 이들에게 몇 가지쯤은 요구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로서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사실 이 중에 손해를 논하자면 그만 해당사항이 있었다. 그러니 볼멘소리를 하는 것쯤은 수용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도 거론하는 이가 없으니 그것을 반쯤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꽤 쓸모 있는 수하들을 잃었으니 그 역할을 대신해줄 전력을 너희 쪽에서 충당시켜줬으면 좋겠어. 우라노스들 절반을 내가 데려가겠다. 그리고……”
어느 정도 받아들일 만한 요구를 해야 들어주지 이건 해도 너무했다. 곧장 말을 잘라오는 바르트.
“차라리 싸우자고 해라.”
메타트론은 피식 웃었다.
“못 들어주겠다?”
파천도 거들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답은 나올 거야. 거절할 걸 알면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라. 네 진심을 말해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그걸 얻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돌릴 이유가 없다.”
그랬다. 메타트론은 사실 확실하게 해둘게 딱 두 가지뿐이었다. 대마신들과 어둠의 천사들을 잃긴 했지만 그에겐 그리 신경쓰이지도 않는 손실이었다. 언제는 그가 수하들의 힘으로 계획을 이룬 적이 있었던가! 그는 혼자서라도 얻고자 하는 걸 모조리 얻어낼 자신이 있었다. 메타트론은 요구 사항을 당당하게 밝혔다.
“파천의 말처럼 너희들의 영계 개입은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조짐이라도 보인다면, 나는 이곳을 다시 방문할 것이고 그땐 망설이지 않고 차원을 붕괴시켜버리겠다. 너희들을 제외한 자들은 하나도 무사하지 못하겠지.”
“나머지 하나는?”
“파천, 네가 들어줘야 할 부분이다. 너 또한 내가 하는 일에 개입하지 마라. 방해하면 영계도 그 꼴이 난다.”
파천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무엇을 도모하느냐에 달렸지. 내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내가 나서서 네 앞을 막을 이유가 없다.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되겠군. 자, 우리측 입장은 말했다. 너희들 뜻을 들어보자.”
파천은 재빨리 메타트론과의 대화를 종결시켜버렸다. 둘 사이에 해결해야 할 부분은 여기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메타트론도 찜찜하긴 했지만 더 이상 거론치 않는다.
아퀴나스가 동류들을 돌아보았다.
“난…… 키케로와 메타트론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선선히 수용하는 아퀴나스. 헤르바르트가 물었다.
“코모라는 어쩌고? 그리고 카오스는? 그와의 채무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꼭 우리 손으로 하란 법이 없다. 그들이 영계로 갔으니 이젠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확고한 아퀴나스의 태도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 손으로 처리하지 못해도 확인은 해야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불안은 여전하겠지.
솔직히 키케로가 다른 마음을 먹고 카오스를 다시 우리 세계로 몰아넣기라도 하면 그땐 어쩔 테냐. 이점만은 확실하게 해둬야 한다.“
결국엔 자신들이 영계로 들어가겠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무엇 하나 결정된 게 없는 셈이 되었다. 개입하지 말라던 메타트론의 주장도 먹혀들지 않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카오스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왜 개입이 되냐고 하겠지만 엄연히 반대쪽의 견해는 영역에 관한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급반전을 일으키자 파천도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닌 게 카오스를 걸고 넘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천이 비밀차원을 찾아온 것과 의미적으로는 동일했다.
더군다나 비밀차원의 지도자들만 들어와서 카오스만 추적하겠다는 것까지 거절해서는 서로간의 입장 차만 더 벌여놓을 뿐이다.
파천은 허락하고 싶었다. 하지만 메타트론은 강경하게 반대를 표했다. 결국 두 의견 사이의 조율은 파천과 아퀴나스가 떠맡게 되었다.
시간적 여유가 그리 넉넉한 건 아니다. 일을 매듭짓는 대로 선발대 뒤를 따라야 한다. 설사 마령의 본주가 난리를 치고 있다손쳐도 수호자가 갔으니 안심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카오스도 갔다. 메타트론의 태도는 아직 명확한 건 아니다. 그와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정리해야 하겠지만 그리 쉽게 결말이 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카오스가 먼저였다. 하지만 파천은 카오스를 비밀차원에 가둬둘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영계로 내보냈다. 파천의 의지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카오스는 없어서는 안 될 주요한 배경이 된 것이다.
위협적이기로는 메타트론 못지않은, 어떤 면에서는 더 까다로운 숙적 카오스를 품안에 끌어들이면서까지 계획하는 일이었다. 파천은 카오스를 염두에 두면서부터 단번에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비밀차원의 붕괴를 방관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과 일맥상통했다.
아퀴나스를 따로 불러들인 파천이 뜸을 들이며 한 말은 중심을 비껴나 있는 가벼운 것들이었다. 아퀴나스는 키케로가 하기 힘든 얘기를 꺼내려 한다는 걸 알았다.
“무슨 얘기라도 해봐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넌 약속을 지켰고 이젠…… 내가 널 도울 차례다. 어떤 부탁이든 해봐라.”
아퀴나스는 닫아두었던 마음을 열어놓고 있었다.
“네 말처럼 우리가 부딪쳤다면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겠지. 모든 것이 내 앞에서 사라졌을 대, 바로 그때야 알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난 네 가르침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신을 우리는 왜 그렇게 미워했던가. 우리는 왜 그러게 투정을 부렸어야만 했나. 부정은 더 큰 긍정이었고, 대적함은 그를 인정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고.
그는 널 통해서, 그리고 내 안에서 자신을 보였을 뿐 한 번도 직접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위엄으로 다스리지도 않았으며 강압적으로 굴복시키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자극을 보내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서 거부되고 제외되곤 했지.
신은 내게 기억되길 바라기보다는 내게서 영광을 받는 것보다도 잊혀지길 바란 것인지도. 그를 굳이 내 안에서 꺼내놓지 않아도 되길 바라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것이 신의 방법이었다.”
파천의 기억에도 아퀴나스가 신에 대해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한 번에 많이 하는 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신에게 향해 있던 관심을 스스로에게 돌렸고 함께 하는 자들에게로 돌렸다. 그것이 오히려 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다시는 신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다. 신은 처음부터 완전함을 모든 존재에게 허락했고 그것은 서로를 향한 관심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나 아닌 남을 용납한다는 것은 바르게 이해함을 전제한다. 그 이해는 스스로를 바로 보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신의 계획은, 섭리는, 암시는 사람 안에, 우주 안에,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 속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사람은 신에게서 버림받은 것도 아니고 타락에서 구원받기 위해 뭔가 특별한 일을 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신은 사람 안에 있었고, 만물 가운데 있었다. 아퀴나스가 여기까지 말하자 파천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퀴나스가 제대로 길을 잡아 가기 시작했구나.’
“그래. 네 말이 모두 맞다. 신은 발견되지 않지만 그 어디에도 있는 존재지. 신은 최초의 동인이자 파동의 총합이다. 처음 노래를 짓고 만든 자에게서 노래는 여러 곳으로 퍼져간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것을 지은 자를 기억하고 노랫말의 의미를 떠올리고 때론 영감을 얻으며 즐거워한다.
후에 그 노래를 누가 지었는지 잊혀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노래는 조금씩 달라지면서도 끊임없이 전해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진다. 그 노래를 지은 자는 작자인 자신을 기억해주기보단 그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위안을 얻기를 원했다. 자신의 이름이 잊혀졌다고 해서 노하거나 성내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작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노래를 짓는 자의마음은 그 노래와 같다.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노래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그 노래는 하나 빠짐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작자의 모든 것을 너무도 충분하게 담고 있다. 그 노래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노래를 짓고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은 그 노래 안에 자신을 숨겨둔 것이지. 그가 노래가 된것이다.”
아퀴나스는 파천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감했다. 그가 키케로를 기억하며 키케로가 되어 갔듯이 그리고 끝내는 혼란스럽던 자신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계기는 갑자기 찾아와 흔들고 그를 새롭게 변모시키는 것이다. 암시가 주는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파천은 아퀴나스에게 중요한 제안을 했다.
“넌 여길 지켜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널 위해서 비밀차원을 떠나지 마라. 약속하겠다. 카오스는 다시 너희들에게로 돌아오지 않게 하겠다. 내 모든 걸 던져서라도 그를 저지하겠다. 그러니 넌 여기 남아라.”
“나만 남으라는 뜻인가? 다른 이들은 데려 가겠다는 말이냐?”
“그래.”
“너, 설마……”
“그들은…… 카오스를 말하지만 아직 집착을 끊어내지 못했다. 때로 기회는 거둬지기도 한다. 난 신이 아니고 완전자도 아니다. 그렇기에 언제까지나 참고 기다릴 수 없다.”
“혹시 완전자가 되는 걸 포기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맞다. 모든 것이 원만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기엔 다른 사람들이 견뎌야 할 고통이 너무 크다. 더 이상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제 위치를 찾아줘야 한다. 그들이 버린 길을 찾아줄 생각이다.”
아퀴나스는 파천이 큰 결심을 했다는 걸 알았다.
‘키케로 넌 언제나 내게 짐을 지우는구나. 널 다시 보지 못한다 해도 널 기억하겠다. 네가 내게 남겨두고 간…… 노래를 영원토록 기억하겠다.’
결정은 내려졌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파천과 동행하기로 했다.
메타트론은 그런 결정이 불만이었던지 루시퍼와 아사셀을 데리고 먼저 영계로 떠나버렸다.
파천은 영계로 들어서기 전에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에게 경고를 잊지 않는다.
“너희들의 입으로 먼저 한 약속이다. 잊지마라. 너희 관심은 코모라와 카오스에게만 두어라. 그렇지 않고 다른 곳에 집착을 보이다면 약속 위반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먼저 받아낼 것이다.”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태도가 긍정인지 부정의 의미인지는 그들만이 알 일이었다.